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을 중국서 산 네덜란드 할머니 |
소설 같은 그녀의 삶…남편은 평범한 중국인 |
올해73세인 양 모 할머니는 금발머리에 파란 눈동자를 가진 백인이다. 소박한 옷차림으로 베이징 둥쓰스탸오(东四四条) 집 문 앞에서 86세의 모 할아버지가 시장에서 돌아오길 기다린다. 유창한 베이징 방언으로 이웃들과 인사를 나누는 양 모 할머니. 베이징 사합원에 거주하고 있는 양 모 할머니는 네덜란드 출신으로 본명은 ‘미라’. 양 모 할아버지 본명은 양바오루(杨宝禄)이며 베이징 토박이다. 그들이 오랜 세월을 살고 있는 사합원의 골목길은 네덜란드 귀족아가씨에서 베이징 평민 며느리로 다시 태어난 미라의 삶을 쭉 지켜봐 왔다. 두 노인의 결혼은 이 골목 근처에 사는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1956년 어느 여름 날, 베이징대학을 갓 졸업하고 전기 기계 공장에 취직하여 출퇴근 생활을 하던 양바오루. 퇴근 중 갑자기 내린 소나기로 발을 동동 구르던 중 우산을 쓰고 버스를 기다리던 한 외국인 여자를 보게 되었다. 그 외국인 여자가 바로 ‘미라’였다. 당시 비는 몹시도 거세 참을 수 없던 양씨는 돌발 행동을 하고 말았다. 미라가 쓰고 있던 우산 안으로 뛰여든 것이다. 친절하고 마음씨 좋은 미라는 그를 안타깝게 여겨 그날 양씨를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고 한다. 그 이튿날 미라에게 한 중국 청년이 집으로 찾아왔다. 양씨가 찾아온 것이다. 미라의 언니는 주위에 많은 남자들 중에 왜 하필이면 중국인 남자냐며 그녀를 탓했지만 낭만적인 것을 좋아하는 미라는 이도 운명으로 여겨 결국 양씨를 선택했다. 그 때 미라는 어머니, 언니, 계부와 함께 3년 동안 중국에 거주하였는데, 그녀는 양씨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그때 그녀는 이미 네덜란드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만 했기 때문에 미라는 아쉬운 마음으로 베이징을 떠났다. 그들의 사랑은 미라가 베이징을 떠난 후로부터 편지를 통해 싹트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어느 날. 양씨는 미라에게 프로포즈를 했고 미라는 이를 받아 들였다. 1960년 1월1일, 그들은 백년가약을 맺었다. 네덜란드에서 미라는 주중국 대사와 참사관도 높이 보는 명문가족의 아가씨였는데 중국 베이징의 평범한 청년에게 시집온 것이다. 중국인의 며느리가 된 미라씨는 네덜란드의 관습에 따라 이름을 ‘양미라’로 바꾸고, 새로운 삶을 꾸렸다. 미라 할머니는 중국 음식을 즐겨 먹게 되고, 양 할아버지도 서양 음식, 유화와 교향악을 즐기는 등 서로 다른 문화와 생활 습관을 존중했다. 할아버지의 어디가 그렇게 좋냐고 물으니 양할머니는 한참을 생각했다. 본인도50년을 곰곰히 생각한 사안이라며 결국 진정한 사랑에 특별한 이유가 있냐고 오히려 반문해 버리고 마는 미라 할머니.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양 할아버지. 어느새 눈이 글썽거리고 있다. 미라 할머니는 많은 시간을 골목에서 여느 베이징 아줌마들처럼 장을 보고 밥을 짓고, 불을 지피는 일을 해왔다. 두 사람은 40여평방미터 되는 방 세칸 단층집에서 이미 50년 가까이 이렇게 지내온 것이다. 양말공장에서 잡일, 유치원에서 교사일을 하는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어렵게 자란 양모씨. 어느 선생의 도움으로 간신히 북경대학 전기 기계과를 졸업했는데 가정형편이 너무나도 어려웠다. 반면에 대학을 졸업해 미래가 창창한 미라씨는 전직 가정주부로 전락했다. 그녀는 시어머니와 함께 중국채를 만드는 것을 배우고 집안일을 떠맡았다. 먼 네덜란드에 있는 친정 어머니가 자기 딸이 고생할까봐 가끔씩 보내는 영양식도 시어머니와 아이들의 영양식이 되버렸다. 60년대 초, 궁핍한 가정환경은 그들을 더욱 조여왔다. 꼼꼼하기로 소문난 양씨 할아버지는 가계부를 만들어 ‘계획경제’를 실시했다. 어렸을 때 부터 경제적으로 아무 어려움없이 자라온 미라씨에겐 받아들이기 무척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양할머니도 그처럼 어렵던 시기에 이 장부가 있음으로 해서 그들 가족이 무사히 지낼 수 있었음을 잘 안다. 지금도 그들은 이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의 가계부는 이미 두꺼운 책이 되어 집안 곳곳에 보관되어 있다. 그 당시에 다국어를 구사하는 미라씨도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한다. 청화대학, 북경공업대학, 제2외국어 대학 등지에서 외국어를 가르쳤다. 심장병이 발병하고 강단을 떠났다고 하니, 양할머니가 가르친 학생들만 해도 수만명이 넘는다. 그 중 2명은 UN에서 통, 번역일을 하고 있고 지금도 이 학생들과 연락하며 지낸다며 매우 흡족해 하고 있다. 몇해 전 양씨 할아버지는 친히 자서전도 냈다. 총 84페이지로 20부를 찍었다고 한다. 이 자서전은 양씨 할아버지 일가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로 중국의 젊은이들에게 많은 공감을 주고있다. ▶ 40여년 동안 골목청소 미라 할머니 얘기만 나오면 양씨 할아버지는 늘 자랑스러워 한다. 미라 할머니가 살고 있는 동네에는 어른, 애들 할 것없이 미라 할머니를 외국인 취급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미라 할머니를 언니, 아주머니, 할머니라 부르며 베이징 사람으로 대우해 준다. 개혁개방 전 미라 할머니는 베이징에 있는 요이샹띠엔(友谊商店)에 자주 들러 사온 음식이나 일용품 및 장난감 등은 이웃이나 친척, 친구들에게 나눠주며 선행을 베풀었다고 한다. 또한 할머니는 가끔 본인이 가장 잘 만드는 네덜란드식 김치를 만들어 이웃들에게 나눠준다. 그녀가 사는 골목의 많은 사람들은 그녀가 만든 이 김치를 아주 좋아한다고 한다. 이밖에 미라 할머니는 골목길을 매일 청소한다. 이 일은 40년 동안 계속 이어져 왔다고 한다. 운동도 하고 이웃사람들한테 편의를 제공해 줄 수 있어 너무 좋다며 앞으로도 꾸준히 계속 청소하고 싶다는 미라 할머니. 이미 중국인보다 더 중국스러워진 미라 할머니는 중국을 무척이나 사랑한다고 말한다. 특히 베이징은 옛 도시로서 더 독특한 정취가 있다고 말하는 미라 할머니의 모습이 무척이나 흥미롭다. |
출처:ein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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