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죽 공예가의 다섯 번째 흙집
지금으로부터 십수년 전, 가죽공예가 이기성 씨는 충남 단양에 지은 자신의 첫 집에 우리를 초대했다. 무려 3년간 돌과 흙을 쌓아 지은 집은 본지에 소개되며 크게 회자되었다. 이후 몇 채의 집과 구들방 작업을 통해 확실한 건축적 아이덴티티를 보여준 그가, 오랜 침묵을 깨고 다섯 번째 집을 선보였다.
HOUSE PLAN
대지위치 : 충청남도 천안시
대지면적 : 660㎡
건축면적 : 126㎡(약 38평)
구조 : 철근콘크리트 및 화강암 기단
내구조 : 소나무 목구조
외벽 : 이중 황토벽돌
주요 단열재 : 왕겨숯
내부마감 : 흙미장
지붕 : 스패니시 기와
설계 및 시공 : 다우리 공방
▲ 집은 대지의 형태와 건축주 취향을 감안해 ‘ㄱ’자의 각진 형태가 되었다. 처마 끝을 살짝 들여 올린 지붕선이 한옥의 정취를 풍긴다.
이름하야 개천골. 신라시대 천년고찰이었던 개천사가 자리했던 마을은 절의 이름을 따 오늘날까지 개천골로 불린다. 지금은 유허만이 남았지만, 그 지세만큼은 더할 데 없는 고귀함을 간직한 땅. 건축을 의뢰받고 이기성 씨가 이곳을 처음 밟았을 때는, 간혹 눈발이 날리기도 했던 올해 2월 말이었다.
그는 지난 5년, 건축에는 거의 손을 땐 채 지냈다. 간간이 마을 안에 방 한 채 작업 정도는 맡아 했지만, 한참 자신의 보금자리를 떠나 있어야 하는 집짓기는 사양해 왔다. 사랑스런 아내가 생기고 그동안 집중하지 못한 가죽공예에 더욱 힘을 쏟기 위해서였다. 그의 공예 작품은 여러 대전에서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고, 단양의 살림집 겸 작업실에는 제법 멋진 전시실까지 오픈했다. 그러던 중, 지난겨울 한 부부가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천안에 절터였던 명당을 마련해 두고 건축을 맡아 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 ‘한옥이되 한옥 같은 권위는 없는 집, 지대가 높은 대신 겸손하게 웅크리고 있는 집’ 부부가 꿈꾸는 집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는 가죽 작업을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오랜만에 그를 살아있게 하는 가슴 뛰는 제의였다. 아내와 함께 단양집을 떠나 천안 어귀에 짐을 풀고, 본격적인 설계를 시작했다.
한옥 구조에 지붕은 스패니시 기와
그는 최소 1년 이상 걸려 집을 짓는다. 주재료로 나무와 돌, 흙만 쓰는데다 웬만한 목공사와 가죽을 활용한 마감 작업도 시간을 요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번 집은 설계에 한 달, 전체 공사는 5개월에 걸쳐 이루어진, 그에게는 무척이나 신속한 공정이었다.
“전에는 너무 제 열정만 고집했어요. 융통성이 없다고 해야 할까요(하하). 이번 작업은 분업과 협업, 실용성을 우선으로 둔 집짓기를 모토로 삼았죠. 아마 결혼하고 나니 고집이 없어지고 타인의 입장을 더 생각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어요.” 한옥의 구조를 따르되, 너무 웅장하고 화려한 외관은 피해야 했기에 그 어디에도 없는 설계가 필요했다. 그는 단양과 화천 등 한옥 학교를 직접 찾아가 솜씨 좋은 목수들과 도면을 공유했다. 결합 부위와 하중 등 한옥의 세부 사항들을 논의하며 새로운 한옥이 그려졌다. 가장 큰 변화는 지붕이었다. 한옥의 전통 지붕은 집을 누르듯 육중하고 색이 어둡다. 건축주가 원했던 낮고 겸손한 집을 위해서는 물매를 최대한 낮추고 밝은 톤의 지붕재를 택해야 했다. 또한 ‘ㄱ’자 형 구조의 집을 모임지붕으로 만들기 위해 하중을 적절하게 분산하는 일이 먼저였다. “한옥 구조에 스패니시 기와를 올린 집은 아마 이곳이 처음이지 싶어요. 매번 현장마다 다른 소재를 적용해보고픈 욕심이 있는데, 이번 현장은 개인적으로 매우 만족스러운 결과에요. 가볍고 경쾌한 스패니시 기와가 외벽 색과도 잘 어울리고, 무엇보다 하자가 적은 좋은 집이 되었어요.” 구조는 전통 한옥의 기둥보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절이나 궁궐에서 쓰임직한 거대한 지름의 홍송과 육송들을 옮겨와, 현장에서 목수들이 직접 치목했다. 꼬박 한달 간 이루어진 이 작업은 전통 한옥의 골조 과정을 고스란히 재현한 동시에, 독특한 지붕 구조로 현장 목수들의 탐구 의식을 자극했다. 최근 국내 지어지는 한옥들이 대부분 일본의 프리컷(기계 치목과 조립) 공법을 따르고 있기에, 대목들의 손맛을 다시 볼 수 있는 보기 드문 건축 현장이기도 했다.
왕겨숯으로 단열한 이중 흙벽돌 벽체
벽체는 황토 벽돌을 두 겹으로 쌓고 그 사이에 왕겨숯을 넣어 단열했다. 왕겨숯은 부패되지 않고 벌레가 생길 염려가 없어 택한 소재다. 벽체의 외부 하단은 단양에서 공수한 화강암을 둘러 흙집의 풍화에 대비했다. 창은 페어유리를 2겹으로 겹친 유리를 택해 대부분 고정으로 만들었다. 대신 상부에 열고 닫을 수 있는 통풍창을 내고 문짝을 가죽으로 마감해 디테일을 살렸다. 그가 지은 흙집에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연출이다. 기술적으로는 창틀과 흙 사이에 목재의 수축 작용으로 틈새가 벌어질 수 있어, 접합면을 분리 시공해 바람이 들어오지 않게 신경 썼다. “한옥이나 흙집에서 가장 고려해야 할 것이 하자에요. 직접 흙집에 살면서 제가 겪은 불편함이 있으면, 새로 짓는 집에서 해결책을 모색하죠. 그렇게 흙과 나무의 물성을 고심하며 최대한 하자 없는, 기능적인 흙집을 짓고자 했어요.”
▲ 화강암으로 주차장의 바닥과 진입로를 만들고, 나무와 돌을 이용해 주차선을 만든 위트가 돋보인다.
▲ 지붕은 최근 까다로워진 단열 기준(시험 성적으로 증명 가능한 단열재)에 맞춰 흙이 아닌, 인슐레이션으로 시공했다.
나무와 가죽으로 연출한 실내 이미지
여태껏 그의 집들이 그러하듯, 실내의 다양한 요소들이 그의 가죽 작업으로 마감되었다. 가죽으로 만든 현관을 열고 들어서면 오묘한 향이 코를 자극한다. 은근한 소나무와 상쾌한 송진 냄새, 여기에 간간히 가죽 특유의 향이 더해진다. 가죽은 가방, 의류, 신발 등을 만드는 소재로 알고 있지만, 가공성과 내구성이 좋아 인테리어 소재로도 두루 쓸 수 있다. 자연스러운 질감으로 나무, 흙 등 천연 소재와도 잘 어울리고, 시간이 갈수록 태닝 효과를 통해 색상 변화도 느낄 수 있다. “전 욕실 바닥에도 소가죽을 깔아 건식으로 써요. 물이 튀면 물걸레로 쓱쓱 닦기만 하면 되죠. 의외로 관리도 쉽고, 두고 보아도 질리지 않는 소재에요.” 실내는 나무로 짠 콘솔 위에도, 거실의 벽난로 앞에도 소가죽을 펼쳐두었다. 그의 예술적인 가죽 공예는 창문, 거울, 손잡이 등 다양한 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 전체적인 시공과정
01 아무것도 없던 빈 터의 토목 작업. 02 구들방 위치만 뺀 콘크리트 통기초. 03 한옥식 기둥보 결합구조. 04 벽체는 이중벽돌 사이에 왕겨숯을 넣어 단열했다.
◀ 오크 원목에 악어무늬 소가죽을 더해 싱크대를 제작했다. 기둥에 간이 테이블을 만들고 가죽을 씌운 통나무 의자를 두어 간이서재로 활용한다. ▶ 욕실 하부장은 현장에서 대목이 직접 만들어 약간 투박하지만 견고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샤워 부스 맞은 편으로 월풀 욕조가 있다.
◀ 가죽으로 마감한 신발장과 현관문. 베이지색 가죽은 시간이 흐를수록 진한 색으로 바뀌게 된다. ▶ 안방에 딸린 파우더룸은 해가 무척이나 밝게 들어 낮에는 별다른 조명이 필요없다. 거울과 선반은 나무로 제작하고 가죽으로 마무리하거나 못자국을 가려준다.
▲ 내부 벽면은 흙날림이 없는 매끈한 면의 황토칠이다. 황토, 맥반석, 송진을 섞어 페인트처럼 손쉽게 미장할 수 있는 제품을 사용했다
▲ 아궁이와 가마솥, 항아리 저장고 있는 정지. 일종의 보조주방 역할로, 물도 쓸 수 있도록 실용성을 높였다. 사랑방으로 이어진 작은 문을 통해 개다리 소반이라도 들고나야 할 것 같다.
두 개의 굴뚝과 ‘정지’가 있는 집
두 개의 방은 모두 구들을 깐 전통 난방 방식을 택했다. 둘 다 2층의 이중구들로 안방은 벽난로형, 사랑방은 가마솥이 걸린 아궁이형으로 구분된다. 불 피우는 낭만을 원했던 남편의 소원대로 거실에 벽난로를 둘 수 있게 되고, 경상도가 고향인 안주인의 바람대로 가마솥이 있는 ‘정지’를 갖게 되었다.
이기성 씨가 집의 백미로 꼽는 ‘정지’는 경상도에서 말하는 부엌으로, 사랑방으로 통하는 작은 쪽문을 두고 아궁이와 항아리 저장고, 수납고 등으로 구성된다. 이곳은 주차장에서 바로 이어져 장 본 물건들을 차에서 바로 옮겨 저장할 수 있다. 또한 입식 주방에서 할 수 없는 다양한 살림을 행하는 보조주방 역할도 한다. 물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바닥은 타일로 마감하고 수도를 두었기 때문이다.
장작을 태워 방을 데우고, 정지에 앉아 가마솥을 닦아야 하는 일상. 아파트에 살던 건축주가 이런 환경에 쉬 적응하긴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애초에 동선을 최대한 길게, 몸을 많이 움직일 수 있는 집을 주문했다. 집으로 인해 삶 자체가 바뀌길 갈망했고, 이제 진짜 생활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기성 씨는 그들의 도전이 마냥 반갑다.
■ 구들 놓기 시공과정
01 고래는 2층 구조로, 구들을 2번 깔았다. 02 고래는 적벽돌을 사용하고, 흙으로 마감한다. 03 구들장은 청원 철편석을 사용했다. 04 불을 피워 연기가 새는 곳을 확인한다.
◀ 외부 저장고 모습. 알루미늄과 동판으로 비가림 지붕을 만들고 목재로 문을 짰다.
■ 조명은 눈에 크게 띄지 않는 심플한 제품으로 골라 배치했다.
▶ 외부굴뚝은 동판과 알루미늄으로 만들었다.
◀ 문의 장식은 카빙(칼로 그림을 파고, 두드려서 모양을 만드는 가죽 작업)으로 만든 다우리 공방의 마크이다. ▶ 금속 심재를 넣고 가죽으로 덧씌운 현관의 붉은 색 손잡이.
◀ 가마솥 곁에는 식품저장고인 항아리를 따로 묻었다. 고구마 같이 따뜻하게 보관해야 하는 식품을 넣어 두는 요긴한 용도다.
■ 창의 위쪽은 나무에 가죽을 덧씌우고 위 혹은 아래로 열리게 만든다. 경첩과 전통 문양의 손잡이나 걸쇠를 이용해 열고 닫는다.
▶ 이기성 씨의 트레이드마크이기도 한 원형 통풍창. 그가 지은 집에는 꼭 하나씩 볼 수 있는 요소다.월간 <전원속의 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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