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츠 SL시리즈 - 플레이보이들의 드림 카[1]
멋진 ‘오픈카’에 연인을 태우고, 뭇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드라이브를 즐기는 일은 아마도 누구나 한 번쯤 꿈꾸어 보았을 일일 것이다. 무릇 자동차는 장소의 이동을 위해 만들어진 기계가 틀림없지만, 이상하게도 그러한 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기계보다는 좀 더 ‘멋있게’ 달리기 위한 연구가 더 많이 되는 게 사실이다. 이를테면 경승용차 같은 ‘효율적인’ 차보다는, 그보다 훨씬 기름이 많이 들어도, 즉 ‘비효율적’ 이라도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차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또 개발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타고 싶어하는 차, 소위 「드림 카」는 단지 비싼 고급 차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시대를 앞서 간 첨단기술이나 성능을 가진 차가 있다면, 당연히 그 시대 사람들이 바라는「드림 카」일 것이다. 그렇다면 당대의 사람들이 갖고 싶어하는, 그 시대에 보편적인 기준을 뛰어 넘는 「드림카」의 기준에서 한 번도 벗어나 본 일이 없는 차가 있을까?
최초의 자동차를 만든 ‘벤츠’는 오늘날에 와서는 고급승용차의 대명사지만, 벤츠에는 고급 ‘세단’만 있지는 않다. 속도 무제한의 고속도로 아우토반의 나라 독일의 메이커답게 벤츠도 고성능 스포츠카가 있다. 독일의 스포츠카라고 하면 포르쉐 같은 ‘고성능 기계’의 기능적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지만, 벤츠의 스포츠카는 그런 독일의 기능주의를 역시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와는 조금 다른 그 무엇, 그러나 딱히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벤츠의 스포츠카는 300SL모델이 1954년부터 나오기 시작해서 지붕을 없앤 로드스터(Roadster)가 1957년에 나온다. 그리고 1963년형 230SL 파고다(Pagoda), 뒤 이어1971년의 SL, 1989년의 500SL, 그리고 2003년형 SL500과 2012년형 SL클래스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왔지만, 계속해서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것 같다. 그것은 바로 그 시대를 뛰어 넘는 어떤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세대 1954년형 300SL(W198)
1세대의 1957년형 SL로드스터(W121)
갈매기가 날개를 펼치듯 열리는 걸 윙 도어(gull wing door)가 인상적인 1세대 300SL은 구조적 제약조건을 특이한 도어 디자인으로 승화시킨 가장 대표적인 예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견 300SL의 걸 윙 도어는 단지 멋을 부린 것으로 보인다. 물론 멋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단지 멋만이 아니라 새로운 구조의 적용에 따른 구조의 제약을 스타일적인 방법으로 승화시킨 것이었다. 300SL에는 그 이전의 사다리 형태와 같은 차체 프레임 대신에 스페이스 프레임(space frame)이라고 불리는, 마치 철교나 체육관 지붕구조물에서의 트러스(truss) 구조와 같은 프레임이 쓰였다. 스페이스 프레임구조의 채택으로 차체의 강성을 확보하면서도 훨씬 가벼워져서 주행성능이 높아졌다고 한다. 그러나 가느다란 부재들 간의 결합으로써 전체적인 강성을 얻는 스페이스 프레임의 특성 때문에 문턱을 운전자 팔꿈치 높이까지 올라가게 만들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을 문이 지붕의 일부분까지도 함께 열리게 함으로써 타고 내리는 데 필요한 크기를 얻게 된 것이 바로 300SL의 걸 윙 도어이다. 이것은 당대에 보기 어려운 새로운 스포츠카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걸 윙, 그리고 후드 위의 블리스터
300SL은 스포츠카로써는 생명과도 같은 날렵하고 낮은 후드를 위해 엔진을 비스듬하게 눕혀서 탑재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진의 헤드커버 모서리와 흡기포트가 후드와의 간섭되자 그것을 피하면서도 낮은 후드의 디자인을 유지하기 위해 두 개의 블리스터(blister)를 후드 위에 만들게 된다. 이것은 벤츠 디자인의 아이콘이 된다.
1954년형 SL의 엔진
1963년부터 생산되기 시작한 2세대 모델(W113) 230SL은 일명 ‘파고다(PAGODA)’라고 불리기도 했다. 파고다라는 이름은 230SL의 하드탑(hard top) 형태에서 나온 것으로, 다른 차들과 구분되는 구조의 지붕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것으로 인해 전체 차체의 높이가 낮은 SL에서 넓은 측면유리로 시야가 넓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운전자와 탑승자의 머리공간을 넓힐 수 있었다. 독특하게 아래쪽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C 필러와 경쾌한 차체 형태가 이전의 300SL과는 달리 근대적인 SL 시리즈의 스타일개념을 정착시켰다.
2세대 SL 파고다(W113), 1963년
1971년에 발매된 3세대 모델 350SL(R107)은 벤츠의 근대적 스포츠카 디자인의 전형을 보여주기 시작한 모델로 평가된다. 특히 3대의 SL 시리즈 하드탑 모델은 성공의 상징이었던 것은 물론이고, ‘플레이보이들의 드림카’, 그리고 인기 연예인들의 ‘자가용’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모델이다. 우리나라에 「원더우먼」이라는 영화 시리즈로 알려졌던 여배우 「린다 카터」 역시 3세대 SL을 탔었다고 한다.
3세대 SL(R107), 1971년
3세대 SL의 테일 램프(tail lamp)는 벤츠 특유의 줄무늬(groove)가 파여 있는 디자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홈의 깊이가 얕아지거나 매끈해지는 등으로 더 간결하게 정리되었지만, 이 시기에는 벤츠 고유의 테일 램프 디자인의 특징이 되었었다. 테일 램프 렌즈 표면의 홈을 파 놓은 것은 가령 흙탕물이 튀었다든지 폭설이 내려 쌓여도 렌즈가 가려지지 않도록 해서 후방의 차량들에게 신호를 정확히 전달하기 위한 기능적 디자인이다. 이러한 테일 램프 디자인은 4세대 모델에도 사용된 것은 물론이고, 1970년대와 80년대에는 다른 메이커의 차량에서도 유행처럼 나타나기도 했다. 3세대 SL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았는데, 4세대 모델이 나온 1989년까지 무려 18년 동안이나 생산 판매되었다.
줄무늬가 들어간 테일 램프 디자인
1989년에 등장한 4세대 SL(R129)은 12 기통 5000cc 306마력의 고출력 엔진을 장착하여, 고성능 럭셔리 쿠페로써 완전히 자리잡았다. 물론 3000cc 엔진도 있었고, 컨버터블 루프는 전동 모터와 유압을 이용해서, 이전의 모델들이 지붕을 손으로 열고 닫았던 데에 비하여, 이때부터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여닫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하드 탑 지붕만은 여전히 따로 떼어서 보관해 두었다가 손으로 조립해야 했다.
4세대 SL(R129), 1989년
사실 ‘오픈카’는 타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 모두가 폼 나고 부러운 자동차이지만, 차체가 뒤집히는 전복(顚覆) 사고 시에는 사실 아무리 벤츠라 하더라도 속수무책으로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그에 대한 대책으로 일부의 컨버터블 차량들은 좌석 뒤쪽에 롤 바(roll bar)를 설치하기도 하지만, 그럴 경우에 오픈카로써의 ‘폼’이나 ‘낭만’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플레이보이들의 드림 카로 ‘폼에 살고 폼에 죽는’ 폼생폼사 SL에게 롤 바의 설치는 어쩌면 타협할 수 없는 문제였는지 모른다. 4세대 SL은 차체가 어느 각도 이상으로 기울면 자동으로 솟아오르는 롤 바를 달게 되었다. 정말로 이 장치는 ‘폼을 내기 위한’ 첨단장비이다.
4세대 SL의 전동식 롤 바
그런데 4세대 SL 앞모습의 인상을 보면 벤츠의 SL 시리즈의 스타일 전통을 따르고 있기는 하지만, 약간의 ‘오만함’ 같은 성격이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영화 속에서 나오는 ‘돈 많은 플레이보이’ 에게 보여질 법한 이미지로, 매너 있고 핸섬한 이미지이지만, 놀기 좋아하면서도 약간은 불량한(?) 인상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필자는 이런 이미지가 참 마음에 든다. 그래서 역대 SL 모델 중 4세대가 가장 마음에 든다. 자동차가 단지 기계가 아닌, 마치 품성을 가진 생명체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4세대 SL의 앞 얼굴
그에 비하면 2003년에 나온 5세대 SL R230은 조금은 순진한 인상이다. 5세대 모델에서 돋보이는 장비는 바리오 루프라고 불렸던 전동식 하드탑 지붕이었다. 사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오픈카들의 화려한 모습 이면에 존재하는, 남들에게는 차마 이야기할 수 없는 속사정은 누수(漏水)와 풍절음(風切音)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화창하게 맑은 날에는 만인의 부러움을 받으며 ‘폼 나게’ 달릴 수 있지만, 비 오는 날에는 마치 초가지붕에서 비가 새듯이 천으로 된 지붕의 이음새에서 떨어질지도 모르는 물방울을 걱정해야 한다. 아무리 정교한 설계로 지붕을 만든다 하더라도 물이 새는 것을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5세대 SL(R230), 2003년
다른 한편으로 지붕을 닫은 채로 차를 빠르게 몰면, 천으로 된 지붕을 타고 들려오는 마치 태풍이 몰아치듯 울려대는 바람 소리 때문에 사실상 차 안에서 무드 있게 음악을 감상하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지붕을 열었을 때의 ‘멋’에 대한 대가라고 인정하고 감수하는 오픈카의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픈카로써의 멋과 하드 탑으로써의 안락함은 벤츠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5세대 SL의 컨버터블 하드 탑이었다.
이제 2012년형으로 나온 6세대 SLR231에서도 그러한 컨버터블 하드탑은 당연한 것이 되었다. 어찌 보면 6세대 SL모델은 그 동안 벤츠가 성능과 안락성을 높이기 위한 발전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6세대 모델은 지금까지의 SL모델들의 분위기와 달리, 기계의 느낌이 더 강해진 것 같다. 말하자면, 돈 많은 플레이보이 같은 느낌이 조금은 덜 한 것 같기도 하다. 플레이보이 대신 그냥 잘 달리는 자동차의 느낌이다.
5세대 SL의 컨버터블하드탑
기계적 이미지를 가진 6세대 SL(R231)의 앞 얼굴
그런데 만약, 잘 달리기는 하는데 ‘노는 분위기’가 없다면, 그건 스포츠카라고 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런 차, 잘 달리기만 하는 차는 결국 레이싱 머신(racing machine), 경주하는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스포츠카는 성능으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격을 가진 표정의 디자인이 있을 때, 그게 플레이보이가 됐든 아니면 단정한 신사가 됐든지 간에, 그런 개성을 가지고 정말로 멋있게 달릴 수 있다면, 그게 바로 누구나 타고 싶어하는 스포츠카이며, 드림 카 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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