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향의 풍경

대구의 향수를 말한다...

구봉88 2009. 8. 30. 16:57

대구의 향수

 

동산 언덕 위에 자리잡은 선교사 주택. 100년 전 미국인 선교사가 살았던 집은 요즘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대구 시민이 꼽는 최고의 웨딩사진 포인트.

계산성당

 

우리나라에서 셋째로 큰 도시 대구. 그러나 여행자에게 대구는 그리 인상 깊은 도시가 못 된다. 특출한 역사적 배경도, 내로라하는 음식도 전해지는 게 별로 없어서다. 그저 유난히 뜨거운 여름과 6·25전쟁 당시 피란민이 모여 살던 비좁은 골목, 역사와 무관한 고층 빌딩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그러나 대구에도 역사의 흔적은 있다. 한 세기 전 근대화의 흔적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 이후 복닥거리며 살던 우리네 모습이 골목 모퉁이마다 들어앉아 있다. 대구는 그 후미진 골목으로 인해 여느 대도시와 구분된다. 옛 대구읍성 언저리를 얼기설기 이어붙인 좁은 길 안에 100년의 역사가 숨쉬고 있다. 그래서 대구에선 골목을 봐야 한다. 대구의 문화운동단체 거리문화시민연대가 8년간의 답사 끝에 완성한 ‘대구 골목 투어’의 대표 코스인 ‘남성로~종로~진골목’을 중심으로 돌아다녔다.

사과의 고향 동산 선교사 주택

옛 대구읍성 남서쪽에 동산(東山)이란 언덕이 있다. 이 언덕에 100여 년 전 미국 선교사들이 들어와 학교를 짓고 병원을 세웠다. 그 학교가 대구 최초의 여자학교 신명학교이며, 그 병원이 지금도 대구에서 가장 유명한 동산병원이다. 언덕 위 제일교회 왼편에 그림 같은 주택이 줄지어 있다. 미국 선교사들이 살았던 곳으로 지금은 교육·역사·의료 박물관 등으로 쓰이고 있다. 배경이 예뻐 요즘엔 웨딩사진 촬영지로 인기가 높다. 영화에도 제법 등장했다. 또 언덕 곳곳엔 역시 선교사들이 심은 사과나무가 자라고 있다. 대구의 명물 사과는 그러니까 이 언덕이 고향인 셈이다.

프랑스 선교사가 설계한 계산성당

대구에서 가장 역사적인 공간으로 꼽히는 건물이다. 프랑스 선교사가 설계했고, 서울 명동성당을 지었던 중국인들이 내려와 1902년 지었다. 서울·평양에 이어 세 번째 세운 고딕 양식의 성당으로 사적 290호다. 성당의 지금 모습 자체가 하나의 역사다. 스테인드글라스에 12사도 말고도 서상돈·김종학·정규옥 등 대구의 초기 천주교 신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성당 마룻돌은 대구읍성을 허물고 난 뒤 나온 돌을 깐 것이다. 계산성당은 한때 성모성당이라 불렸는데, 시인 이상화가 이 성당에서 영감을 얻어 ‘나의 침실로’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와 결혼한 장소로도 유명하다.

대구 시민이 지켰다 이상화 고택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인 이상화(1901~43)가 숨지기 직전 4년을 살았던 집이다. 8월 12일 개관을 앞두고 한창 마무리 공사 중이다. 시인이 죽은 뒤 이 집은 한동안 요정으로 쓰였고, 이 일대가 재개발되면서 철거될 위기에 처했다. 이때 대구 시민들은 50만 명이 서명한 탄원서와 모금액 8600만원을 들고 대구시청을 찾아갔다. 2006년 이 일대를 구입한 건설회사가 상화 고택을 대구시에 기증해 겨우 지켜낼 수 있었다. 예약을 하면 문화해설사가 설명해 준다. 053-256-3762. 건너편엔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서상돈(1850∼1913) 선생의 고택이 있다.

가수 현미가 떡장사했던 곳 염매시장

‘염가판매’시장의 준말이다. 대구읍성 바깥에 늘어선 좁은 시장 골목이 100년이 다 되도록 유지되고 있다. 혼수 떡 전문의 떡전골목, 돼지고기 수육을 전문으로 하는 수육골목, 이유식 골목 등이 규모는 축소됐지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가수 현미씨가 한국전쟁 중에 피란을 왔다가 여기서 떡장사를 했단다. 이 시장 끄트머리의 ‘곡주사(053-255-4524)’란 선술집은 70년대부터 대구 대학생의 아지트로 유명한 곳이다.

어르신 위한 명소 미도다방

진골목. 경상도 말로 ‘길다’가 ‘질다’로 통해 붙은 이름이다. 그만큼 길게 이어진 골목이란 뜻이다. 조선시대 때부터 있던 골목으로 1905년 대구읍성 지도에도 표시돼 있다. 진골목 모퉁이마다 들어선 식당·의원·요정·다방은 하나같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미도다방(053-252-9999)’일 듯싶다. 여기가 특별한 건 어르신만을 위한 다방이어서다. 손님 모두 60대 이상 어르신이다. 정인숙 사장(사진)이 82년 처음 문을 열었고, 그 뒤로 대구·경북 지역의 원로 정치인·유림·문인 사이에서 명소가 됐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비롯해 박준규 전 국회의장, 김종필 전 총리도 들렀단다. 약차 2000원, 커피 1500원.

한약 냄새가 몸에 밴 약전골목

대구 약령시 약전골목에 들어섰다. 700m가 넘는 거리에 한약방·약업사·제분소 등이 빽빽이 들어찼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한약 골목이란 설명이 무색하지 않다. 60년대만 해도 약초꾼 사이에서 “영 쇠러 가다”란 말이 돌았단다. 똑같은 약초라도 대구 약령시에 들어왔다 가야 효험이 있다 해서 생긴 말이란다. 약전골목 복판 제일교회 옆에 약령시한의약전시관이 있다. 약전골목 바로 위가 화교 집성촌 장관동이다. 이곳은 한국문학사에서도 소중한 공간이다. 소설가 김원일씨가 자신의 피란 시절 경험을 담은 소설 『마당 깊은 집』의 배경이 이 동네다.

 

달라지는얼굴 지~ㄴ  골목

 

골목에도 생명이 있다. 골목을 이루는 사람들의 삶이 만드는 생명이다. 단순히

흥망성쇠(興亡盛衰) 한 마디로 나타내기엔 허전하다.

시시각각 다른 인생의 격동에야 비할 수 없겠지만, 골목의 생명에도 가슴을 움직이는 스토리가 있다. 한 세기도 지나지 않는 동안 제 스스로 혹은 주위 영향으로 몇 번이나 얼굴이 달라진 진골목에는 더욱 더 많은 스토리들이 묻혀 있을 게다.

지금처럼 묻어두면 언젠가 골목과 함께 운명을 다하겠지만, 찾아내 갈고닦으면

골목의 생명을 더욱 빛나게 할 것이다.

 

▲육개장과 호박전, 골목을 바꾸다

 

“호박전이 제일 인기였지. 1년에 호박값만 700만원 나갔어. 한 개 8천원 정도. 1년 열두 달 호박을 계속 사야 해. 다른 데 가면 호박전을 조그맣게 굽는데, 연구를 했지. 호박을 삶아가지고 넓적하게 구웠는데 손님들 반응이 너무 좋은 거야. 다른 음식은 팔아봐야 이문이 별로 없는데 호박전은 좀 나았어. 장사하는 데 참 효자였지.”

정예숙(59·여)씨는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긴 진골목을 지금의 얼굴로 바꾸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육개장과 육국수, 호박전과 콩나물밥을 전국적인 명물로 만든 주역이다.

 

“염매시장에서 식당 하다가 1986년에 진골목으로 들어왔어. 그때는 식당이라고 해봐야 두 집, 으슥한 골목이었지. 처음엔 국수를 팔았어. 손님이 늘면서 국수만 먹으면 질린다고들 해서 육개장을 끓이기 시작했지. 그런데 너무 맛있어서 낮에 12시40분만 되면 국이 떨어지는 거야. 저녁에는 새로 안 끓이니까 몇 솥을 끓여도 낮에 잠시 팔면 끝이었지. 그러다 보니 오전 11시30분만 되면 어르신들이 오기 시작하더라고.”

 

맛 내는 비법을 묻자 정씨는 “좋은 재료를 쓰고 많이 넣으면 맛은 절로 난다”고 했다. “한번은 육개장을 조금 더 팔아보잔 욕심에 물을 좀 더 부은 적이 있어. 그랬더니 손님들이 금세 알아차리시더군. 어르신들께 꾸지람 많이 들었어. 그날을 늘 가슴에 새기며 살지.”

 

종로 일대를 드나들던 중장년층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진골목에 식당이 하나 둘 들어섰다. 1980년대 들어서도 영업을 하던 요정들도 골목의 변화에 따라 하나 둘 간판을 내렸다. 최고급 요정이 떠난 자리를 중저가 식당들이 차지했으니 골목의 변천이 참 묘하다.

 

▲전통의 삼색 맛이 교차하다

진골목은 1970년대 후반 동서간 소방도로 2개가 뚫리면서 허리가 잘려 푸근함과 정취를 잃고 말았다. 긴 골목이라는 이름도 무색해졌다.

하지만 소방도로는 중앙로와 종로, 그 사이의 진골목을 소통시켜 새로운 풍경을 만들었다. 화교들이 정착한 종로에는 일제시대부터 유명한 중국요리집이 많았다. 영생덕, 복해반점, 경미반점 등이 지금까지도 맛과 전통을 자랑하며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진골목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며 새로 난 농협 옆 소방도로에 식당들이 들어섰는데 이 가운데 일부는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종로초밥과 미성초밥이 대표적이다. 비싸지 않은 회와 초밥, 오뎅국물과 정종이 수많은 중장년층 단골들을 만들었다. 오랜 솜씨가 빚어낸 독특한 일식요리는 종로의 또 다른 명물이다.

 

여기에 육개장과 빈대떡, 탕과 찌개를 주요 메뉴로 하는 한식당들이 진골목에 들어서니 전통 있는 한·중·일식을 한곳에서 맛볼 수 있는 독특한 지역이 됐다. 종로초밥은 물론 일대의 보리밥집과 갈치찌개집 등이 저마다 30년 전통을 내세우는 유래다.

 

▲중절모와 넥타이

진골목에는 현재 식당이 여럿 들어와 있지만 실제로 거주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 때문에 골목의 주인은 주민이라기보다 식당과 상가 이용자들로 보는 게 좋을 듯하다.

 

가장 많이 진골목을 점유하는 건 노년층이다. 진골목 한가운데에 있는 미도다방을 중심으로 하루 500~1천명의 어르신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식당마다 오랜 단골이 있지만 전체적인 평판은 미도다방에서 판가름난다. 대구 각지의 단골 어르신 300~400명이 거의 매일 ‘출근’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식당의 맛이나 서비스는 여기서 금세 소문난다.

 

정예숙씨는 “이 동네에서는 음식값을 살짝 올린다거나 맛이 바뀌면 점심 식사 후 곧바로 퍼진다”며 “장사 흥하고 망하는 게 어르신들 평가에 달렸다”고 말했다.

정소아과옆에서 등나무식당을 하는 김경희(58·여)씨는 “10년 이상 변함없이 찾아오는 단골들이 많다”며 “70대면 젊고 80대, 90대 어르신도 자주 찾으신다”고 했다. 김씨가 자신있게 내놓는 추어탕에는 뻑뻑할 정도로 고기가 많았다.

 

“조금만 고기를 적게 써도 나무라시니 남는 게 적어도 어쩔 수가 없어요. 12년째 이 식당을 하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다달이 모임을 갖는 분도 있어요. 항상 같은 음식만 잡수러 오시니 메뉴를 바꾸기도 쉽지 않아요. 이젠 손님들이 좋아하는 음식과 반찬, 넣으면 안 되는 것까지 알기 때문에 별말씀이 없으시면 집처럼 알아서 상을 차려드리죠.”

 

진골목의 또 다른 이용층은 직장인들이다. 동아쇼핑, 삼성프라자 등에서 가까운 진골목의 남쪽 식당들에는 점심시간마다 직장인들이 몰려든다. 진골목식당을 비롯해 일대 식당에선 노인들과 직장인들이 뒤섞여 앉은 모습을 매일 볼 수 있다. 저녁시간의 경우 종로초밥 골목에서 비슷한 풍경이 벌어진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들어오기엔 아직 힘들어 보인다. 김경희씨는 “중앙시네마가 영업할 때 젊은 사람들을 끌기 위해 분식 메뉴도 넣어봤지만 전부 동성로로 건너가더라”며 “한옥과 어르신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 때문에 진골목에 활력을 불어넣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