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대통령

김대중 출생의 비밀--이런것까지.....

구봉88 2010. 5. 12. 21:38

김대중의 묘비에 새겨져 있는 기록의 허와 실 


 


ㅡ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후광 (後廣) 김대중 선생은 본관이

金海 이시다. 아버지는 김운식 공이고 어머니는 장수금 여사이며 1924년 1월6일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 에서 태어나셨다ㅡ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멀쩡한 거짓말이다. 김대중은 자신을 만들어준 진짜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私生兒(사생아)이다. 지금 같으면 DNA 검사를 해보면 간단 하게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아버지로 되어 있는 김운식은 김대중이 7살 때 자신의 호적에 첩의 아들로 이미 7년 전에 태어난 庶子로 올려 주어 학교를 다니도록 만들어 주고 먼 훗날 정치인으로 변신한 김대중의 호소로 본부인과 이혼하고 4일 후 김대중의 어머니와 바로 결혼 정식, 정부인으로 올려 김대중을 嫡子로 만들어 주었을 뿐이다.

김대중의 어머니 장노도(張齒島-후에 장수금으로 개명)씨는 18살 때인 1911년 같은 옆 섬 마을에 사는 제갈성조(諸葛成祚) 라는 사람에게 시집을 가서 딸 2명을 낳았다.(1990년 9월 29일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장 김광홍 발행 호적초본)

1920년 12월 제갈성조가 사망하자 제갈성조의 형인 제갈성복(諸葛成福)이 과부가 된 젊은 제수씨를 위로 해주기 위해 자주 동생 집을 방문하다가 비밀리에 육체관계를 가졌으며 아이를 임신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여러 증언과 기록에서 나온다.

인구 1천 여명 정도의 좁은 섬 마을에 젊은 과부의 배가 불러오자 소문이 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제갈성복은 장노도 여인이 출생한 건너편 섬인 뻐리섬으로 이사를 보내면서 친구인 윤창언(尹昌彦) 에게 중매를 서는 것처럼 하여 동거를 시켰다. 윤창언은 본래 농악을 하는 사람이었으며 부인과 사별한 후였다.

동거를 한지 얼마 안되어 출생한 것이 사내아이였다. 그의 이름을 윤대만(尹大萬-또는 윤성만)이라고 불렀다. 그가 훗날 김대중이로 변한다. 윤대만 이가 태어날 때 김대중의 이모가 되는 장도산이 조산원 역할을 했다고 한다.(윤창언씨의 조카 윤일만 경찰관 증언, 공화당 조사 팀 조사 기록)

그 2년 후 장노도는 다시 사내아이를 출생했다. 그는 윤창언과 사이에 정상적으로 태어난 아이였다. 그는 윤대의(尹大義) 라고 불렀다고 한다.

몇 년 후 윤창언도 사망했다. 김대중의 어머니 장노도는 졸지에 딸 2명 아들 2명을 길러야 하는 청상과부가 되었다. 그녀가 어려울 때 김대중의 생물학적 아버지이자 한때 동거했던 시숙 제갈성복이 돈을 내어 뻐리섬 선창가에 주막집을 차려 주었다.

그 주막집에 큰 섬을 돌면서 발동선을 이용 방물장사(생활용품 장사)를 하러 자주 섬에 오던 김운식(金云植) 씨와 동거를 하다가 윤대만이 7살이 되어 초등학교를 가기 위해 호적이 필요했다.

당시 뻐리섬에는 초등학교가 없었고 서당만 있었다. 초등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본 섬인 큰 섬으로 가던지 목포로 가야만 했다. 장노도는 뻐리섬의 재산을 정리, 목포로 옮겨 가서 여관을 경영하면서 김운식의 호적에 첩으로 올라간다.

당시 호적에는 본부인 외에 제1첩 __제2첩을 호적에 등재했으며 첩하고 사이에 출생한 자녀들은 서자(庶子-첩이나 외부에서 외도를 하여 얻은 자식)로 올렸다.

1924년(단기 4257년) 7월 7일 윤대만이 김대중(金大仲) 으로 이름이 바뀌어 김운식의 서자(庶子)로 등재되었다.(1988년 7월 18일 하의면장 장명우 발행 호적등본)

당시 김운식에는 본부인 김순례(金順禮)가 있었으며 그사이에 아들 대봉, 딸 매월, 안례, 용례 등 1남 3녀가 있었다.

목포 北국민학교(초등학교)와 목포상고를 거쳐 6, 25 전쟁 후 부산 피난 건국대학교 야간부 2학년을 다니다가 목포에서 1954년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바로 다음날 전과 7범의 민원비서실장 오길록을 검찰에 보내 칼럼자를 비롯

 함윤식, 손창식, 이도형 등 언론인 등 14명을

형사 처벌하라는 고소를 했다.

사진은 지난 2002년 '한길소식' 손창식 편집인이

칼럼자에게 보낸 편지


 

목포의 나이든 유권자들은 김대중의 출신 성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표가 나오지 않았다. 목포에서는 자신의 출생비밀 때문에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 김대중은 1959년 6월 5일 강원도 인제 지구에서 출마하면서 다음해인 1960년 6월 1일(단기 4293년)

호적을 정리했다.



▲ 김대중의 계부 김운식씨의 호적등본(본사 최초공개)-

한 가운데 본부인 김순례와 이혼하고 4일 후에 장노도 여인과

재혼 신고한 것으로 표기돼 있다.




▲ 김대중의 어머니 장노도씨가 제갈성조씨의 부인으로 기록된

호적등본(본사 최초공개)




▲ 김대중의 호적등본(본사 최초공개)- 오른쪽 두번째 줄을 보면 김운식씨의 서자로 입양신고가 되어 있다.


김대중의 출신 성분이 참 복잡하고 기가차다.

그가 고향을 두고 왜 낮설고 물선 강원도에가 출마 했었는 지를 알것 같다.

 

6-70년대 나는 기자 생활을 하면서 김대중을 좋아했었다.

원인은 그가 3공시절 군사 독재에서 너무나 핍박 당하는것 같아동정어린 친근감이 들었다.

 

  그런데 그에서 멀어진 것은  80년대 후반 부터이다. 그가 옥살이 에서 풀려나자 당시 야당 이던 김영삼 총재가  대통령 출마시 도움이 될가하여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만나 그의 복권을 강력히 주장하여 결국 복권됐다.

 

대통령 선거를 불과 1개월여 남겨둔 상태에서다.

 

전두환이는 선심을 쓴것 갖지만 사실은 김대중을 잘알기 때

문에 야당끼리 싸움부처 표 가르기 작전이고, 김영삼은 어수룩하여, 그가 복권돼 도우면 큰 힘이 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사실 김영삼은 같은당 소속인 김대중을 너무 믿었던 것인데 복권 되자마자 선거일 한달여를 앞두고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고 급조한 당이 평민당이다.

 

 김영삼으로는 마른 하늘의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크게보면 민주화를 갈망하던 모든국민들의 기대가 하로 아침에 날벼락을 맞는 꼴이였다. 그래서 노태우 정권이 태어나고 군부

시대가 4년이나 연장되였다. 

 

말만하면 거짓 말인데도 특정지역 사람들은 몰라서 인지 알면서도 그런 것인지 그를신격화  하면서 결국 대통령까지 만들었다. 

낙선때마다 정치 안한다고 하던 그의 말이다.

 

그 당시 그의 출신 성분이 어떻든 그의 정치 성향이 어떻든

그가 부정부패의 관여가 됐던 안됐던 관계없이 90%이상이 그를 지지했다. 

 

 어느 종교의 교조도 그 인기를 능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80년대말 여수에서 잘때이다.

일행중 한명이 여기 왔으니  바다가에 나가 회나 먹자고해 택시를 탓다.

 

대화중 부산에서와 운전을 하고 있다고해 부산 사람이니 괜 찮으려니 생각하고 거짓말 잘하는 김대중이라 했더니 얼굴을 경색하며 김대중선생 흉 보려거든 차에서 내리라며 세우드라고요.

 

나도 화가나 내려 다른차 타면 되지마는 그런 사람들과 싸울 필요도 없고해서 그냥 가자고 달랜일이 있었다. 

 

60년대만 해도 보수적이라 출신성분 같은것 많이들 따젖지만 시대가 변한 지금에야 따질일 아니지만 여하든 김대중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회손하고 법과 질서를 문란시켯으며 안보 의식을  약화시킨 대역 죄인 임에는 틀림이 없다.

                                                           ( 하 늘 소 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