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망의 직업… "승객 성희롱에 화나" 투고도
'머리에는 남빛 모자를 받쳐 쓰고 몸에는 경편(輕便)한 양복을 입고 자동차 위에 올라앉아 아리따운 목소리로 "여기는 종로올시다" "여기는 동대문이올시다" 하고 외치면서 하루에도 수백명의 손님을 실었다가는 부리우고, 부리우고는 또 싣고 하는 뻐스 걸!….'(조선일보 1929년 3월 18일자)
1928년 4월 22일. 전차만 다니던 경성에 시내버스가 등장한 이 날, 버스 안내양인 '뻐스 걸'도 첫선을 보였다. 최초의 버스는 경성부에서 운영했으며 좌석 14석, 입석 8석의 22인승 버스 10대로 운행이 시작됐다. 경성역(오늘의 서울역)을 기점으로 남대문에서 광화문, 종로를 거쳐 헌병사령부(필동)에 이르는 노선 등 3개 노선을 운행했다.
버스 안내양의 공식 명칭은 차장(車掌)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뻐스 걸'이라는 신조어로 불렀다. 화려한 제복을 입은 뻐스걸들은 젊은 여성들의 선망의 직업으로 떠올랐다. 1970년대 한국 대졸 여성들의 선호도 1위이던 스튜어디스에 못잖은 인기였다. 운행 초기 버스 차장의 지원 자격은 '16세 이상 20세 미만의 보통학교 졸업 이상 학력의 여성'으로 제한했는데도 경쟁률이 4.5대 1에 달했다. 손님들에게 호감을 줄 만큼 얼굴이 예쁜 여성을 뽑으려고 '이력서에 상반신 사진을 첨부하여 신청할 것'도 요구했다. 1929년에 있었던 버스 차장 모집 땐 "36명이 응시했는데 미인은 그리 많지 못하였다"는 보도도 보인다.(1929년 11월 26일자)
'용모가 단정한' 차장들에게는 추근대는 남자들도 많았다. 늘 남자들이 따라다니는 '뻐스걸'들에겐 곧바로 '연애대가(大家)'란 별명이 따라붙었다. 그러나 버스 차장들이 겉보기보다 무척 고달픈 일상을 산다는 사실은 바로 알려지게 된다. 1931년 1월 17일자 조선일보에 한 버스 차장은 '뻐스 걸의 분언(憤言)'이란 글을 투고해 "뎀뿌라 학생(껄렁껄렁한 학생), 심지어 점잖다는 신사복 차림까지 야비하기 짝이 없는 '히야까시'(성희롱)를 내부린다…"고 항변했다. 조선일보 1933년 11월 26일자 '저물어가는 1933년 가두 여인/대경성(大京城)을 얽어매면서 질주하는 버스걸'이란 제목의 글은 '뻐스 걸'들의 애환을 이렇게 표현했다.
"날이 밝으면서부터 어둘 때까지 동서남북 그 어디를 물론하고 다리 한번 편안히 못 쉬어보고(…) 늙은 부모, 어린동생의 밥을 위하여 할 수 없이 판에 박은 듯 피가 족족 말려들어가고 살이 살살 내려들어가는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1960~70년대, 채 닫혀지지 않는 만원버스 차문에 매달려가며 가족들 생계를 책임지던 '차장'들의 애환은 일제시대부터 시작됐다.
'◘ 사회, 풍속,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CNN이 뽑은 미국 선망 직업 10위 (0) | 2011.02.22 |
---|---|
한국의 유망직업 변천사 (0) | 2011.02.22 |
서양여인들의 요강 (0) | 2010.10.04 |
막걸리의 예찬 (0) | 2010.07.04 |
70, 80년대 극장 풍경과 여배우들 (0) | 2010.07.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