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코게돈(Francogeddon)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 같아요.”
지난 17일 비까지 내려 더 을씨년스러웠던 스위스 취리히 시내 곳곳에서 만난 시민들 말에서는 불안감이 잔뜩 묻어났다.
이틀 전 스위스 중앙은행(SNB)이 전격적으로 스위스프랑화 환율 방어를 포기한다고 선언한 후 스위스프랑화 가치가 폭등해 수출과 관광으로 먹고사는 스위스 경제에 짙은 먹구름이 드리웠기 때문이다. 스위스 화폐 ‘프랑(Franc)’과 종말을 뜻하는 ‘아마게돈(Armageddon)’을 합쳐 만든 신조어인 프랑코게돈이 현실화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도 컸다.
취리히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곳 중 하나인 취리히 중앙역에서도 환율 변동에 따른 혼선이 쉽게 한눈에 들어왔다. 역사 내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는 편의점과 분식점에 적용 환율이 서로 다르게 표시돼 있을 정도다. 예전에는 사실상 ‘고정환율’이나 마찬가지여서 똑같았던 환율이 제각각으로 달라지면서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이다. 취리히 중앙역사 내 편의점인 ‘케이키오스크’는 1유로당 1프랑으로 ‘1대1’ 환율을 적용하고 있지만 10m 떨어진 분식점인 ‘부페익스프레스’에선 1유로당 1.1프랑으로 계산하고 있다. 지난주만 해도 1유로당 1.2프랑으로 두 가게에서 적용한 환율이 동일했다. 부페익스프레스에서 서빙을 하는 카밀 핫신 씨는 “중앙은행에서 고정환율을 사실상 포기하면서 환율이 하루하루 달라지다 보니 가게들도 혼란이 크다”며 “그냥 하나로 통일됐던 며칠 전이 훨씬 편했다”고 말했다.
취리히 도심에서 만난 한 택시기사는 “지난주만 해도 우리 서비스 요금도 유로당 1.2프랑으로 계산했지만 지금은 1대1로 계산하고 있다”며 “그냥 은행에서 환전해 사용하는 것이 편할 것”이라고 취재팀에 조언했다. 스위스 중장비 업체 ABB에서 중국 바이어를 관리하는 가우시 마르코 씨는 “스위스프랑화 가치가 급등하면 결국 스위스산 제품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다”며 “가격이 오르면 당장 중국 기업들이 우리 제품을 사지 않고 다른 업체로 갈아타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염려 섞인 목소리를 냈다. 마리코 씨는 “고가품인 스위스 시계 산업이야 가격이 오르더라도 어느 정도 고객에게 비용을 전가할 수 있어 상대적으로 타격이 작겠지만 나머지 수출·관광산업은 비상”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지난 15일 SNB가 환율 방어를 포기한다고 발표한 후 스위스프랑화 가치가 폭등하자 대다수 금융회사들이 스위스 경제성장률을 경쟁적으로 낮추고 있다. 당초 올해 스위스 경제성장률을 1.8%로 전망했던 스위스 최대 은행인 UBS는 성장률을 0.5%로 확 낮췄다. 당장 스위스를 찾는 스키 관광객도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관광산업 타격도 본격화할 것이라는 전망 속에 스위스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할 수도 있다는 극단적인 전망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택시 기사인 다니엘 샤퓌자 씨는 “우리 세대는 그래도 먹고살 만한 삶이었지만 다음 세대인 아이들에게는 점점 더 힘든 상황이 벌어질까 염려스럽다”고 덧붙였다. 취리히 중앙역 인근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요안 야킨 씨는 “스위스 금융권의 강점이던 비밀보장 원칙이 훼손되면서 경쟁력이 약해진 상황이었는데 또 스위스 중앙은행이 환율 방어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면서 환율 급변동을 초래해 신뢰를 잃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하루에 5조3000억달러나 손바뀜이 일어나는 글로벌 외환시장을 패닉 상황으로 몰고간 스위스발 환율 쇼크로 인해 치명적인 투자 손실을 입은 헤지펀드와 외환중개기관 등도 속출하고 있다.
스위스 중앙은행 측 약속만 믿고 스위스프랑화 약세에 베팅했다가 아무런 준비 없이 허를 찔리면서 일부 월가 딜링룸에서는 스위스프랑화 거래가 일시적으로 중단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운용자산만 8억3000만달러(약 8940억원)에 달했던 에버레스트캐피털 글로벌펀드는 스위스프랑화 약세에 베팅했다가 돌이킬 수 없는 환차손을 입은 채 펀드 해지에 들어갔다.
영국 소재 외환중개기관 알파리UK도 지급 불능 상황에 직면하면서 파산을 선언했다. 이 때문에 그동안 알파리UK에서 후원을 받아온 영국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팀 웨스트햄도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뉴질랜드 환거래 중개회사 글로벌 브로커스NZ도 파산 신청에 들어갔다. 일간 외환거래액 규모로 세계 1·2위인 씨티그룹과 도이체방크는 스위스프랑화 가치가 폭등하면서 각각 1억5000만달러(약 1616억원) 이상 투자 손실을 입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이 17일 전했다. 영국 바클레이스도 1억달러 넘는 손실을 입었다.
[취리히(스위스) = 서양원 부국장 / 정욱 기자 / 임성현 기자 / 뉴욕 = 박봉권 특파원]
중앙은행 신뢰 저하 최대 후폭풍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
스위스 중앙은행(SNB)이 지난 3년 동안 유지해 왔던 ‘최저환율제’를 포기했다.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단행된 만큼 초기 충격은 의외로 크게 나타나고 있다. 국내 증시에서도 코스피지수 1900선이 재차 붕괴됐다. 벌써부터 ‘프랑코겟돈(스위스 프랑화와 종말을 뜻하는 아마겟돈의 합성어)’이란 신조어가 나올 정도로 앞으로 닥칠 파장이 우려된다.
SNB가 자신의 신뢰에 치명적인 손상이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저환율제를 포기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금융위기 이후 고평가 압력에 시달려 왔던 스위스프랑화가 곧이어 터진 유럽 재정위기로 더 절상될 조짐을 보이자 자국 수출과 경기에 미칠 충격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1유로=1.20 스위스프랑화’로 고정하는 일종의 페그제인 최저환율제를 도입했다.
최저환율제는 한국에서도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시행했던 ‘최저 가격제’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특정 연도에 배추가 풍작을 거둬 시장에 맡겨 놓으면 배추 값이 폭락하고 농민은 생산비조차 건지기 힘든 상황이 발생한다. 이때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 균형가격보다 높게 최저 가격을 설정한다. 이 경우 당연히 농민은 보호받을 수 있다. 하지만 배추를 사들여야 하는 정부는 재정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인위적인 자원 배분 기능을 갖고 있는 최저 가격제를 단기간 사용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자체가 ‘정부의 실패’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오랫동안 사용하면 암시장이 형성되고, 2차적으로 배추 공급은 늘고 배추 수요는 줄어 최저 가격 유지를 위한 정부의 재정부담은 더 증가하게 된다. SNB가 최저환율제를 포기한 것도 늘어나는 유로화 매입 부담이 직접적인 원인이다.
환차익을 겨냥한 투기성 각종 캐리자금의 유입도 확실시된다. 이런 부작용을 차단하기 위해 SNB가 스위스로 유입되는 외국 자금에 대해 마이너스 금리 폭을 더 확대하는 대내외 예금금리 차별화 정책을 함께 발표했다. 하지만 최근처럼 저금리 시대에는 금리 차보다 환차익이 국제 간 자금 흐름에 더 크게 영향을 미쳐 그 효과가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에는 명암이 엇갈릴 것으로 예상된다. 최저환율제 포기 이후 유로화 약세가 더 빨리 진행된다면 유로 수출과 경기에는 반사 이익이 기대된다. 특히 PIGS(포르투갈·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에는 더 큰 혜택이 예상돼 그리스 총선을 앞두고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우려가 확산되면서 균열 조짐을 보이는 유럽 통합을 봉합시키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부담도 만만치 않다. SNB는 최저환율제 유지를 위해 매입한 유로화로 유로채를 매입해 왔다. 최저환율제 포기 이후 유로채 시장에서 큰손 역할을 해온 SNB의 비중이 떨어지면 조만간 미국식 국채 매입을 통해 양적 완화 정책을 계획 중인 유럽중앙은행(ECB)과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에게 상당한 혼란을 줄 가능성이 높다.
특히 SNB와 최저환율제를 믿고 유로 국채를 사들이거나, 스위스프랑화 쇼트(매도) 포지션을 취하거나, 스위스프랑화 표시 모기지론(주택담보대출)에 가입한 투자자도 손실이 예상된다. 전형적인 ‘꼬리 위험(tail risk)’이다. 꼬리 위험이란 발생 가능성이 희박하고 예측하기 어렵지만 일단 발생하면 커다란 손실을 초래하는 위험을 말한다.
SNB를 비롯한 각국 중앙은행의 신뢰에도 커다란 손상이 예상된다. ‘은행의 은행’으로 최종 대부자 역할을 해야 하는 중앙은행이 신뢰를 지키는 일은 생명과도 같다. 특히 세계가 하나의 시장이 된 시대에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 중앙은행일수록 신뢰를 지켜야 세계 경제와 국제금융시장이 안정을 찾을 수 있다.
위기 극복이라는 명분이 있긴 했지만 2008년 금융위기, 2012년 유럽 재정위기를 잇달아 거치면서 양적 완화를 통해 대규모 자금을 공급해온 선진국 중앙은행의 신뢰에 균열을 보여 왔다. SNB는 미국 중앙은행(Fed)보다 신뢰가 높게 평가된다. 최저환율제 포기를 계기로 SNB까지 믿을 수 없게 되면 각국 중앙은행에 대한 신뢰는 의외로 크게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법화(法貨)’로 상징되는 신용화폐 시대에 중앙은행마저 믿을 수 없다면 종전 이론과 관행으로 설명할 수 없는 ‘뉴 노멀 대혼돈(new normal chaos)’이 닥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