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산중 최고의 집, 너와집
울릉도 나리분지에 남은 투막집 형태의 너와집.
너와집은 과거 화전민 마을이나 산중마을의 대표적인 가옥으로, 기와집을 제외한 옛집 가운데 최고의 집으로 손꼽았다. 그러나 현재 우리 땅에 남아 있는 너와집은 문화재로 지정된 삼척 대이리와 신리, 울릉도 나리분지에 모두 4채, 오대산의 암자 2채 등 6채밖에 남아 있지 않으며, 정선 숙암리 단임마을에 남아 있던 너와집 한 채는 관리의 어려움으로 현재 천막을 씌워 놓았다. 이밖에 돌너와를 얹은 돌너와집은 평창 이곡리와 정선 유평리 등 전국적으로 약 10여 채가 되지 않는다. 이대로 가면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너와집과 돌너와집은 모두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 것이다.
너와 100년, 이왕이면 너와
문화재로 지정된 대표적인 너와집, 대이리 너와집.
흙으로 빚은 것이 기와라면 나무를 쪼개어 만든 지붕재료가 너와다. 옛날 논이 흔하지 않은 산간마을이나 화전민촌에서는 볏짚을 구할 수 없었으므로 나무를 쪼개어 만든 널을 지붕에 얹는 너와집이 흔했다. 강원도에서는 너와집을 너새집, 능에집, 느에집이라고도 부른다. 너와 100년, 굴피 20년이라는 말이 있다. 기와지붕은 10여 년만 손을 보지 않아도 지붕에 잡풀이 돋고 이끼가 끼어 쇠락하지만, 너와는 몇십 년이 지나도 풀이 자라거나 이끼가 끼지 않는다. 때문에 산간에 살던 화전민이나 일반 촌부들은 집 가운데 너와집을 최고로 쳤다. ‘이왕이면 너와’라는 말도 있었거니와 구전되는 노래에는 ‘집이사 많다마는 너와집이 일품이라’고까지 하였다.
빈집으로 남은 신리 너와집.
너와집 주인은 해마다 몇 짐찍 나무를 준비해 두었다가 썩거나 비가 새는 부분은 그때그때 바꾸어 주었다. 너와는 송진이 많은 암소나무를 주로 골라썼는데, 소나무 중에서도 송진이 많아 벌건색을 띠는 것이 더 오래 간다고 한다. 알려져 있듯 너와는 질이 좋은 소나무나 전나무를 길이 60~70센티미터, 너비 30~40센티미터, 두께 5센티미터 안팎 정도로 쪼개 지붕에 차곡차곡 얹는다. 혹여 나무이기 때문에 쉬 뒤틀리고 사이가 떠서 빗물이 스며들 것 같지만, 나무는 젖으면 오히려 차분히 퍼지고 가라앉기 때문에 생각만큼 물이 새지는 않는다.
너와집으로 된 신리의 물레방앗간.
애당초 너와조각을 톱으로 자르지 않고 도끼로 쪼개는 까닭도 물이 스미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만일 톱으로 자를 경우 나무는 섬유질이 파괴돼 쉽게 빗물이 스며들게 된다. 너와를 얹을 때는 서까래 위에 중간중간 너스레(지붕에 이리저리 걸쳐놓는 막대기)를 질러놓고, 그 위에 나무를 쪼개어 만든 널을 비가 새지 않을 만큼 포개어 얹는다. 그런 다음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군데군데 무거운 지지름돌(눌림돌)을 얹어놓는다. 눌림돌을 놓지 않을 경우 너와는 쉽게 바람에 날아갈 것 같지만, 너와 한 장 한 장은 드러난 면보다 2~3배의 길이가 뒷목에 끼어 있어 쉽사리 빠지거나 날려갈 염려는 없다. 다만 보다 확실하게 너와를 고정하고, 나무의 뒤틀림을 줄이기 위해 눌림돌을 얹는 것이다.
너와집, 씨가 마르다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너와집으로 손꼽히는 오대산 서대 수정암 풍경.
본래 너와라는 것이 나무조각을 꿰맞춰 놓은 것이라서 조각마다 아귀가 딱딱 맞지 않아 간혹 처마 밑이나 부엌에서 올려다보면 나무 틈새로 하늘이 보이기도 했는데, 틈새 많은 집치고는 그다지 춥지 않은 게 특징이었다. 겨울에는 대개 눈이 와 지붕에 쌓이므로 쌓인 눈이 오히려 보온막 노릇을 하여 찬바람을 막아주었던 것이다. 반면 여름에는 지붕의 틈새가 통풍을 도와 집안을 시원하게 만들어 주었다. 처음부터 나지막하게 지은 너와집의 구조도 추위와 습기에 잘 견딜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오대산 수정암 너와집에 걸린 목탁과 너와지붕 너머로 보이는 하늘.
너와집은 주로 산간 지역에서 지어졌는데, 이는 귀하고 비싼 기와 대신 산간에서는 나무가 흔하고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였기 때문이다. 물론 재료를 구하기 쉽다고 해서 너와집이 쉽게 지을 수 있는 집은 결코 아니었다. 나무를 잘라 일일이 도끼로 쪼개는 일만 해도 그렇거니와 그렇게 쪼갠 너와를 지붕에 얹을 때도 널과 널이 딱딱 맞물리도록 신경을 써야 했다.
삼척 동활리 쓰러져가는 너와 헛간채의 이끼 덮인 지붕.
과거 너와집은 산간에서 최고의 집으로 통했으며, 화전민정리사업과 새마을운동이 있기 전까지는 굴피집과 더불어 대표적인 산중가옥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삼척과 정선을 포함해 전국에 남아 있는 너와집은 이제 몇 채 되지 않는다. 일반 서민들에겐 최고의 집이었지만, 양반문화에 길들여진 역대 정권의 눈엔 이것이 ‘보기 흉한 집’에 다름없었으니, 단지 지붕개량 대상일 뿐이었고, 폐기처분의 대상일 뿐이었다. 1970년대를 기점으로 너와집이 씨가 마른 것도 그 때문이다.
물고기 비늘을 이어놓은 듯 아름다운 돌너와집
정선 신월리에 있는 돌너와집.
돌기와를 지붕에 얹은 집도 있다. 이것을 돌너와집이라고 하는데, 지역에 따라 돌지붕집, 돌기와집, 돌집, 돌능에(애)집, 돌능와집 등으로도 불린다. 돌너와집은 얇게 쪼개지는 성질을 가진 청석과 조석이 많이 나는 고장(강원도 평창, 정선, 충북 보은, 영동, 청원 등)에서 주로 볼 수 있었다. 돌너와집은 가까이에서 보면 손바닥만한 돌판에서부터 구들장만한 것까지 마치 지붕에 고기비늘을 이어놓듯 얇은 돌판을 서로 맞물려 놓은 모습인데, 멀리에서 보면 그 모습이 마치 커다란 물고기 등짝처럼 아름다운 무늬를 연출한다.
물고기 비늘처럼 이어놓은 돌너와집의 지붕.
돌너와를 올리는 방법은 이러했다. 용마루를 진흙으로 이겨 올리고 흙이 마르기 전에 사방 1~2자 짜리 돌기와를 진흙에 박아놓고 그 다음부터 조금씩 작은 돌로 이어서 내려가다 처마끝 부분에 또다시 1~2자 크기의 돌을 이어 물받이가 되도록 했다. 여름 장마 때 심한 비바람 속에서도 물이 쭉쭉 빠져 처마 밑으로 떨어지게 되고 중심부분의 작은 돌들은 상층부와 하층부의 큰돌에 힘입어 움직이지 않는다. 이렇게 돌너와집 지붕에 올리는 돌은 무게로 따지면 대략 4~5톤에 이른다고 하며, 그 크고 작은 돌판의 수도 약 1천여 개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무게에도 돌너와집은 한번 이어 놓으면 20년까지는 손을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한때 농촌에서는 돌너와집이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다.
* 구름을 유목하는 옴팔로스::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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