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대통령

[스크랩] 전두환

구봉88 2010. 4. 14. 20:35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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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전두환
전두환(1985년)
대한민국의 국기 대한민국제11·12대 대통령
임기 1980년 9월 1일~1988년 2월 24일
국무총리 남덕우 (1980 ~ 1982)
유창순 (1982)
김상협 (1982 ~ 1983)
진의종 (1983 ~ 1985)
노신영 (1985 ~ 1987)
김정렬 (1987 ~ 1988)
전임: 최규하(제10대)
후임: 노태우(제13대)

출생일 1931년 1월 18일(1931-1-18) (79)
출생지 한국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정당 무소속, 민주정의당
종교 천주교(대통령 재직시, 세례명:성 베드로) -> 불교(백담사 기거 후 개종)
배우자 이순자
자녀 전재국, 전재용, 전재만, 전효선
전두환
1931년 1월 18일~
별명 호 일해(日海)
태어난 곳 한국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복무 대한민국 육군
복무 기간 1955년 2월 ~ 1980년 8월 22일
최종 계급 예비역 대장
근무 육군

전두환(全斗煥, 1931년 1월 18일~, 경상남도 합천군 출생)은 대한민국제11·12대 대통령으로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키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압을 주도했다. 국군 보안사령부 사령관, 12.12중앙정보부장 서리,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예편 후 정계에 입문하여 1980년 9월부터 1988년까지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지냈다. 그 외에 민주정의당 초대 총재 등을 지냈다.대통령 재직기간에 1988년 서울 올림픽 준비 등을 수행하였다. 퇴임 후 민주정의당 명예총재,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 등을 지냈으며, 1995년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구속 기소되어 1심에서 내란죄군사반란죄 수괴 혐의로 사형[1],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1997년에 사면되었다. 아호는 일해(日海), 본관완산(完山)이다.

1994년 당시 총무처 장관 서석재, 1995년 국회의원 박계동에 의해 비자금 조성 의혹이 제기되어 오면서 비자금 조성 의혹을 받고 있으며, 일부 비자금은 밝혀지기도 했으나 정확한 액수는 밝혀지지 않았다. 정적 탄압과 삼청교육대 사건에 대한 비판,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학살자와 12·12 군사 정변의 실질적 책임자라는 비판과 구국의 영웅이라는 극단적 평가가 양립하고 있다.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출신으로 5세에 대구광역시로 이사하였으므로 정치적 고향을 대구광역시로 간주하기도 한다.


목차

[편집] 생애

[편집] 대통령이 되기 이전의 생애

[편집] 출생과 가계

1931년 1월 18일 경상남도 합천 율곡면 내천리에서 완잔 전씨(完山全氏) 전상우(全相禹)[2]광산 김씨 김점문(金點文)[3]의 10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그의 위로 형 열환, 형 규곤, 누나 홍렬(1918년생), 명렬(1922년생), 형 기환(1929년생), 누나 선학(1931년생)이 있었다. 그가 태어난 뒤로도 남동생 석환과 여동생 점학(1935년생)이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몰락 양반 가계로 13대조인 전제임진 왜란 때 영산현감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였고, 이후 무관이 몇명 배출되었으나 한동안 벼슬에 나가지 못하고 몰락한 상태였다. 풍수지리에 능했던 그의 삼촌은 할아버지인 전영수의 묘소를 파가 다른 먼 친척의 선산 근처 명당에 암장하기도 하였다.

아버지 전상우는 가난한 농부였으나 마을 구장을 지낼 만큼 상당한 한문 지식이 있었다.[4] 아버지 전상우는 성격이 괄괄해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했는데, 전두환은 이런 아버지의 성격을 닮았다 한다. 전상우는 의리가 강해 아들 전두환이 여덟 살이던 1939년에 동네 노름꾼 지인의 빚보증을 서주느라 문중의 종토(宗土)를 저당잡혔다. 이 종토를 돌려받는 과정에서 합천 읍내 주재소 순사부장의 소환을 받았으나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4] 어머니 김점문은 자녀들 중 전두환에 대한 기대가 강했다 한다. 아들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강했는지, 지나가는 승려를 대접해준 뒤, 그 승려로부터 '어머니의 튀어나온 앞니가 아들의 운세를 가로막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김점문은 부엌으로 달려가 쇠 집게로 생니 3개를 뽑을 정도였다.[4] 한다.

전두환이 태어날 때 그 위로 세 명의 형이 있었으나, 두 형 중 전열환은 고향 친구들과의 놀이 도중 사고로 사망하였다. 둘째 형 전규곤은 추락사고로 사망하였고, 전두환과 전경환 사이의 동생 전석환 역시 어렸을 때 병으로 사망하여 셋째형 전기환과 그, 동생 전경환과 누이들만 살아남았다.

[편집] 유년기와 소년기

그가 5세 되던 해에 그의 가정은 경상남도 합천 율곡면에서 대구로 이사하였다. 이후 전두환은 호란보통소학교에 입학하였다.[3] 그의 아버지 전상우는 횡포를 부리는 일본인 순사를 벼랑에서 밀어 떨어트린 뒤 만주 지린성으로 피신하였다가 2년 만에 귀국했다.[3] 일본 순사의 수배를 피해 그의 부모가 이주한 곳은 만주 지린성 반석현에 숨어 살다가 1년 3개월 만에 다시 지린성을 떠나 귀국하게 되었다. 전상우는 그뒤 만주에서 배운 한의술로 한의원을 개업했으나, 정식으로 배운 한의학이 아니라서 손님들의 발길은 뜸했고,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이 일 때문에 전두환은 또래들보다 2~3년 늦게 호란보통소학교를 졸업했고 1947년 대구공업중학교에 입학해 50리나 되는 먼 길을 걸어서 통학하였다 한다.[3] 그 뒤 대구공업중학교를 졸업하고 대구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고등학교 재학 당시 우수한 성적이었다 하며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저녁마다 목총을 들고 중학교 교사를 돌며 순찰을 했다 한다. 6·25 전쟁1951년 2월 대구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전두환은 학창시절부터 생계에 뛰어들어야 했다. 학창시절 내내 전두환의 학업 성적은 우수하였으나, 가정 형편이 곤궁하였던 전두환은 대학교 진학의 꿈을 접고 대학에 준하는 ‘학비가 들지 않는’육군보병학교[5]육군사관학교를 지망, 보병학교에서 탈락하자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편집] 청년기

[편집] 운동선수로서의 전두환

체력이 강하고 운동을 즐기던 전두환은 운동선수이기도 했으며, 축구선수였고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중학교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으며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도 축구선수로서 계속 활약했다.[6] 이 전력이 있는 전두환은 대통령이 된 이후 스포츠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으며, 박종환 당시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불러다 축구국가대표팀의 작전과 선수기용을 직접 지시하기도 했다.[6]

전두환이 생도시절에 주최된 전국 대학 축구대회에서 육군사관학교는 전두환 골키퍼의 맹활약으로 전국 준결승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편집] 육군사관학교 시절

대구공업고등학교 졸업 후 그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였다. 사관학교에서 동기인 노태우·정호용 등과 만나 친분을 쌓고 인맥관계를 형성하였으며 훗날 이들과 군사독재 정권을 이루게 된다. 육군사관학교 재학 중 우연히 육사 참모장인 육군 대령 이규동(李圭東)의 관사에 드나들다가 그의 딸 이순자를 만나게 되었고, 후에 이순자와 결혼하였다.

1955년 9월 전두환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졸업과 동시에 육사 11기로 육군소위에 임관하였다. 육군소위 임관 후 육군부관학교(陸軍副官學校)에 입학, 1959년 1월 육군부관학교 군사영어반을 6기로 졸업한다.

[편집] 군인 생활

1959년 2월 전두환은 미국으로 유학, 미국 육군특수전학교에 입교하였다. 그해 6월 미국 육군특수전학교 심리전 교육 과정을 마치고, 미국 육군보병학교에 진학, 1960년 7월 미국 육군보병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그후 육군본부 특전감실 기획과에서 근무하다가 1961년 4월 육군본부 특전감실 기획과장 직무대리에 발탁되었다. 1961년 5월 16일5·16 군사정변이 발생하자 육사에서 육군 대위로 있던 그는 육사 내에서 지지 시위를 주도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박정희의 신임을 얻었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의 비서관에 임명됨으로써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하였다. 그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담당 비서관으로 선임되었다.

육군 소령 계급으로 있었던 1962년하나회를 조직하는데 가담하여, 군부 내에 인맥을 형성하는 한편, 육군 본부 특전감실 기획과장대리,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 등을 지냈다.[7] 1963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을 거쳐, 육군대학(陸軍大學)에 입교, 1965년 6월 육군대학을 졸업하였다.

그는 육사 동기들 중 육군 중령으로는 늦게 진급하였으나 1969년 육사 11기 동기들 중 최초로 육군 대령으로 진급하였고, 육군 본부 육군참모총장실 수석부관을 지냈다.[8]

[편집] 월남 참전과 숙청 위기

1970년에는 육군 대령으로 연대장이 되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고, 1971년 귀국 후, 장군으로 진급, 그 뒤 제1공수특전단 단장, 1976년 대통령 경호실 차장보, 1978년 제 1사단장을 지냈다. 장군 진급 후 육사 11기 출신과 그 후배 기수가 가입된 군장성 모임인 하나회를 결성하였는데 그의 동기 기수가 주축이 되었다. 하나회에서 윤필용 등과 함께 하나회를 이끌어갔으며 윤필용하나회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기도 하였다.

하나회의 리더 중의 하나였던 그는 1973년 4월 윤필용이 사석에서 한 발언이 문제가 된 윤필용 사건으로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강창성에 의해 하나회가 군부 내 사조직으로 적발되어 위기에 몰렸으나, 예편(豫編)의 위기를 모면하고 1978년 제 1사단장에 임명되었다. 제 1사단장으로 있을 때 부대 내 사기진작을 하겠다 하여 모범병사 10명을 선정하여 표창과 포상을 수여하였다.

1사단장 재직 당시 제3땅굴을 발견하기도 했으며, 1979년 3월 기적적으로 보안사령관에 임명되어 중앙으로 복귀하였다. 윤필용 사건으로 강창성에게 앙심을 품은 전두환은 강창성을 강제로 예편시키고 삼청교육대에 보내버렸다. 윤필용은 수감 중 강제 퇴역당하였고, 전두환은 하나회의 실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다음은 전두환이 군인으로서 걸어온 길이다.

  • 1955 육군 소위 임관(육사 11기)
  • 중령
    • 1963 중앙정보부 인사과 과장
    • 1963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 1965 육군대학 졸업
    • 1966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
    • 1967 수도경비사령부 제30대대장
    • 1969 육군참모총장실 수석부관
  • 대령
    • 1970 제9사단 29연대장 (월남 백마부대)
  • 준장
    • 1971 제1공수특전단 단장
    • 1976 청와대경호실 차장보
  • 소장
  • 중장
    • 1980 제10대 중앙정보부 부장서리
    • 국가보위입법회의 상임위원장
  • 대장
    • 1980년 8월 6일 육군 대장으로 진급 후 8월 26일 부 전역

[편집] 10.26 사태 전후

이 부분의 본문은 10·26 사태입니다.

1979년 10월 26일대통령 박정희가 궁정동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저격당하는 10·26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후 혼란과 함께 권력 공백으로 국무총리 최규하대통령 권한대행직으로 일시 권력을 승계하였다. 이 날 전두환은 부하들에게 막강한 합수본부 설치 기안을 명령하였다.[9] 10월 27일 새벽 비상국무회의에서 박정희 대통령 유고안이 내려졌고, 계엄사령부가 설치되자 전두환 소장은 곧 계엄사령부 예하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에 임명되어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의 수사 지시 명령을 받았다.

10월 27일 전두환은 중앙정보부 해외담당차장 윤일균, 국내담당차장 전재덕, 검찰청 총장 오탁근, 치안본부장 손달용 등을 보안사 2층 사령관 접견실로 불렀다.[9] 전두환은 이들을 입구에서 삼엄한 몸수색을 하였으며, 상석에 앉아 박정희의 서거를 알린 뒤 범인은 중앙정보부라고 지목하고 박준광 육군 소령을 통해서 각 기관의 업무지침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9] 곧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에는 ‘앞으로 일체의 예산을 집행해서는 안 된다. 다만, 합수본부의 허가를 받으면 집행할 수 있다.’라며 행동에 제한을 두었다. 그 뒤 “앞으로 모든 정보 보고는 오후 5시, 오전 8시에 합수부에 제출하라.”라고 지시했다. "정보부는 전재덕 차장이 당분간 장악하라." 라고 지시했다가 선임자가 해외담당차장임을 알고는 수정했다.[9]

1979년 10월 27일 권력 공백에 의한 혼란 중에 김재규, 박선호 등을 박정희 대통령 저격범으로 체포하였고, 그 해 12월 6일 최규하는 제10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혼란한 정국을 틈타 노태우, 정호용, 유학성, 허삼수 등 육사 11기 출신 장교들이 주도하는 비밀 사조직 하나회를 주축으로 하여 신군부를 형성하였고, 신군부가 12·12 군사정변을 일으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1월 6일 합수부장으로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의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계엄군법회의에서 공개재판할 것을 언론사에 발표하였다. 이어 내외부의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고 수사기간 중 협조해준 국민과 관계기관에 감사를 표한다고 발표했다.

[편집] 군사반란과 집권 과정

이 부분의 본문은 12·12 군사 반란입니다.

같은 해 12월 12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부장으로서 현장에 있던 김계원계엄사령부 사령관 육군 대장 정승화 등을 김재규 등과 공모한 공범으로 체포하고, 이 과정에서 김오랑 소령과 병사 2명이 사망하는 등 물리적 교전이 발생하였다. 준장 박희도에게는 특전사령관 정병주 중장을 체포케하고 수도경비사령부에는 수경사령관 장태완 등도 체포케 한다. 이 과정에서 반발하던 육군 장성과 장교들은 인사 불이익을 받고 강제 퇴역, 예편당하였다. 1980년 전두환은 육군중장으로 진급하고, 이어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앉았다가 그해 4월 14일 제10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했다.

1980년 5월 북한 인민군 침투설이 돌자 5월 17일 새벽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를 발표하였고, 국회 내의 야당 인사들을 체포, 감금하였다. 5월 18일 시민군과 군 병력 간에 발생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계엄군과 공수부대를 투입, 시민군은 5월 21일부터 광주 해방구를 만들고 저항하였으나, 전두환은 5월 27일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그 뒤 국무회의와 정권을 장악한 뒤, 그해 6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하고 국보위 위원에 피선되었으며, 국보위 상임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에 선출 되었다. 이어 7월 17일 중앙정보부장직을 사퇴하고 국보위만을 관할하다가 8월 5일 육군대장으로 진급하고, 8월 22일 예비역 육군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일반적으로 그는 노태우, 정호용 등과 함께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무력진압 지휘체계의 실질적인 주요 핵심 책임자 및 조력자로 여겨지고 있다.[출처 필요] 그러나 정확한 명령계통과 5월 18일 부터 진압 시까지의 발포 명령자[출처 필요]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편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폭도들과 북한 인민군에 의한 폭동으로 여겨졌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압은 정당하게 해석되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실권자였던 전두환을 겨낭해 '전두환 퇴진', '전두환 아가리를 찢어죽이자' 등의 격한 구호가 나붙었으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대량 사상자를 내고 유혈진압되면서 학생운동권의 반(反) 전두환 기운은 고조되었다.

7월 충청북도 일대에 수해가 발생하자, 7월 23일 국보위 내무분과위원회 위원장 이광로(李光魯)를 대동하고 충청북도 청주시보은군, 경상북도 문경군점촌읍, 마성면 등 수해지역을 시찰, 김종호(金宗鎬) 충북도지사김무연(金武然) 경북도지사 등으로부터 수해상황을 보고받고 돌아왔다.

[편집] 미사일 포기각서 제출

미국으로부터 박정희 집권 당시 개발중이던 핵미사일을 폐기할 것을 요구받았다. 1980년 초 전두환 대통령은 악화된 대미관계를 풀기 위해 “사거리 180km, 탄두 무게 453kg 이상의 미사일은 절대 개발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써줬고 이후 레이건 대통령은 전두환 신군부를 승인하였다. 1990년대에 미국과 다시 협상을 벌인 결과 ‘미사일 각서’를 무효화하는 대신 2001년 MTCR(Missile Technology Control Regime)에 가입하여 ‘사거리 300km, 탄두 무게 500kg 이하’의 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게 되었다. [10][11]

[편집] 제5공화국

이 부분의 본문은 제5공화국입니다.

[편집] 11대 대통령

1980년 8월 6일 육군 대장(大將)으로 진급했다. 전두환은 곧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였으며 미국로스엔젤레스 타임즈지의 공식 보도를 통해 전두환 장군을 지지한다 는 성명을 발표했다.[12] 8월 25일 필리핀이멜다 여사 역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전두환 장군을 지지해야 한다고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13] 8월 15일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를 선언하여 그해 8월 27일 그는 대통령 후보자에 출마하였다. 8월 29일 육군 대장에서 예편하였다. 8월 29일 경쟁자 없이 단독 출마로 장충동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간접선거로 제11대 대통령에 당선,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80년 9월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취임 직후 전두환은 김재익을 청와대 경제 수석으로 등용했다.

김재익은 "제가 생각하는 경제 정책은 인기도 없고 기존의 세력들이 환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 일을 해내야 합니다. 그래도 저를 쓰시겠습니까."[14]

전두환은 김재익의 다짐을 받아들이고 경제에 관해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라고 하며 그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해 주었다. 김재익은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입각하면서 전두환의 경제 가정교사 역할까지 했다.[14] 그는 하얀 종이에 경제 자율화와 안정화의 그림까지 그리면서 전두환을 가르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14] 전두환은 김재익의 강의를 통해서 나름대로의 경제관을 갖게 되었고, 사람들을 만나면 자신의 경제에 대한 소견을 밝히고[15] 토론하기를 좋아했다.

김재익에 대한 전두환의 신임은, 제5공화국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한 청와대 정무수석 허화평과 사정수석 허삼수로부터 김재익이 괴로움을 당하게 되자, 전두환은 격노하면서 두 허씨들을 청와대에서 내보내기도 했다.[16] 이후 전두환의 비호하에 김재익 등의 경제관료들은 군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경제정책을 펴나갈 수 있었다.

그 해 9월 법률의 연좌제를 공식 폐지하였고, 10월 17일 비리정치인 정치활동 금지법 발표와 함께 구 정치정당을 해산하는 정당 해산령을 내려 제3공화국제4공화국의 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유신정우회, 민주당계 야당인 신민당, 혁신 정당인 통일사회당, 민주통일당 등을 강제 해산시켰다. 그리고 비리 혐의로 구 정치인들을 일부 정치활동을 규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형식적인 정치규제는 12대 대통령 선거를 1개월 앞두고 해지시켜 주었다. 구 정치인들은 각자 정당을 만들어서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다. 1981년 1월 창당된 민주정의당에 입당, 민주정의당의 초대 총재에 추대 되었다. 이어 전두환은 12대 대통령에도 출마할 의사를 밝히고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였다. 국민당김종철(金鍾哲)은 기호 1번, 기호 2번은 김의택(金義澤), 3번은 민한당의 유치송(柳致松)이었고 전두환은 기호 4번을 차지하게 되었다.

[편집] 12대 대통령 취임

청남대(전두환의 대통령 재직 시절 별장, 충청북도 청원군 소재)

개정된 새 헌법에 따라 장충동체육관에서 치러진 선거로 1981년 2월 25일 90.6%의 참석하에 2500표의 압도적인 표차로 2위 민한당유치송 후보를 누르고 제12대 대통령(7년 임기에 단임)에 당선되었다. 이후 노태우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임명하여 민정당의 당권을 대리하게 하였다. 4월 13일 전임 대통령 최규하 등 전직 삼부요인과 각계 원로 25명을 국정자문위원으로 위촉, 국정자문회의를 발족시켰다. 국정자문회의 치사에서 "정의로운 민주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국민참여의 깃발이 높이 게양되었다. 국정자문회의는 이러한 국민 총 참여와 화합을 촉진하는 표상"이라 했다.

12대 대통령 취임 후에 그는 박정희 정권을 전면 부정하였다. 박정희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그는 헌법에서 소위 “5·16 혁명정신”에 관련된 사항을 삭제하였다.[17] 또한, 박정희 정권에서 시행한 통행금지령을 폐지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폐지함과 동시에 7년 단임제를 주장하기도 했다. 하나회 계열에 부정적인 민주공화당유신정우회 실세들을 권력형 부조리 혐의로 엮어서 제거하고, 박정희의 시대를 부정과 부패, 부조리의 시대로 규정하고, 자신들은 정의사회 구현을 추구한다고 선언하였다.[17] 또한, 대통령 연임제를 철폐하고 임기 7년의 대통령 단임제를 시행하였다. 집권 후 정책의 주요 강령으로 정의사회구현, 복지사회건설을 구호로 내걸었으며, 재임기간 물가안정, 범죄 소탕, 경제 성장, 88 서울 올림픽 개최 준비 성공, 무역흑자 달성 등을 이룩하였다.[출처 필요] 그러나, 다수의 국민과 민주화 운동가들에 의해 군부독재자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집권 과정에서 행한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와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유혈 진압으로 후에 제6공화국 때의 5공 청문회1993년 김영삼 집권 후 문민정권에서 사법심판을 받게 된다. 그로 인해, 한동안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상실하기도 했었다.

1981년 6월 아내 이순자를 대동하고 동남아시아 5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 등을 순방하고 귀국하였다.

5·18 이후 야당 지도자인 김영삼·김대중 등을 가택연금하였는데, 김영삼은 1983년 5월 18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3주기를 맞이하여 전두환 정권의 야당인사 탄압에 저항하는 의미에서 23일간 단식투쟁을 시도하기도 하였다.[18] 1981년 3월 26일 민주정의당 소속 지역구 국회의원 당선자들에게 직접 축전을 보내기도 했다.

[편집] 핵개발 포기

전두환은 취임 초 핵실험 및 개발을 포기하였다. 1982년~1983년 플루토늄을 이용한 핵 개발 계획을 극비리에 추진하였고, 이는 일본미국 측 언론에 입수되어 보도되었다. 일본 아사히 신문의 보도로는 레이건 정부는 그런 정보를 입수해 계획 중지를 요구했으며, 전두환은 1983년 11월 한국을 방문한 레이건 미국 대통령에게 핵개발 계획 중지를 약속하게 되었다.[19][20][21][22][23] 2004년 9월 8일 미국의 AP통신도 미국 고위관리의 증언을 인용하여 비슷한 보도를 하였다.[22][23] 핵개발을 계속 추진해나갔던 박정희 정권에 비교하여 1979년 12.12 군사 정변 이후 집권하여 정당성이 미비하고 집권기틀이 부족하였던 전두환은 미국의 지원과 정권의 정당성을 승인받으려고 핵개발 포기를 선택하게 되었다.[24][25] 또한, 박정희(朴正熙) 정권 말기에 악화하었던 미국과의 관계 회복과 레이건 미국 대통령 행정부의 박정희 집권 시절의 핵개발 계획에 매우 부정적이었던 측면도 작용하였다.[26] 또한, 정통성 부재를 만회하기 위해 레이건행정부의 지지를 받을 필요도 있었다.[26] 1980년 12월 19일 전두환은 박정희가 핵개발을 주도했던 원자력연구소를 한국핵연료개발공단과 갑자기 통폐합시킨 뒤 명칭에서 ‘원자력’이라는 말을 빼버리고 ‘에너지 연구소’라는 이름으로 변경시키기도 했다.[27] 전두환은 핵을 포기하였고.[22][23] 1983년 11월 당시 재처리 작업을 통해 추출했던 플루토늄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제출되었다.[20]

[편집] 정치적 활동

1980년 9월 1일 부로 전두환은 연좌제를 폐지시켰다. 이는 전두환의 측근 인사들 중에 공산주의자 전력을 가진 부형이 있는 인사들 때문이었다 한다. 동시에 10월 유신 체제 이후 나타난 통행금지령을 해제하여 박정희 정권과의 차별성을 보이려고 했다. 써머타임제를 적용하여 1시간씩 늦추기도 했다. 또한 해외 순방 전후해서 환영인파를 대신해서 여학생을 동원하지 말라 하여 학생 환영인파 동원을 폐지시켰다.

1980년 9월 연좌제를 폐지하였다고 한다.[출처 필요] 1981년 보호·감호소 설치를 제정하기도 했다. 상습범은 형기 종료 후에도 즉각적인 사회복귀를 막아야 한다는 논리로 보호감호제도를 시행, 시행하고 같은 해 강원도 춘천시 춘천교도소에 보호감호시설을 설치했다. 춘천교도소 보호감호소는 뒤에 1983년 2월 12일 경상북도 청송군으로 이전하였다.[28] 1982년 10월 26일 강원도의 이승복기념관 준공식에 참석하였다.

이날 준공식에서 전두환은 "총칼 앞에서 어린 학생이 자기 심정을 이야기했다는 것은 얼마나 용기 있는 일이냐."고 이승복의 용기를 칭송하며, "이승복기념관의 준공을 계기로 어린이들 뿐만이 아니라 전 국민에게까지 이승복 군의 반공정신이 파급되어 우리 2세들에게 국민정신교육과 반공교육의 일대 전기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29]

1983년 3월 22일 민정당 전국 시도 전당대회에 참석하였다. 민정당의 행사에는 꾸준히 참여하였으나 당권은 사실상 노태우에게 위임하여 운영하였다.

1984년 가을 한국 경제가 모라토리움 선언 직전의 상태까지 가자 전두환은 일본을 방문 60억 달러의 융자를 요청하였다.[30] 일본은 논란 속에 60억 달러의 지원을 결정하여 원조를 받아왔다.[30] 1984년 11월에는 덴마크의 국무총리, 기니비사우 대통령과 코스타리카 대통령의 방한을 연이어 받았다.

[편집]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 사건
이 부분의 본문은 아웅산묘역 폭탄테러사건입니다.

1983년 10월에는 동남아 순방을 다녀왔다. 10월 9일, 동남아시아 국가 순방 기간에 순방국 하나인 버마(미얀마)에서 아웅산묘소 참배 도중 북한에서 보낸 공작원들에 의한 폭탄테러사건이 발생하였다. 1진으로 도착하여 예행연습 중이던 이범석, 심상우, 함병춘 등 80명의 외교관과 취재진 및 현지안내인이 피폭으로 즉사하였다. 현지 한국인들을 방문하고 뒤늦게 2진으로 방문한 그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때 북한이 파견한 특수요원 중 검거된 상위 신기철은 현장에서 사살되었고 체포된 소좌 진모는 사형에 처했다. 상위 강민철은 범행사실을 자백하고 수사에 협조하여 종신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가 2008년 5월 21일 사망했다.[31]

[편집] 교육·문화분야

국민의 민주화 염원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하면서 싸늘해진 민심을 달래고, 국민의 정치적 욕구를 돌리려고 이른바 3S(Sex, Screen, Sports) 정책을 실시하였다.[출처 필요] 일본의 우익 거물 세지마 류조(이토추 상사 고문)의 제안을 받아들여 민심수습책의 일환으로 올림픽 유치에 전력을 다하였다. 계속하여 급조된 프로야구 프로축구 출범, 칼라 TV 방송 전격실시, 영화 및 드라마 성적 표현 검열완화, 교복자율화 등이 이어졌다. 1981년 국풍(國風)이라는 이름의 대규모 축제를 벌였으나 국민으로부터 외면을 당하기도 하였다.[32] 취임 직후 과외 등 모든 개인교습을 금지하고 단속을 하였다.[33] 80년대 초반 부터는 86 아세안 게임88 서울 올림픽의 국내 유치를 추진하였다.[34]

[편집] 호헌과 6.10 항쟁

1986년 11월 구주 4개국을 순방, 프랑스, 영국, 벨기에, 독일 등을 방문하고 귀국하였다.

1987년 4월 13일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국민의 개헌과 민주화 요구를 묵살하고 당시 현행 헌법에 따라 13대 대선 때도 12대 대선 때와 같은 방식으로 대통령을 선출하고 1988년 2월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특별담화인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이에 호헌철폐를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그 해 경찰의 피고인 성추문 사건인 문귀동 성추문 사건과 그해 10월 발생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등과 맞물려서 6월 10일에는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을 시발점으로 반정부적 성격의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시국 수습을 위해 1987년 6·29 선언이 발표되었고, 민주정의당의 대선 후보였던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단안을 발표하였고, 7월 9일 그는 이를 수용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7월 10일에는 민주정의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노태우에게 총재직을 넘겼다. 1987년 7월 10일 민주정의당 명예총재가 되었다.

전두환은 행정관과 외교관을 지낸 노신영을 후계자로 낙점하고 있었다. 제네바 대표부 대사로 있던 노신영1980년 외무부 장관으로 불러들였고, 1982년 안기부장, 1985년 국무총리에 임명했다.[35] 그 뒤 강원용의 지적대로 정치수업을 시켜서 후계자로 낙점하려 하였으나[35], 전두환의 주변 인사들, 특히 군 출신들이 ‘말도 안 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라며 반발하자 결국 전두환은 뜻을 거두고 말았다.[35] 이들은 전두환의 집권을 도운 신군부 계열로 이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새로운 쿠테타를 우려하게 되었다.

[편집] 퇴임 후

[편집] 퇴임 직후

1988년 2월 대통령직에서 퇴임한 그는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에 취임했다. 그는 이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들었으나 198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어 제5공화국의 청문회가 진행되었다. 여기서 광주민주화운동과 5공 비리문제로 책임추궁을 당하다가 1988년 11월 19일 약 1만 명의 학생들은 서울시내에서 전두환 구속을 위한 2차 궐기대회를 열었다.[36] 대통령 노태우는 전두환 국회 증언은 회피했지만 전두환의 형제들을 구속시켰다.[36]

11월 23일, 전두환은 언론에 대국민 사과와 함께 재산 헌납을 발표하고,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직과 민주정의당 명예총재직을 사퇴하고 11월 29일 민주정의당을 탈당하였다. 12월 이순자를 대동하고 강원도에 있는 백담사에 내려가 불경을 외우며 은둔생활을 하다가 1989년 일시적으로 국회청문회 증언대에 서기도 했다. 다시 백담사에 돌아간 뒤, 1990년 12월 30일 하산하였다. 하산 후 전두환은 자신의 불경강해실력이 웬만한 승려 보다도 뛰어남을 자랑하기도 했다.

1993년 김영삼문민정부 출범 후, 전직 대통령 4천억 비자금 수수설이 유포되었다. 전두환은 산책을 하며 비자금 수수를 묻는 질문에 너털웃음과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1994년 총무처 장관과 서석재와 국회의원 박계동 등이 대통령 4천억 비자금 수뢰설을 주장하였으나, 전두환은 이 때에도 무대응으로 대응하다가 김영삼 정권의 내사로 비자금 수수가 밝혀지면서 1995년에는 12·12 사태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및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로 노태우와 함께 기소되었다. 이후 법정에서 전두환은 최종적으로 반란수괴죄가 적용되어 법정최고형인 사형 선고가 되었으나, 1997년 12월 22일 동서 지역화합 차원에서 사면되어 1998년 복권, 현재에 이르고 있다.

[편집] 1990년대 이후

전·노 두 전직 대통령 법적심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전두환과 이순자

1995년 11월 16일 후임 대통령인 노태우의 수감을 계기로 12·12 군사 반란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에 대한 국민적인 요구가 거세어졌으며, 당시 대통령 김영삼도 5·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하고, 소급입법을 적용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선언하였다. 헌법재판소의 합헌 결정이 내려지자 검찰은 재수사에 착수, 12월 3일 전두환과 관련자 16명을 내란 및 반란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하였다. 동시에 제5공화국의 비리에 대한 수사도 진행되었다.

공판은 1996년 3월부터 진행이 되었는데, 8월 26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사형을, 1996. 12. 16. 서울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 원을(96노1892) 각 선고받았으며, 1997년 4월 17일대법원에서 확정되었다. 당시 대법원은 전두환 등이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판결하였다.[37]

형 확정 이후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97년 12월 22일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지역감정 해소 및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한 대통령 특별사면에 의해 풀려났다. 그러나 추징금은 사면대상에 포함되지 않았고, 재산은닉, 비자금 조성혐의로 2,205억 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아 532억 원을 납부하였다. 그 뒤 자신의 통장에는 29만 원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추징금을 납부하지 않고 있어 약 1,673억 원이 환수되지 못하고 있다.[38] 그는 1995년에 제정된 5·18 특별법 등으로 법에 따라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진압한 공로로 받은 훈장 등을 박탈당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훈장 9개를 반납하지 않았다.[출처 필요]1995년 12월 4일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였다. 이때 그는 1989년 12월 15일 노태우김영삼·김종필·김대중의 영수회담에 동의하여 5공 청산의 정치적 종결을 위해 법정에 섰음을 강조하였고 자신을 5·18 특별법 등으로 구속한 김영삼 역시 군부세력과 연합하였으니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9] 이어 '좌파운동권은 이승만 대통령 이후 역대 정권을 부정하였는데 김영삼 정부는 이승만 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3~6공화국을 내란에 의한 범죄집단으로 규정한다'고 비판하였고[39] '이후 발생하는 수사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것'과 '12·12 등 모든 사건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지며 제5공화국 인사들에 대한 정치 보복행위를 중단할 것'을 촉구하였다.[39]

1999년 전국체육대회 때 하키 결승이 열린 성남운동장을 방문, 관계자들을 격려하고 우승 팀에 저녁식사를 대접했다.[40] 2000년 호주 시드니올림픽에서 너무나 값진 은메달을 획득한 남자하키 선수들을 서울 연희동 자택으로 초청, 다과를 베풀기도 하였다.[40]

[편집] 정치, 사회적 활동

1994년 이후부터 전두환은 5공 신당 결성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12·12 사건과 5·18 관련 재판으로 신당 창당 추진 계획은 무산당하고 말았다. 1998년 이후에도 계속 신당 창당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2002년 안중근의사 여순순국유적 성역화 사업추진위원회 고문을 지냈다. 2008년 2월 25일 제17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여 제17대 대통령 이명박에게 이 대통령이 국민이 바라는 염원을 잘 파악해서 국정을 잘 이끌어갈 것을 기대하고 또 그렇게 해주리라 믿는다며 독려하였다.[41] 2008년 7월 22일 인사차 방문한 한나라당 대표 박희태 등 정치인들의 예방을 받고 회견하였다. 회견 중 전 세계적으로 경제가 어려워지자 곡물을 하루에 두 끼 먹기 운동을 제안하기도 했다.[38][42][43] 촛불 정국 등으로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난 여론이 형성되자 이 대통령이 취임 후 6개월도 되지 않았음을 들어 군에서도 불문율로 연대장 이상이 되면 100일은 봐주는 고사를 들어 대통령은 상당히 오래 봐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이명박을 변호하기도 하였다.[38][42][43] 정치권은 코미디 같은 제안이라 하였고,[38] 그날 오후 진보신당은 논평을 내고 전두환의 제안을 헛된 개그라고 비판하였다.[44]

그는 1995년에 제정된 5.18 특별법 등으로 법에 따라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진압한 공로로 받은 훈장 등을 박탈당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훈장 9개를 반납하지 않은 상태이다.

[편집] 2000년대 이후

[편집] 국민의 정부 시절

2001년 11월 22일 15대 대통령 김대중(金大中)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 김대중 내외의 오찬에 참석하였다. 김대중은 유럽순방 결과를 설명한뒤 경제 경쟁력 강화, 민생 안정, 남북관계 개선 등 국정 과제 수행을 위해 매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전두환에게 협력을 요청하였다.[45] 2002년 7월 1일 국군수도병원 종합체육관에서 열린 서해교전 희생자 합동영결식에 참석하였고, 유가족들을 찾아 조문하였다.[46]

2002년 제5공화국 당시 녹화사업에 청와대 고위간부 개입설과 전두환이 직접 지시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에 착수하였다. 이 녹화사업은 전두환의 지시와 녹화사업은 당시 보안사, 치안본부, 검찰, 안기부, 문교부, 대학 등이 총동원돼 조직적으로 이루어 진것으로 추정되었다.

2002년 2월 19일 대통령 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는 보안사령부(현 기무사) 대공처장(대령)이었던 최경조가 2001년 12월 “82년 청와대에서 보안사 간부들이 만찬을 할 때 전씨가 (입대한 운동권 학생들때문에 군내에 불온낙서등이 빈발하고 있다는 등의) 군내 상황을 듣고 있다가 ‘야, 최경조, 너 임마 뭐하는거야’라며 혼을 냈고, 그 말을 듣고 보안사가 정화를 시켜야겠다는 생각에서 교육계획(녹화사업)을 세웠다”고 진술했다고 밝혔다.[47] 최씨는 이어 “(대통령의) 대책을 수립하라는 이야기 속에 지시가 다 들어있는 것으로, 구상은 (내가) 직접 했다”면서 “입안 후 대통령에게 보고해 결재를 맡았다”고 말했다.[47]

2002년 7월 11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한상범은 전두환의 소환조사를 발표했고[48], 8월 10일 녹화사업 개입여부에 대한 소환조사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하였다.[49] 8월 28일 개그맨 이주일의 빈소를 방문하였다. 오후 5시 20분께 장세동 전 경호실장과 앞서 도착한박종환 전 축구국가대표 감독의 안내로 분향소에 도착, 간단한 묵념과 함께 헌화했다.[50] 이어 1호 접객실로 옮긴 자리에서 기자들에게 "이주일씨가 화장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나도 군대시절부터 화장하겠다는 생각을 해 왔다"며 "나도 죽으면 화장하겠다"고 즉석 화장 서약을 했다.[50]

9월 30일 강서하키장에서 열린 부산아시안게임 남자하키 A조 예선 한국-일본전에 아내 이순자, 측근 장세동 전 안기부장 등 20여명과 참관하여 한국 대표팀을 응원하고, 환호하는 관중들을 향해 인사하였다.[51] 경기가 끝난 후 한-일전에서 첫승을 거둔 대한민국 남자하키팀 국가대표 선수들을 면담, 격려하였다.[52]

10월 녹화사업 관련 전두환이 직접 지시를 내린 것으로 추정되는 문서가 발견되었고, 10월 11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한상범)는 기자회견을 갖고 "지난 82년 8월 육군참모총장이 국방부 장관에게 보낸 문서에 따르면 80년대 초 '녹화사업'이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것임을 드러내는 정황이 잘 나타나 있다"고 주장하며 관련문서를 처음 공개했다.[53][54] 80년대 초 운동권 대학생들을 강제징집해프락치로 활용한 의혹을 받고 있는 소위 '녹화사업'은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지시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지적됐다.[53]

[편집] 참여정부 시절

2006년 9월 26일 재산 상속에 대한 증여세가 80억원이 부과되자 그는 차남 전재용과 증여세 취소소송을 제기하였다.[55] 2007년 8월 29일 한나라당·이명박 등의 방문 시에는 자신이 대신 인질로 가는 편이 낫겠다는 발언을 했다. 아프가니스탄의 인질 납치극과 관련 자신은 이제 많이 살았다. 난 특수훈련도 받아서 인질 대신 아프가니스탄에서 생활하기도 낫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56][57][58] 이에 일부 네티즌들의 비판이 있었고,[58] 권영길은 전두환 덕분에 웃었다는 비평을 발표하기도 했다.[59]

2006년 [10월 22일]] 10대 대통령 최규하가 사망하자, 10월 23일 최규하의 빈소에 조문하였다.

[편집] MB정부 시절

2008년 2월 18대 대통령 이명박의 취임식에 초대되었다. 2008년 4월 17일 언론 인터뷰에서 "카메라 기자들이 내 사진은 꼭 비뚤어지게, 인상 나쁘게 찍는다", "젊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아직 감정이 안 좋다.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고..." 등의 농담을 하여 구설수에 올랐다.[60] 5월 10일 아나운서 윤현진의 결혼식에 참석하기도 했다.[61]

2009년 2월 18일에는 서울 명동 대성당에 마련된 김수환 추기경의 빈소를 찾았다가 구설수에 올랐다. 검은색 정장과 중절모 차림으로 경호원 10명을 대동하고, 김운회 주교의 안내를 받으며 시신이 안치된 유리관 쪽으로 갔고, 관 앞에서 합장하고 나서 그만 평소 자신의 습관대로 계속 뒷짐을 진 채 관을 주시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끝난 조문 시간은 채 2분이 걸리지 않았다. 조문을 마치고 대성당 밖으로 나오자 김 추기경과의 인연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 공세에 전두환은 “인연이 깊다.”라며 김 추기경과의 개인적인 친분에 대해 언급만 했을 뿐 신군부에 저항했던 김 추기경의 민주화 행보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자들이 그에게 “30년 악연이라는데…….”, “서운한 감정은 없느냐?”, “김 추기경과 악연인 것 아니냐?”라고 질문하자 “개인적으로 찾아오라.”라면서 일절 답을 하지 않았다.[62]

5월 23일 노무현이 투신, 사망했을 때 전두환은 전립선 수술을 이유로 빈소에 불참하였다.

5월 23일 오후 7시 10분쯤 경상남도 김해시 봉하마을 노무현의 빈소에 조화를 보냈으나, 전두환 전 대통령의 조화도 빈소로 들어가는 도중 노사모 회원들에게 짓밟혀 내동댕이쳐졌다.[63] 전두환은 노무현의 투신자살에 대해 '꿋꿋하게 버티지', 그렇게 가느냐. 조금만 더 버티지. 라고 했다.[64]

2009년 8월 14일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병문안했다.[65] 이희호 여사를 만나자마자 "얼마나 고생이 많으신가"라며 "자꾸 상태가 나빠지는 것 같아 휴가 중에 올라왔다"고 말했다. 이어 자신도 이 병원에서 완쾌한 바 있다면서 "의료진들이 워낙 저명한 분들이니 잘 하실 것"이라며 "틀림없이 완쾌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모시고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김 전 대통령 집권 당시 전직 대통령들이 가장 행복했었다면서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우회적으로 아쉬움을 표현했다.[66][67] 이때 그는 "김 전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10번 정도 청와대에 초대받아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듣고 도움도 많이 받았다"며 "외국 방문 후에는 꼭 전직 부부를 청와대에 초청해 방문 성과를 설명해주며 만찬 및 선물도 섭섭지 않게 해주셨다"고 말했다. 이어 "이명박 대통령이 그런 것을 잘 알아서 전직 대통령의 의견도 들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66] [68]

10월 19일 오전 11시경 부인 이순자 여사를 동반하고 전 안기부장 장세동, 전 감사원장 황영시, 전 국방장관 이기백 등 일행을 대동하고 함께 관광버스편으로 평화의 댐 관리사무소에 도착, 김명림 수자원공사 강원지부장과 정갑철 화천군수, 오정석 육군 제2군단장 등의 영접을 받고 환담을 하였다. 이후 평화의 종을 타종하는데 참석하고 댐 주위를 둘러보았다.

2010년 1월 18일 대통령 이명박으로부터 생일축하난을 받았다.[69]

[편집] 외교 관계

반공의 기치 아래 한·미·일 삼각동맹을 추진하였다.[70]

[편집] 대미 관계

미국의 압력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개발한 핵을 폐기하였다는 견해가 있으나 확인된 것은 없다. 레이건 정부는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계엄령 발동에 대해서 견제하는 태도를 유지해왔다.[70] 이후 외교적으로는 친미(親美) 일변도의 정책을 추진하였고, 이는 학생들의 반미주의 운동을 조장한 측면도 있다.

[편집] 대일 관계

그는 대통령 재임 중, 한국의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에도 국권피탈의 책임이 일부 있었다고 인정해 당시 일본 언론에서도 크게 보도되었다.

1981년 8월 15일에 있었던 광복절 기념식의 연설에서 그는 “우리는 나라를 잃은 민족의 치욕을 둘러싸고 일본의 제국주의를 꾸짖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당시의 정세, 국내적인 단결, 국력의 약함 등 자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하였다.

또 이듬해의 광복절 기념식전에서도, 일본 정부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에 의해 일본인에 대한 택시 승차거부가 일어나는 등 반일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던 때, 강경적인 자세를 보이면서도 “이민족 지배의 고통과 모욕을 다시 경험하지 않기 위한 확실한 보장은, 우리를 지배한 나라보다 살기 좋은 나라, 보다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내는 길밖에 없다.”라고 하여 맹목적 ‘반일’보다는 실력을 형성한 ‘극일’주의를 강조했다.

[편집] 대북 관계

재직기간 중 기본적으로 반공주의적 정책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1982년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을 발표하였지만, 이러한 통일정책은 북한의 계속된 거부로 말미암아 실질적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출처 필요] 전두환 체제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주체사상파 역시 전두환 정권의 대북정책을 경직시키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편집] 기타 대외 관계

아프리카대륙 각국 순방, 아시아 6개국 순방 등을 다녔다. 1983년 아시아 6개국 순방 중 버마의 랭구운 아웅산 국립묘지에서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 사건을 당하여 순방일정을 취소하고 되돌아오기도 했다.

[편집] 기타

닮은 연예인(박용식, 이주일)들에 대한 탄압도 간혹 회자되곤 한다. 또한 제5공화국 기간 중에는 대머리, 주걱턱 등은 영화계나 드라마 계에서 금칙어가 되었다.

2002년 2월 이주일의 빈소에서는 개인적인 친분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주일씨가 아들이 사망한 뒤 박종환 감독과 함께 우리 집에찾아와 함께 술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50] 2008년 4월 팬클럽인 전사모에 의해 전두환 기념관이 설립되려다가[71] 무산되기도 했다.

[편집] 유행어

  • 1980년 이후 9시 뉴스의 첫 기사로 전두환 대통령의 일정이 보도되어, 땡전 뉴스라는 유행어가 파생되기도 하였다.
  • 1995년 재판정에서 '왜 나만 갖고 그래' 라고 푸념한 것이 화제가 되어 한동안 유행하였다.
  • 2003년 4월 28일 법정 회견에서 ‘29만 원 밖에 없다’고 하여 이 발언이 한동안 유행하였다.[72][73][74] 한편 2004년 11월 서울 서부지검 형사5부는 29일 전두환 전 대통령 명의의 추가 부동산 존재사실이 새롭게 밝혀진 것과 관련, 전씨가 허위로 재산명시를 함으로써 민사집행법 위반여부를 검토했고[75], 일류국가시민운동본부 등 시민단체들은 2005년 7월 전두환을 법정 허위 진술죄로 검찰에 고발하였다가[76] 허위사실 명시 무혐의 처리 되었다.[77][78]
  • 2008년 4월의 선거 투표 후 인터뷰에서 그는 "우리나라도 대단히 좋은 나라가 됐다.”며 “누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더라도 헌법을 개정해서 장기집권하겠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그렇게 나오는 사람은 '간덩이'가 큰 사람"이라고 말했다.[79] 또한 "기자들이 내 사진은 꼭 삐뚜러지게 찍는단 말이야. 인상 나쁘게... 젊은 사람들은 나에게 감정이 안좋은가 봐. 나한테 당해 보지도 않고..."라고 한 발언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79][80][81]

[편집] 일화

민족문화 장려정책에 따라 국풍 21을 주도하고, 독립기념관의 건립을 추진한다. 독립기념관 건립 후에는 김구의 차남 김신을 관장으로 선임했다. 박정희 집권 말기인 1977년부터 문교부를 출입하던 이유립 등의 역사가들을 계속 문교부 등에 초빙하여 공무원들을 상대로 국사강연을 실시했다. 한편 전두환은 고조되는 반일감정에 대해 극일(克日)정신을 주장하며 실력으로 일본을 이길 것을 강조하였다.

대통령 후보 시절 7년단임제를 주장하였는데, 재선 이후 1987년 7년 단임제를 이행하고 퇴진하였다. 재출마를 시도하려 했다는 주장과 재출마를 단념하고 노태우를 차기 주자로 결정하였다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한편 전두환은 후임자는 문민통치자여야 된다며 1984년 경 경제관료 출신 노재봉 등을 후계자로 낙점, 정치수업을 하려다가 신군부하나회 출신 군부 인사들의 반발로 취소하고 노태우를 선택하게 된 것이라 한다. 그가 후계자로 잠정 낙점했던 인물은 노재봉, 노태우, 정호용 등이었다.

한편 전두환은 2009년 8월 14일 김대중의 병문안 중 기자회견에서 '김대중 대통령 때 가장 행복했다'고 발언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82][83][84]

[편집] 땡전뉴스

1980년 이후 각 방송사의 오후 9시 뉴스에는 시작부터 전두환 내외의 소식이나 전두환 내외 관련 행사를 가장 먼저 보도하였다. 그리하여 일부 지식인들은 이를 땡전 뉴스라 풍자하기도 했다. 9시 정각이 되면 전두환 내외의 소식이나 전두환 내외 관련 행사를 가장 먼저 보도한 것을 비꼬아 풍자한 것이다.

[편집] 평가

전두환에 대한 평가는 현재 극과 극이며 그의 평가는 대한민국의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를 가르는 척도 중의 하나로 통용되기도 한다. 광주 학살자 라는 혹평에서부터 구국의 영웅이라는 평가가 존재한다. 하지만, 전두환에 대한 시각이 보수주의 내부에서도 전혀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보수주의 일각에서도 전두환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으로 평가하는 세력이 상당수 존재한다. 그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이해당사자들의 사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타고난 유들유들함과 비위로 위관급 장교 시절부터 철저한 ‘정치군인’의 면모를 드러냈다는 평이 있다.[출처 필요] 이후 청와대 경호실 근무 경험으로 ‘정치군인’으로서 갖춰야 할 모든 자질을 다 갖추게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85]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정변 시 지지하는 데모를 하였으나 호응은 없었다. 이때부터 정치적 두각을 나타냈으며 하나회 윤필용 필화사건으로 축출되었으나 운 좋게 위기를 모면하고 다시 보안사령관으로 복귀했다. 정승화도 전두환이 정치적 야망을 갖춘 인물이라고 평가하였고,[86] 전두환은 이후 대통령 박정희와의 잦은 교제를 통해 권모술수의 능력을 길러온 것으로 알려졌다.[87] 그의 붙임성에 대해서는 자신도 인정하고 있다.[88] 그런가 하면 이희호는 “전 대통령의 유명한 숫기와 입담을 나중에야 알았다. 사형을 시키려 했던 ‘수괴’의 안사람을 상대로 동네 복덕방 아저씨가 아주머니 대하듯 일상적으로 대했다.”고 밝히기도 했다.[89] 범죄소탕과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진행하는 성과를 이룩했다는 일부의 견해도 존재하고 있다.

[편집] 긍정적 평가

1979년 박정희피살 후 경제회생 노력을 기울인 점과 1986년 아시안 게임(1981년 11월 26일), 1988년 하계 올림픽(1981년 9월 30일)을 성공적으로 유치한 점 등이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2009년 9월 납북자가족모임과 라이트코리아 등 보수단체회원들은 서울 세종로 통일부 앞에서 시위를 하며 임진강 참사 사고 이후 전두환이 북한의 수공계획을 미리 간파하고 평화의 댐을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90]

대한민국을 풍전등화에서 건져올려 역대 최고의 흑자율과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는 주장도 있다.[91] 한편 법정 진술시 은닉재산 29만원 설에 대한 비판에 대해 29만원 이외의 재산이 더 있다는 증거를 밝혀내고 나서 당당히 비난해야 옳다며 전두환을 비하한다고 일부시민들의 명예가 회복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반박이 제기되기도 했다.[91]

전두환 지지모임인 전사모는 전두환을 구국의 영웅으로 보기도 한다.[92][93][94] 전사모는 "각하의 위대한 업적이나 사소한 국민들에게 100% 알리지 않고 소수에게 이득이 되는 사실만 100% 진실인양 떠들어대며 국민들을 우롱하고 대한민국 역사상에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위대한 영웅 전두환 전 대통령 각하를 음해하고 있다"며 그의 명예회복을 주장하고 있다.[95][96] 한편 전두환의 아호를 딴 일해공원의 건립을 놓고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97] 프로리그를 만들기도 하였다.

[편집] 부정적 평가

  • 1979년12.12 군사 반란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유혈 진압하는 등의 행위를 주도한 것이 대표적인 비판의 근거이다. 인권적인 측면에서는 국가안전기획부, 경찰청 대공분실, 보안과 등을 통해 김근태, 박종철 등의 반체제 인사와 학생운동가 등을 고문하는등 인권 유린을 자행하며 민주주의를 탄압했다는 비판이 있다.
  • 천문학적인 뇌물등의 혐의로 유죄를 받고 법적인 환수조치를 당하였으나 당당히 29만원 밖에 재산이 없다고 밝혀 국민적인 실소를 자아내기도 하였다. 1997년 검찰은 전두환에 대한 확정 판결 이후 추징금 납부시효를 세 번이나 연장해 가며 비자금을 추적해 왔으나 2,205억원 중 532억원(24%)을 징수하였으며 성과는 그리 크지 않은게 현실이다. 아직까지 환수조치는 계속되고 있다.[98][99][100] 한편 전두환의 차남인 전재용은 이태원에 위치한 100평 규모의 시가 30억 원대 초호화 빌라로 이사한 사실이 밝혀졌다.
  • 전두환 일가가 약 1700만 달러 이상의 비자금을 조성,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와인 생산 농장(와이너리)을 운영하고 있다는 의혹이 재미동포 안치용(42)의 블로그 '시크릿 오브 코리아' 를 통해 이 같은 의혹을 제기했다. 안씨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삼남 재만씨가 장인인 이희상 운산그룹 회장과 함께 캘리포니아주 나파밸리에서 시가 1천억 원대의 와이너리(와인 생산 농장)을 운영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며 "이들이 와이너리와 포도밭을 구입할 당시 정체불명의 괴자금이 적어도 1700만 달러(한화 197억 원)이상이 투입된 것으로 보여 전두환 비자금이 아니냐는 의혹이 일고 있다"고 주장했다.[101]
  • 연평균 지가상승률이 이승만 21.6% 박정희 33.1% 전두환 14.9% 노태우 17.7% 김영삼 -1.2% 김대중 -0.6% 노무현 4.5%에다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때는 생산소득에 대한 불로소득 비율이 거의 미미한데 비해 이승만 때에 43%, 전두환은 67.9% 노태우는 거의 100% 박정희는 무려 248.8%에 달했으며 부동산 시장의 불안정을 보이고 있다. 이는 경제의 기강이 무너졌다는 것과 동시에 제5공화국 시절의 경제 치적은 실제로 경제가 좋은 것이 아니라 부동산 거품경제로 인한 착시현상이라는 견해도 있다. [102]
  • 2006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삼청교육대의 실상에 대한 몇 가지 결과를 발표하였다. 1980년에 신군부에 의해 설치된 삼청교육대는 정부에 의한 조직적인 폭력 및 인권유린 사례로, 당시 강제 입소되어 숨진 사람 가운데 일부의 사인이 조작·은폐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조사됐다는 의혹도 있다. 강제 입소자 중에는 학생이 980명에 달했으며 이 중 17명은 중학생이었고, 질병사한 54명 중 최소 4명은 폭행 등으로 숨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103][104]
  • 1988년 3월 새마을본부 중앙회장이었던 동생 전경환은 공금 76억여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구속됐으며 골프장 허가를 미끼로 거액을 챙긴 사촌동생 전순환과 노량진 수산시장 영업권 불법인수와 관련된 친형 전기환, 그리고 공금을 횡령한 처남 이창석 등이 전두환의 재임기간 중 저질러진 친인척의 비리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105]
  • 전두환 정권은 3S 정책을 실시했다. 섹스(Sex), 스크린(Screen), 스포츠(Sports)의 머릿글자를 딴 것으로 독재정권이 국민의 정치적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즐겨 쓴다는 정책이다. 올림픽 유치를 지시 한 이유, GNP 2천 달러도 안 되는 개발도상국에서 프로야구를 출범시킨 배경이 있다. 이에 대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치밀하게 기획됐다는 비판이 있다.[106]
  • 국회의원을 지낸 박찬종은 전두환에게 국정파탄의 책임이 있다고 비판하고, 이순신 장군의 동상 앞에 석고대죄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107]

[편집]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책임 의혹

2007년 7월 24일 대한민국 국방부의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서울특별시 태평로에 소재한 프레스센터에서 12ㆍ12 군사반란 및 5ㆍ17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 5ㆍ18 민주화운동 유혈진압사건에 대한 조사결과 보고서를 발표했다.[108][109]

과거사위에 따르면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이 군 수뇌부 회의에서 자위권 발동을 주장한 사실이 보안사(기무사의 전신)에 보존된 2군사령부 작성 ‘광주권 충정작전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에 들어 있다. 과거사위가 보안사(현 기무사)에서 찾아낸 2군사령부 작성 수기(手記)문서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주영복 국방장관, 이희성 육군참모총장, 진종채 2군사령관, 노태우 수도경비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 차규헌 육사 교장 등이 참석한 군 수뇌부회의에서 자위권 발동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문서에는 '전(全) 각하(閣下:전두환):초병에 대해 난동시에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라고 명기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자위권 발동을 주장했음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시위대에 발포를 명령한 사람은 관련 문서가 남아있지 않고 전두환 등 관련자들이 진술을 기피, 물증이 없다는 이유로 실체 규명에 실패했다고 밝혔다.[110]

[편집] 의혹

[편집] 비자금 조성 의혹

1994년 당시 총무처 장관인 서석재에 의해 전직 대통령 비자금 의혹이 제기되었다. 서석재의 전직 대통령 비자금 발언 파문 초기에 전두환은 새벽에 약수터를 오르며 웃음과 무응답으로 서석재의 발언을 일축했다. 그러나 1995년 민자당 국회의원 박계동국회 청문회에서 전두환 4천억, 노태우 4천억 비자금 조성을 폭로하자 전두환은 강하게 부인하였다.

수사 결과 전두환과 노태우는 5천억 원 이상의 비자금을 수뢰한 것으로 확인되었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관련 문제와 12·12 군사 정변 주동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뒤 사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그러나 1997년 12월말 지역감정 해소를 목적으로 대통령 김대중의 주선으로 사형 형집행은 면죄되고 곧 풀려났다. 풀려난 후 복권되었다.

김대중 대통령 재직 중, 1980년 자신에게 내란음모로 사형을 구형했던 전두환과 노태우를 청와대에 초청하기도 했으며[111] 후에 전두환은 [[김대중]이 대통령에 있었을 때, 자신이 가장 편안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두환의 추가 비자금 조성 의혹이 드러나면서 수사가 재개되었고, 전두환은 인터뷰에서 자신의 전 재산은 29만원이라고 하여 회자화되기도 했다. 2009년 현재 전두환의 미추징 비자금은 정확히 얼마인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편집]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논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느냐에 대한 논란이 있다. 전두환이나 전두환이 이끌던 신군부 세력에 의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명령이 내려진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는 전두환 광주 학살자설, 광주 학살의 배후로 지목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일부 우익보수세력 및 전두환의 팬클럽인 전사모나 네티즌 역사학도, 지만원 등의 주장에 의하면 당시 그는 군 지휘체계가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당시 대한민국 국군의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최규하 였고, 국무총리신현확이었으며, 국방부 장관주영복, 육군참모총장육군중장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31향토사단장 육군소장 정웅으로서 전두환이 진압의 지휘체계나 명령선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편집] 지역감정 조장 의혹

대한민국의 지역 감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일부에서는 광주학살로 전두환 정부가 조장했다는 설도 있다. 민주진영에서는 민주정의당 집권세력의 농간이라고 반박한다. 1992년 초원복집사건으로 여당이 초래했다는것이다. 그러나 김영삼지역감정의 원인은 김대중이 제공했다고 주장한다.[112]

[편집] 종교

대통령 기간에는 천주교 신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대통령직이후에 정치적인 이유로 백담사에 들어갔다. 1989년 백담사 은둔 1주년을 맞아 부처님 진신사리 친견 및 봉헌법회에서 불경을 외우기도 했다. [113] 이때, 전두환은 1988년 11월 23일 오후 3시 20분, 안현태 전 경호실장 등 수행원과 백담사에 도착. 그 후 25개월 동안 전두환은 백담사에 머무르며, 백담사 생활을 한 지 1년 후 전두환은 찾아온 신도들과 대화하면서 " 몇 사람 손봐주고 싶었던 마음을 극복했다"고 불교신앙고백을 했다고 한다. 또 주지에게 "모든 일이 내게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니 남을 탓하거나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백담사에 와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됐으니 나는 복있는 사람이죠"라고 말했다고도 한다. [113]

그러나,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 취임식을 했던 1980년 9월 10일 직후인 10월 27일에 10·27 법난[114]을 일으키며 집 권 신군부 세력이 불교계를 탄압한 일이 있는데, 그 사건을 일으킨 동기는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신군부를 반대했던 조계종 총무원장 월주가 전두환 지지 성명에 반대하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현장을 방문하여 성금을 전달하는 등 신군부에 밉보인 것이 원인이라는 해석이 있다. [115] 천주교와 개신교를 탄압하지 않고 불교만 탄압하였다.

[편집] 상훈

[편집] 서훈 취소

2006년 국무회의에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등 3년이상 형을 선고받은 176명의 서훈을 취소하고, 훈장 등을 환수키로 의결하였다.[116] 그러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비롯해서 서훈 취소 대상자 절반 가까이가 훈장 반환 요구에 대해 반환 기한인 30일까지 반환은커녕 사유서조차 내지 않고 있다. 이에 행자부 관계자는 “서훈 취소자의 경우 훈장 기록부 명단에서 이름을 삭제하고 이 사실을 관보 등을 통해 발표하는 것만으로도 훈장에 따른 영예가 모두 상실됐다고 볼 수 있다”며 “반환 의무 규정을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117]

[편집] 가족 관계

그의 재임시절 형 전기환노량진 수산시장을 인수하고, 동생 전경환새마을운동 중앙본부 회장을 지내며 이권을 챙기는 등 비리를 일으켜 퇴임 후 물의가 되었다.

부인 이순자의 사이에 재국, 재용, 재만 세 아들과 딸 효선을 두었다. 첫째 재국은 시공사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부계
 
 
 
 
전상우
(全相禹)
 ?~1967
 
김점문
(金點文)
 ?~1974
 
 
 
 
 
 
 
 
 
 
 
 
 
 
 
 
 
 
 
 
 
 
 
 
 
 
 
 
 
 
 
 
 
 
 
 
 
 
 
 
 
 
 
 
 
 
 
 
 
 
 
 
 
 
 
 
 
 
전열환
 
전규곤
 
전기환
 
 
 
전두환
(全斗煥)
1931~
 
이순자
(李順子)
1939~
 
 
전경환
(全敬煥)
1942~
 
 
 
 
 
 
 
 
 
 
 
 
 
 
 
 
 
 
 
 
 
 
 
 
 
 
 
 
 
 
 
 
 
 
 
 
 
 
 
 
 
 
 
 
 
 
 
 
 
 
 
 
 
 
전재국
(全宰國)
1959~
 
 
전재용
(全在庸)
1964~
 
 
 
박상아

1972~
 
 
전재만
 
 
 
전효선
 
 
 


  • 처계
 
 
 
 
 
 
 
 
이규동
 
 
 
 
 
 
 
 
 
 
 
 
 
 
 
 
 
 
 
 
 
 
 
 
 
 
 
 
 
 
 
 
 
 
 
 
 
 
 
 
 
 
 
 
 
 
 
 
 
 
 
 
 
 
 
 
 
이순자
(李順子)
1939~
 
전두환
(全斗煥)
1931~
 
이신자
1942~
 
홍순두
 
이정순
 
김상구
 
이창석
 
 
 
 
 
 
 
 
 
 
 
 
 
 
 
 
 
 
 
 
 
 
 
 
 
 
 
 
 
 
 
 
 
 
 
 
 
 
 
 
 
 
전재국
(全宰國)
1959~
 
전재용
(全在庸)
1964~
 
박상아

1972~
 
전재만
 
전효선
 


  • 조부 : 전영수(全永洙, 1867년 ~ 1936년)[118]
  • 부 : 전상우(全相禹, ? ~ 1967년)
  • 모 : 김점문(金點文, ? ~ 1978년)[118]
    • 형 : 전열환, 어려서 사망
    • 형 : 전규곤, 어려서 사망[119]
    • 형 : 전기환(全基煥, 경찰 출신으로[120] 1988년 서울지방검찰청 특수부 검사 홍준표에 의해 비리 혐의로 구속되었다.[121])
    • 동생 : 전석환, 어려서 사망
    • 동생 : 전경환(全敬煥, 1942년 ~)
    • 누나 : 전홍렬(全鴻烈, 1918 ~ ?)
    • 누나 : 전명렬(全命烈, 1922 ~ )
    • 누나 : 전선학(全善學, 1928 ~ )
    • 여동생 : 전점학(全點學, 1935년 ~ )

[편집] 관련 인물

[편집] 문화에 나타난 전두환

[편집] 문학

  • 백무현, 《만화 전두환》, 전두환에 대한 비판적인 소설 겸 만화
  • 《황강(黃江)에서 북악(北岳)까지》, 전두환 전기

[편집] 전두환을 연기한 배우들

[편집] 드라마

[편집] 영화

[편집] 같이 읽기

[편집] 참고자료

  • 천금성, 《황강(黃江)에서 북악(北岳)까지》- 전두환 일대기
  • 이장규,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전두환시대 경제비사) (올림, 2008)
  • 서상원, 정부패러다임적 정책결정과정 분석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부의 비교) (한국학술정보, 2007)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80년대편 1 (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80년대편 2 (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80년대편 3 (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90년대편 1 (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90년대편 2 (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2006)
  • 80년대 경제개혁과 김재익 수석 (남덕우 외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6)
  • 박상하, 그때 그 사람들 (전두환의 제5공화국) (박상하, 학영사, 2005)
  • 역사의 언덕에서 4 (미완성의 민주화) (강원용, 한길사, 2003)
  • 한상범, 전두환체제의 나팔수들 (이철호 역, 패스앤패스, 2004)
  • 방경일, 전두환 리더십 노태우 처세술 (방경일, 너와나미디어, 2002)
  • 노신영 회고록 (노신영 저 , 고려서적 , 2000)
  • 윤치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윤치영, 삼성출판사, 1991)
  • 서진모, 전두환.이순자 부부에게 보낸편지 (서진모, 대웅출판사, 1988)
  • 박경우, 전두환 이순자 구속처벌투쟁 평가 (박경우, 세계출판사, 1989)
  • 고항민, 전두환왕국 (고항민, 청사출판사, 1988)
  • 이사달, 전두환 참회록 (이사달, 청음사, 1988)
  • 암파편집부, 전두환시대 1~6:제5공화국정치비사제2부(중원강좌 17) (암파편집부 저, 황인 역, 중원문화사, 1988)

[편집] 주석

  1. 오늘 속으로 全盧재판 - 한국일보 2004년 8월 26일자
  2. 그의 부친이 독립운동가라는 견해가 있으나 확인된 것은 없다.
  3. http://news.joins.com/article/3359391.html?ctg=1000
  4. 대통령의 아버지, 누구인가?…가난한 농사꾼에서 거제도 갑부까지 ① 중앙일보 2008년 10월 30일자 기사
  5. 갑종 장교 후보생에 지원
  6. http://news20.busan.com/news/newsController.jsp?subSectionId=1010090000&newsId=20090206000186
  7. 네이트 인물검색
  8. 그는 자신의 동기들 중 중령 진급은 늦었으나 대령 진급은 빠르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했다 한다.
  9.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48) - 조선닷컴 인물
  10. 한경비즈니스[대한민국 우주시대 ‘카운트다운’우주강국 코리아 ‘카운트다운’ ]
  11. 북한의 로켓발사 정국과 북미 관계의 함수 분석
  12. 동아일보, 1980.08.09일자 1면
  13. 동아일보, 1980.08.25일자, 1면
  14. 80년대 경제개혁과 김재익 수석 (남덕우 외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6) 189
  15. 80년대 경제개혁과 김재익 수석 (남덕우 외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6) 190
  16. 80년대 경제개혁과 김재익 수석 (남덕우 외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6) 190
  17. 전재호,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책세상, 2000) 112~113쪽.
  18. 김영삼 - Daum 백과사전
  19. 80년대초 국내서 플루토늄 추출 한겨레 2004.09.09
  20. "레이건이 전두환 핵무기개발 직접 저지" 프레시안 2004-09-10일자
  21. "83년 레이건이 핵개발 중지 요구" 경향신문
  22. 국내서 82년 플루토늄 극미량 추출 세계일보
  23. "한국, 82-83년 극비리 핵개발 추진" YTN 2004-09-09일자
  24.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까 주간한국 2004-09-23일자
  25. ‘제5공화국’ 전두환, 핵무기개발 포기 방영후 네티즌 비난 해럴드경제
  26. <전직 대통령 북핵실험 진단 `3인3색'> 연합뉴스 2006년 10월 10일자
  27. 북데일리
  28. 22년 만에 간판 내리는 청송감호소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29. 이승복기념관, 《이승복기념사업 25년사》 (이승복기념관, 1993) 91~123쪽
  30. 박정희 시대 경제의 명과 암 브레이크뉴스
  31. 맛있는 정보! 신선한 뉴스! - 서울신문
  32.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교과서포럼 저, 도서출판 기파랑, 2008.3.24) 237p
  33. ‘신정아 사건’ 1년, 가정교사 지낸 기자의 '그녀를 위한 변명' 신동아 매거진 2008.10.01 통권 589호
  34. 88서울 올림픽은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7,78년 무렵부터 유치를 추진했다는 견해도 있다.
  35. [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4/03/02/200403020500004/200403020500004_6.html (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④) 12·12 직후 만난 DJ, "군인들은 내게 충성할 것"] 신동아 2004년 03월(534호)
  36. 한국현대사(서중석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 337
  37. 대법원 1997. 4. 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38. 경제난에 ‘두 끼 먹자’ 일요서울 2008-07-31 기사
  39. 전두환 대국민성명 전문, 한국일보 1995년 12월 04일자, 8면
  40.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01&aid=0000247058
  41. YS "잘할 것으로 믿어" DJ "서민 살피길" 한국경제 2008-02-25 기사
  42. 전두환 “하루에 두 끼만 먹기 운동하자” 이색 제안 경향신문 2008년 07월 22일 기사
  43. “경제 어려운데 하루 두 끼 먹기 운동 어떤가” 문화일보 2008-07-22 기사
  44. [논평] 전두환 전 대통령의 헛개그를 고찰함 :: 네이버 뉴스
  45.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0121658
  46.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050526033435065&p=ohmynews
  47.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2021901010125034002
  48. http://www.donga.com/fbin/output?f=totalad&code=ad_&n=200207110161
  49.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2/08/005000000200208111858604.html
  50.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0228665
  5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01&aid=0000247058
  52.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01&aid=0000247161
  53.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1245307
  54.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90640
  55.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60213.html
  56. 전두환 "인질 석방 안 되면 내가 대신 인질 될까 고민" 조선일보 2007년 8월 29일자 기사
  57. 전두환, 이명박에 입심 과시 중앙일보 조선일보 2007년 8월 30일자 기사
  58. [인터넷 스타] ‘전두환 인질’ 발언 : 맛있는 뉴스 : 특집 : 한겨레21
  59. [권영길 후보 논평, 전두환 덕분에 웃겼다] 연합뉴스 2007년 08월 29일자
  60. 전 前대통령의 ‘으스스한’ 농담, 구설 올라 서울신문 2008-04-17
  61. http://sports.hankooki.com/lpage/entv/200805/sp2008051209453696010.htm
  62. [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71814 전두환, 고 김수환 추기경 '뒷짐 조문' 결례] 오마이뉴스 2009-02-18 기사
  63.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155654
  64. 노무현, 전태일, 예수 뉴스앤조이 2009년 06월 01일
  65.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soc&arcid=0921386783&cp=nv
  66. 전두환 전 대통령도 DJ 문병 "틀림없이 완쾌될 것"
  67.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soc&arcid=0921386783&cp=nv
  68.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soc&arcid=0921386783&cp=nv
  69.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369017
  70. 대통령 따라 출렁거린 한·미 관계 30년
  71.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82995
  72. 사이버공간은 전두환 패러디 글로 '들썩' :: 네이버 뉴스
  73. 전씨는 구호대상자 아닌가 :: 네이버 뉴스
  74.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32&aid=0000052713
  75.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0836590
  76. http://search.ytn.co.kr/ytn_2008/view.php?s_mcd=0103&key=200507021739006205&q=%26quot%3B%C0%FC%C0%E7%BB%EA+29%BE%EF%26quot%3B+%C0%FC%B5%CE%C8%AF+%BE%BE+%B0%CB%C2%FB%BF%A1+%B0%ED%B9%DF
  77.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9&aid=0000425289
  78.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18&aid=0000254152
  79.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80417500002
  80.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905818
  81. http://www.magazinet.co.kr/Articles/article_view.php?mm=004006000&article_id=48066
  82. 문병간 전두환씨 “DJ 대통령때 전직 가장 행복”- 한겨레
  83. 문병 온 전두환 “DJ 집권때 제일 행복” - 세계일보
  84. http://www.heraldbiz.com/SITE/data/html_dir/2009/08/14/200908140533.asp
  85. 강준만 (2003년 5월 12일). 〈제1장 왜 광주는 피를 흘려야했나?/ 1980년 - K공작〉,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1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서울: 인물과사상사, 50쪽. ISBN 89-88410-75-0
  86. 정승화(이경식 정리·대필) 《대한민국 군인 정승화》(휴먼앤북스, 2002) 404쪽. "목에 힘을 주고 패거리 우두머리 같은 기질을 보이며 행세하는 전두환 소장은 정신 자세부터가 정치적이었고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87. 강준만 (2003년 5월 12일). 〈제1장 왜 광주는 피를 흘려야했나?/ 1980년 - K공작〉,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1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서울: 인물과사상사, 49쪽. ISBN 89-88410-75-0
  88. 김성익, 《전두환 육성증언》(조선일보사, 1992) 346쪽. 박정희와의 관계에 대해 전두환은 1987년 4월 12일 청와대 본관식당에서 수석 비서관들과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어디 가 있어도 골치아픈 일이 있으면 나를 불렀어요. 군대 얘기도 물어보고 그랬어. 나는 항상 그 양반한테 희망적인 얘기를 많이 했어요. 1년에 한두 번씩은 부르셨어요. 이 식당, 여기에서 육여사와 함께, 분식 권장할 때인데 분식으로 식사도 했어. 육여사가 만든 거라고 했는데 별로 맛은 없지만 나는 식성이 좋으니 두 그릇 정도 먹었어요."
  89. 남편의 사형선고 소식때 나는 외롭게 감금당해 있었다” 경향신문 2008년 11월 11일 기사
  90. "전두환 대통령은 북한 수공계략 간파했다" - 오마이뉴스 2009년 09월 9일자
  91. '제5공화국', `전두환=29만원?' 홈피에 논란 재연 :: 네이버 뉴스
  92.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59537
  93. http://star.mt.co.kr/stview.php?no=2005062010200564915&type=3
  94. "한국사회에서 보수란 무엇인가?" 프레시안 2008년 09월 09일자
  95. "전두환, 역사상 두 번 다시 없는 위대한 영웅" - 오마이뉴스
  96. '전사모' 일해공원서 한달간 집회 신고 뉴시스 2007년 8월 19일
  97. "광주땐 폭동... 내가 전두환이라도" 전두환 생가 지키는 합천 주민들 - 오마이뉴스 07.02.11일자
  98. 시민단체, 재산 위증혐의 전두환씨 고발
  99. '숨은 전두환씨 재산 찾기' 숨바꼭질
  100. 이순자씨, "땅투자 재산 10배 불려"
  101. '전두환 비자금' 미국에 있었다?
  102. 한국경제 제 3의 길이 가능한가?
  103. 국방부 과거사위 발표 “삼청교육대 사인 일부 조작”
  104. 6공 시절 5공 청산 과정
  105. 6공 시절 5공 청산 과정
  106. MBC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을 말한다"
  107. 박찬종 “전두환, 現국정파탄 책임 이순신 동상앞 석고대죄…” 동아일보 2006-11-28일자
  108. 전두환씨 5·18때 '자위권 발동' 주장 서울경제 2007년07월24일자
  109. 과거사위, 5·18때 전두환씨 '자위권 발동 주장' 확인 경향신문 2007-07-24 일자
  110. 5.18 때 전두환씨 '자위권 발동' 주장
  111. 전두환 전 대통령 오늘 DJ 문병 노컷뉴스 2009년 8월 14일자
  112. [대담 김영삼 전 대통령: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 - 시대정신
  113. 전두환 백담사 은둔(1988.11.23) 역사학연구소
  114. 전두환의 불교탄압
  115. 정천기. “월주스님 "10ㆍ27법난 때 죄수복입고 조사받아".”, 《한국일보 (연합뉴스 인용)》, 2007년 10월 25일 작성. 2008년 9월 8일 확인.
  116.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등 176명 서훈취소 , 《연합뉴스》인용
  117. 전두환·노태우씨 훈장반환 ‘버티기’, 《한겨레인용
  118. 지종학풍수지리연구소
  119.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120.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01990.html
  121.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81206010307233180010
  122.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2698.html
  123. 김대중의 본처 차용애는 이순자의 숙모 장성희, 장영자와 외사촌간이었다. 장성희, 장영자의 친정아버지와 차용애의 친정어머니가 남매간이었다.

[편집] 바깥 고리

2000년대 이전에 전사모라는 팬클럽이 등장하였다.

Flag of South Korea.svg         제11·12대 대한민국 대통령         Presidential Standard of the Republic of Korea.svg

전 임
박충훈
(권한 대행)
1980년 9월 1일 - 1988년 2월 24일 후 임
노태우
이승만 · 윤보선 · 박정희 · 최규하 · 전두환 · 노태우 · 김영삼 · 김대중 · 노무현 · 이명박
전 임
윤일균
(대행)
제10대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1980년 4월 14일 - 1980년 7월 17일
후 임
유학성
(안기부장)
전 임
(초대)
제1대 민주정의당 총재
1981년 1월 - 1987년 7월 10일
후 임
노태우
전 임
(초대)
제1대 민주정의당 명예총재
1987년 7월 10일 - 1989년 11월 23일
후 임
노태우
(민주자유당)
전 임
최규하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
1988년 2월 - 1988년 11월 23일
후 임
최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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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인생을 알려면 배우며 도전하라...
글쓴이 : 풍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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