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적 명품

세계최고의 보석상

구봉88 2009. 7. 27. 11:09

세계의 유명 보석상

세계 유명 보석상 모브상 (Mauboussin) - 프랑스

파리의 방돔 광장. 고급 보석점들이 나란히 들어선 이 지역에서도 '위대한 다섯 상점'으로 불리는 5개 보석점이 전통뿐 아니라 최고급품 상점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를 비롯, 세계적으로도 최고급 보석점으로 치는 '위대한 다섯 상점' 중에서도 모브상은 그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1827년에 세워진 모브상은 1907년 방돔으로 진출했다.

슬로건은 '보석에 관한 깊은 조예, 끊임없는 기술개발, 시대에 맞는 예술성'이 세 가지를 위해 일관되게 노력해온 모브상이기에 세계 제일의 이미지는 계속되어 왔고 그로 인해 고객의 신뢰도 변함이 없다. 모브상은 하이 주얼리와 부티크, 두 가지를 모드 취급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하이 주얼리 쪽에 모브상의 개성이 잘 나타나 있다. 고급 보석들을 수없이 흩뿌려 박은 목걸이나 팔지 등, 하이 주얼리 제품은 엄청난 가격이며 예술성도 높고 품위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뷰티크쪽은 ';오리지널을 구하기 쉬운 가격으로'라는 시대적 요청에 발맞춘 제품들로 섬세하고 우아한 선이 돋보이며 최고의 소재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이 두 가지 종류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뛰어난 기술로 손수 만든 제품이며 참신하고 개성있는 디자인이라는 점이다.

모브상은 해마다 봄 가을 두차례 신작 발표회를 갖는데 그때면 유럽 각국의 왕실이나 세계 부호들의 관심은 어김없이 모브상으로 쏠리게 한다.


세계 유명 보석상 까르띠에 (Cartier) - 프랑스


1847년 보석계에 첫발을 내디딘 루이 프랑스와는 당시 상류계층에서 크게 유행하던 에나멜과 조금(彫金)에 보석을 조화시키는 새로운 기법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1853년 보석 살롱을 열면서 때마침 일어난 보석 붐을 타고 왕실의 보석상으로 상류층의 사랑을 받으면서 차츰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 후 그의 아들 알프레드는 보석업계에 있어 혁명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자식들에게 정통예술을 공부시켰다. 1889년 알프레드는 장남 루이와 함께 '까르띠에와 그 아들'이란 회사를 설립하고 점포도 라 페가 13번지로 옮겼다.

까르띠에는 1902년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에 쓸 27개의 왕관을 제작해 더욱 유명해졌다. 알프레드의 세 아들 중에서도 세공술에 가장 비범한 재능을 가진 이는 루이였다. 그는 보석 세공에 백금을 사용해서 세상을 놀라게 했으며 1904년에는 브라질의 비행사 듀몽에게 만들어 준 시계가 크게 히트하기도 했다. 1923년에는 장느 토우상 부인의 도움으로 에나멜, 법랑, 은을 사용한 보석품과 가죽 일기장이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까르띠에의 대명사로 불리는 영원한 명기(名器), 쓰리 컬러 골드(Tiree color gold)가 루이에 의해 탄생되었다.

루이가 세상을 뜨면서 까르띠에는 한때 활기를 잃기도 했지만 로베르 옷크 사장이 취임, 1972년 까르띠에를 감각과 기술을 결집시킨 레마스토 두 까르띠에를 내놓음으로써 일찍이 누렸던 영광을 되찾았다. 완전함을 추구하는 까르띠에의 제품은 보석류, 라이터, 가죽제품, 시계, 필기구, 식기류 등에까지 이르고 있다. 유행을 따르지 않고 유행을 창조한다는 자세를 가진 까르띠에는 세련된 미와 꿈을 앞으로도 계속 우리에게 제공해 줄 것이다.


세계 유명 보석상 티파니 (Tiffany) - 미국

영화 '문 리버(Moon River)'의 우울한 멜로디와 함께 떠오르는 뉴욕 5번가의 티파니.

티파니는 1837년, 25세의 찰스 루이스 티파니가 친구 영과 함께 뉴욕에 문방구와 도자기를 취급하는 작은 가게를 내면서 시작되었다. 두 사람의 시대를 앞서가는 아이디어는 티파니를 점차 보석점으로 변신시켜 나갔다. 티파니는 1845년 처음으로 거래에서 주문방식을 채택했다. 이것은 보석점뿐 아니라 일반 소매상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858년에는 대서양의 해저 전선사업이 성공하자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쓰다남은 케이블로 기념 문전을 제작해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1878년 킴벌리 광산에서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다는 카나리아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 티파니는 즉시 이것을 사들였다. 128.51캐럿이나 되는 이 희귀 다이아몬드는 현재 뉴욕 5번가의 티파니 본점 특별실에 진열되어 있다.특별실의 출입문은 컴퓨터로 조작되는 견고한 이중문이라고 한다. 일명 ‘티파니 다이아몬드’라고 불리는 카나리아 빛깔의 유명한 황색 다이아몬드가 1층 홀에서 신비로운 광채를 발하고 있다.

1902년 창업자 티파니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뒤를 이어 1955년에 회장으로 취임한 월터 호빙은 파리의 슈란바자, 이탈리아의 페레티 등 유명 디자이너를 초빙해 ‘티어 드롭(Tear Drop)’ ‘다이아몬드 바이쟈아드’와 같은 명품들을 제작, 티파니의 명성을 한층 드높였다. 그후 파로마 피카소도 가세해 부유층뿐만 아니라 만인의 사랑을 두루 받을 수 있는 제품을 만들려고 힘써 왔다.

미국 최고의 보석점 티파니는 시대적 추세를 타고 눈부시게 발전하여 1850년에는 파리에, 1968년에는 런던에 지점을 설치 세계의 티파니로 성장하였다. 도시인의 심플한 감각이 돋보이는 디자인이 특징이다.


세계 유명 보석상방 클리프 & 아페르 - 프랑스

세계적인 보석상이 나란히 들어선 유명한 파리의 방돔 광장. 그 가운데 하나인 방 클리프 앤드 아페르가 이곳에서 개점한 것은 1906년의 일이었다.

아페르 3형제인 쥴리앙, 루이, 샤를르와 막내 여동생의 남편 알프레드 방 클리프, 이 네사람이 새로운 보석점의 설립에 합의했다. 그 당시 프랑스는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대)의 예술운동이 한창이었으며 새로운 개성 시대에 어울릴 새로운 패션을 요구하고 있었다. 벨 에포크를 특징짓던 아르누보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장식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이 새로운 풍조를 반영하여 개최된 1925년의 ‘아르데코전’에서 방클리프 앤드 아페르는 장미꽃을 모티프로 한 디자인으로 대상을 받았다. 1930년에는 미노주토르라는 이름의 코즈메틱 백을 발표하였는데 그 이후로 미노주토르는 이브닝 백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세계 굴지의 보석점으로 발전해온 방클리프 앤드 아페르는 전세계 왕실과 재계의 거물들을 매료시키는 독특한 스타일을 확립해 나갔다. 그중에서도 팔레비 왕비의 왕관은 방클리프 앤드 아페르 기술의 절정을 이룬 작품이다.

‘미스테링 세팅’(손톱을 사용하지 않고 보석을 세팅)으로 불리는 방클리프 앤드 아페르의 획기적인 기술은 예술원 회원이 지니는 국보급 검을 제작하는 영예를 얻게 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방 클리프 앤드 아페르의 그 제품을 본딴 유사품이 돌아다니기도 한다. 이러한 성공의 비결은 보석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엄격하고 정확한 식별안 그리고 언제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창조력이다.


세계 유명 보석상 쇼메 (Chaumet) - 프랑스

1780년 일류 보석 세공인 에첸느 니토는 보석점 하나를 열고 어느날 갑자기 엄청난 행운의 주인공이 된다. 얘기인즉, 그의 가게 앞을 지나가던 마차가 뒤집히는 것을 보고 황급히 달려나가 도와주었는데 그 마차의 주인이 다름아닌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던 것. 이 사건을 계기로 그 가게는 프랑스황실의 지정 보석점이 된 것이다.

이 니토의 가게를 이어받은 사람이 죠셉 쇼메와 그의 아들 마르세르. 1885년 죠셉이 니토의 사위가 됨으로써 가게 이름이 쇼메로 바뀌게 되었다. 아주 근면한 사람이었던 죠셉은 보석을 과학적으로 연구하였으며 해외로도 눈을 돌려 밀려오는 새로운 시대의 물결을 민감하게 파악하려고 애썼다. 그는 유럽뿐만 아니라 인도나 중동 지역까지 손을 뻗쳐 그쪽 권력자에게 제작 의뢰를 받는 등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다.

1907년 쇼메는 리슈류로 이전하게 되는데 리슈류 쇼메점은 루이 16세의 명령으로 지은 유서깊은 호텔로서 현재도 옛모습 그대로의 쇼메 살롱이 남아 있다. 1964년 가게를 이어받은 자크 쇼메와 그의 동생 피에르 쇼메는 보석과 자사제품에 대해 이처럼 얘기했다. ‘보석 속에는 아름답고자 하는 인간의 소망이나 감정을 나타내는 것이 있고 그것이 장신구로 완성됐을 때는 장식품을 지닌 사람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쇼메가 지금까지 계속 사랑을 받아온 비결은 그 전통과 쇼메를 만드는 사람들에 보내는 신뢰 때문입니다.’

최신 컬렉션은 옥츄오르. 기하학적인 18K의 대(坮) 중앙에 다이아몬드를 배치한 디자인이다. 생생하게 빛나는 여성상이 탄생한 1920년대의 아르데코를 방불케하는 쇼메만의 엘레강스이다.



세계 유명 보석상 부슈롱 (Boucheron) - 프랑스

부슈롱은 1858년 프레드릭 부슈롱이 파리의 로와야르에 고급 보석점을 차리면서 시작되었다.

뛰어난 보석세공인인 부슈롱은 그 당시 성황리에 열렸던 박람회에서 세계의 보석 애호가들로부터 찬사를 받는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프랑스 예술을 세계에 널리 알린 업적으로 레종 드 누르 훈장을 받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1893년 부슈롱은 방돔 광장 26번지로 자리를 옮겼다. 방돔은 그 당시 나폴레옹 3세의 총애를 받던 신하들이 거주하던 지역이었으나 지금은 세계 보석장식품의 중심지로 바뀐 곳이다. 부슈롱이 세상을 뜨자 그의 아들 루이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부슈롱을 더욱 세계적인 보석점으로 키워나갔다. 혁명으로 쫓겨난 이란의 팔레비 왕은 루이를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보석 전문가’라며 극찬하기도 했다.

1980년 알란은 아버지 제랄(루이의 아들)의 뒤를 이어 부슈롱의 제4대 사장이 되었다. 알란의 방침은 다음과 같은 그의 말대로 첫째가 창조정신이다. "내게 있어서 보석은 각기 다른 개성을 느끼게 하며 나로 하여금 열의와 상상력을 불러 일으킨다." 또한 보석상의 존석 여부와 명성도 이 창조 작업에 달려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가장 전통적인 보석에서부터 유행의 첨단을 걷는 것까지 부슈롱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변함없는 ‘엘레강스’이다.

부슈롱은 수정과 귀석을 교묘하게 배합시킨 전혀 새로운 감각의 보석이며 아프리카나 중앙아메리가를 연상케하는 이국적이 컬렉션이 특히 인기를 얻고 있다. 현재 영국과 사우디아라비아, 모나코의 왕실 보석을 제작하는 등, 세계 최고의 보석만을 사용해 제작하는 부슈롱 제품은 하나하나가 새로운 감각을 지니고 있다. 부슈롱은 ‘보석의 거리’ 방돔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세계 유명 보석상 프레드 (Fred) - 프랑스

프레드는 로열가 6번지에 본점이 있다. 또한 칸느, 사트로페, 몬테카를로, 제네바, 달라스, 비버리힐스, 뉴욕 등지에도 직영점을 가진 세계 굴지의 보석점이다.

1936년 창업때부터 지금까지 사장 프레드 사미엘은 양식진주의 디자인에 몰두해 왔다. 그러한 디자인은 마레네 디토리히, 더글라스 페어뱅크스, 최근에는 그레이스 왕비, 카트리느 드뇌브 등 저명인사들에게 인정받아 파리 보석계에 확고한 기반을 구축했다. 프레드의 하이 주얼리 컬렉션은, 손으로 만들지 않고는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을 만큼 개성이 독특하며 디자인도 다양하다. 본점 건물은 1971년까지는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었다가 그 후 내부 장식만 약간 바꾸었다. 원래 이 건물은 루이 15세 전용의 마굿간으로 사용되다가 그 후에는 아담 드 스파르의 거처로도 쓰였던 역사적 가치가 높은 건물이다.

1976년 프레드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그 직영점을 확대하여 비버리힐즈에 그 1호를 세웠고 1980년 휴스턴에 다시 2호를 개점하였다. 이 두 직영점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그래서 계속해 달라스와 뉴욕에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뉴욕 5번가의 티파니와 가까운 센트레지던스 쉐라톤 호텔 쪽 한 구역에 있는 뉴욕점은 1983년 11월에 성대하게 오픈하였다.


세계 유명 보석상 피아제 (Piaget) - 프랑스

피아제는 스위스의 대표적인 고급 시계메이커.

1874년 조르쥬 피아제가 스위스의 뉴사텔주 ‘요정의 언덕’에 세웠다. ‘항상 필요 이상으로 힘쓴다’라는 피아제의 창업정신은 오늘날까지도 충실히 지켜지고 있다. 피아제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286개의 다이아몬드(87.87캐럿)를 박아 세계에서 제일 비싼(당시 우리 돈으로 약 100억원) 손목시계가 된 휘버스를 떠울리게 될 것이다. 그만큼 휘버스는 피아제의 기념비적 작품이었다.

1946년에는 두께가 1.35mm 밖에 되지 않는 태엽에 10달러 금화로 장식화 시계를 만들어 냈고 이어 두께 2.2mm의 슬림형 기계장치의 자동 손목시계를 만들어 세계를 또 한번 놀라게 했다. 거기에 거치지 않고 피아제는 최초로 문자판에서 시각표를 떼내는 과감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같은 피아제의 끊임없는 신제품 개발은 세계 시계사에 불멸의 금자탑을 세웠다. 이러한 피아제의 이름을 더욱 유명하게 한 것은 초현실주의 거장 달리가 만든 ‘피아제-달리의 인형’이란 황금 작품이다. 이것은 달리가 피아제를 위해 손수 고안한 황금 장신구로 세계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피아제의 진기는 금이나 다이아몬드와 같은 값비싼 재료로 자유분방하게 창작하며 끝없이 미(美)를 추구하는데 있다. 피아제의 제품은 그 하나하나가 예술품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정교하며 특히 끝마무리가 뛰어나다. 이같은 사실은 이미 전세계 모든 이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피아제의 진지한 자세와 우수한 기술은 다이아몬드 국제 대상, 유럽 메리큐르 등 여러 콘테스트를 휩쓴 사실로 입증된다. 피아제는 이제 스위스의 시계 명성을 지켜나갈 뿐만 아니라 세계 보석계에서도 큰 발자국을 남기려는 새로운 의욕을 보이며 점차 보석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세계 유명 보석상 장마리아 브첼라티 - 이탈리아

장마리아는 1929년 밀라노에서 보석세공사인 마리오 브첼라티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마리오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뛰어난 재능과 기술을 이어받은 장마리아는 아틀리에를 물려받아 한층 더 발전시켰다.

장마리아 브첼라티의 디자인은 장마리아의 탁월한 발상으로 구상되며 당대 최고라는 공인의 손에 제작이 맡겨진다. 아틀리에에는 디자인별로 정통한 금세공사, 조금사, 연마사 등으로 구성된 작은 그룹이 있어서 전통 기법을 구사하며 독창적인 예술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렇게 해서 르네상스시대의 고전적이면서도 섬세한 분위기의 조각법을 재현한다.

금을 소재로 하여 천처럼 부드러운 감촉으로 장식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색의 보석을 그림물감처럼 흩뿌려 박아 분홍, 흰색, 황금색이 서로 어우러져 미묘한 하모니를 창출한다. 그래서 장마리아를 ‘보석의 화백’이라 부르기도 한다. 아버지 마리오의 작품이 유럽까지 좋은 평가를 받았듯이 장마리아도 전세계 저명인사들로부터 그 진가를 인정받고 있다. 파울로 6세, 오나시스 부인 자크리누, 태국의 실리커 왕비, 모나코의 그레이스 왕비 등 세계의 톱 레이디들이 그의 보석품을 애용하고 있다.

장마리아의 소망이라면 전세계 여성들을 보다 아름답게 하는 것. 그것을 위해 손으로 만드는 정성스런 작품은 때로 수개월이 걸려 완성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신사용 제품을 개발하기도 하고, 브첼라티의 특징은 살리면서 가격은 내린 캐주얼 제품으로 젊은 층을 끌어들임으로써 애호가 층을 더 넓히고 있다.


세계 유명 보석상 다미아니 (Damiani) - 이탈리아

보석품의 중심지로 이름이 높은 이탈리아 북부 도시 발렌챠.

다미아니는 이곳에 본거지를 두고 1958년에 창설되었다. 긴 역사를 자랑하는 이탈리아 보석계에 있어서 다미아니는 비교적 역사가 짧은 편이다.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다미아니는 이미 세계적인 보석 메이커로 성장했다. 현재 이탈리아에만도 전국에 1천 여개에 이르는 판매망을 갖고 있으며 전세계로도 다미아니가 가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이처럼 다미아니가 세계적인 메이커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확고한 기술과 완고하기까지한 장인기질 그리고 새로운 감각과 독창성 때문이다.

다미아노 그랏슈 사장은 다미아니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다미아니는 항상 제품 하나하나가 개성적이며 그와 동시에 다른 제품들과 잘 어울려야 하고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다미아니는 요란스러울 만큼 화려한 것은 거의 없고 피부에 어울리는 수수한 아름다움을 갖춘 제품이 많다. 또한 다미아니는, 다미아니의 이상(理想)인 ‘사랑·우정·존엄’을 나타내는 심오함과 유럽적 향기를 담고 있다. 디자인면에서도 다양함을 자랑한다. 세련되면서도 우아한 화려함을 함께 갖추고 있다.

이처럼 보석 선택의 엄격함에서부터 디자인 제품의 제작, 마무리에 이러기까지 최고의 배려로 이루어지는 다미아니의 보석은 정장이나 캐주얼 어떤 복장에도 자연스럽게 어울려 앞으로도 계속 장식의 즐거움을 만인에게 선사해줄 것이다.


세계 유명 보석상 해리 윈스톤 (Damiani) - 이탈리아

해리 윈스톤은 세계에서 가장 호화로운 보석품을 50년에 걸쳐 잇달아 발표해 화제를 모았다

유달리 멋진 보석에 애착심이 깊었던 윈스톤은 그러한 보석들을 찾아 전세계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 모험에 가득찬 일생에는 왕, 군주, 부호 등 온갖 사람들이 등장하며 거대한 재산을 둘러싼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뉴욕에서 태어난 윈스톤은 15세때 로스앤젤레스에서 보석상으로서 첫걸음을 내디뎠다. 20세가 되기 전에 뉴욕으로 돌아온 윈스톤은 캘리포니아에서 모은 2천불의 자금으로 5번가에 프리미어몬드사를 설립했다. 보석에 뛰어난 식견을 가졌던 그는 자산성이 있는 보석을 겨냥했다. 우선 윈스톤은 은행과 강한 유대관계를 구축했다. 그리고는 사교계 명부나 인명록을 점검한 뒤 보석 처분으로 망하는 부호들을 상대로 전문가로서의 업무를 시작했다 그리하여 1932년에 해리 윈스톤이라는 보석거래상을 세웠으며 이미 그때 1건에 1백만불을 웃도는 대형 거래를 하고 있었다.

거래뿐만 아니라 윈스톤은 이제까지 발견된 다이아몬드 원석 가운데서 최상의 것을 구입하여서는 멋진 다이아몬드를 만드는 역할까지도 해냈다. 그 가운데는 욘카, 니알코스, 테일러 버튼, 윈스톤, 스타 오브 인디펜던스, 스타 오브 시에라레온 등이 있다. 윈스톤은 또한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이돌즈 아이, 아루콧, 네팔, 브리오렛, 우제니 블루 등 거대한 다이아몬드도 다루었다. 윈스톤의 이름을 가장 잘 알려준 것도 아마도 악명 높은 호우프 다이아몬드를 미국의 스미소니안 박물관에 기증하면서였을 것이다. 해리 윈스톤은 보석 디자인에서도 탁월한 식견을 갖고 있었다. 그 당시 유행하던 대형의 세팅에 만족하지 않고 손으로 만든 자유로이 움직이는 세팅을 백금이나 금을 이용해 제작함으로써 보석 장식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윈스톤의 특징은 매끈한 움직임, 우아함, 그리고 입체감을 살린 디자인에 있다. 윈스톤은 우대한 보석상이 지녀야 할 자질 - 지식, 인내력, 통찰력, 그리고 가장 중요한 보석에 대한 타고난 애정 - 전부를 충분히 갖춘 사람으로서 시대를 초월한 찬란한 미의 유산을 남긴 기억할 만한 인물이었다.
내용출처 : 주얼리신문

'■ 세계적 명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럭셔리컨셉트카 부가티갈리비에  (0) 2009.09.16
세계 50대 관광 명소  (0) 2009.08.20
세계최고 최장 다리모음  (0) 2009.07.16
세계최대의 실내수영장  (0) 2009.03.17
150억짜리 수석  (0) 2008.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