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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콩 로스팅의 과학적발견

구봉88 2012. 2. 11. 10:10


 

출처:[동아일보]

이공계 대학의 작은 실험실을 보는 것 같다. 10m² 남짓한 공간은 각종 실험도구로 빼곡하다. 배율이 다른 전자현미경들, 표면장력계측기, 수분분석기, 색도계, 편광기, 액상 점성분석기, 전자온도계, 진동계측기…. 이름조차 생소한 기구들과 여러 가지 시약병이 네 개의 실험탁자 위에 빈틈없이 놓여 있다. 전자현미경과 특수유리 속 각종 기계가 결합된, 누군가 직접 제작한 듯한 계측기구 두 점은 공간의 가장 앞쪽에 배치돼 있다.





예로부터 와인이 감성과 몽상을 표상했다면 커피는 이성과 각성을 상징했다. 경험과 감각이 풍미하는 한국의 커피 세계에 배동근 씨는 분석과 과학의 잣대를 내놓았다. 그의 공간은 작은 실험실이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이 '연구실'의 주인은 배동근 씨(53). 배 씨는 1980년대 후반부터 국내 오디오 마니아들 사이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던 오디오 전문가다. 하지만 이곳에 오디오와 관련된 것은 클래식 음악 CD 수십 장뿐이다. 이 많은 기구들은 오직 커피를 위해서 배 씨가 10년 동안 모은 것이다. 연구실 이름도 커피분석센터(Coffee Analysis Center)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만나고 싶을 때' 마시는 커피가 딱딱하고 차갑게 느껴지는 기계들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은데 그가 말한다. "커피를 둘러싼 신비의 영역을 최대한 캐보고자 하는 거예요."

커피콩과의 교감

바야흐로 커피가 대세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원두커피의 시대다. 원두커피를 주로 판매하는 커피전문점이 지난해 전국에 1만 곳을 넘어섰고 매출액도 2조 원을 돌파했다. 동서식품의 국내 커피시장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국민 1인당 연간 약 40잔의 원두커피를 마셨다. 원두를 볶고(로스팅) 빻고(분쇄) 내리는(추출) 법을 가르치는 사설 커피학원은 전국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다. 커피학과를 신설한 대학이 등장했고, 부설 평생교육원 등에서 커피를 가르치는 과정이 있는 대학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온라인 커피 동호회인 '커피마루'는 회원이 8만6000여 명이나 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배 씨처럼 커피를 바라보고 관찰하지는 않는다.

그는 지난해 말 'Essence of Coffee Roasting·커피 볶기의 정수(精髓)'라는 책을 출간했다. 말린 커피콩(원두·原豆)을 잘 볶는 방법을 배우기란 녹록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누구에게서 배우는지에 따라, 어떤 로스팅 기계(로스터)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볶는 방식과 시간이 다 다르고 원두의 산지에 따라 또 달라진다. 익어가는 과정의 변곡점인 첫 번째 크랙(원두가 갈라짐) 또는 파핑(원두가 펑 소리와 함께 튐)이 일어나는 지점도, 원두(혹은 생두)가 언제 무슨 색으로 변해야 잘 익어간다는 건지를 판단하는 기준도 각양각색이다. 그렇다 보니 커피콩 볶기에는 변수가 너무 많아 통일된 기준을 정하는 건 무리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배 씨는 말한다. "누구도 로스팅 과정과 관련해 의사소통을 하지 못해서 그런 거죠." 그의 연구실을 찾는 사람들에게 그는 공언한다. "콩 하나를 못 볶아서야 만물의 영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커피콩을 단 한 알만 볶는 기계를 자체 제작했다. 일반 로스터는 1kg에서 수백 kg까지 커피콩을 넣어 볶는다. 그렇기 때문에 콩이 볶아지면서 어떻게 색이 변해 가는지, 언제 크랙 또는 파핑이 발생하는지 정확하게 측정하기가 어렵다. 사람들은 대부분 한 종류의 로스터를 오랫동안 다루면서 쌓이는 경험을 통해 체득할 뿐이다.





배동근 씨의 저서 '커피 볶기의 정수', '커피 분쇄의 정수', '커피 추출의 정수'도 잇달아 나올 예정이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만든 '마이크로로스터'에 커피콩 하나만을 넣고 열을 가하면서 발생하는 물리적 변화를 분 단위로 관찰, 측정하고 사진과 영상으로 담았다. 지난 3년 동안 커피콩을 1000개 넘게 볶으며 그가 얻은 건 콩 볶는 두 가지 공식이다. 알고 보면 콩이 스스로 말해준 것들이다.

첫째, 콩을 볶은 지 3분 30초(±30초)가 지났을 때 콩이 노란색(정확히는 연노란색)을 띠면 그때까지 열처리를 잘했다는 뜻이다. 처음 커피콩을 로스터에 투입할 때의 온도도 적절하고 큰 손상을 주지 않은 채 잘 익히고 있다는 것이다. 흔히들 커피콩이 열을 받으면 변하는 색을 8가지로 구분하지만 육안으로 선뜻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노란색은 색맹만 아니라면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다.

▼12번 망가뜨린 끝에… 마침내 그만의 로스터 만들어내▼





마이크로로스터에서 커피콩 하나가 분석을 기다린다. 배동근 씨가 감각 대신 기계를 선택해 뽑아낸 정보 덕에 우리는 커피에 더욱 감성적으로 끌리게 된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둘째, 로스터에서 10m 떨어져 있어도 들리는 큰 소리가 날 때가 있다. 바로 1차 파핑이다. 실험 결과 5분 30초(±30초) 정도 지나면 일어나는 것으로 밝혀졌다. 즉, 커피콩이 노란색으로 변한 후 2∼3분의 간격을 두고 1차 파핑이 일어나면 잘 구워지고 있다는 방증이 된다고 그는 말한다. 따라서 1차 파핑 이후 열을 조절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부드럽게 익어가고 이후 용도에 맞게 향기나 색으로 판단해서 꺼내면 된다는 것이다.

"커피 로스팅을 배우는 많은 사람이 기계에만 의존합니다. 기계가 바뀌면 어떻게 손을 써야 하는지 모르죠. 물론 로스팅이라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과학적 원리를 알면 콩과 대화하고 교감할 줄 알게 되고 나중에는 로스터를 상황에 맞춰 조율할 수 있습니다. 과학을 알고 나면 기술은 아주 쉽지요."

국내외 커피 관련 책 600여 권 탐독

배 씨의 최종 학력은 고졸이다. 그가 쓴 책과 활용한 기기들을 보고 있자면 공업고등학교를 나왔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왔다. 오디오를 공부할 때도 그랬던 것처럼 그는 "궁금하다고 생각하는 건 끝없이 팠다". 밥 먹고 오직 커피만 공부했다. 커피 관련 국내외 서적을 600여 권 사서 읽었다. 그의 책 참고문헌 목록에 이 서적들의 제목이 모두 실려 있다.

연구실 기계는 50여 종. 이 중 커피 전문 분석기구는 단 한 종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다 응용장비들이다. 다른 시료를 분석하는 기기들을 사서 커피 분석 프로그램을 스스로 짜고 여러 번 실험을 거쳐 최적화했다. 잘 모르는 데다 우리나라에서는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측정을 하려다 보니 시행착오가 적지 않았다.

그는 액상 커피의 표면장력을 측정해 보려고 표면장력기를 두 대 샀다. 한 대는 신형으로 1000만 원짜리. 다른 한 대는 중고였다. 혹시 더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을까 싶어서 계면(界面·서로 맞닿은 두 물질의 경계면)장력기를 비슷한 가격에 두 대 더 샀다. 아뿔싸! 커피는 물에 섞이면 계면이 생기지 않고 섞여버리는 게 아닌가. 무용지물이 됐다. 커피의 물성(物性)을 잘 몰라서 생긴 일이었다.

물질을 가열해 말린 뒤 저울에 달아 수분이 얼마 있는지 측정하는, '사토리우스'사의 수분분석기를 샀을 때 일이다. 배 씨는 이를 이용해 액상 커피에 들어있는 커피 '건더기'를 측정하는 데 이용했다. 분쇄한 커피를 추출했을 때 어느 정도 물과 섞였는지를 알아보는 중요한 실험이었다. 사토리우스사의 한국지사 직원들이 이걸 보고는 "이 기기를 이런 데 쓰는지 처음 알았다"며 독일 본사에 보고하겠다고 했다.

마이크로로스터는 오디오 전문가로 앰프며 스피커를 직접 조립하고 만든 기술이 총동원된 그의 작품이다. 감히 전 세계에서 그만 소유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1000도를 견디는 특수유리로 통을 만들었고, 전기로 열을 내는 세라믹히터를 달았다. 볼록렌즈를 외부에 부착하고 디지털카메라 및 200배 전자현미경과 연결해 콩이 익어가는 전 과정을 지켜보고 기록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모든 것이 설계도면 하나 없이 그의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오디오 세트와 관련해 단골로 이용하던 청계천 공구사에 특별히 주문해 유리를 깎고 특수강을 손질해 만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통 속에서 콩을 잡고 열을 지탱하는 도구였다. 콩이 열을 받아 부피가 커지고 크랙과 파핑이 생길 때 튀어나가지 않도록 신축성도 있어야 했다. 고민을 거듭하다 생각해 낸 것이 조직검사에 사용하는 의료용 핀셋이었다. "의료기기 가게에 가서 7개를 달라고 했더니 '어느 병원에서 오셨느냐'고 하더라고요." 독일 '헤부'사 제품으로 개당 22만 원 하는 핀셋을 사서 콩을 잘 집을 수 있는 악력(握力·약 50g중)을 내면서도 신축성이 살아 있도록 손수 선반작업을 통해 갈았다. 4개를 망치고서야 겨우 하나를 만들어냈다. 230도의 열을 내는 마이크로로스터는 이런 과정을 거쳐 12번 파손되고 나서야 완성됐다. 그렇게 얻은 모든 결과와 데이터는 커피콩 분석사진 1500여 장과 함께 그의 책에 담겼다.

"이런 기기들을 사는 사람이 두 부류가 있는데, 로또에 당첨됐거나 아니면 저 같은 사람이지요. 저를 얼간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그는 왜 커피에 몰두하게 됐을까.

합리성을 찾아서

1997년 외환위기로 몸담고 있던 오디오 전문 계간지가 폐간되면서 그는 직장을 잃었다. 오디오 전문가로 살면서 생계유지에는 큰 걱정이 없었지만 앞으로 무엇을 하면서 살 수 있을까 생각이 많았다. 오디오 시장조사를 위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지인을 찾아갔던 2000년 초였다. 시 외곽에 있는 한 호텔에 머물렀는데 매일 아침 뷔페식당에서 따라주는 커피가 정말 맛있었다. 약간 썼지만 목을 넘어갈 때 생기는 군침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그전까지는 커피를 어쩌다 마시는 음료로 생각했을 뿐 관심을 주지는 않았던 그였다.

그 순간 '사람들은 왜 쓴 커피를 즐겁게 마시는 걸까' 하는 생각이 퍼뜩 났다. 이후 10년 넘게 그를 붙잡은 화두였다.

무작정 커피콩을 볶아야겠다는 생각에 겁도 없이 당시 가장 좋다는 독일제 프로바트 상업용 로스터를 구입해 집에 들여놨다. 비싼 커피콩을 송두리째 태워가면서 로스팅 기술을 독학했다. 국내에는 커피에 관련된 서적 한 권 제대로 없을 때였다. "어렴풋이 로스팅 방법을 이해하면서 책을 한번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만 9년을 고생해서 낸 책이 이번에 나온 '커피 볶기의 정수'다. 3년 전에는 아예 커피 연구를 전담으로 하는 '커피분석센터'를 차려 분석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가 자신의 모든 시간과 돈과 열정을 바쳐 연구를 하는 것은 이제까지 세상에 없던 커피 맛을 내기 위함은 아니다. 과학적 분석을 통해 특허를 받을 만큼 좋은 커피가 새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면 그건 사기에 불과하다고 그는 믿는다.

"인류가 1000년 동안 마신 음료인데 새로운 맛이나 조리법이 나와 봤자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다만 커피에 헌신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기술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죠. 그걸 과학의 힘으로 쉽게 알리고 싶은 겁니다."

볶기, 분쇄, 추출이라는 이른바 커피의 3대 가공 공정과 관련한 기술은 현재 경험과 반복된 훈련을 통해 원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어떻게 보면 도제식이다. 커피콩을 볶고 그라인더로 분쇄한 뒤 핸드드립용 주전자로 뜨거운 물을 부어 커피를 내리는 과정이 모두 몸에서 몸으로 이어진다. 낭만적이지만 돈과 시간, 노력이 적지 않게 들어간다.

배 씨는 과학적 분석을 통해 이런 과정이 규격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경험으로 전달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그는 좋은 커피, 맛있는 커피를 만드는 기술을 더욱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커피 전문가들은 자신의 기술이 규격화돼 있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그게 감각이나 상상의 규격화라고 봐요. 과학의 잣대를 대보면 그 과정에 신비로운 영역은 그다지 많이 존재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지요."

'당신은 과학을 마시고 있다'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한 글에서 자신이 즐겨 가는 커피집을 소개한다. 도쿄(東京)에서 30년 넘게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다이보(大坊)'라는 곳이다. 이 집 주인은 손으로 돌리는 로스터로 커피콩을 볶아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린다. 김혜경 씨의 책 '고치소사마, 잘 먹었습니다'는 다이보 주인장이 혹시 오른손이 다칠 때를 대비해 왼손으로도 커피를 내리는 연습을 수십 년 해오다 보니 이제는 어느 쪽 손으로도 차이 없이 커피를 내릴 수 있게 됐다고 소개했다. 감동이 밀려온다.

배 씨가 추구하는 '커피의 과학'은 이런 감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가 분석한 좋은 커피의 기준대로 만드는 커피가 좋은지, 아니면 '낭만적인' 커피가 좋은지를 논쟁하는 것은 다 부질없는 짓이다. 배 씨는 말한다. "제가 분석한 기준점을 알고 난 이후 얼마나 창의력을 발휘해서 커피를 만드는지는 그 사람 본인에게 달린 겁니다."

다만 그는 포화상태에 이른 커피산업의 출구가 과학에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틀림없이 내년쯤이면 '우리는 주먹구구식으로 커피를 만들지 않습니다. 과학으로 만듭니다' 하고 선전하는 체인점이 등장할 겁니다. 다른 커피와 차별화할 수 있는 영역이거든요."

권당 40만 원인 그의 책은 나온 지 두 달여 만에 200부 넘게 팔렸다. 광고도 마케팅도 하지 않고 인터넷 동영상 전문사이트 유튜브와 자신의 블로그(blog.naver.com/coffeebrew)에 관련 동영상을 올린 게 전부다. 배동근의 '커피 과학'이 슬슬 먹히고 있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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