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군자 그림이란 무엇인가?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소재로 하여 수묵 위주로 그려진 묵매, 묵란, 묵국, 묵죽 등을 합쳐서 四君子라 부른다. 이러한 명칭이 붙게 된 것은 수많은 식물들 중에서도 매화는 설한풍 속에서 맑은 향기와 함께 봄을 제일 먼저 알리며 피고, 난초는 깊은 산골짜기에서 홀로 은은한 향기를 퍼뜨리고, 국화는 늦가을 찬서리를 맞으면서 깨끗한 꽃을 피우고, 대나무는 추운 겨울에도 푸른 잎을 계속 유지하는 등, 그 생태적 특성이 모두 고결한 군자의 인품을 닮았기 때문이었다.
옛부터 동양인들은 덕성과 지성을 겸비한 최고의 인격자를 가리켜 군자라 불렀다. 이러한 군자적 성품은 누구나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고 찬미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당시의 知的 엘리트였던 문인 사대부들은 실현해야 할 인생의 궁극적 지표로 설정하고 적극 추천했었다.
사군자 그림은 바로 이러한 문인사대부들의 삶을 확충, 고양시키고 그 마음의 뜻을 표현하기 위한 매체로서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문인사대부들은 사군자를 사시사철 그리고 감상하면서 윤리적 규범을 함양하고 성정을 바르게 순화하고자 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신념을 나타내고자 하는 등, 사군자 그림을 자기 계발과 자기 표현의 긴요한 수단으로 애호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사군자 그림은 지식층을 중심으로 갖추어야 할 예술적 교양의 하나로 여겨지면서 시문, 서예와 함께 일상 생활화되었으며, 이러한 풍조는 시대가 내려올수록 더욱 확산되었다.
옛부터 군자에 대한 인식은 그 신분성보다는 고매한 품성에 의한 인격적 가치로서 존경되었기 때문에 사군자를 그릴 때도 대상물의 외형보다 그 자연적 본성을 나타내는 것이 더 중시되었다. 그래서 문인사대부들은 사군자의 형상 너머에 있는 정신과 뜻을 마음으로 터득하여 마치 시를 짓는 기분으로 추상적인 구도와 모든 색을 함유하고 있다는 수묵의 표현적인 붓놀림을 통해 진솔하게 그리는 경지를 높게 여겼다. 다시 말해서 사군자 그림은 외형의 단순한 재현이나 형식의 답습이 아니라 대상무이 자라고 성장하는 자연의 이치와 조화의 정신을 깊이 생각하면서 느껴진 자신의 감정과 마음의 정서와 뜻을 표출, 즉 寫意性을 통해 가치가 추구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사군자 그림은 동양화와 수묵화의 중심사상과 핵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寫意畵의 정수이면서 동양회화의 대종을 이루었던 문인화의 대표적 화목으로서 크게 성행했으며, 마음을 수양하고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매체로서 널리 다루어졌다. 이는 곧 사군자가 그림뿐 아니라 동양의 문화와 정신의 본질적 가치와 의의를 집약시킨 하나의 표상으로서 전개되어 왔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군자는 일반적으로 매,난,국,죽의 순서로 소개되는데, 이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4계절에 맞추어 배열된 것이다. 그러나 기법의 습득단계는 전통적으로 가장 단순하고 기초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난초에서부터 시작하여 대나무, 매화, 국화의 순서로 진행된다.
■매(梅)
매화는 추위를 이기고 눈 속에서 피는 강인하면서도 고귀한 운치를 그 특성으로 한다. 살을 에이는 추위 속에서도 풍기는 매화의 향기는 맑고 깨끗한 인품으로, 눈 속에서도 아름다운 자태는 봄을 알려주는 선구자적인 뜻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반드시 늦겨울 이른봄의 추위속에 피는 강건한 특성은 훌륭한 덕성을 지닌 군자의 강인한 절개와 지조 및 세속을 초월한 은일로 상징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매화를 가리켜 雪中君子, 淸香, 玉骨, 花御史, 淸客, 世外佳人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매화가 재배되고 시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매우 오래 전부터였으나 수묵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북송 때였으며 창시자는 선승인 仲仁이었다. 그는 호남성 華光寺의 주지로 문인사대부였던 蘇東坡, 黃庭 등과 교유하면서 매화를 사랑하고 이에 대한 시를 읊고 지내다가 우연히 창문으로 매화나무의 성근 그림자가 빗겨드는 것을 보고 그 소쇄한 맛이 너무 좋아 붓으로 그 형태를 따라 그리다가 墨梅三味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발생된 묵매화는 같은 禪僧인 妙高에 의해 이론적 체계화가 시도되었으며, 南宋 때에는 꽃잎의 윤곽을 그리는 圈法이 완성되기도 하였다. 묵매의 이러한 전통은 원대에 와서 王, 吳太素 등에 의해 크게 성행되었으며 구도에서 북방식인 形式보다 남방식인 貫式이 더 유행하였다. 명대부터는 화보 등의 출현으로 다소 형식화되었지만 청대에 이르러 金農등의 개성파 화가들에 의해 보다 담채가 많이 곁들어진 화사한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매화는 묵죽과 함께 고려 중기부터 그려졌으며, 조선시대에는 각 시기마다 구도와 기법을 달리하면서 독특한 양식으로 전개되었다. 조선 초, 중기에는 선비들의 기상과 밀착되어 고담한 모습으로 그려졌으며, 후기에는 문인화의 담백한 분위기가 강조되다가 말기에 이르러 趙熙龍 등에 의해 봄의 화사한 계절적 정취와 함께 보다 회화성을 짙게 나타내었다.
난초를 곡선미, 대나무를 직선미로 본다면 매화는 굴곡미에서 그 조형적 특성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매화를 그리는 데는 전통적으로 다섯 가지의 필수적인 방법(五法)이 있다. 뿌리는 서로 얽혀야 하고 대목은 괴이해야 하고 가지는 말쑥해야 하며 줄기는 강건하고 꽃은 기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36가지의 병(三十六病)이 있다 하여 한 가지라도 잘못 그리면 평가를 받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기본수련의 중요성과 함께 매화 역시 높은 경지에 들기가 어렵다는 점을 말해 주는 것으로 문제는 형식의 충실한 모방이 아니라 이를 통하여 자신의 감성과 뜻을 얼마만큼 구현시킬 수 있는가에 참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필법도 중요하지만 그 속에 담긴 정신세계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매화의 품종으로는 白梅, 紅梅, 朱梅, 時梅, 綠梅, 千葉梅, 九英梅 등이 있다. 그리고 많이 다루어졌던 화제로는 月梅, 雪中梅, 老梅, 羅浮梅, 西湖梅, 庭梅, 梅, 夜梅 등이 있다.
■난(蘭)
난초는 옛부터 깊은 골짜기에서 홀로 고고하게 향기를 품고 있는 모습이 세속의 이욕과 공명에 초연하였던 고결한 선비의 마음과 같다고 하여 ''幽谷佳人'', ''幽人'' 또는 ''香組'', ''君子香'' 등으로 불리었다. 그리고 정절과 충성심의 상징으로 찬미되기도 하였다.
난초의 상징성은 楚나라의 시인이며 충신이었던 屈原이 난의 고결한 자태를 거울로 삼았다고 읊었듯이 이미 오래 전부터 형성되었다. 그러나 난초가 그림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北宋때부터였으며, 처음에는 화조화의 일부분으로 그려지다가 米 에 의해 수묵법에 의한 독립된 화제로 다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미불은 서예에도 뛰어났던 당대 최고의 문인화가로 그의 난화에 대해 비평가들은 잎이 서로 교차하는데도 혼란치 않고 실로 희대의 奇品이라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와 같이 화조화의 배경에서 하나의 화제로 독립된 묵란을 보다 사의적으로 발전시킨 사람은 鄭思였다. 그는 南宋이 元에 망하자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면서 나라를 빼앗긴 울분을 땅을 그리지 않음으로써 뿌리가 드러난 露根蘭을 통해 토로하였다. 그의 이러한 정신과 蘭法은 一代宗師로서 후인들의 규범이 되어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원나라 때는 松雪體로 유명한 趙孟 와 雪窓등에 의해 산뜻하고 단아한 모습의 묵란이 유행되기도 하였으며, 특히 조맹부의 부인인 管道昇의 맑고 수려한 난화는 馬守貞, 表表등의 여류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쳐 이들을 ''閨秀傳神派''라 부르기도 한다.
문인화가 널리 보편화되었던 明代에 와서 묵란은 더욱 크게 성행하였고, 이러한 전통이 靑代에도 계속 이어져 보다 다양하고 개성이 넘치는 화풍으로 발전하였다. 그 중에서도 石 등의 明朝遺民畵家와 陽州八의 鄭燮 등이 특히 뛰어났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묵란은 고려 말기에 전래되어 조선 초기부터 그려지다 秋史 金正喜에 이르러 대성되었고 그 전통이 근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렇듯 묵란은 그 은은한 먹향기와 수려한 곡선미와 청초한 분위기를 통해 고결한 이념미가 역대의 뛰어난 문인화가들에 의해 계승, 발전되어 오면서 사군자 그림과 문인화의 발달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군자 그림을 배울 때 이러한 전통과 상징성을 지닌 묵란을 제일 먼저 시작하는 것은 난초의 생김새가 한자의 서체와 닮은 점이 가장 많다는 데 있다. 난엽을 그리는 것을 잎을 그린다고 하지 않고 앞을 삐친다고 하는 것도 글씨에서 삐치는 법을 쓰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김정희는, "난초를 치는 법은 隸書를 쓰는 법과 가까워서 반드시 文字香과 書卷氣가 있은 뒤에 얻을 수 있다."고 하여 이론적으로 서체훈련이 회화기술의 기초가 되고 있음을 말한 바 있다. 이 점은 묵란화가 문인묵객들이 즐겨 찾던 주제의 하나로서 시,서,화에 능한 三絶, 특히 서예에 뛰어난 사람들에 의해 주로 그려졌던 사실로도 알 수 있다.
난초의 종류는 상당히 많지만 묵란화에서는 주로 春蘭과 建蘭을 다룬다. 춘란은 草蘭, 獨頭蘭, 幽蘭이라고도 하는데, 잎의 길이가 각각 달라서 길고 짧으며 한 줄기에 한 송이의 꽃이 피는 것으로 청의 鄭板橋와 조선 말기의 김정희, 대원군 李昰應, 金應元 등이 잘 그렸다.
건란은 雄蘭, 駿河蘭, 란이라고도 했으며, 잎이 넓적하고 뻣뻣하며 곧게 올라가는데 한 줄기에 아홉 송이의 꽃이 핀다. 福建 지방이 명산지인 이 난은 청의 吳昌碩과 조선 말기의 閔泳翊이 특히 잘 그렸다.
■국(菊)
국화는 다른 꽃들이 만발하는 계절을 참으며 서리 내리는 늦가을에 그 인내와 지조를 꽃피운다. 만물이 시들고 퇴락해 가는 시절에 홀로 피어나는 이러한 국화의 모습은 현세를 외면하며 사는 품위있는 자의 모습이나 傲霜孤節한 군자를 연상케 한다.
그래서 옛부터 국화는 晩餉, 傲霜花, 鮮鮮霜中菊, 佳友, 節華, 金華 등으로 불리면서 정절과 은일의 꽃으로 알려져 왔다. 그리고 국화는 본성이 西方을 좋아하기 때문에 동쪽 울밑에 흔히 심는 것으로 되어 있어 東籬佳色이라는 별명이 생겼으며, 특히 晋나라의 유명한 전원시인이며 은사였던 陶淵明(365∼427)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면서 더욱 시인묵객들의 상탄의 대상이 되었다.
국화도 다른 사군자와 마찬가지로 北宋代부터 문인화의 성격을 띠고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묵국만을 전문으로 다룬 화가는 매우 드물었으며 靑末期에 와서 吳昌碩 등에 의해 회화성 강한 彩菊이 많이 그려졌다. 우리 나라에서도 묵국화는 그다지 성행하지 못했고 조선 말기 이후로 오히려 花畵로서 보다 많이 다루어졌다.
국화의 종류도 상당히 많지만 그 중 빛깔에서 黃菊을 으뜸으로 친다. 국화는 단독으로 그려지는 경우보다 다른 초화나 괴석과 함께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
국화 전체 모습의 운치는 꽃이 높은 것도 있고 낮은 것도 있으면서 번잡하지 말아야 하며, 잎은 상하, 좌우, 전후의 것이 서로 덮고 가리면서도 난잡하지 말아야 한다.
국화의 꽃과 꽃술은 덜 핀 것과 활짝 핀 것을 갖추어서 가지 끝이 눕든지 일어나 있든지 하여야 한다. 활짝 핀 것은 가지가 무거우므로 누워있는 것이 어울리고 덜 핀 것은 가지가 가벼울 수밖에 없으므로 끝이 올라가는 것이 제격이다. 그러나 올라간 가지는 지나치게 꼿꼿해서도 안되고 누운 것은 너무 많이 드리워서는 좋지 않다.
국화의 잎의 형태는 다섯 갈래로 갈라지고 파진 곳이 네 군데가 있어서 그리기가 어렵다. 이를 나타내는 데는 反葉法, 正葉法, 捲葉法, 折葉法 등의 네 가지 화법이 있다.
그러나 국화는 늦가을에 피는, 서리에도 오연한 꽃이다. 그러므로 섬세하고 화사한 봄철의 꽃과는 특성이 다르다. 그림이 종이 위에 이루어졌을 때 晩節을 굳게 지켜 그윽한 향기를 풍기는 국화를 대하는 느낌이 들어야 하는 것이다.
■죽(竹)
대나무는 옛부터 문인사대부들의 가장 많은 애호를 받으면서 사군자의 으뜸으로 꼽혀 온 것이다. 그것은 대나무의 변함없는 청절한 자태와 그 정취를 지조있는 선비의 묵객들이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늘 푸르고 곧고 강인한 줄기를 가진 이러한 대나무는 그래서 충신열사와 열녀의 절개에 비유되기도 하였다.
대나무가 그림의 소재로 등장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였으나 수묵화의 기법과 밀착되어 문인사대부들의 화목으로 발달시킨 사람은 북송의 蘇東波와 文同이었다. 소동파는 특히 그리고자 하는 대나무의 본성을 작가의 직관력으로 체득하여 나타낼 것을 주장한 ''中成竹論'' 을 제창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문동은 ''湖州竹派''를 형성하여 묵죽화의 성행에 크게 기여하였다.
南宋 때에 이르러 묵죽은 더욱 유행하였고 元代에는 문인사대부들의 저항과 실의의 표현방편으로 성황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 때 벌써 李에 의해 [竹譜] 7권이 만들어져 화법이 체계적으로 발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죽의 생리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묵죽화가로서 유명하였다.
元代에는 이 밖에도 조맹부, 吳鎭, 瓚 등의 명가들이 나와 가늘면서 굳센 묵죽화풍을 형성했으며, 이러한 전통이 明代의 夏 (1388∼1470)등을 통해 자연미와 이념미가 융합되면서 청대로 계승되었다.
죽을 그리는 데 묵죽을 기본으로 삼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으나 묵죽 이전에 寫竹과 채색죽의 방법이 이미 있었음을 기록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사죽은 사생에 의한 대나무의 묘사방법이고 채색죽은 윤곽을 선묘로 두르고 안에 칠을 하는, 이른바 彩의 방법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대나무는 수묵법과 결부됨으로써 비로소 동양회화의 중심적 창작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氣韻과 정신의 주관적 표현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墨이란 선으로서 작용할 뿐 아니라 색채를 대신한 면으로서도 작용한다. 文同이나 蘇東波에 의해 처음 시도된 묵죽은 바로 대상물의 외형적 사생을 떠난 傳神의 실천적 방법으로 죽을 그린 것이 되며, 이 때의 묵은 현상세계 너머의 조화력을 암시하는 것으로 묵선이나 목면 모두 그 기운을 담는 형식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묵죽과 동양회화가 지니고 있는 사의정신은 이러한 창작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묵죽도 묵란과 마찬가지로 서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찬은 서법 없는 묵죽은 병든 대나무를 보는 것 같다고 했으며, 明代의 王 은 서법과 죽법은 동체라고 하였다.
그러나 묵란이 짧고 긴 곡선의 반전 등을 통해 풍부한 변화를 보이는 데 비해 묵죽은 직선이 위주이며 그 구도에서도 보다 다양한 것이 특색이다.
묵죽을 그리는 데도 절차와 방법이 있는데, 줄기(幹)와 마디(節), 가지(枝)와 잎(葉)마다 그리는 순서가 있다. 먼저 죽간을 그리고 다음에 가지를, 이어서 방향과 필법을 변화시켜 잎을, 마지막으로 마디를 그리는 것이 청대 이후 확립된 죽화법이다.
이 순서는 시에서의 起承轉結과 같다. 이러한 붓질의 흐름은 사군자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지만 그 중에서도 죽의 경우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묵죽을 그리는 것이 다른 사군자에 비해 어렵게 여겨지는 것은 대나무의 형태 자체는 단순하지만 일기와 계절적 정취에 따른 변화가 다양하고 미묘하기 때문이다.
대나무는 이러한 기후와 자연적 정경에 따라 晴竹, 仰竹, 露竹, 雨竹, 風竹, 雪竹, 月竹 등의 화제로 다루어졌는데 대가들조차 50년을 그린 후에야 비로소 그 경지가 터득되고 마음에 드는 죽화를 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곧 묵죽의 높은 경지와 깊은 맛을 시사하면서 이러한 사군자그림들이 결코 본격적인 회화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기초 내지는 예비단계의 차원이 아니라 동양 회화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의의를 내포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소재로 하여 수묵 위주로 그려진 묵매, 묵란, 묵국, 묵죽 등을 합쳐서 四君子라 부른다. 이러한 명칭이 붙게 된 것은 수많은 식물들 중에서도 매화는 설한풍 속에서 맑은 향기와 함께 봄을 제일 먼저 알리며 피고, 난초는 깊은 산골짜기에서 홀로 은은한 향기를 퍼뜨리고, 국화는 늦가을 찬서리를 맞으면서 깨끗한 꽃을 피우고, 대나무는 추운 겨울에도 푸른 잎을 계속 유지하는 등, 그 생태적 특성이 모두 고결한 군자의 인품을 닮았기 때문이었다.
옛부터 동양인들은 덕성과 지성을 겸비한 최고의 인격자를 가리켜 군자라 불렀다. 이러한 군자적 성품은 누구나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고 찬미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당시의 知的 엘리트였던 문인 사대부들은 실현해야 할 인생의 궁극적 지표로 설정하고 적극 추천했었다.
사군자 그림은 바로 이러한 문인사대부들의 삶을 확충, 고양시키고 그 마음의 뜻을 표현하기 위한 매체로서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문인사대부들은 사군자를 사시사철 그리고 감상하면서 윤리적 규범을 함양하고 성정을 바르게 순화하고자 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신념을 나타내고자 하는 등, 사군자 그림을 자기 계발과 자기 표현의 긴요한 수단으로 애호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사군자 그림은 지식층을 중심으로 갖추어야 할 예술적 교양의 하나로 여겨지면서 시문, 서예와 함께 일상 생활화되었으며, 이러한 풍조는 시대가 내려올수록 더욱 확산되었다.
옛부터 군자에 대한 인식은 그 신분성보다는 고매한 품성에 의한 인격적 가치로서 존경되었기 때문에 사군자를 그릴 때도 대상물의 외형보다 그 자연적 본성을 나타내는 것이 더 중시되었다. 그래서 문인사대부들은 사군자의 형상 너머에 있는 정신과 뜻을 마음으로 터득하여 마치 시를 짓는 기분으로 추상적인 구도와 모든 색을 함유하고 있다는 수묵의 표현적인 붓놀림을 통해 진솔하게 그리는 경지를 높게 여겼다. 다시 말해서 사군자 그림은 외형의 단순한 재현이나 형식의 답습이 아니라 대상무이 자라고 성장하는 자연의 이치와 조화의 정신을 깊이 생각하면서 느껴진 자신의 감정과 마음의 정서와 뜻을 표출, 즉 寫意性을 통해 가치가 추구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사군자 그림은 동양화와 수묵화의 중심사상과 핵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寫意畵의 정수이면서 동양회화의 대종을 이루었던 문인화의 대표적 화목으로서 크게 성행했으며, 마음을 수양하고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매체로서 널리 다루어졌다. 이는 곧 사군자가 그림뿐 아니라 동양의 문화와 정신의 본질적 가치와 의의를 집약시킨 하나의 표상으로서 전개되어 왔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군자는 일반적으로 매,난,국,죽의 순서로 소개되는데, 이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4계절에 맞추어 배열된 것이다. 그러나 기법의 습득단계는 전통적으로 가장 단순하고 기초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난초에서부터 시작하여 대나무, 매화, 국화의 순서로 진행된다.
■매(梅)
매화는 추위를 이기고 눈 속에서 피는 강인하면서도 고귀한 운치를 그 특성으로 한다. 살을 에이는 추위 속에서도 풍기는 매화의 향기는 맑고 깨끗한 인품으로, 눈 속에서도 아름다운 자태는 봄을 알려주는 선구자적인 뜻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반드시 늦겨울 이른봄의 추위속에 피는 강건한 특성은 훌륭한 덕성을 지닌 군자의 강인한 절개와 지조 및 세속을 초월한 은일로 상징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매화를 가리켜 雪中君子, 淸香, 玉骨, 花御史, 淸客, 世外佳人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매화가 재배되고 시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매우 오래 전부터였으나 수묵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북송 때였으며 창시자는 선승인 仲仁이었다. 그는 호남성 華光寺의 주지로 문인사대부였던 蘇東坡, 黃庭 등과 교유하면서 매화를 사랑하고 이에 대한 시를 읊고 지내다가 우연히 창문으로 매화나무의 성근 그림자가 빗겨드는 것을 보고 그 소쇄한 맛이 너무 좋아 붓으로 그 형태를 따라 그리다가 墨梅三味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발생된 묵매화는 같은 禪僧인 妙高에 의해 이론적 체계화가 시도되었으며, 南宋 때에는 꽃잎의 윤곽을 그리는 圈法이 완성되기도 하였다. 묵매의 이러한 전통은 원대에 와서 王, 吳太素 등에 의해 크게 성행되었으며 구도에서 북방식인 形式보다 남방식인 貫式이 더 유행하였다. 명대부터는 화보 등의 출현으로 다소 형식화되었지만 청대에 이르러 金農등의 개성파 화가들에 의해 보다 담채가 많이 곁들어진 화사한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매화는 묵죽과 함께 고려 중기부터 그려졌으며, 조선시대에는 각 시기마다 구도와 기법을 달리하면서 독특한 양식으로 전개되었다. 조선 초, 중기에는 선비들의 기상과 밀착되어 고담한 모습으로 그려졌으며, 후기에는 문인화의 담백한 분위기가 강조되다가 말기에 이르러 趙熙龍 등에 의해 봄의 화사한 계절적 정취와 함께 보다 회화성을 짙게 나타내었다.
난초를 곡선미, 대나무를 직선미로 본다면 매화는 굴곡미에서 그 조형적 특성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매화를 그리는 데는 전통적으로 다섯 가지의 필수적인 방법(五法)이 있다. 뿌리는 서로 얽혀야 하고 대목은 괴이해야 하고 가지는 말쑥해야 하며 줄기는 강건하고 꽃은 기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36가지의 병(三十六病)이 있다 하여 한 가지라도 잘못 그리면 평가를 받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기본수련의 중요성과 함께 매화 역시 높은 경지에 들기가 어렵다는 점을 말해 주는 것으로 문제는 형식의 충실한 모방이 아니라 이를 통하여 자신의 감성과 뜻을 얼마만큼 구현시킬 수 있는가에 참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필법도 중요하지만 그 속에 담긴 정신세계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매화의 품종으로는 白梅, 紅梅, 朱梅, 時梅, 綠梅, 千葉梅, 九英梅 등이 있다. 그리고 많이 다루어졌던 화제로는 月梅, 雪中梅, 老梅, 羅浮梅, 西湖梅, 庭梅, 梅, 夜梅 등이 있다.
■난(蘭)
난초는 옛부터 깊은 골짜기에서 홀로 고고하게 향기를 품고 있는 모습이 세속의 이욕과 공명에 초연하였던 고결한 선비의 마음과 같다고 하여 ''幽谷佳人'', ''幽人'' 또는 ''香組'', ''君子香'' 등으로 불리었다. 그리고 정절과 충성심의 상징으로 찬미되기도 하였다.
난초의 상징성은 楚나라의 시인이며 충신이었던 屈原이 난의 고결한 자태를 거울로 삼았다고 읊었듯이 이미 오래 전부터 형성되었다. 그러나 난초가 그림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北宋때부터였으며, 처음에는 화조화의 일부분으로 그려지다가 米 에 의해 수묵법에 의한 독립된 화제로 다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미불은 서예에도 뛰어났던 당대 최고의 문인화가로 그의 난화에 대해 비평가들은 잎이 서로 교차하는데도 혼란치 않고 실로 희대의 奇品이라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와 같이 화조화의 배경에서 하나의 화제로 독립된 묵란을 보다 사의적으로 발전시킨 사람은 鄭思였다. 그는 南宋이 元에 망하자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면서 나라를 빼앗긴 울분을 땅을 그리지 않음으로써 뿌리가 드러난 露根蘭을 통해 토로하였다. 그의 이러한 정신과 蘭法은 一代宗師로서 후인들의 규범이 되어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원나라 때는 松雪體로 유명한 趙孟 와 雪窓등에 의해 산뜻하고 단아한 모습의 묵란이 유행되기도 하였으며, 특히 조맹부의 부인인 管道昇의 맑고 수려한 난화는 馬守貞, 表表등의 여류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쳐 이들을 ''閨秀傳神派''라 부르기도 한다.
문인화가 널리 보편화되었던 明代에 와서 묵란은 더욱 크게 성행하였고, 이러한 전통이 靑代에도 계속 이어져 보다 다양하고 개성이 넘치는 화풍으로 발전하였다. 그 중에서도 石 등의 明朝遺民畵家와 陽州八의 鄭燮 등이 특히 뛰어났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묵란은 고려 말기에 전래되어 조선 초기부터 그려지다 秋史 金正喜에 이르러 대성되었고 그 전통이 근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렇듯 묵란은 그 은은한 먹향기와 수려한 곡선미와 청초한 분위기를 통해 고결한 이념미가 역대의 뛰어난 문인화가들에 의해 계승, 발전되어 오면서 사군자 그림과 문인화의 발달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군자 그림을 배울 때 이러한 전통과 상징성을 지닌 묵란을 제일 먼저 시작하는 것은 난초의 생김새가 한자의 서체와 닮은 점이 가장 많다는 데 있다. 난엽을 그리는 것을 잎을 그린다고 하지 않고 앞을 삐친다고 하는 것도 글씨에서 삐치는 법을 쓰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김정희는, "난초를 치는 법은 隸書를 쓰는 법과 가까워서 반드시 文字香과 書卷氣가 있은 뒤에 얻을 수 있다."고 하여 이론적으로 서체훈련이 회화기술의 기초가 되고 있음을 말한 바 있다. 이 점은 묵란화가 문인묵객들이 즐겨 찾던 주제의 하나로서 시,서,화에 능한 三絶, 특히 서예에 뛰어난 사람들에 의해 주로 그려졌던 사실로도 알 수 있다.
난초의 종류는 상당히 많지만 묵란화에서는 주로 春蘭과 建蘭을 다룬다. 춘란은 草蘭, 獨頭蘭, 幽蘭이라고도 하는데, 잎의 길이가 각각 달라서 길고 짧으며 한 줄기에 한 송이의 꽃이 피는 것으로 청의 鄭板橋와 조선 말기의 김정희, 대원군 李昰應, 金應元 등이 잘 그렸다.
건란은 雄蘭, 駿河蘭, 란이라고도 했으며, 잎이 넓적하고 뻣뻣하며 곧게 올라가는데 한 줄기에 아홉 송이의 꽃이 핀다. 福建 지방이 명산지인 이 난은 청의 吳昌碩과 조선 말기의 閔泳翊이 특히 잘 그렸다.
■국(菊)
국화는 다른 꽃들이 만발하는 계절을 참으며 서리 내리는 늦가을에 그 인내와 지조를 꽃피운다. 만물이 시들고 퇴락해 가는 시절에 홀로 피어나는 이러한 국화의 모습은 현세를 외면하며 사는 품위있는 자의 모습이나 傲霜孤節한 군자를 연상케 한다.
그래서 옛부터 국화는 晩餉, 傲霜花, 鮮鮮霜中菊, 佳友, 節華, 金華 등으로 불리면서 정절과 은일의 꽃으로 알려져 왔다. 그리고 국화는 본성이 西方을 좋아하기 때문에 동쪽 울밑에 흔히 심는 것으로 되어 있어 東籬佳色이라는 별명이 생겼으며, 특히 晋나라의 유명한 전원시인이며 은사였던 陶淵明(365∼427)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면서 더욱 시인묵객들의 상탄의 대상이 되었다.
국화도 다른 사군자와 마찬가지로 北宋代부터 문인화의 성격을 띠고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묵국만을 전문으로 다룬 화가는 매우 드물었으며 靑末期에 와서 吳昌碩 등에 의해 회화성 강한 彩菊이 많이 그려졌다. 우리 나라에서도 묵국화는 그다지 성행하지 못했고 조선 말기 이후로 오히려 花畵로서 보다 많이 다루어졌다.
국화의 종류도 상당히 많지만 그 중 빛깔에서 黃菊을 으뜸으로 친다. 국화는 단독으로 그려지는 경우보다 다른 초화나 괴석과 함께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
국화 전체 모습의 운치는 꽃이 높은 것도 있고 낮은 것도 있으면서 번잡하지 말아야 하며, 잎은 상하, 좌우, 전후의 것이 서로 덮고 가리면서도 난잡하지 말아야 한다.
국화의 꽃과 꽃술은 덜 핀 것과 활짝 핀 것을 갖추어서 가지 끝이 눕든지 일어나 있든지 하여야 한다. 활짝 핀 것은 가지가 무거우므로 누워있는 것이 어울리고 덜 핀 것은 가지가 가벼울 수밖에 없으므로 끝이 올라가는 것이 제격이다. 그러나 올라간 가지는 지나치게 꼿꼿해서도 안되고 누운 것은 너무 많이 드리워서는 좋지 않다.
국화의 잎의 형태는 다섯 갈래로 갈라지고 파진 곳이 네 군데가 있어서 그리기가 어렵다. 이를 나타내는 데는 反葉法, 正葉法, 捲葉法, 折葉法 등의 네 가지 화법이 있다.
그러나 국화는 늦가을에 피는, 서리에도 오연한 꽃이다. 그러므로 섬세하고 화사한 봄철의 꽃과는 특성이 다르다. 그림이 종이 위에 이루어졌을 때 晩節을 굳게 지켜 그윽한 향기를 풍기는 국화를 대하는 느낌이 들어야 하는 것이다.
■죽(竹)
대나무는 옛부터 문인사대부들의 가장 많은 애호를 받으면서 사군자의 으뜸으로 꼽혀 온 것이다. 그것은 대나무의 변함없는 청절한 자태와 그 정취를 지조있는 선비의 묵객들이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늘 푸르고 곧고 강인한 줄기를 가진 이러한 대나무는 그래서 충신열사와 열녀의 절개에 비유되기도 하였다.
대나무가 그림의 소재로 등장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였으나 수묵화의 기법과 밀착되어 문인사대부들의 화목으로 발달시킨 사람은 북송의 蘇東波와 文同이었다. 소동파는 특히 그리고자 하는 대나무의 본성을 작가의 직관력으로 체득하여 나타낼 것을 주장한 ''中成竹論'' 을 제창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문동은 ''湖州竹派''를 형성하여 묵죽화의 성행에 크게 기여하였다.
南宋 때에 이르러 묵죽은 더욱 유행하였고 元代에는 문인사대부들의 저항과 실의의 표현방편으로 성황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 때 벌써 李에 의해 [竹譜] 7권이 만들어져 화법이 체계적으로 발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죽의 생리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묵죽화가로서 유명하였다.
元代에는 이 밖에도 조맹부, 吳鎭, 瓚 등의 명가들이 나와 가늘면서 굳센 묵죽화풍을 형성했으며, 이러한 전통이 明代의 夏 (1388∼1470)등을 통해 자연미와 이념미가 융합되면서 청대로 계승되었다.
죽을 그리는 데 묵죽을 기본으로 삼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으나 묵죽 이전에 寫竹과 채색죽의 방법이 이미 있었음을 기록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사죽은 사생에 의한 대나무의 묘사방법이고 채색죽은 윤곽을 선묘로 두르고 안에 칠을 하는, 이른바 彩의 방법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대나무는 수묵법과 결부됨으로써 비로소 동양회화의 중심적 창작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氣韻과 정신의 주관적 표현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墨이란 선으로서 작용할 뿐 아니라 색채를 대신한 면으로서도 작용한다. 文同이나 蘇東波에 의해 처음 시도된 묵죽은 바로 대상물의 외형적 사생을 떠난 傳神의 실천적 방법으로 죽을 그린 것이 되며, 이 때의 묵은 현상세계 너머의 조화력을 암시하는 것으로 묵선이나 목면 모두 그 기운을 담는 형식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묵죽과 동양회화가 지니고 있는 사의정신은 이러한 창작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묵죽도 묵란과 마찬가지로 서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찬은 서법 없는 묵죽은 병든 대나무를 보는 것 같다고 했으며, 明代의 王 은 서법과 죽법은 동체라고 하였다.
그러나 묵란이 짧고 긴 곡선의 반전 등을 통해 풍부한 변화를 보이는 데 비해 묵죽은 직선이 위주이며 그 구도에서도 보다 다양한 것이 특색이다.
묵죽을 그리는 데도 절차와 방법이 있는데, 줄기(幹)와 마디(節), 가지(枝)와 잎(葉)마다 그리는 순서가 있다. 먼저 죽간을 그리고 다음에 가지를, 이어서 방향과 필법을 변화시켜 잎을, 마지막으로 마디를 그리는 것이 청대 이후 확립된 죽화법이다.
이 순서는 시에서의 起承轉結과 같다. 이러한 붓질의 흐름은 사군자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지만 그 중에서도 죽의 경우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묵죽을 그리는 것이 다른 사군자에 비해 어렵게 여겨지는 것은 대나무의 형태 자체는 단순하지만 일기와 계절적 정취에 따른 변화가 다양하고 미묘하기 때문이다.
대나무는 이러한 기후와 자연적 정경에 따라 晴竹, 仰竹, 露竹, 雨竹, 風竹, 雪竹, 月竹 등의 화제로 다루어졌는데 대가들조차 50년을 그린 후에야 비로소 그 경지가 터득되고 마음에 드는 죽화를 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곧 묵죽의 높은 경지와 깊은 맛을 시사하면서 이러한 사군자그림들이 결코 본격적인 회화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기초 내지는 예비단계의 차원이 아니라 동양 회화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의의를 내포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내용출처 : 南天 宋秀南 [한국화 기법총서 사군자 - 藝耕産業社] |
출처 : 풍경스케치
글쓴이 : 소운 小雲 원글보기
메모 : 소운선생닌 동양화 교실- 사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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