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이다. 새벽에는 날이 선선해 이불을 당겨 덮게 된다. 눈 깜짝할 새 벌써 가을이 왔다. 1년의 3분의 2가 지나가 버린 것이다. 나는 올해, 얼마나 시간을 효과적으로 잘 사용하고 있을까?
계획과 지시와 통제의 시대, 우리의 인생계획은 특별할 게 없었다. 일단 관직으로 갈 것인지, 의사나 회계사 같은 전문가의 길을 걸을 것인지, 학자의 길을 걸을 것인지 정도만 정해 두면, 그 다음에는 그저 남들이 가던 길을 따라만 가면 됐다. 봐야 하는 시험 공부 열심히 해서 시험을 치르면 됐고, 돈을 벌면 세금을 내면 됐고, 평생 한 직장에서 한 직업을 갖고 살다 은퇴한 뒤엔 그저 쉬면 됐다.
개인의 시간 관리를 사회가 대신 해주던 시기였다. 일하는 시간도 25세에서 30세 사이에 시작해 60에서 65세 사이에 끝내는 것으로 사회가 정해줬다. 출퇴근 시간도 여가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세상은 훨씬 복잡해졌다. 자신의 시간은 스스로 관리해야 한다. 스스로 관리할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행복 지수는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게 당연해졌다.
시간에도 포트폴리오가 필요해진 것은 이 때문이다.
시간계획 세울 때도 돈 굴릴 때처럼월급이 들어올 때마다 이 돈을 어디에 얼마나 넣을지 고민하는 것은 이제 기본이다. 안전한 예금에 얼마를 넣고, 수익률이 높지만 위험도 큰 주식에도 일부를 넣고, 큰 돈이 생기면 부동산에도 나눠 넣는다. 이게 바로 투자 포트폴리오(portfolio)다.
포트폴리오는 과거에는 대기업 경영자나 펀드매니저들이 주로 생각하던 개념이다. 사업 포트폴리오란, 기업의 사업 구조를 어떻게 가져가야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투자 포트폴리오란 투자 상품을 어떻게 구성해야 위험을 줄일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이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고민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 과거에는 안전하게만 여겨졌던 은행이 망하는 일도 생기고, 불안해 보이던 주식과 부동산에서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사람들이 자꾸 눈에 띄면서, 포트폴리오는 우리 삶에 아주 가까운 단어가 된 것이다.
그런데 돈을 굴릴 때면 반드시 생각하는 이 포트폴리오라는 개념을 시간에 대해서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있다.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는 시간을, 급한 일부터 닥치는 대로 처리하면서 보내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지적이다.
아일랜드 출신의 경영 구루 찰스 핸디는,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 개인이 진정한 경쟁력을 가지고 행복을 누리려면 시간을 투자 포트폴리오처럼 관리하며 ‘포트폴리오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럽의 피터 드러커가 주는 조언찰스 핸디는 “유럽의 피터 드러커”라고 부를 만한 원로 경영학자다. 스스로는 경영 구루보다는 ‘사회철학자’(social philosopher)라고 불러 달라고 할 정도로, 경영뿐 아니라 인문학에 대한 이해도 깊은 인물이다. 미국 선탑미디어와 유럽경영개발재단(EFMD)이 매년 발표하는 “Thinkers 50”에서 2001년 피터 드러커에 이어 2위에 올랐으며 2005년 순위에서도 10위에 올라 있다.
찰스 핸디의 “포트폴리오 인생론”은 그의 조직이론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1989년에 펴낸 저서 “비합리의 시대”(Age of Unreason)에서 미래 기업은 “토끼풀 조직” 형태를 갖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토끼풀은 핸디가 태어난 아일랜드의 국화이기도 하다. 주목할 점은 토끼풀이 세 개의 잎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한 잎은 정규직 핵심 노동자다. 이들은 기업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고, 기업은 이들의 고용을 보장해 준다. 또 다른 한 잎은 비정규직 노동자다. 이들은 기업에 큰 기여를 하지만, 대체될 수 있는 인력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의사 결정 참여 정도와 고용 보장 정도는 약하다. 마지막 한 잎은 파트타임이나 임시직이나 계약제 외부 컨설턴트다. 핸디의 정의대로라면 이들이 바로 포트폴리오 노동자다.
핸디는 저서에서 과거 기업은 한 개의 잎, 즉 정규직 노동자로만 이루어졌지만, 미래 기업은 세 종류의 노동자의 비중이 거의 비슷해질 정도로 노동이 분화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과거에 전혀 없던 프리랜서, 즉 ‘포트폴리오 노동자’라는 계층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포트폴리오 노동자들은 기업으로부터 일거리를 보장받지 못하지만, 대신 기업으로부터 속박 받지도 않는다. 고용안정과 자유를 맞바꾼 셈이자 안정된 수입과 시간을 맞바꾼 것이기도 하다. 이런 조직형태의 변화가 바로 사람들이 ‘포트폴리오 인생’을 설계하고 누릴 수 있는 배경이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포트폴리오 노동자는 분명 기업의 외부인이지만, 기업에게는 중요한 자원을 제공한다. 핵심 경영 의사결정은 기업 내부의 경영자와 정규직 임직원들이 내리지만,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지식의 상당 부분은 포트폴리오 노동자에게서 빌려올 수 있다. 미래 기업은 점점 더 많은 주요 기능을 포트폴리오 노동자들로부터 가져올 수 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시간의 10%는 자원봉사에이런 포트폴리오 인생의 모델을 보여준 것은 다름아닌 찰스 핸디 자신이다. 런던 비즈니스 스쿨을 거쳐 영국 왕실인 윈저 성의 학장이라는 안정된 직장을 스스로 버리고 프리랜서 저술가의 길을 걸었다.
그의 시간 포트폴리오는 다음과 같았다. 1년을 날짜 별로 배분해 100일을 공부에 할애하고, 일에 150일을 투입했다. 돈을 벌기 위해 총 250일을 투자했기 때문에 10%인 25일을 자원봉사날로 넣었다. 또 나머지 90일은 가정 일, 휴일, 여가 등으로 넣었다.
핸디는 이렇게 비율을 정해 둔 다음, “절대로 어기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일거리가 아무리 많더라도 절대로 일하는 시간을 늘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힘들겠지만 그래야 포트폴리오 인생이 갖는 이점인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돈 만큼 시간을 선호하기 시작하는 사회, 안정만큼이나 자유를 선호하는 사회, 거대 브랜드의 뒤에 숨기보다는 자기 스스로 브랜드가 되고 싶어하는 사회, 그게 바로 미래 사회의 특징이다. 급한 성장보다는 성숙된 삶을 추구하고, 무조건적인 성공보다는 마음 속의 행복에 더 높은 가치를 두는 사회다.
한국 사회도 서서히 이런 특징을 가진 사회로 변모하고 있다. 이런 사회일수록, 시간의 중요성은 점점 커진다. 당연히 시간을 관리할 줄 아는 사람이 삶을 관리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이게 진정한 자기 경영이다.
이런 사회에서 포트폴리오 인생론, 시간관리법은 특정한 계층의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우리 모두가 시간을 포트폴리오처럼 관리해야 하는 포트폴리오 노동자다.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에 평생 다니겠다는 비현실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현재의 직장을 위해 365일 24시간을 모두 바치는 것은 그야말로 비현실적인 시간 관리다. 현재의 직장을 끝까지 다닌다고 해도, 50대 중반 이후 사망 때까지 20년 이상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 지 미리 준비하지 않는다면, 현재 ‘잘 나가는’ 직업인도 은퇴 뒤 말년의 긴긴 시간을 비참하게 보내게 될 수도 있다.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다면, 가족과 함께 보내야 할 말년의 오랜 시간을 어색하고 힘들게 보내야 할 수도 있다.
삶은 80년, 직장생활은 25년삶은 다양해졌다.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80년에 육박하고 있는데, 직장에 다니는 시간은 25년 남짓이다. 다른 삶에 대한 준비를 하는 데, 또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데 미리 시간을 투자해 두지 않는다면, 마치 갖고 있는 돈을 한 종목의 주식에 모두 투자해 둔 것처럼 위험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신은 올해 지나간 240여일 가운데 어느 정도를 일에 사용했는가? 또 며칠을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냈는가? 자신의 능력을 계발하는 데는 며칠을 사용했는가?
지금이라도 시간 포트폴리오를 한번 점검해 보시라. 그리고 취미생활과 재충전을 위해, 자원봉사를 위해, 은퇴 후 제 2의 인생 준비를 위해, 가족을 위해서도 여러분의 시간을 배분하시라.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오랜 투자 격언이 있다. 그 바구니를 떨어뜨리면 모두 다 깨어져 버리니 말이다. 당신의 시간도 마찬가지다.
by 이원재(트위터 wonjae_lee, 한겨레경제연구소 홈페이지 www.heri.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