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일을바란다!

“'유연한 진보’ 주장한 노무현”

구봉88 2009. 8. 17. 10:37

노무현 시대 '좌우 이념대립'왜 격렬 했나?
남시욱 저 “한국진보세력연구” 중 “'유연한 진보’ 주장한 노무현” 지상중계
 
정리/문일석 기자

브레이크뉴스는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끌고 있는 남시욱 교수 저 “한국 진보세력 연구”의 일부인 “노무현 집권-국정실패 6가지”를 소개한데 이어 “'유연한 진보’ 주장한 노무현”을 2차로 지상중계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생전에 추구한 진보적 가치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노무현추모기념사업회가  이해찬 전 국무총리 등 과거 그의 측근 인사들을 중심으로 곧  발족할 예정이며, 그의 측근 학자들은 이미 설립된 한국미래발전연구원을 통해 그의 진보주의에 관한 책을 오는 10월에 출간예정이어서 본지의 2회 지상중계 기사는 노무현 진보주의노선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진보의 가치’ 신봉자 노무현 

후보 시절 논란 빚은 노무현의 이념성향
 
▲ 남시욱    교수
노무현(盧武鉉) 정부는 김대중 정부에 이은 한국 정치사상 두 번째의 좌경중도정권이다. 진보주의를 표방한 노무현은 김대중 정권 때보다 훨씬 더 큰 변화의 소용돌이를 각 분야에 몰고 왔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고졸 출신의 인권변호사였던 그는 타고난 반항아적 기질로 인해 과격하고 파격적인 정책과 언행을 거듭해 야당 지배 하의 국회로부터 탄핵소수를 받은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퇴임 후 고향으로 내려간 최초의 대통령인 그는 재임 중 640만  달러를 수뢰한 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던 중 사저 뒷산 절벽에서 투신해 목숨을 끊음으로써 한국정치사상 자살로 생을 마감한 첫 대통령이 되기도 했다.

노무현 시대의 좌파정치세력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청와대와 여당에 진입한 386운동권출신을 포함한 ‘집권진보세력’과 둘째는 2004년 총선에서 원내진입에 성공한 ‘진보야당세력’, 즉 정권 밖의 좌파세력인 민주노동당이다. 이들 좌파정치세력들 이외에 친북시민단체들도 노무현 시대에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로 인해 노무현 시대의 좌우 이념대립은 김대중 시대와 비교할 수 없는 정도로 격렬했다.

노무현을 대통령 후보로 공천한 새천년민주당(약칭 민주당)은 결코 진보정당이 아니다. 당 강령에서 명시했듯이 ‘중도개혁정당’이다. 노무현 자신도 2002년 3월 대선후보자 경선토론 때 “나는 중도개혁주의와 개혁적 국민정당 등을 정강정책으로 내세운 민주당 노선에 가장 충실한 민주당원”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의 이념성향을 좌파로 규정했다. 그의 노선에 대한 시비는 맨 먼저 민주당의 후보경선과정에서 제기되었다. 마지막까지 그의 라이벌이었던 이인제(李仁濟) 예비후보는 2002년 3월 TV토론에서 노무현이 1988년 국회 대정부 질문과 89년 현대중공업 파업 현장에서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자”, 그리고 “재벌 총수와 그 일족의 주식을 정부가 매수해 노동자에게 분배하자”고 했다면서 그의 노선이 ‘급진좌파’ 노선이라고 비난했다. 이인제는 그 다음날에도 노무현의 주장이 ‘유럽의 좌파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과격한 주장’이라면서 그를 ‘좌파 정치인’이라고 몰아세웠다.
 
후보 지명 받은 뒤에도 사퇴 압력

민주당 내의 이 같은 비난은 반대당인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온 이회창의 공격으로 이어졌다. 그는 2002년 4월 대선후보 경선출마 선언문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만약 민주당 정권이 5년 더 연장된다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위기와 불안의 대한민국”이라면서 “지금 급진세력이 좌파적인 정권을 연장하려 하고 있으며, 음모와 술수로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는 무원칙한 작태가 횡행하고 있다”고 공격했다. 노무현에 대한 좌파시비는 그가 후보로 선출된 다음에도 당내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해 6・13 지방선거 참패 후 민주당의 이근진(李根鎭) 의원은 성명을 발표하고 “노무현당은 중도개혁이 아니라 급진좌파당의 시대착오다”라고 비판했다. 민주당 고문 안동선(安東善) 역시 성명을 통해 “노 후보의 급진좌파적 이념에 대해 중산층과 보수층의 우려는 심각하다. 급진좌파 이념으로 국민의 심판을 받겠다고 나선 사람은 노 후보가 처음이어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노무현은 그 자신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이념면에서 상당한 괴리가 있었으며 당내에서 가장 좌파 쪽에 속한 것이 사실이다. 대통령선거가 있기 10개월 전인 2002년 2월 발표된《중앙일보》와 한국정당학회 공동조사 결과에 의하면 당시 예비주자였던 노무현은 이념지수가 1.5로, 그가 속한 민주당 소속의원 평균치인 3.7보다 훨씬 좌파 성향이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예비주자 중 진보파로 분류된 유종근(柳鍾根)이 3.3, 김근태가 3.7이었는데 비하면 노무현의 이념경향은 아주 좌측인 셈이었다(지수가 적을수록 좌파성향이다).《조선일보》는 전문가들의 분석을 토대로 노무현의 경제정책이 그가 속한 민주당 보다는 좌파정당인 민주노동당과 참여연대에 가깝다는 진단을 내렸다.

노무현은 변호사 시절인 1981년, 부산지역 학생운동가들이 관련된 ‘부림(釜林)사건’의 변호를 맡은 것을 계기로 정신적 운동권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35세였던 그는 금서로 분류된 리영희(李泳禧)의《전환시대의 논리》같은 책을 읽고 감동해 세상을 보던 눈이 달라졌다. 노무현은 그의 자전적 에세이《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자신의 젊은 시절에 리영희의《베트남 전쟁》, 에드가 스노의《중국의 붉은 별》같은 책을 읽고 사회주의에 마음이 ‘좀 끌리다가도’ 자신이 상대주의철학에 기초를 둔 법률을 공부했기 때문에 “이건 아니다로 돌아서곤 했다”고 회고했다. 이것은 그가 사회주의자가 아님을 주장한 것이다. 그가 말한  사회주의가 마르크스-레닌의 정통사회주의, 즉 공산주의였는지, 아니면 서구식 사회민주주의를 의미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 남시욱  교수 저 "한국 진보세력 연구"의 표지.   ©브레이크뉴스
노무현은 1988년 14대 국회의원 총선 때 당선되어 정치에 입문할 무렵 혁신계 정당활동을 하려 했다는 자료가 있다. 김영삼 정부 시절 청와대 행정관을 지낸 김용철(金容哲)은《노무현론》이라는 책에서 “노무현은 ‘나는 일찍부터 혁신정당의 필요성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노무현은 진보계인 한겨레민주당 참여를 권유받았으나 거절하고 민중의 당에도 입당하지 않았다. 그를 망설이게 한 것은 당선 가능성의 문제였다”고 썼다. 노무현은 그 대신 보수계인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을 선택해 부산 동구에서 당선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의 ‘진보적’ 개혁주의자의 꿈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노무현은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후보경선 당시 경쟁자였던 이인제가 그의 1988년 국회에서의 재벌해체 발언을 공격하자 그 발언이 ‘장(場)의 논리’ 또는 ‘역설의 야유’라며 해명했다. 그러나 이 해명은 사실이 아니다. 그는 문제의 대정부질문 때 재벌해체 발언을 하면서 “공연히 한 번 해보는 소리가 아닙니다”고 분명히 말했었다. 그의 이런 인식은 1988년 총선 공약집에도 나타나 있다.
 
《오 민주여, 사람 사는 세상이여》라는 제목이 붙은 그의 공약집에는 “재벌을 해체하고…재벌과 부정축재자들이 독점하고 있는 토지는 강제 징발하여 무주택서민과 중소기업 육성자금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는 구절이 들어있다. 노무현은 자전적인 에세이집인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1989년 당시 그가 속한 민주당의 총재이던 김영삼이 일본 사회당의 초청을 받고 노무현을 불러 일본방문에 수행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김영삼의 제의를 거절하면서 “총재님, 앞으로 정권이 교체되어 정말로 민주주의가 되면 전 진보정당에 참여 할 생각입니다. 그때가 되면 총재님 하고도 갈라서야 할 판입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총재님을 졸졸 따라다니는 사진만 나오면 뒷날 제 입장이 무척 곤란해질 것 같습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진보’ 옹호론 

노무현은 대통령 취임 이후에는 공개적으로 ‘진보’노선을 옹호했다. 그는 취임 1년 후인 2004년 5월 27일 연세대에서 열린 ‘리더십 특강’에 강사로 나가 보수와 진보 문제에 대해 “보수는 힘 센 사람이 좀 마음대로 하자,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에게 거의 모든 보상을 주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에 의하면 자본주의 사회에 있는 한, 대개 보수는 적자생존론에 근거하고 있고, 약육강식론에 근거하고 있고, 아울러 되도록이면 바꾸지 말자, 특히 한국처럼 아주 오른쪽에 있는 나라에서는 더욱 더 바꾸지 말자, 기득권의 향수가 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보수와 수구를 완전히 동일시하는 시각이다. 그는 이어 “복잡하게 이야기할 것 뭐 있어? 보수, 합리적 보수, 따뜻한 보수, 별놈의 보수를 다 갖다 놔도, 보수는 바꾸지 말자, 이겁니다”라고 단언했다. 노무현은 이어 ‘진보’에 대해서는 “진보는 뭐냐. 더불어 살자, 인간은 어차피 사회를 이루어 살도록 만들어 있지 않냐, 사회를 이루어 사는 한…연대죠. 연대, 더불어 살자, 이런 얘깁니다”라고 말한 다음 “뭘 좀 바꾸자, 고쳐가면서 살자, (이것이) 진보죠”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2007년 10월  벤처기업인들을 상대로 한 특강에서 “보수주의의 문제점은 정의가 없고, 연대의식, 지속가능한 미래에 대한 전략이 없다는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보수주의는 전통적으로 대외정책에 있어 대결주의를 취한다”면서 “지금 미국을 보라, 일본의 보수주의를 보라, 대결주의 입장에 항상 서 있다. 그래서 평화는 진보주의가 가깝다”고 주장했다.
노무현은 2005년 9월 27일 청와대에서 중앙언론사 경제부장들과의 오찬 석상에서는 스스로를 ‘통합적 진보주의자’라고 밝혔다. 그는 자신은 당연히 ‘진보’인데, ‘진보’라고 말을 못 하는 이유는, ‘진보’ 하면 비타협적 투쟁노선으로 비치기 때문에 그렇게 스스로를 부르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노무현은 ‘진보’의 옹호자이자 예찬논자였다. 그는 “한국에서 뻑 하면 진보, 진보는 좌파고, 좌파는 빨갱이다, 이렇게 몰아붙이는(데 이)것은 한국사회의 진보를 가로막는 암적인 존재”라고 단언했다. 이 때문에 노무현은 기회 있는 대로 자신이 “진보적 가치를 지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교조적 진보’ 비난한 노무현

그는 2006년 10월《청와대브리핑》에 기고한 ‘대한민국 진보, 달라져야 합니다’라는 글을 통해 그의 한미FTA추진을 비판하는 진보세력을 향해 “진보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필요하면 그것이 신자유주의자들의 입에서 나온 것이든 누구의 입에서 나온 것이든 채택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고 밝혔다.
 
노무현은 이 글에서 그를 비판하는 진보적 지식인들을 ‘교조적 진보’라고 역공하면서 “진보적 가치 실현을 위해선 유연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다음 “참여정부의 노선은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유연한 진보’라고 붙이고 싶다. ‘교조적 진보’에 대응하는 개념이라 생각하고 붙인 이름이다”라고 설명했다. 그
 
의 이 발언은 즉각 진보파 학자들의 반론을 불러와 당시 언론이 명명한 이른바 ‘진보논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진보파 학자들이 노무현의 진보노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직접적 계기는 양극화 심화현상과 참여정부의 한미FTA추진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노무현의 노선에 대해 “유연한지는 몰라도 진보인 것 같지는 않다”고 비꼬면서 “노무현 정부의 노선은 민주노동당 같은 진보도, 한나라당 식의 ‘냉전적 보수’도 아닌, ‘중도개혁’, ‘자유주의적 개혁’, ‘개혁적 보수’라고 보는 것이 맞는 것 아닌가”라고 지적한 다음 노무현이 ‘유연한 중도’내지 ‘유연한 개혁’ 대신 ‘진보’라는 명칭을 고집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노무현이 집요하게 자신을 진보주의자라고 자임하고 있는데 대해 많은 진보파지식인들이 그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 한 것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이탈리아 정치학자 보비오(Norberto Bobbio)의 말처럼 어느 누구도 공산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자유주의자나 가톨릭이 될 수가 없듯이 그 누구도 좌파인 동시에 우파가 될 수는 없다. 확실히, 한미FTA체결을 신자유주의정책의 증좌로 보는 한국의 정통 좌파이론가들의 시각에서 볼 때는 노무현은 결코 진보가 아니다.
 
노무현은 ‘진보’를 자임함으로써 진보라는 용어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한국의 진보파 지식인들이 정통좌파이론에 입각해서 “우리는 진보지만, 너는 아니야”라는 식으로 진보를 독점하려는 것 역시 문제가 있다. 그것은 세계화시대인 21세기의 시각에서 볼 때 ‘진보의 수구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노무현은 2007년 1월 TV연설에서 “진보개혁 세력이 개방에 대한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역사의) 주류 세력이 안 된다”고 비난하고 “개방도, 노동의 유연성도 더 이상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 효용성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스스로를 ‘진보의 비주류’를 자처한 노무현이 자신의 노선을 ‘좌파신자유주의’ 운운한 것은 언어의 기교라 하더라도 그가 “나는 신자유주의자가 아니며 한나라당이나 일부 정치언론이 말하는 그런 좌파도 아니다.…나는 진보의 가치를 지향하지만, 무슨 사상과 교리의 틀을 가지고 현실을 재단하는 태도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것은 그대로 유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노무현의 ‘유연한 진보’ 노선을 간단하게 ‘정체성의 혼란’이라고 치부하고 그를 단순한 중도개혁파나 자유주의적 개혁파로 규정하기 보다는 좌경중도노선이라고 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노무현은 2007년 가을에는 그전까지 주장하던 ‘유연한 진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진보적 시민민주주의’와 ‘진보적 시장주의’를 주장했다. ‘유연한 진보’가 그의 실용주의적 진보이념이라면, 진보적 시민민주주의 또는 진보적 시장주의는 그런 이념을 실천할 방법론인 것 같다. 그는 앞에서 살펴본 대로 2007년 10월 서울 강남구 코엑스 오라토리엄에서 열린 벤처코리아2007행사에 참석, “진보적 시민민주주의는 내가 앞으로도 추구해야 될 정치적 노선”이라면서 “신주류가 나타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2008년 말부터 투신자살 전 까지 경남 김해 진영읍 봉하마을 사저에서 가까운 학자들과 함께 진보주의연구회를 운영하면서 그의 진보사상을 발전시키려 했다. 

2. 노무현의 정치적 시각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

노무현은 소년기부터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진데다가 청년기에는 좌파지식인들의 저서에서 영향을 받아 한국현대사와 대한민국에 대해 수정주의적 관점을 갖게 되었다.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작문시간에 ‘우리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과제를 받고 반장이면서 백지동맹을 선동하고 그 자신은 백지에다가 ‘우리 이승만 택통령’이라고 써냈다. ‘택’은 턱도 없다는 뜻이었는데 이 때문에 학교가 발칵 뒤집혔으나 그는 반성문 쓰기를 끝내 거부했다. 

노무현은 민주당 대선예비주자 시절인 2001년 11월 경북 안동시민학교에서 특강을 하면서 “그 당시(광복 직후) 소련을 등에 업고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려는 세력과 미국을 등에 업고 자본주의 국가를 세우려는 세력이 극한 대립하는 상황에서 민족의 통일과 자주독립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던 중도통합세력들은 모조리 패배해 버렸다”고 주장했다.
 
그는 2002년 5월 중견언론인들의 모임인 관훈클럽 초청토론에서 대한민국을 ‘자본주의 분열세력’이라고 표현했다. 자본주의 분열세력이란 바로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인 이승만과 한국민주당 세력을 의미한다. 노무현은 유엔이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인정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고는 “유일한 합법정부이지만 분열세력인 것도 맞다.
 
양립이 가능하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이어 북한과 남한을 같은 분열세력으로, 등가(等價)로 보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정통성과 합법성은 별도로 하고, 분열세력이라는 점은 같다. 광복 후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남한의 정통성을 부인한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 노무현  전  대통령.   ©브레이크뉴스
노무현은 대한민국의 수립을 ‘분열주의’ 행동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 후의 역사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는 대한민국은 기회주의자들이 판치는 세상이었다고 단정했다. 노무현은 2003년 2월 취임식에서 행한 연설에서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가 득세하는 굴절된 풍토는 청산되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의 이와 같은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역사인식은 1980년대를 풍미한 수정주의 해석의 영향 때문이다. 노무현이 1981년경부터 읽고 영향을 받았다는 책들은 바로 수정주의에 입각한 역사 서적이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 취임 이후에는 점차 현대사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보였다.
 
예컨대 그는 2005년 6월 현충일 추도사에서 “그동안 우리는 해방과 건국, 경제와 민주주의 발전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이뤄냈다. 2차대전 이후 수많은 나라가 독립했지만 우리만큼 큰 성취를 이뤄낸 나라는 없다”고 긍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그러나 그는 1개월 후 청와대에서 열린 제12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전체회의에서는 대회사를 통해 다시 “지난날 역사의 고비마다 통합을 주장한 사람들은 항상 좌절하고, 분열세력이 승리해 왔다”고 말했다. 그의 분열세력관은 그 후 흔들림 없는 확고한 신념으로 그의 뇌리에 자리 잡은 것 같다.
 
대북정책과 통일관

노무현은 후보시절부터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보완적으로 계승할 뜻을 밝혔다. 그의 이 말 속에는 보수세력이 폐기하라고 주장하는 6・15공동선언의 준수도 당연히 포함된다. 보수세력이 이 공동선언을 문제 삼고 나선 것은 특히 제2항의 통일조항이 북한의 연방제방안을 받아들인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노무현은 연방제에 대해 훨씬 긍정적이었다.
 
그는 후보시절인 2002년 5월 관훈클럽 초청토론에서 “연방제는 북한에서 내놓은 안이기 때문에 금기시하는데…연방 개념은 단일 헌법을 반드시 전제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 다음 “(북한이 말하는 안은) 결국 연합인데, 용어를 연방으로 쓴다고 (해서 우리가) 쌍방 간의 차이를 크게 확대한다면 공통점을 만들기 어렵다”고 언명했다. 그는 “북한이 남한적화 전략을 갖고 있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으나 그것은 관념적 주장이지,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다. 가능하지도 않은데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해석하고 굳이 매달릴 이유가 뭐냐”고 말했다. 그의 말은, 북한 측에서 말하는 안(낮은 단계의 연방제)은 단일헌법을 전제로 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가 주장하는 연합이므로 수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취임 후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노무현은 2004년 2월 취임 1주년을 맞아 개최된  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우리의 통일은 독일처럼 흡수통합이 아니라 오랫동안 일종의 국가연합체제로 갈 것”이라고 전제한 뒤 “판문점이나 개성 일대에 서울이나 평양보다 규모가 작게 통일수도가 대단히 상징적으로 만들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가연합의 사무국과 의회 등이 여기에 건설되고, 대부분의 권한과 행정은 지방정부가 각기 해 나가는 것이 장기적인 통일과정에서 합리적일 것”이라고 밝혔다. 이 발언의 문제점은 ‘지방정부’라는 대목이다. 남북한의 두 정부가 지방정부가 되고, 공동의 사무국과 의회 등을 두자는 안은 바로 북측의 연방제통일방안이다. 남측의 국가연합방안은 ‘1민족 2국가 2정부 체제’로, 남북의 두 정부는 각각 주권국가이지 결코 지방정부가 아닌 것이다.

노무현은 2005년 4월 독일을 방문한 기회에는 동포간담회와 독일 일간지《디 벨트》(Die Welt)와의 회견에서 자신은 독일식 흡수통일을 반대한다고 밝히면서 “한국의 통일은 천천히 준비해 먼저 평화구조를 정착시키고, 그 토대 위에 교류협력을 통해 관계를 발전시키고, 북한도 통일을 감당할 만한 역량이 성숙되면 국가연합 단계를 거쳐 통일되면 좋을 것”이라고 4단계의 통일방안을 밝혔다. 여기서도 여전히 국가연합을 말하고 있으나 연방제와의 차이 여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미국관 

세계의 좌파세력은 어느 나라에서건 대체로 ‘반미적’이다. 노무현은 어떤가. 그는 후보시절 젊은 층의 반미정서에 노골적으로 편승했다. 선거운동기간 중인 2002년 9월 경북 영남대학교 특강에서 “미국에 가본 적 있느냐”는 질문이 나오자 노무현은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미국에 가본 일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바빠서 안 갔다고 했다. (국회에서) 노동위를 했는데 미국 갈 일이 있느냐.
 
미국 안 갔다고 반미주의자냐, 또 반미주의자면 어떠냐”고 답했다. 그는 이어 “말을 하고 보니 반미주의자는 좀 그렇다. 대통령이 반미주의자라면 우리 국익에 큰 손해를 끼칠 것이다”면서 “말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는데, 왜 그 얘기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한국 다녀가서 미국 대통령이 되었느냐”고 덧붙였다.

노무현은 한 때 주한미군철수론자였다. 2002년 3월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운동기간 중 경쟁자인 이인제로부터 1990년 11월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시국선언문에 서명한 사실에 대해 해명을 요구받았다. 그는 “초선 국회의원일 때 다소 부정적인 견해였던 것은 사실이나 1991년 통합민주당 대변인이 된 뒤 김대중 당시 총재와의 토론을 통해 주한미군 철수는 외교현실을 고려해야 하는 공당으로서는 적절치 않다는 입장 조율을 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통일 후에도 지금과 같은 안보적 대치구도가 유지된다면 주한미군은 계속 주둔해야한다”고 수정된 입장을 피력했다. 그는 당선자 시절이던 2003년 1월에는 미군이 한국에 계속 남아 동북아의 ‘힘의 균형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거듭 확인했다. 그는 한미관계 역시 장래에는 의존관계에서 대등한 상호협력관계를 이루어 가야 한다며 “양국관계는 수평적이고 대등한 관계로 갈 만큼 경제와 안보 환경이 변화했다”고 말했다.
 

3. 정권내부의 좌파세력

386운동권의 도구를 자처한 노무현

노무현 정부의 탄생을 계기로 386세대 운동권 출신들이 정권과 여당의 실세로 등장하자 거센 소용돌이가 각 분야에서 일기 시작했다. 청와대 비서실은 초기에 이들 386세대가 주류를 이루었다. 청와대 1, 2급 비서관 37명 중 31명이 386세대여서 관료출신은 비서실 인사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이들 386출신 비서관 대다수는 노무현의 선거운동을 도운 운동권 출신들이다.

노무현은 자신의 측근들을 ‘동지’라고 불렀는데, 그가 2003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하기 이틀 전에 가진 비서들과의 워크숍에서 공개한 측근들의 이야기는 상징적이다. 이광재(李光宰), 안희정 등 그의 386 측근들은 전년 8월 그의 생일을 맞아 “우리의 도구로서 변함없이 나가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편지를 생일선물상자 안에 넣어 노무현에게 보냈다는 것이다. 노무현은 이보다 앞서 그의 386 측근들에게 “당신들이 꿈꾸는 사회를 이루려는 도구로 나를 선택한 것 아니냐”고 농반진반 조로 얘기했기 때문에 이들이 도구 이야기를 한 것이다. 자신이 386운동권이 꿈꾼 사회를 만들기 위한 도구가 되겠다고 자임한 노무현은 이들을 청와대 요직에 포석했다.

노무현이 당선 된 다음 청와대와 여당의 핵심 고위요직은 민청학련 출신들이 차지했다. 정무수석에 임명된 유인태(柳寅泰) 전 의원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재야운동권출신이며, 인사보좌관에 임명된 정찬용(鄭燦龍) 광주 YMCA 사무총장은 같은 사건으로 1년간 옥살이를 한 인물이다.
 
같은 사건으로 10년형을 선고받은 민주당 이해찬(李海瓚) 의원은 노 당선자 측 중국 방문단장으로 기용되었고, 당시 민청학련의 대구지역 핵심 인물이었던 이강철(李康哲)과 부산 지역을 대표했던 김재규(金在圭, 나중에 부산민주공원 관장)도 중용되었다.
 
대선 막판에 국민통합21 대표 정몽준(鄭夢準)의 노무현 지지 철회발표에 반발, 국민통합21을 탈당한 이철(李哲) 전 의원도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었다. 민청학련 핵심 4인방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김근태(金槿泰)는 노무현과 보조를 같이해 나중에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는데 주동역할을 했다.
 
청와대 비서실 점령한 386세대

청와대 비서실의 1, 2급 비서관, 그리고 그 아래인 행정관에 기용된 인사들 중에는 386운동권 출신 중에서도
특히 전대협 출신들이 많았다.
 
이호철(李鎬喆) 민정1비서관(후에 민정수석비서관)은 부산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부림사건’ 때 그의 변호인이던 노무현 당선자와 인연을 맺은 뒤 초대 보좌관 등을 맡은 인물이고, 연세대 운동권 출신인 이광재 국정상황실장은 1988년부터 노무현의 보좌관으로 그의 대통령 당선 후에도 핵심 브레인 역할을 한 실세참모였다.
 
같은 연세대 운동권 출신이며 교내에 유인물을 배포한 혐의로 구속된 바 있는 윤태영(尹太瀛) 연설담당비서관(후에 대변인), 연세대 문과대 학생회장 출신 문용욱(文龍旭) 제1부속실장, 연세대생으로 교내시위를 주도하다가 구속된 천호선 기획비서관(후에 국정상황실장과 대변인),
 
국민대 출신 운동권인 서갑원(徐甲源) 의전비서관(후에 17대 의원으로 당선), 연세대 재학 중 구국학생동맹 사건으로 구속된 바 있는 김만수(金晩洙) 보도지원비서관(후에 대변인), 연세대 삼민투 위원장을 지낸 박선원 안보전략비서관도 ‘노무현 사단’의 핵심들이었다.
 
이밖의 전대협 출신 386운동권으로는 김은경 대통령직속 지속가능발전위 비서관, 서양호(徐良鎬) 대통령직속 동북아시대위 자문위원, 최인호(崔仁昊) 청와대 국내언론비서관, 송인배(宋仁培)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실 행정관, 한주형 전 청와대 국민제안비서관실 행정관, 이승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실 행정관 등이 대표적이었다.
또한 양정철(楊正哲) 홍보기획비서관은 외국어대 자민통 위원장 출신이다.

재야출신들도 다수 들어갔다. 2004년 5월 시민사회비서관으로 들어갔다가 곧 시민사회수석비서관으로 승진한 황인성은 전국연합 집행위원장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을 역임한 재야운동권출신이다.
 
 같은 시기 민정비서관으로 청와대에 들어간 전해철(全海澈) 민정수석비서관은 고려대 출신의 386세대 변호사로 전국연합 인권위원과 민변(정칙명칭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언론위원장 및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비상임위원을 지냈다.

이들은 임명 당시 대다수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이었다. 비서관 31명 가운데 23명이 40대였고, 3명은 30대였다. 청와대의 운동권 출신수는 노무현의 집권후반기에는 상당히 줄었지만 2006년 10월 현재 비서실의 행정관 이상 268명 중 30〜40명 이상이 NL계열 운동권 출신이었고, 그 이전에 이미 퇴직한 171명 중에도 수십명이 있었다.
 
‘주체사상 메모리칩이 머리속에 박힌 386들’

학생시절인 1980년대에 반미청년회 핵심간부를 지내고 뉴라이트로 돌아선 인터넷매체《프리존뉴스》편집인 강길모는 2006년 11월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개최된
 
자유민주주의학회에서 자신이 열린우리당 소속 국회의원 우상호 오영식(吳泳食), 청와대 제1부속실장 문용욱, 제2부속실장 이은희(李恩嬉), 청와대 대변인 김만수, 제1부속실 행정관 여택수(呂澤壽)에게 주체사상을 교양했다고 주장해 파문이 일어났다.
 
그는 정권에 들어간 운동권들은 전향을 하지 않고 ‘주사 메모리칩’이 머릿속에 박혀 있어서 모든 현안을 ‘북한 정권의 이해’에 비추어 판단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당사자로 거론된 본인들은 강길모의 주장을 부인하면서 “그는 과거 정권부터 한나라당 골수분자로 언론을 이용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청와대에 들어간 386참모들은 공식, 비공식으로 국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들은 국정경험 부족으로 정부 각료 및 열린우리당 지도부와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다.
 
정권 초기에는 국가기밀인 국정원 간부들의 사진을 언론에 흘리고 비서관들이 가족과 함께 공무용 소방헬기를 탑승하는 등 기강해이를 보이기도 했다.
 
386참모들의 부패스캔들은 여론을 들끓게 했다. 노무현의 최측근으로 ‘우 광재, 좌 희정’으로 불린 이광재 전 대통령국정상황실장과 안희정(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 정무팀장) 열린우리당 충남 창당준비위원장, 그리고 ‘20년 집사’로 알려진 최도술(崔導術) 전 총무비서관 역시 SK 비자금을 받은 혐의로 구속 또는 불구속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
 
노무현의 광주 경선 1위 돌풍의 숨은 주역이었던 양길승(梁吉承) 전 제1부속실장과 여택수 제1부속실 행정관도 검찰의 조사를 받았다. 임기 후반기에 비리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 대표적인 케이스는 노무현의 386 측근인 정윤재(鄭允在) 전 의전비서관이다.

노무현은 정부 출범 10개월 만인 2003년 12월 청와대 비서실을 대폭 개편, 17대 국회의원 총선출마자 11명을 포함한 386비서관 23명이 물러남으로써 취임 초 비서관 3분의 2가 교체되었다. 386참모 가운데 유임한 비서관급은 윤태영(대변인) 천호선(정무기획) 황이수(黃二秀, 행사기획) 등이었다.
 
2004년에 실시된 총선에는 비서실의 대폭인사가 있기 전에 출마를 위해 미리 청와대를 떠난 이광재를 비롯해 모두 19명의 청와대 비서관 출신이 출사표를 던졌다. 그러나 2명은 사전선거운동 혐의로 구속되고 10여명이 당선, 나머지는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NL계가 주류를 이룬 청와대 386참모들은 북핵문제가 불거졌을 때 북한을 감싸기가 일쑤였고 친북단체의 폭력시위에 대해서도 관대했다. 노무현 취임 초기에 청와대 치안비서관을 역임한 바 있으며 시위농민사망사건으로 재야단체들의 압력에 의해 경찰총수 자리에서 물러난 허준영(許准榮) 전 경찰청장은 “청와대 비서관들이 불법 폭력시위에서 연행된 이들을 석방하라는 요구를 자주 했다”고 폭로했다. 그에 의하면 일부 386비서관은 또한 공사구별을 못하고 전날 밤에 늦게까지 토론을 했다는 핑계로 이튿날 한낮이 되도록 출근을 안 하는 경우가 있었으며 유인태 정무수석비서관 아래 자신을 제외한 5명의 비서관 모두가 감옥을 다녀온 운동권 출신들로 어떤 비서관은 회의도중 유인태를 ‘형’이라고 부르는 일까지 있었다는 것이다.

4. 열린우리당 창당과 해체 

여당에 진입한 운동권 출신

노무현 정부 출범 9개월 만에 민주당 내 동교동비서 출신 구주류와 당개혁 문제로 갈등을 빚은 친노그룹의 신주류세력은 민주당을 탈당, 새 살림을 차렸다. 개혁과 지역당 탈피, 그리고 국민통합을 이룩한다는 명분 아래 창당된 열린우리당은 민주당 내 친노무현계인 김근태 임채정(林采正) 이해찬 장영달 이재정(李在禎) 등을 비롯한 진보-좌파 성향의 국회의원 47명이 주축이 되었다.
 
유시민(柳時敏) 김원웅(金元雄) 등이 이끌던 개혁국민정당(약칭 개혁당)도 자진 해산하고 열린우리당에 합류했다. 열린우리당은 2003년 11월 창당대회에서 ‘새로운 정치, 잘사는 나라, 따뜻한 사회, 한반도 평화’ 등 4대 강령과 국민참여 및 통합의 정치 등 100대 기본정책을 채택했다.
 
 열린우리당의 정강정책은 김대중 정부의 노선을 상당 부분 이어받은 바탕 위에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 공약을 충실히 반영했으나 기본적으로 민주당의 정책 노선과 큰 차이가 없었다. 열린우리당은 남북문제에 관해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계승한 노 대통령의 ‘평화번영정책’을 정강정책에서 구체화함으로써 한나라당의 대북강경정책과 대조를 보였다.
 
당의 강령을 구체화한 기본정책 가운데는 한미관계의 수평적 관계 개선, 동북아경제중심 구축, 지방분권 추진을 통한 균형 발전, 부당한 부의 대물림 근절 등 노무현 대통령의 선거공약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점이 특징이었다.

2004년 4월에 실시된 제17대 총선은 열린우리당을 152석의 거대 여당으로 만드는 동시에 운동권 출신들이 대거 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주도해서 국회에서 통과시킨 노무현에 대한 탄핵소추안의 역풍이 주된 이유였다.
 
열린우리당 당선자 가운데는 1백여명이 초선이었는데, 전대협 출신만 10여명, 그리고 여야를 통틀어 386세대 당선자는 55명이었다.
 
이 때 당선된 운동권 출신 의원은 심재철(沈在哲, 안양동안갑, 서울대 총학생회장), 고진화(高鎭和, 영등포갑, 성균관대 총학생회장) 등 한나라당 소속도 있었으나 열린우리당 소속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열린우리당 김근태 원내대표를 비롯해서 이인영(李仁榮, 구로갑, 고려대 총학생회장). 오영식(강북갑, 고려대 총학생회장). 우상호(서대문갑, 연세대 총학생회장). 정봉주(鄭鳳株, 노원갑, 한국외대 민추위회장), 우원식(禹元植, 노원을, 연세대). 이화영(李華泳, 중랑구갑, 성균관대). 우윤근(禹潤根, 광양구례, 전남대) 등 긴급조치 위반자 및 기타 386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 중 이인영, 오영식은 전대협 의장을 지냈다. 개혁당 출신은 김원웅(대전대덕, 서울대). 유시민(고양덕양갑, 서울대)을 주축으로 유기홍(柳基洪, 관악갑, 서울대 민청련의장). 김형주(金炯柱, 광진을, 한국외대). 이광철(李光喆, 완산을, 민통련). 강기정(姜琪正, 광주북갑, 전남대), 김태년(金太年, 성남수정, 경희대총학생회장), 김재윤(金才允, 제주 서귀포남제주, 명지대) 등이다. 이들 중 전남대 삼민투 위원장 출신인 강기정은 6선 관록의 민주당 김상현(金相賢) 후보를 꺾고 국회에 진출했다.
 
노무현의 386 핵심 참모들 가운데는 연세대 운동권 출신이자 ‘참여정부의 실세’였던 전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이광재(영월평창, 연세대)와 청와대 의전비서관 서갑원(순천, 국민대), 그리고 전대협 연대사업국장 출신인 전 청와대 정무비서관실 행정관 백원우(시흥갑)도 원내에 들어왔다. 이들 이외에 국회의원 보좌관과 비서들을 합하면 운동권 출신들이 여야를 통틀어 100여 명이 넘었다.
 
국회의 권력중심, 좌향좌

운동권 출신들의 대거 진입으로 제17대 국회는 과거 보수일색이던 권력의 중심이 우에서 좌로, 보수에서 진보로 움직였다. 제헌국회 이후 줄곧 보수 일색이었던 국회가 보수-진보간의 경쟁체제에 들어섰음을 보여주었다.
 
이 사실은 당시 동아일보사가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모종린(牟鍾璘) 교수팀과 공동으로 17대 당선자 전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서면 및 대면 인터뷰를 근거로 한 이념성향 분석에 의해 밝혀졌다. 이 분석에 의하면 원내 제1당이 된 열린우리당 소속 당선자들은 평균적으로 진보에 가까운 중도성향을, 원내 제2당이 된 한나라당 당선자들은 평균적으로 중도보수를 각각 이념적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들 386운동권출신의 성향을 그들이 활동했던 시기별로 보면, 1987년의 민주항쟁 이전의 386세대 활동가들로는 CA 계열의 리더였던 열린우리당 민병두(閔丙梪) 총선기획단장이 비례대표로 당선되었고 80년 ‘서울의 봄’ 당시 고려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신계륜(申溪輪, 성북을)은 3선에 성공했다.
 
같은 고려대 총학생회장 출신의 김영춘(金榮春, 광진갑)과 연세대 총학생회장 출신의 송영길(宋永吉, 계양을)은 재선에 성공했다. 또한 전 전남대 총학생회장 강기정(광주북갑)과 노동운동을 한 이화영(李華泳, 중랑갑) 및 연세대 학생회 활동을 하다가 당시 인권변호사였던 노무현과 인연을 맺은 이광재(영월평창)도 같은 계열이다.
 
이들은 대체로 민중민주주의(PD)노선과 그로부터 갈라져 나온 제헌의회파(CA) 계열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에 비해 민족해방파(NL) 계열이 주류를 이루었던 1987년 이후의 활동가들인 전대협 세대에서는 모두 10명이 당선되었다. 이인영은 고려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전대협 1기 의장을 지냈으며 역시 고려대 총학생회장 출신인 오영식은 전대협 2기 의장, 재선에 성공한 임종석은 1989년 임수경을 전대협 대표로 북한에 파견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한양대 총학생회장 출신의 전대협 3기 의장이었다.
 
전대협의 1, 2, 3기 의장이 모두 열린우리당 의원으로 원내에 진입한 것이다. 서울 서대문갑구에서 재선된 우상호는 전대협 1기 부의장이었다. 그는 87년 6월 연세대생 이한열(李韓烈)군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할 때 옆에서 부축했던 인물이다.
 
김태년 역시 경희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전대협 간부였으며 백원우(시흥갑, 고려대)는 2기 전대협 연대사업국장을 거쳐 청와대 행정관을 지냈다.
 
대통령행정관을 지낸 최재성(崔宰誠, 남양주갑)은 동국대 학생회장 출신이며 이철우(李哲禹, 연천포천, 서울시립대)와 정청래(鄭淸來, 마포을, 건국대)도 전대협 간부 출신이다.
 
“좌파이미지가 열린우리당의 실패 불러”

열린우리당은 노무현의 실정으로 차츰 인기가 동반 하락했다. ‘백년정당’을 자임하면서 열린우리당을 만든 친노무현파 의원들은 노무현의 인기가 바닥권에서 헤매던 정권말기에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하듯 앞을 다투어 탈당했다.
 
당 밖으로 나가서 시민단체들과 함께 개혁적 통합신당을 창당하겠다면서 초기단계에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천정배(千正培) 의원은 2007년 1월 인터넷언론 기자들과의 오찬간담회에서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서는 뛰어내려야 한다. 그게 사는 길이며, 이는 공적인 생존의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노무현의 최측근 중 한 사람으로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와 법무장관을 역임했었다. 그와 행동을 같이 한 386세대의 변호사 출신인 최재천(崔載千) 의원(성동갑)은 “무능과 무책임, 무생산의 질곡에 빠진 당이 창조적 분열을 해야 한다”면서 “민주주의를 심은 시민들의 희망을 위해 원내 제1당, 여당이라는 집을 떠나 광야로 나올 때”라고 주장했다.
 
이 무렵 386세대 의원 자신들에 대한 평가도 급속히 떨어졌다. 민노당 진보정치연구소가 2006년 8월 한길리서치에 의뢰, 국회 공무원. 출입기자 100명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 결과 386세대 의원들이 ‘17대 국회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집단 1위’(78.8%)로 뽑혔다.

천정배 보다 약간 늦게 열린우리당을 탈당하고 ‘중도개혁통합신당추진모임’(대표 최용규 의원)을 만든 김한길 강봉균(康奉均) 등 전 노무현계 의원 23명은 새 원내교섭단체를 만들기 위해 2007년 2월 경기도 용인시 중소기업인력개발원에서 워크숍을 갖고 열린우리당의 문제점을 토론했다.
 
이 자리에서 김대중 정부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을 지낸 이강래(李康來) 의원은 열린우리당 창당 때 민주당 박상천(朴相千) 전 대표가 자신에게 “당신들은 틀림없이 좌파 정당을 만들 것”이라고 말한 사실을 소개하면서 “17대 총선 이후 당헌 개정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개혁당 그룹과 갈등을 빚다가 그 말뜻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열린우리당의 실패를 ‘노무현 대통령의 15가지 잘못’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면서 그의 반복적 말실수, 코드인사, 언론과의 적대적 관계, 고집·오만·독선, 싸움의 정치, 경험의 부족과 미숙, 정책의 일관성 부족 등을 꼽은 다음 열린우리당이 ‘좌파 정당’으로 인식된 점을 실패의 원인으로 들었다.
 
그 이유는 열린우리당이 개혁당·운동권 출신 의원과 청와대의 386 출신 참모들, 그리고 일부 기간당원들의 ‘좌파’ 이미지를 탈색하지 못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강래는 “청와대의 좌파적 386과 개혁당 출신, 108명의 초선 의원들이 섞이면서 (열린우리당은) 완전히 잡탕 비빔밥이 되어 버렸다”고 자평하면서 “이들이 좌파적 색채를 강화했다”고 지적했다. 이 자리에서 조선대 총장 출신인 양형일(梁亨一) 의원(광주동)은 17대 총선 직후인 2004년 5월 노무현이 열린우리당 당선자들을 청와대 영빈관으로 초청, 만찬을 베푼 자리에서 386세대 당선자들과 당중앙위원들 33명이 운동권 노래인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한 사실을 소개한 다음 “노래를 부르면서 적절한가를 생각했다.
 
이후로도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용기 없이 따랐던 제 자신을 탓하고 싶다”고 회고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 이날 청와대 모임은 어떤 자리였는가. 만찬모임 참석자의 한 사람인 전민련 출신의 정봉주 당선자는 나중에 친노 정치포털사이트인《서프라이즈》에 올린 ‘청와대 만찬 감상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시위현장도 파업현장도 아닌 청와대에서, 그것도 대통령이 함께 한 자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한반도 전체에 울려 퍼져 나가고 있었다.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런 날이 오게 될 줄을…
 
흥미로운 사실은 이날 노무현이 만찬 참석자 전원에게 ‘노무현 시계’와 함께《제3의 길》의 저자 기든스가 쓴 책《노동의 미래》를 선물한 점이다. 기든스는 영국 노동당의 새 노선을 밝힌 토니 블레어 총리의 브레인이었다.
 
대선 패색 짙어지자 붕괴의 길로

그러나 열린우리당은 2007년 들어 17대 대선의 패색이 짙어지자 당내 갈등으로 파열음을 내기 시작하더니 끝내 소멸하고 말았다. 탈당파들이 연합해서 그해 8월 원내의석 85석의 대통합민주신당을 창당하고 대통합민주신당은 다시 잔류파들이 남아있던 원내의석 58석의 열린우리당을 흡수 합당해서 의석 143석의 원내제1당이 되었다.
 
노무현은 이에 앞서 그해 2월 열린우리당 지도부의 요구로 당을 탈당했다. 이어 그해 11월 대선 직전에는 과거에 노무현의 탄핵소추안을 한나라당과 함께 공동 발의했던 민주당의 후신인 중도통합민주당과 통합민주당(가칭)이라는 이름으로 합당, 세칭 ‘도로 민주당’으로 환원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곧 양당간에 당직 지분문제로 이견이 생겨 대선 전 양당의 합당은 실현되지 못했다.

노무현을 지지하던 열린우리당이 분당과 합당을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당내 386세대들도 이합집산을 거듭했으나 결국 대통합민주신당에 다시 모이게 됨으로써 이강래가 말한 ‘좌파잡탕 비빔밥당’의 체질을 그대로 유지한 채 2007년 12월 대선에서 3공 이후 여당으로서는 최악의 대참패를 맞았다. 대통합민주신당은 대선 패배 후 이해찬 유시민 김두관 등 친노무현계열이 탈당하고 난 다음 당초 합의대로 민주당과의 합당을 실현함으로써 노무현당의 실험은 ‘한 여름 밤의 꿈’처럼 완전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출처:moonilsuk@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