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러내다
공부하는 가족, 연우네 이야기
25억원이란 보증 빚과 싸우면서도 끊임없이 공부하며 꿈을 이룬 가족이 있다. 따뜻한 인간 공학자를 꿈꾸는 딸은 MIT 박사 과정을 밟고 있고, 아버지처럼 교육 행정 전문가가 되겠다던 아들은 최연소로 행정 고시에 합격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두 아이가 잘 자라준 것은 포기하지 않고 소설가란 꿈을 이뤄낸 엄마 덕분이다. 가능성을 믿고 서로를 응원해온 연우네 가족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채원씨는 최근 『우리는 공부하는 가족입니다』를 펴냈다. 주변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잘 자라준 아이들의 교육법을 알려주는 자녀 교육서 같지만 펼쳐보면 다르다. 절망을 딛고 뜨거운 희망을 찾은, 꿋꿋한 가족의 감동 에세이다.
재앙을 자산으로 바꾸기까지
이채원씨는 책에 '세상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며 나와 우리 가족을 덮쳤다'고 표현했다. 1997년 IMF 외환위기가 터진 후, 연우네 가족은 절망적인 소식을 듣게 됐다. 고시 출신 공무원으로 착실히 살아가던 남편은 사업을 하던 시누이와 시동생의 보증을 서줬는데 그 사업이 부도를 맞으면서 10억원이란 보증 빚을 떠안게 됐다.
그 일로 봉급을 쪼개고 알뜰살뜰 모아 결혼한 지 11년 만에 마련한 아파트를 내놓아야 했고 살림살이까지 압류당했다. 이후에도 10여 년을 빚에 시달려야 했다. 한때는 빚이 25억원으로 불어나기도 했지만 채무 조정을 받고 변제금은 친정 동생의 도움을 받아 겨우 보증 채무에서 벗어났다.
이채원씨는 지난 10여 년간의 시간을 책 한 권에 다 담기는 어려웠다고 했다. 가족들만의 내밀한 인생 이야기를 쓰기까진 쉽지 않았을 터다.
"가족이 살아온 이야기를 정리하자는 생각으로 글을 썼어요. 제 소설에도 그런 생각이 담겨 있죠. 다른 일을 이야기하듯 예사롭게 말하지 못하는 걸 보면 아직도 그 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일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마음이 남아있는 거겠죠. 나는 그 일이 왜 부끄러울까, 왜 공개하는 걸 주저할까 생각하다가 그러면 안 되겠다, 털어버리고 더 성장해야겠다고 마음먹었요. 큰아이가 졸업하기 전에 책을 내면 좋겠다 했죠."
아픈 기억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 한편에는 힘든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간절하게 말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었다.
"각자에게 놓인 처지가 다 다르겠지만 주저앉지 말고 일어서시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자신의 꿈이 뭔지 절실하게 생각하고 도전해보라고요. 자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치열하게 노력하기를 바랐어요. 특히 젊은 친구들에겐 역경을 자신의 꿈을 이루는 자산으로 삼으라고 당부하고 싶어요. 역경은 노력하면 자산이 되고 성장할 수 있어요. 그 뒤의 삶 전체도 이끌 거고요. 가능성은 자꾸 가능성을 부르더라고요. 그게 삶을 긍정하는 모습인거죠. 그 자세는 자식에게도 이어질 테고요."
물론 이채원씨가 처음부터 삶을 긍정하며 살아왔던 것은 아니다. 그녀는 젊었을 때는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무엇을 향해 노력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그 열등감을 위장하려고 냉소적이고 자조적이었어요. 그냥 이렇게 살다 죽을래 하는 자세요. 왜, 태어났는데 한 번쯤 치열하게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달라붙어 보지 않아요? 전 이 일을 당한 뒤 정신을 번쩍 차렸어요. 이 재앙을 자산으로 바꾸자 하고요. 매 순간 어떤 자세를 취하는 게 긍정적인가, 효율적인가를 생각했죠."
물론 이채원씨가 처음부터 삶을 긍정하며 살아왔던 것은 아니다. 그녀는 젊었을 때는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무엇을 향해 노력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그 열등감을 위장하려고 냉소적이고 자조적이었어요. 그냥 이렇게 살다 죽을래 하는 자세요. 왜, 태어났는데 한 번쯤 치열하게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달라붙어 보지 않아요? 전 이 일을 당한 뒤 정신을 번쩍 차렸어요. 이 재앙을 자산으로 바꾸자 하고요. 매 순간 어떤 자세를 취하는 게 긍정적인가, 효율적인가를 생각했죠."
소신 있는 교육, 엄마가 괴팍해야 한다
이채원씨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형편에 맞는 교육'을 중요시했다. 아무리 사정이 어려워도 자식 교육에 쓰는 돈은 아끼지 않는 다른 엄마들과는 달랐다. 지금 형편 안에서 가장 효율적인 대안을 찾았다. 그러기 위해 교육에 대한 원칙을 세웠는데 '남과 다르게 하기'가 그중 하나였다.
"저는 아이들이 초등학교 4학년이 되기 전까지는 공부하라는 말을 쓴 적이 없어요. 공부를 어려운 것이 아닌 밥 먹는 것처럼 일상적인 것으로 생각하기를 바랐죠. 공부란 말은 넓은 뜻을 포함하고 있어요. 인생 공부, 고시 공부, 세상 공부 등 받아들이는 아이들에게는 막연하죠. 만날 듣는 소리이니 자극도 없을 테고요. 그래서 전 콕 집어 산수 익힘 숙제, 국어 공책 몇 장 쓰기, 그림일기 마치기 등으로 말했어요. 아이들이 4학년이 될 때까지 공부란 말을 쓰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그걸 지켜냈죠.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자기의 분수를 알게 됐고, 자신은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갖게 됐어요."
이채원씨는 자식이 대학에 입학하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아이들이 성숙한 인간이 되기를 바랐고 그 과정에서 자신 역시 성장하기를 바랐다. 자신만의 교육 원칙을 세우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그것을 유지하는 일. 그녀에게는 자신의 소신을 지키는 비결이 있었다.
"실은 조금 괴팍해야 해요. 다수의 흐름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소신이 있어야 하니까요. 그래, 너희들 그렇게 할 테면 해봐, 나는 이렇게 할 거니까. 어디 나중에 어떻게 되는지 보자고. 이런 마음가짐이 필요하죠(웃음). 그런 자기 입장이나 자세를 유지하려면 혼자 공부를 많이 해야 하고, 아이들을 관찰하고 성향을 파악해야 하죠. 나 자신이 아이들보다 한참 앞에 나가 있어야 하고 늘 모색하는 자세가 필요하니 외롭고 힘든 길이지만 뿌듯한 일이기도 해요."
보증 빚 때문에 부부가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당시 두 아이는 초등학생이었는데 남편이 이전부터 국가에서 지원하는 장기 해외 연수 프로그램을 통해 3년간의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던 터여서 가족은 미국으로 떠나야 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이채원씨는 잃어버린 집 문제와 앞날 걱정을 누르고 새로운 곳에서의 생활을 준비했다. 연우는 아이오와 주에 있는 초등학교 6학년에, 상우는 4학년에 입학했고 남편은 석사, 박사 과정을 밟았다. 이채원씨는 미국 생활을 위해 무료로 배울 수 있는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영어를 배우며 지냈다.
아이들은 예상보다 미국 생활에 잘 적응했고, 낯선 환경은 이채원씨에게 뜻하지 않은 깨달음을 주기도 했다. 봄 방학을 맞은 아이들과 차를 타고 공원에 가던 중 그녀는 둥근 지평선을 발견했고 아이들과 이것에 대해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이후 그녀는 생활 전반에 숨어 있는 과학에 대해 아이들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고 매 순간 과학을 만나며 감탄했다.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매일 일상 속 과학 현상을 찾아내 끝말잇기 놀이를 하듯 놀았고 이것은 나중에 연우가 이공계 적성을 갖고 있음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겨울 방학에는 체류비를 아껴 아이오와를 떠나 플로리다 최남단까지 11일 동안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한국에서 거기까지 여행하는 시간과 비용을 생각하면 살고 있는 동안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무엇보다 일을 당한 뒤 제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그 전까지는 무조건 돈을 아끼며 살았죠. 어머니 세대, 할머니 세대가 했던 것처럼 무조건 안 쓰고 모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사니까 삶이 행복했나? 뭘 이루었나? 그런 의문이 들어 나를 바꿨어요. 비용을 들이더라도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일은 하자. 이왕이면 즐겁고 멋지게 하자. 아이들에게 다양한 문화를 배우게 할 수 있는 기회잖아요. 가진 게 없다고 아무 것도 못한다고 생각하는 건 편협하다고 생각했죠."
아이들과 가능성의 세계로 향하다
3년의 시간이 지나고 한국에 돌아오자 아이들은 고등학교 1학년, 중학교 2학년에 편입해야 했다. 처음에는 한국의 교육 과정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점차 자기 힘으로 헤쳐 나갔다. 이채원씨 역시 영어 학습지 수업을 하며 하루를 30분 단위로 쪼개 쓰는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전쟁을 치르듯이 살았죠. 전쟁이 나면 당연히 나가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냥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무장을 했어요. 일을 당한 뒤로 아이들 스스로도 그렇게 무장이 됐고요. '내 소중한 자식'하며 붙들고 앉아 응석만 받아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저는 우리나라 학교의 좋은 점을 계속 이야기했어요. 물론 빚 때문에 적응하기 더 힘들었죠. 주기적으로 독촉장이 날아오는데 아무리 아이들이라도 그 일에 무심할 수 없고 부모는 다투고, 부모가 다투니까 아이들은 힘들어하고요. 그런데 전 남편과 다투다가도 아이들을 보면 농담이 나오더라고요(웃음).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천생 낙천주의인가 보다 싶었죠. 그 상황을 떨어져서 생각해보니 남편과 다투고 있는 나는 빚의 세계에 발목이 잡혀 있고, 아이들에게 농담을 건네는 나는 가능성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저는 어떤 순간에도 좌절하지 않고 긍정과 가능성의 세계로 가고 싶은 거였죠."
연우네 가족은 소통을 위한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에 망설이지 않았다. 가족이 의견을 모아 큰 방에 책상 두 개를 마주보게 놓고 벽면에는 책장을 세워 그 방에 '죽림서실'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공부를 했고, 이채원씨는 소설을 썼다.
둘째가 대학에 입학한 뒤 집에 두 번째 압류가 들어 왔을 때도 가족이 모두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서로에게 쌓인 감정을 대화로 풀었고, 자신의 인생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아들은 아빠처럼 행정 고시에 합격하겠다는 목표를, 딸은 삼성장학회의 장학생이 돼 미국 유학을 간 뒤 인간 공학 교수가 되겠다는 계획을 말했다. 남편은 채무 조정 상담을 신청해 빚 문제를 해결해나가겠다고 했고, 이채원씨는 열심히 소설을 써 책을 내겠다고 했다. 실제로 연우네 가족은 자신이 말한 목표를 이뤘거나 이루는 과정에 있다.
"힘들수록 가족이 합심해야 한다는 생각이 아이들에게 스며들기를 바랐어요. 그걸 늘 이야기했죠. 가족 모두 마라톤 대회에 나가자는 생각을 떠올린 것도 그 때문이에요. 가족 마라톤이 성사될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아이들이 선뜻 좋다고 대답했어요. 대회를 대비해 제각기 훈련을 하기도 했는데 그때 참 고마웠죠."
연우네 가족은 2007년부터 매달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 남편과의 불화를 해결하고자 했던 게 이제는 가족의 중요한 이벤트가 된 것이다. 가족 마라톤의 약속은 처음부터 끝까지 달리는 자세를 유지하자는 것, 함께 페이스를 맞춰 달리자는 것이다.
끝까지 놓치지 않았던 소설가라는 꿈
소설가가 되는 것은 이채원씨의 오랜 꿈이었다. 하지만 결혼 후 내 집 장만을 위해 자신의 꿈을 잠시 미뤘다. 아파트를 장만한 후 1997년 가을에 수필로 등단했지만 기쁨은 잠시, 곧 IMF 외환위기가 터졌고 빚더미를 갖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렇게 정신없는 가운데 그녀는 자신의 꿈을 접어야 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지낼 때에도 그녀는 계속 수필을 써서 수필 창작반 선생님에게 부쳤고 조언을 받아 고치기를 반복했다. 한국에 돌아와 학습지 일을 하며 눈코 뜰 새 없이 지내는 가운데서도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간절해졌다. 녹록지 않은 현실 가운데 자신의 꿈을 이루기까지는 많은 고민과 갈등이 있었다.
"가장 힘든 일이었어요. 빚을 잔뜩 지고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하는 처지에 꿈을 이루겠다고 하다니, 그럴 여유 있으면 남들처럼 아이들 교육에 헌신해야지. 남들이 그렇게 바라볼 거잖아요? 돈이 되는 일을 해도 부족할 판에 소설을 공부한다고? 내가 과연 소설을 쓸 수 있을까, 해도 해도 안 되면 어쩌지. 그렇게 망설이기도 많이 했어요. 하지만 결단을 내렸죠. 남들이 돈으로 자식을 교육한다면 나는 내가 꿈을 이루는 모습으로 아이들을 교육하겠다, 함께 공부하며 꿈을 이뤄가겠다고요. 뭔가를 이루는 사람의 자세는 어떻게 달라도 달라야 한다. 그러니까 뭔가에 미쳐 있어야 한다. 어쨌든 시작을 하면 장기 지속해야만 이룰 수 있으니까요. 일본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가 '절체절명, 고립무원, 사면초가 등의 궁지에 삶의 핵심이 숨어 있다. 그 안에서 몸부림치는 자신을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는 것, 그것이 자립한 인간이다'라고 했어요. 그래서 저는 내내 자립하고 싶었어요. 더욱이 빚을 진 뒤에는 그 빚으로부터요."
이채원씨의 바람대로 가족은 모두 자립했다. 그러기까지는 가족과 했던 소통의 힘이 컸다. 그녀는 이제 힘들었던 시기를 벗어나 많이 편안해졌다고 한다. 압박감 없이 각자 할 일을 할 수 있게 됐다고. 새로운 목표도 세웠는데 남편과 이채원씨는 매년 책을 내고 가족이 모여 출간 기념 파티를 하자고 했단다.
"큰아이가 하는 일은 전문 분야라 설명하기 어렵지만 고령자가 신기술을 사용하면서 마주치는 문제점을 제품 디자인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왔어요. 앞으로 연구를 확장한다고 해요. 작은아이는 현재 공군 장교로 복무 중인데 작년에 혼자 프랑스 파리에 출장을 갔던 사업이 올해 결실을 봤어요. 초보 사무관으로선 큰 성취인데 앞으로도 국제 교육 교류 분야에서 일하겠다고 해요. 우리 가족은 크고 작은 일이 생길 때마다 파티를 해요. 케이크 하나 놓고 성취의 의미를 공감하는 거죠. 그러면 모두 기분이 즐거워져요. 그런 의식으로 서로를 응원하면 그 힘이 다음 성취로 이어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집은 파티가 끊이지 않는 집이에요(웃음)."
취재_지희진 기자 사진_홍하얀(studio lamp)
여성중앙 2014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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