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경영환경의 변화와 새로운 마케팅의 역할
1. 전통적 마케팅의 종말
1991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의 커버스토리에 ‘마케팅이 전부다(Marketing is everything)’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향후 고객 중심의 경제가 도래하면서 제품 개발이건, 성장 전략이건 결국 궁극적으로는 마케팅의 기능과 연관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글의 결론이었다.
기술 중심 기업에서도 마케팅의 중요성이 증가한 것은 마찬가지다. 세계적인 화학기업 듀폰(Dupont)의 최고 마케팅 책임자(CMO)였던 다이앤 굴리아스(Diane H. Gulyas) 는 “불행하게도 제품을 파는 데 있어서 위대한 기술의 영향력은 약해졌다. 이제 영업과 마케팅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케팅이 전부라는 기사가 나간 지 5년도 안되어 맥킨지에서는 ‘마케팅, 중년의 위기(Marketing’s mid-life Crisis)’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글에서는 종종 제 역할을 다하고 있지 못하는 마케팅 기능이 조직의 비효율을 낳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Economist 역시 ‘브랜드 매니저의 종말(Death of the brand manager)’이라는 기사(1994년 4월 9일자)에서 P&G와 같은 소비재 기업의 전통적 성장 방식인 브랜드 전략만으로는 범용화가 진전되는 시장 환경에서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독창적인 광고나 구상하던 고고함을 잊고, 유통업체와의 제휴 등 보다 적극적인 고객 유인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90년대 중반 보스톤 컨설팅 그룹(BCG)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 주요 기업들 가운데 90%가 마케팅 조직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10여 년 전부터 시작된 마케팅 기능에 대한 회의는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최근 시장조사 컨설팅 기관인 Forrester Research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 2년간 조사 대상 기업의 77%가 마케팅 조직에 변화가 있었다고 응답했으며, 그럼에도 여전히 변화가 필요하다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객이 경영 활동의 중심으로 등장하면서 가치사슬 상에서 고객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마케팅의 기능이 중요해 졌다는 데는 산업 분야를 막론하고 많은 기업들이 동의한다. 하지만 높아진 기대만큼 실망이 크다는 사실은, 마케팅이 달라진 경영 환경에서 요구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고객 중심 경영 시대에 마케팅은 하나의 개별 기능이 아니라 전사에 체화되어야 하는 가치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고객 가치가 강조되어 전사적으로 잘 체화된 기업들은 단순 기능에 머무는 마케팅을 불필요한 것처럼 여기고, 마케팅이 체화되지 못한 기업은 그러한 변화를 주도하지 못하는 마케팅에 실망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브랜드 매니저의 종말’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는, 마케팅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마케팅의 역할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P&G나 유니레버와 같은 마케팅 중심 기업들이 마케팅 임원직을 없앴다고 해서 이들이 마케팅에 집중하기를 포기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마케팅의 역할을 더욱 중시하고 있다. 다만 관점이 달라졌을 뿐이다. 전통적 마케팅의 종말을 가져온 경영 환경의 변화를 살펴보고, 이에 맞는 새로운 마케팅의 역할을 정의해야 한다.
2. 힘센 고객의 등장
기업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는 정보였다. 하지만 정보 기술의 발전은 고객과 기업간의 정보 비대칭 문제를 해소했다. 가격, 제품의 스펙과 같은 구매 결정 요인에 대한 고객들의 정보 수준이 높아진 만큼 고객들의 협상력도 높아졌다. 맥킨지가 2005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보험 가입자들의 절반이 상담사와 통화하기 전에 온라인을 통해 사전 조사를 했으며 이 수치는 5년 안에 80%까지 증가할 전망이라고 한다. 보험과 같이 구매 요소가 상대적으로 복잡한 경우에도 고객의 영업사원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졌으니, 구매시 필요한 정보가 상대적으로 단순한 제품들은 그야말로 고객의 손바닥 위에 놓이게 된 셈이다.
상위 업체 집중화와 유통업체에 대한 의존도 증가도 위협이 되고 있다. 맥킨지가 2000년 37개 소비재 제조 업체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 의하면 상위 5개의 구매업체가 이들 소비재 기업 전체 매출의 32%를 차지하여, 5년 전의 21%보다 상위업체 집중 현상이 심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서는 5년 뒤에는 이 수치가 45%까지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고객의 힘이 강해진 것은 산업재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산업재 거래에서는 대량 구매를 하는 고객사들이 공급기업들에게 고유한 제품 스펙과 구매 조건들을 요구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고객들의 전문성이 높아지면서 요구사항이 많아지고 있다. 앞서 등장했던 듀폰(Dupont)의 다이앤 굴리아스(Diane H. Gulyas)도 자신이 영업을 뛰던 80년대 중반과 비교해 볼 때, 오늘날의 구매 조직은 훨씬 더 전문화된 집단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강력한 고객의 등장은 기업에게 좀 더 맞춤화할 것을 요구한다. 무난한 가격의 무난한 제품이 경쟁력을 잃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은 특정 산업의 경우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며, 적정한 규모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High-end 전략과 Low-end 전략을 동시에 추구하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 매스 시장이 줄어들고 시장이 상이한 특징을 가진 세분화된 하위 시장으로 재편됨에 따라, 기존 대 고객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이었던 대중매체 광고의 영향력은 크게 감소하고 있다.
따라서 마케팅은 이전보다 좀 더 창의적인 방법으로 돌파구를 마련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마케팅에서 ‘창의력’은 언제나 중요했지만 오늘날 강조되는 창의력은 참신한 광고 메시지와 이벤트 전략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다양한 고객의 니즈를 효율적으로 만족시켜 줄 수 있는 ‘혁신’이다. 혁신적인 채널의 발견이 될 수도 있고, 시장 트렌드를 짚어낼 수 있는 통찰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창의적 혁신을 통해 단순히 고객 커뮤니케이션 차원뿐 아니라 제품을 개발, 생산하고 그것을 전달하는 사업 활동의 전 과정에 있어서 고객 가치를 개선할 수 있어야 한다.
3. 고객 니즈의 고도화
오늘날 고객들은 보다 다양한 목적으로 제품을 구매한다. 즉 제품 고유의 기능이나 가격뿐만이 아니라 브랜드가 주는 막연한 만족감이나 해당 제품의 구입과 관련된 사회적 이슈 등도 구매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고객의 니즈가 고도화 된다는 것은 기업이 고려해야 할 마케팅 이슈도 다양해짐을 의미한다. 종전에 기업들은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마케팅 활동을 정부 대상의 대외 업무(Corporate Affairs), 투자자 대상의 IR 활동, 언론 대상의 PR 활동과 분리시켜 생각했다. 각 부문의 이슈는 별개의 부서에서 서로 다른 책임자에게 보고되고 처리되었다. 마케팅은 CMO에게, IR은 CFO에게, 대외 업무는 비서실에, PR은 홍보실로 책임이 분산되어 있었다. 물론 대기업의 경우 각 부문만의 이슈도 방대하기 때문에 부문간 별도의 전담부서를 두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인다. 하지만 최근 기업에 대한 고객들의 요구 수준은 각각의 활동들을 전혀 별개의 것으로 다루도록 놓아두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영향력 있는 비정부 단체가 회사의 제품 생산 안전성에 대해서 블로그에 의혹을 제기하는 상황이 발생했다고 가정해 보자. 곧이어 주요 언론과 인터넷 사이트에서 이에 대한 논쟁이 불붙게 되고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일어날 수 있다. 정부기관은 이에 우려를 표명하며 제품의 생산을 중단할 것을 요청하고 회사의 주가가 떨어지는 상황이 예측 가능하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누구의 책임하에 관리되어야 하는 것일까?
미국에서는 최근 ‘CSO(Chief Sustainability Officer, 최고환경책임자)’가 기업의 새로운 중요 직함으로 떠오르고 있다. 환경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흐름 속에 2년여 전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자리이다. 다우(Dow)의 줄리 홀더(Julie Fasone Holder) 부사장은 영업 마케팅 기능과 더불어 인사와 공보업무(Public Affairs)를 총괄한다. 시스코의 CMO인 수잔 보스트롬(Susan Bostrom)도 브랜드 관리 및 광고 전략은 물론이고 전 세계 대관업무와 시장 전략에 대한 책임까지 맡고 있다. 이름은 다르지만 결국 모두가 기업 브랜드 관리, 고객 관리라는 측면에서 마케팅의 새로운 역할이라 볼 수 있다.
이제 마케팅은 보다 넓은 이슈에 대응하도록 요구 받고 있으며, 그렇기에 책임의 범위도 전략적 차원으로 보다 확대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4. 고객의 마케팅 기능 대체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마케팅의 역할이 이렇게 확대되고 있는 한편으로, 기존에 마케팅이 전담해야 했던 역할을 전문업체나 고객들이 대신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광고, 판촉기획, CRM, 시장조사 등 마케팅 부서의 역할을 대행해 주는 전문업체들은 과거에도 존재했지만, 이제는 고객들이 다양한 형태로 기존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이 담당했던 역할을 적극 대체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실제로 충성도 높은 고객의 입소문은 기업의 어떠한 광고보다도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이 이미 입증되었다.
UCC 사이트들은 미국에서 방문빈도가 높은 상위 100개 웹 사이트의 1/3을 차지할 만큼 그 영향력이 크다. 도요타는 미국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온라인 가상 공간 ‘세컨드라이프(Second Life)’에서 고객들에게 새로운 제품 설계에 대한 역할연기(role-playing)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자사의 신차를 세컨드라이프에 먼저 선보여 소비자의 반응을 살피기도 한다. 도요타의 브랜드 Scion xB와 xD는 세컨드라이프와 시카고에서 열리는 오토쇼에 동시에 공개되기도 했다. 고객이 제품생산, 테스트, 홍보활동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마케팅의 역할을 부분적으로 대체해 주고 있는 셈이다.
산업재 시장에서도 아직 그 영향력이 입증되지는 않았지만 입소문의 효과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높아지고 있다. 소비재 시장의 경우에 비해 소극적 방식이기는 하지만 같은 업계의 구매 담당자들끼리의 비공식적 의견교환은 지금도 일반적으로 존재한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2005년에 자사 사업 정책 및 프로그램의 가장 혹독한 비평가였던 로버트 스코블(Robert Scoble)을 비공식 치프 블로거(Unofficial Chief Blogger)로 임명하고 MS의 회사 정책이나 제품에 대해서 어떠한 불평이든 할 수 있게 했다. Economist의 기사에 따르면 “그의 블로그를 신앙처럼 받드는 전 세계 팬들 사이에서 그의 말은 절대적 반향을 이끌었으며, 대부분이 얼리 어답터인 이들은 전체 시장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쳤다”고 한다. 상당한 위험을 감수한 MS의 정면 승부는, 기존에 MS가 가지고 있었던 독점 업체로서의 부정적 이미지뿐 아니라 장점들까지 동시에 공론화시키면서 오히려 긍정적 효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특히 블로그의 주된 방문자인 소프트웨어 개발자들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는 사실은 산업재에서도 입소문의 잠재 마케팅 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음을 시사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제품에 대한 이해도가 높지 않은 고객의 평가나 고의적인 악평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객에 대한 영향력이 기업이 제공하는 정보보다도 큰 이들의 정보는 진위 여부와는 상관없이 사실로 인식될 가능성이 크다. 기업이 통제하지 못하는 정보의 확산이 기업 이미지나 성과에 매우 부정적인 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업이 의도치 않은 가운데 일어나는 이러한 외부로부터의 마케팅 활동은 기업들에게 새로운 숙제를 안겨준다. 즉 창의적인 광고 기획과 같은 메시지의 생산보다 고객으로부터 창조되는 메시지를 관리하는 것이 더 중요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II. 마케팅 실패의 원인
앞서 살펴본 것처럼 마케팅이 경영 활동에서 가지는 의미나 중요성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기업들이 이에 공감하게 되었다. 10년 전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최고 마케팅 책임자를 가리키는 CMO라는 직함이 Fortune 500대 기업의 절반 가까운 기업에서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일반화 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국내에서도 LG전자가 올해 CMO 자리를 새로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어떠한가? 임원급 헤드헌팅 기관인 스펜서 스튜어트(Spencer Stuart)에 따르면 미국 상위 100개사 CMO의 평균 재임 기간은 지난 해 26.8개월에 불과했는데, 이는 CFO 평균 재임기간인 53.8개월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치다. 스타벅스는 7년 동안 마케팅 책임자를 5번이나 교체했으며, 코카콜라는 6년 동안 네 번 교체했다. 단명하는 CMO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의 실패가 개인의 실패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전사적으로 마케팅의 중요성이나 가치에 대한 평가절하, 또는 회의적인 시각을 고착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들의 잦은 교체는 결과적으로 애초에 의도했던 마케팅의 역할이나 조직의 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반영하기도 한다. 실제로 마케팅 책임자들의 영향력은 대부분의 기업에서 다른 최고 경영자들에 비해 미미한 것이 현실이다. 마케팅 책임자들이 이사회에 참여하는 경우가 드문 것은 물론이고, 미국의 30개 대기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1/3 이상의 기업들이 이사회에서 마케팅이나 고객과 관련된 이슈들을 대해 논의하는 시간이 10%도 안 된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CMO의 임명이 기업의 변화 의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조직을 고객 중심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한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CMO를 포함한 마케팅 부문이 변화를 이끄는 선봉장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변화하는 경영 환경에서 요구되는 전략적이고, 전문적이며, 생산적인 기능을 수행해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 이하에서는 CMO들의 주요 실패 원인을 통해 오늘날 많은 조직에 만연해 있는 마케팅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조직에서 신뢰를 확보하기 위해 해야 할 선결 과제를 생각해 보자.
1. 다운스트림(Downstream) 마케팅 활동에만 집중
경영 환경의 변화는 마케팅이 하나의 기능으로서 전술적 활동에 머무르지 말고, 고객의 잠재수요와 니즈를 파악해 성장에 좀 더 적극적으로 기여하기를 요구한다. 즉 업스트림(Upstream) 마케팅 활동에 대한 중요성이 높아진 것이다. 특히 CMO들은 마케팅 부서가 아닌 전사 차원에서 마케팅, 즉 대 고객 활동이 창출할 수 있는 가치를 고민해야 한다. 창의적 커뮤니케이션이 아닌 창의적 혁신으로서의 마케팅에서는 전략적 관점에서의 고민이 필수적이다.
많은 CMO들이 머리로는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짧은 시간 내 가시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광고 바꾸기, 브랜드 관리 등 전술적 다운스트림(Dwonstream) 이슈 해결에 급급하다(<그림 2> 참조).
조사 결과에 따르면 여전히 많은 CMO들은(83%) 현재 가장 중요한 마케팅 관심사는 브랜드 관리라고 응답했다. 혁신 추진이라는 응답의 2.5배나 되는 수치다.
많은 최고 경영자들은 광고 전문가와 같은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출신이 대부분인 CMO들이 전략적 문제에 대해서 고민할만한 역량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이유로 최근 기업들은 적어도 CMO 레벨에서는 마케팅에 대한 경험뿐 아니라 다양한 기능부문에 대한 경험과 전략적 사고 능력을 갖춘 인재를 찾고 있다. 최근 적지않은 기업들에서 마케팅과 전략부분을 겸하고 있는 최고 책임자가 선임되고 있는 현상 역시 이 둘의 높아진 상관관계를 감안하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제록스에서 전략 마케팅 부사장을 맡았던 짐 파이어스톤(Jim Firestone)의 경우 기업 전략 수준의 경영 활동과 마케팅 활동을 동시에 지휘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인물의 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재무 부서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그는, 타깃 고객 분석과 관련된 글로벌 프로젝트 및 전략 관련 프로젝트에서 외부 컨설팅 업체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맥칸 에릭슨(McCann Erickson), 하쿠호도(Hakuhodo)와 같은 광고 대행사들과 함께 광고 및 프로모션 전략을 기획하기도 했다. 이후 IBM을 거쳐 제록스에서도 계속해서 비슷한 업무를 담당하면서 전략과 전술 모두에서 경험이 있으면서 산업을 이해하는 몇 안되는 경영진 가운데 하나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는 제록스에서 조직의 턴어라운드와 구조조정에 까지 관여하면서 이러한 역량들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맥도날드의 래리 라이트(Larry Light) 전 CMO는 ‘아임 러빙 잇(“I’m Lovin’ it”)’ 캠페인을 성공시켰을 뿐 아니라 메뉴, 사업지역 선정에 이르기까지 사업의 장기 성장 전략과 관련된 활동에도 관여했다. 마케팅 리더는 전략적 차원의 고민을 통해 마케팅 활동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사실을 이들 CMO의 성공 사례는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2. 부문간 불협화음 조율 실패
마케팅뿐 아니라 전 조직에서도 고객의 개념은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고객 활동을 중심으로 가치사슬이 허브 앤 스포크(Hub and Spoke)와 같은 모습으로 재편된다면, 마케팅은 이 모델의 심장부에 위치해 있어야 한다(<그림3> 참조).
하지만 많은 CMO와 마케팅 조직이 타 조직으로부터 협력을 이끌어 내거나 기능간 시너지를 내는 데 있어서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관계가 가장 밀접한 영업부문과도 태생적으로 다른 문제 접근 방법과 서로 다른 성과평가 기준으로 협력이라기보다는 경쟁관계에 놓이게 되는 경우가 많다. 개인에게 할당되는 판매지원비가 매출액이라는 판매량과 직결되는 영업 부문은 가시적인 성과를 얻기 위해 낮은 가격에라도 많이 판매하고 싶어한다. 반면 상대적으로 프로모션 활동에 투입된 비용과 그에 따른 성과를 추적하는 데 오랜 기간이 걸리는 마케팅은 매출 증가에 대한 단기적 압박이 적어 보다 장기적 관점에서의 수익을 따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영업은 마케팅을 책상머리 전략이라 비난하고 마케팅은 영업을 전략적이지 못하다 폄하하는 현상이 빈발하게 된다. 가장 유기적으로 일해야 하는 영업 부문과의 관계가 이러하니 마케팅을 비용 중심점(Cost Center)로 여기는 재무 부분이나 시장을 보는 시각 자체가 다른 R&D, 생산 부문과 불협화음이 발생할 가능성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실패의 원인은 각 부문간 목표를 시너지가 날 수 있도록 연계시키지 못한 구조적 문제에서 찾아야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케팅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피해가기도 어렵다. 성공하는 CMO들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끊임없는 부문간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기능간 협력을 이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월마트의 마케팅 최고 책임자는 처음 부임했을 때, 매장의 모든 핵심 구성원들을 만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마케팅의 역할에 대한 현장의 기대와 이들이 안고 있는 고민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제품 혁신에 대한 기여도까지 마케팅의 역할로 규정한 기업들도 있다. 주류회사 디아지오 CMO의 직무에는 마케팅뿐만 아니라 영업과 제품 혁신도 포함되어 있다. 펩시의 CMO도 마케팅과 혁신 사이의 연결이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팀 성과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P&G에서도 마케팅과 R&D는 이전부터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며 움직여 왔으며, 궁극적으로는 서로 ‘분리가 가능하지 않은 수준까지’ 유기적인 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성공한 CMO들은 마케팅이 다른 사업부문들과 결합될 때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3. 재무적 설득력 부족으로 신뢰 확보에 실패
아무리 마케팅의 역할이 강조된다 해도 마케팅 스스로가 조직 내부적으로 진정한 지지를 얻을 수 있을만한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면 변화에 성공하기 어렵다. 특히 재무적 언어로 많은 대화가 이루어지는 최고 의사 결정 자리에서 그들의 언어로 대화할 수 없다면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많은 마케팅 전문가들은 재무적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미국의 CMO 협회가 이사회 구성원과 C 레벨 관리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의 62%가 마케팅 지도자들이 충분한 마케팅 ROI(Return on Investment, 투자 수익률) 데이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CMO들 스스로도 해결해야 할 선결과제로 ROI 평가지표의 개선을 꼽는다. 영국 주요 기업들의 비 마케팅 분야 임원급 경영자들을 대상으로 크랜필드(Cranfield) 대학에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타 기능부문의 사람들은 마케팅 하는 사람들을 ‘책임지지 않고(Unaccountable), 비판할 수 없고(Untouchable), 돈이 많이 들고(Expensive), 책임지지 않고 잘 빠져나가는(Slippery)’ 이라는 말로 묘사하고 있었다. 특히 어떠한 실패에 대해서도 마케팅 탓이라고 하지는 않지만, 마케팅이 잘 하는 것, 잘 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있다는 점은 마케팅 담당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래디슨 호텔 체인(Radisson Hotels & Resort)의 마케팅 책임자는 전략적 선택에 대한 상충관계(Trade-off)를 명백히 함으로써 마케팅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새로운 브랜드 전략을 시작한 이후 ‘객실 당 수입은 5.6%가 상승했고 이는 모회사인 칼슨 호텔 체인(Carlson Hotel Worldwide)의 매출을 10%, 수익을 18% 향상시켰다’ 와 같은 식으로 성과를 명확히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그림 4> 참조).
물론 마케팅 담당자들이 재무적 의사소통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도 실제로 활용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측정의 어려움에 있을 것이다. 액센추어(Accenture)가 선정한 마케팅 성과 측정 관리 우수 기업들을 보면, 모두 평가 툴 그 자체보다도 마케팅 담당자들에게 손익에 대한 책임감을 느낄 수 있도록 촉구했다는 점이 공통적으로 목격된다. 도요타는 자사의 Kaizen(지속적 개선) 개념을 마케팅에도 적용시켜 이사회에서 마케팅 부문의 KPI(핵심성과지표)가 어떻게 개선되고 있는지를 보고하게끔 한다. GE의 베스 콤스탁은 완벽한 ROI 공식이 있다거나, 이것이 완벽하지 않으면 CFO에게 거부당할 것이라는 염려부터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 완벽한 ROI 공식을 보여주는 것 보다는 “아마도 이 수치가 정확한 매출 효과를 대변해주지는 못하겠지만 여러 가지 다양한 보완 수치들을 사용해 마케팅 활동의 성과를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와 같이 현재 활용 가능한 도구들을 가지고 전략적으로 설득하려는 노력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한다.
결국 마케팅도 진정한 지지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내부 구성원이 수긍할 수 있는 용어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마케팅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III. 고객 중심 시대의 마케팅 기능 재설계
조직 전반에 마케팅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한편으로 마케팅 무용론과 같은 회의적 시선이 확산되고, 마케팅 리더는 기대했던 변화를 만드는 데 실패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고객 중심 시대에 마케팅의 달라진 역할을 조직 구성원 및 의사결정자들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고객의 영향력이 더욱 강해지고, 고객들이 더 많은 것을 요구하며, 동시에 기존 기업의 마케팅 기능 부분에까지 관여하는 고객 중심 시대를 맞아 마케팅은 과연 어떠한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것일까?
1. 전략으로서의 마케팅
오늘날에는 ‘만들어져 있는 것을 파는’ 한계에서 벗어나 전략적 마케팅으로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 내는 것이 더욱 중요해 진다. 한 소비재 기업의 CMO는 스스로를 최고 수요 창출 책임자(Chief Demand Creating Officer)라고 칭하면서 성장의 드라이버로서 마케팅의 역할을 강조했다. 10여 년 전 Economist에 발표된 기사처럼 단순히 전술을 잘 수립하는 마케팅 책임자의 역할은 끝나고 있으며(The death of brand manager), 점점 더 많은 기업들이 수익 관리 관점에서의 책임과 역량을 강조하고 있다(<그림 5> 참조).
맥킨지 보고서에 따르면 마케팅이 전략의 중심축으로서 작용하는 기업에서는 브랜드 관리, 광고 기획과 같은 전통적인 CMO의 역할은 이들이 담당해야 하는 전체 역할의 25%에 불과하다.
반면 전략적 차원의 마케팅에서는 제품 및 브랜드의 포트폴리오 관리, 4P(Product, Price, Place, Promotion) 효율화 및 파트너십 관리를 비롯하여 마케팅 예산에 대한 통제권까지 마케팅 담당자에게 귀속되기도 한다. 디즈니가 음악, 영화, 테마파크, 비디오, 소프트웨어 등의 다각화된 포트폴리오로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었던 것도 전략적 마케팅의 기능이 그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P&G가 유통 채널의 일부였던 월마트와 구축했던 파트너십은 다소 진부하게까지 느껴질 정도로 자주 회자되는 전략적 마케팅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다.
전략적 마케팅을 위한 조직 구성
마케팅이 전략적 차원에서 수익창출을 주도하고 변화의 원동력으로서 작용하려면 적어도 기존의 전술적 기능과 구분되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마케팅의 역할 전반에 걸친 구조적 변화를 감행할 필요가 있다.
사업지역이 확대되고 제품에 대한 글로벌 표준화가 어느 정도 진행된 경우, 전략적 마케팅은 전사적 관점에서 진행될 때 보다 높은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다. 실제로 오래 전부터 마케팅을 강조해온 기업들 가운데는 CEO 스스로가 CMO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경우도 있고 마케팅 책임자의 위치가 부사장 정도로 높은 경우가 많다. UPS의 부사장인 커트 쿠엔(Kurt Kuehn)은 글로벌 영업 마케팅을 총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의 역할은 영업, 브랜드 관리, 커뮤니케이션, 고객 관계 경영, 제품 개발 등 전 기능 분야를 아우른다. 또한 전 세계 80~90명에 이르는 운영 책임자(Operation Head)들을 관장하기도 한다. 펩시 콜라의 부사장이자 북미지역 CMO인 데이브 버윅(Dave Burwick)도 브랜드, 미디어, 촉진 활동, 시장 기회 탐색은 물론 제품과 패키징 혁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활동을 담당한다.
이처럼 강력한 전사적 마케팅 기능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전략적 마케팅 기능이 약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부 기업들은 전략적 차원의 업스트림 마케팅 기능과 전술적 차원의 다운스트림 마케팅 기능을 분리시키기도 한다. IBM은 전략적 차원의 마케팅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Big M’ 마케팅 임원이라 하여 주로 특화된 부분에서 전문적 역할만을 수행하는 ‘Small m’ 직원들과 구분한다. Big M 역할을 수행하는 관리자의 상당수는 컨설팅 경력이 있으며 그 가운데는 경영학 교수 출신들도 있다. 또한 P&G는 글로벌 사업 단위(Global Business Unit: GBU)와 시장 개발 조직(Market Development Organization: MDO)을 양 축으로 두고 마케팅 전략을 추진중이다. GBU는 전반적인 사업 전략 기획 및 회계, 인력관리, 연구 개발, 제품공급, 마케팅 등 거시적 관점에서의 업무를 수행하고, MDO는 지역에 특화된 요구사항에 보다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실행 전략 분야를 담당한다(<그림 6> 참조).
2. 통합자(Integrator)로서의 마케팅
고객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해진 만큼, 다양한 시장 및 사업부에 축적된 고객 지식이 전사적으로 공유되도록 하는 기능도 한층 중요해졌다. 통합자로서의 마케팅은 고객에 대한 지식과 마케팅 마인드를 조직 내부에 다양한 형태로 전파하는 기능을 맡아야 한다. 그 출발점으로 전사 차원에서 베스트 프랙티스를 개발해 타 지역 시장이나 타 기능부분에 전파하는 방법이 있다. 영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DIY 유통업체 B&Q는 원래 물건을 천장까지 쌓아놓고 영업하는 1층 구조의 매장을 운영해 왔다. 그러나 중국 시장에서는 셀프 서비스로 운영되는 매장 형태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이 높은 곳의 물건이 닿지 않아 종업원들의 도움이 자주 필요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B&Q 차이나는 물건을 2층 구조로 진열하는 매장을 고안해냈는데, 이 방식은 공간 절약의 효과도 커서 나중에 영국 본사에까지 도입되었다.
그러나 통합자로서의 역할은 궁극적으로 마케팅을 각 기능부문의 중심에 두고 어떤 활동에서건 고객 가치가 최우선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시스코의 경우 조직 내 분산되어 있는 기술을 모아 테스트하고 새로운 고객 솔루션의 청사진을 만드는 크로스 사일로 엔지니어링(Cross-silo Engineering)팀에서 통합자적 마케팅을 주도하고 있다. 사무용품 판매업체인 스테이플스(Staples)의 경우 고객의 구매 행동을 분석하여 매장 내 제품 배열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 잉크나 종이와 같이 구매빈도가 높은 소모품을 매장의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고객의 동선을 단축시키는 한편 충동구매를 유도하는 것이다. 이처럼 고객 분석 결과를 효과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선두업체 오피스디포(Office Depot)를 따라잡으며 연 10%의 빠른 성장을 이루고 있다.
통합적 마케팅을 위한 조직구성
통합적 마케팅을 위해서는 마케팅이 하나의 기능이나 부서가 아닌 전체적인 프로세스에 녹아 들어가야 한다. 많은 기업들은 다양한 기능부문 각각이 고객 지향적인 가치를 가지고 운영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 고민한다. 전자 유통업체 베스트바이(Best Buy)는 아예 고객 세그먼트에 따라 조직을 구분하여 특정 고객 집단에게 더욱 적합한 형태로 맞춤화된 니치 스토어를 운영하기도 한다. 하지만 고객 중심의 조직 구성이 모든 기업에게 적용될 수는 없다. 시스코는 기술적 시너지가 경쟁력을 높이는 데 핵심인 사업분야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기술 중심의 구조를 유지해야 했다. 대신 고객 대응력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영업 조직은 고객 중심별로 유지하고, 중앙에 마케팅 기능을 추가하여 기술 그룹과 고객 그룹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팀 형태의 조직을 활용하여 마케팅 기능이 조직 구조에 체화되도록 만드는 방법도 있다. P&G와 마찬가지로 브랜드 매니저 형태의 조직 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크래프트(Kraft)는 주요 고객 관리처럼 핵심이 되는 역할들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기능간 협업팀(Cross Funtional Team)을 별도로 구성, 카테고리 매니저의 역할을 보완하게 했다(<그림 7> 참조).
이러한 형태의 조직 구성에서는 기능이 아닌 목적에 따른 팀 단위 활동이 가능하게 되어 고객 가치 증진이라는 목적에 보다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된다.
3. 외부 마케팅의 관리자로서의 마케팅
지식 경제 시대에는 많이 아는 것 못지않게 타인의 정보와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 마케팅 활동에 의해 고객에 대한 지식이나 가치 증진의 방법이 모든 기능부문에 전파되고, 심지어는 고객조차도 마케팅의 역할에 일부 관여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마케팅의 역할 또한 달라진다. 실제로 Forrester Research가 2004년 640명의 B2B 마케팅 담당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3%가 자사 마케팅 활동의 절반 이상을 아웃소싱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특히 CRM(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 고객관계관리) 아웃소싱은 2008년까지 46억 달러로 4배 가까이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최근 열린 CMO 회의에 참가한 최고 마케팅 책임자들의 75%는 자신들에게 요구되는 능력이 과거에 비해 훨씬 전문화되고 있기 때문에 미래에 조직 내 마케팅 운영 모습은 지금과는 많이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존에 강조되어 온 전문성 축적 못지않게 외부의 전문그룹과 고객으로부터의 개입을 관리, 통제하는 능력이 중요해 지고 있음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IBM은 각 지역에서 광고를 맡고 있던 수십 개의 광고사를 오길비 앤 마더(Ogilvy & Mather)로 통합하였다. 이는 애초 글로벌 광고 메시지의 통합을 위해서였지만 IBM을 오길비 앤 마더의 가장 중요한 광고주로 만드는 전략적 효과도 거두었다. 덕분에 IBM은 최상의 인력으로 구성된 광고 제작팀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입소문과 같은 고객의 개입에 대해 PwC의 마케팅 이사는 “통제 불가능한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영향력을 감안할 때, 부정적 기능을 최소화하고 전략적으로 적극 활용할 수 있는 통제력이 진정한 마케터의 역할로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IV. 맺음말
마케팅이 좀 더 전략적인 차원에서 고민되어야 한다는 지금까지의 논의와 관련해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그 동안 마케팅에 소홀해왔다고 여겨온 산업재 기업들이 실제로는 훨씬 더 전략적 문제들을 고민해 오고 있었다는 점이다. 산업재 기업의 주된 관심사인 원가 절감을 통한 경쟁력 있는 가격 달성, 핵심 고객 관계 관리, 공급 및 유통업체와의 파트너십 구축 등은 새로운 마케팅의 역할에서 더욱 강조되는 부분들이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마케팅의 중요성이 경시되는 조직 분위기에서 마케팅이 이러한 변화를 주도하기는 어려웠다. 사실 이러한 문제를 고민하는 마케팅의 기능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도 했다.
반면, 소비재 기업의 경우 지금까지는 광고, 브랜드 관리 등과 같은 다운스트림 활동에 주력해 왔으나 이제는 고민의 차원을 한 단계 끌어올릴 것을 요구 받고 있다. 결국 달라지는 경영 환경에서는 산업재든 소비재든 점차 마케팅의 주된 역할이 전략적 관점으로 수렴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향후 모든 기업에서 마케팅이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기능이 아닌 프로세스로 체화된 마케팅
강력한 마케팅팀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더 우수하고 고객 중심적인 기업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과 마케팅 관리자들은 아직도 기업의 고객 중심 정도를 중역들이 마케팅을 다른 부서에 비해 얼마나 중요한 부서로 보는지 질문하여 평가한다. 또한 CMO나 마케팅 팀을 신설하여 조직이 달라질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높은 기대와는 달리 마케팅의 새로운 역할에 대해 충분히 준비가 되지 않은 CMO와 마케팅 팀은 결국 실패하기 마련이다.
마케팅은 기능이 아닌 마인드로 전환되고, 마케팅 팀은 조직이 아닌 프로세스로 체화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고객을 잘 이해하는 한 사람의 뛰어난 마케터가 아니라, 조직에 고객 가치를 전파할 수 있는 마케터가 필요하다. 마케팅 사관학교로 알려져 있는 P&G는 커뮤니케이션 장벽을 허물기 위해 혁신 체육관(Innovation Gym)이란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여러 부서 사람들이 부서의 벽을 허물고 고객 가치가 무엇인지 토론함으로써 전 부서가 고객 가치라는 동일한 목표로 운영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이제 마케팅은 마케팅 팀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2. 사업의 특성에 맞는 마케팅 조직 구성
기능 부분으로서가 아닌 전략적 차원으로서의 마케팅에서는 글로벌화, 표준화 정도, 타깃 고객과 같은 사업의 특성에 따라 가장 효율적일 수 있는 마케팅 조직의 모습도 달라진다. 따라서 기업들은 고유의 산업 특성과 고객, 전략에 가장 잘 부합하는 마케팅의 모습과 역할을 정의해야 한다.
그 동안 제품, 기술 중심의 사업을 해 왔던 많은 산업재 기업들은 내부에서 적합한 인재를 찾지 못하고 종종 소비재 기업의 마케터들을 영입해 고객 중심적 마케팅으로의 변화를 기대한다. 그러나 타깃 고객이 다르고 사업 고유의 프로세스나 특징에 차이가 있는 소비재 기업의 마케팅을 산업재 기업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또한 많은 기업이 마케팅의 전략적 역할을 고민하면서 전사 차원에서 마케팅을 총괄하는 CMO를 임명하기도 하지만, 어떤 사업에서는 CMO의 기능이 마케팅 기능의 성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유니레버 식음료 사업부의 실패 사례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CMO를 통한 표준화된 전략이 언제나 유효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유니레버는 지난 2000년 생활용품 부문(Home and Personal Care)과 식음료 사업 부문(Food and Beverage)에 최고 마케팅 책임자급에 해당하는 임원을 각각 임명하였다. 이들은 글로벌 시장에서 해당 사업부문에 대한 전권을 위임 받았다. 생활용품 사업부는 Dove, Lux, Sunsilk 등의 브랜드들에 대해 표준화된 접근방식을 채택해 글로벌화에 성공하였지만 식음료 사업부의 경우 제품의 지역적 기호에 따른 차이가 커서 표준화가 어려웠고 글로벌 표준화 전략은 성공하지 못했다. 이처럼 개별 시장의 규모가 작고 유사성이 떨어지는 다수의 시장에서 다양한 하위 브랜드를 가진 기업의 경우 굳이 강력한 중앙집권적 마케팅의 기능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결국 마케팅이 우리 기업에서 어떠한 전략적 역할을 해야 하는지 먼저 고민해 봐야 한다.
3. 준비된 마케터의 육성
마케팅의 어깨가 무거워진 만큼이나 마케팅 조직을 이끌 CMO 또한 많은 능력을 요구 받게 되었다. 그러나 산업의 특성을 이해하고, 전략적 고민이 가능하며, 브랜드 관리와 같은 마케팅 고유의 기능에 대한 능력까지 뛰어난 슈퍼맨은 그리 많지 않다. 마케팅 기능만을 경험한 사람은 전략적 통찰이 부족하기 쉽고, 외부에서 수혈한 인재는 새로운 조직에서 해당 산업 고유의 프로세스와 특징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스펜서 스튜어트(Spencer Stuart)에 따르면 CMO 자리를 공석으로 두고 있는 기업들은 작년보다 2배나 증가했다고 한다. 미국의 한 임원 채용 담당자는 “미국에 그러한 역량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50명 정도밖에 안 될 것이다.” 라고 말한다.
따라서 기업 스스로 마케팅 조직이건, 산업 전문가이건 상관없이 전략적 마케팅의 역할을 발휘할만한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멜트는 GE의 최고 관리자는 ‘위대한 Operator’에 머물지 않고 ‘위대한 Marketer’를 지향하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천명하면서 마케팅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GE의 CLP(Commercial Leadership Program)는 내부의 마케팅 지도자 후보들을 조직의 다양한 부문에 2년간 파견하여 마케팅의 중요성과 전문 지식을 현장에 전파하는 한편, 마케터들에게는 현장 이해의 기회를 마련해 준다. 또한 우주항공, 산업재 등 각각의 사업 분야에서 산업을 이해하는 마케터를 육성하기 위해 노력중이다. P&G의 전 최고경영자가 언급한 것처럼, 이제 전사적 혁신의 주체로서 마케터들은 ‘무엇을 개선할 것인가에 앞서 스스로를 개선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Steve Silver, “Bring on the Super-COM”, s+b, Summer 2003
G. McGovern, J. Quelch, “Outsourcing Marketing”, Harvard Business Review, March 2005
David Court, “The evolving role of the CMO”, Mckinsey Quarterly, No3, 2007
출처:LG경제연구원 [LERI. 2007. 11. 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