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투자증권 사장 유상호 “증시 침체, 2년 이상 갈 수도 있다” [중앙일보]
2000년 이후 가계 금융비중이 본격적으로 늘어나면서 자본시장에 팽팽한 전운이 감돌고 있다.
그 가운데서 창업 10년 만에 업계 1위로 올라선 미래에셋 그룹과,
자본시장의 전통적 강자인 한국투신운용을 인수 합병해 독보적인 금융그룹으로 성장한 한국금융지주가(구 동원증권)가
양강 구도를 형성하며 치열한 선두다툼을 벌이고 있다.
한쪽인 미래에셋 그룹에는 박현주라는 걸출한 창업자가 전면에 부각되어 있지만,
한쪽인 미래에셋 그룹에는 박현주라는 걸출한 창업자가 전면에 부각되어 있지만,
다른 쪽인 한국금융지주의 대표선수는 아직 세간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잘 나서지 않는 조용한 성품 탓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직 강호에 정식으로 방부(房付)를 들이지는 않았으나,
그 내공이 실로 만만치 않다는 평이 자자한 국내 증권사 사상 최연소 CEO 유상호(48) 한국투자증권 사장을 만났다.
1. 증권사 사장이 목표였던 사람.
일단 그의 이력은 화려하다. 증권사 해외영업의 신화적 인물, 사상 유례없는 초고속 승진의 주인공,
1. 증권사 사장이 목표였던 사람.
일단 그의 이력은 화려하다. 증권사 해외영업의 신화적 인물, 사상 유례없는 초고속 승진의 주인공,
증권사 사상 최연소 40대 CEO 등, 증권맨으로서 그의 인생은 성공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는 막상 증권사 사장이라는 꿈을 이룬 지금에 와서, 오히려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 처음 직장생활은 은행에서 시작했는데, 처음 금융 쪽 일을 택한 이유가 따로 있었나요?
“아버지와 다른 형제들까지 식구들이 은행원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금융권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죠.
- 처음 직장생활은 은행에서 시작했는데, 처음 금융 쪽 일을 택한 이유가 따로 있었나요?
“아버지와 다른 형제들까지 식구들이 은행원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금융권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 당시만 해도 ‘금융은 곧 은행’이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래서 한일 은행에 입사했지만 1년 만에 한계에 직면 했습니다.
은행의 고루하고 답답한 업무에 스스로 질려버린 거죠.
문화가 답답하고 시스템을 중요하게 여기고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은행은 그냥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으면 된다 생각한 거죠.”
- 그래서 선택한 것이 미국 유학이었습니까? 당시 문화에서 은행에서 쉽게 보내주던가요?
“아니었어요. 앞서 말한 은행의 체질이 그런 거였죠.
- 그래서 선택한 것이 미국 유학이었습니까? 당시 문화에서 은행에서 쉽게 보내주던가요?
“아니었어요. 앞서 말한 은행의 체질이 그런 거였죠.
유학을 위해서는 재직증명서 같은 서류가 필요했는데 인사담당자에게 ‘휴직하고 미국 가서 MBA를 해서 돌아오겠다’고 했더니 사표를 내라더군요. 내 돈으로 공부하고 돌아오겠다고 하면 오히려 공부 많이 해서 돌아오라고 해야하는 데 그만두라는 거죠.
그래서 할 수 없이 윗분을 통해 빽을 섰더니 휴직 처리해서 서류를 해주더군요.
그때 우리나라 은행이 이래서는 망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 미국에서는 무엇을 했습니까? 거기서 황권호 현 증권협 회장과 만난 것이 증권사 입사의 계기가 되었다면서요?
“미국에서는 정말 죽을 만큼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그 수밖에 없었고요.
- 미국에서는 무엇을 했습니까? 거기서 황권호 현 증권협 회장과 만난 것이 증권사 입사의 계기가 되었다면서요?
“미국에서는 정말 죽을 만큼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그 수밖에 없었고요.
그러던 어느 날 대우증권에서 파견 온 친구가 황권호 당시 대우증권 뉴욕사무소장에게 놀러 가자고 해요.
그래서 그냥 별 생각 없이 따라갔었죠. 그날 그분을 처음 만났는데,
그때 저보고 추천서를 써 줄 테니 유학을 마치면 대우증권으로 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때가 우리나라 증권시장이 단군이래 최고 호황이라던 80년대 말이었죠. 그때 증권업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 그럼 귀국해서 대우증권으로 입사한 동기가 추천서 때문이었나 보죠?
“아니에요. 그런 인연도 있지만 당시에 증권사 호황으로 인해 증권사들이 은행과는 달리 MBA 출신을 많이 뽑았어요.
- 그럼 귀국해서 대우증권으로 입사한 동기가 추천서 때문이었나 보죠?
“아니에요. 그런 인연도 있지만 당시에 증권사 호황으로 인해 증권사들이 은행과는 달리 MBA 출신을 많이 뽑았어요.
은행에서는 효용가치가 없었지만 증권사에는 쓸모가 있었던 거죠.
당시 제일 큰 증권사가 대우증권이어서 그리로 갔죠.”
- 그 후 영국법인으로 간 것은 어떤 생각 때문이었나요?
“입사 후 국제부에서 기획과 리서치를 맡고 있었는데, 92년 1월 3일에 국내증시가 외국인에게 개방되었죠. 그
- 그 후 영국법인으로 간 것은 어떤 생각 때문이었나요?
“입사 후 국제부에서 기획과 리서치를 맡고 있었는데, 92년 1월 3일에 국내증시가 외국인에게 개방되었죠. 그
래서 회사에서 해외근무자를 보충을 하고 지원을 받았어요. 마침 제가 해외근무 순서이기도 했고요.
그때 이왕 갈 거라면 런던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외국인 투자자라고 하면 영국계였거든요.
미국은 아직 한국증시에 관심을 갖지 않을 때였죠.
그래서 대우증권 런던 현지 법인에서 영국투자자들을 상대로 한국 주식을 파는 브로커 일을 했죠.”
- 거기에서 유사장의 신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데, 어떻게 했나요?
“음, 당시 런던에서 거래되던 한국물은 삼성그룹의 전환사채 정도가 고작 이었어요. 한국 기업을 모르니 투자를 못하잖아요.
- 거기에서 유사장의 신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데, 어떻게 했나요?
“음, 당시 런던에서 거래되던 한국물은 삼성그룹의 전환사채 정도가 고작 이었어요. 한국 기업을 모르니 투자를 못하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한국시장이 전면 개방된다니까 외국 투자자들이 한국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무조건 가서 한국 주식 아무거나 사라고 한다고 살 리가 없잖아요.
그들에게 있어서 관심은 가지만 막상 손대기에는 뭔가 내키지 않는 주식이 바로 한국물이었던 셈이죠.
그래서 처음에는 일단 영업보다 알리고 이해시키는데 주력했어요.”
(당시 그의 영어 이름은 제임스였다, 영국인들이 쉽게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그들에게 가장 친숙한 007 의 주인공 제임스 본드에서 일부러 따온 것이다. 심지어는 사무실 전화번호도 8007 이었다고 한다.)
- 당시에는 한국시장은 해외에서는 불모지에 가까웠을 텐데 영업이 쉽던가요?
“당시에 영국 펀드매니저들은 한국 브로커들을 가리켜 ‘런천 바우처’라고 불렀어요,
(당시 그의 영어 이름은 제임스였다, 영국인들이 쉽게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그들에게 가장 친숙한 007 의 주인공 제임스 본드에서 일부러 따온 것이다. 심지어는 사무실 전화번호도 8007 이었다고 한다.)
- 당시에는 한국시장은 해외에서는 불모지에 가까웠을 텐데 영업이 쉽던가요?
“당시에 영국 펀드매니저들은 한국 브로커들을 가리켜 ‘런천 바우처’라고 불렀어요,
그러니까 ‘식권’ 정도랄까. 상당히 모욕적인 말이었죠.
이 말은 한국사람들이 무조건 ‘밥 한끼 사겠다, 식사 한번 하자’ 이렇게 접근하니까, 그걸 비하한 것이죠.”
- ‘식권’으로 불렸다는 것은 접근이 어려웠다는 뜻인데, 그걸 어떻게 돌파했습니까?
“영국 비즈니스 관행은 사람관계를 두고 이렇게 등급을 규정하죠.
- ‘식권’으로 불렸다는 것은 접근이 어려웠다는 뜻인데, 그걸 어떻게 돌파했습니까?
“영국 비즈니스 관행은 사람관계를 두고 이렇게 등급을 규정하죠.
우선 어떻게 해서건 사무실 전화번호를 입수해서 전화를 한 통 거는 것을 콜드 콜(Cold call) 이라고 하거든요.
그리고 처음에는 콜드 콜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내가 전화 했을 때 일단 전화 정도는 받아주는 관계가 되는데 성공하면 1단계 관계라고 해요.
그리고 한번 만나서 내 얘기를 할 수 있는 약속을 잡을 수 있는 정도의 관계를 2단계라고 하고,
점심식사 정도를 같이 나누는 관계가 되면 3단계라고 하는데, 이 3단계는 되어야 거래가 가능한 관계가 되는 거죠.
그리고 4단계는 저녁 초대 정도를 하는 정도인데,
이 정도가 되면 서로 거래가 활발한 사이라는 의미이고, 마지막 5단계는 한국을 방문하게 해서
기업탐방 정도를 할 수 있는 관계로 이 정도면 밀착된 관계라 부르죠. 그
런데 한국사람들은 다짜고짜 3·4단계, 즉 무턱대고 ‘밥부터 한끼 하자’고 말하니 이들이 ‘식권’이라고 비웃는 거죠.
그래서 내내 고민하다가 그들이 가려운 곳을 긁어 주기로 했어요.”
- 가려운 곳을 긁어 주었다면, 새로운 영업 기법을 구사한 셈인가요?
“술 사고 밥 사는 식의 한국식 영업 대신 공부를 하자고 했어요.
- 가려운 곳을 긁어 주었다면, 새로운 영업 기법을 구사한 셈인가요?
“술 사고 밥 사는 식의 한국식 영업 대신 공부를 하자고 했어요.
지금 우리나라가 신흥국에 투자하는데 잘 몰라서 불안하죠.
그때 그쪽 나라에서 와서 설명을 해주겠다고 하면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그래서 한국의 기업회계, 법률, 규정, 기업 내용 등을 같이 공부하자고 제안했더니 긍정적으로 생각하더군요.
그렇게 같이 공부하다가 저절로 같이 밥도 먹고 맥주도 한잔 하는 사이가 되어 갔죠.”
(그는 이렇게 신뢰를 쌓았고, 결국 영국에 진출한 한국 증권사 전체 거래의 절반 이상을 대우증권으로 가져온다.
(그는 이렇게 신뢰를 쌓았고, 결국 영국에 진출한 한국 증권사 전체 거래의 절반 이상을 대우증권으로 가져온다.
심지어 대우증권을 통한 외국인 투자의 60% 이상을 혼자서 해냈다.
한국 주식을 해외에 제대로 판 최초의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레전드리 제임스(Legendary James)라는 별칭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하지만 이런 탁월한 업적을 보인 그에게 한 푼의 성과급도 지급되지 않았다,
연공서열 우선의 당시 관행 때문이었다.)
- 그래서 지금 한국투자증권에서 성과급 주의를 강조하는 것인가요?
“그때 뼈저리게 느꼈죠, 저는 그나마 2500명 직원 중에 가장 빠른 승진으로 보상을 받았지만,
- 그래서 지금 한국투자증권에서 성과급 주의를 강조하는 것인가요?
“그때 뼈저리게 느꼈죠, 저는 그나마 2500명 직원 중에 가장 빠른 승진으로 보상을 받았지만,
많은 능력 있는 사람들이 성과에 대한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했어요.
그러니 누가 해외근무를 하려 하겠어요.
제가 영국에서 귀국한 게 IMF 이후 99년인데, 이때 한국 증권사들이 조금씩 성과급을 도입하기 시작했죠.
저는 성과급에 의한 보상이 신념입니다. 특히 다른 업종보다 증권사는 개인별로 실적을 평가하기가 아주 좋죠.
그래서 지금 우리 회사도 아주 강한 수준의 성과급 체제가 도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성과급제도가 한국투자증권의 ‘행복’이라든지, 혹은 ‘친구’라는 개념과는 상충되지 않나요?
“못하는 직원에게 손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잘하는 직원에게 회사가 보상하자는 주의가 성과급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과급제도가 한국투자증권의 ‘행복’이라든지, 혹은 ‘친구’라는 개념과는 상충되지 않나요?
“못하는 직원에게 손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잘하는 직원에게 회사가 보상하자는 주의가 성과급입니다.
합리적 차등은 불행감이 적어요.
이런 성과급은 회사가 지불하는 전체 임금이 올라가는 플러스 섬 게임이죠,
다른 사람에게 갈 임금을 빼앗아서 일 잘하는 사람에게 주는 게임이 아니거든요.”
(이런 성과급 시스템에 의해 한국투자증권 직원 중에는
(이런 성과급 시스템에 의해 한국투자증권 직원 중에는
수십억 원의 고액 급여자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고 한다)
2, 대우정신, 그리고 대우가 남긴 것들
(유상호 사장은 취임 후 한국투자증권이 ‘인도 차이나 허브, 그레이트 차이나 허브, 동남아 허브. 그레이트 러시아 허브’를 구축한다는 4대 허브 구상 전략을 내놓았다. 아울러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와, 우크라이나·카자흐스칸 등 구 CIS 지역을 공략한다는 원대한 계획도 구체화 하고 있다. 어딘가 기시감을 불러 일으키는 낯설지 않은 구상들이다.)
- 그렇게 애착을 가졌던 대우증권을 떠난 계기는 무엇입니까? 배가 난파 기미를 보이니까 먼저 뛰어 내리신 건가요?
“영국에서 일할 때 매년 연말이면 외국 증권사로부터 스카웃 제의를 받았었어요. 그쪽에서는 한국 진출을 위한 전문가가 필요했던거죠. 하지만 응하지 않았어요. 저는 우리나라 제1의 증권사에서 사장이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당시 대우증권은 우리나라에서 2등의 두 배나 되는 1 위였어요. 그런데도 대우를 떠나면 꿈을 포기하는 거잖습니까. 그래서 스카웃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죠. 그런데 귀국하자마자 대우그룹이 어려워지면서 결국 대우증권도 흔들리고 말았죠. 하지만 저는 대우증권을 살릴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그렇게 무너질 수는 없었죠. 당시 대우증권의 2대 주주와, 주요 외국계 주주들이 모두 제 고객이었어요. 그들을 설득해서 대우를 살릴 방안을 추진했어요. 하지만 정부에서 그걸 받아 들이지 않았어요. 살릴 수 있었는데 무너진 거죠. 그래서 결국 대우를 떠났죠. 어찌 보면 제 스스로 얹었던 멍에를 벗은 셈이었고 홀가분한 일이기도 했지만 솔직히 안타깝고 서러웠어요.”
- 요즘 지향하는 4대 허브라든지, 금융 실크로드 구축과 같은 전략들은 대우의 유전자를 강하게 느끼게 하는데요?
“아무래도 대우에 있을 때 보고 들은 것이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당시에는 ‘대우정신’이란 게 있었어요.
(유상호 사장은 취임 후 한국투자증권이 ‘인도 차이나 허브, 그레이트 차이나 허브, 동남아 허브. 그레이트 러시아 허브’를 구축한다는 4대 허브 구상 전략을 내놓았다. 아울러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와, 우크라이나·카자흐스칸 등 구 CIS 지역을 공략한다는 원대한 계획도 구체화 하고 있다. 어딘가 기시감을 불러 일으키는 낯설지 않은 구상들이다.)
- 그렇게 애착을 가졌던 대우증권을 떠난 계기는 무엇입니까? 배가 난파 기미를 보이니까 먼저 뛰어 내리신 건가요?
“영국에서 일할 때 매년 연말이면 외국 증권사로부터 스카웃 제의를 받았었어요. 그쪽에서는 한국 진출을 위한 전문가가 필요했던거죠. 하지만 응하지 않았어요. 저는 우리나라 제1의 증권사에서 사장이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당시 대우증권은 우리나라에서 2등의 두 배나 되는 1 위였어요. 그런데도 대우를 떠나면 꿈을 포기하는 거잖습니까. 그래서 스카웃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죠. 그런데 귀국하자마자 대우그룹이 어려워지면서 결국 대우증권도 흔들리고 말았죠. 하지만 저는 대우증권을 살릴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그렇게 무너질 수는 없었죠. 당시 대우증권의 2대 주주와, 주요 외국계 주주들이 모두 제 고객이었어요. 그들을 설득해서 대우를 살릴 방안을 추진했어요. 하지만 정부에서 그걸 받아 들이지 않았어요. 살릴 수 있었는데 무너진 거죠. 그래서 결국 대우를 떠났죠. 어찌 보면 제 스스로 얹었던 멍에를 벗은 셈이었고 홀가분한 일이기도 했지만 솔직히 안타깝고 서러웠어요.”
- 요즘 지향하는 4대 허브라든지, 금융 실크로드 구축과 같은 전략들은 대우의 유전자를 강하게 느끼게 하는데요?
“아무래도 대우에 있을 때 보고 들은 것이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당시에는 ‘대우정신’이란 게 있었어요.
사실 부실경영만 아니었다면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은 놀라운 통찰이었어요.
관리부재가 낳은 비극이었죠.
하지만 지금도 아까운 것은 김우중 회장의 네트워크가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사정에서 그 네트워크를 활용 할 수 있었다면, 생각 할수록 아까운 일입니다.
가끔 그분이 사회에 헌신하고 반성 할 기회를 주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대우증권은 당시 대우의 돈줄이었는데요. 그것도 해외파트이면 당시 상황을 가장 잘 파악을 하고 있었을 것이고요.
-대우증권은 당시 대우의 돈줄이었는데요. 그것도 해외파트이면 당시 상황을 가장 잘 파악을 하고 있었을 것이고요.
당시 대우의 방향이 옳았다고 생각하나요?
“당시 대우의 금융부분을 증권이 맡았던 것은 맞아요.
“당시 대우의 금융부분을 증권이 맡았던 것은 맞아요.
대우증권을 통해서 헝가리·우즈베키스탄·폴란드에 은행을 세우고, 베트남 은행에는 지분을 투자하고,
인도에는 합작 증권사를 만들었었죠, 그때 ‘이머징 마켓에 진출하려면 이래야 하는구나’라는 사실을 배웠어요.
무조건 가서 회사를 만드는 게 능사가 아니라,
함께 뛰어들어 현지화 하면서 성장해야 한다는 거죠.
상상해 보세요.
지금 우리나라 금융기관들이 이제야 너도나도 진출을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때 만약 그게 결실을 거두었다면 지금 우리나라는 위상은 너무도 달라져 있을 겁니다.
그러고 보면 김우중 회장 한 분에게 지나치게 의존한 관리부재 시스템이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안타깝죠.”
(그는 이후 대우증권을 나와, 황권호씨가 당시 사장으로 있던
(그는 이후 대우증권을 나와, 황권호씨가 당시 사장으로 있던
메리츠 증권을 거쳐 구 동원증권으로 자리를 옮겨 법인영업을 담당하는 부사장급 본부장으로 영입된다.
그 후 IB 본부장을 거쳐 2005년 한국투자신탁을 동원증권이 인수하자 본사영업담당 총괄 부사장으로 승진한다.
그야말로 승승장구였다.)
- 지금 우리나라 증권사들의 해외진출 붐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십니까?
“음, 우려스럽습니다. 과열된 느낌입니다. 90년대 IMF 전에 증권사가 25개 있었는데 그 중 14개가 런던에 해외법인을 냈었죠.
- 지금 우리나라 증권사들의 해외진출 붐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십니까?
“음, 우려스럽습니다. 과열된 느낌입니다. 90년대 IMF 전에 증권사가 25개 있었는데 그 중 14개가 런던에 해외법인을 냈었죠.
하지만 그 중에서 그나마 이익을 낸 곳은 불과 두세 군데 였죠.
결국 IMF 후에 4개만 남고 모두 철수하면서 큰 손실을 냈어요.
어쩌면 지금 그 재판이 될까 걱정스러운 측면이 있습니다.
다만 지금 경기 침체 등의 영향으로 열풍이 주춤하고 있는데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3. CEO 로 산다는 것
- 우리나라 1등 증권사의 사장이 된다는 꿈은 이뤄진 셈인데 그 다음에는 어떤 꿈이 있나요?
“음, 아직 우리회사가 업계의 1 위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3. CEO 로 산다는 것
- 우리나라 1등 증권사의 사장이 된다는 꿈은 이뤄진 셈인데 그 다음에는 어떤 꿈이 있나요?
“음, 아직 우리회사가 업계의 1 위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회사가 국내 최고, 아시아 1위 증권사가 되어야 꿈이 이루어 진 거죠. 아직은 아닙니다.
우리 회사를 아시아 1위의 투자 은행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 그러기 위해서는 뭔가 다른 전략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처럼 펀드만 팔아서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저는 IB(투자은행),와 AM(자산관리) 비중을 크게 키울 생각입니다, 이 두 부분은 우리회사의 큰 장점이기도 하죠,
- 그러기 위해서는 뭔가 다른 전략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처럼 펀드만 팔아서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저는 IB(투자은행),와 AM(자산관리) 비중을 크게 키울 생각입니다, 이 두 부분은 우리회사의 큰 장점이기도 하죠,
거기에 자본금을 키워서 PI(자기자본 투자)를 적극적으로 함으로서 지속적으로 성장하도록 생각입니다.”
- 말은 쉽지만, 글쎄요, 자기자본을 투자한 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 일 테고,
- 말은 쉽지만, 글쎄요, 자기자본을 투자한 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 일 테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금도 충분해야 할텐 데요.
“우리는 5년째 배당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5년째 배당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모기업인 한국 금융지주는 배당을 하지만 증권은 배당을 하지 않고 몸집을 키우고 있어요.
필요하면 지주로부터 증자를 받을 수도 있겠지요. 자본금 투자에 대한 이익률은 기본목표로는 12% 정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은행이율이 6-7라고 가정하고 두 배 수익을 낸다는 것이죠. 물론 내부 요구 수익률은 20%를 넘습니다.
우리회사 자본이 2조 4천억인데 이게 그냥 자본으로 묶여 있는다는 건 아까운 일이죠.
아직 우리나라 금융사들의 경험이 많지 않고 투자패턴이 다양하지 않지만,
앞으로 최소 자기자본 이익률 20%는 달성하겠다는 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그래서 2010년대 아시아 5대 투자은행, 2020년에는 아시아 최대 투자은행으로 가겠습니다.”
- 국내 최연소, 그것도 메이저 증권사 사장으로서 앞으로
- 국내 최연소, 그것도 메이저 증권사 사장으로서 앞으로
젊은 청년들이 증권사에 도전한다면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뽑겠습니까?.
“베어스턴스의 CEO 였던 분이 쓴 ‘Memo from the Chairman(사장이 보낸 편지)' 이라는 책을 옆에 두고 있습니다.
“베어스턴스의 CEO 였던 분이 쓴 ‘Memo from the Chairman(사장이 보낸 편지)' 이라는 책을 옆에 두고 있습니다.
이 분은 바람직한 인재상으로 'PSD'를 꼽았어요.
즉 가난하고(Poor), 똑똑하며( Smart), 부자가 되고 싶은 강한 욕망(Deep desire to become rich) 을 가진 인재라는 의미죠.
저는 이 기준을 좋아합니다.
다만 거기다가 미래에 CEO 가 되고 말겠다는 열망까지 가졌다면 더 할 나위가 없겠죠.”
4. 도전과 시련
(유사장은 2000년 7월 베트남 호치민에 증권거래소가 개장되었다는 소문에 무릎을 쳤다.
4. 도전과 시련
(유사장은 2000년 7월 베트남 호치민에 증권거래소가 개장되었다는 소문에 무릎을 쳤다.
대우시절 배운 영토확장의 본능이 꿈틀거린 것이다.
그는 그곳으로 진출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때부터 5년간 베트남 진출을 위한 리서치를 시작했다.
그리고 베트남 프로젝트를 터트렸다.
하지만 정작 이 도전은 그의 승승장구에 첫 번째 시련이 되고 말았다.)
- 미래에셋의 성장이 무서울 정도인데요. 미래에셋과 한국 투자증권의 차이라면 어떤 게 있을까요?
“미래는 운용사 중심의 성장 전략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외형상 한투운용이 따라 잡기 어려울 정도로 성장했지요.
- 미래에셋의 성장이 무서울 정도인데요. 미래에셋과 한국 투자증권의 차이라면 어떤 게 있을까요?
“미래는 운용사 중심의 성장 전략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외형상 한투운용이 따라 잡기 어려울 정도로 성장했지요.
하지만 우리는 증권사 중심의 성장 전략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증권 부분에서 미래가 따라오고 있지만 증권 부분에서 역전 당할 가능성은 없죠.
우리입장에서는 운용 부분에서 미래를 따라 잡는 것이 중요해진 셈이죠.”
- 그럼 미래에셋이 불과 10년 만에 전통의 강호인 한국투신을
- 그럼 미래에셋이 불과 10년 만에 전통의 강호인 한국투신을
흡수한 한투운용을 추월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미래의 과감한 전략이 앞서 간 것이라고 봐야겠죠. 공격적인 해외진출이 대표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고요.
“미래의 과감한 전략이 앞서 간 것이라고 봐야겠죠. 공격적인 해외진출이 대표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고요.
직접 해외펀드를 운용한다든지, 초기부터 적립식 펀드에 주력했다던지
중국 시장 진출이 앞섰다던지 하는 것들을 들 수 있겠죠.
그 외에도 마케팅 능력이나 전략도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
- 그런데 한국운용에서도 해외진출은 미래 다음으로 많이 하신 셈인데,
- 그런데 한국운용에서도 해외진출은 미래 다음으로 많이 하신 셈인데,
베트남에 투자한 부분이 지금 곤란한 상황에 빠져 있지 않습니까.
혹시 신흥시장 진출이 성급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솔직히 속앓이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또 저희 펀드에 투자하신 투자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솔직히 속앓이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또 저희 펀드에 투자하신 투자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베트남 프로젝트는 옳은 일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저희 베트남 펀드는 5년까지 폐쇄형 펀드라 아직 3년 반 정도가 만기가 남았죠.
베트남 같은 초기 프런티어 마켓은 원래 변동성이 대단히 큽니다. 그 과정에서 하필 외생변수가 발생했고요.
해외진출 시 특히 베트남 같은 초기 신흥시장은 잠재력이 가장 중요합니다.
결국 시련을 디디고 결국 일어 설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느냐, 라는 점인데, 저는 결국 다시 일어 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만약 5년 만기가 되었을 때도 손실이 있다면,
만기 즈음에 대안펀드를 만들어서 투자자들이 갈아 탈 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폐쇄형 펀드는 개방형 펀드와는 달리 만기 전까지 환매를 할 수 없다.
(폐쇄형 펀드는 개방형 펀드와는 달리 만기 전까지 환매를 할 수 없다.
때문에 펀드에 문제가 생겨도 투자자들이 즉각 대응 할 수 없는 단점이 있지만,
대신 시장이 나쁘면 환매하고 좋으면 투자하는 고점매수, 저점매도를 막아 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중도 환매가 불가능해 투자자들이 처음부터
여유자금으로 투자하기 때문에 불안감이 적다는 측면도 있다.)
- 증권사 사장으로 투자자들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하기가 쉬운 일은 아닌데,
- 증권사 사장으로 투자자들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하기가 쉬운 일은 아닌데,
투자자들은 일단 펀드에 가입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펀드를 팔 때는 온갖 장점만을 들어 홍보하다가 막상 펀드를 팔고 나면 입을 씻어버리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맞는 말입니다. 그 점은 잘못 된 일입니다. 앞으로 펀드 판매 후에 A/S제도를 도입 할 생각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 점은 잘못 된 일입니다. 앞으로 펀드 판매 후에 A/S제도를 도입 할 생각입니다.
세상에 모든 상품은 A/S가 있는데 펀드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앞으로 분기마다 보고서를 발송하고, 투자자들이 궁금해 하시는 부분들에 대해 무조건 기다려라 하지 않고,
상세하게 A/S를 해서 투자자들이 자본시장을 신뢰하시게 할 생각입니다.
지금 영업사원보다 A/S인력을 늘리고 있습니다.”
- 사실 베트남 펀드는 규모가 많이 크지는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 사실 베트남 펀드는 규모가 많이 크지는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중국의 경우는 심각한 문제가 생겼는데요,
한투운용은 중국 진출은 왜 소극적이었습니까?
혹시 중국에 대해 부정적이었나요?
“운용부분에서 중국투자에 대한 준비가 늦어졌기 때문입니다.
“운용부분에서 중국투자에 대한 준비가 늦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충분히 준비하고 알면 투자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는데, 중국은 리서치를 하는데 시간이 더 필요 했었어요.
그 바람에 중국에 대한 상품을 선보이는 것은 아무래도 좀 늦고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죠.”
(지금 중국·인도·베트남과 같은 신흥시장 지수들은 고점대비 거의 40,50%씩 하락한 상태다.
(지금 중국·인도·베트남과 같은 신흥시장 지수들은 고점대비 거의 40,50%씩 하락한 상태다.
요즘 들어 일부 반등한 베트남이나, 최근 하락폭이 깊어진 인도나,
중국 등에 투자한 펀드들은 예외 없이 투자자들의 우려가 심각한 상황이다.)
5. 현재와 미래
- 이제 요즘 주식시장 이야기 좀 해보죠, 주가가 많이 하락하고 있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우리 회사는 작년 연말부터 장이 안 좋을 것으로 보고 그에 대한 준비를 해왔습니다. 신년사에도 밝혔었죠.
5. 현재와 미래
- 이제 요즘 주식시장 이야기 좀 해보죠, 주가가 많이 하락하고 있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우리 회사는 작년 연말부터 장이 안 좋을 것으로 보고 그에 대한 준비를 해왔습니다. 신년사에도 밝혔었죠.
올해는 힘든 장이 될 거라고요.
그래서 그 동안은 성장 위주로 경영을 해왔으나 이제는 위험자산의 비중을 줄이고, 자산의 저변을 넓혀 갈 생각입니다.
증권사인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투자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직 주식시장 하락의 끝은 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상당기간 고생을 할 것으로 생각 합니다.”
(이 인터뷰는 7월 1일 화요일에 진행되었고 인터뷰가 진행되던 당시 종합주가 지수는 1670 이었다.
(이 인터뷰는 7월 1일 화요일에 진행되었고 인터뷰가 진행되던 당시 종합주가 지수는 1670 이었다.
하지만 유사장이 신년사에서 시장이 힘들 것이라고 한 것은 내부용이었고,
실제 한국 투자증권 리서치 센터가 투자자들에게 한국 주식시장이 약세장에 진입했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은
이 인터뷰가 진행된 지 며칠 후였다.)
- 그렇다면 지금 한국이나 중국, 기타 신흥시장에 투자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문제는 한 가지 고민이 필요합니다, 지금 환매를 하면 단기적으로는 분명히 좋은 선택 일 수 있습니다.
- 그렇다면 지금 한국이나 중국, 기타 신흥시장에 투자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문제는 한 가지 고민이 필요합니다, 지금 환매를 하면 단기적으로는 분명히 좋은 선택 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환매하고 지금보다 더 낮은 가격에 재 매수를 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자칫하면 나중에 더 높은 가격에서 재 매수를 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죠.
그것이 투자자의 심리이니까요.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펀드를 파는 회사지만 신규매수는 당분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섣불리 환매하는 것도 이미 늦었습니다.
다만 기술적인 반등이 나타나면 일부를 환매해서 포지션을 바꿀 필요는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지나치게 비중이 높은 신흥국의 펀드를 환매해서 국내펀드에 가입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라고 봅니다.
주식투자자도 일단 반등 시 비중을 줄이고 안정성이 높은 우량주로 교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 그렇다면 지금 여유자금을 가진 분들이나, 환매한 분들은 어디에 돈을 맡겨야 할까요?
“지금은 주식에 투자할 때는 아닙니다. 단기적으로는 CMA(초단기채권투자 상품) 에 넣어두고 관망하고, 굳이 투자를 하시겠다면 ELS(주가 연계증권) 정도가 상대적으로 나아 보입니다.
- 그렇다면 지금 여유자금을 가진 분들이나, 환매한 분들은 어디에 돈을 맡겨야 할까요?
“지금은 주식에 투자할 때는 아닙니다. 단기적으로는 CMA(초단기채권투자 상품) 에 넣어두고 관망하고, 굳이 투자를 하시겠다면 ELS(주가 연계증권) 정도가 상대적으로 나아 보입니다.
하지만 한가지 지금 뒤늦게 원자재 관련 주식이나, 원자재 수출 관련 국가에 뒤늦게 투자하려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선택이라고 생각됩니다.
앞으로 침체 상황이 최소 1년, 길게는 2년 이상 갈 수도 있습니다.
유가는 일정수준에서 하락 할 것으로 보지만, 그렇다고 증시가 바로 좋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 요즘 젊은 증권사에 취업하려는 분들이 많습니다, 상대적으로 인기 직장인 셈이죠.
- 요즘 젊은 증권사에 취업하려는 분들이 많습니다, 상대적으로 인기 직장인 셈이죠.
증권사는 다른 산업에 비해 어떤 매력이 있습니까?
“증권업의 1인당 생산성은 제조업과 비교가 안됩니다.
“증권업의 1인당 생산성은 제조업과 비교가 안됩니다.
현대자동차가 아무리 생산성을 높여도 같은 인력으로 자동차를 두 배를 생산 할 수 없죠, 하지만 증권업은 다릅니다.
한 사람이 하는 일에 ‘0’ 하나를 더 붙이면 10 배가 됩니다,
능력 있는 펀드매니저가 100 억을 굴리는 것이나, 1000 억을 굴리는 것이나 ‘0’ 하나 차이일 뿐이죠.
지렛대 효과가 대단히 큰 산업입니다. 우리나라가 미래에 나가야 할 길이기도 합니다.”
- 그래서 인가요? 요즘 기업들의 증권업 진출이 붐인데 어떻게 보십니까?
“대기업들이 증권업을 성장 산업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인가요? 요즘 기업들의 증권업 진출이 붐인데 어떻게 보십니까?
“대기업들이 증권업을 성장 산업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증권사 신규허가라는 문이 닫힐까 봐 일단 라이선스를 따놓고 보자는 곳도 있습니다.
하지만 증권업은 정열과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산업자본이 자기자본을 굴리는 창구로 쓴다면 내부거래가 되고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시장발전에 장애가 됩니다.”
- 그렇지만 동원그룹도 산업자본 아닙니까?
- 그렇지만 동원그룹도 산업자본 아닙니까?
동원그룹의 진입은 괜찮은 것이고 다른 기업의 진출은 나쁜 것인가요?
“동원은 자기 계열회사 돈을 굴릴 방계 회사가 없는 회사였습니다.
“동원은 자기 계열회사 돈을 굴릴 방계 회사가 없는 회사였습니다.
오히려 소규모 산업자본이 금융자본으로 변신에 성공한 것이지, 산업자본이 금융업을 하부에 거느린 것이 아니었죠.
하지만 지금 재벌 그룹의 진출은 거느리는 형태가 되는 것입니다.
금융시장은 금융자본의 전문기업 체제로 가야 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의 답변은 궁색한 데가 있었다.
(하지만 이 부분의 답변은 궁색한 데가 있었다.
동원이 한 것은 결과적으로 잘한 일이지만 다른 기업이 하는 것은 목적이 불순하다는 것은
아무래도 자기방어 논리에서 나온 것으로 밖에 볼 수 없었다.)
- 우리나라 금융시장, 혹은 금융회사의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원래 행동양식은 제도나 규범에 좌우 됩니다, 제도가 개선되면서 금융시스템도 많이 나아졌죠, 이점은 긍정적입니다.
- 우리나라 금융시장, 혹은 금융회사의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원래 행동양식은 제도나 규범에 좌우 됩니다, 제도가 개선되면서 금융시스템도 많이 나아졌죠, 이점은 긍정적입니다.
하지만 금융회사들이 리스크, 즉 위험에 대한 인식이 부족합니다,
특히 증권업은 과거의 실패에서 반성을 못하고 있는 점이 있습니다.
그 점에서 재벌기업이나 형제기업의 진출도 위험을 보지 않고 기회만 보기 때문이고요.”
마침
마침
그는 젊은 증권맨들이 가장 닮고 싶어하는 증권가의 성공모델 중의 한 사람이다. 더구나 고속 출세한 사람 특유의 교만함이 없어 증권가에서는 그를 들어 서슴없이 ‘인격자’라고 칭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성공에는 그만큼의 대가가 따른다. 사람들은 그를 부러워할지 몰라도 정작 자신은 밤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기가 일쑤 라고 한다. 그가 베트남을 비롯한 주식시장이 악화된 탓이다. 이렇듯 증권사 사장이란 극도의 스트레스가 따르는 직업이다. 그는 워크홀릭의 전형이다. 하지만 인터뷰 내내 드물게 온유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비법을 물었더니, 매사를 스타카토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민을 길게 하기 보다, 걱정과 고민을 치열하게 하되 그 순간으로 끊어친다는 의미다. 하지만 정작 증권사에 돈을 맡긴, 그의 고객들도 주식시장의 급락으로 생긴 그 길고 깊은 고민을 과연 스타카토로 끊어버릴 수 있을까. 어쩌면 바로 이 점이 그의 진짜 고민일지도 모른다.
글=박경철,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글=박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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