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부품과 기계 업체인 A사는 최근 유럽 진출을 추진 중이다. 유럽 자동차 부품 시장 참여를 위해서인데, 방법은 소위 스몰 M&A(소규모 인수합병)다. A사 관계자는 “최근 워낙 금리가 낮아 자금 조달 상황도 용이해진 데다 유럽 쪽 경기가 안 좋아 시장에 매물로 나와 있는 업체들이 꽤 있다. 지나치게 규모가 크지 않고 업력이 긴 업체를 찾고 있다”고 밝혔다. A사 측은 유럽에 새로 진출해 지사를 설립하고 사람을 뽑는 데 걸리는 시간과 비용, 리스크 등을 감안하면 스몰딜을 통한 시장 진출이 더 효과적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기업들이 신사업에 진출하거나 시장 확대를 위해 스몰 M&A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흔히 스몰딜로도 불리는 소규모 인수합병의 최대 장점은 자금 부담이 크지 않다는 점이다. 시장 환경에 탄력적으로 대응하기도 용이하다. 외국계 증권사의 IB사업부 대표는 “국내외 경기 전망이 불확실한 상태에서 과도한 차입이 승자의 저주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로 대형 M&A보다는 소규모 합병이 늘어나는 추세다. 최근에는 유럽, 일본 등의 소규모 기업을 두고 국내 기업들이 경쟁하는 양상도 나타나고 있다”면서 소규모 합병에 나서는 기업이 늘 것으로 전망했다.
조 단위 빅딜 대신 스몰딜 열풍
인수 후 합병 작업· 낮은 리스크 최대 장점
국내외 안 가리고 기술력 갖춘 中企 잡아라
지난 4월 글로벌 제약사 GSK와 노바티스는 각각 항암제와 백신사업부를 맞교환하는 데 합의했다. GSK는 노바티스로부터 백신사업부를 받아들이고 대신 노바티스는 GSK의 항암제사업부를 사들이는 게 골자다. 이를 통해 GSK는 백신에서, 노바티스는 항암제에서 더욱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계산이다.
재계에서 신성장동력을 확보하거나 기존 사업을 강화하기 위해 아니면 핵심 역량에서의 경쟁력을 더욱 높이기 위해 특정 분야에서 기술력을 가진 국내외 중소기업을 인수하는 수백억원 안팎의 스몰 M&A가 트렌드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지난 8월 SK그룹은 계열사인 SK텔레콤을 통해 음향기기 업체 아이리버를 인수했다. SK 측은 아이리버의 음향기기 제조와 고음질 오디오 관련 노하우를 통해 앱세서리(모바일앱+액세서리) 사업 등에 진출할 계획이라고 인수의 변을 밝혔다. 인수 금액은 약 300억원. LG는 반도체 시스템설계 업체인 실리콘웍스 지분 20%를 취득, 최대 주주에 오르면서 역시 계열 편입시켰다. 두산은 연료전지를 생산해 판매하던 퓨얼셀파워를 흡수합병했다.
대기업뿐이 아니다. 자동차에어컨과 히터 시스템 전문기업 한라비스테온공조는 일본 자동차 공조 회사인 JCS 중국 난징법인 지분 51%를 인수한다고 밝혔다. 인수금액은 약 66억원(약 640만달러)이다. 췌장암 치료제로 알려진 젬백스앤카엘은 바이오 사업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삼성제약 지분 16.1%를 120억원에 인수했다.
삼일회계법인 한 파트너는 “스몰딜의 명확한 정의는 없지만 흔히 국내외 중소·중견기업을 1000억원대 이하의 가격에 인수하는 것을 말한다. 최근 공시가 되지 않은 비상장사나 계열사 내에서 사업 조정을 목적으로 한 지분 이동 등을 고려하면 최소 한 달에 한 건 이상 스몰딜이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기업들이 소규모 M&A에 나서는 이유는 자금 때문이다.
대기업의 성공한 스몰딜의 경우 인수 자금이 작게는 수십억원에서 많아야 2000억~3000억원을 넘어서지 않는다.
스몰딜은 ‘승자의 저주’에서도 자유롭다. 대규모 인수합병은 단번에 기업 규모를 키울 수 있지만, 인수 시 질 수밖에 없는 부채가 큰 부담이다. 과거 금호아시아나 그룹이 대운건설과 대한통운 인수에는 성공했지만 결국 핵심 계열사가 워크아웃에 들어간 게 대표적 사례다.
무엇보다 최근 기술력을 갖춘 알찬 중소기업들이 적지 않다는 점 역시 스몰딜이 늘어나는 배경 중 하나다. 이들의 기술을 저렴한 비용으로 확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해외 시장 진출도 용이하게 만들 수 있다.
삼성전자가 최근 미국 사물인터넷(IoT) 개방형 플랫폼 개발회사인 ‘스마트싱스(SmartThings)’를 인수한 게 대표적이다. 2012년 설립된 스마트싱스는 여러 가전제품이 원활하게 연결될 수 있도록 하는 개방형 플랫폼을 만드는 업체다. 인수 대금은 약 2억달러(약 2000억원)로 삼성전자 입장에선 그리 큰 액수가 아니다. 삼성전자는 또한 북미에서 시스템에어컨 등 공조기기를 판매·유통하는 콰이어트사이드도 사들였다. 가격은 2400만달러(약 244억원)에 불과하지만 삼성은 이로써 북미 공조 시장에 교두보를 확보했다.
스몰 M&A는 조직 통합에도 용이하다는 평가다. 대형 기업을 인수하게 되면 인수 후 조직 통합 작업이 실패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진다. 반면 중소형 기업의 경우 인원이 적은 만큼 조직원들이 새 조직문화에 적응하기에 용이하다.
“우수한 중소기업을 인수하면 적은 비용으로 큰 효과를 누릴 수 있다. 경기에 대한 미래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에서는 소규모 M&A가 활발해질 수밖에 없다”고 전문가들이 입을 모으는 이유가 있는 셈이다.
인수 후 잘 성장시키니 주력 사업보다 빛 발하기도
시장서 저평가된 벤처 찾아 새로운 동력원 삼는다
기업이 신성장동력을 확보하는 방법은 크게 2가지다. 연구개발(R&D)을 통해 자체 육성하거나 기존 기업을 인수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시장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중소업체를 인수, 성장시켜 신사업 기틀을 마련한 성공 스토리가 적지 않다. 회사 설립, 인력·네트워크 구축까지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을 감안하면 인수하는 편이 유리할 때도 있다. 굳이 큰 기업을 인수하지 않더라도 기술력을 가진 소규모 기업을 적절한 가격에 인수한다면 변화하는 시장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모기업의 조직력과 자금력, 마케팅 능력이 더해진다면 시너지를 발휘해 신사업을 더 크게 성장시킬 수 있다.
김정열 SV어드바이저그룹 대표는 “불확실성이 높아지는 요즘엔 많은 기업들이 큰 금액을 투자하기 꺼려한다. 소규모 거래를 주시하는 기업들이 많아지면서 스몰 M&A 형태의 거래는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중견기업 스몰 M&A로 사세 확장
LS·KG·SM그룹 대표적 성공 사례
LS그룹, SM그룹, KG그룹은 M&A를 통해 신사업에 진출한 대표적인 기업들이다.
특히 국내에서 LS그룹은 스몰 M&A의 선두 주자로 꼽힌다. LS는 LG에서 분리돼 나온 지 10여년 만에 계열사 수를 11배 이상 늘렸다. 2000년대 후반부터 새 시장 진출에 적합한 원천 기술을 갖춘 기업들을 찾아 스몰 M&A를 지속해 왔다. 대상은 인수 대금 50억원부터 1000억원 미만의 다양한 중소업체들이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자체 기술력을 갖고 있지만 시장에서 저평가된 기업들이었다. ‘휘닉스M&M’을 77억원에 인수해 폐전자 부품을 활용한 희유금속 추출 산업에 진출했다. 로봇 사업 확대를 위해 ‘메트로닉스’를 88억원에, 그린빌딩 분야로 진출하면서 지능형 건물관리시스템 전문업체 ‘사우타코리아’를 5억5000만원에 사기도 했다.
LS그룹 관계자는 “우리가 가진 고유 기술을 보완하면서도 시너지를 극대화할 수 있게 기술력 있는 기업을 중심으로 인수에 나섰다”고 설명했다.
SM그룹 역시 적극적인 M&A를 통해 다양한 신규 사업에 진출한 경우다. 지난 10여년간 매출액 100억원 이상 계열사를 10여개 사들였다. 특히 우오현 SM그룹 회장의 매물을 바라보는 눈이 주효했다는 평가다. SM그룹은 당장 자금 흐름이 원활하지 않아도 그룹과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회사를 찾아내 신성장동력으로 삼았다. SM그룹은 2008년까지만 해도 1조1000억원이던 매출이 지난해 2조4900억원으로 5년 만에 2배 이상 성장했다. 적극적인 M&A가 성공한 결과다.
매출 1조원대 중견기업 KG그룹도 스몰 M&A의 강자로 꼽힌다. 2005년 ‘시화에너지’를 시작으로 2008년 택배회사 ‘옐로우캡’, 2011년 온라인 결제업체 ‘이니시스’, 휴대전화 결제업체 ‘모빌리언스’까지 끊임없이 신규 업종의 업체를 인수했다. 특히 곽재선 KG그룹 회장은 M&A 업계의 ‘미다스의 손’으로 불린다. M&A를 할 때 당시 잘되는 회사가 아니라 실적이 좀 좋지 않더라도 직접 키울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회사를 선택해 왔다.
금융 분야에서도 스몰 M&A로 신사업을 크게 성장시킨 사례가 이어진다.
2006년 자산 규모 300조원에 육박했던 농협중앙회는 약 1000억원을 주고 세종증권을 인수했다. 이후 1년 만에 농협은 세종증권을 3배 이상 키웠다. 지난 6월 말 기준으로 NH농협증권의 순자산은 8679억원. 인수 당시 약 150명 규모였던 소형 증권사 세종증권은 현재 직원 수 4000여명의 대형 증권사 NH농협증권으로 거듭났다.

최근 대기업 적극적으로 가세
두산·LG 연료전지 진출에 활용
이 같은 성공 사례가 이어지면서 최근에는 대기업들도 신성장동력 확보 차원에서 소규모 업체들을 잇달아 인수하기 시작했다.
삼성전자는 최근 M&A에 접근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이전에는 비교적 소극적이었지만, 최근 기술력 있는 작은 기업들을 잇따라 사 모으고 있다. 올해만 4개의 기업을 사들였다. 2007년부터 삼성전자는 총 22건의 M&A를 성사시켰다. 이 중 절반이 지난해 이후 진행됐다. 전문가들은 삼성전자의 이 같은 태도 변화에 대해 “신성장동력 발굴과 함께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함”이라고 입을 모은다.
두산과 LG는 연료전지라는 새로운 시장에 뛰어들기 위해 M&A 전략을 적극 활용했다.
좀 더 적극적인 곳은 두산이다. 두산은 연료전지 기업 ‘퓨얼셀파워’ 외에 ‘클리어에지파워’도 인수했다. 퓨얼셀파워는 독자적인 원천 기술을 바탕으로 국내 가정용 연료전지 시장의 80%를 점유하고 있다. 클리어에지파워는 건물용 연료전지 기술을 보유한 미국 기업으로 두산은 3240만달러를 들여 인수했다.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은 “연료전지 사업을 두산의 주력 사업으로 키워 나가겠다”며 의지를 밝혔다. 이번 M&A를 통해 연료전지 사업 확대를 위한 첫 단추를 끼운 셈이다.
연료전지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LG도 마찬가지다. 2012년 LG는 영국 롤스로이스 계열사로 발전용 연료전지 원천 기술을 보유한 ‘퓨얼셀시스템즈’ 지분 51%를 4500만달러(약 520억원)에 인수했다. 인수 후 ‘LG퓨얼셀시스템즈’로 이름을 바꿨다. LG는 내년부터 연료전지 시장에 본격 뛰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그 밖에도 LG그룹은 수처리 필터 사업을 그룹 차세대 성장엔진으로 육성하기 위해 M&A를 활용했다. LG화학은 올해 초 미국 수처리 필터업체 ‘NanoH2O’를 2억달러에 인수했다.
화학 분야는 최근 M&A가 활발히 진행되는 곳이다. 특히 미래 소재 부문은 많은 기업들이 군침을 흘리고 있다.
M&A로 새 판 짜는 중소기업
리노스, 인수 후 매출 10배 키워
스몰 M&A로 새 사업지도를 짜는 데 성공한 중소업체들도 있다. 디지털방송에서 패션 기업으로, 최근에는 바이오 업체까지 인수하며 회사를 성장시킨 코스닥 기업 ‘리노스’다. 2003년 디지털방송 전환이 완료되며 시장이 포화 상태가 됐고 리노스는 완전히 새로운 사업에 과감히 도전했다. 당시 가방 브랜드 키플링 판권을 보유한 회사를 약 15억원을 주고 인수한 것. 그 후 10년 만에 키플링 사업 매출은 10배가량 뛰어 올해 700억원을 바라본다. 올해 리노스는 드림씨아이에스를 인수하면서 바이오 시장에도 진출했다.
양영석 한밭대 창업경영대학원 교수는 “리노스는 시장과 산업 트렌드를 제대로 파악했다. 실제 구매 행위를 일으키는 유효 수요를 확인한 뒤 M&A를 감행해 성공한 사례”라고 분석했다.
반도체 부품업체였지만 노르웨이의 조그만 신약 개발업체 ‘젬백스’를 인수한 코스닥업체 젬백스(옛 ‘카엘’)도 비슷한 경우다. 젬벡스의 연매출이 약 600억~700억원 수준이지만 시가총액이 한때 1조원을 넘길 정도로 주목받았다. 췌장암 치료제를 만드는 데 쓰이는 물질 ‘GV1001’ 덕분이다. 신사업이 기존 주력 사업보다 더 빛을 발한 것이다.
물론 기술력을 있는 중소기업을 인수한다고 해서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실패 사례가 더 많다. KT&G는 과거 인수를 통해 계열사들을 크게 늘리며 사업 다각화를 한창 진행했다. 2011년에는 화장품 진출을 선언하며 소망화장품을 인수했지만 4년째 실적 부진을 면치 못하는 등 조그만 계열사들의 실적이 개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강승태 기자 kangst@mk.co.kr, 서은내 기자 thanku@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777호(10.08~10.14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