운명, 천기누설?
점(占)과 사주(四柱)에 관심이 큰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한국역술인협회> 추산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10명 가운데 4명이 점(占)이나 사주를 본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운명학은 현대인의 일상이 됐다. 철학관 운영자, 무속인 등 전국의 역술인은 45만 명에 이르고 관련 시장 규모도 2조원대에 달한다. 불자들 가운데서도 종종 자신과 가족들의 안위를 점집이나 철학관에서 살펴보는 경우가 비일비재함은 부정하지 못한다.
더 나아가 불법을 닦고 수호하는 스님들조차도 몇몇 분은 중생교화의 방편(!)이라는 빌미로 점이나 사주를 봐주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런 스님을 과연 스님이라 인정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러한 현실은, 점과 사주가 꽤 설득력이 있다는 반증이겠다. 그럼에도 점과 사주가 도대체 무엇인지 그 정체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크게 많지 않다.
30대 중반 무렵, 나는 우연한 기회로 동양의술의 한 갈래인 침술(鍼術)에 관심이 가게 되었다. 중국에 유학을 가볼까 할 정도였으니까 관심의 수준을 넘어섰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여건상 마음뿐이었고, 마침 집 주위에 <수지침 학원>이 있어서 등록을 했다. 수지침도 침이니깐, 뭔가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거진 2년에 걸쳐 모든 과정을 마쳤고, 적십자에서 운영하는 봉사단에 가입해서 경로당이나 동사무소 같은 곳에서 봉사활동도 짬나는 대로 꾸준히 펼쳤다. 단순히 손에 놓는 침이었지만, 그 효과는 매우 놀라웠다. 물론 그 한계도 또한 분명해 보였다. 어쨌든 건강보조수단으로 수지침도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학습과정에서 침술의 가장 기본적인 교과서가 <주역(周易)>임도 알게 되었다. 젊은날의 대부분을 서양철학에 투자했던 나의 삶에 큰 획이 그어지는 순간이었다. 동양사상이라면 고등학교 시절에 읽었던 <논어> <맹자> 가 전부였던 나로서는, <주역>이 펼치는 세계란 황홀 그 자체였다(물론 이때만 해도 불교와는 전혀 인연이 닿지 않았음을 밝혀두어야 하겠다). 태극(太極)과 음(陰)과 양(陽), 사상(四象)과 팔괘(八卦)가 서로 부딪치고 품고 이끌고 멀리하고 한바탕 펼쳐내는 무대에, 보편적 합리와 절대적 이성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무장된 나의 철학은 서서히 무너져갔다.
동양의술은 음양오행(陰陽五行)에 그 논리적 근거를 둔다. 침술에서 머물던 나의 관심은 오행(五行)을 현실에 구체적으로 적용한, 흔히 사주학, 운명학으로 불리는 명리학(命理學)으로 이어졌다. 나는 왜 이런 삶을 꾸리는지, 그 해답이 궁금했던 것이다. 그 열쇠를 쥘 수 있다면, 명리학 아닌 어떤 학문이라 해도 기꺼이 다가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명리학의 발생과 전개,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그게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니깐(물론 이 글을 읽는 분들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또한 운명을 다루는 학문, 비학문적 분야 - 점성술, 손금, 관상, 신점(神占) 등등 - 는 무척 다양하지만, 나로서는 직접 공부한 주역과 명리학만을 대상으로 하겠다.
‘사주팔자(四柱八字)’는 명리학 또는 사주학의 기본구조를 가리키는 전문용어이다. 태어난 연월일시를 네 기둥이라 하고, 윗기둥을 천간(天干), 아랫기둥을 지지(地支)라 하며, 한 기둥에 두 글자씩 모두 여덟 글자이므로 팔자라 하는 것이다. 천간은 하늘의 기운인 10간[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땅의 기운인 12지[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를 말한다.
일례로, 음력으로 1985년 3월 27일 낮 5시에 태어난 사람의 사주를 확인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시 일 월 년
갑(甲) 을(乙) 경(庚) 을(乙)
신(申) 유(酉) 진(辰) 축(丑)
이 간단한 ‘사주팔자’에 한 인간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것이다. 과연 놀랍지 않은가? 그리고 이러한 기본적 구도에, 대운(大運) 세운(世運)으로 나뉘는 운의 갈마듦을 합쳐서, 한 개인의 총체적 삶의 그림이 펼쳐지는 것이다. 올해 관재(官災)가 있네, 이별수가 있네, 횡재를 하겠네, 다리가 부러지겠네 등등의 역학자들의 예언은 사실 음양과 오행의 이치를 알면 크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동양의학적 지식까지 접목하면, 사상체질 또한 사주만으로도 분명하게 파악되고, 질환의 성격이나 이행도 어느 정도는 예측이 가능하다.
또한 <주역>의 풀이에 의지한 역점(易占)의 결과 또한 놀랍도록 정교하다. 하지만, 역점의 한계는 그 바탕은 학문적이지만 점괘를 낳기 위한 과정은 지극히 비학문적이라는 사실에 있다. 예로써, 점괘의 풀이는 성인의 가르침인 <주역>에 의지하지만, 점괘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우연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알 수 없는 다른 힘이 개입했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런 까닭인지는 몰라도, 전문 역학자가 아닌 일반인이 호기심으로 역점을 치다 보면 빙의(憑依 ; 귀신 들림)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역점은 사주처럼 매우 다양한 면에서의 인간 탐구가 이뤄지지는 않는다. 죽음에 버금 갈 정도의 화급하고 중대한 문제의 처리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일상적이고 소소한 문제에는 사실 점을 칠 이유도 없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곰곰 더듬어나가다 보면 상식적인 수준에서 해결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주역>의 학문적 이치에 관심을 갖기를 권하고 싶지, 점을 치러 가라는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
모두가 성인으로 받드는 공자가 말년에 <주역>에 심취해서 책을 묶는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였다는 데서 유래한 ‘위편삼절(韋編三絶)’이라는 고사에서 알 수 있듯, <주역>은 이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철학사상서라 할 수 있다. 재미삼아 하나 말씀드리자면, 도서(圖書), 천문(天文)과 지리(地理)란 말이 <주역>에서 비롯하였는데, 직접 찾아보는 것은 어떨지?
명리학의 학문적 한계
어지간한 일간지나 잡지,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는 ‘운세(運勢)란’이 어김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과연 운이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운은 ‘우연’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지극히 통속적인 이해인데, 정확히 이해를 돕자면, 운세란 곧 천지를 운행(運行)하는 이치, 음양오행의 ‘필연적’ 법칙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명리학은 100% 필연의 법칙에서 살짝 벗어나 ‘일개인의 삶에서 펼쳐지는 개연성(蓋然性)의 학문’이다.
개연성의 사전적 의미는 ‘절대적으로 확실하지 않으나 아마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성질’로 ‘확률’이라고 이해해도 좋겠다. 말하자면, ‘일기예보’와 다를 바가 없다. 필연과 개연성의 빈틈에 개인의 자유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있는 셈이다. 100% 필연이라면 굳이 점을 볼 필요도 없고 운세를 확인할 이유도 없다. 알든 모르든 내 삶은 정해진 길을 따라 진행될 것인데, 오히려 ‘긁어 부스럼’ 격으로 괜한 고민에 휩싸일 까닭이 없다. 또한 액땜의 여지가 없다. 몇 푼의 굿이나 부적, 개명(改名) 등으로 운명이 바뀐다면 과연 운명이겠는가? 물론, 100% 필연이 아니기에 숱한 역학자들이 생계를 이을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명리학의 한계는 여기에 있지 않고, 이러한 팔자를 갖고 태어나게 된 근본적 원인에 대해서는 전혀 밝히지 못한다는 데 있다. 왜 내 삶의 밑그림이 이렇게 그려진 것인지, 보다 근원적인 곳에 우리의 관심이 기울여져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물론 대개의 소박한 사람들의 관심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통속적이라서, 재물과 애정 등 눈앞의 문제에만 매달리는 것이 십상이다. 그런 까닭에, 명리학의 한계에 대해서 무척 너그러운 태도를 취한다. 물론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명리학에서는 두 시간을 같은 시간대로 여긴다. 같은 날 오전 3-5시 사이에 태어나는 사람은 모두 같은 사주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쌍둥이가 극적인 예다. 하지만 이들의 운명이 같을 수 있겠는가? 여기에 대한 변명으로, 부모나 집안의 분위기 등 환경요인을 내세우지만 설득력은 약하다. 방송사에서 같은 시간대에 출생한 이들을 모아서 현재 모습을 비교해 본다면, 이 땅의 철학관들은 모두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서는 입춘(立春)을 한 해의 시작으로 보지만, 대만에서는 동지(冬至)를 한 해의 시작으로 여긴다. 우리나라에서도 대만 역학계의 입장을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점차 확산되고 있다. 이는 엄청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동지 이후에 출생한 사람은, 출생년도인 띠가 바뀌는 것이다. 그렇다면 입춘을 기준으로 확인한 사주는 ‘말짱 도루묵’이 되는 것이다.
천기누설
‘천기누설’이라는 지극히 탈속적이고 신비적이고 종교적인 위압감마저 들게 하는 신성불가침의 속삭임은 이제 거리에서 흔하게 눈에 담을 수 있는 풍경이 되었다. 선량한 대중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져 정말 다급해서든, 무료한 일상에 심심풀이 재미삼아서든, 철학관에 기웃거린다. 그리고 역학자들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이 내뱉는 전문적인 용어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수용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주위에서 ‘용하다’는 얘기를 들으면, 철학관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철학관에 들르는 ‘소비자’는 ‘생산자’인 역학자의 학문적 깊이를 전혀 알 수 없다. 속된 말로, 똥인지 된장인지 가려낼 수가 없는 것이다. 명리학만 해도 숱한 학문적 갈래가 있다. 한 사주를 놓고도 제각기 이해의 정도가 다를 수 있다는 얘기다. 한 운명의 펼쳐짐이 천상과 지옥의 극과 극을 오가기도 한다. 물론 자신의 과거를 어느 정도 정확하게 들춰내느냐에 따라 소비자는 생산자에 대한 신뢰도를 가늠할 수는 있다. 하지만, 상술과 화법에 능한 역학자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다. 손님의 분위기나 사주에 드러난 품성과 기질을 참고해서 발언의 수위를 조절하는 것 또한 역학자들이 활용하는 테크닉의 하나이다.
다른 문제는, 역학자의 도덕적 자질에 있다. 이는 곧 예측 결과에 대한 무책임성을 가리킨다. 예측이 맞으면 단골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이고, 불행히도 빗나간다면 그뿐인 것이다. 부적이나 개명 등의 액땜을 적극적으로 권하는 역학자들일수록 학문적 깊이나 도덕적 품성 등의 덕목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해도 무리는 아니다.
운명은 비켜갈 수 없다. 강도를 완화시키는 정도일 따름이지. 이는 곧, 운명을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자세를 겸허히 하라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어차피 맞아야 할 매라면 달갑지는 않아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충격은 완화된다. 운명학의 장점이라면 바로 여기에 있다. 심리적, 육체적 긴장의 이완이랄까, 위안이랄까.
5-6년에 걸친 학문적 탐색에 머물지 않고, 나는 임상에 대한 갈증을 해소키 위해서 직접 ‘철학연구원’이라는 간판을 달고 2년 가량 서울 근교 소도시에 머문 적이 있었다. 명분으로야 이제껏 닦은 학문적 깊이와 정당성에 대한 확인이지만, 실상 사람들의 속내를 들춰보고 싶다는 속된 호기심에서였으리라. 처음에는 그들의 환희에 찬 표정에서 희열도 느꼈다. 나름대로 단골도 생기고, ‘도사님’에게 밥 사준다 술 사준다는 열성팬도 생겼다.
그런 대로 보람도 있고 재미도 느꼈지만, 이내 식상해졌다. 운세를 보러 오는 사람들의 목적은 정확히 두 가지였다. 돈[財]과 애정[色]. 삶이란 참으로 소박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심지어, 애인이나 연적(戀敵)의 사주를 들고 와서, 배우자나 친인척의 것이라며 태연히 내놓는 파렴치한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어쨌든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기에 나는 미련없이 철학관 문을 닫고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개똥도 약에 쓸 수 있듯, 무엇이든 활용하기 나름이다. 하지만, 운세를 봐야 한다는 이유를 대라면 쥐어짜듯 몇 가지에 지나지 않지만, 운세를 보지 말아야 할 이유를 꼽자면 적지 않다. 전문적이고 논리적인 분석은 역학자들과의 토론에서나 필요할 터이고, 여기서는 소비자들의 감성적이고 심리적인 측면에서 그 허실을 몇 챙겨보겠다.
철학관에 기필코 가야만 한다면 가라, 왜?
1. 사주에 드러난 자녀의 성품과 취향, 지적 감성적 깊이, 육체적 기질과 취약성 등에 대한 이해를 구하기에 명리학은 나름대로 역할을 한다. 자녀 지도에 큰 기여를 한다.
2. 주위 누구에게도 밝히기 어려운 속내를 털어놓고 심리적 위안을 얻기 좋은 곳이다. 정신적 안정은 육체에도 큰 도움이 된다.
3. 불확실한 앞날의 전개에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해준다.
어지간하면 철학관에 가지 말라, 왜?
1.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격언에 유의하자. 역학자의 학문적 깊이, 도덕적 자질에 대해서 판단이 설 수 없는 입장에서는, 역학자가 꺼내는 얘기를 100% 신뢰했다가 큰코를 다칠 수도 있다. 예로써, 내게 이름을 바꿔달라고 온 몇몇 사람은 출생 당시 유명한 역학자에게 부모가 큰 돈을 치르고 작명했다는데, 전혀 아닌 경우가 많았다. 이름은 옷에 지나지 않으니, 크게 신경 안 써도 될 터이다.
2. 앞날이 순탄하다면 기분이 좋겠지만, 여의치 않다면 심리적 저항으로 인해 일상이 무너진다. 다가올 일에 대해 고민하지 말라. 늘 최선을 다해 살면 그뿐 아닌가.
3. 운세에 집착하다 보면 짬만 나면 철학관을 순례하는 골수 매니아로 전락할 소지가 크다. 재미삼아 돌아다닐 곳은 따로 있다. 차라리 그 시간에 러닝머신에서 죽어라 땀을 흘리는 게 생산적이다.
4. 궁합의 폐해가 크다. 본인과 가족 이외의 사주는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다. 상대에 대한 편견과 오해만을 불러일으킨다. 만남은 인연이다. 궁합이 안 좋다며 헤어지는 것 또한 인연에 지나지 않는다. 만날 사람은 만나고 헤어질 사람은 헤어지기 마련. 궁합에 만남을 의지하는 태도는 지극히 비과학적이고 비도덕적이다.
5. 살(煞)이 어떻고, 삼재(三災)가 어떻고, 띠 궁합이 어떻고 하는 소리는 역학자의 입에서 나올 소리가 아니다. 살의 종류만 해도 수백 가지이며 대부분이 신뢰할 만한 이론적 바탕이 없다. 삼재나 띠궁합 또한 마찬가지. 삼재의 경우, 12가지 띠 가운데 3가지 띠 곧 모든 사람 가운데 4분의 1이 해당되는데 가당치도 않다. 띠궁합 또한 다를 바가 없다. 이밖에 소박하고선량한 사람들을 꽤나 을러대는‘씨알도 안 먹히는’ 난삽한 전문용어들이 난무한다. 자칫 솔깃해졌다가는 금전적, 정신적 손실이 막심할 수 있다.
‘동양철학’ 하면 점을 치고 사주를 풀이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적잖은 현실이다. 그러한 오해를 불식시키는 데 이 글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역점과 침술의 교과서인 <주역>은 그 학문적 위치와 정당성이 엄정하게 검증된 지 오래이지만, 명리학은 지극히 통속적인 차원에 머물 따름이다.
‘운명학’이 자신을 성찰하고, 인간과 자연, 그를 둘러싼 삶에 대한 한층 깊은 이해에로 나아가지 못하고, 기껏해야 돈과 명예, 애정 등의 전개에 관심을 갖는 수준에 머물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주역>은 노장자(老壯子)의 도가철학, 동양철학의 정점인 성리학으로 이어지므로, 적어도 한 번은 그 세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나의 경우, 수년 전에 노자의 <도덕경>을 선불교의 관점에서 해설한 <노자와 똥막대기>라는 책을 낸 적이 있는데, <주역>에 대한 이해가 앞서지 않았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소득이었다.
불법과의 인연이 닿은 지금 돌아보면, 젊은 날 명리학에 쏟았던 시간과 공이 아쉬울 따름이다. 부처님은 절대로 점을 치거나 보러 다니지 말라 당부하셨는데, 당시에도 그 폐해는 심각했던 모양이다. 하긴, 생명을 복제하고 우주에 식민지를 건설한다는 요즘에도 천기누설의 풍조는 식을 줄 모르지 않는가. 내게 주어진 현생의 프로그램, 게놈(genom)이 곧 사주인데, 이는 전생의 업보에 다름 아니다. 미련하지 않게, 슬기롭게, 지혜롭게 살아야겠다.
蕭湛 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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