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사상의 유래와 상징적 의의는?
최근 중국은 갑자기 ‘고구려사’에 대해 거론하면서 잠자고 있던 대한민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좁게는 축구와 같은 스포츠 영역에서부터 넓게는 ‘6자회담’과 같은 정치적인 영역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영향력을 서서히 강화시켜 나가고 있다. 최근 아테네 올림픽에서 보여준 그들의 기세는 부상하는 중국의 경제력과 그들의 대국주의적 기운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점차 대국주의에서 패권주의로, 화해주의에서 일방주의로 나아가는 듯한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우리 입장에서는 그들의 이면에 녹아있는 ‘중화의식’과 ‘중화사상’에 대한 이해가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에 필자는 2회에 걸쳐 ① 중화사상의 근원을 먼저 짚어보고 ② 현대 중국의 행보를 중화사상의 입장에서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중화사상의 근간 이루는 ‘중국(中國)’사상
중화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근간을 이루는 ‘중국’의 사상적 개념에 대해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사실 ‘중국’이라는 용어가 주권국가의 개념으로 사용된 것은 300년의 역사도 채 되지 않았다. 1869년에 조인된 네르친스크조약에서 당시 청조 외교사신의 신분을 호칭할 때 ‘중국’이란 용어를 만주어로 처음 사용했다. 외교상에서 한문으로 ‘中國’이 사용된 용례는 1842년 아편전쟁의 패배로 중국 청조가 영국과 맺은 난징(南京)조약이 최초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후 청조는 서양 열강의 잇단 침략에 힘없이 무너지면서 ‘中國’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수많은 강화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그렇다면 청조 이전의 역사 속에서 중국인들이 칭했던 ‘중국’이라는 용어는 과연 어떠한 용례로 쓰였으며, 그것은 당시 중국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녔는가? 이 분야에 대한 연구는 중국인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중국’이란 용어는 중국의 고전인 ‘시경’에서 최초로 사용되었다. 시경에서 사용된 ‘중국(中國)’은 ‘사방(四方)’주①과 ‘사이(四夷: 중국 사방에 거주 한 변방민족)주②’의 대칭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주(周) 왕조 시대에 처음 출현한 ‘중국’은 주 왕조의 수도(京師)를 지칭하거나 주나라 왕이 통치했던 지역 일대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사방’이란 원래 주 왕실에 의해 분봉된 주변의 제후국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中國’은 주왕이 거주하는 수도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나 점차 주왕이 직접 통치하는 지역 일대를 가르치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그 후 주 왕실의 권위가 쇠락하고 주 왕실에 의해 분봉 받거나 배치되었던 제후국의 세력이 강성해짐에 따라 각 제후국은 주 왕실의 통제권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 확장을 꾀하게 되었다. 여러 제후국, 즉 ‘제하열국(諸夏列國)’은 서로의 이권에만 눈이 멀고 약육 강식의 논리로 분열을 일삼게 되면서 변방 민족들(夷狄)이 ‘중국’ 땅을 침략할 수 있는 기회를 허용하게 되었다.
춘추시대(B.C 770~B.C 476)에는 변방 민족의 제하열국에 대한 침략이 거의 해마다 자행되었는데 이에 대한 제하열국의 대응 역시 매우 적극적인 형태로 이루어졌다. 춘추시대 당시의 패자(覇者)였던 제나라 환공은 이른바 ‘존왕양이(尊王攘夷)’를 표방하면서 제후들을 규합해 변방 민족의 침탈로부터 제하열국의 생존을 보호했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중국’이라는 용어는 점차 춘추열국의 제하 세계 전체를 가리키는 의미주③로 확대되었다.
주왕의 통치 영역에서 제하열국의 거주 영역으로 확대된 ‘중국’은 공자에 이르러 ‘문화적인 우월지역’이라는 새로운 의미가 첨가되었다. 공자는 “오랑캐 나라에 임금이 있는 것이 제하 여러 나라에 임금이 없는 것보다 못하다”고 말하며 ‘중국’의 문화적 우월성을 확실하게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공자를 비롯한 많은 중국의 사상가들이 중국 변방 민족의 존재가치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시 한족이 중심이 되었던 ‘중국’ 지역의 문화를 받아들인 자들에게만 한정될 따름이었다.
앞서 살펴 보았듯이 ‘중국’이란 용어는 다분히 상대적인 관계 설정 속에서 사용되었다. 주변부와 대칭되는 ‘중심부(Center)’란 의미로 처음 쓰여진 ‘중국’은 정치•군사적인 의미의 통치 경계를 설정하는 의미에서 점차 민족 간의 정체성을 경계 짓는 의미로 확장되어 갔다. 한족과 변방민족의 경계를 상징하는 ‘중국’이라는 용어는 공자와 기타 사상가들의 윤색을 거치면서 ‘문화적 우월성을 지닌 중심부’라는 의미로 심화되었다. 이로부터 자연스럽게 한족과 기타 변방민족을 구분하는 이른바 ‘이하지변(夷夏之辨)’이란 관념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중국’이란 용어를 살펴보면 중국인들이 왜 항상 민족과 문화를 함께 논하고 또 논해야만 했는가의 역사적 배경을 알 수 있다.
중화사상의 주체 ‘화하족’의 출현
‘화하족’은 한족의 전신을 이루는 족속이다. 따라서 한족의 태생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화하족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中國’이라는 용어보다는 ‘華夏’라는 용어가 더 확실한 뜻을 지니고 있었다. ‘중국’이 거주 지역과 경계를 구분 짓는 뜻이 강했다면 ‘화하’는 그 지역에 거주하는 구성원의 주체를 지칭하는 용어였기 때문이다. 화하는 본래 지명을 본떠 만든 용어였지만 점차 황하 중하류 지역에 거주하면서 이른바 ‘황하문명’을 건설한 이들을 지칭하는 의미로 굳어지게 되었다.
춘추시대에는 이미 ‘화하’는 특정지역에 거주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다.주④ ‘화하’로 불리는 이들은 시종 일관 변방 민족과의 차별화를 통해 그들의 정체성을 구축해 나갔다. 당시의 구도는 크게 황하 중하류에서 활동했던 ‘중원화하족(中原華夏族)’과 장강 이남의 ‘남방묘만족(南方苗蠻族)’, 동부지방에 거주했던 ‘동방동이족(東方東夷族)’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중에서 화하족은 지역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다른 지역의 구성원들과 차별화를 진행시키면서 그들만의 민족의식을 결집시켜 나갔다. 화하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국 문화를 주도하고 있는 ‘한족(漢族)’의 전신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래 중국 정부는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의 화해와 협력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화해의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족이 중국문화의 주체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화하(華夏)’가 지닌 의미의 양면성, 즉 문화주체와 민족주체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구성원은 ‘한족’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혈통보다 강한 문화적 의미의 ‘중화’코드
화하족은 훗날 ‘제하열국(諸夏列國)’으로 불리게 되었다. 제하세력들은 혈통에 기반을 둔 세습을 통해 규모를 늘려나갔다. 이러한 전통은 ‘상(商)’을 거쳐 ‘주(周)’대에 이르러서 ‘봉건제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봉건제도 속에서 이전에 부족의 우두머리로 신봉되던 인물은 점차 ‘천자(天子)’로 추앙되었고 그 밑의 제후국들은 천자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나름대로의 질서를 유지해 나갔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중원 지대는 제하열국 간의 전쟁과 변방 민족들의 침입으로 이중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제하열국들은 잔인 무도하게 중원을 짓밟고 약탈해가는 변방민족들과의 투쟁 속에서 서서히 그들을 ‘야만’이라고 부르면서 차별하고 배타시하는 관념이 싹트기 시작했다. ‘제하’는 그들을 주로 동이(東夷), 남만(南蠻), 서융(西戎), 북적(北狄)이라고 부르면서 자신들과 ‘오랑캐’를 구분했다. 이들 ‘오랑캐’ 호칭은 대부분 짐승의 특징이나 도구 연장의 유래를 지녔으므로 결국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군락에 속한 자들이라는 뜻이었다.
제하가 자신을 ‘오랑캐’와 구분했던 근거는 결코 혈통 상의 차이에 있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과 혈연 관계가 있었던 나라들, 예를 들면 춘추시대 ‘오(吳)’ 와 ‘초(楚)’는 제하와 혈연관계가 있었으나 모두 ‘남쪽 오랑캐’(南蠻)로 불렸다. 반면 춘추시대의 ‘진(秦)’의 경우 거리상으로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섬서성 ‘봉상(鳳翔)’에 위치했으나 ‘오랑캐’로 칭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국시대 들어 ‘진’의 물질 문명이 진보하고 제도가 정비되었을 때 제하는 오히려 그들을 ‘만이(蠻夷)’라고 불렀다. 제하가 춘추의 ‘초’와 전국의 ‘진’을 ‘오랑캐’로 칭한 것은 결코 혈연 상의 구분에 의한 것이 아니었으니 단지 그들이 ‘침략국’이었기 때문이었다.
근대 중국의 역사학자인 ‘치엔무(錢穆)’는 춘추전국 시대에 ‘제하’와 ‘이적(夷狄)’의 구분은 혈통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첫 번째 ‘생활 방식’의 차이에 의한 것이었고, 두 번째 ‘평화연맹’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생활 방식’의 차이란 제하와 달리 ‘이적’은 농업사회가 아니고 성시(城市)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차별화되었고, 또한 화평과 긴장관계를 유지하려는 연맹에 속하지 않는 침략국의 영토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차별화되었다는 것이다.주⑤ 이 공통 분모는 넓게 말하면 ‘문화’의 방식에 속한다. 사실상 공자(孔子)와 그가 편집한 경전이 영향력을 행사하기 이전에 제하에 의해 형성된 ‘중화관념’이란 앞서 말한 ‘생활 방식’과 ‘정치적 연맹’의 테두리 내에서 형성된 저급한 수준의 관념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 후 공자(B.C 551~B.C 479)를 거치면서 중화 관념에 ‘인문주의’의 혼이 불어넣어졌고 도덕과 인륜을 말하는 한족과 그러한 교육을 받지 못한 이적의 구분이 이때부터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중화(中華)는 중국(中國)과 화하(華夏)의 합성어
‘중화(中華)’는 ‘중국(中國)’과 ‘화하(華夏)’의 합성어이다. 다시 말해 ‘중화’는 ‘지리적 중심부’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한족의 민족 정체성’과 ‘문화적 우월성’이라는 요소가 함께 녹아있는 용어이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스스로를 ‘중화민족’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하는데 이것은 문화적 자부심과 민족적 동질의식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용어일 것이다.
청조 이후로 중국의 영토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규모를 유지했다. 만주족이 세운 청조는 300년의 태평성대를 누리다가 서구 열강의 침입으로 몰락했지만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이 유지하고 있는 민족구성과 영토경계의 기본적인 틀을 제공했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 다시 한족에 의한 정권이 수립되었고 마오쩌둥과 인민해방군에 의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쑨원(孫文)이 한족 민족주의에 호소해 신해혁명을 일으킨 것처럼 국가를 단순히 한족 위주의 차별정책을 쓸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이 채택한 ‘중화’ 속에는 자연스럽게 한족과 55개의 소수민족이 공동 구성원으로 내포되게 되었다. 현대 중국의 입장에서 사용되는 ‘중화’란 용어 속에서 한족의 자기동질성이란 요소는 ‘다민족의 화해와 통일’이란 요소로 바뀌게 되었고 다민족의 구성원이 주체가 되어 건설한 ‘중국문화의 우월성’만이 공통분모로 자리 잡게 되었다.
따라서 21세기에 들어선 이 시점에서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문화 건설을 통한 르네상스의 시작이다. 21세기에 떠오른 ‘중화’는 곧 문화의 상징이자 문화 르네상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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