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사업

토탈패션매장

구봉88 2008. 12. 13. 14:15

패션과 문화, 놀이가 섞여 있는 편집매장 유행" ┌ 패션 News  


[한겨레] [매거진 esc] 당신의 감각을 편집해 봐

구경만으로도 재미가 쏠쏠

연두색 잔디로 덮인 암벽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면, 동화 ‘비밀의 화원’ 같은 공간이 펼쳐진다. 길게 땋은 머리카락 뭉치, 다이아몬드 형태의 거울 등 독특한 소품 사이로 마네킹이 보인다. 언뜻 보면 초현실주의 연극 무대 같은 이곳.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는 곳일까? 편집매장 ‘탐그레이 하운드’의 이상권 바이어는 “기본적으로 옷을 파는 곳이지만, 패션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재미난 장소”라고 소개한다. 지난달 25일에는 젊은 디자이너 하상백의 소규모 파티가 있었고, 공간 곳곳엔 작가 윤리의 작업이 설치되어 있다. 첫인상은 신비한 분위기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에이프릴 77’, ‘알렉산더 왕’, ‘래그 앤 본’과 같이 쉽게 보기 어려운 희귀한 브랜드들의 성찬이다.

이름 자랑하는 유명 브랜드는 저리 비켜


패션에 관심 있는 이들에겐 꽤 알려진 단어인 편집매장은 조어의 냄새가 풍긴다. ‘콘셉트 숍’, ‘셀렉트 숍’, ‘멀티숍’을 번역한 용어로 명품 브랜드나 유명 디자이너의 제품을 선별해 구성한 매장을 뜻한다. 이런 편집매장에선 똑같은 옷, 엇비슷한 스타일은 찾아보기 어렵다.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롭지만 고급 마케팅의 기본인 다품종 소량, 맞춤형 정신이 철저히 배어 있다. 국내에서 2000년 ‘분더샵’을 시작으로 강남 청담동 일대에 편집매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쿤’, ‘무이’, ‘분더샵’이 1세대 편집매장이라면, 최근 뜨고 있는 2세대 편집매장은 하나같이 복합 문화공간을 꿈꾼다. 신세계백화점에 들어선 ‘분더샵 앤 컴퍼니’의 황유선 바이어는 “독특한 아이템을 찾는 패션 리더들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정보를 풀어놓는 곳”이라고 말한다. 신세계백화점, 롯데백화점, 제일모직 등 대기업들도 편집매장을 운영하고 최근엔 홍대 앞, 신사동 가로수길에도 소규모 편집매장들이 늘었다.

그중에서도 ‘탐그레이’는 국내 편집매장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패션을 매개로 한 소규모 문화 행사, 기존 편집매장과 비교해 저렴해진 상품 가격이 눈에 띈다. 젊은 바이어들은 옷뿐 아니라 외국 잡지, 피겨(캐릭터 인형), 음반 등을 소개하며 편집매장의 새로운 트렌드를 주도한다. ‘탐그레이’를 비롯해 20대 젊은 남성들에게 사랑받는 ‘애딕티드’, 다채로운 행사 기획으로 입소문이 난 ‘데일리 프로젝트’, 지난 9월 신세계백화점 본점에 문을 연 ‘분더샵 앤 컴퍼니’는 모두 기존 편집매장의 고급 이미지를 탈피했다. 대신 젊은 감각과 새로운 시도가 이들의 전략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신진 디자이너들의 매력적인 옷으로 소비자를 유혹하고, 동시에 세련된 고급 놀이터임을 자처한다.

최근의 편집매장은 왜 유독 복합 문화공간을 선망할까? 1991년 이탈리아에서 세계 최초로 콘셉트가 있는 편집매장 ‘10 꼬르소꼬모’를 기획한 패션잡지 에디터 출신의 카를라 소차니는 편집매장의 매력을 잡지에 빗대 설명했다. 다양한 이야기를 한 손에 읽을 수 있는 잡지처럼 한 공간에 서로 다른 개성의 제품을 모아 변화무쌍한 욕구를 충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편집매장과 복합문화는 바늘과 실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의 관계다. 올해 초 청담동에 ‘10꼬르소꼬모’ 한국점을 연 제일모직 관계자는 “부유층에 한정된 명품 숍이 아니라 독특한 디자인의 옷이나 생활 소품, 음반 등 광범위한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장소”임을 강조한다.


요즘 편집매장의 변화는 더 젊게, 더 가볍게로 요약된다. 문턱이 낮아졌다고는 하지만 편집매장엔 여전히 비싼 제품들이 많다. 그래도 편집매장들은 값비싼 명품을 사고파는 차원을 넘어 실험적이고 뜨거운 문화가 생산되는 활력 있는 장소를 표방한다. ‘데일리 프로젝트’의 이정희 이사는 위압감을 주는 고급 편집매장에 반기를 들고 싶었다. 초인종을 눌러야 들어갈 수 있는 패션도시 뉴욕이나 밀라노의 우아한 편집매장은 오히려 식상했다. “패션에 관한 재미난 일이 벌어지고, 사람들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프로젝트 개념의 장소로 만들고 싶었던” 그는 벼룩시장, 바자회, 독립잡지 전시 등을 열어 유행에 민감한 젊은 방문객들을 끌어들이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는 10월 말 ‘서울 패션위크’ 주간에 임수정, 양근영, 지일근 등 국내외 신진 디자이너의 작업을 소개하는 ‘쇼룸’을 열었다.

현장에서 편집매장의 매력을 완성시키는 이들은 뭐니 뭐니 해도 바이어들이다. 전세계 디자이너로부터 옷을 사고 매장에 진열해 파는 모든 일을 하는 바이어들에게, 편집매장은 옷의 매력을 가장 과감하게 펼쳐놓을 수 있는 장소다. 반 발짝 앞서간 유행이 통하고, 반응도 빠르기 때문이다. 북유럽 중심의 아방가르드한 신진 디자이너의 옷을 주로 다루는 ‘애딕티드’에선, 덴마크의 젊은 패션 집단 ‘우드우드’, 호주의 ‘매터리얼 보이’, ‘코콘토자이’(KTZ)를 비롯해 코믹북, 디자인 장난감도 인기를 끈다.

2009년 가을·겨울철 옷을 준비 중인 공준호 바이어는 “세계 4대 컬렉션을 직접 찾아 디자이너와 만나고 샘플을 일일이 직접 입어 보고 주문을 결정한다”며 “내가 트렌드라 예상한 옷이 소비자들에게 사랑받을 때면 무한한 즐거움을 느낀다”고 했다. 공준호 바이어는 편집매장은 “개성을 중시하고 유행에 민감한 패션 리더들에게 적합한 쇼핑 장소”라고 강조한다. 아직 대중화된 공간이라기보다는 자기 취향을 맘껏 누리는 이들에게 최적의 소비 장소라는 것이다.


아직은 고가 제품이 주, 쇼핑 부담 없이 놀이터처럼 즐겨 보길

‘탐그레이’의 이상권 바이어는 “패션을 좋아하는 여러 사람들이 편하게 찾아올 수 있도록 매장에서 2천원에 커피를 팔고 있다”며 “옷을 사지 않아도 옷을 보는 것이 놀이가 됐으면 한다”고 했다. 편집매장을 운영하는 것 자체가 바이어들에겐 아이디어와 콘셉트를 기반으로 한 각고의 ‘작업’이다. 옷걸이 위치나 천장 조명 등을 붙박이가 아닌 이동형으로 설치해, 패션쇼나 전시 등 행사에 따라 디스플레이가 달라진다. ‘분더샵 앤 컴퍼니’도 투명 아크릴과 밝은 조명을 활용해 경쾌한 느낌을 강조했고, 젊은 미술작가들의 설치작업을 공간 인테리어에 활용한다. ‘데일리’도 이동식 벽으로 콘셉트에 맞게 언제든 공간을 뒤집었다 펼쳤다 하듯 바꾼다. 비싼 옷만 쌓아둔 지루한 매장 대신, 옷으로 ‘놀 수 있는’ 걸 보여주는 편집매장들이다. 편집매장에서 만난 회사원 이진(30)씨는 케이블티브이의 패션 프로그램을 보고 호기심에 편집매장을 찾았다고 했다. “미술서적과 귀여운 장난감도 진열되어 있어 의외로 친근한 느낌이었다”며 “비싸긴 하지만 확실히 눈이 즐겁고 패션 공부도 되는 것 같다”고 했다.

글 현시원 기자
qq@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