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아]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가 8월 26일 펴낸 ‘김우중과의 대화 : 아직도 세상은 넓고 할일은 많다’는 대화체로 구성한 역사서이자 경영서다. 신흥국에서 탄생한 최대 다국적기업 대우의 흥망을 그 총수이던 김우중 전 회장의 입을 빌려 서술했다.
1999년 대우그룹 해체는 당시 세계 역사상 최대 규모 기업의 파산으로 기록됐다. 개발도상국에서 태어나 세계로 나아간 이 다국적기업은 1997년 동아시아를 타격한 금융위기 와중에 몰락했다.
“Catch-Up 실행가와 해석가”
9월 2일 서울 중구 한국금융연구원에서 만난 신 교수는 ‘정사(正史)’와 ‘야사(野史)’라는 낱말을 사용하면서 대우의 몰락과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를 설명했다. “야사와 정사가 뒤바뀌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외환위기 이전까지는 내 견해가 정사였는데 지금은 야사다. 성장동력을 되찾으려면 정사와 야사가 원래 위치로 되돌아가야 한다.”
‘김우중과의 대화’는 발간되자마자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김 전 회장이 15년 침묵을 깨고 목소리를 내서다. 언론은 “무리한 확장 경영으로 부채가 늘어나 시장에 의해 무너졌다”와 “다른 처방을 제시하면서 관료에게 맞서다 본보기로 해체됐다”는 주장의 대립에 주목했다. 신 교수는 “책의 초점이 조명받지 못한다”며 안타까워했다. 한국 경제의 방향과 관련한 중요한 논쟁을 담았는데 그에 대한 논의가 거의 없는 게 아쉽다는 뜻이다.
지난 일을 회고할 때 잘한 일은 허용되는 범위에서 돋보이게 말하고, 잘못한 일은 말하지 않거나 합리화하는 게 사람 심리다. 김 전 회장도 비슷했을 것으로 보인다. 대화와 자료를 취사선택해 책으로 엮은 사람 또한 정보를 처리해 결과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자신의 소신이나 믿음을 투영하게 마련이다.
경제학자로서 저자의 성향을 파악하면 ‘김우중과의 대화’의 행간을 더욱 수월하게 읽을 수 있다. 신 교수는 주류 경제학(신고전학파)에서 비켜선 학자다. ‘보이지 않는 손’(자유시장)보다 산업정책, 산업금융 같은 국가와 민간의 협력을 강조한다.
신 교수는 한국 경제가 선진국을 ‘캐치업(Catch-Up·따라잡기)’하는 과정을 20세기 후반의 일본, 19세기 후반의 유럽과 비교한 연구로 학자로서의 이름을 알렸다. 한국의 반도체·철강산업을 틀로 삼아 제도와 기술이 캐치업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고찰하기도 했다.
그는 ‘김우중과의 대화’를 ‘캐치업의 실행가(Practitioner of catch-up)’와 ‘캐치업의 해석가(Interpreter of catch-up)’의 만남으로 규정했다. 그에게 김 전 회장은 한강의 기적을 이룬 창업 1세대의 한 명이면서 “세계를 경영한 민족주의자”지만, 많은 사람에게 경제적 피해를 안긴 중범죄인이기도 하다. 2006년 법원은 분식회계 등의 혐의로 김 전 회장에게 징역 8년6개월과 추징금 17조9253억 원을 선고했다. 그룹 해체 후 대우 계열사에 공적자금으로 투입한 국민 세금이 30조 원에 달한다. ‘김우중과의 대화’에 담긴 시각이 논쟁적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비주류 경제학자’의 김우중論
▼ 세계 경제학계에서 비주류다.
“비주류? 맞다. 비주류라 하지 말고 혁신적 경제학자라고 해달라. 비주류가 혁신적일 수 있다.”
신 교수는 학자로서의 성향이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와 비슷하다. 2002년 장 교수와 함께 ‘Restructuring Korea Inc.’(2002, ‘주식회사 한국의 구조조정’)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한 적도 있다.
“‘Restructuring Korea Inc.’에서 가장 잘못된 구조조정 사례로 꼽은 것이 대우차였다. 한국 경제가 IMF(국제통화기금)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구조조정을 완수했다는 주장이 지금껏 정사의 위치에 있다. 나는 1998년부터 일관되게 IMF 프로그램을 비판해왔다. 한국의 저성장과 양극화는 모두 당시 잘못된 구조조정의 산물이다. 우리는 ‘Restructuring Korea Inc.’를 쓰면서 저성장 시대가 오리라 예측했다. 경제학자로서 예측이 들어맞은 데 자부심을 느끼지만, 한국 경제가 나빠진 것이 안타깝다. 더 늦기 전에 경제 발전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신 교수(80학번)는 장 교수(82학번)의 서울대 경제학과 2년 선배다. 신 교수가 2학년을 마치고 입대해 두 사람은 3, 4학년을 함께 다녔다. 신 교수는 대학을 졸업하고 ‘매일경제’에 입사해 14년 동안 기자, 논설위원으로 일했다.
“1998~99년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해외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비판한 사람이 장 교수라면 국내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비판한 사람이 ‘매일경제’ 논설위원이던 나다. 경제학계에서 나와 생각이 가장 비슷한 경제학자가 장하준이다. 1999년 유학을 떠나면서 학교를 결정할 때 장 교수에게 조언을 청했다. 장 교수는 박사학위를 받기 전인데도 능력을 인정받아 교수로 발탁됐다. 장 교수가 케임브리지대 교수로서 처음 가르친 학생이 나다. 선배에서 후배도 아니고 제자로 두 단계 강등된 셈이다. ‘한국 경제의 문제점은 크지 않았다. IMF 구조조정이 잘못됐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영국과 싱가포르에서 함께 책을 쓸 수 있었던 까닭이다.”
장 교수가 쓴 책과 관련한 영미권 서평에서 ‘provocative(도발적인)’ ‘contrarian(이단적인)’ 같은 단어를 찾아볼 수 있다. 주류 경제학을 비판한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23 things that they don’t tell you about Capitalism)’는 ‘(주류 경제학 탓에) 세계경제는 만신창이가 되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1999년 대우車, 2009년 GM
신 교수는 1998년부터 한국의 관료들이 IMF 프로그램에 따라 구조조정을 잘못하면서 한국 경제가 망가졌다고 여긴다. ‘김우중과의 대화’는 대우그룹과 GM을 비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책의 첫 대목을 요약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신흥국 출신 세계 최대 다국적기업으로 떠오른 대우그룹은 1997년부터 벌어진 아시아 금융위기 소용돌이 속에서 몰락했다. 당시 한국 정부는 대우가 신흥시장에서 적극적으로 벌인 자동차 투자를 부실로 단정하고 유동성을 지원해 살리기보다 대우그룹을 해체하는 길을 택했다. 반면 세계 최대 자동차회사인 GM은 2008년부터 시작된 세계 금융위기 와중에 도산 위기를 맞았지만 2009년 미국 정부가 인수하고 유동성을 무제한 공급해줬다. GM은 이 과정에서 ‘정부자동차회사(Government Motors)’라는 오명을 얻었지만 불과 4년 만에 회생했다. 정부도 투입자금의 80%가량을 회수했다.”
신 교수는 9월 2일 인터뷰에서 이렇게 부연했다.
“미국은 2008년 금융위기 때 한국과 정반대로 했다. 한국은 금리를 30%로 올렸는데, 미국은 0% 가까이로 낮췄다. 양적완화에도 나섰다. 대마(大馬)는 불사(不死)했다. 정부 돈이 들어간 GM, 씨티은행, AIG 등의 경영진도 바뀌지 않았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이를 ‘더블 스탠더드(Double Standard)’라고 비판한다. 나는 그것을 싱글 스탠더드(Single Standard)라고 규정한다. 잣대가 ‘선진국의 이익’ 단 하나이기 때문이다. 신흥국이 금융위기를 겪으면 구조조정을 강요해 헐값에 자산을 매입하고, 자신들이 금융위기를 겪으면 정부가 지원해 기업을 살린다.”
외환위기 때 한국에 요구한 프로그램대로라면 GM도 대우차처럼 정리됐어야 한다는 것.
“이헌재(김대중 정부 때 금융감독원 원장, 재정경제부 장관), 강봉균(김대중 정부 때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재정경제부 장관) 때려잡자고 책을 낸 게 아니다. 대우가 타살이냐, 자살이냐는 논쟁만 보도됐는데, 해체 15년 후 과거 일을 하소연하는 것에 누가 관심을 갖겠나. 경제 관료들이 대우를 죽일 의도가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것은 한국 경제와 관련해 극히 일부분의 얘기다. 금융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와 관련해 관료들과 김 전 회장의 철학이 완전히 달랐고, 해법을 놓고 대결했으며, 결과적으로 누구 말이 옳았는지가 중요하다.”
▼ 김 전 회장을 어떻게 만났나.
“2010년 여름 김 전 회장 측근에게서 전화가 왔다. 김 전 회장이 내가 쓴 책, 칼럼을 흥미롭게 읽는다면서 한번 만나보고 싶어 한다고 했다. 캐치업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유일하게 생존한 창업 1세대 아닌가. 이틀에 걸쳐 15시간 동안 대화했는데, 살면서 한 사람과 그렇게 집중적으로 얘기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두 사람이 경제 발전 과정과 국제금융시장을 들여다보는 시각이 비슷했다. ‘선진국 하는 짓을 봐라, 속아서 당한 것’이라고 일관되게 비판해왔는데, 김 전 회장의 생각도 유사했다. 그후 서울, 하노이 등에서 20차례 넘게 만나 150시간 넘게 대화했다. 대화 내용을 책으로 내기로 합의한 뒤 방향과 관련한 의견 다툼이 생겨 접기로 한 적도 있다.”
▼ 대우는 세계경영을 모토로 과도한 확장 투자를 벌이다 부실이 쌓여 몰락했다는 게, 신 교수 표현대로라면 정사(正史)다.
“외환위기 이후의 한국만큼 부채를 줄이고, 다각화를 없애고, 공정거래법을 강화한 나라가 없다. 선진국을 캐치업하려면 부채가 생길 수밖에 없다. 자본이 축적된 선진국과 상황이 다르다. 빠르게 성장해 선진국을 따라잡으려면 빚을 내야 한다. 부채 비율이 결코 높은 수준이 아니었다. 프랑스, 이탈리아 기업의 부채 비율이 1980년대 후반 360%가량이었다. 외환위기 당시 한국이 그와 비슷했다. 이헌재 씨는 200% 이하로 부채 비율을 낮출 것을 요구했는데, 나는 그 정책을 ‘IMF 플러스’라고 부른다. 당시 일본 기업의 부채비율이 200% 수준이었는데, 1년 반 만에 일본 수준으로 부채 비율을 낮추라는 건 그 사이에 일본만큼 선진국이 되라는 것과 똑같은 얘기다.
1998년 상반기 30대 그룹 중 16개가 도산했다. 흑자부도가 많았다. 힘없는 기업은 바로 쓰러졌다. 대우는 그나마 신용이 있어 단자회사에서 자금을 조달해 버텨갔다. 한국은 외채를 조달해 정부가 산업금융을 통해 민족기업을 육성하는 방식으로 경제를 발전시켰다. 그게 우리의 경쟁력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캐치업을 할 수 없었다. 부채비율을 200%로 낮추라니까 자산을 헐값에 내다팔지 않았나. 2008년 GM의 사례에서 보듯 선진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부가 기업에 돈을 더 지원했다.”
후발국의 불균형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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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6일 서울 영등포구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대우특별포럼에 참석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인사말 도중 눈물을 흘렸다. 그는 “대우의 공과를 평가해달라”고 말했다.
▼ 축적된 자본을 대기업에 몰아준 불균형 성장전략과 그로 인한 방만한 확장 경영이 한계에 다다랐던 건 아닌가.
“세계 어디에도 ‘균형 성장’을 한 나라가 없다. 후발국은 불균형 성장을 해야만 캐치업이 가능하다. 또한 기업이 여러 분야에 동시 투자해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
▼ 그래도 1990년대 중반은 불균형 성장 모델을 버려야 할 시기가 아니었을까.
“재벌이 불균형 성장으로 컸는데, 그 과정에서 중소기업이 다 죽었나? 일본과 비교하면 중소기업 성장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었다. 일본이 성장할 때는 주변에 부품을 조달할 곳이 없으니 직접 다 해야 했다. 한국은 사정이 달랐다. 선발주자인 일본이 존재하는 상황이라 조립 생산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부품을 들여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정사와 야사가 바뀌었다는 주장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
“정부와 민간이 협력해 수출 주도 공업화로 경제 발전에 성공했다는 것이 외환위기 이전의 정사였다. 내수 시장에서 뭘 해보려고 했다면 중남미처럼 됐으리라는 설명이 따라붙었다. 그런데 외환위기 이후에는 정부와 민간의 협력을 정경유착, 부패로 간주했으며 그 탓에 부채 관리를 제대로 안 해 부실이 쌓였고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정사가 됐다. 관료들이 새 정사에 따라 IMF 프로그램보다 한발 더 나간 IMF 플러스 경제 정책을 짰다.
이 이론은 그에 앞선 한국 경제의 기적을 설명하지 못한다. 구조적 문제가 있었다면 어떻게 경제 기적을 이뤘겠나. 뒤도 설명하지 못한다. 1998년 이후의 대처가 옳았다면 그다음에 경제가 좋아져야 하는데 오히려 저성장에 빠졌다. 구조조정론이 가장 힘이 셌을 때 구조조정을 등한시한다는 이유로 망한 대표적인 한국 기업이 대우다. 결국 대우차는 GM에 거의 공짜로 넘어갔다. 그로 인해 한국은 IMF에서 빌린 돈과 비슷한 규모인 210억 달러 이상의 손실을 봤다. 대우차 투자의 열매는 GM이 다 가져갔다.”
그는 GM이 중국에서 성공한 과정을 다룬 마이클 던의 책 ‘미국 바퀴, 중국 도로’의 한 대목을 소개했다.
‘상하이GM의 성공에는 GM대우가 큰 도움이 됐다. 한국에서 개발한 뷰익 엑셀은 중국 시장에서 상하이GM 매출의 70%를 차지했다. 중국에서 4년 이상 근무한 GM의 한 임원은 ‘GM대우 인수가 없었다면 상하이GM이 이렇게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확인해줬다.’
신 교수의 주장을 더 들어보자.
“대우차가 공짜나 다름없이 GM에 넘어간 스토리는 한국 경제의 비극이다. 대우차는 신흥시장을 보고 선(先)투자를 했다. 대우는 1978년 GM과 합작해 자동차 사업을 시작했는데, GM은 한국을 내수 하청 기지로만 봤다. 대우 쪽에서 돈을 더 투자해 수출용인 르망을 제작했는데 GM이 미국에서 잘 안 팔아줬다. 김 전 회장은 대우조선에서 티코를 만들어 성공한 것에 자신감을 얻었고, 1992년 GM과 결별했다. 김 전 회장은 티코를 제작하면서 50만 대를 생산하면 단가가 반으로 줄어든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4~5개 차종 도합 200만 대 생산 규모를 갖춰야 규모의 경제를 이룰 수 있었기에 선투자에 나섰다. 라노스, 누비라, 레간자 세 가지모델을 갖추고 막 팔기 시작할 때 외환위기가 닥쳤다.
외환위기 때도 대우차 임원들은 돈벼락 맞을 일만 남았다고 여겼다. 환율이 달러당 800원대에서 1600원대로 치솟으면서 쾌재를 불렀다. 1998년 남미, 동유럽에선 대우차가 점유율 1위를 기록한 국가도 있다. 품질이 떨어진다는 비판에도 가격 대비 경쟁력을 갖췄던 것이다. 현대차, 기아차가 외환위기 이후 성장한 것을 보라. 결국 대우차의 투자로 떼돈을 번 건 GM이었다. 자산을 빨리 팔아 외국 자본을 유치하는 게 애국하는 것이라는 얘기는 지금 되돌아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한국GM은 현재 내수 시장만을 겨냥한 하청 기지로 전락하지 않았나.”
▼ 김 전 회장이 김대중(DJ) 전 대통령을 원망하나.
“끝까지 DJ는 아니란다. 늘 DJ를 변호한다. DJ는 김 전 회장과 관료들의 180도 다른 의견을 모두 경청했던 것 같다.”
신 교수는 1998년 5월 김 전 회장이 사법연수원생을 상대로 강연한 자료를 인용하면서 설명을 이어갔다. 당시 강연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늘 DJ를 변호했다”
‘지금 IMF 체제가 형식상으로는 국제 금융기관이 우리나라를 돕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면에서 얘기하면 돕는 것이 아니라 관리체제로 바꿔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체제가 오래가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없다. (…) 지금은 대기업만 없으면 IMF 체제도 안 왔을 것이라는 인식이 있다. 내가 보기에는 경쟁하기 골치 아프니까 (한국) 대기업을 없애자는 게 선진국 기업의 생각인 것 같다. 지금 IMF와 선진국이 계속해서 얘기하는 것은 우리나라 대기업을 줄이라는 것이다. 선진국이 바라는 쪽으로 만들어진 이론이라고 본다.’
장하준 교수식 표현으로 하면 선진국들이 ‘사다리 걷어차기’에 나섰다고 김 전 회장이 인식한 것이다.
“김 전 회장은 구조조정을 선진국이 원하는 것을 더 받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봤다. 이 강연은 대우의 유동성 위기 이전에 한 것으로 김 전 회장이 자신감이 넘칠 때다. ‘한국에 생산시설이 1조 달러 축적돼 있다. 아시아만 경제위기일 뿐 세계경제는 괜찮다. 환율이 이 정도면 매년 500억 달러 흑자가 가능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매년 500억 달러 무역흑자 달성을 통한 2년 내 IMF 체제 조기탈출론’이 그것이다. 그는 또 ‘일을 안 한다, IMF가 하라는 대로만 한다, 능력 없으면 물러나야 한다’면서 관료들을 비판했다. 1998년 한국의 무역흑자가 416억 달러였는데 그중 대우가 낸 무역흑자가 3분의 1인 143억 달러다. 연초 정부의 무역수지 흑자 예상치는 28억 달러였다. 결과적으로 누구의 얘기가 맞았는가.”
▼ 김 전 회장의 해법이 옳았다고 가정하더라도 관료들 또한 나라가 잘되라고 정책을 수립했을 것이다.
“김 전 회장이 개척한 곳은 신흥시장이다. 러시아, 중남미, 아프리카 등 금융위기가 빈발한 곳이다. IMF 프로그램을 도입하면 어떻게 되는지 피부로 체험했다. DJ는 양쪽 얘기를 다 들어보려고 했다. 김우중 1인이 사실상 경제관료 전체와 대립했다. DJ는 김 전 회장을 편들기도 했다.
당시 관료들이 한국 경제를 망치려고 그러진 않았을 것이다. 자기들 주장이 국가를 위해 옳은 것이라고 믿고 싸운 것으로 본다. 아주 선의로 해석하면 구조조정이 외길이라고 믿었고, 그와 다른 방향으로 가는 대우를 몰아세워 시장에 경고를 주려 한 것 같다. 수출금융에 숨통을 틔워주지 않고, 대우를 상대로 단자 조달 규제, 회사채 규제를 차례로 시행했다. 대우 쪽에서는 ‘미운털이 박혔으니 본보기를 보여주려고 기획 해체한 것’이라고 여긴다. 관료들이 DJ에게 대우의 부채가 늘어난 것과 관련해 허위보고를 하기도 했다. 알면서 그랬다면 기획 해체이고 몰랐다면 무능한 것이다.
신념에 따라 애국한 것이겠지만, 삐딱하게 보면 매국노 노릇을 한 것이다. 한국의 자산이 헐값에 외국으로 넘어갔고 저성장이 이어졌다. 대우의 다른 계열사들은 워크아웃해 살렸는데, 대우차는 GM이 가져가서 큰 성공을 거둔다. 김 전 회장은 대기업이 투자를 계속했으면 오래 전에 1인당 소득 3만~4만 달러가 됐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외환위기 이후 글로벌 스탠더드를 따라야 한다는 게 정설로 대두됐고, 실제로 그렇게 하면서 더는 캐치업을 못하고 선진국과 똑같이 저성장하게 된 것이다. 저성장, 양극화가 계속되는 것은 당시의 잘못된 처방 때문이다. 제조업 기반이 그때 많이 약화됐다. 금융 역시 산업금융이 아닌 가계금융에 치중하게 됐다.”
김대중, 북한, 정치경제학
▼ 관료들이 대우를 기획 해체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설득력이 약하지 않나. 당시엔 정부가 대우를 도울 여력도 없었던 것 같고.
“대우차와 대우차에 투자한 ㈜대우 외의 다른 회사는 문제가 없었다. 대우차의 수출금융이 막힌 것이 핵심인데, 1998년 상반기에 수출금융을 안 해준 것은 못 해줬다고 볼 수도 있으나 하반기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어쩔 수 없이 못 도와줬느냐, 기획 해체냐의 결론은 유보적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 거짓말하는 것이다. 앞으로 밝혀내야 한다. 어떻게 정부 관료들이 그럴 수 있었겠느냐는 질문에는 ‘세상에 많은 일이 상식과 어긋나게 벌어진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 당시 사정을 잘 아는 DJ가 세상을 떴으니 김 전 회장이 뒤늦게 임의대로 주장하는 건 아닌가.
“DJ가 살아 있어도 팩트는 똑같다. 1998년 11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해 ‘5대 그룹 개혁이 부진하다’고 DJ에게 직접 언급한다. 미국, 북한과 관련한 DJ의 정치경제학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햇볕정책이 잘되려면 미국의 지원이 필요했다.”
▼ 더 나아가 노벨상 수상 같은 바람과….
“노벨상까지는 아니더라도 남북문제와 관련한 어떤 개연성이 있었다고 본다. 금융위기를 어느 정도 해결한 상황에서 DJ가 치적으로 삼고자 한 것은 남북관계였다. 관료들의 얘기를 듣고 ‘김우중이 나를 속였나?’ 하고 여겼을 수도 있다.”
김 전 회장은 “어떻게 파렴치한 잡범이랑 나를 같이 취급하느냐”고 신 교수에게 한탄했다고 한다. “DJ가 있을 때 한국에 돌아와 제대로 얘기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고도 했다고 한다.
▼ 천문학적 규모의 분식회계가 있었다. 대우차 회사채에 투자한 개인이 입은 손실도 엄청났다.
“대우의 해외 네트워크에서도 손해 본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나. 김 전 회장은 근본적인 잘못이 자신이 아니라 정부 정책과 국제 환경에 있었다고 여기는 터라 미안해하면서도 답답해한다. 23조 원의 추징금은 징벌적인 것이라고 법원이 선고하면서 밝혔다. 개인적으로 이득을 취한 것이 아닌데 징벌적으로 추징한다고.”
▼ 외환위기 때 한국은 어떻게 했어야 한다고 보나.
“모라토리엄(채무지불유예)을 선언하고 부채를 조정하는 게 나았다. 금융위기의 책임이 한국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국제금융시장이 부담을 나눠 져야 했다.”
▼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모델’은 어떻게 평가하나.
“자본통제를 통해 돈이 갑자기 빠져나가는 것을 막은 말레이시아의 선택이 옳았다. 스티글리츠 교수의 말을 빌리면 구조조정은 앉아 있는 사람 의자를 갑자기 뺀 후 수술 받으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마하티르 전 말레이시아 총리는 올해 6월 한국을 방문해 “돌이켜보면 외환위기 당시 우리가 선택한 정책이 옳았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터지니 당시 우리가 썼던 정책을 미국이 따라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고 회고했다.
▼ 외환위기 이후 주주자본주의가 주목받았다.
“김 전 회장이 GE의 잭 웰치를 두고 그런 사람을 어떻게 경영인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힐난하더라. 사람 잘라서 일시적으로 수익 올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고려대 장하성 교수가 주주자본주의를 강조하는데, 사촌인 장하준 교수와 그 부분을 놓고 논쟁한 적도 있다더라. 외환위기 때 ‘정리해고 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 유일한 재벌 총수가 김우중이다. 한국이 캐치업에 성공한 것은 김우중 같은 기업인이 국가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기업을 운영했기 때문이다.”
“추징금 피하려 책 냈느냐고?”
▼ 김 전 회장의 꿈이 대통령이었다고….
“그 얘기는 안 하는 게 좋겠다. 꿈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구체적인 액션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내가 언급할 사안이 아니다.”
▼ 김 전 회장은 책 출간 이후 언론보도를 챙겨 보나.
“신문을 열심히 읽는다. 지금도 10개국 이상의 환율을 매일 확인한다. 반응을 주의 깊게 보는 편이다. 언론이 ‘기획 해체냐’ ‘그렇지 않으냐’에만 주목하면서 나와 김 전 회장이 책에 담은 건설적 메시지가 잘 알려지지 않았다.”
▼ 추징금을 모면해보려고 책을 낸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더라.
(김 전 회장은 부인과 자녀 명의로 국내외에 상당한 재산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납부한 추징금은 법원이 부과한 액수의 0.5% 수준이다.)
“모면할 수도 없는 금액이다. 사실은 지난해 여름 책이 완성됐다. ‘전두환법’이 이슈일 때다. 김 전 회장이 전두환과 엮이기 싫다면서 발간을 미루자고 했다. 나는 그냥 내자고 했다. 지금 책을 내야 오히려 오해를 덜 받는다고 말했다. 나야 거리낄 게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지만 김 전 회장은 가족의 재산이 걸렸다. 가족 재산은 대우가 망하기 전 증여한 것으로 판결이 났다.”
▼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주류 경제학에 비판적인 인사들의 주장이 과거보다 힘을 얻었다.
“우리의 주장이 입증됐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사람이 아직은 아니라고 말한다. 세(勢)가 커지는 상황이라고 하겠다. 역전이 되면 좋겠다.”
▼ 사람의 기억은 본인에게 유리한 쪽으로 왜곡되기도 한다.
“어떤 책이든 주관적이다. 대화체를 선택한 이유는 15년 동안 김 전 회장의 반대 쪽 사람들 얘기는 수없이 반복됐는데, 대우 쪽 견해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 한국 경제가 어떻게 바뀌면 지금보다 나아지리라고 보나.
“경제성장의 기본은 투자다. 기업의 투자를 북돋우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금융이 밀어줘야 하는데 산업금융이 약화했다. 산업금융을 키워야 한다. 과거처럼 정부가 은행에 압력을 행사해 기업에 대출하라고 하지는 못한다. 산업은행 같은 곳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 그런데 앞선 정부에선 산업은행마저 민영화하려 했다. 산업금융을 늘리는 은행에 인센티브를 줘야 한다.”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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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 |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4세' 출신 의사
김 세르게이 분당서울대병원 교수[ 이준혁 기자 ]
경기 성남시 분당구 분당서울대병원 2층에 있는 40㎡ 규모의 국제진료센터 진료실. 김 세르게이 교수(44·국제진료과)가 외국인 환자들을 맞는 진료실이다.
지난 22일 이곳에서 만난 김 교수의 인상은 ‘한국의 평범한 청년’이었다. 40대 중반이지만 훨씬 젊어 보였다. 한국어도 유창했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가 섞여 들릴 정도로 그의 말은 친근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난 ‘고려인 4세’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조금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머니 죽음 계기로 의대 입학
신일희 계명대 총장 통역 맡은 인연…한국서 석·박사 공부할 기회 얻어
연구원 생활 10년 하다 병원 복귀
러시아어·카자흐스탄어·영어 능통…분당서울대병원서 외국인 환자 전담
2010년 한국 국적 취득
고려인은 돌아오지 못한 한국의 자산…배려할 수 있는 의료프로그램 필요분당서울대병원을 찾은 외국인 환자는 지난해 5000여명이었다. 낯선 땅에 병을 고치러 온 외국인들에게 김 교수는 ‘환자 제일주의(第一主義)’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환자가 원하는 것이라면 다 해주겠다는 마음으로 일합니다. 항상 웃으려고 노력하지요. 고국(한국)에서 의사로 환자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니까요.”
분당서울대병원에 외국인 환자 전용 국제진료센터가 세워진 것은 김 교수가 이 병원에 온 지 3년쯤 지나서였다. 그가 병원에 새 바람을 불어넣고 돌풍을 일으킨 결과다. 중앙아시아 외국인 환자가 늘어난 것은 물론 외국인 의사들의 연수도 줄을 잇고 있다.
“나의 핏줄은 한국”김 교수에게 한국에 오게 된 사연을 묻자 어린 시절 어머니 말을 떠올렸다. “중학교 때 우즈베키스탄 역사책을 많이 읽었는데, 한번은 그 모습을 보신 어머니가 ‘너의 핏줄은 한국사람’이라고 말해 놀랐습니다. 그때부터 ‘내가 한국사람이구나’ 하고 깨달았죠.”
이후 김 교수는 집안의 가계도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가족사는 1870년대 프리모르스키(옛 연해·沿海)주로 이주해온 조선인 증조할아버지가 출발점이다. 그 뒤 할머니, 아버지, 자신에게로 고려인의 피가 이어졌다는 것.
김 교수에게 ‘조선 말에 연해주로 갔는데 왜 고려인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처음에는 조선인라고 했는데, 남북 분단이 되고 북한만 조선이라고 쓰면서 바뀐 것 같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모친이 뇌졸중으로 별세했을 때 장례식을 한국의 전통 방식으로 치렀다고 설명했다. 집 안방에 병풍을 치고 입관을 했다. 지붕에 올라가 옷을 흔들면서 고인의 영혼을 떠나보내는 의식도 했다. 어머니의 별세를 계기로 김 교수는 의사의 길을 선택했고, 한국에 더 많이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했다.
신일희 계명대 총장과의 만남
김 교수는 러시아 명문 의대로 꼽히는 제1 레닌그라드 의과대학(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의대)에서 학사학위를 받았다. 1988년 카자흐스탄에서 레닌그라드 의대에 들어간 사람은 김 교수가 유일했다. 의대를 졸업한 뒤 1996년 인턴생활을 하던 그에게 운명적인 만남이 찾아왔다.
신일희 대구 계명대 총장이 레닌그라드 국립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게 됐는데, 현지 교회 목사의 추천으로 김 교수가 통역을 맡았다. 당시 김 교수는 신 총장의 통역 겸 비서 역할까지 했다. 신 총장은 김 교수를 마음에 들어 했다. 그의 유창한 한국어 발음과 레닌그라드 의대의 유일한 고려인이라는 점을 높이 샀다.
행사가 끝난 뒤 신 총장은 “자네 한국에 와서 공부할 생각은 없는가. 괜찮으면 우리 대학에 와서 공부해 보면 어떤가”라고 제안했다. 김 교수는 ‘인사치레’로 생각했는데, 이듬해 계명대에서 입학 서류를 보내 달라는 연락이 왔다. 김 교수는 고민 끝에 의대 대학원 석·박사과정 입학서류를 보냈다. “그 이후 몇 개월간 소식이 없어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6개월이 지난 8월쯤에 초청장을 받았습니다. 신 선생님을 통해 한국이 나를 부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한국의 병원에 연수를 온 최초의 고려인 수련의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연구원으로 외도 10년김 교수는 순환기내과 분야 박사학위(대구 계명대)를 받았지만 의사 면허 시험은 통과하지 못했다. 김 교수가 박사학위를 취득하던 해 의사국가시험이 모두 한국어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영어 위주로 준비한 김 교수는 시험에서 떨어졌다.
진료 현장에 나갈 수 없게 된 그는 2002년 한·러 합작회사인 메이미르에 연구원으로 입사했다. 그는 각종 의료기기 개발에 관한 임상과 조언 역할을 맡았다. 그러던 중 2005년 한국전기연구원(
KERI)이 러시아 국립광학연구소와 합작으로 경기 안산에 연구센터(쏘이코리아 연구개발센터)를 설립하면서 그곳으로 이직했다. 선임연구원으로 초기 암 진단기 개발팀을 총괄했다. 4년간 형광 물질을 통해 초기 암을 진단하는 기술 개발에 집중했고, 김 교수의 주도로 피부질환 진단기도 만들어냈다.
그러나 운명은 김 교수를 병원으로 다시 이끌었다. 각종 의료기기 정보를 얻기 위해 참석한 대학광역학학회에서 또 다른 인연이 맺어졌다. 2011년 당시 학회 이사였던 전상훈 분당서울대병원 기획조정실장(흉부외과 교수)과의 만남이었다. 그해 8월 카자흐스탄 보건부 차관이 분당서울대병원을 방문했을 때 전 실장은 김 교수에게 통역을 부탁했고, 행사를 마친 뒤 분당서울대병원은 새로 만드는 외국인 진료센터의 외국인 환자 진료 전담 교수로 김 교수를 데려오기로 했다. 김 교수의 의사 경험과 의학박사 학위, 한국어·러시아어·카자흐스탄어·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언어 능력을 높이 샀다.
전 실장은 “김 교수는 외국인 환자들과 상담하며 진료과를 정해주고, 일일이 치료 과정을 챙겨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가 국제진료센터 실무를 맡은 뒤 러시아, 독립국가연합(
CIS) 등에서 오는 환자들이 부쩍 많아졌다. 전 실장은 김 교수에게 상담받은 뒤 자신의 진료과로 넘어오는 외국인 환자 수가 무려 20배나 늘었다고 소개했다.
“이젠 한국이 내 집 같다”김 교수는 2010년 귀화 시험을 통해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김 교수는 “이젠 한국이 내 집 같다”고 말했다. “정말로 운이 좋아서인지 이곳에서 좋은 사람을 만났고, 험한 차별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때려치우고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은 솔직히 해본 적이 없어요. 그만큼 한국이 편하고 좋습니다. 나이가 들면 제주도에 내려가 살고 싶습니다.”
올해 초부터 러시아 모스크바시 보건국 소속 의사 250여명이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의료 연수를 받고 있다. 김 교수는 이들을 각 진료과에 배치하고 선진 의료기술을 체험하도록 돕는 도우미 역할도 맡고 있다. 고려인이자 재외동포 출신으로 한국의 동포 정책 문제점을 지적해 달라고 부탁하자 ‘포용’이라는 단어가 돌아왔다. “러시아에 있을 때 재외동포들을 모두 받아들이는 독일과 이스라엘을 부러워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고려인’이라는 말을 싫어하지만, 이 고려인들을 한국은 왜 포용하지 못할까요. 이들은 아직 돌아오지 못한 한국의 자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한국을 찾을 때 배려할 수 있는 의료 프로그램이 있었으면 합니다.”
■ 김 세르게이 교수▷1971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주 출생
▷1988년 카자흐스탄 공립고등학교(233슈콜라) 졸업
▷1994년 제1 레닌그라드 국립의대 졸업
▷2001년 대구 계명대 의대 석·박사과정 졸업
▷2002년 한·러 합작회사 메이미르 임상연구원
▷2005년 한국전기연구원(
KERI) 선임연구원
▷2010년 한국 국적 취득
▷2012년~ 분당서울대병원 국제진료센터 교수
이준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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