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술작품 감상

[스크랩] ★- 사군자 연구생이 필독해야하는 원론적 강의내용,,

구봉88 2008. 4. 8. 12:39
사군자 교실
★글:평생학습원 사군자강사,南淸,李병진
아래 모든 내용은 많이 알고있는 원론적 내용입니다,

★ 사군자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등 네 가지 식물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각 식물의 특유의 장점을 군자 즉, 덕과 학식을 갖춘 사람에 비유하여 사군자라고 부른다. 사군자라는 명칭이 생긴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명대(明代)에 이르러서이며 그 이전에는 개별적으로 기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나라에서 사군자화가 처음 그려진 시기는 고려 시대로 보고 있다. 고려 시대에 이어 조선 초기에도 사군자화가 계속 문인들 사이에 그려졌다. 중기의 사대부 화가인 이정, 오달제, 어몽룡 등은 조선 시대 묵죽, 묵매화의 양식적 전통을 수립하였다. 후기에 들어오면서 조선 시대 사군자화는 질적·양적인 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김정희와 조희룡을 정점으로 한 말기의 사군자화는 약간 수그러진 듯하나 김규진, 조석진, 이하응 등의 그림에서 새로운 구도와 필치에 의한 시대적 감각의 표현이 나타났다.



이정(李霆) 1541(중종 36)∼1622(광해군 14).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종친 사대부 묵죽화가. 자는 중섭(仲燮), 호는 탄은(灘隱). 세종의 현손으로 익주군 지(益州君枝)의 아들이다. 석양정(石陽正:正이란 이조 때 비교적 가까운 왕손에게 준 작호로 정3품 堂下에 해당함.)에 봉해졌으며, 뒤에 석양군(石陽君)으로 승격되었다. 묵죽화에 있어서 그는 유덕장(柳德章)·신위(申緯)와 함께 조선시대 3대화가로 꼽힌다. 또한, 그는 묵죽화뿐 아니라 묵란·묵매에도 조예가 깊었고,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다.

그는 임진왜란 때 적의 칼에 오른팔을 크게 다쳤으나 이를 극복하고, 회복 후에는 더욱 힘찬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조선 초기의 묵죽화들이 대개 수문(秀文)의 묵죽화와 같이 줄기가 가늘고 잎이 큰 특징을 보임에 반하여, 그의 묵죽은 줄기와 잎의 비례가 좀더 보기 좋게 어울리며, 대나무의 특징인 강인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는 특히 굵은 통죽(筒竹)을 잘 그렸는데, 통죽의 굵은 입체감을 두드러지게 표현하였다. 즉, 통죽의 마디를 묘사함에 있어서 양쪽 끝이 두툼하게 강조된 호형선(弧形線)으로 마디의 하단부를 두르고, 거기에서 약간의 간격을 떼고 아랫마디를 짙은 먹으로 시작해서 점차로 흐려지게 하였다. 이 기법은 조선 후기의 여러 묵죽화가들에 의하여 널리 쓰이게 되었다. 그는 〈풍죽도〉에서 대나무의 줄기와 잎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을 정확하게 포착하여 대나무의 탄성(彈性)을 잘 나타내었다. 화면의 공간감(空間感)을 살리기 위해 짙은 먹과 흐린 먹의 구별이 뚜렷한 대나무들을 대조시켰다.

한편, 그는 묵죽화 또는 묵란화에서 토파(土坡)를 묘사함에 있어서는 당시의 산수화의 주류인 절파화풍(浙派畵風)의 영향을 받아 강한 농담(濃淡)의 대조를 많이 사용하였다.

같은 시대의 최립(崔)과 허균(許筠)은 그의 묵죽화의 자연스러움과 사실성을 칭찬하였으며, 이정구(李廷龜)는 “소동파(蘇東坡)의 신기(神氣)와 문동(文同)의 사실성을 모두 갖추었다.”고 하였다. 그가 접할 수 있었던 중국의 묵죽화는 송대(宋代)의 것보다 명대(明代)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더 많다.

따라서, 그는 소동파나 문동의 묵죽양식도 하창(夏昶)이나 또는 그 뒤를 따른 주단(朱端) 등의 명대 화가들에 의하여 변형된 것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강한 필력과 잘 잡힌 구도를 보이며, 조선 묵죽화의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기년작(記年作)으로는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소장인 검은 비단 바탕에 금니(金泥)로 그린 〈죽도 竹圖〉가 만력갑오(萬曆甲午), 즉 1594년에 해당하여 연대가 가장 이른 작품이다. 그의 만년작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우죽도 雨竹圖〉가 있으며, 여기에 천계임술(天啓壬戌), 즉 1622년의 연대가 적혀 있다. 이밖에도 낙관이 있는 묵죽화는 많이 전한다.

그가 인물화를 그렸다는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나, 그의 작품으로 전하는 〈문월도 問月圖〉 두 폭이 개인소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두 그림은 모두 절파양식을 강하게 보이는 인물화이다.

〈풍죽도〉를 그린 이정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종친 사대부 화가이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문집 등 문헌 자료를 통해서 보면 대나무 그림에 있어서는 당대의 명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문헌 자료뿐만 아니라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을 보아도 조선 시대의 제일인자로 꼽는데 주저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높은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풍죽도〉는 그의 선비다운 기개와 뚜렷한 개성을 보여 주고 있으면서 한국적인 화풍을 함께 제시하고 있어 한국 묵죽화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그림이다.

〈풍죽도〉는 세 그루의 대나무가 스산한 바람에 스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잎이 흔들리는 방향을 보아 바람이 화면의 왼쪽에서 불어오는 것 같은데, 바람을 맞아 휘는 듯 버티는 대나무의 탄성(彈性)이 절묘하게 그려져 있다. 전경의 대나무는 진한 먹색으로, 배경 역할을 하고 있는 두 그루의 대나무는 옅은 먹색으로 처리되어 있어 공간감이 살아나고 있다. 특히 대나무 잎의 묘사에 보이는 날렵하면서도 세련된 필법은 선비화가의 풍모를 여실히 보여 준다.

〈풍죽도〉는 지조라든가 절개의 상징형으로 그린 묵죽도에서 느낄 수 있는 경직성이나 근엄함 같은 것은 찾아 볼 수 없고, 선비의 기개를 느끼게 하는 단정함과 정숙함을 그리고 있다. 담묵과 농묵을 구사한 세 그루의 대나무가 창출해 내는 그윽한 공간감은 시적(詩的)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바람결에 밀리는 대나무는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의 대나무를 연상케 해준다. 대나무 잎의 묘사에 보이는 세련된 운필에는 기교를 초월한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字香)이 배어 있다. 이런 점에서 〈풍죽도〉는 선비 이정의 교양과 인품,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대자연의 섭리가 함께 용해되어 있는 참다운 문인화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표현 기법과 회화 정신

대나무 잎의 묘사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경아식(驚鴉式), 개자식(字式), 분자식(分字式) 이다. 〈풍죽도〉에서는 바람을 맞이하는 쪽의 대나무 잎은 사필경아식(四筆驚鴉式, 네 잎을 까마귀가 놀라 날개를 펴고 달아나는 모양으로 그리는 방식)을 구사하였고, 그 반대쪽 대나무 잎은 첩분자식(疊分字式, 한자의 分字를 여러 개 겹친 모양으로 그리는 방식)과 삼필개자식(三筆개字式, 개字를 풀어 쓴 방식)의 형식을 취하였다.

이처럼 대나무 잎을 그릴 때 한자의 필획을 차용하는 것은 동양화 특유의 서화일체(書畵一體)사상과 관계가 깊다. 서예가로 유명한 조맹부(趙孟)는 서화일체를 강조하면서“바위는 비백법으로, 나무는 전서체로, 대나무를 그리는 데는 반드시 팔분법(八分法), 즉 예서의 일체를 통달해야 한다. 만일 사람들이 이와 같은 것을 잘 이해한다면 서화는 원래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선의 김정희는 묵란(墨蘭), 묵죽(默竹)에 서예의 기법을 적용시킬 것을 강조하여, 예서의 획과 묵란의 획을 동일시하였고, 또한 대나무 그림에도 문인 정신의 표현인 서권기(書卷氣)를 강조하였다. 이것은 서예의 필력 자체가 쓴 사람의 인품을 반영한다는 원리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선비들이 대나무를 즐겨 소재로 삼아 그리는 데에는 대나무가 지니고 있는 상징적 의미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다른 소재도 많은데 굳이 대나무를 비롯한 사군자를 고집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대나무는 다른 식물들과 달리 사계절을 통하여 푸르름을 잃지 않으며 곧게 자라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속성을 지닌 대나무를 동양의 옛 사람들은 군자에 비유하였다. 대나무를 군자에 비유한 최초의 사례는 《시경 詩經》의 위풍(衛風)편의 기오(淇奧) 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아래에 소개하는 것은 제1절의 내용이다.



저쪽 기수 후미를 보아라 (瞻彼淇奧)

푸른 대나무는 청초하고 무성하니 (綠竹)

고아한 군자가 거기 있네 (有匪君子)

뼈와 상아를 다듬은 듯 (如切如磋)

구슬과 돌 갈고 간 듯 (如琢如磨)

정중하고 너그러운 모습이여 (瑟兮兮)

빛나고 뛰어난 모습이여 (赫兮兮)

고아한 군자가 거기 있네 (有匪君子)

결코 잊지 못하겠네 (終不可)



<기오>는 기수(淇水) 가의 대나무를 위(衛)나라 무왕의 인품에 비유하여 읊은 시로, 모두 3절로 되어 있다. 3절을 통하여 ‘비군자(匪君子)’라는 말이 다섯 번 나오는데, 모두 대나무를 의인화해서 비유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시경》 이후 대나무와 군자 사이가 가까웠던 때는 선비들의 풍류로 유명한 중국 육조 시대(六朝時代)이다. 죽림칠현들이 대나무 숲을 은거처로 삼아 군자를 자처하며 풍류를 즐긴 것이라든지, 왕희지(王羲之)의 아들 왕휘지(王徽之)가 대나무를 가리켜 “차군(此君) 없이 어찌 하루라도 지낼 수 있느냐”고 하였다는 일화가 이를 입증해 준다. 대나무에 대한 이와 같은 정서는 “내 벗이 몇인고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고 읊은 윤선도의 〈오우가 五友歌〉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선비화가들은 대나무 등 사군자를 그림에 있어서 작화 태도의 확립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그 때문에 사군자를 그리는 사람은 예술의 기법에 앞서서 문학의 교양을 필요 불가결한 것으로 여겼다. 서권기’가 바로 그것이다. 서권의 기운이 없고서는 대나무건 난초건 그 격을 상실한다고 생각하였다. 선비들은 그래서 단순한 기예(技藝)는 서권의 기를 구비하지 못한 교묘(巧妙)한 손재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문인화의 기본 정신은 인품과 화품(畵品)을 동일시하는 데에 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는 대나무 그림이 마치 아무나 손쉽게 기법을 습득해서 그릴 수 있는 화목인 것처럼 착각되고 있는 느낌이 있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볼 때 〈풍죽도〉는 오늘날 잘못된 사군자 그림의 추세에 많은 점을 깨우쳐 주는 작품이라 할 것이다.



문인화의 개념

文人畵란 직업화가가 아닌 순수한 문인의 그림. 南宗畵 또는 南宗文人畵라고도 한다. 王公貴族이나 士大夫 또는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들이 그리는 그림을 포괄적으로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림을 직업적으로 그리지 않는 순수한 문인들의 작품이기 때문에 아마추어적인 경향이 강하며, 외형적인 형태를 꼼꼼하게 그리는 工筆보다는 마음속의 사상을 표현하는 寫意에 치중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문인 특유의 문인화가 발전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문인화는 詩나 書藝와도 밀접한 연관을 가지며 발전하게 되어 詩·書·畵에 모두 뛰어난 이른바 '三絶'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문인화는 水墨과 淡彩를 즐겨 쓰는 경향이 있고 장식성보다는 그리는 사람의 인품이나 사상을 표현하는 데 주력하기 때문에 자연 格調가 중요시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중국과는 달리 문인화와 남종화가 반드시 동일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文人이 그린 그림이면 그것이 남종화법을 따른 것이든 아니든 문인화로 분류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예를 들면 조선 초기의 姜希顔은 북종화로 분류되는 南宋의 화원체 화풍이나 明代의 浙派 화풍 등을 토대로 그림을 그렸던 인물이지만, 신분이 文人이었기 때문에 문인화가로 간주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인화의 예로는 國寶 제180호로 지정된 秋史 김정희가 친 '阮堂歲寒圖'를 들 수 있겠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南宗畵法을 따라서 그린 많은 화원들을 절대로 문인화가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경우 문인화란 어떠한 화풍이나 화법을 지칭하기보다는 화가의 신분에 의거하여 부르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1)



출처 : 풍경스케치
글쓴이 : 소운 小雲 원글보기
메모 : 소운 선생님 동양화 교실-사군자의 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