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영 리더쉽

美 얼라이드 테크놀로지 이덕선 회장

구봉88 2009. 8. 5. 12:19

美 얼라이드 테크놀로지 이덕선 회장

 
 

지난해 11월 초 미국 메릴랜드대학 콘퍼런스센터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이덕선

회장(70)은 벅찬 가슴을 안고 연단에 섰다. 수도 워싱턴DC와 인근 버지니아주,

메릴랜드주에서

창업해 기업을 운영중인 소수인종 출신 `100대 기업인`에 뽑혀 상을 받는 자리였다.

상 이름도 전통과 영광을 인정한다는 의미로 `비즈니스 레전드 어워드(Business

Legend Award)`다. 한국계 기업으로는 유일하게 선정됐다.

그가 운영하는 네트워크 시스템 보안업체인 `얼라이드 테크놀로지`는 미국

북동부지역에서 인정받는 IT업체로 자리를 잡았다. 한 해 8000만달러 매출에 직원이

600명이나 된다. 메릴랜드 록빌,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 버지니아 노포크 등 미국

전역에 걸쳐 사무실을 두고 있다.

소수인종 기업인으로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이 회장은 최고의 전문가로 통한다.

메릴랜드 주지사 직속 `소수인종 기업개혁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얼라이드 테크놀로지를 창업한 것은 1986년이었다. 이 회장은 그때까지 통계자료

수집ㆍ분석 용역회사인 웨스탯에서 일했다. 처음 합류했을 때 직원 30명의 작은 회사

였지만 급성장을 거듭해 3000명의 공룡 기업으로 커졌다. 웨스탯을 키우는 데

이 회장의 공헌은 적지 않았다. 입사 7년 만에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을 총괄하는

부사장으로 승진시킬 만큼 회사도 그를 예우했다.

86년 자기 일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몇 년간 고전했다. 형식상 독립해놓고

실제로는 웨스탯에서 월급을 받으며 버텼다. 88년 말부터 웨스탯에 손 벌리는 것을

멈추고 마침내 자기 일을 시작했다.

그의 사업에 일대 전기가 온 것은 92년. 소수인종이 운영하는 기업에 특혜를 주는

`8a` 프로그램을 통해 75만달러짜리 국립보건원(NIH) 프로젝트를 따내면서부터였다.

중소기업청(SBA)이 지원하는 8a 프로그램은 연방정부가 정부조달 일부를 소수인종에

할당하는 것이다. 소수인종 운영 기업에 9년에 한해 입찰할 자격을 주며,

수입이 2300만달러를 넘으면 졸업한다.

이 회장은 NIH 프로젝트 설명회 때 함께 일할 전문가 10명을 모두 데리고 갔다.

일을 맡겨주면 실제로 각 분야에서 일할 전문가들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그의 시도는 먹혀들었으며 이로 인해 그는 신뢰를 얻었다.

이후부터 정부에서 발주하는 프로젝트를 속속 확보했다. 93년에는 620만달러짜리

월터리드 육군병원 연구소 프로젝트를 따냈다. 95년에는 5년짜리 3600만달러 규모

대형 프로젝트도 얻어냈다. 해군에서 발주한 사회복지ㆍ건강 관련 프로그램이었다.

일 성격에 맞춰 생물통계학자와 전염병 연구학자 등 전문가들과 손잡고 참여했다.

이들과 맺은 비즈니스 네트워크는 이후 이 회장에게 최고의 자산이 됐다.

얼라이드 테크놀로지에 프로젝트를 맡긴 미국 연방정부는 셀 수 없을 정도다.

국무부, 교통부, 국토안보부, 내무부, 국방부 산하 정보국(DIA), 해안경비대, 해병대

등등. 컴퓨터와 통신장비, 내비게이션 등의 프로그램 개발ㆍ설치, 유지ㆍ보수, 작동

교육이 주된 업무다.

이 회장은 비즈니스 수칙의 첫째로 `원만한 대인관계`를 꼽는다. 월급쟁이였을 때나

창업 후 최고경영자로 일할 때나 변치 않는 원칙이다. 20년간 일했던 웨스탯의

조 헌트 회장에게 배운 경영 기법이다. 헌트 회장은 그가 독립해 창업하자 직원을

보내주고 집기와 사무실을 제공했다. 어려울 때는 월급도 대신 줬다.

이 회장은 "사람과의 관계를 좋게 유지하려면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균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며 "상대에게 발전의 토대를 만들어주고 도와줘야 자발적인 협력과

충성을 끌어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에게는 대인의 풍모다운 겸손함이 몸에 배어 있다. 이 회장은 "직원을 뽑을 때

항상 나보다 잘난 사람을 곁에 둬야 한다는 점을 고집한다"며 "상대에 대한 예우와

대접이 결국 나 자신과 회사의 발전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이 회장이 한국계 이민자에게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컴퓨터 프로그래머 일을 하게

된것은 친척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한국외국어대학 독어과에 다니던 그는 가톨릭구제회라는 단체에서 고아들을 미국에

입양보내는 일을 했다. 65년 고아 5명을 미국에 데려다주고 돌아온 이 회장은

미국행을 결심한다. 66년 구호물자 수송선에 몸을 싣고 한 달 동안 태평양을 건너왔다.

서부 롱비치에서 친척이 살고 있던 동부 워싱턴DC까지 다시 사흘간 그레이하운드

버스로 이동했다. 한 달간의 배와 사흘간의 버스 여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는 이후

배와 버스 여행을 절대로 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워싱턴 친척집에 기착한 그는 당시 컴퓨터 계통에서 일하던 숙모의 조언으로 컴퓨터

학원에 등록했다.

졸업 후 당시 슈퍼컴퓨터 개발업체인 `컨트롤 데이터 코퍼레이션`에 프로그래머로

취직했다. 69년 자신의 오늘이 있도록 만들어준 웨스탯으로 옮긴 그는 20년간

봉직하며 최고의 컴퓨터 프로그램 전문가로서 인생을 만들어갔다.

◆ 독실한 가톨릭신자, 나눔실천도 `으뜸`

= 이덕선 회장은 `나눔`과 `베품`을 실천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2007년 9월 워싱턴DC

가톨릭 대성당에 한국 가톨릭 신도를 상징하는 성모자 부조상을 세울 때 이 회장과

형제들은 20만달러가 넘는 거금을 내놓았다.

그의 가톨릭에 대한 믿음은 어린 시절부터였다. 가톨릭 신자였던 아버지는 황해도

연백의 고향 마을에서 해방 전 주민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부친은 일제의

지배 아래에서도 미래의 희망을 일구는 주민 계몽 운동가였다.

성모자 부조상 설립과 교황의 미국 워싱턴DC 방문에 거액을 낸 것은 집안 내력

덕분이다. 2006년에는 교황 베네딕토16세에게서 `교회와 교황을 위한 메달`도 받았다.

가톨릭 교도로서는 영광스러운 메달이다. 그의 넷째동생 덕효 씨는 워싱턴 에피파니

성당 주임신부다. 미국에서 신학대학을 마친 덕효 씨는 미국 내 성당에서 한국인

최초로 주교 선임을 기대할 정도로 인정받고 있다.

이 회장은 IT와 네트워크 시스템 관련 분야에 동생과 자식들을 끌어들였다.

처남인 이수동 회장은 IT 보안 솔루션 업체인 STG를 창업해 성공했다.

STG는 이덕선 회장의 얼라이드 테크놀로지를 웃돌 정도로 성장했다. 딸 세희 씨는

 IT업체인 액세스 시스템을 꾸리고 있고, 딸 소피 씨는 통계조사연구를 하는 암색을

창업해 운영한다. 막내동생 덕형 씨는 IT업체 글로텍을 설립해 국무부 통신 소프트웨어

를 담당하고 있다.

이 회장은 2004년 모교인 한국외국어대학에서 명예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닥터 리`로 통한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로서뿐 아니라 미국 내 한인 사회의 존경받는

원로로서 자타가 공인하는 박사인 셈이다.

[워싱턴 = 윤경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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