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들에게

서재필 박사를 도돌아본다

구봉88 2010. 7. 11. 14:20

 미주 한인의 아버지 서재필(1)
한국과 미국이 우호통상조약을 맺은 지 125년이 넘었다.
1882년에 두 나라가 관계를 가진 것은 짝사랑과 같았다.
1902년부터 수 년에 걸쳐 7천여 명의 한인들이 사탕수수 농장 근로자로
하와이에 들어왔다. 그 중 2천여 명이 미 대륙으로 건너오고, 일제 40년간 더 이상 이민은 없었다. 오늘날 미국 내 한국 이민사회는 200만에 달한다.

 
이민 백 년이 넘었지만 사실 대부분은 1960년대 이후에 온 사람들이니
이민 2세대가 많고, 3세대는 아직 어리다. 젊은 이민사회라 하겠다.
유대인들과 달리, 한국의 피를 가진 사람들에게 조국에대한 생각은

시기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달랐다. 때로는 빈곤하고 비민주적인 조국이 부끄럽기도 하였을 것이다.

100년이 넘은 한미관계사에서 우리가 진실로 존경할 만한 표상은 없을까?
한국인의 피를 갖고 미국인으로 살아가는 이중의 정체성 속에서 우리의 2세와 3세들에게 귀감이 되는 분이 있다면 누구일까?

그러한 분의 동상이라도 하나 세워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가끔
스스로를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고 몸을 추수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의 우리 총영사관 앞에 미 시민권자 1호인
서재필 박사의 동상이 세워지는 것은 그런 뜻에서다.많은 사람들이 그가 누구인지 자세히 알지는 못하는 것 같다.고등학교까지의 역사교육에 따라
독립협회를 세우고 독립신문을 만든 사람이라는 정도인 것 같다.

특히 이민 2세 자녀들에게는 세종대왕, 이순신도 알까말까 한데 서재필까지 알기를 기대하기는 쉽지않다.그런데 “구한말 개화사상의 주요인물로서 갑신정변의 주역, 미주 한인 이민사에 있어 최초의 한인의사요 미시민권자, 독립신문과 교육을 통한 국민계몽의 선각자, 독립협회를 통한 리더십 육성가,
미국 내 한국관련 인쇄물 발간 등 일제 치하 미국 내 한국 알리기의 선봉,
이민으로서 87세에 미국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일관되게 통일 개명조국을 희구 등…

한 마디로 한국의 지도자이자 미주 한인들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고
자세히 말씀드리면 수긍하는 것 같다.
그래도 동상을 세울 만큼 역사에 우뚝 선 영웅은 아니지 않느냐는 듯 갸우뚱하는 분들도 있다.
아마도 왕이나 대통령이나 전승장군등의 동상을 많이 보아온 관성에서인 듯싶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 공동체에서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에 있어, 진실로 훌륭한 분이라면 유명세 여부를 떠나 존경할 수 있다면 좋겠다.

 

미주 한인의 아버지 서재필 (2)

무너진 개혁개방의 꿈

서재필(1864-1951)은 충남 논산 출신 서광언 진사의 둘째 아들로 전남 보성의 외가에서 태어난다. 외가는 이조참판을 지낸 집안이다.
어려서 충남 대덕의 아저씨인 서광하의 양자로 가는데, 뛰어난 머리가 아까워 관찰사와 판서를 지낸 서울의 외가로 가서 공부하도록 한다.

1882년, 18세에 23명의 과거시험 합격자 중 최연소로 장원급제한다.
그런데 십대의 청년 서재필은 순탄한 관료의 길로 가지 않고 개화와 개혁의 선봉이 된다. 김옥균과의 운명적인 만남 때문이다.
당시의 사회는 밀려오는 서양세 속에서 위정척사파와 개화파로 나뉘었고,
개화파는 다시 동도서기파, 급진파로 나뉘어 걷잡을 수 없었다.
바깥을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 식의 쇄국 속에서, 서양의 우수성과 일본의 발전상을 알게 된 개화파는 조선의 대대적인 개혁을 주장한다. 유교 조선사회는 요즘 문제되는 20/80보다도 심한 5/95의 사회였다. 양반이 아닌 사람들은 대부분 문맹이었다.제도와 사상의 총체적인 개혁과 국민수준을 높이지 않고는 발전을 기할 수 없는 상황이다.
서재필은 회고록 ‘My days in Korea’에서 조선 5백 년을 백성들이 주인이 되지 못하고, 양반 중에서도 100개 가족이 나라를 좌지우지했다고 비판한다.급진개화파의 맏형은 김옥균이다. 조선 개화당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박규수의 제자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는 못했으나, 박식하고 재능이 많으며 시대의 흐름에 대한 통찰력을 갖춘 청년이다.
거기에다 카리스마가 대단하여 개화의 청년들이 맏형처럼 따랐다.
서재필은 그를 ‘대인격자요 처음부터 끝까지 애국자’라고 하였다.박영효는 ‘김옥균은 글 잘하고, 말 잘하고, 시서화에능하고, 교유에 능한 사람이다’고 하였다.개화의 청년들은 페리함대 도착 이후 30년간 비약을 이룬 일본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옥균은 유럽 국가들이 수백 년 동안 경쟁적으로 노력을 계속하여 이룬 것을 일본이 한 세대 동안에 달성한 것에 감명을 받고, 일본을 모델로 개혁해야 한다는 의지를 굳힌다.
조선이 후진적 왕정의 늪에 있을 때, 일본은 이미 우편, 철도, 전신, 전보 등 서양문명을 갖춘 나라가 된 것이다.물론 조선과 일본의 발달 정도가 당초부터 차이가 있기는 하다. 일본의 막부정권도 오랜 기간 쇄국의 늪에 있었지만, 조선과는 달리 오래 전부터 큐슈에 정착촌을 허용한 화란을 통해 유럽을 배우고 있었고, 개항과 유신 이후에는 대대적인 개혁개방을 한 것이다.
옥균은 서재필을 동생처럼 대한다. 재필은 김옥균을 존경과 흠모로써 따른다.
그렇게 김옥균은 서재필의 생애를 좌우한 스승이 된다. 개화당의 젊은이들이 갑신 쿠데타를 일으키는 동기는 한마디로 ‘청국의 종주권에 대한 분노’다.
그들은 1882년 임오군란으로 청에 의해 주권이 짓밟히고 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이 붙잡혀 가야 하는 상황에 분개한다. 서재필이 과거에 합격한 해다.
나라의 주권을 지키는 데는 정예군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옥균은 서재필을 일본에 군사유학을 시키고자 한다. 1883년 5월 서재필은 김옥균의 계획에 따라 서구식 군사훈련을 배우기 위해 16명의 청년들을 이끌고 토야마 사관학교에 들어간다. 문관이지만 국방을 배우게 된 것이다. 13개월 훈련 후 귀국하여 고종으로부터 사관학교 창설 및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나,
청나라와 민비의 반대로 무산된다.
임오군란 이후 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서구문물을 택해야 한다는 개화당,
전통적 동맹인 청과의 결속을 지켜야 한다는 수구당의 대립은 더욱 심해진다.
당시 민비의 조카인 민영익은 민 씨 집안의 그런대로 출중한 인재로서 가장 힘이 센 관료다. 개화의 필요성에 공감하던 그가 1883년 보빙사로 미국까지 다녀온 뒤 오히려 마음을 바꾼다.
개화보다는 권력 때문에 수구당으로 돌아간 것이다.세계 일주에서 돌아온 민영익이 청나라 교관을 초청하여,
서재필과 일본 사관학교 유학생들을 쫓아내고 개화당을 처치하려고 한다.
그렇게 민영익은 역사 속에서 조선의 개화의 앞길을 막아버린 사람으로 남는다. 한 마디로 식견과 신념이 없는 사람이 지나친 권세를 가진 것이다.
위기에 처한 개화당은 살아날 길이 쿠데타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1884년 12월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을 이용한 쿠데타가 벌어진다.
주역은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 5인이다. 서재필은 사관생도들을 이끌고 행동파 역할을분담한다. 쿠데타 내각에서 서재필은 병조참판을 맡는다.그러나 안남문제로 청불전쟁을 벌이는 상황이라 청국이 관여치 못할 것이라고예측하면서 김옥균의 거사를 지원하던 이노우에 일본외상과 다께조 공사의 입장이 갈팡질팡한다. 더구나 주둔군 숫자도 일본측은 150, 청측은 1,500명으로 상대가 안 된다.청군의 개입으로 쿠데타는 3일 천하로 허무하게 무너진다. 200여명이 사망하고 개혁파는 완전 몰락한다. 쿠데타 주역들 중 홍영식은 피살되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은 간신히 인천에 있던 일본 배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한다.
한 세대 만에 선진국을 따라 잡을 수도 있다는 김옥균의 꿈은 100년이 지난
박정희 시대에야 이루어지니, 지난 역사의 아쉬움이다.
미주 한인의 아버지 서재필 (3)

일본 배의 창고에 처박혀 일본에 도착한 젊은이들의 생활은 끼니를 때울 수 없을 정도였다. 후원자라 믿었던 일본이 등을 돌려 냉대함에 그들은 이를 갈았다.
조선 정부가 보내는 자객들에게 언제 살해될지 모르는 위험한 생활이다.
서재필에게는 고국에서 역적으로 몰려 삼족이 몰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 온다.
부모와 처가 자살하고, 두 살 된 아들도 굶어 죽고, 형과 동생도
처형되었다는 것이다. 스무 살에 쿠데타에 가담한 젊은이의 심장은 찢어진다.
서재필은 미국인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5개월간 멸시 받던 일본을 떠나 철종의 사위인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가는 배에 오른다. 승선료는 달필로 한시를 써 일본 사람들에게 팔아 마련한다.

김옥균은 일본에 남아 외딴 섬에 유배되는 등 갖은 고생끝에 1894년 자객 홍종우에게 유인되어 샹하이에서 살해당한다.
당시 샌프란시스코는 1860년부터 몰려온 중국 이민이 도시 인구의 10%인 6만여 명이나 되었다.
지역당국이 중국인 배척법을 제정하고, 타 인종에 대한 학대도 극심하였다.
말도 통하지 않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박영효와 서광범은 한 달을 못 견디고 떠난다.양반 체면에 노동을 하지는 못하겠다는 것이다.그러나 혼자 남은 서재필은 살기 위해 막일도 마다 않는다.
낮에는 매일 10마일씩 뛰어다니며 가구점의 광고전단을 벽에 붙이고,밤에는 YMCA와 교회에서 영어를 배우고 기독교인이 된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신문은 ‘은둔의 나라 진보주의자들의 망명’이라는 제목으로 장문의 보도를 한다.
동방의 코리아라는 나라의 젊은 혁명가에 대한 이야기가 교인들에게 퍼진다.
그런 막노동 생활이 1년, 행운의 여신은 아까운 청년을 버리지 않는다.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한 펜실베니아의 광산재벌 홀렌벡이 학비를 대주겠다고 나선다. 서재필은 그를 구호천사라 불렀다.
펜실베니아의 윌크스베리라는 도시로 후원자를 찾아간 그는 힐맨 아카데미라는 사립고교에 들어간다.
미국에서도 상류층만 다니는 곳이 사립학교다. 서재필이란 이름의 발음을 역순으로 하여Philip Jaisohn이라는 영어 이름을 짓는다.그는 스캇 교장의 사택에 같이 사는 특혜도 누린다. 학교 공부에 더하여 교장으로부터 미국이란 나라의 모든 것을 듣고 배운다.
한참이나 나이 어린 동생뻘 아이들과의 늦깎이 공부지만 발군의 실력으로 4년 과정을 줄여 3년 만에 졸업한다. 특히 연설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졸업생 대표연설도 한다.
프린스턴 대학과 라파예트 대학에 합격하여 꿈에 들떠 있던 그에게 이번에는 행운의 여신이 등을 돌린다. 후원자가 서재필이 신학교에 가지 않으면 더 이상 후원을 못한다는 것이다. 그간 도와준 동기는 선교사로 교육시켜 조선에 보내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있었다는 것이다.
청천벽력이었다.
서재필은 호소한다. 자신이 기독교인이지만 선교사가 될 자신은 없고, 조선에 돌아가면 역적으로서 참수당할 위험이 있다고,  신학대학원을 갈 지 여부는 4년 학부를 마치고 생각해 보면 안 되겠느냐고.
그러나 후원자는 냉정했다. 후원자와 결별하고 다시 외톨이가 되어 길거리로 나온 그의 앞길은 막막했다. 라파옛 대학을 찾아가 장학금을 호소해보나 그 대학에도 후원자가 이사로 있어 장학금을 못주게 한다.
입학비를 벌어보겠다고 막노동을 해보기도 하나 세상은 녹록치 않다.
결국 대학 진학을 포기한다. 다행히 교장 선생과 지인들의 추천으로 워싱턴으로 와 육군 의학도서관에서 동양의학 서적 분류와 번역을 하는 일에 취직한다. 한인 최초의 미국 공무원이 된 것이다.
당시 돈으로 100불이나 되는 적지 않은 월급에 직업이 안정되자 1888년 콜럼비안대 부설 코코란 야간대학에 들어가 1년간 공부한다. 공무원 등 직장인들을 위해 오후 6시부터 4시간을 수업하는 야간대학이다.
1890년에는 국적을 버리는 문제에 대한 심각한 고민 끝에 시민권을 얻는다. 한국 사람으로서는 최초의 미 시민권자가 된 것이다. 황인종에게는 아예 국적을 주지 않던 당시 상황에서는 예외적인 일이다.1889년에는 컬럼비안대 의학부에 입학하여 3년 정규과정을 마치고 1892년 한인 최초로 미국 의학사 학위를 받는다. 인턴을 거쳐 1894년에는 의학도서관을 그만두고 병원을 개업한다.
방 하나를 커튼으로 막아 진료실과 침실을 겸한 병원이다.
그러나 동양인 의사는 믿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환자들이 별로 없다. 이유 없는 인종차별에 스트레스를 받던 중 7살 아래의 뮤리엘 암스트롱이라는 처녀와 인종을 넘어선 사랑을 하고 1894년 6월에는 결혼을 한다. 남자 쪽도 여자 쪽도 무척 고민을 거듭한 국제결혼이었다.
아내는 미 철도우체국(U.S. Railway Mail Service) 초대 국장의 딸로 쟁쟁한 가문이어서 워싱턴 포스트 등 언론이 대서특필한다.
 키 178센티의 동양미남과 173센티 서양미녀 간의 결혼이다. 그녀는 남편의 사람됨과 역할을 평생 존경한다.

미주 한인의 아버지 서재필 (4)
민주와 독립의 선구자(상)

신혼에 환자 치료와 의대교수를 하는 생활은 가난했다.
생계가 어려워 워싱턴의 한국공사관에 신세를 지기도 할 정도였다.
그러할 무렵 조선에서 청일전쟁으로 청이 물러나고 개화파가 득세한다.
쿠데타 동지들인 박영효가 총리대신, 서광범이 법무대신이 된다.
서재필에게도 워싱턴 주재 일본공사가 찾아와 귀국하여 외교부를 맡아줄 것을 간청하지만 거절한다.
그러나 나중에는 박영효까지 찾아와 후진된 조국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설득에 귀국결단을 내린다.
1895년 크리스마스 날, 말과 문화와 음식과 주거가 다르다고 만류해도,
남편의 나라인데 세상의 끝이라도 못 갈 리 없다고 따라 나서는 미국인 부인을 데리고 제물포에 도착한다.
10년 만에 돌아온 조국은 강산이 변하기는커녕 떠날 때에서 한 걸음도 나아진 게 없다.
제물포에서 서울로 가는데 버스나 기차는커녕 인력거나 마차도 없다.
그보다 백 년 전에  실학자 박제가가 중국을 견문한 뒤 쓴 ‘북학의’에서 수레의 필요성을 역설했는데도,
사람의 발 이외에는 굴러가는 운송수단이 없어 가마를 타고 서울로 온다.
바깥세상을 모르고 암담한 조국에서는 민 씨 척족과 왕실의 부패로 농민들이 도탄에 빠져
동학 농민전쟁을 일으켰다. 한국 최초의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나 외세의 개입만 부르고 실패하고 만다.
4개월 전인 8월에는 일본인들이 민비를 시해하여 뒤숭숭했다.
불과1개월 전인 11월에는 김홍집 내각이 단발령을 발하여 민심을 왈칵 뒤집어 놓았다.
좋은 일도 앞뒤를 재고 해야 할 텐데,급진적이고 강압적인 조치가 초래하는 막무가내의 폐단이다
그는 조국의 비참한 현실에 낙담하고 상심하여 미국에 돌아가려고까지 생각한다.
그러나 개화파의 8년 선배이며 내부대신인 유길준의 끈질긴 설득이 그를 붙잡는다.
우리가 아니면 누가 후진의 늪에 빠져 있는 조국을 구하겠느냐고 한다.
두 사람은 당시 조선에서 서구식 교육과 민주주의를 접해 본 유일한 사람들이다.
유길준은 일본유학 경험 1호, 미국유학 경험 1호생이요, 서재필은 미국 정규대학 1호생이다.
두 사람의 차이라면 유길준은 점진개화, 서재필은 급진개화파였다.
서재필을 붙잡아두게 된 유길준이 오늘날의 외무장관 격인 외부대신을 권하나,
서재필은 벼슬은 하고 싶지 않으며, 백성들의 교육을 위해 신문을 만들겠다고 한다.
민중의 각성과 지지가 없이 엘리트 몇 사람만의 생각으로 나라를 바꾸는 개혁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갑신정변에서 뼈저리게 느낀 결과다.
당시 일본에는 100여 개, 미국에는 500여 개의 신문이 있었으니 생각할 여지도 없는 문제다.
유길준은 그를 중추원 고문직에 임명하여 3백 불의 각료급 봉급을 받도록 하면서 신문 발간 사업에

측면지원을 다한다.
1896년 4월 독립신문이 탄생한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민간신문이다.
일본 외무성 자금으로 한성신보를 만들던 일본 측은 서재필에 대한 살해 협박 등 결사적으로 방해한다.
일본이 장악할 수 없는 신문이 나오면 조선을 조종하는데 방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관파천이 벌어지면서 일본세력이 약화되어 신문 발행이 가능하게 된다.  
미주 한인의 아버지 서재필 (5)
- 민주와 독립의 선구자

독립신문은 최초의 한글 전용 신문이다.
외무차관인 윤치호도 번역을 거들도록 하여 The Independent 라는 영어판도 한 페이지 만들었다.

서재필은 논설을 통해 엘리트를 가르치고 백성을 인도한다.
애국애족, 여성해방, 위생의 중요성, 도로와 철도의 필요성 등 개혁할 모든 분야에 대해 설파한다.
엘리트들이 그의 날카로운 주장에 새롭게 눈을 뜨고, 백성은 스스로가 나라의 주인이라는 주장에 감동한다.
왜 ‘조선신문’ 같은 다른 이름들을 두고 ‘독립신문’인가?
그는 국체의 독립도 중요하지만, 사람들 마음의 독립도 중요함을 역설한다. 천 년 이상을 소중화 사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조선에서 의식의 타파 없이는 나라의 장래가 없다는 절실함에서이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이 독립적 생각, 주체성이 부족한 것은 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크게 변한 게 없다.
중국의 자리를 미국이 대체한 것만 다를 뿐이다.
큰 나라들에 낀 지정학적 이유인가, 타고난 국민성이 더 큰 이유인가. 연구해야 할 주제이다.
한자를 섞어서 신문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그는 한글로만 써도 이해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고 단호히 배격한다.
우리말과 글에 대한 사랑이요 자주성의 표명이다.
하는 말과 쓰는 글이 달라 수백 년을 백성은 무지했다. 말과 글 사이에 차이가 없어야 하겠다는 것은
영어를 배우면 금방 알 수 있는 문제였다.
세종대왕의 뜻이 4백 년 후에야 펼쳐지는 모습이다. 한자를 가끔 섞어 쓰고 싶은 욕구는 백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일부 지식인들에게 잔존한다.
서재필은 또한 독립신문에서 한글의 띄어쓰기를 처음으로 시도한다.
영어에서 힌트를 얻은 것일 터이다. 과거에는 한글의 단어들을 모두 붙여 써놓아, 문장을 잘라서 쉽게 이해하기는커녕 호흡조차 어려웠던 걸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발전이다.
물론 그 전에도 선교사들이 한글을 영어처럼 띄어쓰기는 하였지만, 공식적으로 신문에 모두 띄어쓰기를 한 것은 독립신문이 처음이다.
언문일치와 한글전용, 그것만으로도 서재필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끼친 영향은 깊고도 넓다.
신문과 별개로 유길준은 서재필에게 공개강연을 하도록 한다. 조선 최초의 공개 강연회다.
내무대신 명의로 고위관료들을 소집한 자리에서 서재필이 ‘조선에게 가장 필요한 것’에 대해 강연한다. 행사에 앞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한다. 조선 역사상 최초의 국기에 대한 경례다.

국가의 자주적 자세의 확립, 역사의 주체인 백성들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회발전을 위해 교육의중요성과 민주주의식 토론의 필요성을 설파한다.치안을 이유로 공개 강연회가 어려워지자 매주일 배재학당에 나가 학생들을 가르친다. 세계의 지리와 역사를 가르치고 정치학을 가르친다.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 인권을 가르친다. 이승만, 안창호 등 학생들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다.
그들에게 협성회를 만들어 학생들끼리 토론을 많이 하라고 가르친다.
이승만은 말한다, “영어를 배워보자는 생각으로 배재학당에 들어갔는데 진짜로 배운 것은 서재필의 민주주의였다”고. 서재필이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한국에 처음 수입한 셈이다.서재필은 또한 1896년 7월 독립협회를 조직한다. 독립협회는 리더 격인 사람들을 모은 일종의 리더십 양성을 위한 클럽이다.배재학당 토론회의 연장선상에서 독립협회에서도 왕성한 토론이 벌어진다.
1897년 1월에는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서대문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운다.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뜬 모양이다.
구에게서 나온 아이디어인지 후에 북한에서도 주체를 상징하는 유사한 문을 만든다.
1896년 1천 명이던 독립협회 회원이 1898년에는 4천 명이 넘는다.
활동 내용도 점차 민중투쟁 등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된다.
독립신문, 공개강연, 배재학당 강의, 독립협회 등 서재필의 활동은 한국 정신사에 있어서의 대변혁이었다.
그것은 사회혁명이요 문화혁명이다.
위로부터 아래까지, 엘리트와 민중이 새롭게 눈을 뜬 사회 대개혁이다.

미주 한인의 아버지 서재필 (6)
재망명과 미국 내 독립운동(상)

개혁은 늘 반동과의 밀고 당기는 싸움이다.
사대주의에 물든 관료들과 부패한 탐관오리들이 비판의 대상이 되자 개혁의 적대세력이 된다.
기득권층의 반발이다. 서재필이 전파하는 자주와 독립사상이 왕권의 기반을 위협하는 것으로 왜곡된다.
귀국한 갑신정변의 역적인 서재필을 처단하거나 홀대하지 않고 통역으로 쓰는 등 높이 평가해 온
고종조차 친러파에 둘러싸여 판단에 혼동을 일으킨다.
서재필이 주장하는 정치체제는 입헌군주제인데도, 간신들은 서재필이 왕을 없애는 제도를 퍼뜨리고

있다고 고종을 오도한다.
1898년 3월에는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이승만은 왕실이 친러정책을 거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왕실과 독립협회가 대립한다. 정치와는 무관하게 계몽에만 몸 바쳐 온 서재필이 정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드는 형국이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왕실이 서재필에게 한국을 떠날 것을 종용한다.
추방한다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위험상황이기도 하다.
1898년 5월, 서재필은 2년 4개월간의 귀국활동을 청산하고 울분을 머금고 다시 조국을 떠난다.
34세의 나이다. 다시 망명 아닌 망명이다.
윤치호에게 맡긴 독립신문은 얼마 못가 1899년 12월에 폐간되고 독립협회도 문을 닫고 만다.
주 3회 나온 독립신문은 부수로는 3천부였으나 전국에 뿌려졌다.
신문 하나를 많은 사람이 돌려보기도 하고, 버리지 않고 계속 두고 읽기도 하였으니,
당시의 1,200만 인구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다 할 것이다.
이후 조국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잃고, 급기야는 합방이 된다.
세계지도에 Korea는 없고 한반도는 일본말인 Chosen이라 적혀,  Korea가 어디있는지도 모른다.
일본의 조선 강탈은 지식인들의 대혼란을 가져왔다. 사실 그 이전까지 서재필, 이승만을 포함한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일본을 동양의 앞서가는 국가요 믿을 만한 이웃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일본이 러시아를 물리친 것을 같은 황인종의 승리로 환호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야욕을 예견치 못한 뒤늦은 후회로 그들은 40여년의 남은 일생을 독립을 찾는데 바쳐야 했다.
참으로 불운한 세대다.
필라델피아로 돌아온 서재필은 미국인 고등학교 후배와 문방구와 인쇄업을 시작한다.
독립을 위한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의사보다 사업을 해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또한 지식인도 돈을 벌어야 하며, 입만 갖고 남의 돈으로 활동해서는 안 된다는 생활철학에서다.
사업은 50여명의 종업원을 둘 정도로 번창한다.
1차대전의 종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나라 잃은 민족의 가슴을 다시 들끓게 한다.
고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린다. 샹하이에 임시정부가 설립되었다는 소식도 들린다.
하와이와 캘리포니아 교포들도 흥분한다.
하루 임금 3달러의 한인 노동자들로부터 피땀 어린 독립의연금이 답지한다.  

미주 한인의 아버지 서재필 (7)
재망명과 미국 내 독립운동(하)

1919년 4월 14일 서재필은 필라델피아에 미국 각지의 모든 한인들을 불러 모은다. 미국 내 3.1운동이다.
서부에서 동부까지 미국 전역에서 독립을 서러워하는 150여명의 한인들이 집결한다.
집회를 제1차 한인대회(The first Korean Congress)라 하였다.
서재필이 의장이 되어 ‘미국 정부와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 ‘사색하는 일본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하여 조선의 독립을 호소한다.
이승만 등 모든 한인들이 조선의 독립을 외치며 필라델피아 시내를 행진한다.
수십년이 흐르고 동포가 2백만이 된 오늘날에도 미국 내 한인 대표자들이 모두 모이는 한인총대회는 없다.
그러나 힘없는 민족의 독립운동은 허공의 메아리로 사라졌다.
이상주의자를 자처하는 윌슨이 주창하는 민족자결주의는 1차대전의 패전국인 독일의 경우에나 적용되어
폴란드 같은 나라가 독립하지만, 일본의 압제에 시달리는 나라들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워싱턴은 물론 서울에도 조선의 독립을 옹호하는 미국인은 없었다.
서울의 알렌 공사까지도 본부에 “한국 사람들은 스스로 다스릴 능력이 없다”고 보고할 정도였다.
워싱턴 외교의 거두 조지 케넌은 정치인들에게 “한국은 미개국이다”고 가르쳤다. 2차대전 후
신탁통치가 논의될 때까지도 계속된 미국인들의 조선에 대한 시각이다.
이후 서재필은 임시정부의 한국홍보국(Korea Information Bureau)을 맡아 Korea Review라는 월간지를
만들고 각종 한국 관련 자료를 만들어 한국 알리기에 앞장선다.
한국을 이해하는 미국인들을 모아 한국친우동맹(The League Ofthe Friends of Korea)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게 한다. 한국이 어디 붙어 있는지, 일본에 병합된 나라인지 조차 모르던 시절이다.
한인들은 1921년 11월부터 석 달간 열리는 워싱턴 군축회의에 또한번 기대를 해본다.
임시정부의 외교공관 격인 구미위원회가 적극 활동토록 하고, 이승만 위원장, 서재필 부위원장을 임명한다.
서재필은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하딩 대통령, 휴즈 국무장관을 만난다.
미국대표들에게 청원서를 보내고 미국 의원들을 동원하여 한국문제를 토의에 포함시키고자 백방 노력한다.
그가 하딩 대통령등에게 보낸 장문의 영문 호소문 등은 수십 년이 지난 오늘의 우리 외교관들을 무색케 한다.
그러나 한국문제는 의제에 들어가지 못한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조선의 독립은 무망했다.
일본은 동양의 맹주요 1차대전의 전승국이다. 냉엄한 국제정치의 틀 속에서 조선은 강국들에게 안중에도 없다.
서재필은 한국문제로 시간과 정력을 다 바쳐 건강이 상하고 사업체는 남의 손에 넘어간다.
가진 집만 남기고 가진 재산 8만 불을 모두 날려 빈털터리가 된다.
의사도 건강을 위해 장기간 휴식을 명한다.

미주 한인의 아버지 서재필 (8)
팔십 노인의 조국 사랑

갑신정변, 독립협회, 3.1운동 등 세 번에 걸친 애국운동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낙심천만한 그는 독립운동에서 물러서고 만다.
1926년 62세의 노인이 된 그는 다시 의학공부를 시작한다.
그 나이에 펜실베니아 의대에 들어가 세균학, 병리학,면역학, 비뇨학, 피부학 등을 공부한다.
이후에는 이런 저런 병원을 옮겨 다니며 의료에 종사하고, 2차대전 때는 미군들의 징병검역관을 하기도 한다.
물론 언론과 각종 매체에 글을 써 조국의 백성을 깨우치고, 미국인들에게는 한국을 알리고 동포들을
결집시키는 일은 계속한다.
1945년 드디어 조국이 해방된다.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한 해방이 못되고 남이 가져다 준 해방이다.
분단 이후 전쟁에서도 우리가 주도권을 쥐지 못하여 우리 역사를 우리 손으로 써본 적이 없는 떳떳하지 못함은
오늘날까지 계속된다. 미군정 치하에서 해방정국의 정치인들은 단합하지 못하고
이념문제까지 보태져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국민을 한데 모을 수 있을 만한 지도자로서 노투사 서재필을 모셔 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이승만과 불편한 관계인 주둔군 사령관 하지 장군이 직접 찾아와 도와줄 것을 권유한다.
1947년 7월 그리던 고국에 미군정 최고고문으로 돌아온다.
이미 늙었고 아무런 야심이 없으니 국민교육만 하겠다는 전제조건을 달았다. 실로 49년 만의 귀국이다.
민중은 조국의 개혁과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그를 뜨겁게 환영한다.

 미시민권자로서 국내정치에는 아무런 욕심이 없다는데도 일부 사람들이 대통령으로 모시자고 한다.
정치적 혼란이 84세의 노인을 슬프게 한다. 같이 노인이 된 제자 이승만보다도 11살이나 위다.
하지장군은 그가 스무 살만 젊다면 얼마나 좋을까 탄식할 따름이었다.
미군정 당시 미국 기자들은 한국에 4명의 지도자(Big Four)가 있는데,
그들을 각기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승만은 세속정치인(Tammany politician), 김구는 군벌지도자(War lord),
김규식은 정치학자(Political cientist), 서재필은 현자(Saint)라 할 수 있다고 보도하였다.
1948년 9월, 귀국 1년여 만에 노인은 둘째 딸 뮤리엘과 함께 다시 미국으로 떠난다.
그 나이에도 다시 병원 문을 열고 진료를 하던 중 터진 한국전쟁 소식은 늙은 애국자를 절망케  한다.
남북이 따로 정부를 수립한 것이 애통하여 출국시 고별연설에서 ‘여러분들은 통일된 조국을 위해 노력해
달라’고 강조했건만, 동족끼리 전쟁을 벌이고 만 것이다.
1951년 1월 그는 87년의 한 많은 인생을 마감한다.
서재필은 어두운 시대에 태어나 너무 우여곡절이 많은 생을 살았다.
어려서 조국에서 20년, 두 번 중도 귀국하여 4년,미국에서는 약 63년(필라델피아 지역에서 55년,
워싱턴에서 8년 정도)을 살았다. 부인 뮤리엘 암스트롱과의 사이에 스테파니와 뮤리엘 두 딸만 가졌는데, 지금은 부인은 물론 두 딸까지 모두 명을 달리 하고, 두 딸에게서도 자식이 없어 자손이 없다.
필라델피아 옆 미디아 시에 있는 그가 살던 집만이 ‘서재필 기념관’이 되어 가끔 한국 사람들이 찾아온다.
서재필 박사는 대중 지도자다.
19세기 말 이래 폐쇄된 조선 왕조와 국민들에게 새로운 사상을 심어 주고, 개혁을 부르짖으며
민중운동을 일으켰다.
나라의 독립을 염원하며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또한 한글전용이라는 문화운동을 일으켰다.
외교와 관련해서는 미국 땅에 있던 최고의 민간외교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정부 요로에 지속적으로 만남이나 서한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고, 많은 유수한 미국인들을 사귀어 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라는 그룹을만들어 조선을 돕도록 하고, Korea Review 라는 잡지를 만들어 미국민들에게 조선을 알리기도 했다.
한 사람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세계 여러 나라들의 대사관이 즐비한 워싱턴의 메사추세츠 거리, 한국의 대사관 건물을 지나
조금 더 걷다 보면 셰리던 서클이 나온다.
서클 위에 한국이 정부수립 이후인 1949년에 최초로 마련한 유서 깊은 해외공관 건물인 영사관이 서 있다.

이제 우리가 그 거리를 지나거나, 볼 일이 있어 영사관에 들릴 때면
낮이나 밤이나 늘 거기에 홀로 서 있는 한국인을 볼 것이다.
미주 한인들의 할아버지요 아버지요 아저씨인 서재필 선생이 오가는 한인들을 보고 서 계실 것이다.
그들에게 조국은 무엇이며 미국은 무엇인지를, 두 개의 정체성을 갖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말하고 싶은 듯, 아직도 살아있는 듯 생생한 모습으로 거기에 서 계실 것이다.

출처: 서재필 기념 친우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