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이드 메이웨더, 아버지와 두 삼촌이 빚은 걸작품 출처 mfight 입력 2015.04.28 08:24 수정 2015.04.28 11:33
복싱은 위대한 스포츠였다. 1890년대 후반, 링과 글러브, 라운드제가 도입되던 1890년대 부터 복싱은 존 설리번이라는 세계 최초의 백만장자 스포츠맨을 배출했다. 흑인의 프로 스포츠 진출에서도 복싱은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잭키 로빈슨이 브룩클린 다저스에 입단하기 무려 40여년 전인 1907년에 잭 존슨은 헤비급 복싱계로 진출 할 수 있었고 1908년 흑인 최초로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멋내기를 즐겼던 존슨은 화려한 복장에 귀금속 장신구를 주렁주렁 걸치는 블링 블링 패션의 선구자였다고 하며 자동차 수집 광이었다.
▲1900년대 초반의 잭 존슨, 과연..... [사진=에스콰이어]
무하마드 알리는 60년대 흑인 인권운동의 한 가운데에서 복싱 이상의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레너드는 최초로 1000만달러 이상의 대전료를 받게 되었고 타이슨의 전성기에는 한경기로 메이저리그 최고액 연봉자의 3년치 수입을 벌어들이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복싱이라는 스포츠의 위상은 각별했다. 1966년 6월 25일 고 김기수 선수가 65전 무패의 니노 벤베누티를 꺽고 첫 세계 챔피언이 된 이래 복싱은 소처럼 일했던 평화시장 세대의 위안거리이자 활력소였다. 74년 홍수환의 남아공 쾌거와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는 명언, 그리고 4전5기의 전설, 하드 펀처 김태식과 테크니션 박찬희의 시대, 또 장정구와 유명우라는 불세출의 거물이 WBC와 WBA 벨트를 양분하고 연속방어 신기록을 써내려가던 시기, 대한민국은 복싱에 웃고 울었다.
90년대 들어 한국의 경제력이 성장하면서 문화적 생산력도 강화 되었다. 야구와 축구를 비롯해 다양한 스포츠들이 시민들에게 여러가지 선택권을 제공했고 영화와 공연등의 다른 볼거리도 풍성해졌다. 복싱이 뒷켠으로 밀려나는데는 채 10년이 걸리지 않았다. 지금은 세계 챔피언도 없고 세계 타이틀전이 TV로 생중계되는 경우도 극히 드물다.
미국의 경우도 타이슨이 절정기를 구가 한 후, 훌리오 세자르 차베즈, 오스카 델라 호야, 메이웨더, 파퀴아오, 등이 차례로 등장하며 흥행을 주도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서서히 내리막을 걷는 듯한 분위기가 짙었다. 특히 헤비급에서 미국 선수들이 씨가 마르면서 클리츠코 형제를 중심으로 헤비급 타이틀매치의 중심은 독일로 이동한지 오래다.
그렇지만 복싱이 완전히 죽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단지 숨만 붙어있는게 아니라 실로 오랜만에 무서운 저력을 보이고 있다. 6년을 끌어온 지리한 협상끝에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와 매니 파퀴아오간의 대전이 성사되면서 전세계가 복싱 열병에 시달리게 되었는데, 과장 조금 보태 입가진 남자들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죄다 이경기에 대해 떠들고 있는 중이라는 것, 국내에서도 SBS가 수년만에 처음으로 복싱경기를 생중계하는 결단을 내렸을 정도인 이 경기, 복싱 흥행 역사상 모든 기록이 깨진다는 5월 3일의 메이웨더-파퀴아오전. 앞으로 두차례의 조금 긴 글을 통해 두 선수의 이모저모를 알아본다.
◆쇼타임 TV의 특집영상, 기다림은 끝났다!◆
메이웨더 3형제
1952년생인 웰터급 복서 플로이드 메이웨더 시니어는 74년 11월 프로 데뷔전에서 4라운드 판정승을 거두었다. 77년 2월, 그가 10승 1패 5KO의 전적을 거두고 있던 무렵 아들이 태어났다. 메이웨더는 자신의 이름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주니어가 태어난 다음 달 메이웨더는 30승 8패 5무의 전적을 가진 베테랑 미구엘 바레토를 꺽으며 US 챔피언십 토너먼트에서 우승했고 78년 8월 까지 2KO가 포함된 4연승을 전적에 더 보탰다. 당시 총전적 15승 1패 7KO를 기록중이던 메이웨더 시니어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다. 슈거레이 레너드와의 대전이었다.
56년생인 레너드는 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후 77년 2월 프로 무대로 진출했다. 레너드는 아마추어 시절부터 어딘가 그릇이 다른 복서였다. 매우 빠르고 정교했으며 테크닉 레벨도 극도로 높았던데다가 춤추는 듯한 아웃복싱으로 빈틈을 만들고 피냄새를 맡으면 냉혹한 킬러로 돌변하는 특유의 스타일에 호감가는 외모와 쇼맨십 까지 갖추었던 그는 78년 7월 까지의 17개월동안 13승 무패 8KO의 전적을 쌓으며 알리의 뒤를 이을 초신성으로 급부상 중이었다.
메이웨더 시니어는 78년 8월 25일에 경기를 뛰었다. 당시 13승 2패 6KO승을 기록하고 있던 아트 맥나이트라는 선수가 상대였고 결과는 10라운드 판정승이었다. 레너드와의 경기는 78년 9월 9일. 15일만에 다시 링에 오른 셈이다. 본인과 비슷한 전적의 선수와 10라운드 경기를 뛴지 15일만에 다시 경기를 가진다는 것은 잔혹한 스케쥴이다. 메이웨더 시니어는 그렇지만 대전제의를 받아들였다. 복서라면 누구라도, 아무리 어려운 상태일지라도,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메이웨더 시니어는 2라운드 후반부터 주도권을 내주기 시작했고 이후 거의 매 라운드 막판에 큰것을 허용하면 그로기에 몰렸다. 그러던 8라운드, 메이웨더 시니어는 레너드의 그림같은 레프트 훅을 카운터로 당하면서 첫 다운을 내줬다. 충격을 입은 메이웨더에게 레너드의 레이저포같은 연속기가 무참하게 쏟아졌다. 메이웨더는 9라운드, 10라운드 까지 놀라운 투지를 발휘하며 버텼지만 레프리 마틴 타버는 10라운드 2분 16초경 경기를 중단시키고 레너드의 TKO승을 선언했다.
비록 졌지만 메이웨더 시니어의 방어는 대단히 견고했다. 레너드의 폭풍같은 연속기를 단단한 커버링으로 막아내고 컴비네이션 카운터를 시도하는 장면이 여러번 반복되었는데, 공격하는측이 질릴만한 그림도 많이 나왔다. 레너드를 이길 수는 없었지만 메이웨더 시니어는 상당히 훌륭한 선수임에는 분명했다. 레너드전 이후 80년 1월 복귀한 메이웨더 시니어는 같은 해 5월까지 4연속 KO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네명 모두 보잘것 없는 전적을 가진 선수들로 의미없는 연승이라 할 수 있다.
81년 3월, 메이웨더의 앞에 또다른 거물급 신인이 등장했다. 14승 무패의 말론 스털링이었다. '매직맨' 스털링은 훗날 도널드 커리, 마크 브릴랜드, 로이드 허니건등과 함께 F4의 전장이 미들급을 향하면서 공백지가 된 웰터급의 패권 다툼에 참여하게 되는데, 메이웨더 시니어는 스털링에게도 패했고(2패) 이후 세계 타이틀과는 멀어지게 된다. 그는 자신의 아들에게 꿈을 물려주었다. 주니어가 요람에 누워 있을 때 부터 주먹을 휘두르며 놀게 했고 걸음마를 하자마자 복싱 글러브를 끼워 주었다. 복싱은 주니어에게 약속의 땅이자 감옥이 되었다.
◆메이웨더 부자의 스토리를 확인할 수 있는 특집 영상◆
메이웨더 주니어는 자신의 어린시절을 일곱 식구가 한방에서 자고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코카인은 파는 장면으로 묘사했다. 세계랭킹의 언저리에서 돌아선 전직 복서 플로이드 메이웨더 시니어는 1993년 코카인 밀매 혐의로 5년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주니어는 이당시 한국나이로 치면 고1이었다.
한참 감수성이 예민할 시기에 아버지가 수치스러운 죄목으로 투옥되었지만 메이웨더에겐 두명의 전직복서 삼촌이 있었다. 그중 메이웨더 가문 1대의 둘때 로저는 두체급에서 메이저기구의 벨트를 따냈던 훌륭한 선수였다. 로저의 데뷔는 81년 7월이었다. 82년 11월까지 약 16개월동안 14연승 (8KO)을 거둔 그는 83년1월 WBA 슈퍼 페더급 타이틀에 도전했다. 상대는 47승 4패 1무 15KO승의 전적을 가졌고 76년부터 80년까지 타이틀 11차 방어를 달성했으며 한차례 타이틀을 빼았걌다가 리턴매치에서 되찾은 후 다시 4연속 방어전을 성공시킨 베테랑 챔피언이었다. 그렇지만 로저 메이웨더가 그를 8회 KO로 때려잡고 첫 세계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로저의 방어 스킬은 형에게 물려받은 것으로 대단히 우수했다. 그리고 그는 형보다 신장대비 리치가 더 길었다. 메이웨더 가문 특유의 사이드 페이스 자세에서 플리커 잽을 사용하는데까지는 형과 대단히 비슷하지만 로저에게는 블랙 맘바의 맹독같은 라이트 스트레이트가 있었다. 시계방향으로 잔뜩 틀어선 자세로 오른손을 상대의 시선에서 감추고 있다가 잡작스럽게 뻗어나오는 라이트 스트레이트는 상대에게 잘 보이지 않는 특성을 가진 명품 테크닉이었다. 로저는 공격력의 면에서 형에 비해 진일보한 선수였다고 할 수 있다.
83년 4월과 8월에 로저는 두번의 방어전을 연속 KO승으로 장식했다. 하지만 84년 2월 에우제비오 페드로자의 철옹성(페더급 19방)을 넘지 못하고 슈퍼 페더급으로 올라온 32승 3패 26KO의 강타자 록키 록리지를 도전자로 맞아 1라운드 KO패를 당한 후 그는 벨트를 풀었다. 같은해 7월 복귀전에서 토니 발타자라는 선수에게 판정패를 당하며 로저는 크게 흔들렸지만 84년 9월부터 85년 5월까지 3KO가 포함된 4연승을 거두며 다시 랭킹 1위로 복귀했다. 그리고 로저 메이웨더에게 WBC 슈퍼 페더급 타이틀전의 기회가 주어졌다. 챔피언은 멕시코의 훌리오 세자르 차베즈였다.
1962년생인 차베즈는 당시 나이가 22세에 불과했지만 무려 44연승 중이었다. 그중 KO는 38회. (로저의 전적은 21승 2패 14KO). 차베즈는 아즈텍의 태양신 처럼 상대를 말려죽이는 타입의 파이터였다. 끝없이 전진하고 밀어붙이면서 라운드당 80여발의 펀치를 내는 스타일로 바디,안면, 단발, 연타, 선제타, 카운터를 가리지 않고 능숙하게 구사하는데, 펀치력도 엄청나고 방어와 공수전환의 레벨과 맷집이 워낙 우수한데다가 체력이 무한대이기 때문에 버텨내는 상대가 없었다. 특기는 레프트 바디와 더블, 트리플 컴비네이션, 그리고 라이트 리드 스트레이트가 있었다.
로저는 차베즈를 상대로 1라운드와 2라운드 초반까지 어마어마한 리치차를 활용한 잽과 아웃복싱, 라이트 스트레이트로 재미를 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차베즈는 신중하게 잽의 타이밍과 레인지를 재고 있었으며 2라운드 부터는 라이트 오버핸드로 잽에 대한 카운터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2라운드 중반, 차베즈의 라이트 오버핸드가 결국 적중되면서 로저가 휘청하며 물러났고 차베즈는 쫒아들어가며 점프해 결정적인 라이트 공중 펀치를 성공시켰다.
차베즈에게 패한 후 로저는 라이트급으로 체급을 올렸다. 87년 3월 NABF (북미 복싱연맹) 라이트급 타이틀을 놓고 로저는 당시 11연승중이던 신에 퍼넬 휘테커와 대전했다. 휘테커는 후일 왼손잡이 아웃복서중 역사상 가장 훌륭한 방어를 구사했던 선수중 한명으로 성장하게 된다. 국내 팬들은 휘테커를 두고 '방어를 퍼붓는 스타일'이라 표현했다. 로저는 휘테커에게도 전원일치 판정패로 당했고 주니어 웰터 (슈퍼 라이트)으로 체급을 더 올렸다.
87년 11월 로저 메이웨더는 40승 3패 36KO승의 전적을 가진 르네 아레돈도의 WBC 슈퍼 라이트급 타이틀에 도전했다. 메이웨더는 6라운드에 라이트 강타를 여러차례 성공시켜 챔피언을 깊은 잠에 빠뜨리면서 두번째 체급의 메이저 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88년 11월 까지 로저는 4차방어를 달성했다. KO는 두번. 89년 5월, 로저의 앞에 차베즈가 다시 나타났다. 26세이던 이 경기 당시 차베즈는 60연승 50KO를 기록하던 중이었다. 첫 만남에 비해 로저는 훨씬 잘싸웠다. 그렇지만 10라운드가 끝나고 로저 메이웨더는 돌연 기권을 선언했다. 이후 그는 두번의 타이틀 도전 기회를 가졌지만 두번 모두 졌다. 마지막 도전의 상대는 코스챠 추였다.
메이웨더 가문 1대의 3남 제프 메이웨더는 두 형들에 비하면 전적이 약소했다. 그렇지만 그 역시 어김없이 당대 최강자를 만나는 경험을 했는데, 그는 23승 2패 2무를 기록중이던 93년 불과 4전짜리 풋내기였던 오스카 델라 호야와 싸웠다. 물론 호야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고 장차 차베즈의 시대를 마무리 지은 후 본인의 7억달러 왕조를 개척할 골든보이였다. 4라운드 KO로 호야에게 패한 제프 역시 세계 정상권의 언저리에서 잠시 머물다 내려왔다.
93년 메이웨더 시니어의 수감 이후에도 주니어의 성장이 멈추지 않았던 것, 주니어가 96년 올림픽에 출전하고, 메달일 딸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역시 로저와 제프라는 두 삼촌 덕이 있었다. 아버지는 특유의 방어기술을, 로저는 보이지 않는 라이트를, 스위치 복서였던 제프는 왼손잡이를 상대하는 요령을 가르쳤다고 한다.
홀리랜드
생각해 보면 무서운일이다. 세계의 문턱에서 희대의 강자들을 만나 좌절한 경험을 가진 3형제가 한명의 아이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 메이웨더는 한명도 아닌 세명의 우수한 트레이너를 얻었고 그 대가로 평범한 어린시절을 바쳤다.
▲(좌로부터) 복싱 최고의 흥행사 밥애럼, 메이웨더 시니어, 메이웨더 주니어 [사진=쇼타임 유튜브 영상 캡쳐]
메이웨더 주니어의 아마추어 전적은 84승 6패였다. 96년 아틀란타 올림픽에 미국 대표로 출전해 로렌조 아라곤이라는 쿠바 복서를 12:11로 이기면서 76년 레너드 이래 20년만에 처음으로 올림픽에서 쿠바선수를 이긴 미국 복서가 되었다. 하지만 준결승에서 메이웨더는 세라핌 토도로프라는 불가리아 선수에게 어이없는 판정패를 당했다. 아마추어 복싱 역사상 최대의 오심중 하나로 남은 이 판정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는데, 최근 공개된 한 영상물에 의하면 이 대회의 판정을 담당했던 고위 심판관 중 한명이 수치심을 느끼고 사임했을 정도였다.
▲이긴 쪽은 왼쪽의 세라핌 토도로프였다. 그렇지만 주심은 플로이드 메이웨더의 손을 들어 올리고 있다. 이유를 묻지 심판은 '당연히 메이웨더가 이겼다고 생각했다" 라고 대답했다. [사진=쇼타임 유튜브 영상 캡쳐]
올림픽에서의 회한을 뒤로하고 메이웨더 주니어는 즉각 프로로 데뷔했다.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아마추어 선수가 돈을 벌 길이 없었기 때문에 메이웨더에게 다음 올림픽은 허락되지 않았다. 96년 10월 메이웨더의 데뷔전, 상대는 로베르토 아포다카라는 선수였고 전적은 2승 1패였다.
1라운드 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 명확히 드러난다. 1라운드 1분 45초경 메이웨더는 머리에서 바디로 내려가는 레프트 더블을 적중시켜 아포다카의 허리를 접어버렸다. 첫번째 다운. 바디에서 머리로 올라오는 레프트 더블은 굉장히 좋은 컴비네이션이다. 그리고 반대로 머리를 치고 바디를 치는 컴비네이션은 더 좋다. 머리에 충격이 있는 상태에서 바디를 맞으면 호흡조절이 안돼 한방에 숨통이 막힐 수 있기 때문이다. 메이웨더는 2라운드 초반에도 상대의 라이트를 스웨이로 피한 후 똑같은 컴비네이션으로 받아쳐 아포다카를 주저앉혔다.
데뷔전 부터 메이웨더 주니어는 카운터 파이터로써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상대의 공격을 끌어내기 위해 본인 스스로 접근전을 걸기도 하고 선체타를 치고 들어가는데도 주저함이 없었다. 해설진에서도 메이웨더를 두고 파워 펀처라고 하는데, 확실히 메이웨더의 펀치력은 선대 그 누구도 가지고 있지 못하던 재능이었다.
98년 6월 까지의 20개월 동안 17승 무패 13KO의 전적을 쌓은 메이웨더에게 첫 타이틀 매치의 기회가 왔다. 상대는 37승 1패 17KO승의 전적을 가진 WBC 슈퍼 페더급 챔피언 제나로 에르난데즈였다. 에르난데즈의 유일한 패배는 오스카 델라호에게 당한 것이었다.
해설진에 참여한 에마누엘 스투어드 (헌즈의 스승)는 이날의 메이웨더를 두고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모든게 마치 산책이라도 하는 것 처럼 자연스러워요, 저런 움직임을 선수에게 가르치려면 몇년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에겐 이제 뭘 가르쳐야 될지 모르겠네요."라고 평했다. 에르난데즈는 8라운드 까지 잘 싸웠지만 많이 맞았다. 8라운드 종료후 그의 코너에서는 경기를 포기했고 메이웨더는 생애 최초의 벨트를 허리에 둘렀다.
THE BEST EVER
98년 12월 부터 01년 11월 까지 약 3년동안 메이웨더는 9명의 도전자를 모두 돌려세웠다, KO승은 6번. 02년 4월 메이웨더는 2체급 정벌에 나섰다. 상대는 WBC 라이트급 챔피언 호세 루이스 카스티요. 전적은 45승 4패 1무 41KO였다. 당시까지 4차방어에 성공한 상태. 이 경기는 메이웨더가 47전의 커리어상 가장 고전한 경기중 하나로 손꼽힌다. 팽팽한 난전 끝에 메이웨더의 만장일치 판정으로 결론이 났지만 현장의 관객들은 큰 소리로 야유를 보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과 미디어들은 메이웨더의 승리가 맞다고 지지했지만 컴퓨복스의 데이터상으로는 전체적인 타격숫자와 강타의 숫자면에서 카스티요의 우세가 나타났다. 소수의 분석가들이 판정에 의문을 제기했고 메이웨더는 즉각적인 리매치에 응했다. 2차전에서도 근소한 차이였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메이웨더의 판정승이었다.
2002년 카스티요의 벽을 톨파한 메이웨더에게 2006년 4월까지 어려움은 없었다. 타이틀 3차방어를 한후 미련없이 또 한체급을 올린 메이웨더는 주니어 웰터급에서 2승을 추가한 후 아투로 가티의 WBC 슈퍼 라이트급 타이틀에 도전했다. 세번째 체급. 가티는 맷집과 투지로 유명한 선수였지만 이미 노쇠한 상태였고 메이웨더를 상대로는 6라운드까지였다.
그리고 2006년 4월, 메이웨더는 잽 주다와 싸웠다. 당시의 주다는 IBF 웰터급 챔피언이었다. 여기서 잠시 시간을 점프해 주다전 이후를 간략히 살펴본다. 주다전 이후 메이웨더에게는 변변한 위기가 없었다. 웰터급의 메이웨더는 데뷔초기에 비해 수비에 훨씬 치중하면서 KO가 아닌 포인트 쟁탈전을 노리는 스타일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쉐인 모슬리전 초반에 레프트와 라이트 큰것을 각각 한차례씩 허용하고 무릎이 꺽인 것, 마이다나의 거친 플레이와 메이웨더의 커버링 위에서 내려 찍히듯 들어오는 라이트 오버핸드에 잠시 말려든 장면 등을 제외하면 그후로 약 8년간 메이웨더는 11전을 하면서 거의 모든 라운드에서 이기는 무적의 행보를 보였다. 체급돌파는 5단계, 슈퍼페더급, 라이트급, 주니어 웰터급, 웰터급, 주니어 미들급. 벨트는 메이저 기구의 것만 10개다.
▲메이웨더가 겪은 생애 최대의 위기, 그렇지만 이걸 버텨내고 다시 페이스를 찾은 후 넉넉한 판정승을 거둔 것을 보면 메이웨더는 맷집도 매우 훌륭한 수준이다.
오스카 델라호야전에서의 승리 이후 PPV 킹으로 등극 했고 엄청난 개런티를 벌어들이며 본인이 프로모터이기 때문에 다른 선수들처럼 프로모터 피를 수십% 내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 전용기가 자동차가 어떻고 카지도에서 얼마를 했고 등등의 얘기는 더이상 할 필요가 없는 시점일 것이고, 하여간에 현재의 메이웨더는 47승 무패로 PPV 최다 판매 기록 (240만개), PPV 판매총액 최대액 기록 (1억 5천만달러), 사상 최대 대전료, (7천 5백만 달러)기록등을 모조리 자기 것으로 갈아치우고 있으며 이제 매니 파퀴아오와의 대전에서 그 너머의 돈천지를 바라보고 있다.
메이웨더 하이라이트
이번 대전으로 메이웨더는 최대 2억 달러(약 2200억원)를 벌어들일 것으로 전망되고 있으며 메이웨더가 2억달러를 받는다면 파퀴아오는 1억 3천 4백만 달러 (약 1470억원) 가량을 손에 쥐게 된다. 2억 달러는 호날두의 2.5년 수익에 해당하는 액수이고 1억 3천만달러는 메이저리그에서도 A급인 추신수 선수의 7년치 연봉에 해당한다. 단 한경기의 47분만에 거두어들이는 수익치고는 다소 우주적인 숫자다.
유료 중계 방송 시청료도 89.95달러 (약 10만원)로 역대 최고액이 책정되었다. 이 유료 시청권이 대략 300~400만 가구에 팔릴 것으로 예측되고 있는데, 만약 300만개가 팔리면 2억 7천만달러(약 3000억원), 400만개가 팔리면 3억 6천만달러(약 4000억원)의 매출이 발생하게 된다. 기존 기록은 메이웨더-알바레즈전의 1억 5000만달러 (약 1650억원)이었다.
거기다 세계 각지로의 중계권료가 약 400억원의 수익을 가져다 줄 전망이며 현장의 입장료 수익도 약 7400만 달러(약 814억원)에 달해 기존의 기록을 세배가량 뛰어넘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메가 파이트를 앞둔 메이웨더의 소회◆
시니어의 앞을 가로막았던 슈거레이 레너드, 로저를 두번 좌절시켰던 차베즈, 제프에게 치욕을 안긴 오스카 델라 호야, 선대의 3형제는 비록 그런 슈퍼스타의 반열에 오를 수 없었다. 꿈을 이룬 복서로 갑부가 되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주니어는 드디어 그 모든 레전드를 뛰어넘어 복싱 흥행 역사의 새로운 장을 써내려 가는 중이다.
사우스포와 숄더롤의 상관관계
현지 도박사들은 대략 7:3~6:4 정도로 메이웨더의 우세를 점치고 있다. 이정도면 파퀴아오가 이겨도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다는 분위기. 현재까지의 실적이나 상대전적등을 고려해 보면 메이웨더가 우위인 것은 분명하다. 단적인 예가 후안 마누엘 마르케즈와의 상대성인데, 마르케즈는 파퀴아오와 3번싸워 승부를 내지 못했다. 전적상으로는 파퀴아오가 2승 1무로 앞서나갔지만 실제로는 세경기 모두 무승부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팽팽했다. 그리고 2013년 4차전에서 마르케즈가 파퀴아오에게 KO승을 거두었으니, 마르케즈와 파퀴아오는 대등한 수준의 선수로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런 마르케즈를 메이웨더는 아무런 문제없이 손쉽게 요리했다. 마르케즈는 완벽에 가까운 기술과 복싱지능을 갖춘 선수라고 평가받고 있었는데 메이웨더의 앞에 서니 허점 투성이었다. 파퀴아오는 과연 다를까?
파퀴아오는 실력면에서 마르케즈와 대등하지만 왼손잡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왼손잡이는 어째서 어려울까. 다시 2006년으로 돌아가 잽 주다의 경기를 살펴 보자.
1라운드에 메웨더는 주다의 레프트 바디 스트레이트와 라이트훅, 레프트 스트레이트를 허용했다. 1라운드 해롤드 래더맨의 채점은 10:9로 주다의 우세. 왼손잡이는 결국 이게 무섭다. 커버링의 열려있는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레프트와 시야 바깥쪽에서 휘어들어오는 라이트, 2라운드 1분경 메이웨더는 숙이며 접근하다가 주다의 체크 라이트 훅을 클린히트로 허용하고 손을 바닥에 짚었다. "해설진의 레녹스 루이스가 방근 바닥에 손 짚은 것 같은데요!" 라고 지적했고 래리 머쳔트도 '맞았는지 안맞았는지는 확실히 못봤지만 손은 분명히 바닥에 닿았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주심은 그것을 보지 못했고 경기는 속행되었다.
(*편집자주: 메이웨더의 공식 다운 기록은 단 한번이다. 2001년 5월의 카를로스 헤르난데즈전이었고 메이웨더는 손부상을 당했는데 고통이 너무 심해 잠시 주저앉았던 상황이었다.)
속행된 경기에서도 주다의 우세는 계속 되었다. 주다는 계속해서 레프트 바디,안면 스트레이트, 라이트 훅을 성공시켰고 2라운드에서도 우세를 점했다. 메이웨더는 3라운드 부터 반격을 시작했다. 6라운드가 되었을 때 두 선수는 각각 3라운드씩을 나눠가진 상태였다. 그러나 6라운드 이후 메이웨더가 모든 라운드에서 앞서나가며 판정승을 거두었다. 결과적으로는 그렇지만, 메이웨더는 이 경기에서 큰것을 여러차례 허용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아래의 장면.
주다가 더블잽을 치며 들어오다가 레프트 스트레이트를 내는데, 메이웨더는 상대가 접근해 올때 습관처럼 숄더롤 디펜스를 구사했다. 숄더롤 디펜스란 메이웨더가 즐겨쓰는 근접방어테크닉인데, 위 장면에서 맞기 직전의 자세를 취하면서 오른손잡이의 오른손 펀치는 몸을 시계방향으로 돌리며 왼쪽어깨로 가드하고 왼쪽 펀치는 몸을 반시계방향으로 돌리며 양손으로 막아내는 방어법이다. 이것이 오른손잡이에게는 정말 귀신같이 통하지만, 왼손잡를 상대로는 위와 같이 왼손 스트레이트에 뚫려버리게 된다. 모든것이 다 선 자세의 앵글이 다르고 앞손 뒷손의 방향이 달라서이다.
파퀴아오도 왼손잡이다. 그리고 잽 주다 보다 빠르고 더 공격적이며 펀치력도 강하다. 메이웨더의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간단하게 말해 메이웨더는 오른손잡이를 상대로는 S급의 방어력을 자랑하지만 왼손잡이가 상대라면 방어력이 A급으로 하락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파퀴아오가 메이웨더를 상대로도 3~4할은 이길 수 있다고 보게되는 주요 이유다.
파퀴아오는 레프트 스트레이트와 라이트훅, 레프트 바디 스트레이트, 레프트 어퍼, 라이트 어퍼를 단발로, 연속기로 조립해 마구 쏟아낼 것이다. 파퀴아오의 공격력은 보장되어 있다. 많은 펀치가 빠르게 나오고 한방한방에 혼이 실려있을 것이다. 메이웨더가 그것을 얼마나 피하고, 얼마나 먹고 얼마나 받아치는지의 비율에서, 모든것이 결정 날 것으로 전망된다. 메이웨더의 디펜스와 카운터는 사상 최고 수준이기 때문에 이 게임의 진정한 관전 가치는 이 지점에서 나타난다. 파퀴아오의 공격력이 과연 메이웨더의 수비를 능가할 수 있을까. 그리고 메이웨더는 엄청난 움직임을 가진 파퀴아오에게 카운터를 효과적으로 적중시킬 수 있을까,이것이 이 매치업의 본질이다.
레전드들의 선택
마이크 타이슨과 로이 존스 주니어는 파퀴아오의 스타일상 메이웨더에게 어려운 경기가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타이슨은 파퀴아오를 괴롭힌 선수들은 마르케즈나 에릭 모랄레스처럼 라운드당 100여발의 펀치를 내는 복서펀처 타입인데 메이웨더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에 정신없이 움직이며 치고들어갈 각을 찾는 파퀴아오에게 상대성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 로이 존스 주니어는 세간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KO면 메이웨더, 판정이면 파퀴아오의 승리를 점쳤다. 그냥 내버려 두면 파퀴아오를 잡기가 힘들기 때문에 KO 시킬 생각으로 강하게 두들겨야 메이웨더가 이길 수 있다는 얘긴데, 자꾸 곱씹어 생각해 보면 두 레전드의 의견에는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현 미들급 챔피언이자 두 선수 모두와 싸워 보았던 미구엘 코토도 파퀴아오를 응원한다고 했지만 그는 최근 2년동안 파퀴아오와 와일드카드 짐에서 한솥밥을 먹는 사이이므로 큰 의미가 없다.
그 외 대부분의 레전드급 선수들은 메이웨더의 우세를 점쳤다. 그들은 대부분 별다른 이유를 들지 않았다. 메이웨더니까. 그걸로 족했다.
*메이웨더를 선택한 주요 인물들 명단
카를로스 오티즈
메이비스 프레이저
게리 쿠니
래리 홈즈
쉐인 모슬리
후안 마누엘 마르케즈
카를로스 사라테
중립을 선택한 세명
비토 안토페르모
에반더 홀리필드
그리고 헐크 호간! 두둥~
이제 5월 3일 까지 불과 5일, 5일 후면 메이웨더는 47연승의 기록과 백만달러짜리 특수 제작 챔피언 벨트를 걸고 사우스포 매니 파퀴와오와 시대사적 일전을 벌인다. 승자에게는 어마어마한 대전료와 함께 이세대의 진정한 승자라는 월계관이 주어질 예정이다.
이용수 기자
mfight01@gmail.com
[믿을 수 있는 격투기 뉴스, 신세기 격투스포츠의 길라잡이 엠파이트 (www.mfigh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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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마드 알리는 60년대 흑인 인권운동의 한 가운데에서 복싱 이상의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레너드는 최초로 1000만달러 이상의 대전료를 받게 되었고 타이슨의 전성기에는 한경기로 메이저리그 최고액 연봉자의 3년치 수입을 벌어들이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복싱이라는 스포츠의 위상은 각별했다. 1966년 6월 25일 고 김기수 선수가 65전 무패의 니노 벤베누티를 꺽고 첫 세계 챔피언이 된 이래 복싱은 소처럼 일했던 평화시장 세대의 위안거리이자 활력소였다. 74년 홍수환의 남아공 쾌거와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는 명언, 그리고 4전5기의 전설, 하드 펀처 김태식과 테크니션 박찬희의 시대, 또 장정구와 유명우라는 불세출의 거물이 WBC와 WBA 벨트를 양분하고 연속방어 신기록을 써내려가던 시기, 대한민국은 복싱에 웃고 울었다.
90년대 들어 한국의 경제력이 성장하면서 문화적 생산력도 강화 되었다. 야구와 축구를 비롯해 다양한 스포츠들이 시민들에게 여러가지 선택권을 제공했고 영화와 공연등의 다른 볼거리도 풍성해졌다. 복싱이 뒷켠으로 밀려나는데는 채 10년이 걸리지 않았다. 지금은 세계 챔피언도 없고 세계 타이틀전이 TV로 생중계되는 경우도 극히 드물다.
미국의 경우도 타이슨이 절정기를 구가 한 후, 훌리오 세자르 차베즈, 오스카 델라 호야, 메이웨더, 파퀴아오, 등이 차례로 등장하며 흥행을 주도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서서히 내리막을 걷는 듯한 분위기가 짙었다. 특히 헤비급에서 미국 선수들이 씨가 마르면서 클리츠코 형제를 중심으로 헤비급 타이틀매치의 중심은 독일로 이동한지 오래다.
그렇지만 복싱이 완전히 죽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단지 숨만 붙어있는게 아니라 실로 오랜만에 무서운 저력을 보이고 있다. 6년을 끌어온 지리한 협상끝에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와 매니 파퀴아오간의 대전이 성사되면서 전세계가 복싱 열병에 시달리게 되었는데, 과장 조금 보태 입가진 남자들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죄다 이경기에 대해 떠들고 있는 중이라는 것, 국내에서도 SBS가 수년만에 처음으로 복싱경기를 생중계하는 결단을 내렸을 정도인 이 경기, 복싱 흥행 역사상 모든 기록이 깨진다는 5월 3일의 메이웨더-파퀴아오전. 앞으로 두차례의 조금 긴 글을 통해 두 선수의 이모저모를 알아본다.
◆쇼타임 TV의 특집영상, 기다림은 끝났다!◆
메이웨더 3형제
1952년생인 웰터급 복서 플로이드 메이웨더 시니어는 74년 11월 프로 데뷔전에서 4라운드 판정승을 거두었다. 77년 2월, 그가 10승 1패 5KO의 전적을 거두고 있던 무렵 아들이 태어났다. 메이웨더는 자신의 이름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주니어가 태어난 다음 달 메이웨더는 30승 8패 5무의 전적을 가진 베테랑 미구엘 바레토를 꺽으며 US 챔피언십 토너먼트에서 우승했고 78년 8월 까지 2KO가 포함된 4연승을 전적에 더 보탰다. 당시 총전적 15승 1패 7KO를 기록중이던 메이웨더 시니어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다. 슈거레이 레너드와의 대전이었다.
56년생인 레너드는 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후 77년 2월 프로 무대로 진출했다. 레너드는 아마추어 시절부터 어딘가 그릇이 다른 복서였다. 매우 빠르고 정교했으며 테크닉 레벨도 극도로 높았던데다가 춤추는 듯한 아웃복싱으로 빈틈을 만들고 피냄새를 맡으면 냉혹한 킬러로 돌변하는 특유의 스타일에 호감가는 외모와 쇼맨십 까지 갖추었던 그는 78년 7월 까지의 17개월동안 13승 무패 8KO의 전적을 쌓으며 알리의 뒤를 이을 초신성으로 급부상 중이었다.
메이웨더 시니어는 78년 8월 25일에 경기를 뛰었다. 당시 13승 2패 6KO승을 기록하고 있던 아트 맥나이트라는 선수가 상대였고 결과는 10라운드 판정승이었다. 레너드와의 경기는 78년 9월 9일. 15일만에 다시 링에 오른 셈이다. 본인과 비슷한 전적의 선수와 10라운드 경기를 뛴지 15일만에 다시 경기를 가진다는 것은 잔혹한 스케쥴이다. 메이웨더 시니어는 그렇지만 대전제의를 받아들였다. 복서라면 누구라도, 아무리 어려운 상태일지라도,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메이웨더 시니어는 2라운드 후반부터 주도권을 내주기 시작했고 이후 거의 매 라운드 막판에 큰것을 허용하면 그로기에 몰렸다. 그러던 8라운드, 메이웨더 시니어는 레너드의 그림같은 레프트 훅을 카운터로 당하면서 첫 다운을 내줬다. 충격을 입은 메이웨더에게 레너드의 레이저포같은 연속기가 무참하게 쏟아졌다. 메이웨더는 9라운드, 10라운드 까지 놀라운 투지를 발휘하며 버텼지만 레프리 마틴 타버는 10라운드 2분 16초경 경기를 중단시키고 레너드의 TKO승을 선언했다.
비록 졌지만 메이웨더 시니어의 방어는 대단히 견고했다. 레너드의 폭풍같은 연속기를 단단한 커버링으로 막아내고 컴비네이션 카운터를 시도하는 장면이 여러번 반복되었는데, 공격하는측이 질릴만한 그림도 많이 나왔다. 레너드를 이길 수는 없었지만 메이웨더 시니어는 상당히 훌륭한 선수임에는 분명했다. 레너드전 이후 80년 1월 복귀한 메이웨더 시니어는 같은 해 5월까지 4연속 KO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네명 모두 보잘것 없는 전적을 가진 선수들로 의미없는 연승이라 할 수 있다.
81년 3월, 메이웨더의 앞에 또다른 거물급 신인이 등장했다. 14승 무패의 말론 스털링이었다. '매직맨' 스털링은 훗날 도널드 커리, 마크 브릴랜드, 로이드 허니건등과 함께 F4의 전장이 미들급을 향하면서 공백지가 된 웰터급의 패권 다툼에 참여하게 되는데, 메이웨더 시니어는 스털링에게도 패했고(2패) 이후 세계 타이틀과는 멀어지게 된다. 그는 자신의 아들에게 꿈을 물려주었다. 주니어가 요람에 누워 있을 때 부터 주먹을 휘두르며 놀게 했고 걸음마를 하자마자 복싱 글러브를 끼워 주었다. 복싱은 주니어에게 약속의 땅이자 감옥이 되었다.
◆메이웨더 부자의 스토리를 확인할 수 있는 특집 영상◆
메이웨더 주니어는 자신의 어린시절을 일곱 식구가 한방에서 자고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코카인은 파는 장면으로 묘사했다. 세계랭킹의 언저리에서 돌아선 전직 복서 플로이드 메이웨더 시니어는 1993년 코카인 밀매 혐의로 5년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주니어는 이당시 한국나이로 치면 고1이었다.
한참 감수성이 예민할 시기에 아버지가 수치스러운 죄목으로 투옥되었지만 메이웨더에겐 두명의 전직복서 삼촌이 있었다. 그중 메이웨더 가문 1대의 둘때 로저는 두체급에서 메이저기구의 벨트를 따냈던 훌륭한 선수였다. 로저의 데뷔는 81년 7월이었다. 82년 11월까지 약 16개월동안 14연승 (8KO)을 거둔 그는 83년1월 WBA 슈퍼 페더급 타이틀에 도전했다. 상대는 47승 4패 1무 15KO승의 전적을 가졌고 76년부터 80년까지 타이틀 11차 방어를 달성했으며 한차례 타이틀을 빼았걌다가 리턴매치에서 되찾은 후 다시 4연속 방어전을 성공시킨 베테랑 챔피언이었다. 그렇지만 로저 메이웨더가 그를 8회 KO로 때려잡고 첫 세계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로저의 방어 스킬은 형에게 물려받은 것으로 대단히 우수했다. 그리고 그는 형보다 신장대비 리치가 더 길었다. 메이웨더 가문 특유의 사이드 페이스 자세에서 플리커 잽을 사용하는데까지는 형과 대단히 비슷하지만 로저에게는 블랙 맘바의 맹독같은 라이트 스트레이트가 있었다. 시계방향으로 잔뜩 틀어선 자세로 오른손을 상대의 시선에서 감추고 있다가 잡작스럽게 뻗어나오는 라이트 스트레이트는 상대에게 잘 보이지 않는 특성을 가진 명품 테크닉이었다. 로저는 공격력의 면에서 형에 비해 진일보한 선수였다고 할 수 있다.
83년 4월과 8월에 로저는 두번의 방어전을 연속 KO승으로 장식했다. 하지만 84년 2월 에우제비오 페드로자의 철옹성(페더급 19방)을 넘지 못하고 슈퍼 페더급으로 올라온 32승 3패 26KO의 강타자 록키 록리지를 도전자로 맞아 1라운드 KO패를 당한 후 그는 벨트를 풀었다. 같은해 7월 복귀전에서 토니 발타자라는 선수에게 판정패를 당하며 로저는 크게 흔들렸지만 84년 9월부터 85년 5월까지 3KO가 포함된 4연승을 거두며 다시 랭킹 1위로 복귀했다. 그리고 로저 메이웨더에게 WBC 슈퍼 페더급 타이틀전의 기회가 주어졌다. 챔피언은 멕시코의 훌리오 세자르 차베즈였다.
1962년생인 차베즈는 당시 나이가 22세에 불과했지만 무려 44연승 중이었다. 그중 KO는 38회. (로저의 전적은 21승 2패 14KO). 차베즈는 아즈텍의 태양신 처럼 상대를 말려죽이는 타입의 파이터였다. 끝없이 전진하고 밀어붙이면서 라운드당 80여발의 펀치를 내는 스타일로 바디,안면, 단발, 연타, 선제타, 카운터를 가리지 않고 능숙하게 구사하는데, 펀치력도 엄청나고 방어와 공수전환의 레벨과 맷집이 워낙 우수한데다가 체력이 무한대이기 때문에 버텨내는 상대가 없었다. 특기는 레프트 바디와 더블, 트리플 컴비네이션, 그리고 라이트 리드 스트레이트가 있었다.
로저는 차베즈를 상대로 1라운드와 2라운드 초반까지 어마어마한 리치차를 활용한 잽과 아웃복싱, 라이트 스트레이트로 재미를 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차베즈는 신중하게 잽의 타이밍과 레인지를 재고 있었으며 2라운드 부터는 라이트 오버핸드로 잽에 대한 카운터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2라운드 중반, 차베즈의 라이트 오버핸드가 결국 적중되면서 로저가 휘청하며 물러났고 차베즈는 쫒아들어가며 점프해 결정적인 라이트 공중 펀치를 성공시켰다.
차베즈에게 패한 후 로저는 라이트급으로 체급을 올렸다. 87년 3월 NABF (북미 복싱연맹) 라이트급 타이틀을 놓고 로저는 당시 11연승중이던 신에 퍼넬 휘테커와 대전했다. 휘테커는 후일 왼손잡이 아웃복서중 역사상 가장 훌륭한 방어를 구사했던 선수중 한명으로 성장하게 된다. 국내 팬들은 휘테커를 두고 '방어를 퍼붓는 스타일'이라 표현했다. 로저는 휘테커에게도 전원일치 판정패로 당했고 주니어 웰터 (슈퍼 라이트)으로 체급을 더 올렸다.
87년 11월 로저 메이웨더는 40승 3패 36KO승의 전적을 가진 르네 아레돈도의 WBC 슈퍼 라이트급 타이틀에 도전했다. 메이웨더는 6라운드에 라이트 강타를 여러차례 성공시켜 챔피언을 깊은 잠에 빠뜨리면서 두번째 체급의 메이저 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88년 11월 까지 로저는 4차방어를 달성했다. KO는 두번. 89년 5월, 로저의 앞에 차베즈가 다시 나타났다. 26세이던 이 경기 당시 차베즈는 60연승 50KO를 기록하던 중이었다. 첫 만남에 비해 로저는 훨씬 잘싸웠다. 그렇지만 10라운드가 끝나고 로저 메이웨더는 돌연 기권을 선언했다. 이후 그는 두번의 타이틀 도전 기회를 가졌지만 두번 모두 졌다. 마지막 도전의 상대는 코스챠 추였다.
메이웨더 가문 1대의 3남 제프 메이웨더는 두 형들에 비하면 전적이 약소했다. 그렇지만 그 역시 어김없이 당대 최강자를 만나는 경험을 했는데, 그는 23승 2패 2무를 기록중이던 93년 불과 4전짜리 풋내기였던 오스카 델라 호야와 싸웠다. 물론 호야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고 장차 차베즈의 시대를 마무리 지은 후 본인의 7억달러 왕조를 개척할 골든보이였다. 4라운드 KO로 호야에게 패한 제프 역시 세계 정상권의 언저리에서 잠시 머물다 내려왔다.
93년 메이웨더 시니어의 수감 이후에도 주니어의 성장이 멈추지 않았던 것, 주니어가 96년 올림픽에 출전하고, 메달일 딸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역시 로저와 제프라는 두 삼촌 덕이 있었다. 아버지는 특유의 방어기술을, 로저는 보이지 않는 라이트를, 스위치 복서였던 제프는 왼손잡이를 상대하는 요령을 가르쳤다고 한다.
홀리랜드
생각해 보면 무서운일이다. 세계의 문턱에서 희대의 강자들을 만나 좌절한 경험을 가진 3형제가 한명의 아이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 메이웨더는 한명도 아닌 세명의 우수한 트레이너를 얻었고 그 대가로 평범한 어린시절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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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웨더 주니어의 아마추어 전적은 84승 6패였다. 96년 아틀란타 올림픽에 미국 대표로 출전해 로렌조 아라곤이라는 쿠바 복서를 12:11로 이기면서 76년 레너드 이래 20년만에 처음으로 올림픽에서 쿠바선수를 이긴 미국 복서가 되었다. 하지만 준결승에서 메이웨더는 세라핌 토도로프라는 불가리아 선수에게 어이없는 판정패를 당했다. 아마추어 복싱 역사상 최대의 오심중 하나로 남은 이 판정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는데, 최근 공개된 한 영상물에 의하면 이 대회의 판정을 담당했던 고위 심판관 중 한명이 수치심을 느끼고 사임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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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에서의 회한을 뒤로하고 메이웨더 주니어는 즉각 프로로 데뷔했다.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아마추어 선수가 돈을 벌 길이 없었기 때문에 메이웨더에게 다음 올림픽은 허락되지 않았다. 96년 10월 메이웨더의 데뷔전, 상대는 로베르토 아포다카라는 선수였고 전적은 2승 1패였다.
1라운드 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 명확히 드러난다. 1라운드 1분 45초경 메이웨더는 머리에서 바디로 내려가는 레프트 더블을 적중시켜 아포다카의 허리를 접어버렸다. 첫번째 다운. 바디에서 머리로 올라오는 레프트 더블은 굉장히 좋은 컴비네이션이다. 그리고 반대로 머리를 치고 바디를 치는 컴비네이션은 더 좋다. 머리에 충격이 있는 상태에서 바디를 맞으면 호흡조절이 안돼 한방에 숨통이 막힐 수 있기 때문이다. 메이웨더는 2라운드 초반에도 상대의 라이트를 스웨이로 피한 후 똑같은 컴비네이션으로 받아쳐 아포다카를 주저앉혔다.
데뷔전 부터 메이웨더 주니어는 카운터 파이터로써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상대의 공격을 끌어내기 위해 본인 스스로 접근전을 걸기도 하고 선체타를 치고 들어가는데도 주저함이 없었다. 해설진에서도 메이웨더를 두고 파워 펀처라고 하는데, 확실히 메이웨더의 펀치력은 선대 그 누구도 가지고 있지 못하던 재능이었다.
98년 6월 까지의 20개월 동안 17승 무패 13KO의 전적을 쌓은 메이웨더에게 첫 타이틀 매치의 기회가 왔다. 상대는 37승 1패 17KO승의 전적을 가진 WBC 슈퍼 페더급 챔피언 제나로 에르난데즈였다. 에르난데즈의 유일한 패배는 오스카 델라호에게 당한 것이었다.
해설진에 참여한 에마누엘 스투어드 (헌즈의 스승)는 이날의 메이웨더를 두고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모든게 마치 산책이라도 하는 것 처럼 자연스러워요, 저런 움직임을 선수에게 가르치려면 몇년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에겐 이제 뭘 가르쳐야 될지 모르겠네요."라고 평했다. 에르난데즈는 8라운드 까지 잘 싸웠지만 많이 맞았다. 8라운드 종료후 그의 코너에서는 경기를 포기했고 메이웨더는 생애 최초의 벨트를 허리에 둘렀다.
THE BEST EVER
98년 12월 부터 01년 11월 까지 약 3년동안 메이웨더는 9명의 도전자를 모두 돌려세웠다, KO승은 6번. 02년 4월 메이웨더는 2체급 정벌에 나섰다. 상대는 WBC 라이트급 챔피언 호세 루이스 카스티요. 전적은 45승 4패 1무 41KO였다. 당시까지 4차방어에 성공한 상태. 이 경기는 메이웨더가 47전의 커리어상 가장 고전한 경기중 하나로 손꼽힌다. 팽팽한 난전 끝에 메이웨더의 만장일치 판정으로 결론이 났지만 현장의 관객들은 큰 소리로 야유를 보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과 미디어들은 메이웨더의 승리가 맞다고 지지했지만 컴퓨복스의 데이터상으로는 전체적인 타격숫자와 강타의 숫자면에서 카스티요의 우세가 나타났다. 소수의 분석가들이 판정에 의문을 제기했고 메이웨더는 즉각적인 리매치에 응했다. 2차전에서도 근소한 차이였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메이웨더의 판정승이었다.
2002년 카스티요의 벽을 톨파한 메이웨더에게 2006년 4월까지 어려움은 없었다. 타이틀 3차방어를 한후 미련없이 또 한체급을 올린 메이웨더는 주니어 웰터급에서 2승을 추가한 후 아투로 가티의 WBC 슈퍼 라이트급 타이틀에 도전했다. 세번째 체급. 가티는 맷집과 투지로 유명한 선수였지만 이미 노쇠한 상태였고 메이웨더를 상대로는 6라운드까지였다.
그리고 2006년 4월, 메이웨더는 잽 주다와 싸웠다. 당시의 주다는 IBF 웰터급 챔피언이었다. 여기서 잠시 시간을 점프해 주다전 이후를 간략히 살펴본다. 주다전 이후 메이웨더에게는 변변한 위기가 없었다. 웰터급의 메이웨더는 데뷔초기에 비해 수비에 훨씬 치중하면서 KO가 아닌 포인트 쟁탈전을 노리는 스타일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쉐인 모슬리전 초반에 레프트와 라이트 큰것을 각각 한차례씩 허용하고 무릎이 꺽인 것, 마이다나의 거친 플레이와 메이웨더의 커버링 위에서 내려 찍히듯 들어오는 라이트 오버핸드에 잠시 말려든 장면 등을 제외하면 그후로 약 8년간 메이웨더는 11전을 하면서 거의 모든 라운드에서 이기는 무적의 행보를 보였다. 체급돌파는 5단계, 슈퍼페더급, 라이트급, 주니어 웰터급, 웰터급, 주니어 미들급. 벨트는 메이저 기구의 것만 10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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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델라호야전에서의 승리 이후 PPV 킹으로 등극 했고 엄청난 개런티를 벌어들이며 본인이 프로모터이기 때문에 다른 선수들처럼 프로모터 피를 수십% 내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 전용기가 자동차가 어떻고 카지도에서 얼마를 했고 등등의 얘기는 더이상 할 필요가 없는 시점일 것이고, 하여간에 현재의 메이웨더는 47승 무패로 PPV 최다 판매 기록 (240만개), PPV 판매총액 최대액 기록 (1억 5천만달러), 사상 최대 대전료, (7천 5백만 달러)기록등을 모조리 자기 것으로 갈아치우고 있으며 이제 매니 파퀴아오와의 대전에서 그 너머의 돈천지를 바라보고 있다.
메이웨더 하이라이트
이번 대전으로 메이웨더는 최대 2억 달러(약 2200억원)를 벌어들일 것으로 전망되고 있으며 메이웨더가 2억달러를 받는다면 파퀴아오는 1억 3천 4백만 달러 (약 1470억원) 가량을 손에 쥐게 된다. 2억 달러는 호날두의 2.5년 수익에 해당하는 액수이고 1억 3천만달러는 메이저리그에서도 A급인 추신수 선수의 7년치 연봉에 해당한다. 단 한경기의 47분만에 거두어들이는 수익치고는 다소 우주적인 숫자다.
유료 중계 방송 시청료도 89.95달러 (약 10만원)로 역대 최고액이 책정되었다. 이 유료 시청권이 대략 300~400만 가구에 팔릴 것으로 예측되고 있는데, 만약 300만개가 팔리면 2억 7천만달러(약 3000억원), 400만개가 팔리면 3억 6천만달러(약 4000억원)의 매출이 발생하게 된다. 기존 기록은 메이웨더-알바레즈전의 1억 5000만달러 (약 1650억원)이었다.
거기다 세계 각지로의 중계권료가 약 400억원의 수익을 가져다 줄 전망이며 현장의 입장료 수익도 약 7400만 달러(약 814억원)에 달해 기존의 기록을 세배가량 뛰어넘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메가 파이트를 앞둔 메이웨더의 소회◆
시니어의 앞을 가로막았던 슈거레이 레너드, 로저를 두번 좌절시켰던 차베즈, 제프에게 치욕을 안긴 오스카 델라 호야, 선대의 3형제는 비록 그런 슈퍼스타의 반열에 오를 수 없었다. 꿈을 이룬 복서로 갑부가 되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주니어는 드디어 그 모든 레전드를 뛰어넘어 복싱 흥행 역사의 새로운 장을 써내려 가는 중이다.
사우스포와 숄더롤의 상관관계
현지 도박사들은 대략 7:3~6:4 정도로 메이웨더의 우세를 점치고 있다. 이정도면 파퀴아오가 이겨도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다는 분위기. 현재까지의 실적이나 상대전적등을 고려해 보면 메이웨더가 우위인 것은 분명하다. 단적인 예가 후안 마누엘 마르케즈와의 상대성인데, 마르케즈는 파퀴아오와 3번싸워 승부를 내지 못했다. 전적상으로는 파퀴아오가 2승 1무로 앞서나갔지만 실제로는 세경기 모두 무승부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팽팽했다. 그리고 2013년 4차전에서 마르케즈가 파퀴아오에게 KO승을 거두었으니, 마르케즈와 파퀴아오는 대등한 수준의 선수로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런 마르케즈를 메이웨더는 아무런 문제없이 손쉽게 요리했다. 마르케즈는 완벽에 가까운 기술과 복싱지능을 갖춘 선수라고 평가받고 있었는데 메이웨더의 앞에 서니 허점 투성이었다. 파퀴아오는 과연 다를까?
파퀴아오는 실력면에서 마르케즈와 대등하지만 왼손잡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왼손잡이는 어째서 어려울까. 다시 2006년으로 돌아가 잽 주다의 경기를 살펴 보자.
1라운드에 메웨더는 주다의 레프트 바디 스트레이트와 라이트훅, 레프트 스트레이트를 허용했다. 1라운드 해롤드 래더맨의 채점은 10:9로 주다의 우세. 왼손잡이는 결국 이게 무섭다. 커버링의 열려있는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레프트와 시야 바깥쪽에서 휘어들어오는 라이트, 2라운드 1분경 메이웨더는 숙이며 접근하다가 주다의 체크 라이트 훅을 클린히트로 허용하고 손을 바닥에 짚었다. "해설진의 레녹스 루이스가 방근 바닥에 손 짚은 것 같은데요!" 라고 지적했고 래리 머쳔트도 '맞았는지 안맞았는지는 확실히 못봤지만 손은 분명히 바닥에 닿았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주심은 그것을 보지 못했고 경기는 속행되었다.
(*편집자주: 메이웨더의 공식 다운 기록은 단 한번이다. 2001년 5월의 카를로스 헤르난데즈전이었고 메이웨더는 손부상을 당했는데 고통이 너무 심해 잠시 주저앉았던 상황이었다.)
속행된 경기에서도 주다의 우세는 계속 되었다. 주다는 계속해서 레프트 바디,안면 스트레이트, 라이트 훅을 성공시켰고 2라운드에서도 우세를 점했다. 메이웨더는 3라운드 부터 반격을 시작했다. 6라운드가 되었을 때 두 선수는 각각 3라운드씩을 나눠가진 상태였다. 그러나 6라운드 이후 메이웨더가 모든 라운드에서 앞서나가며 판정승을 거두었다. 결과적으로는 그렇지만, 메이웨더는 이 경기에서 큰것을 여러차례 허용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아래의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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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퀴아오도 왼손잡이다. 그리고 잽 주다 보다 빠르고 더 공격적이며 펀치력도 강하다. 메이웨더의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간단하게 말해 메이웨더는 오른손잡이를 상대로는 S급의 방어력을 자랑하지만 왼손잡이가 상대라면 방어력이 A급으로 하락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파퀴아오가 메이웨더를 상대로도 3~4할은 이길 수 있다고 보게되는 주요 이유다.
파퀴아오는 레프트 스트레이트와 라이트훅, 레프트 바디 스트레이트, 레프트 어퍼, 라이트 어퍼를 단발로, 연속기로 조립해 마구 쏟아낼 것이다. 파퀴아오의 공격력은 보장되어 있다. 많은 펀치가 빠르게 나오고 한방한방에 혼이 실려있을 것이다. 메이웨더가 그것을 얼마나 피하고, 얼마나 먹고 얼마나 받아치는지의 비율에서, 모든것이 결정 날 것으로 전망된다. 메이웨더의 디펜스와 카운터는 사상 최고 수준이기 때문에 이 게임의 진정한 관전 가치는 이 지점에서 나타난다. 파퀴아오의 공격력이 과연 메이웨더의 수비를 능가할 수 있을까. 그리고 메이웨더는 엄청난 움직임을 가진 파퀴아오에게 카운터를 효과적으로 적중시킬 수 있을까,이것이 이 매치업의 본질이다.
레전드들의 선택
마이크 타이슨과 로이 존스 주니어는 파퀴아오의 스타일상 메이웨더에게 어려운 경기가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타이슨은 파퀴아오를 괴롭힌 선수들은 마르케즈나 에릭 모랄레스처럼 라운드당 100여발의 펀치를 내는 복서펀처 타입인데 메이웨더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에 정신없이 움직이며 치고들어갈 각을 찾는 파퀴아오에게 상대성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 로이 존스 주니어는 세간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KO면 메이웨더, 판정이면 파퀴아오의 승리를 점쳤다. 그냥 내버려 두면 파퀴아오를 잡기가 힘들기 때문에 KO 시킬 생각으로 강하게 두들겨야 메이웨더가 이길 수 있다는 얘긴데, 자꾸 곱씹어 생각해 보면 두 레전드의 의견에는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현 미들급 챔피언이자 두 선수 모두와 싸워 보았던 미구엘 코토도 파퀴아오를 응원한다고 했지만 그는 최근 2년동안 파퀴아오와 와일드카드 짐에서 한솥밥을 먹는 사이이므로 큰 의미가 없다.
그 외 대부분의 레전드급 선수들은 메이웨더의 우세를 점쳤다. 그들은 대부분 별다른 이유를 들지 않았다. 메이웨더니까. 그걸로 족했다.
*메이웨더를 선택한 주요 인물들 명단
카를로스 오티즈
메이비스 프레이저
게리 쿠니
래리 홈즈
쉐인 모슬리
후안 마누엘 마르케즈
카를로스 사라테
중립을 선택한 세명
비토 안토페르모
에반더 홀리필드
그리고 헐크 호간! 두둥~
이제 5월 3일 까지 불과 5일, 5일 후면 메이웨더는 47연승의 기록과 백만달러짜리 특수 제작 챔피언 벨트를 걸고 사우스포 매니 파퀴와오와 시대사적 일전을 벌인다. 승자에게는 어마어마한 대전료와 함께 이세대의 진정한 승자라는 월계관이 주어질 예정이다.
이용수 기자
mfight0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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