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생활문화

중국 현대사의 이해

구봉88 2010. 4. 13. 14:28

중국현대사의 이해와 전망
 김학관 교수

2009년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49년 10월 1일, 중국공산당은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게 되었다.

 

실상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1919년 오사운동으로 표출된 반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운동 그리고 정치적 경제적 고난 가운데 분열된 민심을 이용하여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1924년에는 용공정책으로 지배세력을 구축하게 되었으며, 1937년 이후 중일전쟁으로 인해 혼란한 시기에는 제1.2차 국공합작을 이뤄냄으로 공산혁명의 세력을 구축하게 되었다. 또한 1945년 8월 일본에서 해방한 후, 중국공산당은 그들의 결집된 세력으로 이미 항일전쟁과 내분 그리고 민심의 동요 등으로 약화된 국민당을 물리침으로 공산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현대중국은 국부 손중산(孫中山)이 바라던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현대에 이르기까지 공산당의 변형된 전제정치로 회귀하게 되었다.

 

1950년대를 지나면서 현대중국은 소련식 경제계획제도에 의한 공업정책들과 대약진운동의 큰 실패를 경험했으며, 또한 1960년대에는 문화대혁명을 통해 엄청난 사상과 문화의 10년 재앙을 겪었다.

 

그 후 1970년대에 이르러 중국공산당은 개혁개방의 도전시기를 겪으면서 사상이냐 개혁이냐, 사회주의의 핵심사상은 무엇이냐, 정치와 경제 가운데 무엇이 우선인가라고 하는 새로운 과제를 풀어야만 했다. 한편 모택동의 사후에는 개혁을 위한 당내투쟁과 진통을 겪게 되었으며, 결국 등소평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980년대에는 미온적인 개혁개방의 한계와 천안문사태를 겪으면서 사회주의 발전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되었으며,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중국식 특색 있는 사회주의라는 구호아래 전면적인 대외개방을 통한 진정한 개혁개방을 실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0년대에는 중국공산당은 중화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일당독재를 더 한층 공고히 하는 한편 2001년 WTO가입과 2008년 북경올림픽 개최,

 

그리고 2010년 상해세계박람회의 개최 등을 통해 중화민족의 부흥과 사회주의

건설을 꾀하고 있다.

1. 중국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었을 때, 일본은 중국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세계대전이 끝나자 독일에 대한 전승국인 일본,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은 파리평화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이 회의에서는 독일이 산동성에 가지고 있던 권익을 일본에게 양보하라는 일본의 요구를 결의하였다.

 

그러자 1919년 5월 4일 북경의 대학생들이 파리강화회담의 결의를 반대하는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애국운동을 일으켰다.

 

이 운동은 전국적인 대규모 민중운동으로 파급되어 민족적인 위기를 호소하고 국산품 장려운동과 일본 상품불매운동을 펼쳤는데, 결국 정부는 친일파 각료를 해직하고 파리강화조약 조인을 거부하게 되었다.

이 오사운동은 중국공산당의 창당이라는 중국현대사의 새로운 전환점을 제공했는데, 1917년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은 지식인들에게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해 주었으며, 민족주의자들은 소련이 중국과 맺은 불평등조약과 이권을 포기한다는 선언에 많은 감명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0년 5월 1일 진독수(陳獨秀)는 상해의 7개 노동단체와 연합하여 세계노동절기념대회를 열게 되었는데, 이 대회는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노동자들이 결합한 최초의 운동이었다. 그 후 1920년 8월 공산당의 창당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10월에는 중국공산당 북경지부를 조직하였고, 11월에는 ‘공산당’이라는 월간잡지를 창간하였다. 또한 1921년 7월 상해에서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함으로 ‘중국공산당’이 정식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실로 중국 공산당은 1917년의 10월의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과 1919년의 오사운동을 계기로 대두된 마르크시즘과 세계대전을 전후로 형성된 노동자 계급의 등장 및 소련과 코민테른의 적극적인 정책 등이 결합되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당시 공산당의 세력은 국민당에 비하여 여전히 미약한 상태였다. 그러나 국민당 주석인 손중산은 러시아혁명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함께 1922년 9월에는 국민당의 조직과 주요직임에 공산당원을 임명하기에 이르렀다. 당시에 최초의 공산당원으로 국민당의 요직에 앉은 사람은 바로 진독수였다.

1924년에 손중산은 소위 신삼민주의(新三民主義)라 불리는 연소(聯蘇), 연공(聯共), 부조농공(扶助農工)의 3대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그 결과 국민당정부 안에서 이대조(李大釗)와 진독수 등 3명이 중앙집행위원에, 모택동(毛澤東) 등 4명이 중앙 집행위원 후보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이는 공산당이 실제적 정치세력으로 그 기반을 견고히 구축하는 데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당시 국민당 중앙집행위원에는 공산당이 약 1/4에 달하였으며, 상무위원 가운데에서는 약 1/3을 점유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중앙당상무조직의 실권을 가지기 시작하였으며, 고위직에도 2명의 장관과 3명의 비서가 선출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신삼민주의정책의 실시는 공산당이 적극적으로 국민당 내에서 그들의 사상과 이념을 전개하면서 국민당의 지도력을 분열시키는 기회를 제공하였으며, 궁극적으로는 국민당이 무너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결국 용공정책으로 공산당세력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과 결합하여 급속히 발전하였으며, 1925년 손중산이 서거하자 중국공산당은 점차 그들의 세력을 조직화하면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1927년에 공산당은 국민당과 대등한 위치에서 무한(武漢)에 혁명정권을 수립하였다. 이와 같은 좌파의 세력 확대를 두려워한 장개석(蔣介石)은 반공투쟁을 실시하였는데, 그 후 10년간에 걸친 국공내전이 전개되었다.

 

그 후 1934년 국민당의 포위를 벗어나기 위해 장정(長征)의 길에 오른 중국공산당은 항일민족통일전선을 제창하였다. 그 후 1936년 서안사건을 계기로 일치항일(一致抗日)을 내세우면서,

1937년 7월에 중일전쟁이 발발함과 동시에 제2차 국공합작을 이끌어 냄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후 1945년 일본의 패망을 맞이하였으며, 공산당은 항일전쟁과 내분으로 약화된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게 되었다.

실상 중국공산당은 국민당이 항일투쟁을 하는 동안 토지개혁의 미명 아래 농민들을 선동하여 정치세력을 확대해 나갔으며, 그 후 자연스럽게 국민적 신뢰와 세력이 약화된 국민당을 대치하는 지도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이미 민중들에게 형성된 강한 중화민족주의와 서구에 대한 반제국주의의 구호를 외치면서 정권을 물려받게 된 것이다.

 

2. 문화대혁명과 삼신위기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한 후, 중국공산당은 청조와 오랜 국민당 정부의 잔재를 몰아내고 공산주의식 정치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많은 사업을 전개하게 된다. 1951년 11월부터는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을 대항하고 북한을 지원한다)의 정책과 토지개혁 그리고 숙반운동(肅反運動:반혁명세력제거운동)을 실시하게 된다. 특히 숙반운동으로는 3반운동(반부패, 반낭비, 반관료주의)과 5반운동(준법자, 기본준법자, 반준법자, 위법자, 범법자로 분류하여 처벌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먼저는 지식층과 지주계층을 대상으로 실시되었고, 후에는 해외 연계세력과 종교 세력으로 확대하게 된다.

한편 중국공산당은 통치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 1952년 제1차 5개년 계획을 실시하게 된다. 그러나 경작방식의 개혁은 오히려 생산량의 감소를 가져왔고, 계획의 분산은 노동력과 기타 자원의 효율적 운영을 불가능하게 했다.

1956년에는 국민들의 성분을 분리하고 좌파세력들을 대대적으로 제거하였으며, 1957년에는 소위 ‘명방운동(鳴放運動)’을 전개하여 잔여세력들을 뿌리 뽑게 되었다. 이 명방운동은 중국공산당이 취한 반공사조(反共思潮)의 완화정책인 동시에 국민을 기만하여 반대파들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술수에서 나온 것으로, 당시 공산당은 이 명방운동에 참여한 청년학생들과 교수, 교사와 지식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숙청을 실시하였다.

1958년에는 중국 경제의 현대화를 가속화하려는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자연재해와 자본과 기술 그리고 경험의 부족으로 인해 2년만인 1960년 실패로 끝나게 된다. 이는 중국 국민들에게는 고통과 가난을 가중시키는 시련을 안겨 주었다. 또한 중국 지도부 내에 심각한 분열을 가져와 그 운동을 지지하는 과격파와 반대하는 온건파가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으며, 모택동도 정치무대에서 잠시 물러나게 되었다.

1961년부터는 급진적인 사회주의 건설 노선을 수정하여 유소기의 경제조정 정책을 채택하고 인민공사 제도를 수정함으로 중국 경제의 회복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중소분쟁의 심화로 기술원조의 중단 및 기술자 철수 사건이 일어나게 되고, 당내부적으로는 영구혁명론을 주장하는 모택동과 등소평, 유소기 등의 실용주의파 간의 대립이 시작되게 되었다. 결국 이는 문화대혁명에 의한 모택동의 정치적 보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1966년에는 모택동 측근의 문예비평가 요문원(姚文元)이 북경시 부시장 오함(吳含)을 비판한 논문 ‘신편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 비평’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문화대혁명이 촉발되게 되었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4구운동(四舊運動,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습관의 타도운동)을 전개하면서, 전통문화와 역사적 잔재들을 일소시키는 문화대혁명을 실시하게 된다. 사실 이는 모택동이 사회주의를 공고히 하고 반대파들과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세력을 청산할 목적으로 실시된 폭압적 정책이었다.

결국 모택동과 4인방(四人幇-江靑, 王洪文, 張春橋, 姚文元)을 중심으로 한 중국공산당은 10년 재앙을 주도해 나갔다. 전국적으로 모택동 우상화를 실시하는 동시에 인민들에게 모택동 어록을 가르치고, 사상토론회를 개최하고 공개비판회를 개최하면서 남은 반공산세력들을 제거하게 된다.

 

또한 북경대학교와 청화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젊은 공산청년들을 모아 홍위병을 구성하여, 전국을 돌면서 모든 문화적 유산들을 파괴하는 일을 전개하였다.

 

그 후 중국 공산당은 경제적 낙후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의 입지와 기반을 튼튼히 하게 되었다.

이 문화대혁명은 모택동, 임표의 주류파가 유소기, 등소평 등의 실권파를 숙청하는 3년간의 치열한 투쟁을 거쳐 모택동의 절대적인 지도체제를 확립하게 되며, 1969년 4월 모택동과 그의 추종자들은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임표(林彪)를 부주석으로 승진시키면서 당규약에 모택동의 후계자로 지명하는 규정을 삽입했다.

 

그러나 임표의 정치적 영향력이 급증하자, 이에 불안감을 느낀 모택동은 강청(江靑)을 중심으로 한 4인방을 권력핵심부에 포진시킴으로써 임표를 제거하려 했으며, 결국 임표는 1971년 9월 13일에 사망하고 말았다.

한편 1970년대 초반 중국은 경제 활성화가 당면 과제로 떠오르게 됐다. 이에 주은래의 천거로 실각한 등소평을 비롯한 많은 실천파들이 복권되자, 기존의 권력을 잡고 있던 4인방과 다시 충돌을 불러일으켰다.

 

1973년 8월에 중국공산당 제10차 대회는 임표(林彪)를 ‘기회주의자, 음모자, 탈당자, 반역자’로 지목하고, 모택동 사상을 확고하게 정립하고자 하였다.

 

그 후 4인방은 1976년 1월에 총리 주은래(周恩來) 추모로 일어난 군중시위 사건인 천안문사건(4.5운동)의 배후 조종자로 등소평을 지목해 그를 다시 실각하게 만들었다.

 

그 후 연이은 모택동의 사망(1976. 9), 주은래의 사망(1976. 1), 주덕의 사망(1976. 5) 그리고 당산대지진(1976. 7) 등이 일어나면서 문화대혁명은 일단락을 맺게 된다. 그러나 중국 국민들은 상호반목과 비판과 상호불신을 품고 다음 역사를 살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중국은 해방 후 3년간의 국공전쟁 시기(1946-1949)를 거치면서 무려 321만에 달하는 국민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1950년 이후 중국공산당은 국민당 잔여세력 약 170만 명을 살해하였다. 1952년에는 반혁명분자 약 50만 명을 처단하였으며, 또한 다시 약 450여만 명을 숙청하였다.

 

1957년에는 반혁명우파라는 죄목 하에 약 55여만 명을 타도하였다. 그 후 1968년에는 약 5400여만 명에 달하는 지식분자들을 하방(下方)하였다.


중국현대사에 있어서, 1976년은 실로 중국공산당이 말하는 삼신위기(三信危機, 공산주의의 위기, 공산당의 위기, 공산주의 영도력의 위기)이라고 할 만한 큰 사건을 기록한 한 해였다.

 

또한 중국공산당과 중국의 국민에게 개혁개방의 새로운 미래를 여는 중대한 계기가 되는 해였다. 이는 하나님이 중국역사에 친히 개입하신 산 증거라고 할 수 있다.

3. 개혁개방과 천안문 사태
등소평은 1978년 4개 현대화노선(과학기술의 현대화, 농업현대화, 공업현대화, 국방의 현대화)을 주창하면서, 이른바 중국식 실용주의 혹은 수정 자본주의의 형태의 경제개혁을 실시하게 된다. 그 후 1979년에는 미국과 국교를 수립하게 되었으며, 1980년 8월에는 심천(), 주해(珠海), 산두(汕頭), 하문(廈門)의 경제특구의 설치하였다.

1982년 12월에는 개혁개방의 정책들을 담은 신헌법을 채택하게 되었는데, 이 신헌법의 주요 내용으로는 주요 지도자 임기제 채택, 국가주석제 부활,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신설, 전국인민대표대회의 권한 강화, 특별행정구의 설치 등이다. 또한 1984년 5월에는 경제특구의 긍정적 성과를 바탕으로 다시 14개 연해항구도시를 개방하였으며, 1988년 4월에는 해남성(海南省)을 경제특구로 신설하였다.

한편 1989년 4월 15일 호요방(胡耀邦) 총서기가 사망하자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으로 호요방에 대한 명예회복 및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운동이 발생하게 되고, 시민, 노동자, 지식인까지 이 시위에 참가하게 된다.

 

 4, 5월에 걸쳐 민주화요구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고 천안문에는 지식인, 노동자, 일반시민, 학생 등 약 100만 명이 연달아 대대적인 집회를 개최하게 된다. 이때 온건파인 조자양(趙紫陽) 총서기와 강경파인 양상곤(楊尙昆) 국가주석, 이붕(李鵬) 총리측이 대립하게 되고 여기에서 강경파의 우세로 1989년 6월 4일 새벽 계엄군이 천안문광장에서 무기한 농성을 벌이던 학생, 시민들에 대한 무력진압을 전개한다. 시내 각처에서 시민과 계엄군의 충돌로 학생 36명을 포함한 319명이 사망하고, 민간인 부상자가 3,000명, 계엄군측 부상자 6,000명을 발생시킨 최악의 유혈사태가 발행했다.

이 천안문 사태는 당시 동유럽의 민주화와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의 붕괴, 지식층 인사들의 불만, 해외유학파들의 처우개선 요구, 고르바쵸프의 중국 방문들을 계기로 촉발된 것이었다. 중국정부는 이에 대하여 계엄을 선포하고, 학생들을 사살하는 엄격한 대응을 실시하였다.

 

그 후 1990년 6월 제13기 4중전회(中全)서 조자양 총서기는 민주화시위를 지지, 당을 분열시켰다는 이유로 총서기와 중앙군사위 제1부주석 등 모든 공직에서 해임되고 강택민(江澤民) 상해시 당서기 겸 정치국위원이 총서기로 선출된다.

 

그 해 등소평은 11월의 5중전회(中全會)에서 당중앙군사위 주석직을 넘겨주었으며, 1990년에는 자신의 마지막 직책이던 국가중앙군사위 주석직을 사임하고 후임으로 강택민 총서기가 두 직책을 승계했다.

1990년 1월 11일, 계엄령이 해제되고 천안문사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 후 중국지도부는 천안문(天安門)사건을 계기로 정치적 불안과 개혁개방의 미흡성을 자각하면서 새로운 사회주의 발전을 모색하게 되었다.

 

4. 중국식 특색 있는 사회주의

1992년 2월 등소평은 남순강화(南巡講話) 기간 중, 시장경제 체제의 도입을 통한 경제개혁과 개방을 추구할 것과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1992년 등소평은 진퇴양난(進退兩難)에 처한 당 지도부와 인민을 향해 공산당의 진로를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혁명은 생산력(生産力)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 가난은 사회주의가 아니다. 생산력을 해방시키고 발전시켜 양극화를 막고 공동부(共同富)를 실현하는 것이 우리는 목적이다. … 당정간부(黨政幹部)들을 혁명화(革命化), 청년화(年輕化), 지식화(知識化), 전문화(專門化)시켜야 한다. 그리고 100년은 동요하지 말고 이 노선대로 가라.” 이 말은 대내적으로는 개혁을 하고, 대외적으로는 개방을 하라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개혁을 통해 기존의 죽은 사상을 해방시켜 생산력을 높이는 데 장애가 되는 요소들을 제거하며, 문호를 개방하여 각국의 앞선 기술과 풍부한 자본, 선진적인 관리경험 등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1992년 10월 제14기 공산당 대회에서는 사회주의 시장경제 방침을 결정하고, 새로이 헌법을 수정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중국지도부는 전면적인 중국식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의 선언과 함께 소위 ‘중국식 특색 있는 사회주의(中國式特色社會主義)’라는 기치를 걸고 개혁개방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92년 8월에는 한중수교가 이루어졌으며, 한국의 대중국진출과 현대선교가 시작되었다. 한편 제3세대 지도자인 강택민은 1989년 6월 당 총서기 조자양(趙紫陽)이 천안문사건에 동조하였다는 이유로 실각하자, 제13기 4차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당 총서기에 선출되었다. 또한 1990년 4월에는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선출됨으로써 당과 정부의 전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전면적인 개혁개방시대의 중국을 이끌어나갔다.

 

5. 조화로운 사회건설

중국공산당은 개혁개방을 통하여 이제 온포(溫飽) 단계를 지나 안락한 소강(小康)사회를 지향하고 있다.

 

과거 등소평은 ‘흑묘백묘론(黑猫白描論)’을 주장하며, 실용주의 노선을 이끌었으며, 강택민은 ‘3개 대표론(3介代表, 공산당이 선진사회 생산력 발전, 선진문화 발전, 광범한 인민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논리)’을 정립하고, 공산당 당장(黨章)에 삽입하였다.

그러나 개혁개방의 표면적 성과와는 반대로 많은 사회문제들을 양산하였다. 특히 빈곤문제, 빈부격차가 개혁과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또한 부정부패의 척결은 공산당의 정통성에 위협을 주는 것으로 중국지도부가 사활을 걸고 추진하는 문제이다.

제4세대 지도자인 호금도는 1992년에 송평의 후임으로 중앙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위원회 서기로 취임하였으며, 1998년 국가부주석, 2002년 공산당 총서기, 2003년 국가주석을 거쳐 2004년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올라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2003년 국가주석에 오른 호금도는 ‘조화사회 건설(和偕社會)’을 국정의 방침으로 채택하였다. 이는 경제발전과 사회발전에 따른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안정적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논리이면서, 심각한 사회계층간의 갈등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더불어서 함께 이기는 것(和偕共)’을 의미하며, 안정을 기조로 하면서 발전을 지속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2007년 10월에 개최된 제17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호금도는 “개혁개방은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말하고, ‘과학발전관(科學發展觀)’을 주창하면서 지속적인 개혁개방의 추진을 선언하였는데, ‘이는 2020년까지 당과 국가의 분투목표라고 이며, 전국의 모든 민족과 인민의 근본이익이다’라고 선언하였다.

 

6. 중국 현대사회의 전망


21세기 초 중국공산당은 중화민족주의를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이념에 가장 중요한 도구로 활용하여, 향후 지속적으로 민심을 결집함으로 공산당의 영구집권을 도모하고 그들만의 지상낙원을 세우고자 꿈꾸고 있다. 그리하여 신화와 전통사상의 역사화작업(염제황제릉과 제의복원, 공자학원 건립 등)과 함께 주변국가들 간의 역사논쟁(동북공정, 발해공정, 몽고공정 등)을 통하여 자국의 위상을 증대시키려 하고 있다.


중국공산당은 21세기의 국정방향과 목표를 설정하였다. 먼저 그것은 1차 계획기간(2001년-2010년)의 10년 동안에는 국민총생산을 2배로 증가시켜 국민생활 수준이 소강생활(小康,생활이 안정된 상태)에 들어서게 하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2차 계획기간(2011년-2021년)에는 완벽한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구축하여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2021년)을 맞이하게 될 것이며, 신중국의 성립 100주년이 되는 2049년경에는 경제적인 부강과 문화적 현대화를 실현하는 사회주의 강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중국의 미래에 가장 중요한 과제는 ‘신용사회의 건설’에 있다. 오늘날 중국사회는 ‘신용(Integrity)’이란 말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빠져 있다. 비록 일부학자들이 중국경제를 낙관적으로 전망하지만, 실상 중국은 거품경제와 부패로 인해 조만간 엄청난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위기를 직면하면서 중국공산당은 정권유지를 위해서는 언제든지 기존의 사상과 방법을 바꿀 것이다. 또한 대외적인 개방을 확대하면서도 불안한 정치현실 때문에, 지금도 강력한 통제와 관리를 통해 독재를 유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오늘날 국제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새로운 질서 속에서, 중국 공산당이 어떠한 제도적 개혁을 통하여 국내외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지 그 방향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게 한다. 이제 중국의 변화는 분명 한반도의 판도변화와 아시아와 세계의 질서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 한편 지금 중국인들은 중국대륙에 아시아 최초의 민주공화국인 중화민국을 세웠던 중국의 국부(國父), 기독교인 대통령 손중산(孫中山)이 꿈꾸던 참된 민주공화와 삼민주의의 이상을 실현해줄 진정한 지도자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다.

 

참고도서

현대중국학입문(김학관 저, 청목, 2002)
손중산과 근대중국(김학관 저, 집문당, 2004)
성경의 눈으로 읽는 중국사(김학관 저, 예영,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