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광유적

[스크랩] 세계 제일의 정원 - 중국 원명원

구봉88 2009. 3. 12. 12:43

세계최고의 정원, 원명원(圓明園)


콘크리트 아파트와 빌딩에 갇혀 사는 사람은 탁 트인 녹색의 골프장에 나가면 해방감을 느낀다.

 

아파트와 골프장의 관계는 돼지고기와 새우젓의 궁합이다.

 

정치에 시달렸던 청나라의 황제들은 숲과 호수, 화초들이 피어 있는 원림(園林)에 가서 쉬는 것을 좋아했다.

 

건물만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자금성(紫禁城)에 눌러앉아 있으면 피곤했던 것이다.

청나라의 황제들은 엄청난 돈과 인력을 동원하여 거대한 원림을 만드는 데에 치중했다.

 

원명원(圓明園)·피서산장(避暑山莊)·이화원이 그 원림이다.

 

피서산장은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 나오는 곳이다.

 

북경에서 너무 멀었다.

 

원명원과 이화원은 북경 교외에 있어서 수시로 황제가 들락거릴 수 있는 위치였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드넓은 초원에서 말을 타고 수렵과 유목을 하던 민족이었다.

 

황제가 되었어도 답답한 왕궁에만 갇혀 살 수 없었던 것이다.

원명원 (圓明園 중국 청 [淸] 정원) 중국 청대(淸代) 황실의 정원.

베이징[北京] 서쪽 교외의 이허위안[頤和園]동쪽에 있다. 본래는 1709년 강희제(康熙帝)가 넷째 아들 윤진(胤禛)에게 지어준 별장이었으나 윤진이 옹정제(雍正帝)로 즉위한 후 1725년 황궁의 정원으로 조성했다. 건륭제(乾隆帝)는 원명원을 크게 확장하여 동쪽에 장춘원(長春園)과 기춘원(綺春園)을 신축했다. 기춘원은 나중에 만춘원(萬春園)으로 이름을 고쳤다. 원명원이라고 하면 보통 원명·장춘·기춘의 3원 전부를 가리킨다. 1709~1860년 청나라 황제는 1년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기거하며 정무를 보았다. 3원은 호수가 밀집되어 있는 평지에 건립되었다. 면적은 320㏊이며 그중 수면이 35%를 차지한다. 원명원 앞쪽 중앙 축선상에 있던 정대광명전(正大光明殿)과 뒤쪽의 구주(九州)·청연(淸宴) 두 건물이 궁전과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크고 작은 건물 100개는 모두 호숫가 섬들의 조경 풍치림에 건립한 것이다. 3원 중 원명원은 뒤쪽에 있는데, 호수 주위에 있는 9개의 섬 위에 조성해 배치했고, 구주·청연과 같은 9동의 부속건물이 딸려 있다. 또 호수 푸하이[福海]에 있는 10개의 섬 위에는 많은 누대와 헌관(軒館)을 여기저기 배열했으며, 호수 한복판에는 신선이 산다는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州)의 세 섬을 상징하는 작은 섬 3개를 조성했는데, 이곳은 3원 중 경물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곳이다. 기춘원은 작은 정원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으며, 장춘원은 비교적 넓고 중앙의 큰 섬에 세워진 순화헌(淳化軒)이 주요건물이다.

                                                                ▲ 원명원 입구

 

                                                         ▲ 원명원의 전체 모습

 

                                            ▲ C/G으로 복원한 원명원 모습

 

피서산장(避暑山莊) [열하행궁]

피서산장(避暑山莊)은 중국에서 가장 큰 황실 정원이다. 피서산장(避暑山莊) 또는 이궁(離宮)이라고 불리며, 중국 허베이 성청더(承德市)에 있다. 청나라 때 별궁으로, 여름에는 황제의 집무를 이곳에서 보면서 피서별궁열하행궁으로 불렸다. 중국 사대 정원 중의 하나이다. 총면적 5,460평방미터로, 주위의 성벽은 10킬로미터나 된다.

역사

청의 황제는 선양(당시의 봉천)에 제사를 지내러 가는 것이었지만, 황제의 행차는 청더에 머물렀다. 청더는 계절과 날씨가 좋고, 자연이 수려하며, 풍경이 아름답다. 또 온천 등도 있었기 때문에 강희제1703년 2개의 별궁을 짓기로 결정한다. 옹정제를 거쳐 1741년 건륭제 때 대규모 정비가 이루어져, 준공으로부터 87년이 지난 1790년에 완성하고, 외팔묘를 궁 밖에 짓기 시작한다. 이곳은 청나라 전기의 황제의 여름 집무지로, 정치, 군사, 외교 등의 국가대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다. 이런 이유로 베이징 이외의 제2의 정치 중심으로 불렸다.

강희제

강희제는 매년 입추 이후 목란위장을 찾아 20여일에 걸쳐 사냥을 했으며 피서산장으로 돌아와 쉬었다. 산장 정궁의 오문에 걸려있는 '피서산장'이라는 현판은 강희제가 직접 쓴 것이다. 그는 피서산장에서 북방의 소수민족들과 잦은 만남을 가지며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열하행궁과 그 주변에 있는 사당에서는 소수민족의 종교적 의식을 거행하였다. 피서산장은 그가 유약하지 않도록 사냥을 함으로 문과 무의 균형을 유지하는 장소였다.

건륭제

1793년 영국 사절단이 피서산장에 있던 건륭제를 만나기 위하여 도착하였다. 영국 사절단은 텐진과 닝보 그리고 저우산 등을 개항할 것과 광저우 부근의 일부 토지를 거류지로 할양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건륭제는 모두 거절하였다.

함풍제

1860년 제2차 아편 전쟁 때 영-프 연합군이 베이징에 난입하여 황제는 이곳으로 피난을 와서 이듬해 피서산장에서 사망하였다. 이후 권력을 잡은 자희태후는 함풍제때 시작된 보수공사를 모두 중지하라고 명하였고, 피서산장 대신에 이화원을 건설하였다.

만주국

1933년에는 일본 군대가 이곳에 주둔하고 만주국을 세웠으며, 이곳의 문화재를 약탈해 갔다.

중화인민공화국

1961년에야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선정되었으며, 1994년에는 외팔묘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외팔묘

건축양식

피서산장의 건축에 있어서는,강남지방의 훌륭한 정원과 명승을 참고해 지어졌다고 한다. 쑤저우사자림한산사, 항저우의 무릉사와 육화탑, 진강의 금산정, 가흥의 연우루는 모방하기 좋은 교과서였다. 내몽골과 대흥안령 등으로부터 소나무를 가져와 건축물에 이용했다고 한다. 또 원내에는 사고전서가 소장하고 있다.

한국 문학 속의 피서산장

이곳을 열하행궁(熱河行宮)이라고도 칭하는데, 1780년 조선 정조 4년 사신 종형(從兄) 박명원의 수행으로 따라가면서 적은 연암 박지원의 전 26권의 열하일기가 조선을 출발하여 이곳에 도착하여 건륭제를 만나는 과정을 적은 기행문이다.

특히 피서산장에 관한 기록은 마지막권인 26권 피서록(避署錄)에 잘 나타난다. 당시의 연암의 행적은 한양을 출발해 압록강을 거쳐 박천, 의주, 풍성, 요양, 거류하, 북진, 산해관, 옥전, 연경 그리고 목적지인 열하(청더)까지 장장 사개월간의 빡빡한 일정이었다.

 

                                                               ▲ 피서산장의 입구

 

            ▲ 황제(건륭제)의 집무실(正殿)이곳에서 박지원이 삼궤구고(三跪九叩)의 예를 행했다.

 

                                                         ▲ 피서산장의 전경

 

이화원(頤和園)은 북경 서북부의 해정구에 위치한 정원 공원이자 궁전이다.주로 60m 높이의 만수산과 쿤밍호에 많은 공을 들여서 공사를 하였다. 이화원의 면적은 2.9평방킬로미터이고 이중에 3/4이 호수로 구성되어 있다. 쿤밍호는 2.2평방킬로미터를 차지하며, 사람을 동원해서 바닥을 파낸 완전 수작업 호수이다. 파낸 흙은 만수산을 쌓는데 사용되었다. 7만 평방 미터의 공간에 궁과 정원 그리고 고전적인 건축을 살려낸 것이 특징이다.

개요

1750년 건륭제 재위 15년에 공사를 개시하였다. 솜씨좋은 장인들은 정원양식의 다양한 궁궐을 창조해 내었다. 쿤밍호는 기존의 작은 연못을 확장하여 항저우의 서호를 모방하여 만들어졌다. 1860년 제2차 아편 전쟁으로 영프연합군의 공격에 의해 수난을 당했고, 모조리 약탈 당했다. 1900년에도 의화단의 운동 때도 8개국의 서양 열강에 의해 공격당하였다. 다행히도 완파되지는 않아서, 1886년과 1902에 서태후에 의해 재건되었다. 1888년 현재의 이화원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서태후는 이곳을 여름 피서지로 사용하였다. 서태후는 이곳을 재건하기 위해, 해군 예산 30만은을 유용하여, 재건과 확장에 쏟아부었다고 한다.

1998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유네스코는 중국의 조경과 정원예술의 창조적인 예술을 빼어나게 표현하였다고 선언하였다.

1153년 금나라 완안량 황제가 행궁을 설치한 것이 시초가 됨

원나라완서우 산쿤밍 호를 만듬

1764년 청나라 건륭제가 개축하여 청의원이라는 이름을 붙임

1860년 제2차 아편 전쟁 당시에 프랑스-영국 연합군에 의해 약탈당하고 불태워짐

1888년 청나라 서태후가 해군 예산 30만은을 유용하여 재건하고 이화원이라는 이름을 붙임

1900년 의화단 운동 당시에 일본과 서양 8개국 연합군에 의해 공격당함

1902년 서태후가 다시 파괴된 부분을 재건함

 

                                                             ▲ 이화원 전경

 

 

청나라는 명나라가 쓰던 궁궐과 성벽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사회간접자본에 돈을 쓰는 대신에 원림 조성에 정력을 기울였던 셈이다.

 

더구나 북경은 큰 강이 없는 건조한 도읍지였다.

 

도시에 물이 있어야 여유가 생긴다.

 

이들 원림에 엄청난 규모의 인공호수가 있는 것은 북경에 물이 부족하다는 생태적 약점을 보강하기 위한 고려가 작용하였다고 여겨진다.

원명원은 강희·옹정·건륭제 3대에 걸쳐서 완성되었다.

 

약 100년에 걸쳐 완성된 정원인 것이다.

 

청나라 최고 전성기의 세 황제가 정력을 들인 작품이다.

 

원명원은 보통 원명삼원(圓明三園)이라고 하여 기존의 원명원에다가 그 동북쪽의 장춘원(長春園), 동남쪽에 있는 기춘원(綺春園)을 같이 포함하여 부른다.

 

옹정제는 1년 가운데 10개월을 원명원에 머물면서 집무를 할 정도였다.

이 원명삼원의 둘레는 70리에 달했다고 하니 그 엄청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원명원에 편액이 걸린 건물이 무려 600채, 장춘원에 200채가 있었다고 한다.

 

경치가 아름다워 '원명삼원 100경'도 있었다.

 

19세기 세계 최고의 정원이었다.

 

외국인들 사이에서 '만원지원(萬園之園: garden of gardens)'이라고 불렸다.

 

1860년 영불 연합군이 쳐들어와 집중적으로 약탈한 것이 바로 이 원명삼원의 보물들이다. [조용헌]

출처 : 석굴암
글쓴이 : 어둠속의 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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