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생활문화

중국의 복식문화-치파오의 유래

구봉88 2011. 3. 26. 22:01

[치파오(旗袍)의 원류]

 

치파오의 기원은 멀리 춘추전국시기의 심의(深衣)로 거슬러올라간다. 심의는 춘추전국시대부터 한대(漢代)까지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을 받던 옷이다. 후세의 파오(袍: 중국식의 긴옷)는 아마도 이 심의와 어느 정도 연원관계가 있는 듯 하다. 사실 심의는 파오와는 다소 다르다. 심의는 투피스 형식으로 상의와 치마를 하나로 연결한 듯한 효과를 나타내고, 파오는 원피스 형식으로 상의와 치마의 구분이 전혀 없다. 후에 파오는 점진적으로 안정된 복식 스타일로 정착되어 발전하였다.

 

파오는 한대부터 관복으로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X자형 깃에 품이 넓고, 길이가 발등까지 닿으며, 소매가 넓으면서 끝이 좁고, 팔꿈치 부분이 원호 형태였다.

 

파오의 스타일은 시대별로 다르게 나타났지만 품이 넓고 길이가 긴 것이 가장 전형적인 것이었으며, 대체로 지식인이나 지배계층에서 즐겨 입었다.

 

소수민족이나 유목민족 지구에서 유행한 파오는 일반적으로 말타기나 활쏘기 등 격렬한 활동을 하기에 편리하도록 몸에 꽉 끼는 것이었다. 이러한 파오는 대체로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고 소매가 좁으며 품이 몸에 맞았다. 역사적으로 한족들도 이렇게 몸에 꽉 끼는 스타일의 파오를 여러 차례 수용한 적이 있었다. 조(趙)의 무령왕(武靈王)이 추진한 호복(胡服: 북방 유목민족 복장) 차림의 말타기와 활쏘기가 비교적 전형적인 사례이다.

 

당대(唐代)에도 호복은 일시에 유행하였는데, 개원(開元: 713~741) 천보(天寶: 742~755) 연간에 호복은 호장(胡粧: 유목민족 치장), 호기(胡騎: 유목민족의 말타기), 호악(胡樂: 유목민족의 음악)과 함께 당시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요(遼) 금(金) 원(元)과 청(淸) 왕조 등 소수민족 정권의 통치시기에 몸에 꽉 끼는 파오는 복식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청대는 통치시기가 가장 길면서도 안정되었기 때문에 파오는 전형적인 복식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청(淸) 순치(順治) 원년(1644)에 세조(世祖)가 중원으로 쳐들어와 북경에 도읍을 정하고 전중국 통일하였다. 그후 정권이 점차 안정되면서 변발의 강요와 함께 의복제도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때부터 상의에 치마를 입던 투피스 형식의 복장은 한족 여인들이 집안에 있을 때만 입었고, 공식적인 장소에서는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파오를 입어야만 했다. 그 결과 파오의 종류도, '차오파오'(朝袍), '롱파오'(龍袍: 용포, 황제가 입던 용무늬를 수놓은 예복), '망파오'(蟒袍: 망포, 대신들이 입던 이무기 무늬를 수놓은 예복), '창푸파오'(常服袍: 평상복) 등으로 많이 늘어났다.

 

의미상에서 보면 치파오(旗袍)는 만주족들이(남녀 불문) 입던 창파오(長袍)이지만, 팔기(八旗)의 여성들이 평상시에 입던 창파오만이 후세의 치파오와 혈연관계를 가지고 있다.예복으로 사용한 차오파오와 망파오 등은 통상적으로 치파오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청왕조의 통치자들은 만주어와 말타기, 활쏘기 등을 중시하면서, 자신들의 풍습과 복식을 유지하려 애썼다. 한편으로는 만주족의 의상으로 한족을 동화시키면서, 만주족과 몽고족 여성들이 한족의 패션을 모방하는 것을 엄금했다. 순치(順治: 1644~1661), 가경(嘉慶: 1796~1820) 연간에 여러 차례 반포한 금령(禁令) 속에서 만주족 여인들이 한족 패션을 모방한 기풍이 성행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만주족과 한족 여인들의 복식 스타일의 점진적인 융합으로 양자의 차이가 점점 줄어들면서, 마침내 치파오의 전국적인 유행을 예고하게 되었다.

 

청대 후기에 만주족 여인들이 입었던 창파오(長袍)는 품이 넓고, 선이 곧고 강하며, 길이가 복사뼈까지 내려왔다. "위앤 바오링(元寶領)"은 아주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옷깃의 높이가 볼을 덮어 귓볼까지 이르렀으며 파오의 표면에는 형형색색의 무늬를 수놓았고, 옷깃, 소매, 옷섶, 옷자락에는 모두 여러겹의 넓은 단이 있다. 함풍(咸豊: 1851~1861) 동치(同治: 1862~1874) 연간에는 이러한 단을 넣는 것이 크게 유행하여 원래의 옷감과 거의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였으며, 만주족 여인들의 파오에 치장한 다양한 장식은 최고 수준에 도달하였다

 

이 때 청왕조는 국내외적으로 난국을 맞이하여 국력이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서양 열강들은 강력한 포화를 앞세워 청왕조의 굳게 닫힌 문을 열었다. 국가의 위기를 구원하기 위해 청나라 조정의 양무파(洋務派)들은 "중체서용(中體西用)"의 구국 방침을 정하였다.

 

많은 유학생들을 외국으로 파견하여 서양 문물을 배우도록 하고, 군대도 신식 군대로 개편하였다. 중국의 학생과 군인들 사이에서는 서양식 학생 체육복, 모자와 서양식 군복, 모자, 양복을 수입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서양 의상의 수입은 미의 가치 척도 평가에도 영향을 미쳐 일반사회의 복식 관념을 변화시켰다.

 

그후 치파오는 중국과 서양이 융화된 새로운 스타일로 발전하였으니, 치파오가 서양의 영향을 받아 개량된 것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의 성공으로 중국의 마지막 봉건왕조가 붕괴되면서, 서양식 의상이 중국에 자유롭게 보급될 수 있었으며, 아울러 전통적인 예교와 교화 관념이 희석되고 복제(服制)의 엄격한 등급도 사라졌다. 이로써 의상에 있어서 평민화 국제화 현상이 출현하게 된 것은 자연적인 추세였으며, 치파오도 오랜 전통의 속박의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주족 정권의 패망으로 당시에 치파오를 입는 사람들은 아주 적었다. 서양식과 중국식이 혼용되면서옛날 만주족 여인들의 전통적인 창파오는 사라지고 새로운 스타일의 치파오가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에 패션유행의 중심지는 소주(蘇州)와 양주(揚州)에서 이미 상해(上海)로 옮겨져 있었다. 당시 상해는 항구의 개방으로 중국과 서양이 공존하고 각지의 사람들이 모여사는 번화한 외국인 거주지인 동시에 여성해방 운동의 중심지였다.

 

선교사, 상인, 혁명당원들은 다투어 여학교를 창설하면서 여권운동의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해방을 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복식과 치장에 있어서 구습을 타파하였다.

 

 

이리하여 패션 스타일은 청왕조 때의 화려하고 복잡한 양식에서 간결함을 지향하면서, 색상도 우아함을 추구하고 여성의 자연미 표현을 중시하였다.

 

치파오는 처음에는 마갑(馬甲)의 형식으로 출현하였다. 마갑은 길이가 발등까지 내려오는데 짧은 솜저고리 위에 걸쳐 입었다. 그후 마갑을 소매가 있는 양식으로 개량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신식 치파오의 추형이다.

 

이러한 신식 치파오를 유행시킨 이들은 상해 지역의 여학생들이었다고 한다. 당시 여학생들은 지식여성의 대표로써 사회의 이상형이었다. 그녀들은 문명의 상징이자 유행의 선도자였기 때문에 사회 유명인사나 화류계 여인 등은 모두 여학생 차림을 하고 다녔다. 1930~40년대는 치파오 전성기로 그것의 기본적인 윤곽은 이미 성숙되었다.

 

신해혁명 이후 북벌전쟁 시기에 유행한 신식 치파오는 만주족 여인들의 창파오와 달랐다. 1930년대 후기에 출현한 개량 치파오는 구성상에서 서양식 재단 방법을 흡수하여 품을 더욱 몸에 맞게 만들었다.

 

치파오는 청대 만주족 여인들의 창파오에서 탄생되어 나왔지만, 옛날 스타일을 훨씬 벗어나서 중국과 서양의 복식 특징을 융합한 근대 중국 여인의 표준 의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