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원 수출에 국내 남는 돈 587원…한국 수출품 부가가치 창출 세계 24위…원자재 의존도 높은 탓
한은, 부가가치 첫 분석
중국·터키 보다도 낮아…수출품목 다변화해야한국 기업이 해외에 1000원어치의 최종 소비재를 팔아도 국내에서 만든 부가가치는 587원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1000원당 800원이 넘는 일본, 미국, 러시아, 호주보다 크게 떨어진 수치다. 세계 무역 8강 진입에 자동차 전자 등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는 한국이지만 성장의 질(質)인 부가가치 창출 능력은 여전히 미흡하다는 뜻이다.
○한국, OECD 평균보다 낮다
10일 발표한 ‘국제 산업연관표를 이용한 우리나라의 글로벌 밸류 체인 분석’에 따르면 한국 수출품의 부가가치 창출 비율은 2009년 기준 58.7%로 나타났다. 1위 일본(86.1%), 2위 미국(83.2%), 3위 러시아(82.0%)보다 크게 뒤떨어진다. 한국의 순위는 조사 대상 40여개국 중 24위로 중국(72.9%)에 비해서도 낮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 비율은 60.4%였다.
기존 수출입 총액 대신 부가가치 창출액 기준으로 무역 실적을 분석한 보고서는 국내에서 처음 나온 것이다. 이우기 경제통계국 팀장은 “세계 제조업 네트워크가 더욱 분업화하면서 기존 수출입 통계로는 최종 제품을 만드는 데 어디에서 얼마큼 기여했는지 알기 어려워졌다”며 “무역 판도를 보다 정확하게 분석하기 위해서는 부가가치 기준으로 수출입 흐름을 파악해야 한다”고 분석 배경을 설명했다.
예를 들어 한국 기업이 미국에 스마트폰 1000달러어치를 팔면 기존 무역 통계는 한국 수출 1000달러로 잡는다. 반면 부가가치 기준으로는 철광석 등 원재료를 판 호주가 500달러, 액정표시장치(LCD)를 만든 대만이 100달러, 배터리를 납품한 일본은 100달러를 가져가고 최종 제품을 완성한 한국에는 300달러만 떨어진다.
물론 이번 조사 결과로 한국의 수출 경쟁력 자체가 뒤처진다고 할 수는 없다. 러시아 인도네시아 브라질 터키 등의 부가가치 창출 비율이 높은 것은 공산품이 아닌 원자재 수출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팀장은 “한국 수출품의 부가가치 유발 효과가 낮은 것은 원자재 의존도가 높고 부품소재 산업의 경쟁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라며 “수출 품목을 다변화하고 단순 조립·가공 방식의 수출 구조를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럽, 미국 시장 중요성 커져”
부가가치 흐름으로 보면 무역 판도도 확 바뀐다. 보고서에 따르면 2009년 한국 수출의 29.2%를 차지한 중국을 부가가치 기준으로 평가하면 20.2%로 비중이 떨어진다. 반면 같은 시기 한국 수출의 13.3%, 8.0%를 각각 차지한 유럽연합(EU)과 미국을 부가가치 기준으로 계산하면 17.6%, 12.6%로 비율이 증가한다. 일본은 수출 총액 비중(4.8%)과 부가가치 창출액 비중(5.0%)이 엇비슷했다.
무역수지도 부가가치 기준으로 보면 중국의 경우 394억달러 흑자에서 64억달러 흑자로 83.8%나 감소한다. 반면 EU와 미국은 각각 61억달러 흑자, 30억달러 적자에서 71억달러 흑자, 30억달러 흑자로 바뀐다. 일본의 무역수지 적자 규모도 198억달러에서 88억달러로 줄어든다. 이 팀장은 “이 같은 양상은 원자재 등을 중심으로 하는 대(對)중국 수출의 일정 부분이 미국, EU 등의 최종 수요로 넘어갔기 때문”이라며 “부가가치 측면에선 미국과 유럽 시장이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준다”고 말했다.
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
한반도, 항상 위기... 대화 외 다른 방법 없다
[오마이뉴스 김동수 기자]
"박정희 목따러 왔수다."
1968년 1월21일 밤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침투했다. 이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김신조가 다음 날인 22일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김신조는 기자회견에서 청와대 침투 계획을 설명하면서 "31명이 5명 내지 7명씩 6개조로 나뉘어 1조에서 5조까지는 청와대의 1층, 2층, 경호실, 비서실, 정문위병소의 격파를 분담하고 나머지 1개조는 습격이 성공했을 때 청와대 수송부의 자동차를 탈취해 문산까지 나가 임진강을 도강하는 것"이라고 했었다. 만약 성공했다면 한반도는 전면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1968년 한반도... 전면전 위기
청와대 습격 이틀 뒤인 23일에는 북한 원산 앞바다에서 미국 해군 정보선(情報船)인 푸에블로호와 그 승무원 83명이 나포된 '푸에블로호 피랍사건'(Pueblo Incident)이 일어났다. 자국민과 배가 북한에 피랍되었는 데도 미국이 북한을 폭격하지 못한 것은 당시 베트남전이 한창이었고, 워낙 많은 인원이 납치되었기 때문에 감행하기 힘들었다. 결국 그해 12월 23일 82명의 생존 승무원을 석방시키는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
또 그해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3차례에 걸쳐 북한의 무장 공비 120명이 울진·삼척 지역에 침투하여 12월 28일 소탕시까지 약 2개월간 게릴라전이 일어났다. 그 유명한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다. 군경과 예비군은 본격적인 토벌작전에 착수, 12월 28일까지 약 2개월간 계속된 작전에서 공비 113명을 사살하고 7명을 생포하여 침투한 120명 모두를 소탕했다.
우리측도 군인, 경찰, 일반인 등 20여명이 사망하는 희생을 치렀다. 두 달 동안 강원도에서 국지전이 벌어진 셈이다. 한 순간 판단이 전면전으로 치닫을 수있는 상황이었다. 충격을 받은 박정희는 '향토예비군'을 창설한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때는 문세광을 통해 저격을 시도했지만 미수에 거쳤다. 하지만 부인 육영수 여사가 숨지는 비극이 일어났다.
한반도는 8년 후 또 다시 전쟁 기운이 감돈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이다.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미군 장교 2명을 북한군이 도끼로 죽였다. 사건 직후 주한미군사령부는 주한미군 장병들의 휴가취소와 부대복귀명령을 내렸다.
1976년 미군살해, 1983년 대한민국 대통령 암살 계획
이어 주한미군과 한국군은 데프콘 3호(경계상태돌입)를 발령하고, F-4전폭기, F-111전폭기 각 1개 대대를 한국기지에 배치했다. 핵항공모함 레인저호를 한국해역으로 이동, B-52폭격기를 출동시키고, 오키나와 주둔 해병대 1800명을 한국에 증파했다. 방아쇠만 당기면 전쟁이었다.
북한은 7년 후 또 다시 대한민국 대통령 목숨을 노렸다. 1968년에는 직접 청와대를 겨냥했다면, 1983년에는 국외방문 중이 대통령을 노렸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해 10월 9일에 일어났다. 북한은 전두환 대통령이 버마(현 미얀마)를 방문하자 아웅산 묘소에 폭탄을 설치해 터뜨렸다. 폭발 사고로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 김동휘 상공장관 등 각료와 수행원 17명이 순직하고 수십명이 부상을 당했다. 분노한 전두환 대통령은 북폭을 계획했지만 포기했다.
1950년 한국전쟁 후... 한반도는 항상 위기
이후에도 '제1차연평해전(1999년 6월 15일),'제2차연평해전(2002년 6월 29일),'대청해전(2009년 11월 10일), '연평포격'(2010년 11월 23일)처럼 북한 도발은 이어졌다. 2008년 7월에는 금강산 관광객을 사살까지 했다. 그렇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는 단 한 순간 위기가 아닌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위기에도 한반도에서는 한국전쟁처럼 피비린내 나는 전면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놀랍게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 큰 역할을 했다. 박정희는 자신의 목숨을 노린 김일성과 대화 채널을 만들었다. 1971년 12월 이후락-김영주 사이에 핫라인을 설치한 것이다. 남북이 휴전선에서 충돌이 일어나면 핫라인을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 전두환도 핫라인은 끊지 않았다.
그리고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상회담에서 핫라인이 설치됐다. 임동원 전 국정원장은 자신이 지은 <피스메이커>에서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 핫라인 개설이 가장 큰 성과라고 평가했다. 임 전 원장은 2000년 8월 남쪽 언론사 사장단 방북을 비롯해 9월 김용순 비서의 남쪽 방문, 2002년 6월 서해교전, 10월의 2차 핵위기와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의 방미 추진, 2002년 4월과 2003년 1월 임동원 특사 방북 등 주요 현안은 모두 이 핫라인을 거쳤다고 밝혔다.
한반도 전쟁 막은 것... 핫라인 그리고 남북회담
결국 남북간 대화 채널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들어 대화채널은 끊겼다. 가족사이에 대화가 끊기면 온전한 가정이 아니다. 남북관계도 마찬가지다. 대화가 끊긴 이후 북한은 국제사회의 거센 비판에도 불구하고 로켓발사와 3차핵실험을 강행했다. 판문점 전화도 끊겠다고 선언했다.
유엔안보리는 대북제재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러자 북한은 남북간의 불가침 합의를 전면 폐기한다고 선언했다. 북한의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은 8일 오전 성명을 내 "조선정전협정이 완전히 백지화되는 3월 11일 그 시각부터 북남사이의 불가침에 관한 합의들도 전면 무효화될 것이라는 것을 공식 선언한다"고 밝혔다.
이보다 앞서 북한은 안보리 결의가 채택되기 직전인 7일 오후 6시 외무성 성명에서도 "제2의 조선전쟁을 피하기 힘들게 됐다"며 "침략자들의 본거지에 대한 핵 선제타격 권리를 행사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우리 정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북한이 도발하면 "지휘세력까지 응징할 것"이라고 했다. 특히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은 8일 정례브리핑에서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한국을 공격한다면 대한민국은 당연하고 인류의 의지로 김정은 정권은 지구상에서 소멸될 것"이라고 밝혔다.
2013년 남북한 '치킨게임'
'치킨게임'으로 치닫고 있다. 겁많은 이가 먼저 운전대를 돌리면 진다. 북한도, 남한도 먼저 돌리지 않겠다면서 먼저 네가 운전대를 돌리라고 윽박지르고 있다. 심각하다. 대화채널이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뽑은 외교안보라인을 보면 강경파밖에 없다. 대화 목소리를 낼 온건파가 보이지 않는다.
강경파만 득세하니 '강 대 강'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작은 충돌이 국지전으로, 국지전이 전면전으로 비화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3일만에 북한을 초토화시킬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어리석은 자들도 있다. 3일만에 북한을 패퇴시킬 수 있어도 남한 역시 파멸이다.
파멸을 막는 유일한 길은 대화밖에 없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난 2004년 6.15 4주년 기념식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남북을 대표하고 있다. 우리가 마음 한번 잘못 먹으면 7천만 민족이 공멸한다. 그러나 우리가 민족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올바르게 문제를 풀어나간다면 우리 국민과 후손들은 축복받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감사할 것이다.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누구도 영원히 그 자리에 있는 사람도 없고, 영원히 사는 사람도 없다. 우리 민족을 위해서나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나 오늘의 이 자리는 하늘과 우리 조상들이 우리에게 마련해 준 기회다. 반드시 성공적으로 문제를 풀자."
박근혜 대통령과 김정은 제1비서가 새겨야 할 말이다. 두 사람 판단 잘못이 7천만 공멸로 이끌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특히 김정은 제1비서는 한반도 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에게 죄 지으면 안 된다. 요즘 자신의 행보가 반민족, 반생명, 반평화임을 알아야 한다. 핵무기는 자주권이 아니다. 핵무기는 평화를 담보하지 않는다. 공멸로 이끄는 죄를 김정은은 짓지 말아야 한다. 박 대통령 역시 수구세력 주장에 흔들리지 말고, 냉철한 판단을 해야 한다.
다 죽고 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지난 2007년 1월 23일 신년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평화를 위한 전략의 핵심은 공존의 지혜입니다. 화해와 협력, 공존을 위한 지혜의 요체는 신뢰와 포용입니다. 끊임없이 상대를 적대하고, 의심하고, 상대의 허물을 들추어 상대의 자존심과 불안을 자극하고, 사사건건 시비를 따지고 자존심을 세우려고 해서는 신뢰를 쌓을 수도 없고, 화해와 협력의 대화를 이어갈 수도 없습니다. 자신감을 가지고 대범한 자세로 상대를 포용해야 합니다. 대결주의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렇다, 대결주의는 길이 아니다. 공존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화해와 협력을 위한 신뢰와 포용이 가장 필요할 때. 한반도에 '너 죽고 나 살자'는 성립되지 않는다. 너 죽으면 나도 죽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결국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길을 가야 한다. 냉전시대는 피스키퍼로 살았지만 냉전이 해체된 이후 피스메이커로 살아가고 있다는 임동원 전 국정원장의 <피스메이커>는 이렇게 끝맺음을 하고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통일은 목표인 동시에 과정이다. 미?북 관계 개선과 북핵문제 해결과정에 병행하여 '남북경제공동체' 건설 및 군비통제를 추진하면서 우리는 통일에 접근해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당면한 과제는 '통일지향적 평화체제'를 구축하면서 '사실상의 통일상황'부터 실현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통일은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핵무기를 보유한 미국과 소련은 지난 1962년 지구 파멸 직전까지 갔다. '쿠바 미사일 위기' 사건이다. 당시 미국 합참과 공군은 선제공격을 주장했다.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 때 케네디 대통령은 측근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군인들의 주장은 엄청난 장점이 하나 있어.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하면, 나중에 우리 중 아무도 그들이 틀렸다고 말해줄 수 없을 거야. 왜? 우리는 다 죽고 없을 테니까."-3월 8일 <한겨레> [세상 읽기] 위기와 용기, 책임감
다 죽고 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정세현 "北 메시지는 과장, 진짜 목적은…"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결정적 한 방이 없다"[프레시안 이재호 기자]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은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안 2094호가 결정적 한 방이 없다며 실효적인 제재가 되기는 힘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 전 장관은 8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유엔 안보리 2094호 결의안은 뾰족한 수가 없는 현재 상황이 반영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언론에서 이번 결의안이 수위가 높아졌다고 하지만 수위가 높아진 것이 아니라 수면이 넓어졌다. 결정적인 한 방이 없어 여러가지 다양한 제재를 늘어놓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정 전 장관은 안보리 결의안에 군사적 강제조치가 없기 때문에 실질적인 제재 효과도 높지 않을 것으로 예측했다. 그는 "결의안에서 북한 선박에 대해 검문검색을 할 수 있다고, 해야 된다고 하면서도 거기에 불응했을 때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에 대한 얘기가 없지 않나"라고 반문하며 "그건 결국 중국이 빼자고 해서 뺐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 전 장관은 결의안 채택에 시간이 좀 걸린 것도 중국의 협조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중국이라는 나라에게 북한은 매우 골치 아픈 나라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치기에는 여러 가지 고려해야 할 점이 많은 상대"라며 "미국이 북한을 때리는 데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것이 과연 중국의 국가이익에 도움이 되겠는가 하는 관점에서 북·중 관계를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이 '정전협정 백지화하겠다'는 식의 강경 발언을 쏟아내는 것과 관련해 정 전 장관은 "정전협정 이야기는 미국에게 빨리 양자회담을 하자는 것과 평화협정 이야기를 시작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핵 선제타격이라든지 제2의 조선전쟁 등을 언급하는 것과 관련, 정 전 장관은 "칼을 뺐으니까 무라도 자르지 않겠나"면서 "그것(전면전)까지 갈 수 있다고 그러지만 과장된 협박이고 북한은 지금 그렇게까지 나갈 수 있는 힘이 없다. 도발을 할 수 있겠지만 자기가 죽을지도 모르는 구덩이로는 안 들어가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정 전 장관은 이어 우리 정부가 미국과 북한의 물밑 대화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북한이 더 강수를 두면 반드시 미국은 뒤로 북한과 무슨 대화를 시작할 것"이라며 "우리도 그런 퇴로를 열어놓고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전 장관은 "그동안에 미국은 북한을 압박하는 조치를 시작해 놓고, 뒤로 북한과 협상해서 결국은 회담으로 끌고 나온 경우가 몇 번 있다"고 덧붙였다.
이재호 기자 (
jh1128@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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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진짜' 실업률 5.8%…일자리 나누기 고려 필요"
우리금융경영연구소 "일자리 나누기로 朴 정부 국정 목표 달성 가능"[프레시안 이대희 기자]
국내 공식 실업률이 작년 말 사실상 완전 고용 상태인 3.2%까지 내려갈 정도로 안정세를 보이고 있지만, 주당 노동시간이 극히 짧은 비정규직 노동자와 취업 준비자, 구직 단념자 등을 모두 포함하면 실업률이 5.8%까지 치솟는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그간 국내 실업률 통계가 현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주장은 숱하게 제기된 바 있다.
8일 우리금융경영연구소 거시분석실은 이와 같은 내용을 담은 '고용시장 회색지대 분석을 통한 실질 고용률 제고 방안' 보고서를 발표하고, 일자리 나누기(잡 셰어링)을 통해 노동 시간을 줄이면 박근혜 정부가 목표로 한 '고용률 70%'도 달성할 수 있다고 밝혔다.
공식 실업률 통계, 현실과 괴리 커공식 실업률과 이처럼 큰 차이가 나는 대체 실업률이 나올 수 있는 건 통계청 집계 방식이 주당 36시간 미만 취업자 중 추가 취업을 희망하는 자를 취업자로 분류하고, 취업 준비자와 구직 단념자를 실업률 통계에서 배제하는 비경제활동인구로 묶어버리기 때문이다.
지난해 기준, 국내 공식 실업자는 82만 명이지만 주당 36시간 미만 취업자 중 추가 취업 희망자인 '불완전 취업자'는 34만9000여 명이고, 비경제활동인구 중 취업 준비자와 구직 단념자는 각각 56만 명, 15만2000명이었다. 이들을 모두 포함하면 공식 실업자보다 많은 106만1000여 명에 달한다.
노동 환경이 변하면서 단시간 노동하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늘어나고, 고시와 취업 준비 등에 시간을 쏟는 20대가 상당수 있는 한국의 특수한 고용 환경을 공식 실업률 통계가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금융경영연구소는 우선 불완전 취업자를 완전취업상태에 있지 않다고 보고 실질지표를 산출했더니 고용률은 58.5%까지 하락하고 실업률은 4.6%까지 상승했다고 밝혔다. 주당 1~17시간 취업자는 0.5명 취업자로, 18~35시간 취업자는 0.75명으로 가정해 산출한 결과다.
이어 잠재실업자까지 실업률 통계에 포함할 경우, 작년 실업률이 통계청 발표보다 2.6%포인트 높은 5.8%에 이른다고 계산했다. 즉 공식 실업자의 1.2배 이상의 인구가 사실상 실업 상태에 있지만, 이들이 공식 통계에서는 취업자로 분류되거나, 아예 실업률 조사 대상에서 제외돼 국내 실업률이 현실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지난해 평균 실업률은 8.1%로, 국내 통계청 실업률의 두 배가 넘는다. 그러나 올해 1월 평균 고용률은 57.4%에 머물러 OECD 평균 63.0%보다 크게 낮다. 통계가 현실과 괴리를 보이는 점이 명확히 드러난다.
허문종 수석연구원은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적은데 일을 하는 사람도 적은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한다"며 "OECD처럼 각 취업 현실을 반영할 수 있는 보조지표 개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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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통계에서 누락되는 잠재실업자를 포함해 새로 계산한 실업률. 우리금융경영연구소 자료 재인용. ⓒ프레시안 |
"일자리 나누면 고용률 올라가"우리금융경영연구소는 한편 고용률을 높이기 위한 대안도 제시했다. 일자리 나누기가 핵심이다.
OECD에서 독보적으로 높은 한국인의 노동시간을 줄이고, 그와 함께 고용률도 높이면서 통계와 현실의 괴리 폭도 좁힐 수 있는 대안이다.
이와 관련, 2010년 기준 한국 노동자의 연간 평균 노동시간은 2193시간으로 OECD에서 멕시코(2242시간) 다음으로 높다. OECD 평균은 1775시간이며, 회원국 중 가장 노동시간이 짧은 네덜란드는 1381시간에 불과하다.
우리금융경영연구소는 주당 49시간, 54시간 이상 노동하는 장시간 노동자의 취업 시간을 국내 평균 노동시간(주당 45시간)으로 재조정하고, 남은 시간을 불완전취업자와 주당 36시간 미만 노동하는 노동자와 나눠 취업자 수를 새로 계산했다.
그 결과, 통계청 기준(15세 이상)으로 작성된 지난해 실질 고용률은 종전 59.4%에서 67.7%로 8.3%포인트나 치솟았다. 단순히 일자리 나누기만으로도 새로운 일자리가 큰 폭으로 늘어난 것이다.
특히 OECD 기준(15~64세)으로 실질 고용률을 계산할 경우, 지난해 실질 고용률이 64.2%에서 73.2%까지 9%포인트나 올라갔다. 이는 박근혜 정부의 국정 목표치를 초과한 수치다.
우리금융경영연구소는 나아가 고령층 노동자와 청년층 노동자 등을 위한 맞춤형 대책도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대희 기자 (
eday@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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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타, 글로벌 자동차 브랜드 가치 1위···현대차는?
英 브랜드 파이낸스 발표···현대차 2년 연속 9위
일본 도요타가 7일(현지시간) 영국의 브랜드 평가 컨설팅업체인 브랜드 파이낸스(Brand Finance)의 '가장 가치 있는 자동차 브랜드' 평가 결과 1위에 선정됐다.
10일 미국 자동차 전문매체 오토모티브 뉴스에 따르면 도요타는 브랜드 파이낸스로부터 260억달러(약 28조 원)의 브랜드 가치를 평가받아 작년에 이어 2년 연속 정상에 올랐다. 도요타의 올해 브랜드 가치는 전년 대비 6% 상승했다.
브랜드 파이낸스의 데이비드 헤이 최고경영자(CEO)는 "도요타는 소비자 신뢰를 되찾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며 "젊은 층에 어필한 스타일이 뛰어난 새 디자인과 광고 캠페인을 통해 신뢰도를 회복했다"고 평가했다.
2위는 237억달러의 브랜드 가치를 기록한 폭스바겐이 차지했다. 폭스바겐은 전년 대비 33% 상승해 지난해 4위에서 2계단 상승했다. 그 다음은 BMW(232억달러) 메르세데스-벤츠(202억달러) 포드(196억달러) 닛산(176억달러) 혼다(161억달러) 포르쉐(112억달러) 순이었다.
현대차는 포르쉐에 이어 9위에 랭크됐다. 올해 브랜드 가치는 전년 대비 4.7% 증가한 87억달러(약 9조4700억 원)로 작년과 순위 변동은 없었다. 르노(84억달러) 푸조(66억달러) 쉐보레(60억달러) 등이 뒤를 이었다.
이밖에 브랜드 파이낸스는 '가장 강력한 자동차 브랜드'에 스포츠카 메이커 페라리를 꼽았다.
한경닷컴 김정훈 기자 lenn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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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 유튜브 14억 뷰 돌파했다
가수 싸이(박재상·36)의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가 10일 유튜브 조회수 14억 건을 돌파했다.
'강남스타일'은 10일 오전 14억 210만 건을 기록 중으로 지난달 10일 조회수 13억 건을 돌파한 지 한 달 만에 또다시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또 '강남스타일'의 후속 버전으로 포미닛의 현아와 함께 부른 '오빤 딱 내 스타일' 뮤직비디오도 지난 9일 조회수 3억 건을 돌파하며 10일 현재 3억 340만 건을 기록 중이다.
‘강남스타일'의 전세계적인 돌풍에 힘입어 싸이는 다음 달 13일 새 싱글을 전세계에 동시 발매한다. 싸이는 싱글 공개 당일 마포구 성산동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해프닝'(HAPPENING)이란 제목으로 공연을 펼치며 이 공연을 유튜브를 통해 전세계에 생중계한다.
싸이, 멜버른 인증샷..수 많은 인파 ‘역시 국제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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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 멜버른 (사진=싸이 트위터) |
싸이가 멜버른 인증샷을 공개했다.
10일 싸이는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Look at us Melbourne! U have no idea how touching U WERE!"이라는 글과 함께 사진 한 장을 게재했다.
해당 사진 속 싸이는 수 많은 인파를 배경으로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는 싸이가 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미래 음악 페스티벌(Future Music Festival)'에 특별 게스트로 참가한 인증샷으로 남다른 인기를 과시했다.
한편 싸이의 멜버른 인증샷에 네티즌들은 “남달라”, “역시 국제가수다”, “싸이 새 앨범 정말 많이 기대된다”, “역시 강남스타일” 등의 반응을 보였다.
/파이낸셜뉴스 스타엔 syafei@starnnews.com김동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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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깜짝… 유지태 영화감독 일 냈다
유지태 감독 <마이 라띠마> 도빌 아시아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영예
유지태 감독의 <마이 라띠마>가 15회 도빌 아시아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
영화 <마이 라띠마>는 절망의 끝에서 만나, 세상에 버려진 두 남녀의 이야기로 도빌 아시아 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상영된 후 세계 각국의 취재진과 영화 관계자,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영화 상영 후, 유지태 감독의 뛰어난 연출력에 찬사가 쏟아졌고, 현지 주요 외신들의 끊이지 않는 인터뷰가 쇄도하면서, 조심스럽게 <마이 라띠마>의 수상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했다. 하지만, <마이 라띠마>가 유지태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이라는 점이 다른 쟁쟁한 경쟁작들에 비해 핸디캡이 될 것이라는 관측도 있었다. 하지만, 유지태 감독이 첫 장편영화 연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뛰어난 연출력을 보여준 요소가 심사위원들에게 더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심사위원장 Jerome Clement는 “<마이 라띠마>는 예민한 소재임에도 유지태 감독의 뛰어난 통찰력으로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이 영화가 그의 첫 영화라는 게 놀랍다. 이 영화가 전 세계 영화팬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대상으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유지태 김독은 “초청해주신 도빌 영화제와 유명한 아티스트들인 심사위원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마이 라띠마>가 한국에서 5월에 개봉예정이고, 제가 두번째 작품을 할 수 있도록 많은 힘을 주는 것 같아 감사합니다. 또한 이 영화에 참여한 모든 배우와 스텝들과 이 영광을 나누고 싶습니다”는 수상소감을 밝히며 대상 수상의 기쁨을 누렸다.
한편, 제 15회 도빌 아시아 영화제는 ‘관객상’에 Vivacent Sandoval감독의
, ‘비평상’은 Vahid Vakilifar감독의 , ‘베스트필름상’에는 Kamal K.M.감독의 , 심사위원 대상 공동수상작은 Boonsong Nakphpp감독의 가 수상했다.
연승기자 yeonvic@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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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삼성-애플 특허전 승자는/최갑천기자
삼성전자와 애플 간 특허전쟁이 시작된 지 다음 달로 2년을 앞두고 있다. 지난 2011년 4월 애플이 '갤럭시S' '갤럭시탭' 등 삼성전자의 스마트폰과 태블릿 제품들이 자사 아이폰과 아이패드의 디자인과 상당수 기능 특허들을 몰염치하게 베꼈다며 미 법원에 30억달러 가까운 손해배상을 요구하면서 세기의 특허전쟁이 발발했다. 이 소송은 23개월간 치열한 공방을 거듭하며 미국 외에 한국, 일본, 독일, 네덜란드, 영국, 호주 등 9개국으로 확산되며 일명 '세기의 소송'으로 불렸다.
양측간 특허전쟁의 시발점인 미 소송은 지난 해 7월 본안 심리 시작 이후 9개월이 흐른 지난 1일 1심 판결이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다. 결과는 애플의 승리였다. 미 재판부는 삼성전자 제품 20여종이 애플의 특허 6건을 침해했다며 5억9000여만달러의 배상책임을 물었다. 당초 배심원단이 판단한 10억5000여만달러보다 대폭 삭감된 액수지만 미 법원은 삼성의 특허 침해와 배상 책임을 인정한 것이다.
삼성으로도 소득은 있었다. 물론 '무죄' 입증에는 실패했지만 미 법원으로부터 특허 침해에 '고의성'이 없다는 판결을 이끌어내면서 '카피캣(모방꾼)'의 오명은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진짜 승부는 애플이 승리했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지난 2년 동안 특허전쟁의 홍보 효과를 톡톡히 보면서 애플의 유일한 대항마로 부각된 삼성이 진짜 승리자일 수도 있다. 어차피 이번 특허전의 실체는 법원의 판결이 아닌 시장의 패권 싸움이었으니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양측은 1차 소송 판결도 확정되지 않은 채 2차 소송까지 전장을 넓히게 됐다. 담당 재판부도 추가 소송의 불필요함을 지적했지만 애플은 "삼성 제품이 판매되는 한 피해가 계속된다"는 이유로 '2차 대전'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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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1 경쟁 뚫은 유망 창업기업가 모였다
IGM 창업기업가 사관학교 입학생 전원 전액 장학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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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서울 장충동 IGM세계경영연구원에서 열린 'IGM 창업기업가 사관학교' 1기 입학식에서 전성철 IGM 회장, 송장 IEA 총장 등 주요 참석자와 입학생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
최고경영자(CEO) 전문교육기관인 IGM 세계경영연구원은 지난 9일 서울 장충동 본원에서 'IGM 창업기업가 사관학교(IEA)' 1기 입학식을 개최했다고 10일 밝혔다.
입학식에는 전성철 IGM 세계경영연구원 회장을 비롯해 IEA 총장을 맡은 송자 명지학원 이사장,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 오명 동부그룹 전자부문 회장 등이 참석했다.
또 10대 1이 넘는 경쟁을 뚫고 선발된 40명의 예비 창업기업가들과 김효준 BMW코리아 사장,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 윤홍근 제너시스 비비큐 그룹 회장 등 성공한 벤처 기업인으로 구성된 창업기업가 교수진과 문규학 소프트뱅크벤처스 대표, 양정규 아주IB투자대표 등 투자자 교수진도 함께 했다. IGM이 창립 10주년을 맞아 사회공헌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설립한 IEA는 올바른 기업가 정신을 가진 창업기업가 육성을 목적으로 입학생 전원에게 전액장학금(2000만원 상당)을 제공하며 졸업 시에는 500만원에서 5억원의 투자금까지 지원한다. 특히 IGM의 전문 경영 지식을 가진 교수진은 물론 변대규 휴맥스 회장, 김준일 락앤락 회장을 포함해 크게 성공한 창업기업가 등 국내 대표 CEO 등이 직접 교수진으로 참여한다.
fnkhy@fnnews.com 김호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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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뿌리고 대학 세우고…금융 대부의 '위험한' 유혹!
[프레시안 books] <조지 소로스는 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까>[프레시안 박찬홍 사회민주주의센터 준비위원]
착한 사람이 착한 일을 하겠다는데, 뭘 그리 피곤하게 의심하는가?맞는 말이다. 선의를 의심하는 것은 피곤할 뿐 아니라 무척 서글픈 일이기도 하다. 사람을 믿지 못한다면 과연 무엇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고통이 길어지고 피해의식이 쌓이다 보면, 어느덧 섣부른 신뢰가 깊은 상처를 남긴다는 걸 깨닫게 된다. 게다가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집단인 경우, 상처와 증오는 몇 갑절 더 깊은 것이 되고 만다. 깊고 오랜 집단적 상처를 품고서는 여유로운 호흡으로 회화를 감상하듯 문제를 탐미할 수 없다. 반대로 독일의 낭만주의 미학자 졸거(Karl Wilhelm Ferdinand Solger, 1780~1819)가 했다는 다음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아쉬울 것 없는 여유로운 시각으로는 사무치는 결핍을 이해할 수 없다.
"아무리 잔인한 전쟁도 멀리서 보면 조화로운 풍경으로 변한다."<조지 소로스는 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까>(니콜라 귀요 지음, 김태수 옮김, 마티 펴냄)라는 책은, 착한 사람이 한다는 착한 일을 피곤하게 의심하는 책이다. 의심의 대상은 소로스로 대표되는 금융 자본이 자선과 교육 사업을 통해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과정이다. 또 그 과정이 20세기 초 카네기 등 산업 자본이 전통적 젠트리 계층에 맞서 사회적 명망을 얻게 된 과정과 놀랍도록 유사함을 지적한다. 요약하자면, 나쁜 것들이 못된 짓만 따라한다는 얘기다. 그리고는 요즘 대세인 '윤리 경영' 혹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 담론을 살펴보자고 제안한다. 그래도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최대한 중립적으로 묘사한다면, 이 책은 현대 자본주의의 훌륭한 미시 역사서이자 사회과학적 분석서라고 총평할 수 있겠다.
안철수는 대통령이 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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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 소로스는 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까>(니콜라 귀요 지음, 김태수 옮김, 마티 펴냄). ⓒ마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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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기업인은 드물지 않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인데, 최근의 예를 들자면 안철수가 있다. 안철수는 대통령이 될 뻔했다. 좀 과장인가. 그래도 그가 지난 대통령 선거의 핵심 변수였음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그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무릎 팍 도사'에 나와서 숫기 없게 "넴, 넴" 대답이나 하던 '범생이' 기업가에 불과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가 존경받는 기업가를 넘어 최고 권력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왜 그리도 많아진 걸까?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에게는 여느 기업가와 다른 점들이 있었다고 한다. 중소기업이 생존할 수 있는 생태계를 걱정했고, 족벌기업의 수탈을 문제 삼았다고 들었다. 그것이 그렇게도 강렬한 희망을 주었던 걸까. 생각해 보면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 당대의 안철수가 있었을 텐데.
이건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일이다. 문국현, 유일한, 빌 게이츠, 조지 소로스….
언제나 존경받는 기업가들이 있었고, 그들이 '나쁜 자본'을 넘어서겠다고 나섰는데, 왜 누구도 '약자의 몰락과 고립'이라는 우리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지 못했을까. 게다가 삼성, 현대, 포스코 같은 대기업에서도, 이제 윤리 경영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말한다. 그들의 선한 뜻이 잘만 실행되면, 드디어 사람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가 우리의 고통과 눈물을 닦아줄 수도 있지 않을까? 번역자는 다음과 같이 저자의 말을 소개한다.
"저자는 자선사업을 향한 금융 자본의 대대적인 전향을 자본가 개인의 도덕적 참회나 책무의식의 결과로 이해하려는 세간의 해석을 넘어서는 통찰을 보여주면서, 이 현상을 금융 자본이 스스로 찾은 지배의 정당화와 영속화의 특정한 형식이라고 설명한다." (8쪽)그래도 최대한 중립적으로 이 책의 내용을 따라가 보자. 선한 의도를 믿지 못하는 것이 병일 수도 있으니까. 배배 꼬인 심사에는 자기 같은 마음만 보이는 법이다. 그렇지만, 의도가 선하므로 한결 같이 믿어주는 건 또 옳은 일일까. 글쎄. 대책 없이 순진하면 자기뿐 아니라 주변 사람까지 고생한다는 게 문제다. 대략 다음과 같은 시각으로 부자들의 선행을 대하는 것이, 독서 여행을 시작하는 나그네의 태도로 온당할 듯하다.
"위로부터의 선의가 세상을 치유하는 것은, 아래로부터의 분노가 차분히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골드만삭스와 프리티 우먼 - 원조 자선가의 몰락과 금융 자본의 부상착한 기업인이 대단한 자선을 펼치는 모범적 사례는, 20세기 초의 미국에서 관찰할 수 있다(고 한다). 이때는 이미 농업을 기반으로 한 전통적 젠트리가 물러나고, 카네기와 록펠러 등의 신흥 '산업' 자본가의 지배가 확립된 시점이었다. 저자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 당시 노동자 계층은 유례없는 성장의 과실을 분배하는 문제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상당한 투쟁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반면, 은행 등의 '금융' 자본은 철저히 '산업' 자본에 협력하고 있었을 뿐, 힘을 견주어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부드럽게 표현하자면 20세기 초 미국의 산업 자본과 금융 자본은,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신뢰와 호혜에 기반을 둔 상생적 관계를 구축했다.
이들(상업은행)은 수익만을 좇는 비인격적 사업체라기보다는 오히려 '가정 주치의'에 가까웠다. (…) 은행과 고객의 관계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선 사회적 친밀감에 기초했다. (…) 골드만삭스의 경우, 일부 기업 고객은 7대, 심지어 8대에 걸쳐 이 은행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으며 "은행장들은 집안의 유산처럼 전임자에게서 승계 받은 고객을 다시 후임자에게 넘겼다." (42~43쪽)그러다 모든 것이 돌변한다. 금융 자본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1990년에 개봉한 줄리아 로버츠의 출세작 <프리티 우먼>에는 매력적인 독신남 에드워드(리차드 기어)가 등장한다. 극중에서 그의 직업은 기업 사냥꾼인데, 그것은 재정이 어려운 회사를 인수해서 종업원 대부분을 해고하고 생산 설비를 분해해서 다시 파는 것이었다. 영화에서도 이러한 수법은 잔혹한 약탈로 묘사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거래가 실제로 회사의 기술적 전통과 직원의 경제적 기반을 산산이 부숴버리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영화가 1990년에 개봉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금융 자본이 산업 자본을 굴복시킨 역사적 전환이 1980년대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순진한 기대와 '진보적' 금융 자본의 배신 - 해방군이 점령군으로왜 그리 짧은 시간에 그리도 대단한 변혁이 일어났을까. 예전부터 대립하던 '산업' 자본과 노동계층은 그 과정에서 대체 어떤 역할을 한 것일까.
'산업' 자본에 대항하여 선전포고를 할 당시, '금융' 자본 측은 노동자와 시민을 위한 정의로운 혁명을 표방했다. 그리고
노동자와 시민 중산층은 산업 자본과의 오랜 투쟁에 지친 나머지, 금융 자본을 해방군으로 반기는 우를 저질렀다. 적의 적은 친구가 아닌가! 금융 자본의 노련한 이미지 메이킹으로 인해, 한동안 노동과 시민 사회에서도 금융 자본의 선전을 사회 진보로 여기며 반기기까지 했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 아닌가? 우리나라에서 참여연대와 장하성 펀드가 선의로 추구하는 바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금융 자본가들은 노동자와 대립하지 않고 (…) 경영자 및 사장과 대립한다. 생산과 무관해 보이는 금융 자본은 오히려 순수해 보인다. 즉 금융 자본은 산업 자본처럼 노동의 직접적 착취의 난폭함에 물들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 능동 자본과는 달리 금융 자본은 이렇게 '좋은' 자본이며 전형적인 진보적 자본이 된다. (28쪽)그러나 이 전쟁의 본질은,
노동에서 착취한 잉여가치의 주인을 정하는, 자본가끼리의 제로섬(zero-sum) 패권다툼일 뿐이었다. 그러니, 누가 승자가 되든 최대의 피해자가 노동자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을 운명이었다.
이러한 전환이 중산층과 노동자와 빈민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는, 이제 우리도 잘 알고 있다. 쌍용자동차와 외환은행에서 벌어진 일들은, 1980년대 이래 미국에서 수없이 이루어진 비극의 되풀이일 뿐이다.
금융 자본의 위기와 생명 연장의 꿈 - 자선과 사회적 책임의 표절그러나 80년대의 승리자인 금융-주주 자본주의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사람들이 몇몇 벼락부자를 탄생시킨 산업 구조조정에 대해 뒤늦게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부의 규제 움직임은 경계할 만한 것이었다. 의심을 받게 된 '금융' 자본은 즉시 생명 연장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힌트는 그들의 적이었던 '산업' 자본의 과거에서 찾을 수 있었 다.
앞선 시대, 카네기·록펠러 등 '산업' 자본가들이 철도, 금속, 석유 제국을 건설했을 때, 그들의 고민 또한 '도덕적 정당화'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제국 건설사는 사기와 투기로 얼룩졌고, 사람들이 그들에게 붙여 준 별명은 '도적 남작들'이었다. 그러자 도적 남작들은 산업 현대화를 일군 계몽 기업가로 자신을 부각시키며 현대적 자선 사업과 자선 재단을 발명함으로써 그들의 지배를 영속화하려 했다.
표절을 불사한 80년대 금융 자본의 필사적인 노력은 결국 보상을 받았다. 역설적이게도 그 보답은, 자본의 대리인에 불과했던 전설적 투기꾼들이 주가 조작과 사기죄로 처벌받음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칼 아이칸, 마이클 밀켄 등의 사기꾼들은, 금융 자본주의의 도래를 위한 정지 작업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완수한 셈이 되었다.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혀 은행과 연기금의 죄를 대속함으로써 말이다.
산업 자본의 때늦은 깨달음 - 소유자의 횡포80년대 '주식 소유자-금융 자본'의 공격에 직면하자,
'산업' 자본은 납품업자·지역 공동체·노동자를 지키는 사회적 가부장으로 자신의 위상을 수정했다. 그리고
'금융' 자본을 향해 '소유자의 횡포'를 그만두라며 항의했다.
이는 대단히 드라마틱한 자기모순이었는데, '소유자의 횡포'란 바로, 산업 자본 자신에게 대항하던 노동자의 논리였기 때문이다. 수치심을 모르는 산업 자본가의 표절은 다음의 뻔뻔한 주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많은 납품업자, 기관, 고객, 지역 공동체가 우리(산업 자본)와 연결되어 있다. 이들 중 아무도 주식을 마음대로 사고팔 수 있는 주주가 누리는 민주적 자유 같은 것을 향유하지 못한다. 이들은 주주보다 더욱 기업에 의존한다." (100쪽)기업에 의존하는 '기업과의 일체성'으로 본다면, 노동자만큼 직접적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도 없다. 그런데도 산업 자본가들은 기업 '소유자'로서의 권력을 노동자들에게 원 없이 휘둘렀던 전력이 있었던 것이다. 일례로, 카네기는 철강왕이 된 후에도 근로자들의 노동 강도를 높이고 봉급을 삭감했으며, 1892년 홈스테드 공장의 점거 파업을 유혈 진압하면서 10명의 사망자와 60명의 부상자를 발생시키기도 했다. 만일 그 시절부터 산업 자본가가 납품업자·고객·지역 공동체를 살뜰히 챙겼더라면, 노동자들도 '진짜' 소유자의 공격으로 어려움에 빠진 1980년대의 산업 자본가들을 조금은 동정했을지도 모른다. ('법적으로' 주식회사의 진짜 소유자는 주주다. 이 점이 타당한지는 다른 글에서 다루기로 한다.)
착한 조지 소로스가 벌이는 특별히 착한 일?유대-헝가리계 미국인 조지 소로스는 외환 투기를 통해 20조 원의 재산을 모았다. 그보다 더 부유한 사람은 전 세계에 걸쳐 20명 남짓밖에 없을 정도다. 그런 그가 1991년부터 '열린사회 재단'을 설립하여, 누구보다도 의욕적으로 자선 사업을 추진했다. 마치 자신의 성공을 가져다 준 금융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휴머니즘과 박애주의로 전향이라도 한듯 말이다.
(조지 소로스)의 인생 이력에 대해 우리가 관심을 갖는 이유는 시장의 탈규제로 인해 최근에 형성된 금융 귀족이 과거 19세기 산업 엘리트의 정당화 전략, 그 중에서도 교육 제도에 대한 투자를 어떤 방식으로 승계했는지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선은 상승하는 사회 계층이 자기 계층의 재생산 문제에 봉착했을 때 권력 행사의 정당한 자격과 관련된 이슈를 선점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 가운데 하나다. (115쪽)위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 소로스의 자선도 일종의 표절이다. 그러나 선명한 차이점도 있다. 산업 자본은 물론, 80년대 금융 자본의 자선과 비교하더라도 그 차이는 뚜렷하다. 일단 그는,
'자본주의에 대한 윤리적 조절'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였다. 또 재산의 거대한 스케일만큼이나 그가 벌이는 자선 및 교육 사업의 목표도 전통적 자선의 전망을 훌쩍 뛰어 넘는다.
소로스의 교육 사업이 가지는 특별한 의미를 살피기 위해서는, '워싱턴 컨센서스'를 이해해야 한다. 1990년경 워싱턴에 자리 잡은 미국 정부와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의 정책 결정권자간에 모종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후에 이 합의는 '워싱턴 컨센서스'라고 불리게 되는데, 그들은 미국식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를 대외적으로 확산시키려는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IMF와 세계은행은 제3세계 국가의 경제 위기에 대한 지원 여부를 결정할 권한이 있었으므로, 그 목표는 90년대 내내 비교적 용이하게 달성될 수 있었다. 경제 지원의 조건으로 신자유주의적 경제 체제 도입을 요구하는 방식이 주로 사용되었는데, 1998년 한국에 대한 IMF의 처방이 대표적 성공 사례였다.
자선 사업을 구상하던 조지 소로스는, 이
워싱턴 컨센서스에서 그가 구상하던 교육 사업의 비전을 발견했고, 그의 자선 사업을 이에 연동시켰다. 소로스는 국가나 공동체의 총체적 규제에 대한 두려움을 체화한 인물이다. 나치의 박해를 겪었고 런던 정경대학에서 공부하던 시절 칼 포퍼의 사상에 깊이 영향 받은 그의 이력에서 그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소로스의 사상적 배경은, 자연스레 신자유주의에 대한 우호적 태도로 연결되었다. 개인과 시장의 절대적 자유와 작은 정부는, 절대로 칼 포퍼가 말하는 '열린 사회의 적'이 아닐 테니까.
조지 소로스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중부유럽대학(Central European University)을 설립했다. 이 대학은 사실상 워싱턴 컨센서스의 세계화라는 목표를 수행하기 위한 물적 토대였다. 소로스가 추구하는 이런 목표를 위해서는, 환경·인권·개발·젠더 문제 등과 같은 '진보적' 의제가 금융 세계화에 대한 비판으로 전환되는 것을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이 대학의 학문적 프로그램은 이를 위해 세밀하게 고안되었다. 이를 통해, 지속 가능한 금융 자본주의를 위해 필요한 변화와 대안이 제공되었다. 금융 세계화의 '폐기'를 주장하는 학자들을 '조정'의 전문가로 전향하도록 돕는 일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학문적 성과와 진지한 연구자가 축적되었고, 지금은 다음과 같은 평가에 어울리는 학문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19세기와 20세기의 전환기에서 자선 사업가들이 자본과 노동의 대립을 뛰어넘을 수 있는 과학적 이데올로기에 투자하여 마침내 계급 대결을 완화시키고 (산업) 자본에 유리한 체제를 구축했듯이, 오늘날 세계화의 주도 세력은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세계화 리더 양성이라는 '공통 과목'을 설정하여, 금융 기관에 대한 시민 사회의 공격을 방어하고 있다. (140쪽)자선 사업의 진정한 위협 - 재분배 체계의 사적 독점자선 사업의 발명자인 '산업' 자본에게, 초창기의 자선은 의심스러운 치부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내야하는 부담금에 불과했다. 그러나 자선 사업이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두면서, 자선가들은 또 다른 기회와 권력을 손에 넣게 되었 다. 그 권력이란
재분배 과정의 사적 독점권이었다. 그것은 부의 재분배 기능을 국가 권력으로부터 분리하고 사적 처분권의 영역에 붙들어 둠으로써 가능해졌다. 자선의 본질적 이득은 자선에 사용된 재산에 대한 세금 공제이고, 자선에 쓰인 돈은 공제가 아니었다면 결국 국고로 환수될 돈이었기 때문이다. 징세를 피한 재산을 아무리 좋은 일에 쏟아 붓더라도, 재분배가 국가 권력의 영역을 벗어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미국이 가진 특징, 즉 극심한 불평등으로 가는 고속도로가 열리게 되었다. 사회적 연대성의 유지와 재분배는 사회 계층 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충돌하는 핵심적 갈등에 속한다. 이런 내용에 대한 결정권을 이해관계 일방 당사자에게 완전히 맡겨 버린 것은, 사회 통합과 공공성 확립을 포기한 것과 같다.
결국 미국인의 교육과 의료와 연금과 주거 문제는 부자들의 선한 마음에 의지하게 되었다.착한 자본을 믿는 착한 사람들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가 닥치기 전까지 지금까지 살펴본 금융 자본의 논리는 난공불락의 진리로 뿌리 내리고 있었다. 최근의 비참한 파국을 겪었어도
금융 자본주의의 진보성과 그들의 선의에 대한 믿음은 뜻밖에도 여전하다. 그러다 소로스 유의 금융가-자선가에 대한 해맑은 찬사라도 듣게 되면, 지젝의 말이 으스스하게 떠오르는 걸 어쩔 수 없다.
"삶이 (…) 이루는 (…) 파국을 이해하는 열쇠는 자기증식하는 자본의 형이상학적 춤사위에 있(…)다. 바로 거기에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구조적 폭력이 존재하며, 이 폭력은 자본주의 이전 시대의 어떠한 직접적인 (…) 폭력보다 더 섬뜩하다. 이 폭력은 더 이상 구체적인 개인들과 그들의 악한 의도의 탓으로 돌릴 수 없으며, 순수하게 객관적이고, 체계적이며, 익명성을 띠기 때문이다."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김희진 옮김, 난장이 펴냄) 40쪽)구조적 폭력을 양산하는 착한 자본가의 목록은 끝이 없다. 카네기, 록펠러, 게이츠…. 이쯤 되면 착한 자본에 속아 주는 것도 두렵다 못해 지겨워질 만하다.
문제는 통제 받지 않는 자유 시장과 개인의 변덕에 내맡겨진 재분배 시스템 자체에 있는데도, 여전히 사람들은 선의에 속는다.
그러나 선한 마음이란 변하기 쉽다. 더구나, '선한 의도로 행하는 강요'는 누구도 꺾을 수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행정적 통제와 민주적 통제를 피하여 이루어지는 자선은, 변심하기 쉬운 연인의 마음과 같다. 오늘의 사랑이 아무리 뜨거워도, 내가 받는 사랑은 결코 나의 권리가 아니다. 엄밀히 말해 내일의 사랑은, 전적으로 내 연인의 변덕에 달려있게 된다.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어진 소로스의 경우도 그렇다. 소로스가 선의로(그렇다고 믿어주자) 벌이는
자선 사업이 암묵적으로 전파하는 메시지는, 자본주의를 이대로 유지하면서도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착각이다. 금융 자본이 천문학적 수익을 올리는 것과, 노동자와 소외당한 약자들의 불행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환상 말이다.
지나친 선의는 이용당하기 쉽다. 불행히도 그런 선의는 약자의 연대에 균열을 일으키고, 강자의 속임수에 힘을 더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니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민주 공화국의 국가 이성으로 순화된 연대의 힘뿐이다. 그 일을 성공으로 이끈 경험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독일과 프랑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스웨덴, 덴마크 정도다. 그들은 자본의 선의보다 연대의 힘을 믿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영웅의 선한 마음에 의지한 다른 나라의 모든 시도가 실패로 끝났음을 인정해야 한다. 제2, 제3의 안철수에게 기대기보다, 맞잡은 이웃의 손을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재미의 아쉬움 - 학술과 저널리즘이 책의 번역자인 김태수는 옮긴이의 글에서 대뜸 이렇게 말한다.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긴 하지만, <조지 소로스는 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까>는 저널리즘이 아니라 사회과학 학술서에 속한다." (9쪽)제목에 속았다면 미안하다. 이런 고백이었구나. 어쩌란 말인가. 이미 본문을 다 읽었는데. 주간지 집어 드는 가뿐한 마음으로 시작하였으나, 도입부에서 날 반긴 것은 부르디외와 라파르귀와 바타이유였다. 아까운 책이다. 재미없는 것은 의미도 없는 것으로 취급되기 쉽다. 전에 언급한 평론가의 말을 빌려 표현하면, "예나 지금이나 지식인의 고뇌는 따분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생활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다분히 나르시시즘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역자의 수고 덕으로 저자의 성찰을 용케도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러니, 대략 다음과 같은 시각으로 부자들의 선행을 대하는 것이, 긴 독서 여행을 마무리 짓는 나그네의 태도로 온당할 듯하다.
"아래로부터의 분노를 추슬러 차분히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위로부터의 선의가 세상을 치유하길 기다리는 것보다 현실적인 방법이다."박찬홍 사회민주주의센터 준비위원 (
mal@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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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선진국? 아니, 식민성의 포로다!
[프레시안 books] 월터 미뇰로의 <로컬 히스토리/글로벌 디자인>[프레시안 우석균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 HK 교수]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로컬리티 번역총서' 제8권인 <로컬 히스토리/글로벌 디자인 : 식민주의성, 서발턴 지식, 그리고 경계사유>(이성훈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는 국내에 번역된 월터 D. 미뇰로(아르헨티나)의 두 번째 책이다.
3년 전 미뇰로의 한국 강연 때 출판된 <라틴아메리카, 만들어진 대륙 : 식민적 상처와 탈식민적 전환>(김은중 옮김, 그린비 펴냄)과 식민성, 근대/식민 세계체제, 식민적 차이, 경계사유, 권력의 식민성, 지식의 지정학 등등의 여러 주제를 공유하고 있다. 실로 다채롭고 쉽지 않은 주제들이다. 게다가 월러스틴, 데카르트, 헤겔, 칸트, 데리다, 푸코, 레비나스, 들뢰즈, 가타리, 바바 등등 숱한 서구 석학들과의 비판적 대화를 시도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라틴아메리카는 물론이고 아프리카와 아랍의 '다른 사유'들과 시공간을 넘나드는 대화를 시도한다.
바둑으로 치면 우주류 바둑을 구사하는 스케일이 큰 책인 셈인데, 원래 언어학을 전공하면서 기호학과 식민지 시대 연구를 접목시킨 미뇰로가 이처럼 시공간을 활보하는 책을 저술할 수 있었다니, 그의 지적 호기심과 열망이 놀랍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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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컬 히스토리/글로벌 디자인>(월터 미뇰로 지음, 이성훈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 ⓒ에코리브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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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제목의 의미를 올바로 포착해야 한다. '로컬'과 '글로벌'이라는 상반된 용어의 대립에 현혹되어 과거 종속이론 유의 민족주의/제국주의 혹은 주변부/중심 아니면 제3세계/서구의 대립 구도 속에서 쓴 책으로 오독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디자인이란 "헤게모니를 장악한 지구 관리 프로젝트"를 말한다. 세계체제의 탄생 이래 그 헤게모니는 항상 서구가 장악했다. 서구는 아메리카(미주)를 식민 통치하던 시절의 기독교 사명, 18~19세기의 문명화 사명, 1960년대의 근대화 프로젝트, 최근의 신자유주의라는 4개의 글로벌 디자인을 통해 전 세계를 관리했다. 그리고 스페인과 포르투갈, 영국과 프랑스, 미국, 초국적 기업들이 차례로 그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로컬 히스토리는 피식민 국가, 즉 소위 제3세계의 역사뿐만 아니라 소위 메트로폴리탄 국가의 역사도 포괄하는 개념이다. 후자가 근대 세계체제 내부의 역사라면, 전자는 그 주변 지역의 로컬 역사이다. 글로벌 디자인도 결국은 특정 메트로폴리탄 국가의 로컬 역사에서 나온 것이고, 시대에 따라 이를 생산한 국가들이 바뀐 만큼 서구 국가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빚어진다. 미뇰로는 이처럼 세계관이 동일한 제국들 간의 갈등이 빚어지는 지점을 내부 경계라 칭하고, 식민 종주국과 상이한 로컬 역사를 지닌 피식민 국가들이 글로벌 디자인과 파열음을 일으키는 지점을 외부 경계라 칭한다.
이 대목에서 미뇰로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근대 세계체제'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사실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을 수정하는 것이 이 책의 중요한 출발점 중 하나이다. 미뇰로는 물론이고 그가 자주 인용하는 페루 사회학자이자 1세대 종속이론가 아니발 키하노와 아르헨티나의 해방철학자 엔리케 두셀은 소위 '장기 16세기'에 세계체제가 탄생했다고 본다는 점에서 월러스틴과 같은 시각을 공유한다.
그러나 이 일군의 라틴아메리카 학자들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다다른 1492년이 세계체제의 탄생 시점이라고 못 박는다. 또한 월러스틴이 세계체제의 탄생을 장기 16세기로 잡으면서도, 미뇰로가 말하는 글로벌 디자인과 유사한 개념인 지문화(geoculture)가 18세기에, 좀 더 구체적으로는 프랑스 혁명으로 비로소 자리 잡았다는 주장을 배격하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주도한 글로벌 디자인의 존재를 천명한다.
나아가 '근대 세계체제'라는 개념 자체가 진실을 호도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근대 세계체제의 탄생이 아메리카 식민통치로 가능했는데 '근대'만을 내세우고 '식민'을 언급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근대/식민 세계체제'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근대성과 식민성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것이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다다른 1492년을 세계체제의 탄생 시점으로 잡는다는 점에서 이런 일련의 주장이 라틴아메리카 학자들의 자민족 중심주의의 소산으로 비칠 가능성이 있다. 또한 반론의 여지도 없지 않다. 필자만 해도 아부-루고드의 13세기 세계체제론이 언뜻 떠오른다. 또한 16세기에 인도나 중국이 서구의 글로벌 디자인에 좌지우지되었다고 보기도 힘들다. 특히 미뇰로가 그 방대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쪽에 대한 이해가 상대적으로 떨어져 보인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사실 미뇰로는 자신의 사유가 "아메리카 내 에스파냐(스페인) 유산의 로컬 역사에서 출현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를 두고 자민족 중심주의라고 비판한다면, 미뇰로는 '경계사유'라고 주장할 것이다. 경계사유는 로컬 역사와 글로벌 디자인의 교차 지점에서 '식민적 차이'에 대한 뼈저린 성찰이나 상처를 통해 획득할 수 있는 사유이다. '식민적 차이'는 "근대/식민 상상계 속에서 행해진 지구의 분류"이고, 키하노가 정립하고 미뇰로가 자신의 이론적 토대 중 하나로 삼은 '권력의 식민성'은 그 "차이를 가치로 변형시키는 에너지이자 기계"이다. 미뇰로는 라틴아메리카의 로컬 역사 덕분에 주체성, 젠더, 노동, 지식, 권위 등 모든 측면의 식민적 차이가 이미 16세기에 위계질서화 되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가령, 서구가 저지른 3대 제노사이드인 아메리카 원주민 말살, 아프리카 흑인의 강제 이주와 노예화, 나치의 유대인 학살 중에서 앞의 두 가지 사건이 16세기 아메리카 정복과 함께 발생한 데에서 인종의 식민적 차이를 본다. 1531~1660년 사이에 최소한 15만 5000킬로그램의 금과 1698만 5000킬로그램의 은이 합법적으로 유럽에 유입되었고, 불법으로 유입된 양도 엄청나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근대성과 식민성이 동전의 양면임을 입증한다.
서구가 자랑하는 인권 개념도 18세기에 담론화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이전에 바야돌리드 논쟁(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와 세풀베다의 논쟁)의 결과물인 '인간(people)의 권리'가 시초라고 주장한다. 이 권리는 인간에 대한 진정한 존중보다는 새로운 인종을 서구의 상상계 안에 끌어들이기 위한 의도에서 기획된 것이다.
미뇰로는 경계사유가 결여된 이들을 가차 없이 비판한다. 푸코도 데리다도 들뢰즈도 사이드도 그 비판을 벗어나지 못한다. 주체성, 젠더, 노동, 지식, 권위 등 모든 측면에 존재하는 식민적 차이는 식민 종주국 출신 학자들이 체득한 현실이 아니다. 따라서 글로벌 디자인과 로컬 역사를 동시에 조망하는 폭 넓은 시야라고 할 수 있을 경계사유를 획득하기 어렵다. 심지어 권력의 식민성이 미시적인 층위까지 촘촘하게 작동하는 상황에서는 식민 지배를 경험한 이들조차 경계사유를 획득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서구) 근대성 기획의 반성에만 골몰하는 오류를 저지르고,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같은 포스트식민주의 이론도 18세기 근대성 기원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원초적 오류를 저지른다.
이런 비판을 통해 미뇰로는 포스트옥시덴탈 이성으로 나아갈 것을 주장한다. 그는 오리엔탈리즘 이전에 옥시덴탈리즘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사이드는 18세기에 구축된 오리엔탈리즘이 근대 세계체제 최초의 헤게모니적인 문화 상상계라고 말하지만, 이는 미뇰로가 수용하기 어려운 관점이다. 무엇보다도, 오리엔트라는 범주가 존재하려면 이의 대립항인 옥시덴트라는 범주가 존재해야 한다. 마치 타자가 존재하려면 그 대립항인 주체가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옥시덴트라는 범주가 탄생한 것이 바로 스페인의 로컬 역사가 주조한 글로벌 디자인에 의해서이다.
1492년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다다른 해이기도 하고, 스페인이 무어인과의 8세기 동안의 오랜 전쟁에서 승리한 해이기도 하다. 흔히 '신대륙 발견'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그것은 결코 발견이 아니었다. 이미 원주민이 살고 있는 지역에 유럽인이 뒤늦게 도달한 것일 뿐이기도 하지만, 스페인인들 그리고 나아가 서구인들의 상상계에서 아메리카는 신대륙이 아니라 유럽이 확장된 것이었다. 이를테면 국제법에서 말하는 무주물선점 원칙이 아메리카에 적용되어, 스페인인들은 새로운 땅을 개척했을 뿐이지 아시아나 아프리카 경우처럼 주인 있는 땅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터무니없는 논리지만 아무튼 미뇰로의 말처럼 "옥시덴트는 유럽의 타자가 아니라 동일성 내의 차이"였다.
서구인들의 오리엔트에 대한 태도는 스페인이 1492년 무어인에게 승리한 지 얼마 뒤부터 바뀌었다. 가령, 르네상스 시대에 "아랍 세계에 대한 인식은 오리엔탈리즘이라 일컬을 만한 것도 아니고 '타자'에 대한 인식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그리스 사상이라는 동일한 토대에 기초한 지식을 소유하는 적으로 인식되었다." 반면, 스페인이 16세기 초에 개종하지 않는 무어인을 추방하면서 오리엔트는 타자가 되었다. 아메리카 정복으로 새로 구축된 지중해—대서양 교역회로는 근대/식민 세계체제의 핵심이 되었고, 옥시덴트는 이 회로의 내부에 위치해 있다. 반면, 오리엔트는 이 회로에서 배제되어 외부에 위치하게 된다.
이 회로가 근대/식민 세계체제에서 주축을 이루게 되면서 옥시덴트는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고, 따라서 옥시덴트 외부를 기술하고 개념화하고 서열화해도 되는 특권이 있다는 인식인 옥시덴탈리즘을 탄생시키게 되었다. 미뇰로에게 옥시덴탈리즘이 모든 사유의 범주와 세계를 분류하는 지정학적 담론이라면, 오리엔탈리즘은 그 결과 파생된 하나의 연구 영역일 뿐이다. 따라서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근본적인 서구 극복에 다다를 수 없다. 이는 오직 옥시덴탈리즘 극복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그래서 미뇰로는 포스트옥시덴탈 이성의 필요성을 언급한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는 라틴아메리카의 비판적 사유에 대한 관심이 많다. 특히 두셀, 미뇰로, 키하노 등 근대성/식민성 연구그룹의 작업에 관심을 가져왔다. 이들은 포스트식민주의(postcolonilaism)이 아니라 탈식민주의(decolonialism)의 필요성을 언급한다. 사이드 같은 남다른 예외도 있지만 포스트식민주의가 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영어권 국가들의 현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대부분의 국가들이 19세기 초에 독립한 라틴아메리카 현실과 맞지 않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연구대상 시기나 지역의 문제만은 아니다. 라틴아메리카는 다른 피식민 지배 국가들보다 훨씬 먼저 독립했지만 미뇰로의 책에서도 자주 언급되듯이 독립 후에 내부 식민주의가 작동했고, 단순히 식민 잔재 정도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장구한 세월이 지속되었다는 점이 포스트식민주의의 기계적 적용을 망설이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직접적인 식민 통치 없는 식민주의의 작동과 지속 메커니즘에 대한 라틴아메리카 학자들의 성찰은 결국 식민주의와 식민성의 구분으로 나아갔다. 물론 식민성에 대한 관심과 이론화 시도를 라틴아메리카의 비판적 사유나 근대성/식민성 연구그룹만의 독점적인 지적 공헌으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이들만큼 집요하게 식민성 문제를 파고든 이들은 별로 없다. 이들이 내린 결론은 식민주의보다 식민성이 더 큰 문제라는 것이다. 이들에게 글로벌 디자인의 지향점은 전 세계적인 근대성의 성숙이라기보다 식민성의 작동과 영속이고, 그 식민성이 미시적인 차원까지 지배하는 한 식민주의도 결코 극복될 수 없는 것이다.
미뇰로의 <로컬 히스토리/글로벌 디자인 : 식민주의성, 서발턴 지식, 그리고 경계사유>의 집필 의도는 결국 식민성의 시각으로 대서사를 정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글로벌 디자인의 역사나 식민성의 실체를 밝히는 데 집중하기보다는 식민성에 대한 인식 필요성, 식민성을 극복하려는 인식의 전환, 즉 경계사유로의 전환을 역설하는 데 관심을 두었다.
그렇다면 미뇰로의 이 책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할까? 국내 라틴아메리카 연구의 과거와 현재에서 그 해답의 단초를 찾을 수 있다. 국내 라틴아메리카 연구 여건은 과거에 비해서 분명 좋아졌다. 일단 스페인어에 대한 관심 자체가 몰라보게 커졌고, 라틴아메리카의 풍부한 자원이나 잠재력에 주목하면서 속칭 돈도 좀 돌고, 군부독재와 부패가 과거 일반인들이 라틴아메리카에 대해 지닌 이미지였다면 지금은 열정, 문화적·예술적 풍요로움 등의 긍정적인 이미지가 라틴아메리카에 덧씌워진다.
하지만 종속이론이나 해방신학의 소개를 통해 국내 학계에 어느 정도 이론적 개입을 했던 것은 과거지사가 되었다. 여기에는 국내 라틴아메리카 연구자들이 반성할 점도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우리나라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물적 토대가 달라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가령 1980년대 한국 사회는 종속이론의 중심-주변부, 신식민주의, 부등가교환 등의 키워드로 분석 가능했지만, 선진국의 문턱에 와있다고 자평하는 지금의 한국 사회를 여전히 개도국 수준을 뛰어넘지 못하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생산된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에 대해 학계가 납득하지 못하는 듯하다. 아마도 그래서 근대성/식민성 그룹에 대한 반향이 아직 미약한 것 같다. 세계화 국면에서 이론적 교정이 있었다지만, 결국 이들의 뿌리는 종속이론과 해방철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 사회가 라틴아메리카의 비판적 사유를 도외시해도 될 정도로 식민성을 극복한 사회일까? 과거 미뇰로를 소개하면서 '지식에도 왕후장상의 씨가 있다'라는 표현을 한 적이 있다. 근대성/식민성 그룹이 말하는 지식의 지정학적 속성, 즉 서구 지식이 비서구적 지식보다 특권적 위치를 지니고 있는 현실을 빗댄 말이다. 2008년 금융 위기의 전후 상황은 지식의 지정학성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금융 위기 이전까지 세계경제포럼(다보스 포럼)은 줄기차게 (신자유주의)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외쳤다. 반면 세계시민사회포럼은 이들을 비판하면서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지식의 지정학이 작동하는 현실에서 우리 사회는 항상 세계경제포럼에 눈길을 주었다. 미뇰로식 용어를 사용하자면 신자유주의 글로벌 디자인 하에서 우리나라의 로컬 역사가 완벽하게 지배당한 형국이다.
그렇다면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우리 사회가 달라졌을까? 필자는 언론도 학계도 출판계도 위기의 진단과 해법을 또다시 서구 지식에서 구하는 현실을 보고 식민성의 포로가 된 국내 현실, 지식의 지정학이 미시적 차원까지 지배하는 현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신자유주의 글로벌 디자인과 파열음을 낸 세계 시민사회의 경계사유는 여전히 지식의 장에서 소외 대상이었던 것이다. 미뇰로의 <로컬 히스토리/글로벌 디자인 : 식민주의성, 서발턴 지식, 그리고 경계사유> 출간이 반가운 이유는 바로 이런 국내 현실의 문제점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기 때문이다.
우석균 서울대학교 ��틴아메리카연구소 HK 교수 (
mal@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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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인터뷰] "입각 못했어도 섭섭하지 않아…朴 대통령 이제 쓴소리도 들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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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은 인터뷰에서 "국가미래연구원을 미국 헤리티지재단처럼 개혁적 보수의 싱크탱크로 만드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 |
박근혜 싱크탱크서 '독립선언'한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 원장
대통령은 공조직 활용해야…사조직인 우리가 결별 선택한 것
창조경제 지나치게 강조하면 경제위기 관리 소홀히 할 수도
건설·부동산 살리는 게 가장 시급지난 3일 오전 서강대 마테오관 9층 리셉션룸. 박근혜 대통령의 싱크탱크로 알려진 국가미래연구원의 인터넷 홈페이지(www.ifs.or.kr) 론칭 행사에 회원 학자 90여명(전체 회원은 200여명)이 모였다. 그들 앞에 선 김광두 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박 대통령은 더 이상 우리의 회원이 아닙니다. 우리는 대통령과 상호 독립적인 관계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어떤 정권이나 어떤 정당에든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장점을 바탕으로 독립적인 싱크탱크로 발전시켜 나갈 것입니다.”
2010년 12월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발기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해 출범한 국가미래연구원이 박 대통령으로부터 ‘독립 선언’을 한 것이다. 한때 박 대통령의 ‘경제교사’였던 김 원장은 그동안 조심스러워하던 언론 인터뷰에도 적극 응하며 자신의 생각을 주저없이 말하고 있다. 김 원장을 7일 서울 마포동 마포현대빌딩 2층에 있는 국가미래연구원에서 만났다. 그는 박 대통령과의 인연, 그의 장단점, ‘불통 논란’ 등 까다로운 질문에도 솔직 담백한 대답을 쏟아냈다.
▷박 대통령의 싱크탱크로 남아 있을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독립한 이유가 있나요.“대통령을 도와주는 공조직은 정부 출연연구소 등 많습니다. 대통령은 공조직을 활용해야지, 우리 같은 사조직을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요. 대통령을 위해 우리가 떨어져 나온 것입니다. 기왕에 각 분야 전문가들이 어렵게 모였는데, 독립적인 싱크탱크를 제대로 한번 만들어 보자는 생각도 했죠.”
▷독립했다고 해도 박근혜 정부에 비판적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요.“앞으로 우리가 내놓는 정책보고서를 보면 알 것입니다. 행복지수, 민생지수, 안정지수 등을 개발해 주기적으로 발표할 건데, 박근혜 정부 임기 중 지수가 나빠지더라도 계속 공개할 거예요. 이런 독립성을 위해 연구원도 소액 다수의 후원금으로 운영할 계획이지요. 지금도 순전히 회원들의 회비와 자원봉사로 운영되고 있어요.”
▷지향하는 모델이 미국 헤리티지재단이라고 들었습니다.“그렇습니다. 헤리티지재단은 미국 공화당과 가치를 공유하는 보수의 싱크탱크로 정책과 전문가들의 플랫폼이지요. 여기서 개발한 정책은 필요한 곳에서 언제든지 가져가 활용합니다. 우린 기본적으로 보수이지만, 개혁적 보수입니다. 보수의 약점은 변화를 싫어하는 건데, 우린 지속적으로 변화를 추구합니다.”
▷박 대통령의 ‘경제교사’로 알려져 있는데요, 언제부터 인연이 닿으셨나요.“2006년 말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 경선을 앞두고 서강대 은사인 남덕우 전 총리의 권유로 10여명의 전문가가 참여한 박근혜 후보 정책자문그룹에 들어갔지요. 거기에 최외출 영남대 교수, 안종범 성균관대 교수, 신세돈 숙명여대 교수 등도 있었어요. 줄·푸·세(세금 줄이고, 규제 풀고, 법질서 세우기) 공약도 그때 만든 것입니다.”
▷박 대통령이 당시 대선 경선에선 패배했지요.“그랬지요. 대선이 끝난 2007년 말 정책자문그룹 송년회에서 당시 박 전 대표가 공부 모임을 계속하자고 제의했습니다. 그래서 2010년까지 3년 정도 한 달에 한두 번꼴로 모임을 가졌어요. 그 공부 모임 멤버엔 이종훈 명지대 교수, 김영세 연세대 교수 등도 합류했어요.”
▷박 대통령의 장점과 단점을 하나씩만 꼽는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장점은 집중력이 좋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4시간 동안 모임을 한 적이 있는데, 박 대통령은 자세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집중했어요. 경제 정책에 대한 이해도도 매우 높았습니다. 단점이라면 어려운 사람들을 자꾸 도와주려는 성향이 강하다는 거죠. 경제학자 입장에서는 ‘서민들 도와주는 것은 좋지만, 재원도 감안해야 한다’고 조언할 때가 많았어요. 박 대통령이 굉장히 냉정한 것 같지만, 가슴은 따뜻한 분이에요. 요즘 언론이 말하는 것처럼 눈에서 ‘레이저 광선’이 나오고, 뭐 그런 건 없었어요. (웃음)”
▷그동안 경제부총리 등의 유력 후보로 거론됐지만 입각하지는 못했습니다. 서운하지 않으세요.“서운한 것 없습니다. 대선 이전부터 미래연구원을 독립적 싱크탱크로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입각엔 관심이 없었어요. 언론 하마평에 오를 때 그냥 웃었습니다.”
▷‘창조경제’는 누구의 아이디어였나요.“그건 박 대통령 자신의 아이디어예요. 박 대통령은 원래부터 이스라엘의 벤처 창업 등 창업 경제에 관심이 많았어요. 우리나라의 중소기업과 창업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었고, 그걸 해결하려면 창조경제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죠.”
▷창조경제가 김대중 정부의 ‘벤처 정책’과 비슷하다는 지적도 있는데요.“김대중 정부의 벤처 정책이 신기술에만 초점을 뒀다면 창조경제는 소프트웨어, 문화콘텐츠까지 폭을 넓힌 것입니다. 또 창조경제는 기술과 아이디어의 상업화부터 창업 인큐베이터, 관련 법률·제도를 종합적으로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좀 더 종합적이고, 내용이 더 깊어졌다고 할 수 있지요.”
▷불황 장기화에 대한 대책도 시급하지 않을까요.“물론입니다. 창조경제는 비전이고 나아가야 할 방향이지만, 당장 경기 활성화 효과가 있는 건 아닙니다. 따라서 현재의 경제위기 관리와 투 트랙으로 같이 가야 해요. 대통령이 창조경제만 강조하다 보면 관료들이 자칫 경기 관리를 소홀히 할 수 있는데, 그건 안 됩니다.”
▷경기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가장 서둘러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무엇보다 건설업이 살아나도록 해야 합니다. 건설업은 서민경제에 가장 영향을 많이 주는 산업이에요. 건설업이 살아나려면 부동산 거래가 되살아나야 하죠. 건설업과 부동산 시장이 정상화될 수 있도록 정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추경예산을 편성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는데요.“필요하다고 봅니다. 경기를 살리려면 전통적으로 금리를 낮춰 돈을 풀어야 합니다. 지금은 그게 효과가 없습니다. 불확실성 때문에 사람들이 돈을 안 쓰니까요. 이런 때는 정부가 직접 소비하는 재정정책을 쓸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정부가 재정을 확대하면 재정 건전성이 악화하는 문제가 있지요. 그건 ‘재정준 칙’이라는 개념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재정준칙은 1년 단위로 재정적자 여부를 따지는 게 아니라 5년, 10년 단위의 중장기로 재정수지를 관리하는 거예요. 불황 때는 적자를 감수했다가 경기가 좋아지면 흑자로 돌려 전체적으로 균형을 맞추는 것입니다.”
▷박 대통령이 강조하고 있는 ‘증세 없는 복지’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나요.“어느 나라든 복지를 늘리려면 증세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증세 이전에 정부의 낭비를 줄이고, 지하경제에서 탈루한 세금을 걷는 노력을 충분히 하자는 것입니다. 이런 노력도 안 하고 증세부터 한다는 건 말이 안 되죠. 그래도 돈이 모자라면 국민을 설득해 증세할 수밖에 없겠지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국정과제를 발표하면서 ‘경제민주화’라는 용어를 안 써서 후퇴 논란이 있었습니다.
“좋게 보자면 인수위가 경제이론에 충실했던 거죠. 경제민주화란 말은 경제학 용어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정치적으론 잘못한 거죠. 사람들이 경제민주화란 말을 기대하고 있는데, 그 용어를 안 쓴 것은 실수입니다. 또 국정과제에 경제민주화 사항이 모두 들어가 있어요. 근데 포장지를 잘못 싼 거지요.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의지이고, 앞으로 하는 걸 보면 대통령 의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박근혜 정부의 성공을 위해 조언하신다면.“소통입니다. 조선왕조에서 소통의 리더십이 돋보였던 세종대왕도 어떤 정책을 시행하기에 앞서 여론조사도 하고, 직언을 하는 신하를 옆에 두는 등 정말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도 신하들에게 ‘내가 제일 잘못하는 게 뭐냐’고 물으면 ‘소통이 부족하다’는 답이 돌아왔다고 해요. 그만큼 소통이 어렵지만, 중요합니다. 소통의 전제조건은 싫은 소리 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통이 안 되고, 신뢰가 안 생겨서 루머가 발생하게 마련이에요. 소통 없는 정책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죠. 박 대통령은 소통에 각별히 신경을 더 써야 합니다.”
● 김광두 원장은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로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 교사’로 불린 정책자문그룹의 학자다. 1947년생으로 전남 나주가 고향이다. 광주일고와 서강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하와이주립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4년부터 서강대에서 교수 생활을 하면서 신문에 칼럼을 쓰고, 방송에 출연하는 등 현실 참여에 적극적이었다.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2006년부터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의 정책 자문에 응했다. 2010년 말 국가미래연구원 설립을 주도했다. 이 연구원은 지난해 4·11 총선과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정책 공약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분과위원 22명(간사 포함) 중 홍기택 중앙대 교수 등 7명이 미래연구원 출신이었다. 새 정부의 윤병세 외교부, 류길재 통일부, 서승환 국토교통부 장관 내정자와 최성재 청와대 고용복지수석 등이 미래연구원 멤버다.
차병석 기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