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여행

북한산의 사찰

구봉88 2014. 10. 12. 18:26

출처: 재경 보은사랑 76회 카페

 

 

 

 

 

(1) 북한산의 사찰 (사찰66 굿당11) 1


우이동지역 - 선운사 백연암 법안사 용덕사

                       영신법화사 지장암 무명치성터 도선사 인수암 백운암

수유동지역 - 보광사

                       무량사 백련사 성도원 운가암

                       화계사 삼성암

정릉동지역 - 법륜사 내원암 삼봉사 영취사 일선사

                       삼봉정사 왕녕사 대흥사 서광사 심곡사 영불사

                       약수암굿당 청학사 구복암 심곡사굿당 여래사

                      연화정사

구기동지역 - 봉정암 관음사 문수사 승가사

                    혜림정사 

                    연화사 금선사

                    각황사

불광동지역 - 정진사 불광사 석가사 선림사

                        진관사 삼천사

                        백화사

북한산성지역 - 용암사 묘법사 성불암굿당 행천사굿당 무량사 선혜암굿당

                          선봉사 보덕사굿당 범용사 국녕사

                          노적사 용학사 부왕사

                          중흥사 태고사 봉성암 대성암

                          보리사 상운사 대동사

                         여신당굿당 경국정사 봉바위굿당 원효굿당 만덕암 덕암사 원효암

밤골계곡 - 국사당굿당

용산교장앞 - 형제당굿당


♣우이동지역1

우이동도선사입구 교통광장에서 그린파크호텔입구옆 육모정고개쪽길로 오르면 오크벨리옆에 선운사가 있고, 오크벨리옆 육모정공원지킴터를 지나 계곡길로 오르다 계곡갈림길에서 우측으로 가면 계곡위에 가건물의 백연암이 잇고, 계곡을 건너 오르면 법안사를 지나 상장능선 왕관바위로 오르고, 계곡갈림길에서 직진하면 용덕사를 지나 육모정고개로 올라 영봉이나 상장능선으로 오른다.

교통 109, 120, 130, 144, 151, 170, 130 1121, 1144, 1161, 1165, 1166, 1217, 1218, 1219 02, 05 도선사입구하차


♠선운사

선운사 대웅전


백연암 계곡위의 가건물

 

♠법안사

대웅전옆에 와불탑이 있으며 사찰밑 축사에 당나귀를 사육하고 있다.

법안사대웅전


 

법안사 와불탑

 

당나귀사육장

 

♠용덕사 (龍德寺) 

1910년 건립된 사찰로서 이 장소가 용의 입 모양을 하고 있다 하여 용덕사라고 한다.

예로부터 용의 명당터로 알려져 뭇 사람들의 기도처로써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곳이다.

용의 여의주라고 일컬어지는 커다란 바위에는 마애불 약사여래불이 조각되어 있다.

용덕사 대웅전

 

용덕사 암각불화

 

♣우이동지역2

우이동교통광장에서 도선사쪽길로 오르다 우이분소옆에서 우측 계곡을 건너 오르면 영신법화사를 지나 영봉으로 오르고, 우이분소에서 직진하여 진달래능선갈림길입구 맞은편 계곡 다리건너에 있는 지장암을 지나 영봉으로 오르고, 지장암좌측 계곡으로 오르면 가건물의 치성터를 지나 영봉이나 하루재로 오른다. 갈림길에서 직진하여 도선사길로 오르다 도선사주차광장에서 서쪽으로 가면 도선사를 지나 용암봉으로 오르고, 도선사광장에서 직진하여 하루재를 넘으면 인수대피소위에 인수암을 지나 백운대피소뒤에 백운암을 지나 백운대에 오른다.

교통 109, 120, 130, 144, 151, 170, 130 1121, 1144, 1161, 1165, 1166, 1217, 1218, 1219 02, 05 도선사입구하차


♠영신법화사

개가 짖어 접근이 어렵다

 

♠지장암

 

치성터 가건물

계곡옆 치성터 암각불화

 

♠도선사(道詵寺)

신라 경문왕 2년(862년)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가 창건하였다.

조선말 광무 8년(1904)에 국가기원본찰로 지정을 받았다.

신라 경문왕 2년 (862)에 도선국사가 조성했다고 전하는 마애불이 있고 명부전앞에는 200년된 보리수가 있다.

도선사대웅전

 

도선사석불

 

▲도선사석불(道詵寺石佛) 서울시유형문화재 제34호

대웅전뒤 석불전(石佛殿) 참회도장(僭悔道場)에 있는 마애불(磨崖佛)

통일신라말기 신라 경애왕 2년(862)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암벽을 깍아만든 마애불(磨崖佛)로 전해진다. 높이 20미터의 암벽에 몸의 높이 8.43미터, 머리높이 2.15미터, 어깨폭 2.88미터로 몸통은 원통형으로 되어있다.

 

명부전과 보리수(가운데)

 

도선서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북쪽

청담대종사가 1991년(신미辛未)에 건립

전면에는 지장보살과 십대왕등 33위의 상이 봉안되어 있고 왼쪽벽면에는 고 박정희전대통령과

유영수여사의 영정이 오른쪽벽면에는 고 정주영전현대그릅회장의 영정이 있다

명부전앞에는 보리수가 있는데, 200여 년전에 인도에서 온 고승이 심었다고 전한다.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

신라말의 승려로 풍수지리설의 대가


인수암 

인수암

 

백운암 

백운암

 

♣수유동지점1

덕성여대앞에서 하차하여 솔밭공원 남쪽길로 올라가면 보광사를 지나 진달래능선으로 오른다.

교통 109, 120, 130, 144, 151, 170, 130 1121, 1144, 1161, 1165, 1166, 1217, 1218, 1219 02, 05

덕성여대앞 하차 솔밭공원남쪽길


♠보광사 (普光寺) 

조선 정조 12년(1788) 금강산에서 수도한 원담스님이 창건하여 신원사라 하였다.

6.25전쟁으로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고 일부 건물이 보존되어 1980년 11월 보광사로 개명되었다

보광사대웅전 

 

♣수유동지점2 

4.19묘입구3거리에서 하차하여 4.19묘를 지나 첫갈림길에서 우측의 진달래길로 가면 무량사를 지나 진달래능선으로

오르고, 갈림길에서 직진하여 다음 갈림길에서 우측의 백련공원지킴터를 지나면 백련사를 지나 지달래능선으로 오르고,

갈림길에서 직진하여 다음 갈림길에서 우측의 운가사공원지킴터를 지나면 성도원, 운가암을 지나 진달래능선으로

오른다.

교통 101, 104, 109, 120, 144, 151, 170, 1119, 1144, 1166, 1218, 01 4.19묘입구3거리 하차


♠무량사

 

♠백련사 (白蓮寺) 

1930년 이은순여사가 창건

중병에 걸려 생사를 헤매던 사람이 현재의 대웅전 옆 약수를 마시고 회생하여 이곳에 절을 세웠다고 한다.

백련사대웅전 

 

백련사약수


♠성도원

성도원대웅전 

 

♠운가암

운가암대웅전

 

 

(2) 북한산의 사찰 (사찰66 굿당11) 2

 

 ♣수유동지점3

한신대앞에서 하차하여 화계사길로 오르면 화계사가 있고 화계사 왼쪽계곡길로 오르면 삼성암을 지나 칼바위능선으로 오른다

교통 101, 151, 152, 410, 1165, 02 한신대앞 하차


♠화계사 (華溪寺) 

조선 중종 17년(1522)에 부허동(浮虛洞 지금의 조병옥 묘 근방)에 있던 보덕암(普德庵)을 신월선사(信月禪師)가 서평군 이공의 도움으로 화계동의 현재 자리로 옮겨 짓고 화계사라 했다. 왕실의 비호로 불교의식을 전담하는 범패승을 양성하던 절이었다.

광해군 10년(1618년)에 화재로 전소하였으나 다음해 도월(道月)이 흥덕대군(興德大君)의 시주를 받아 복원하였고, 고종 3년(1866년) 흥선대원군의 시주로 용선(龍船), 범운(梵雲) 양 대사가 중수하고, 고종 7년(1870) 대웅전, 명부전을 중건하였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은 이 절 만인萬印스님의 도움을 받아 권력(1852년에 고종 낳고 고종은 1863년에 임금이 됨)을 얻었기에 1866년(고종3년)에 새로이 중수하였다.

그리하여 궁宮절로 불리면서 조趙대비(1808-1890 헌종 엄마), 홍洪대비(1831-1903 헌종 2비), 민閔비(명성황후 1851-1895 1866에 왕비 됨)를 비롯하여 궁녀들이 드나는 나라의 원찰願刹이 되었다.

화계사 현판을 비롯해서 흥선대원군의 추사체 글씨 현판을 많이 보존하고 있다.

1933년 조선어학회 주관으로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위해 이희승,최현배등의 국문학자 9명이 기거하며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화계사동종은 보물 제11-5호이고 대웅전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5호로 지정되어 있고, 지장보살상은 국보급의 문화재라고 한다.

 

화계사대웅전

 

화계사대웅전華溪寺大雄殿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675호

대웅전은 고종7년(1870)에 지었다

대웅전大雄殿현판은 근세의 명필인 정학교丁鶴喬의 글씨이고 대웅전 네기둥에 있는 주련柱

聯과 보화루寶華樓현판은 신헌申櫶의 글씨이다. 추사체로 쓰여진 화계사華溪寺 학서루鶴棲樓 명부전冥府殿의 현판은 대원군의 글씨이다 

*유수옹鍮水甕 물동이

대웅전 앞추녀의 양쪽 끝 축대위에 놋쇠(청동靑銅, 유鍮) 항아리(유수옹鍮水甕 물동이)가 하나씩 놓여져 있다. 이 단지들은 헌종(재위1834∼1849)의 왕비인 홍대비가 1904년 기증한 것으로 불도깨비(화마火魔)가 이 물동이단지의 물에 비치어 제 모습에 놀라 달아 나라는 뜻이다

 

범종각

 

범종각은 1972년에 건립된 6각건물이다

범종각에는 1898년 경상북도 풍기 희방사에서 옮겨운 동종과 목어(木魚 나무물고기), 북이 있다.


범종각2층 동종

 

서울화계사동종(서울華溪寺銅鍾) 보물  제11-5호 

대적광전옆 범종각(희방사대종)

조선 숙종 때 승려인 사인(思印)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종을 매다는 고리 부분에 두 마리의 용을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종의 어깨 부분과 입구 부분에 넓은 띠를 두르고 있으며, 몸통에는 사각형의 유곽과 위패 모양을 균형있게 배치하여 안정감을 준다.

사실성과 화사함이 돋보이는 수작일 뿐 아니라, 승려가 공명첩을 가지게 되었다는 당시의 사회상을 알려주는 명문이 남아있어, 종 연구와 더불어 사료로서 가치가 크다.

 

범종각2층 목어 

 

목어는 원래 고려때 창건된 보덕암에 있던 것이라고 전하는데 범종각 2층에 지붕천장에 매달려 있다. 묵어는 1천년이 넘는다고 한다. 1층에 있는 대종은 명문에 의하여 주조연대가 1683년임을 알 수 있으며 무게는 300근이라고 하나, 현존하는 대종은 주지 진암(眞菴)스님이 무오(戊午 1978)년에 조성한 것이다


흥선대원군과 만인스님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부인인 여흥 민씨는 외가의 원찰인 화계사를 자신의 원찰인 것처럼 자유롭게 출입을 하고 있었던 터이라 대원군도 자연 이곳을 찾게 되었다. 그래서 화계사와 깊은 인연을 맺어 장차 왕업을 이루려는 꿈을 꾸게 되었으니 그 일화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어느 여름 날 흥선대원군이 남루한 차림으로 화계사를 찾게 되었다. 서울에서 십리 길이라 화계동구에 도착하였을 때는 갈증이 몹시 심하였다. 그런데 절 앞 느티나무 아래에서 웬 동자승이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꿀물이 든 사발을 내밀었다. 기이하게 여긴 대원군은 그 연유를 물었고, 동자승은 그 일을 시킨 만인(萬印)스님에게 안내하였다. 만나서 심금을 터놓게 되었는데 만인스님은 흥선대원군의 야심을 꿰뚫어보고 있는지라 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세도로부터 왕진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매달리게 되었다.

만인스님은 인연의 도리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탄식하고 자신이 불가(佛家)의 중죄인이 되어 업보를 면할 수 없을 것이나 시운(時運)이라 하며 그 방법을 일러주었다. 충청도 덕산(德山) 가야산의 가야사(伽倻寺) 금탑자리가 제왕지지(帝王之地)이니 남연군 묘소를 그리로 이장하면 제왕이 될 귀한 왕손을 얻을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대원군이 많은 돈을 마련하여 가야사를 찾아가 그 곳 주지를 매수하여 가야사에 불을 지르도록 하였다. 탑을 허물고 여러 형제들을 설득하여 그곳으로 남연군의 묘를 이장해 갔다. 그 후에 대원군의 아들 고종이 탄생하였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순조 20)~1898(광무 2).

조선 제26대왕 고종의 생부

▲정학교 [丁學敎]

1832(순조 32)~1914.조선 말기의 문인서화가.

▲신헌 [申櫶]

1810(순조 10)~1884(고종 21).조선 후기의 무신·외교관.


♠삼성암 (三聖庵)  

삼성암(三聖庵) 고상진이 1872년(고종 9)에 소난야(小蘭若)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는데

고종 19년(1882)에 박선묵 스님이 독성각을 짓고 삼성암이라 개명하였다.

독성각에는 나반존자를 부조로 봉안하였다.

교통 101, 151, 152, 410, 1165, 02 한신대앞 하차하여 화계사를 지나 오르거나

교통 151 1165 03 정인학교 빨래골입구에서 하차하여 빨래골계곡으로 올라도 된다

삼성암대웅전

 

♣정릉지구1  

정릉 110번대진여객종점에서 하차하여 정릉탐방안내소주차장 좌측으로 오르면 법륜사가 있고, 정릉탐방지원센터를 지나 갈림길에서 우측의 북한산사무소옆으로 오르면 내원암을 지나 칼바위능선으로 오르고, 갈림길에서 직진하여 좌측의 청수2교를 건너 청수천계곡으로 오르면 삼봉사, 영취사를 지나 능선넘어 일선사를 지나 대성문에 오른다.

교통 110, 143, 162, 1020, 1113 종점하차

 

법륜사


♠내원암

내원암대웅전

 

♠삼봉사

삼봉사대웅전

 

♠영취사

영취사대웅전

 

♠일선사 

서기870년경 신라시대 명승인 도선국사가 창건했을 때는 보현사(普賢寺)라고 했고 위치는 지금보다

서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서는 탄연스님의 중창이 있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자초(自超), 무학(無學)스님이 중창하였는데 특히 무학대사는 1394년 한양 천도 후 이곳을 수시로 왕래하며 수도정진

하였다.

1940년 김만신행이 현재의 자리로 옮겨 절을 중창하면서 관음사(觀音寺)로 바꾸었다. 1957년 시인 고은(高銀)이

이곳에 승려로 있으면서 절이름을 자신의 법명인 일초(一超)의 ‘일’자와 도선(道詵)의 ‘선’자를 따 일선사(一詵寺)로

바꾸었다. 1962년 문공부에 등록하면서 일선사(一禪寺)라고 개칭하였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약 30m 떨어진 곳에 보현굴(일명 다라니굴)이라고 하는 굴이 하나 있다.

절에는 대웅전 약사전 요사가 있고 산신각은 근년에 불에 타 현재 터만 남아 있는데 이때 산신각 탱화가 훼손되었다.

이곳에는 또 바위에 새긴 칠성도와 산신도가 있는데 역시 근년에 훼손되었다. 보현굴앞과 바위뒤에는 검은색 십자가가,

바위의 암각불화는 검은색으로 칠해졌고, 보현굴바위위에는 커다란 붉은색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

교통 110, 143, 162, 1020, 1113 종점하차하여 청수천계곡으로 오르거나

교통 110, 171, 1020, 1112, 1166, 1213, 1711, 7211 롯대아파트앞에서 하차하여 평창계곡으로 올라도 된다

일선사대웅전

 

보현굴

 

훼손된 암각불화

 

 

♣정릉지역2  

국민대앞에서 하차하여 국민대안으로 들어가 교상3거리에서 좌측 성곡도서관옆으로 오르면 삼봉정사가 있고,

북악터널주차장옆 북악공원지킴터에서 계곡을 따라 오르면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왕녕사, 대흥사를 지나 형제봉으로

오르고, 갈림길에서 직진하여 다음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오르면 서광사가 있고, 갈림길에서 직진하여 다음갈림길에서

좌측으로 가면 심곡암이 있고, 우측으로 오르면 영불사를 지나 형제봉으로 오른다.

북악터널주차장을 지나 북악터널옆 북악터널관리사무소옆길로 들어가 우측으로 가면 약수암굿당이 있고,

북악터널동쪽위로 올라 북악2공원지킴터에서 우측으로 오르면  청학사를 지나 형제능선으로 오르고, 형제봉능선을

넘어 평창동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구복암이 있다. 북악2공원지킴터에서 직진하면 삼곡사굿당이 있고,

북악2공원지킴터에서 좌측 북악터널위를 지나 오르면 여래사를 지나 북악산으로 간다.

교통 110, 171, 1020, 1112, 1166, 1213, 1711, 7211 국민대앞 하차


♠삼봉정사

삼봉정사대웅전


 

대웅전옆

 

♠왕녕사

왕녕사대웅전

 

대웅전옆

 

♠대흥사

대흥사대웅전

 

♠서광사

서광사대웅전

 

 

(3) 북한산의 사찰 (사찰66 굿당11) 3

  

♠심곡암

심곡암대웅전


 

심곡암좌선대

 

♠영불사

영불사대웅전

 

영불사대불

 

♠약수암굿당

약수암굿당

 

♠청학사

개가 사납게 짖어 근접할 수가 없다.

청학사대웅전

 

♠구복암

구복암 성모전

 

구복암불상

 

♠삼곡사굿당

개가 직어 근접할 수가 없다.

삼곡사굿당

 

♠여래사

1958년 창건

일제시대 나라의 독립과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 366명의 순국선열 위패를 모시고 있다.

납골당이 있다.

여래사대웅전 

 

여래사순국열사사당

 

여래사납골당


 

 

♣연화정사

연화정사 극락보전

 

연화정사 불상

 

♣봉정암

봉정암 대웅전

 

♣관음사

관음사대웅전

 

관음사불상

 

♠문수사 

고려 예종 4년(1109)에 탄연(坦然)이 창건하였다.

1451년(문종 1) 연창공주(延昌公主)가 중창하였고 그 뒤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해 오다 6.25 때 소실된 것을

1957년 신수(信洙)스님이 중건하였다. 1957년 주지 주영(周英)스님이 신중탱화를 봉안하였고 1978년에는

소종 1구를 조성하였다.

1985년에는 혜정(慧淨)스님이 삼성각을 중수하고 법당에 후불탱화와 신중탱화를 새로 모셨다.

예로부터 오백나한을 모신 기도처로 유명하다. 문수사가 자리한 곳은 북한산 안에 있는 사찰 가운데 주위 경관이

좋기로 손꼽히는 곳으로 예로부터 신도뿐만 아니라 시인묵객들이 풍류를 좇아 즐겨 이곳을 찾아 시를 읊곤 했는데

고려시대의 이장용(李藏用)과 탄연스님 조선시대의 최립(崔立), 홍세태(洪世泰) 등이 있다.

대웅전의 문수보살상은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석가불상은 영친왕 이은(李垠)의 부인인 이방자(李方子)여사가

봉안한 것이라 한다. 또한 현재 나한전에 모셔진 오백나한은 본래의 오백나한을 그대로 복원한 것으로 역시

진흙으로 빚었다.

이승만(李承晩: 1875∼1965)초대 대통령의 어머니가 이 절에서 백일기도를 한뒤 이승만을 낳았다고 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1960년 이승만전대통령이 82세때 이곳에 들러 참배하였고, 이때 이승만전대통령이 쓴

“文殊寺”(문수사)라는 현판이 요사에 걸려 있다. 전두환 전대통령이 문수동굴에 문수보살을 봉안하고

그의 글씨로 "三角山天然文殊洞窟"(삼각산천연문수동굴)이라고 새긴 현판을 걸어놓았다.

▲탄연 [坦然, 1070~1159] 

고려의 승려이자 서예가이다. 왕사를 지냈으나 곧 은퇴하고 선교(禪敎) 중흥에 이바지했다. 서예에 뛰어나

명필가로도 이름을 떨쳤다.

문수사대웅전

 

문수동굴전

 

 

 

(4) 북한산의 사찰 (사찰66 굿당11) 4

 

♠승가사(僧伽寺)

756년(경덕왕 15) 신라의 수태(秀台 : 수대라고도 한다) 스님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수태스님은 중국 당나라 고종 때 장안 천복사(薦福寺)에서 생불소리를 들었던 서역 출신의 승가대사(僧伽大師)의

거룩한 행적을 듣고 그를 경모하는 뜻에서 이절을 승가사라고 이름지었다.

고려시대에 이 절은 대개 승가굴이라고 불렀는데 선종 숙종 예종 의종 등의 역대 임금들이 자주 참배하고 재를 올렸다. 이조왕실 4대원찰 중 하나 진관사와 함께 비구니 사찰이다.

절 서북쪽 바위에 새겨진 마애석가여래좌상(북한산구기리마애석가여래좌상 보물 제215호)과 약사전에 모셔진

약사여래(승가사석조승가대사상 보물 제1000호)의 영험함과 약수(藥水)의 효험도 유명하다.

승가사대웅전 

 

승가사마애여래좌상  보물 제215호 

 

승가사석조승가대사상 보물 제1000호 

 

▲승가대사(627-708)

당나라 용삭(龍朔)년간(661-663)에 용흥사라는 곳에서 신이함과 자비를 베풀어 세상에 널리 알려진 분이다. 스님의 명성이 궁궐에까지 전해져 왕과 왕비에게 법문을 펼치기도 하였다. 708년 82세로 입적하니 사람들은 스님을 관음보살의 화신이라고 칭송하였다.

 

승가사 석탑


♠혜림정사

혜림정사대웅전 

 

♠연화사

연화사대웅전

 

♠금선사

여말(麗末) 선초(鮮初)의 고승高僧 자초自超 무학無學(1327-1405)대사께서 도읍을 정하고자 삼각산을 살피던 중,

지금의 금선사터에 삼각산의 정기가 서려있고 부처님이 상주하시며 중생들을 제도하는 듯하여 절을 지으니

바로 금선(金仙: 부처님)사였다.

1949년(불기2493년) 도공(道空)스님께서 중건하시고, 철우스님께서 중수하시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 주지 法眼스님이 목정굴을 복원(1996년 3월)하여 수월관음보살을 봉안하고 전통사찰로 등록한 것이

오늘의 금선사와 목정굴이다.

농산(聾山)스님과 순조대왕

부처님께서 상주하시는 기도처인 이곳 금선사에서 수행하시던 농산(聾山)스님께서 조선의 순조대왕으로 환생하신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조선시대 정조 때의 일이다.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하여 불교에 대한 폐해가 극심하던 중 대구 팔공산의 파계사에

주석하시던 용파(龍波)스님은 정조를 알현하고 불교에 대한 극심한 폐단이 있음을 아뢰니, 정조는 이의 시정을

약속하면서 왕실의 대를 이을 왕자를 잉태하기 위한 기도를 부탁하였다.

정조는 슬하에 세자가 없어 고심하던 중이었다. 마침내 그에게 세자탄강世子誕降을 위한 기도를 명하게 되었다.

용파스님은 이를 수락하고 금선사에서 정진하시던 농산스님께 전후 사정을 말씀드렸고, 두분 스님은 수락산 내원암과

삼각산 금선사에서 각자 기도에 들어가셨다. 농산은 바로 이곳 목정굴에서 100일간 관음기도를 올린 것이다.

기도가 끝나갈 무렵 용파스님이 선정에 들어 살펴보니 왕자의 몸을 받아 태어날만한 이가 스님과 농산스님

밖에 없는지라 농산스님께 왕자로 환생할 것을 아뢰니, 농산스님께서 이를 수락하시고 수빈 박씨의 꿈에

현몽하시어 환생의 뜻을 밝히시고는 기도를 마치고 상서로운 징후를 보이며 열반에 들었다. 이때 왕실에 발신을

알수 없는 봉서 하나가 올라 왔는데 " 강무庚戌 6월 18일 세자탄강世子誕降" 이라 적고 있었다.

순조는 바로 이 날 태어났다. 이 날 서북쪽으로부터 맑고 붉은 서기가 왕실에 닿아 산실을 휘감고 있었다.

사람을 놓아 그 진원을 추적하게 하니 그곳은 다름 아닌 바로 이곳 목정굴이었다. 굴 안에는 좌탈입망坐脫入亡한 체로

앉아 있는 농산스님의 탈곡신脫穀身 뿐이었으나 서기는 여전히 그의 정수리로부터 산실産室로 흘러 들고 있었다.

농산스님의 입적과 순조로의 환생을 목도한 정조는 내수사內需司에 명命하여 목정굴 위에 절을 크게 중창하게 하였다.

내원암의 사적에 두분 스님 사이에 오고간 서신이 남아있다. 지금도 금선사에는 순조의 탄진제誕辰祭를 모시고 있다.

금선사 반야전

 

목정굴안 불상

 

금선사 신중탱화 서울특별사유형문화재 제161호

신중탱화(神衆幀畵)는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신중을 그린 것으로, 조선 후기에 가장 대중적

으로 유행했던 불화이다

 

 


♣구기지역2  

구기터널입구에서 하차하여 구기터널서쪽위 구기터널공원지킴터를 지나 오르면 각황사를 지나 족두리봉으로 오른다

교통 7022, 7211 구기터널입구 하차


♠각황사

각황사


 

 ♣불광동지역1  

독바위역에서 하차하여 북쪽 불광중방향으로 가다 한양수자인아파트옆길로 들어가면 천문대,

정진사를 지나 족두리봉으로 오르고, 불광중4거리에서 하차하여 불광중옆3거리에서 우측으로 팀수양관을 지나면

불광사를 지나 향로봉으로 오르고, 불광중옆3거리에서 좌측으로 가면 석가사, 선림사를 지나 향로봉으로 오른다.

교통 불광전철역하차 버스7720 불광역하차 불광중하차


♠정진사

정진사석불

 

♠불광사

불광사대웅전

 

♠석가사 


♠선림사

선림사 대웅보전

 

 

♣불광동지역2  

구파발전철역에서 진관사행 버스로 진관사아래에 하차하여 진관사를 지나 비봉으로 오르고, 

삼천사를 지나 문수봉으로 오른다. 삼천리골입구에서 하차하여 삼천사나 진관사로 간다.

교통 7724 진관사하차 704 34 삼천리골하차


 ♠진관사

신라 제28재 진덕왕(眞德王 재위 647~654)때 원효가 삼천사와 한께 신혈사(神穴寺)를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고려 현종(顯宗) 2년(1011)에 고려 현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진관津寬조사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신혈사를 중창하면서 진관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대웅전안에는 고려 현종이 왕위에 오르기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보존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명령에 의하여 경내에 조종(祖宗)과 충열(忠烈)지사를 위한 수륙사(水陸社)가

설치되는 등 조선 왕실 사대원찰 중 하나였던 권위있는 명찰이자 규모있는 대찰이었다. 6,25전쟁때 소실된것을

1960년대 진관스님이 복원하다.

진관사와 현종

현종은 태조 왕건의 손자로서 왕에 오르기 전에는 대량군(大良君)으로 불렀다.

이름은 순(詢).

7대 목종은 아들을 두지 못해서 대량군 순이 유일한 왕위 계승자 였다.

목종의 어머니 헌애황후(천추태후로도 불림)는 그것이 못마땅했다.

따라서 당시 세도정승 김치양과 자기 사이에 낳은 부정한 아들을 목종 다음 왕으로 뒤를 잇게 하려고 갖은

책동을 다하면서 대량군을 궁궐에서 ?아내 버린다.

김치양은 헌애왕후의 외사촌 오빠였다.

개경 궁월에서 쫓겨난 대량군은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이 되어 삼각산까지 흘러들고, 이를 안 진관(津寬)대사가

그를 보호한다.

그 당시 진관은 지금의 삼천사 계곡에 암자를 짓고 수도한던 중에 대량군을 만난 것이다. 헌애왕후와 김치양은

그것도 미덥지 못해서 사람을 보내 대량군을 독살하려 했지만, 진관대사의 기지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독살의 낌새를 눈치 챈 진관은 방구들 밑을 파 대량군을 감쪽같이 숨겼다.

헌애왕후가 보낸 떡과 약식,술 등 음식물을 마당에 내다 버리니 까마귀와 까치들이 먹고 즉사했다.

나중에 왕이 되어 암자를 떠나게된 대량군이 그 암자를 신혈사(神穴寺)라 했다는데, 오늘날 어디쯤인지 확실치 않다.

현종은 진관대사가 베푼 이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왕이 되자 바로 진관사를 지었다. 현종 2년(1011년)의 일이다.

진관사대웅전

 

나한전안 소조석가삼존불상외6점 서울시유형문화재 제143-149호

 

♠삼천사

660년 신라 제30대 문무왕 때 원효대사와 진관조사가 함께 창건하였고 그 규모가 대단히 커서 한때는 삼천명이

넘는 대중이 수도정진을 하던 대규모 사찰이었던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원래의 절터는 현재의 위치보다 훨씬 위에 삼천사지 발굴터 인근의 방대한 규모였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진영화상이 중창하고 성운화상에 의해 거듭 중창 복원 하였다. 대웅전 위쪽 병풍바위에

보물 제657호 마애여래입상이 선각으로 새겨져 있다.

경내에 있는 천년고불 마애석불은 고려시대 조성된 것으로 보물 657호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세존 진신사리

석총탑과 나한사리 5층석탑이 봉안되어 있다.

삼천사대웅보전

 

마애여래석불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三川寺址磨崖如來立像) 보물657호

고려시대초기의 마애불로 병풍바위에 얕은 홈을 파고 조각한 높이 3.02m의 여래입상이다.

 

세존사리보탑

 

삼천사석종탑 세존사리보탑 대웅보전뒤

   세존진신사리 삼과를 봉안


♣불광동지역3

백화사입구에서 하차하여 여기소경로당, 백화사를 지나 의상봉으로 오른다.

교통 704 34 백화사입구하차


♠백화사

백화사 석불

 

(5) 북한산의 사찰 (사찰66 굿당11) 5

  

북한산성안지역

북한산성입구에서 하차하여 산성탐방지원센터를 지난다.

1지원센터위 삼거리에서 우측차량통행길로 오르면 갈림길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오르면 용암사를 지나

의상봉으로 오르고, 갈림길에서 직진하면 대서문이 있고 대서문에서 의상봉쪽으로 묘법사가 있고,

대서문에서 좌측 수문터쪽으로 내려가면 성불암굿당 행천사굿당이 있다. 대성문에서 직진하면 무량사를 지나

좌측갈림길로 내려가면 선혜암굿당이 있고, 갈림길에서 직진하다 좌측갈림길로 내려가면 계곡을 건너

봉바위당굿당 원효굿당을 지나 만덕암과 덕암사가 있다. 갈림길에서 직진하여 금북장앞 새마을교삼거리가 있다.

2금북장앞 새마을교삼거리를 건너 우측으로 오르면 선봉사를 지나 시멘다리 좌측에 보덕사굿당 우측에 범용사가 있다.

우측 범용사경내를 통과하여 오르면 국녕사를 지나 의상봉으로 오른다.

3법룡사에서 직진하면 중성문을 지나 좌측의 운하교를 건너 오르면 노적사가 있고, 운하교에서 직진하면

용학사를 지나 중흥사가 있다.

용학사에서 우측의 계곡을 건너 오르면 부왕사를 지나 부왕동암문으로 오른다.

중흥사앞 계곡갈림길에서 좌측 동장대쪽으로 오르다 우측은 태고사를 지나 동장대로 가고, 좌측길은

봉성암을 지나 용암문으로 오fms다. 계곡갈림길에서 직진하여 계곡으로 오르면 우측의 대성암을 지나

대남문으로 오른다.

4금북당앞 새마을교3거리에서 좌측으로 가면 보리사를 지나 좌측 계곡을 건너 상운사 대동사를 지나 백운대로 오른다.

5지원센터위 삼거리에서 좌측 계곡탐방로로 오르면 여신당굿당을 지나 경국정사를 지나 차량통행로직전

한성산장옆에서 좌측철다리를 건너면 봉바위굿당 원효굿당을 지나 만덕암 덕암사가 있고, 덕암사에서

원효봉능선으로 오르면 원효암이 있다.

교통 704 34 산성입구하차


♠용암사(龍岩寺)

사십여년된 사찰

용암사대웅전

 

용암사앞의 돌탑

 

묘법사

 

성불암굿당

 

행천사굿당

 

♠무량사(無量寺) 

1895년(조선 고종 32) 고종의 후궁인 순빈(淳嬪) 엄(嚴)씨가 창건하였다. 순빈은 이곳에 산신각을 짓고

약사불좌상과 산신탱화를 모신 뒤 백일기도를 올려 아들을 낳았다. 이 아들이 바로 영친왕

이은(李垠: 1897∼1970)이다. 그 뒤부터 이 절은 백일기도를 올리면 소원을 들어 주는 사찰로 알려져

원당(願堂)이라고 하였다.

또 경내에 약수가 있어서 약수암(藥水庵)이라고도 불렀다. 1902년에 대웅전이 들어섰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요사채가 있으며, 유물로는 약사불좌상과 산신탱화가 있다.

둘다 1895년에서 1906년 사이에 제작된 것이다.

무량사대웅전약사전 

 

약사전뒤 산신각약수


 선혜암굿당

 

♠선봉사

선봉사대웅전

 

보덕사굿당

 

♠법용사

법용사대웅전

 

♠국녕사(國寧寺) 

국녕사는 임진왜란 직전 사명당 대사가 호국기도도량 겸 승병양성도량을 겸해서 창건한 호국사찰이다.

사명당께선 국녕사가 흥하면 나라도 흥하고 국녕사가 무너지면 나라도 망하리라라는 예언을 남기셨다고.

1713년(조선 숙종 39) 청철(淸徹)과 철선(徹禪)이 창건했다.

창건 때는 총 86칸에 이르는 큰 규모의 사찰이었다.  가사당암문과 그 일대를 수비하는 승병의 수행처였으며

중흥사 다음으로 많은 승병이 있었다고 한다.

1991년 화재로 모두 불에 탄 것을 능인선원(能仁禪院)에서 1998년 10월부터 중창하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대웅전과 산신각·종각·요사채가 있다. 부근에 한월당(漢月堂) 대선사의 부도가 있으나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대불부처님 용바위(사자바위)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국녕사대웅전

 

국녕대불

 

두꺼비바위

 

두꺼비 바위(좌선하는 스님바위)

대웅전 오른쪽 산을 올려다보면 두꺼비 모양의 바위가 시야에 들어온다. 이 바위는 아이가 없는 한 부부가 기도하여 득남하였다고 한다.

 

♠노적사(露積寺)

고양시 전통사찰제201호

조선조 숙종당시 팔도도총섭(승병관리기구)이었던 성능 화상이 창건하여 사찰명을 진국사라 하였다.

그후 소실되어(연대미상) 빈터만 남게된 것을 1960년(불기 2504년) 무위스님이 사찰을 복원해 노적사라 하였다.

경내에는 창건당시 석사자상(해태상)과 석축이 남아있다

노적사대웅전


 약사여래상

 

♠용학사

용학사

 

용학사불

 

용학사암각불화

 

부왕사 가건물

부왕사불


 

♠중흥사

중흥사 가건물

 

중흥사뒤 중흥사지 

 

중흥사지 [重興寺址]  경기기념물 제136호

북한산 노적봉(露積峰) 남쪽 장군봉과 구암봉 사이에 위치한 옛 중흥사터이다.

고려 초기에 지어진 사찰로 1894년(고종 31) 화재를 만난 뒤 1915년 홍수까지 겹쳐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6) 북한산의 사찰 (사찰66 굿당11) 6

 

♠태고사(太古寺) 

고려말인 14세기후반 고려승려 원증국사(圓證國師) 보우(普愚)가 창건한 사찰로, 중흥사지 동남쪽 태고대

아래에 있는데, 원래는 중흥사의 부속 암자였다. 북한산성을 축성한 후에 총섭인 승 성능이 보우의 유지에

태고사를 창건하고 이름을 태고사라 하였다. 고려후기의 태고사원증국사탑(보물 제749호)과

그 탑비(보물 제611호)가 있다

구암봉 기슭의 긴 계단 위에 대웅전이 서향으로 서 있고, 그 옆에 1385년(고려 우왕 11)에 세운 높이 2.3m,

너비 1m, 두께 24cm의 태고사 원증국사탑비(보물 611)와 비각이 서 있다.

비석은 널찍한 사각 지대석 위에 귀부를 안치하고 그 위에 비신을 세운 뒤 단부에 이수를 놓았는데,

태고사를 세운 보우의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비각 왼쪽에 돌로 지은 산신각이, 산신각 뒤에는 부도탑 3기가 남아 있다.

경내에는 원증국사 사리탑인 태고사 원증국사탑(보물 749)이 보존되어 있는데, 하대가 넓어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고 단정하다. 문양과 조식이 고려 후기의 뛰어난 제작 솜씨임을 단적으로 알게 한다.

부도탑은 넓은 석단으로 이루어진 부도전에 세워졌는데, 사각형 지대 위에 사각형 하대를 놓고,

8각 꽃모양을 조각한 중대와 귀꽃문을 새긴 상대를 놓아 탑신을 받치고 있다.

태고사대웅전

 

원증국사탑비

 

▲태고사원증국사탑비(太古寺圓證國師塔碑) 보물611호 석비

고려 후기의 승려인 원증국사 보우(1301∼1382)의 탑비이다.

규모 : 높이 3.42m, 비신높이 2.27m, 옥개석 높이 0.05m

비문내용 : 국사 보우(고려말)의 출생부터 입적에 이르기까지의 내력을 적고있음

고려 우왕 11년(1385)에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 이색이 짓고, 명필 권주가 글

씨를 썼다.

 

원증국사부도

 

▲태고사원증국사탑(太古寺圓證國師塔)부도  보물749호 

고려 후기의 승려인 원증국사 보우의 사리탑

높이 : 4m

형태 : 8각의 상대석을 놓고 탑신석을 안치

태고사원증국사탑비(보물 제611호)의 건립이 고려 우왕 11년(1385)이므로, 이 사리탑은 그 이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태고사경내 보호수 수종귀룽나무 수령150년 수고23m 나무둘레2.3m

▲원증국사 보우(보우普愚의 호는 태고太古 시호 원증(圓證) 1301-1382) 고려말의 고승

공민왕의 왕사(王師) 국사(國師)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조(宗祖)로 받들어지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大韓佛敎曹溪宗]

한국 불교 26개 종단의 하나이며, 한국 불교 최대의 종단이다.

신라 때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이며 도의국사(道義國師)가 개산(開山)한 가지산문(迦智山門)에서 기원하여, 고려시대 보조국사(普照國師)인 지눌(知訥)의 중천(重闡)을 거쳐, 보우국사(普愚國師) 태고(太古)가 구산(九山)을 통합하여 조계종이라 공개적으로 이름붙인 데서 비롯되었다. 창종(創宗)의 정신은 보조국사에 연유하는 선교일치(禪敎一致)에 있다.


♠봉성암(奉聖庵)

구암봉 아래 있다. 규모는 25칸이며 성능스님이 창건하였다.

한국전쟁 때에 소실되었다고 한다 암자 초입에는 보연당 부도가 있고 뒤쪽에는 성능스님의  사리탑으로 전해지는 부도가 있다.

봉성암

 

♠대성암

대성암

 

♠보리사

보리사대웅전

 

♠상운사(祥雲寺) 

신라 때 원효(元曉:617∼686)가 삼천사(三千寺)와 함께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조선 중기 이후 승병들이 머물렀던 절이다.

1722년(조선 경종 2) 승병장 회수(懷秀)가 중창하면서 절 이름을 노적사(露積寺)로 바꾼 것을 1813년(순조 13)

승병장 태월(太月)과 지청(智廳)이 중건하면서 상운사로 바꾸었다.

북한산성 축성이후 군사요충지로써 승대장이 상주하며 전국승군을 지휘한 사찰이다

6,25동란으로 페사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근래에 중건

건물로는 대웅전과 삼성각·범종각·요사채 2동이 있고, 유물로는 고려 중기에 제작된 석탑과 석등 부재가 남아 있다.

그 중 석탑은 기단부와 1층 탑신만 전한다. 절 뒤에는 원효가 좌선하였다는 바위가 있다.

원효(元曉)617∼686 신라시대의 고승

34세에 의상(義湘)과 함께 당나라로 가던중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진리는 걸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터득하고 의상과 헤어져서 돌아왔다.

이후 태종무열왕의 둘째딸인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는데 이후 스스로 복성거사(卜性居士)

소성거사(小性居士)라고 칭하고 속인행세를 하였다.

그는 학승으로서 높이 평가될 뿐만 아니라 민중교화승으로서 당시 왕실 중심의 귀족화된 불교를 민중불교로

바꾸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상운사대웅전

 

♠대동사

개가 짖어 접근이 어렵다

대동사 칠성각과 대웅전

 

약수암

불타버린 약수암 

 

여신당굿당

 

♠경국정사

경국정사

 

봉바위굿당

 

원효굿당

 

♠만덕암

만덕암

 

♠덕암사

덕암사 대웅전

 

덕암사 불상

 

♠원효암(元曉巖)

원효봉 아래에 있는데, 10칸으로 승 성능(聖能)이 창건하였다. 원효대사가 좌선했다는 원효대가 부근에 있다.

지금의 산신각은 원효대사가 수도정진 하던곳 원효암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으나 새로이 건립되었다

원효암대웅보전

 

원효암산신각

 

원효암석불탑

 
국사당굿당 밤골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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