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
연변성보그룹 정영채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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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2007/09/10 흑룡강신문 |
○ 약속의 해방로 350번지
“여생을 이들과 함께 살고파…”
“내 동포 부자 만드는 것이 평생 소원” 이라는 정영채 회장, 그를 아는 조선족들은 정 회장을 “우리를 위해 좋은 일 하는 한국사람”이라 불렀다.
지난 8월 연길시 번화가인 해방로 350번지에 자리잡은 연변성보호텔 회장사무실에서 만난 주인공, 보통키에 탄탄한 체구, 일흔고개를 넘었지만 여전히 젊은이 못지않게 열정적인 모습이었다.
“사실 중국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초기엔 천진에 투자하려 했다가 연길이란 곳이 있다기에 누군가를 따라 이곳에 한 번 다녀온다는 것이 인연이 되어 이렇게 연변에 봇짐을 내려놓게 됐습니다.” 그는 연길에 자리잡게 된 사연을 이야기하며 감회를 금치 못했다.
“연길역에 내렸는데 글쎄 우리글 간판들이 보이지 않겠수, 그때 왜 그리 좋던지, 날 마중하러 온 사람들이 모두 우리 말을 하더라구요, 깜짝 놀랐지유”
모두가 다 알고 있듯이 그때만 해도 한국에서는 사회주의 중국에 대한 인식과 정보에 큰 장벽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이곳의 동족들은 아주 어렵게 살더라구요. 내가 먹고 살만하니깐, 그리고 나이도 60이니깐, 남은 여생은 이 분들에게 큰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유.”
일단 결심을 했으니 연길에서 제조업을 하든 비즈니스를 하든 서울과 한국을 오가며 프로젝트를 찾아나섰다. 그러던 어느날 연길시에 비즈니스 1 번지가 될만한 부지가 나타났다. 한국에서 몇 십 년간 기량을 닦고 성공을 거듭한 무스탕옷가공과 제조업을 그만두고 60세 고령에 미지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것 그 자체야말로 크나큰 모험이고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매입하려는 부지는 이에 앞서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매입협의서에 서명도 했고 이런저런 약속도 했지만 한국에 돌아간 후로는 모두 종무소식이라 시비가 좀 많은 땅이었다. 그리하여 연길시 관련 부문들에서는 정영채 회장이 이 땅을 매입하려는 의향을 보이자 반신반의하는 태도였고 93년부터 제곱미터당760위안이던 땅값도 2200위안으로 껑충 올랐었다. 그러나 한 번 품은 “소원”을 이루기 위해 갈등 끝에 그는 끝내 토지매입의향서에 서명했다.
그런데 의향서에 의하면 15일 내로 토지값을 입금시키지 못하면 토지매입이 자동으로 무효가 된다고 밝혀져 있었다. 중국에서 서울로 돌아가는데 벌써 3일이 걸렸다. 한국에서 은행지점장을 만난 정 회장은 이렇게 속을 털어놓았다 “한국사람의 좋은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기업인의 약속은 곧 생명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급합니다.” 정 회장의 거동에 감동된 한국 은행 측에서는 적극 그를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정 회장은 계약체결 후 한국에 나가 단 4일만에 자금재가와 해외투자허가서까지 획득하게 되었고 중국을 떠나온 지 7일만에 연길에 토지값을 송금했다.
연길시정부는1994년 4월 연길시 호텔에서 환영연을 마련했고 한편 소득세, 지방세 등 여러면의 우대정책을 약속했다.
○ 갈등과 위기의 시험
“내가 동족에게 짐이 될 거면…”
전라남도 목포가 고향인 그는 중국 진출 초기 한국과 다른 중국의 법규와 문화 때문에 크고 작은 갈등과 위기를 겪었으며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해 큰 낭패를 맛보기도 했다.
그 당시 연길시의 시책은 아주 좋았으나 관련 부문의 일부 사업가들의 그릇된 사업작풍으로 말미암아 관련 지도자가 약속한 투자수속이 차일피일 미루어지거나 어떤 부문은 18번씩 다녀와도 영업허가증을 손에 쥐지 못하는 인위적인 장애가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1994년 7월, 정영채 회장이 8천만위안을 투자해 건설할 성보빌딩종합건물이 드디어 착공하게 됐다. 그런데 건축시공이 막바지단계에 들어섰을 때 일부 시공에 허점이 드러나자 시공자는 공사를 포기했을 뿐 아니라 공사대금을 주지 않았다는 허위사실을 꾸며 성보를 법정에 세우기까지 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저러한 뜻밖의 일들은 정영채 회장의 심신을 몹시 괴롭혔다. 하지만 정 회장은 시공비용을 더 지불하면서 우수한 시공자를 청하여 시공을 계속했다.
1997년 한국에서 불어 닥친 IMF사태는 중국 진출을 위해 매진하던 그에게 자산동결 및 자회사 부도라는 치명상을 주었다. 한국에서 자금을 들여와 여기 저기에 지불해야 했는데 그때 시공중인 성보는 엘리베이터, 계단, 화장실도 채 만들어지지 않은 채 골격만 서있는 상태였다. 그리하여 나중엔 공사중인 성보를 팔아 빚을 값자는 주장들까지 나왔다. 극심한 심신의 시련으로 정영채 회장은 입이 부어올라 매일 따뜻한 물 몇 숟가락 정도 넘길 수 있었다. “그럭저럭 40일이 지나니 조금씩 죽을 먹을 수 있더라구요, 그때 난 사람이 40일을 먹지 못해두 살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수다. 좋은 뜻을 갖고 왔으니 동족들과 정부에서 의례 가마를 태워주려 했는데…나중에 이 꼴이 뭐냐, 동족에게 짐이 될 바에는 차라리 오지 않은 것보다 못하지…이런 생각을 하면서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슬펐겠어유…”
○ 창출과 나눔의 기쁨
“동족을 부자 만드는 회사 ”
"성보”는 94년 초기 이런 광고를 냈다. “부자 되렵니까. 성보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근년에 들어서 이 광고타이틀은 “부자 만드는 회사 성보호텔”로 바뀌었다. "성보”의 “혼”은 “화합으로 부를 창출하며 나눔과 기쁨을 함께 하는 세상”이다. 이는 “성보사람들”이 누구나 다 외울 수 있는 글귀이다.
“14년 전에 내가 ‘부자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성보로 오십시오’하고 말할 때 모두들 이 말을 믿을 수가 없었고 어디 정신이 좀 이상한 양반이라 했을지 모르지유. 그러나 지금의 ‘성보’ 사람들은 죄다 이를 달갑게 받아 들이고 있답니다.”
그때 지금의 성보호텔 자리는 지저분했고 눈에 띄는 상가라곤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곳이 지금은 어렵지만 내일도 어렵다고 할 수 없는 일이다. 바로 지금 이곳이 어렵고 지저분하기에 이제 곧 깨끗하게 되고 흥성흥성하는 미래가 올 것이고 분명 누군가 이 일을 착수해야만 될 것이 아닌가? 어느 나라의 큰 시장도 바로 이렇게 이루어지고 확장되는 법이다. 연길에서 시장조사를 하면서 그는 이제 다가올 대변혁을 예고할 수 있었다.
그때 이곳에서 조선족 장사꾼들은 2천-5천위안씩 얻어 보통 책상크기만한 자판을 놓고 장사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때 한족상인들은 점포, 조선족들은 자판정도를 갖는 것을 의례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마치 점포를 갖고 장사하는 것은 한족 전용으로만 간주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지켜보며 정영채 회장은 “내 동족들에게 부자 되는 길을 가르쳐 줘야겠다”는 강한 충동이 생겼다고 했다. 그러나 십여년이 지난 오늘. 성보의 상인은 90%가 조선족상인이다. 결코 “성보”의 한족상인들이 발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조선족상인들의 발전속도가 급속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성보백화에는 320개 가량의 점포가 있는데 한 점포당 5명으로 계산하면 1천 5백명, 거기에 업주까지 하면 1천 800명, 관련 종사인원을 망라하면 그 “식구”가 총 2100명에 달한다. “성보의 조선족들은 대부분 한국에 나가 물건을 구입해다 파는데, 한국서 살라고 권해두 머리를 저을 겁니다. 그러니 성보상인들 중 한국 가서 불법체류하는 사람이 있을 수 없지유. 이 점에 대해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모두들 이곳에서 보람차게 살지요” 정 회장은 이렇게 말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의 성보상인 중 150여명이 자가용을 갖고 있고 300여명이 자기 아파트를 갖고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으며, 말그대로 “부자”가 되었다. 초기에는 “동으로 하면 서로 가던” 사람들도 이젠 “정 회장을 따르면 부자가 된다”고 말한다. “성보”는 해마다 국가에 내는 세금만 해도 500만위안이 넘는 기업으로 발돋음했다. 정 회장은 연변에서 300여명 조선족 백만장자, 천만장자를 만들어냈고 마침내 중국에 와서 동족을 부자로 만들겠다는 “소원”을 이룬 셈이다. 정 회장은 “나의 소원이 나와 성보를 성공시켰다”고 말한다.
성보그룹 김성순 총경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성보’를 택한 것은 회장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것을 진실하게 말하며 진실하게 일한다. 한때는 역경을 이기지 못해 갖고 온 2천만위안을 그대로 연변에 나누어 주고 돌아가려고까지 했었지만 그래도 연변사람들에게 ‘물고기를 잡는 법’을 배워주려고 여생을 다 바치는 그다.” “부자가 되렵니까? 성보가 도와 드리겠습니다”이는 절대 광고만이 아닌 그의 철학이며 실천이다”
올해 수십명 성보상인을 상대로 조직한 기획회사 한국HR 조인스의 제1기 서비스교육 졸업식이 성보호텔 회의실에서 있었다.
“큰 거상이 되려면 이것이 필수다” 졸업식에서 정영채 회장이 한 얘기다. 10여년동안 “부자 됩시다”를 회사의 구호와 정신으로 고집하면서 수많은 부자들을 배출시킨 정영채 회장이 오늘날 이젠 부자를 뛰어넘어 거상을 논한다.
기업문화에 남다른 중시를 돌려온 성보그룹은 이번에도 거금을 투입해 백화부문, 사무직부문, 식당서비스부문의 사장, 직원, 종업원들에게 수개월간 야간을 이용해 서비스전문 교육을 받게 했다.
“성보상인회” 안려영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정 회장은 미국, 한국으로부터 인재를 초빙하면서까지 우리에게 부자가 되는 법을 배워줬습니다. 우리 300여호 업주들 중에는 적지 않은 업주들이 이자돈을 꿔가지고 입주했는데 지금은 많은 업주들이 부자가 됐습니다.”
○ 성공의 두음법칙
“신뢰로 쌓고 나눔으로 큰다”
정영채 회장은 3년전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라는 자서전을 출판했다. 그 자서전에는 중국에 진출하여 겪은 여러 가지 고초와 더불어 그간 있었던“고운 정 미운 정”이 그대로 숨쉬고 있었다. 정 회장은 자신의 자서전에 친히 싸인해 기자에게 선물하면서 “상처로 남는 기억들도 많지만 그보다 아픔을 같이 해주고 지켜준 고마운 분들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그 같은 고마운 분들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성보를 상상두 못하지유”
IMF비상시기 한국에서 들어오던 건축자금이 동결되었을 때 주, 시 정부 각 관련 부서들에서 “성보”에 특수결재를 해주고 아울러 대출을 내주어 시공이 마침내 순조롭게 진척되게 했다. 1998년 성보빌딩이 완공될 때까지만 해도 국내에서는 외국백화점이나 호텔이 허가되지 않았다. 이 고충을 헤아린 관련 부문에서는 백화점 경영허가 대신 한국상품전시매장으로 오픈을 할 수 있게 배려했다.
지난날 “성보”가 어렵던 시기 백철수 시위서기는 시관계 부문과 함께 매주 한번씩 “성보”가 봉창한 애로사항을 연구하는 회의를 갖기도 했고 성보호텔 내에 파출소를 세우는 방안까지 연구한 적 있다고 한다.
어느날 연길시공안국 김광진 국장은 성보에서 있은 공안대회에서 만약 사회불량배들이 성보에 드나들며 시비가 벌어지거나 사고가 날 경우엔 공안국 치안대장이 그 즉시로 자리를 내놔야 한다는 명령까지 내렸다.
“성보” 가 극심한 자금난의 시련을 겪고 있을 때 남상복 주장이 친히 나서서 성으로, 중앙으로 다니며 마침내 2천만위안의 대출을 마련했다. 그리고 남 주장은 이틀이 멀다하고 현장을 15층에서 지하까지 오르락내리락하며 자주 들러보았다. 역시 “성보”가 어려운 고비를 넘기던 때 교통은행 700만위안 대출에 담보를 서 준 “좋은 양반” 토지국 김성은 국장, 초창기부터 뜻을 나누며 두터운 친분을 쌓아온 연변대학 박문일, 임범송 교수…이 같이 성보를 사랑하고 도와준 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성보가 있게 되었다고 정영채 회장은 말한다…
한편 정영채 회장을 아는 조선족들은 그는 “우리를 위해 좋은 일 하는 한국사람”이라 했다.
성보는 고고성을 울린 날부터 사명감을 잊지 않고 불우이웃돕기 등 사회공익행사 성원에 발벗고 나섰다.
–그 동안 성보는 자체의 경비를 내어 중한 수교 5주년, 10주년, 15주년을 기념행사로 세차례나 연변 경제문화인시찰단을 조직했다. 성보는 총 46만여위안에 달하는 구제물품과 현금을 수재민들에게 보내 주었다. 성보는 연변텔레비전방송국과 공동으로 “사랑으로 가는 길”프로를 주최, 총 6만여원의 현금과 물품을 생활고로 고생하는 학생에 전달했다. 성보의 후원으로 연변대학에서는 공화국 창건 50돌 경축 1천명 장거리 경기를 펼치기도 했다. 성보는 이 몇 년 사이에 총 180여만위안의 현금과 각종 생필품을 사회에 헌납했다. 지난 7월에도 방문취업제 한국어시험 무료강습반에 5백명씩 모이는 회의 장소를 2개월간 무상으로 제공해 동포들과 함께 나누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다.
- 정녕 성보는 단순히 돈을 버는 시장공간만이 아닌 삶의 보람을 느끼는 터전이다.나눔의 법칙으로 커가는 성보와 성보사람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가꾸어 가는 것이 바로 성보의 “꿈”이다.
○ 사랑과 믿음의 생리
“좋은 만남은 기적을 일으킨다”
“현지 체제의 생리에 맞게 움직이고 착한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면 어느 사회에서나 길이 열리는 법이다.” 한국에서 “ 내가 본 연변”이라는 경영특강에서 정 회장은 “중국정부 시책에 미안한 일을 조금도 하지 않았기에 성공했다. 정부에 의거하고 사회적 중시를 받게 되면 자연히 성공과 멀지 않다.”고 밝혔다. 그는 중국에서의 자신의 성공비결은 동족에 대한 사랑과 중국 정부시책에 대한 믿음이라고 했다.
그의 최고 좌우명은 신용이다.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도 그는 자신을 믿어주는 지성인들과 정부에 신뢰를 지키기 위해 극심한 자금난 속에서도 예정된 사업을 차질없이 진행시켜 관계자들을 감탄시켰으며 믿음으로 신뢰를 쌓았다. 이 같은 신뢰는 나눔의 법칙으로 커가고 장대해지고 다시 역동적인 신뢰를 낳고 성공의 청사진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정 회장은 이렇게 말한다. 외국에 진출한 기업이 성공하자면 기업 운영에서 현지화를 해야 한다는 것은 진리처럼 인정을 받지만 나의 생각은 무엇보다도 손잡고 꿈을 이룩할 파트너를 잘 만나야 한다. 이것이 현지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다 현실을 살펴보면 외국투자인들이 실패하는 주요한 원인의 하나는 바로 파트너를 잘못 만난 데 있다고 생각한다.
“10여 년간의 창업에서 가장 큰 수확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김성순 총경리를 얻은 것이다. 그처럼 간고한 시험이 들 때마다 내가 설마하고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보았다면 오늘의 “성보”는 영원히 연변땅에 없었을 것이다. 김 총경리가 나에게 준 것은 자아를 넘어선 믿음이었다. 그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우리는 하나하나의 난관을 헤쳐나가며 성공으로 다가설 수 있었다.” 좋은 만남은 사람을 바꾸며 사람을 살려내기도 한다. 히딩크와 한국축구의 만남에서 보았듯이 좋은 만남은 기적을 일으킨다. 새로운 생명, 새로운 신화도 좋은 만남에서 창조된다… 정영채 회장과 김성순 여사의 만남이 바로 이 같은 만남이었다.
○ 추수를 위한 밀알
“후대가 커야 미래가 있다”
금년 3월 31일, 연변성보장학재단 설립 및 제1회 장학금발급의식이 성보호텔에서 거행됐다.
연변대학 총장 김병민 교수는 연변 사상 처음으로 기업문화로 중한 문화교류와 연변지역 민족교육발전을 위하여 거대한 기여를 한 정영채 회장을 중한문화교류의 앞장선 선봉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앞으로 성보장학재단의 도움으로 사회의 기둥으로 자라는 모든 이들과 이를 지켜보는 연변, 나아가서는 중국 조선족들은 정영채 회장을 잊지 않을 것이라 찬양했다.
“후대가 커야 미래가 있는 법이다”, 미래 10년을 바라보며 성보는 민족교육을 위한 연변성보장학재단을 출범해 체계적인 불우학생 돕기에 나섰다. 이 장거 역시 정 회장의 중국에 올 때 간직했던 그 “좋은 소원”이 맺은 열매라 해야 할 것이다.
연변성보장학재단은 현재 “연변대학 연구생 장학금”, “연변대학 대학생 장학금”, “연변 고등학생 장학금”등 3가지 장학금을 설치했는데 금년 제1회로 17만 5천위안을 지급, 금후 해마다 20만위안씩 지급하기로 연변주위, 주교육위원회와 10년간 계약을 체결했다. 이 장거는 지금 이미 정부 관련 행사로 부각된 것이다. 중문판 “길림일보”는 이 행사 기사를 다루면서 한 기업에서 장학재단을 설립하기는 중국 최초라고 전했다.
“10년이 아니라 성보가 있는 한 계속되고 그 범위도 늘려 앞으로 자손들에까지 넘겨줄 겁니다.” “성보사람”들은 정 회장의 말대로 하면 이제 “살만하니깐” 장학재단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는데 장학재단에 매인당 월 100-1000위안까지 기부하고 있다.
정 회장은 민족인재의 요람인 연변대학에 특수한 정이 있었다. 초기 창업시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연변대학장학금 설립 뿐 아니라 성보호텔을 연변대학 경제학원의 실습기지로 제공하고 연변대학 교수이사회 이사로, 객원교수로 강단에 나서 친히 자기의 지식과 노하우를 대학생들에게 전수하는 기회도 자주 갖는다.
10여년간 정영채 회장을 지켜본 연변대학 임범송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 정영채는 성실하고 정직하며 믿음직한 사람이다. 그는 연변을 사랑하고 중국을 사랑하는 인간이었기에 연길시 첫 영예시민이 될 수 있었다” “기업인으로서의 정영채는 ‘오뚝이’정신과 ‘탱크’정신을 모두 소유한 훌륭한 기업인이다.그렇기 때문에 그는 올해 길림성 유일의 ‘장백산우의상’ 한국인 수상자가 된 것이다.” “정영채는 문화인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그는 연변의 문화사업과 문인을 아끼는 문화인의 참된 벗이다.”
○ 빛을 발하는 성보행전
“심양에 중국 최대 한국상품 집산지 세운다”
“내 나이 61살에 중국에 와서 사업을 시작해 오늘까지 쉼을 모르고 분투해왔습니다. 올해 나이 75살입니다. 우리 “성보”는 이제 곧 심양에서 지금의 “성보”보다 규모가 곱절 더 큰 백화점을 인수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더 많은 부자들이 나올 것입니다.”
올해 한국국회 산하 사법단체 초청으로 제3회 연변경제문화인 시찰단 한국방문시 외무통상위윈회 김원웅 위원장과 만난 자리에서 정영채 회장은 “성보”의 성장 노정과 더불어 금후 심양에 중국 최대 한국상품집산지를 조성할 구상을 내놓았다. 성보가 현재 연간 한화로 1천억원에 달하는 한국상품을 중국에 판매하고 있다는 상황회보를 듣고 김 위원장은 이를 극찬하며 금후 적극 지지할 것이라고 밝히고 아울러 성보그룹인원과 성보상인들에게 복수비자를 약속했다.
정 회장이 지금 본격 추진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심양시 서탑에서 5백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원 심양백화점 부지, 현재 기존 건물의 양측 4층과 5층 건물을 8층으로 통합하게 되는데 그 건축면적은 약 4만제곱미터에 달한다. 이 면적이 지금 연변성보호텔의 두배가 넘으며 상품물량은 무려 지금의 10배에 달할 것으로서, 명실상부한 중국 최대 한국상품집산지로 될 전망이다.
정 회장에 따르면 이 건물은 이미 인수 마무리 단계에 있고 9월 중순부터 공사에 들어간다. 최근 심양시에서는 원 한국거리설계를 변경, 심양시 화평구에서는 “성보”를 중심으로 백화오락시설을 입주시키고 “한국거리”를 조성하게 되며 이곳에서 매년 한국주행사를 하게 된다.
미래를 위해 성보는 어떤 대비책들을 갖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정 회장은 이렇게 터놓았다. 한국이나 외국의 백화점의 발전을 돌이켜보면 “성보”도 미래 20년 사이 어느 땐가 엄청난 위기가 올 것이다. 그 어떤 성공한 기업도 격동기를 맞이할 수 있다. 이러한 격동을 대비하는 방안이 있어야 한다. 현재 연변의 많은 조선족들은 많이들 한국, 일본, 그리고 기타 연해도시로 빠져 나가고 있으며 그 추세가 지속되고 있다. 그러면 연변기업은 누가 이끌 것인가. 그 대비책으로 시찰을 거쳐 서북 감숙성에 백화점을 차릴 타산, 그곳에서 직원들을 모집하고 우리 말 공부를 시켜 “성보”에 취직시킬 예정이며 지금 그 구상을 실천에 옮기는 중이라 한다.
정영채 회장 프로필
연변성보국제상무빌딩유한회사 이사장
연변성보백화 한국상품도매센터 이사장
연변성보장학재단 이사장
연변대학 객원교수 연변대학 이사회 이사
길림성 정부, 연변주정부 경제고문
1997년 길림성 연길시 영예시민 칭호
2004년 자서전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출판
2004년 길림성 “우수외국전문가” 영예칭호
2006년 길림성 한국인 중 첫 “외국인영주권”획득
2006년 길림성 외국인 최고상 “장백산우의상”수상
/박백림 기자 bailinp@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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