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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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성장 시대' 기업들 "품질혁신·新성장동력이 살길"(종합)
저성장기
생존전략 골몰…삼성·LG "혁신제품으로 승부"
GS·현대重 "新시장 개척", 포스코·SK "새 성장동력
확보"
(서울=연합뉴스) 산업팀 = 세계 경제의 '저성장 기조'가 장기화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가운데 대기업들이 저마다
'저성장기 생존 전략'을 찾는 데 골몰하고 있다.
세계 경제가 평균 이상의 성장을 지속할 것이라는 가정 아래 수립한 사업 전략과
경영 방식을 고집한다면 날이 갈수록 극심해지는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저변에 깔려 있다.
이에 기업들은
단기적으로 제품경쟁력 향상을 꾀하는 한편 중장기적으로는 연구개발(R&D) 투자 확대를 통한 신성장동력 발굴·사업 구조 개편 등으로 체질을
개선하겠다는 전략을 수립하고 있다.
◇ '품질 혁신'·'신시장 개척'으로 위기의 파고 넘는다
세계 최고 수준의 사업
역량을 보유한 삼성전자도 저성장 기조의 장기화가 불러올 시장 환경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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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5월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월드 IT 쇼 2013'에서 LG전자 부스에 세계최초로 개발된 곡면
OLED TV가 전시돼 있다. <<연합뉴스DB>> |
이 회사는 지난 4일
전 임직원에게 보낸 CEO(최고경영자) 메시지에서 "하반기 시장은 급변할 것이고 경영환경의 불확실성은 더욱 커질 것"이라며 "기본에 충실한
자세를 잊지 말고 경영실적 극대화를 위해 최선을 다해달라"고 당부했다.
삼성전자는 저성장 기조를 돌파할 해법으로 제조업체의
'기본'인 기술적 역량 및 제품경쟁력 강화를 제시했다.
회사 관계자는 "경영 전 과정에서 운영 효율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지속적인
R&D 투자로 울트라HD(초고해상도) TV, 곡면 올레드TV, 갤럭시S4 등 세계 시장에서 통하는 혁신 제품군을 확대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LG전자도 당장에는 TV, 스마트폰, 가전제품 등 주력사업 부문의 시장선도 제품 출시에 집중하면서
중장기적으로는 R&D 투자를 통한 초일류 제품 확보와 질적 성장에 '올인'할 계획이다.
55인치형 올레드 TV, 곡면 올레드
TV 등을 세계 최초로 출시하면서 차세대 초고화질 TV 시장을 선점한 여세를 몰아 상대적으로 뒤처져 있는 LTE(롱텀에볼루션) 스마트폰
분야에서도 시장 주도권을 강화하겠다는 전략이다.
일부 기업은 저성장으로 기존 시장에서 수익 확대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만큼 해외
미개척 시장에 뛰어들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겠다는 전략을 내놨다.
GS그룹 계열사인 GS칼텍스와 GS샵은 아시아·유럽·중동·중남미
등의 미개척 시장으로 수출전선을 다변화하기로 했고, 대한항공도 미래 성장 가능성이 충분한 신흥시장에서 새로운 여행 수요를 개발하고자 구체적인
액션 플랜을 짜고 있다.
현대중공업도 지난 1월 러시아에 고압차단기 공장을 준공한 데 이어 4월에는 브라질에서 건설장비 공장의 본격
가동에 들어가는 등 글로벌 시장 확대에 사활을 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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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공업울산 본사 <<연합뉴스DB>> |
◇
"신성장동력 확보가 관건"…사업구조 개편에 박차
기술개발·품질 혁신 외에 신성장동력 확보를 위해 사업구조 개편에 나서는 기업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기업이 철강업계의 대명사인 포스코다.
포스코는 이러한 저성장 시장환경을 극복하고자
철강·소재·에너지 등을 3대 미래 사업 포트폴리오로 정하고 전사적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정준양 포스코 회장도 최근 미국 철강콘퍼런스에서 이를
공식화했다.
전통의 주력 업종인 철강 부분에서 자동차 강판, 에너지강재 등 고부가제품 개발에 힘을 쏟는 한편 소재와 에너지 분야를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삼아 기업의 기초 체력을 튼튼히 하겠다는 것이다.
포스코가 새로운 포트폴리오 구축에 나선 것은 철강산업만으로는
앞으로 글로벌 경쟁에서 생존하기 쉽지 않다는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이다.
세계 철강산업의 불황의 골이 깊어지면서 세계 주요 30개
철강사가 작년에 기록한 영업이익률은 2.5%에 불과했다. 포스코는 7.8%의 영업이익률을 올려 그나마 선방했으나 당분간 저상장 기조가 지속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현대·기아차는 세계적인 경기침체와 맞물려 글로벌 완성차 메이커 간 경쟁이 극심해지는 상황에서 이른 시일 내에
최상위권 진입의 발판을 마련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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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강남구 대치동 포스코 본사
<<연합뉴스DB>> |
이에 따라 무리한 양적 팽창보다는 내실 경영을
강화하는 쪽으로 중장기 사업 전략의 방향을 잡았다.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으로 떠오른 중국 공장 증설을 제외하고는 해외 생산기지 확대를 보류한
것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
아울러 미래 자동차업계의 경쟁력을 판가름할 고효율 친환경차에 R&D 역량을 집중해 고부가가치
친환경차 분야에서 세계 초일류 브랜드로 우뚝 서겠다는 목표를 내놨다.
SK그룹은 주력 사업인 정유화학·정보통신·반도체 부문의 경쟁력
향상에 전력을 쏟는 한편 R&D 투자 확대를 통한 미래 성장동력 확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아울러 수직계열화와 업종전문화를
통한 계열사 체질 강화 작업도 서두르고 있다.
한화그룹도 비핵심사업을 과감하게 정리하는 한편 주력 사업의 내실을 강화하는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저성장기 생존 전략으로 채택했다.
김은환 삼성경제연구소 상무는 "저성장기는 장기전이자 지구전"이라며 "단기 실적에 매달려
무리하다가는 탈진할 수 있는 만큼 장기적인 안목에서 체질 강화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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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 나오는데 30분 그래도 손님 줄서…장사도 철학
있어야
프랜차이즈 CEO
경영노트면류와 돈가스가 주력 제품인 회사를 운영하는 필자는 맛있는 국수집이 있으면 항상 달려간다. 한
번은 서울 홍제동에 있는 국수집을 찾아갔는데 그곳에서 정말 소중한 것을 얻었다. 장사에도 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국수집의 점포 이름은
‘우동국수’였다. 조금은 특이한 상호였다. 점포 안으로 들어간 나는 우동국수 한 그릇을 시켰다. 그런데 30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주문이 들어가면 그때서야 반죽을 하고 면을 뽑는다는 것이었다. 화가 나서 몇 마디 불만을 토로하자 옆에 있던 손님들이 웃으면서 “이 집은 원래
그래요”라고 말했다. 외식사업에 상당한 지식을 지니고 있다고 자부하던 필자로선 이해할 수 없는 가게였다.
오랜 기다림 끝에 필자도
드디어 그 국수를 맛볼 수 있었다. 맛을 본 나는 깜짝 놀랐다. 면발은 방금 뽑아내 신선하면서도 쫄깃했고, 육수는 시원한 멸치국물이었다.
진하면서 깔끔했다. 국수를 다 먹은 필자는 “조리 시간을 줄이면 더 많은 손님이 올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주인장의 대답은
간단했다. “빨리 만드는 국수는 우리집 국수가 아니다”고 그는 말했다. 더 황당한 것은 어느 날 그 국수가 먹고 싶어서 찾아갔더니 문이 닫혀
있는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좋은 식재료를 구하지 못하거나 주인장의 몸 상태가 좋지 않으면 장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장사꾼이 장사를 안 하다니.”
그 국수의 가격은 3000원이었다. 그 정도 정성과 맛이면 5000원 이상 받아도 장사가 잘될 텐데
몇 년간 그 가격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 후로도 몇 번 더 그 국수를 먹으러 갔다. 그리고 왜 가격을 올리지 않는지 슬쩍
물어봤다. 주인의 대답은 걸작이었다. “그 가격만 받아도 먹고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어요.”
그 국수집 주인장은 자신의 집에
오는 손님은 자신이 고집하는 방식으로 만든 국수를 먹기 위해 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좋은 재료가 확보되지 않거나 컨디션이 나쁘면 좋은
음식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장사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래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으니 가격도 올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제야 필자는 그
가게를 책임지는 어머니와 아들의 얼굴이 정말 편안해 보인다는 것을 느꼈다. 그 국수집은 많은 사람이 오랜 시간을 기다려 줄을 서서 먹지만 아무도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문을 열지 않은 날은 아무런 불평 없이 다른 날을 기약하며 돌아간다.
최근에 수많은 자영업자들이
장사가 안 된다며 괴로움을 호소한다. 사실 장사가 잘되고, 안 되는 것에는 많은 변수가 존재한다.그래도 모든 자영업자가 힘든 시간을 잘 버텨
나가고 있다. 이럴수록 자신만의 장사철학이 없다면 금방 주저앉게 된다.
장사의 세계에 처음 발을 디디는 초보자일수록 최악의 순간에도
굳건히 인내할 수 있는 자신만의 장사철학을 지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조만희 ‘우메마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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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OEM 확대, 한국전자업계 최대위험 요인
- OEM으로 일본 극복한 한국, 중국에 똑같이 당할수
있다
[이데일리 류성 산업 선임기자] 국내 전자업계에 중국업체를 통한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이 확산되고
있는 현상은 중국업체들의 제조 기술력이 국내 업체들의 턱밑까지 근접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기존에는 중국업체들의 낮은 기술력
때문에 주요 국내 전자업체들은 중국 현지에 자체 공장을 두고 제품을 생산해 들여오는 방식을 선호해왔다. 하지만 최근 중국전자업체들의 제조
기술력이 비약적으로 높아지면서 OEM방식을 통해 중국업체들에게 위탁생산을 하더라도 한국산과 별반 차이가 없는 상황에 도달한
것이다.
특히 중국업체들이 무섭게 잠식해 들어오고 있는 중저가, 저부가가치 전자 제품 분야에서는 현재 실질적으로 국내전자 업체들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생존 대안은 이들 중국업체들에게 OEM 방식의 위탁을 맡기는 방법 뿐이다. 그렇지 않고 자체 생산을 할 경우 손익을 맞출 수
없어 사업성이 사라진 실정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중국업체가 생산한 것과 한국업체 생산품과 품질은 비슷하고 제조원가는 한국산이
20~50% 가량 높은 상황”이라며 “중국산과 맞대응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귀띔했다.
OEM 방식을 활용하는 업체는 대개
초창기에는 고부가 기술 및 제품은 자체 생산하고, 저부가 제품 중심으로 외부 업체에 위탁하는 전략을 편다. 국내 전자업체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현재 국내 전자업체들이 중국업체들에 OEM 위탁 생산을 맡기고 있는 것은 전자레인지, 청소기, 제습기, 소형 에어컨 등
비교적 낮은 수준의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전자 제품 중심이다. 하지만 TV, 대형 냉장고 심지어 스마트폰 등 고난도 제조기술을 필요로 하는
전자제품으로 확대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게 전자업계의 시각이다.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OEM 주문을 받은 하청업체의 기술력이
올라가 결국에는 OEM을 맡긴 원청업체와 맘먹는 수준으로 도약할 가능성이 높다는 데 있다.
바로 1980년대~1990년대
삼성전자(005930)와 LG전자(066570)등 한국 전자업체들과 이들에게 OEM 일감을 줬던 소니, 파나소닉 등 일본 전자업체들과의 관계가
그랬다. 일본 업체들은 초기 저부가 기술을 필요로 하는 단순 중저가 전자제품 위주로 한국업체들에게 OEM 위탁생산을 맡기며 고부가가치 기술이
한국 업체들에게 이전되는 것을 철저하게 막는 전략을 폈다. 하지만 결국 한국업체들은 고부가가치 기술 습득에 성공했고 나아가 일본업체들을 누르고
세계 전자업계를 주름잡을 수 있었다.
업계 전문가들은 중국에 OEM 위탁생산을 맡기고 있는 한국 전자업계를 보면서 과거 한국과 일본
전자업계간 관계를 떠올리며 우려한다. OEM을 통해 기초체력을 다진 후 원청업체인 일본업계를 제압한 한국업체들처럼 중국업체들도 결국 한국업체들을
초월할 것이라는 전망에서다.
장세진 카이스트 교수는 “현재 한국 전자업체들은 OEM 방식에 있어 일본 업체들의 전철을 상당부분
그대로 밟고 있다”며 “결국 한국 전자업체들은 중국 업체들에게 추월당하기 전에 프리미엄 제품을 차별화할 수 있는 창조적 혁신기업으로 거듭나야
만이 미래가 보장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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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 이 점포] 한입 크기의 허브 양념 족발…女心잡아 月매출 6000만원
거뜬
서울
논현동 양념족발 전문점 '리틀족발이'족발은 원래 여자들이 즐겨 찾는 음식이 아니다. 고기 냄새도 나고
음식의 모양이나 먹는 모습이 여성으로선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족발집에는 여성 고객이 그렇게 많지 않다. 하지만 이런 편견을 깨는 족발집이
있다. 가게를 들어서면 여성 고객이 압도적으로 많다. 서울 논현동 영동시장 근처에 있는 양념족발 전문점 ‘리틀족발이’가 바로 그곳이다. 이
점포는 고객 70%가 2030세대 여성이다. 유흥가 상권임에도 이 점포는 배달 매출이 20%로 상당히 높은 편이다. 이 배달 고객 대부분이
여성이다.
이곳 양념 족발은 각종 천연 재료를 넣고 삶아 냄새를 없앤 족발에 다시 각종 양념을 발라 한 번 더 구워주는 방식으로
조리한다. 허브 등 30가지 천연재료로 맛을 낸 양념을 코팅하는 방식으로 발라서 직화로 구워내기 때문에 족발이 식어도 맛을 유지하는 것이 조리
비법이다. 예쁜 그릇에 2㎝ 크기로 잘라서 손님상에 내놓기 때문에 여성들이 손을 대지 않고 젓가락으로 집어서 편하게 먹을 수 있다.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청양고추와 전통 고추장을 배합한 양념을 입혀 직화로 구워내는 ‘매운맛 족발’과 전통 간장과 마늘, 생강
등으로 맛을 낸 ‘간장 족발’이다. 냉면에 매운 족발을 얹어서 비벼 먹는 ‘후끈면’은 여름철 인기 상품이다.
이 가게를 운영하는
김대광 사장(43·사진)은 원래 서울 압구정동에서 실내포장마차를 하다 지난해 10월 이곳으로 자리를 옮겨 59㎡(약 18평) 규모의 양념족발요리
전문점을 열었다. 10년 가까이 실내포장마차를 하면서 재미를 좀 봤지만 언제부터인가 압구정동 상권이 침체되면서 새로운 상권을 찾아야 했다.
그동안 눈여겨본 상권이 바로 논현역과 신논현역 사이의 먹자골목이었다. 이곳은 하루 24시간, 1주일 내내 영업이 가능한 상권이다. 저녁시간대에는
일반 직장인이 주고객이고 새벽에는 주변 유흥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들르기 때문에 강남의 황금상권 중 하나로 꼽힌다.
이 가게의
족발요리는 3분 안에 모든 메뉴의 조리가 가능하다. 손님상에 나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5분이 다. 조리 시간이 짧으니 테이블 회전율이 높다.
덕분에 매장 규모가 작은데도 한 달 평균 매출이 6000만원을 거뜬히 넘고 순이익은 2500만원 안팎을 기록하고 있다. 창업비는 임대보증금
2억원, 인테리어 및 주방집기비 7000만원 등 총 2억7000만원이 들었다.
김 사장은 점포를 이전했을 때 빠른 시간 안에
매출을 본궤도에 올리려면 고객DB를 활용하라고 조언했다. “포장마차를 운영할 때 단골고객 전화번호를 간직하고 있었는데 새로 문을 연 가게 정보를
담아 메시지를 보냈지요. 그랬더니 옛 단골고객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금방 손익분기점에 도달할 수 있는 비결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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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대 재도약 - 총장이 뛴다] 이원로 인제대 총장
평생지도교수제로 졸업 후 취업까지
책임져요
629개 기업과 산학협력 강화… 작년 졸업생 유지취업률 91%
정부 공적개발원조 사업 참여… 아프간 바그람
한국병원 운영
이원로(사진) 인제대 총장은 지난달 28일부터 3일까지 스리랑카를 방문했다. 이 총장은 스리랑카 국립
스리자예와데네푸라 간호대학에 학위 과정 개설을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인제대는 4년간 20억원의 국고를 지원받아 스리랑카 보건의료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선진 의료기술을 전수하게 된다.
이 총장은 “인제대는 ‘울지마 톤즈’로 잘 알려진 고 이태석 신부의 모교”라며
“건학 이념과 그 동안 쌓은 역량을 바탕으로 저개발국에 대한 정부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에 적극 참여하고 다양한 봉사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인제대 의과대학에는 현재 고 이태석 신부가 활동했던 남수단 출신 학생 2명이 재학 중이다. 이들을 전문 의료인으로 키워
현지의 낙후된 의료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다.
인제대는 2010년부터 아프가니스탄 바그람주에 의료 인력을 파견해 한국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바그람 한국병원은 한국의 보건의료 ODA성공 사례로 국내외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5년간 참여한 ODA사업은 15건에
이른다.
인제대는 지역 기업과의 협력도 강화하고 있다. 부산, 경남, 김해지역 기업과의 산학 협력을 위해 2011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산학협력가족회사’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인제대는 기업의 기술개발, 생산, 마케팅, 재직자 재교육 등에 학교 인프라와 우수한 인력을
지원하고 있다. 이를 통해 629개의 기업과 실질적 동반성장 관계를 구축했다.
이 총장은 지난해 인덕성을 갖춘 글로벌 인재를 양성을
목표로 ‘글로벌 캠퍼스 2020’ 비전을 제시했다. 이를 위해 구조적, 기능적 단위인 학과를 발전시켜 나가게 될 ‘책임학과장 제도’와 ‘미래발전
준비위원회’를 운영하면서 대학의 혁신을 유도하고 있다. 또한 대학교육평가의 척도로 사용되는 중요 지표를 향상시키기 위해 ‘지표관리 위원회’도
운영하고 있다.
그 동안의 성과도 적지 않다. 4년 연속 교육역량강화사업 최우수대학 선정, 7년 연속 취업률 최우수대학,
지역인재추천제 고급공무원 전국 최다 배출, 약학대학 설립 등 결과물을 이뤄냈다.
인제대는 해마다 높은 취업률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지난해 졸업생 유지취업률은 90.7%로 졸업자 2,000명~3,000명 규모 4년제 대학 중 4위에 올랐다. 이 총장은 “대학이 입학에서
졸업 후 취업까지 학생을 책임지는 ‘평생지도교수제’와 자격증과정, 전문가과정, 학과별 진로ㆍ취업교육 등 현장을 중시하는 인재 양성이 좋은 결과를
내고 있다”고 설명 했다.
이원로 총장은 의학계에서 심장분야의 권위자로 정평이 나 있는 의사이면서 1989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한
시인으로도 유명하다. 올 해초에는 12번째 시집 ‘시냅스’를 발간했다.
이원로(사진) 인제대 총장은 지난달 28일부터 3일까지
스리랑카를 방문했다. 이 총장은 스리랑카 국립 스리자예와데네푸라 간호대학에 학위 과정 개설을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인제대는 4년간 20억원의
국고를 지원받아 스리랑카 보건의료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선진 의료기술을 전수하게 된다.
이 총장은 "인제대는 '울지마 톤즈'로
잘 알려진 고 이태석 신부의 모교"라며 "건학 이념과 그 동안 쌓은 역량을 바탕으로 저개발국에 대한 정부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에 적극
참여하고 다양한 봉사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인제대 의과대학에는 현재 고 이태석 신부가 활동했던 남수단 출신 학생 2명이
재학 중이다. 이들을 전문 의료인으로 키워 현지의 낙후된 의료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다.
인제대는 2010년부터 아프가니스탄
바그람주에 의료 인력을 파견해 한국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바그람 한국병원은 한국의 보건의료 ODA성공 사례로 국내외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5년간 참여한 ODA사업은 15건에 이른다.
인제대는 지역 기업과의 협력도 강화하고 있다. 부산, 경남, 김해지역 기업과의 산학
협력을 위해 2011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산학협력가족회사'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인제대는 기업의 기술개발, 생산, 마케팅, 재직자 재교육
등에 학교 인프라와 우수한 인력을 지원하고 있다. 이를 통해 629개의 기업과 실질적 동반성장 관계를 구축했다.
이 총장은 지난해
인덕성을 갖춘 글로벌 인재를 양성을 목표로 '글로벌 캠퍼스 2020' 비전을 제시했다. 이를 위해 구조적, 기능적 단위인 학과를 발전시켜 나가게
될 '책임학과장 제도'와 '미래발전 준비위원회'를 운영하면서 대학의 혁신을 유도하고 있다. 또한 대학교육평가의 척도로 사용되는 중요 지표를
향상시키기 위해 '지표관리 위원회'도 운영하고 있다.
그 동안의 성과도 적지 않다. 4년 연속 교육역량강화사업 최우수대학 선정,
7년 연속 취업률 최우수대학, 지역인재추천제 고급공무원 전국 최다 배출, 약학대학 설립 등 결과물을 이뤄냈다.
인제대는 해마다
높은 취업률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지난해 졸업생 유지취업률은 90.7%로 졸업자 2,000명~3,000명 규모 4년제 대학 중 4위에
올랐다. 이 총장은 "대학이 입학에서 졸업 후 취업까지 학생을 책임지는 '평생지도교수제'와 자격증과정, 전문가과정, 학과별 진로ㆍ취업교육 등
현장을 중시하는 인재 양성이 좋은 결과를 내고 있다"고 설명 했다.
이원로 총장은 의학계에서 심장분야의 권위자로 정평이 나 있는
의사이면서 1989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한 시인으로도 유명하다. 올 해초에는 12번째 시집 '시냅스'를 발간했다.
김해=황상욱기자
sook@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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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법 시행 7개월 만에 1461곳.. 자금지원 어떻게
농협 등
기존조합 자금에 중기청 정책자금 등 지원
정부가
협동조합 운영 자금을 지원하기 위한 '투트랙 방안'을 검토하고 있어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농협, 신협 등 기존 금융협동조합 자금을
이용하는 것과 정책금융공사, 중소기업청 등을 통해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정책자금을 활용하는 방안이다. 기획재정부는 이르면 올해 말 이 같은 방안을
토대로 한 협동조합 자금지원 정책을 마련할 것으로 보인다.
7일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협동조합기본법 시행 7개월 만인 6월 30일
기준 1461곳이 협동조합 설립인가를 받았다. 빠른 추세로 증가하고 있는 협동조합에 대해 정부는 이달부터 8월까지 실태조사를 벌인 후
협동조합기본법 시행 초기에 발생하고 있는 문제점과 제도적 보완장치를 마련할 계획이다.
특히 기재부는 협동조합 초기 운영에 있어
정부의 적극적인 자금지원이 필요하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에 공감대를 형성, 협동조합을 대상으로 한 정책자금의 구체적인 지원 방안을 마련하는 데
속도를 낼 전망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8월 중 실태조사가 끝나면 정확하게 나오겠지만 현재 협동조합을 실제 운영하는 데 자금조달
부분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정부가 정책적으로 협동조합 초기 운영자금을 지원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고
밝혔다.
정부는 협동조합에 대한 실태조사가 끝나는 8월부터 협동조합 운영자금을 지원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는 작업을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기재부는 새로운 제도를 마련하거나 기관을 신설하기보다 기존 제도를 활용해 자금을 지원하는 방안에 무게를 두고 있다.
정책자금을 지원하는 데 있어 주식회사 등 협동조합과 다른 형태의 기업들과 형평성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는 판단이다.
이에 따라 기존
금융협동조합의 자금이 새롭게 설립된 협동조합으로 흘러들어가는 길을 터주는 동시에 중소기업에 지원되는 정책자금의 총 규모나 비중을 조정해 협동조합
역시 혜택을 받게 한다는 방안이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다.
실제 기재부 관계자는 "기존 금융협동조합과 정책자금을 활용해 자금을
지원하는 방안이 현실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이라며 "실태조사 결과가 나오면 구체적인 자금지원 대책을 세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협동조합 전문가들은 정책자금 지원 등과 같은 기존 제도를 활용하는 것을 넘어 협동조합 자금조달을 전담할 조직을 신설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신대 장조익 교수는 "농협, 새마을금고 등 기존 금융협동조합 형태의 기관들은 이미 시중은행과 같은
성격의 영업을 하기 때문에 협동조합을 위한 새로운 금융기관이 필요하다"며 "협동조합기본법을 개정해 금융, 보험 분야에서도 협동조합 설립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relee@fnnews.com 이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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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지배구조 대수술 본격화?
신동빈 회장 잇단 자사주 매입·IPO
추진…
계열사 흡수합병도 가속… "다수의 지주회사로 나뉠듯"
호텔-일본계·쇼핑-한국계… 형제간 계열분리가 키 포인트
신동빈(사진) 롯데그룹 회장이 최근 잇따라 자사주 매입에 나서는 한편 기업공개와 계열사 흡수합병 등을 속도감 있게 추진하고
있다.
이런 신 회장과 롯데그룹에 재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특히 갑작스러운 자본거래 확대에 대해 이런저런 해석이 나오고 있다.
롯데 측은 이에 대해 "재무구조 개선과 신사업 자금 확보를 위한 것일 뿐"이라는 입장이지만 재계 일각에서는 지배구조 개편을 위한 롯데의 구체적인
행보가 시작됐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7일 재계에 따르면 기업공개 추진, 신 회장의 지속되는 자사주 매입 등 최근 행보가 일본
롯데와 한국 롯데의 계열분리 등 지배구조 변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롯데는 경제민주화 열풍 속에서도 계열사 수가 지난해 6월
79개에서 올 6월 74개로 거의 변화가 없을 정도로 움직임을 찾아보기 힘든 그룹 가운데 하나다.
우선 롯데는 롯데정보통신의
기업공개를 추진하고 있다. 신사업을 위한 자금확보가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오너 일가가 계열사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이상의 폭넓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의미다. 롯데정보통신의 최대 주주는 롯데리아(34.5%)와 대홍기획(28.1%) 등으로 이들 계열사는 롯데그룹 오너 일가
지배구조상에서 적잖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계열사 간 지분과 자산 이동도 잇따르고 있다. 호텔롯데가 롯데카드 지분 1.24%를
처분했고 최근에는 부산 국제빌딩 토지 및 건물을 121억원에 롯데케미칼에 매각했다.
신 회장의 자사주 매입도 지속되고 있다. 그는
최근 롯데케미칼과 롯데칠성ㆍ롯데제과 주식을 잇따라 매입했다. 이로써 신 회장의 계열사 지배력이 더욱 강해졌다.
계열사 흡수합병도 최근 들어 나타나고 있다. 롯데는
최근 식료품 제조업을 영위하는 기린식품과 플라스틱 제조업체인 ㈜삼박ㆍ하오기술㈜ 등을 흡수합병했다.
롯데그룹의 특성을 고려해볼 때
최근 들어 나타나고 있는 변화는 예전과 사뭇 다른 모습이다. 롯데는 여타 그룹과 달리 오너 일가의 지분 등 지배구조가 수십 년째 거의 변하지
않고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재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급작스러운 롯데의 변화에 대해 재계에서는 지배구조 개편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지난 2005년 롯데물산을 지주회사로 전환했으나 2007년 제외되면서 현재의 지배구조가 계속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롯데의 복잡한 순환출자를 고려해볼 때 몇 개의 지주회사로 나누는 것이 유력해 보인다"고 말했다.
지배구조 재편의 최대 관심사는
일본 롯데와 한국 롯데의 계열분리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롯데가 지배구조 변화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같다"며 "결국 롯데 형제가 일가의
계열분리가 키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롯데그룹의 지배구조 핵심 계열사는 호텔롯데와 롯데쇼핑이다.
호텔롯데는
일본계 자금이 100% 대주주로 외국인 투자기업으로 분류돼 있으며 롯데알미늄과 롯데건설, 롯데상사 등 적지 않은 계열사의 최대 주주로 올라서
있다. 아울러 롯데그룹 순환출자의 핵심인 롯데쇼핑 지분도 8.83% 보유하고 있다.
롯데쇼핑은 호텔롯데와 더불어 롯데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고 있으며 30여 계열사에 출자하고 있다. 또한 신 회장이 13.46%, 신동주 일본 롯데 부회장이 13.45%를 소유하고 있다.
한마디로 호텔롯데와 롯데쇼핑이 그룹의 주요 역할을 하면서 한국 롯데와 일본 롯데와 연결돼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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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을 넘어 일류를 창조하라] ② (5) 롯데리아
대한민국
햄버거의 역사 서른다섯살 롯데리아
아시아의 입맛 사로잡다
롯데리아는
'새로운 식생활 문화 창조와 고객 만족 추구'라는 슬로건을 앞세워 지난 1979년 10월 서울 소공동에 1호점을 오픈했다. 이는 국내 최초의
패스트푸드점이다. 국내 최초로 서양 외식사업을 도입해 한국식 스타일을 접목하는 등 끊임없는 연구 개발로 국내 소비자 입맛을 사로잡았다. 여기에
치킨, 디저트류, 국내 로스팅한 커피 등 다양한 사이드 메뉴로 종합외식서비스를 제공하는 퀵서비스레스토랑(QSR)으로 거듭났다. 이를 통해
롯데리아는 현재 점포 수 1090개로 업계 1위를 고수하고 있다. 롯데리아는 이 같은 노하우를 살려 베트남.인도네시아·미얀마 등 동남아
외식시장을 공략, 글로벌 브랜드로 거듭나고 있다.
■35년 업계 1위 '차별화된 맛이 비결'
롯데리아가 35년째 토종
브랜드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은 '맛' 차별화다.
롯데리아는 전통적으로 양념을 중요시하는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다양한
소스를 개발, 서구식 음식인 햄버거에 한국적인 맛을 가미했다.
대표적인 예가 불고기버거다. 쇠고기 패티에 한국인이 좋아하는 불고기
소스를 더한 이 '한국형 햄버거'는 지난 1992년 출시 이후 5억3677만9122개가 팔리며 판매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빵 대신 밥을
넣은 라이스 버거와 축산 농가의 한우 소비 촉진을 위한 한우 불고기 버거도 대표적인 제품이다.
또한 지난해 기존 버거와 차별화된
라츠버거를 출시, 2주 만에 100만개 판매를 돌파하는 등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랏츠버거는 업계 최대 115g 중량의 두툼한 패티를
버거에 접목시켜 화이트 소스와 어우러져 소스의 자극적인 부분을 줄이고 버거의 식감을 최대한 살린 제품이다.
롯데리아는 다양한
디저트를 개발해 고객들의 니즈를 만족시키고 있다. 양념감자, 요거트맛 샐러드, 치즈스틱, 크런치 새우, 쉑쉑치킨, 홍게너겟 등이 대표적이다.
양념감자와 쉑쉑치킨의 경우 어니어링·치즈·칠리 등 세 가지 시즈닝 중 하나를 선택, 감자 및 닭가슴살과 함께 흔들어 먹는 디저트류로 먹는
재미까지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롯데리아는 또한 고객 편의를 위해 24시간 매장 운영과 함께 주문 배달 서비스, 롯데리아
외식브랜드를 한곳에 모아둔 복합 매장 등 다양한 매장 운영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롯데리아 관계자는 "주문배달 서비스 등은 오랜
외식사업을 운영한 노하우가 접목된 결과로 다른 브랜드에 비해 뛰어난 강점"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지난 2005년부터는 패스트푸드
전문점을 연상하는 딱딱한 의자와 정형화된 분위기를 탈피, 소비자들이 더욱 편한 분위기에서 외식을 즐길 수 있도록 카페형 매장으로 탈바꿈했다.
명일 드라이브쓰루점의 리뉴얼을 시작으로 홍대점, 무교점 신림점 등 지역별 특성을 살린 카페형 매장을 선보이는 등 전체 매장 중 약 85% 이상이
리뉴얼을 끝낸 상태다. 롯데리아·엔제리너스·크리스피크림도넛 등 롯데리아 외식브랜드를 한곳에서 즐길 수 있는 복합매장도 운영하고 있다.
■'철저한
현지화' 동남아 입맛 사로잡아
롯데리아는 국내 대표 외식 브랜드답게 동남아시장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 지난
1998년 업계 최초로 베트남에 진출한 데 이어 2008년 중국 왕푸징 매장 오픈을 기점으로 으로 중국 및 아시아 핵심지역 진출에 속도를 내며
아시아 글로벌 브랜드로 도약하고 있다. 특히 베트남에서 148개의 매장을 운영중인 롯데리아의 성장세는 무섭다. 지난 2004년보다 2013년
현재까지 매출은 약 25배, 점포수는 14배 이상이 증가했다. 지난 5월 매출도 전년 같은 기간보다 160%나 증가하는 등 최근 3년 매출액은
매년 40% 이상 성장세를 기록 중이다.
지난 2011년에 진출한 인도네시아에서도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있다. 최근 롯데쇼핑이
자카르타에 문을 연 치푸트라 월드 자카르타 롯데쇼핑 애비뉴점에도 입점하는 등 활발하게 사업을 진행 중이다.
롯데리아의 동남아시장
성공 요인은 현지화한 메뉴를 꼽을 수 있다. 롯데리아 관계자는 "라이스 수프 등 동남아시아 주식인 쌀을 기본으로 현지화된 음식들이 현지인들
입맛을 사로잡았다"면서 "여기에 불고기버거, 새우버거 등 한국형 버거들 또한 현지에서 인기를 이끌고 있다"고 설명했다.
■미얀마
'최초' 글로벌 외식 브랜드로
롯데리의 해외 사업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글로벌 외식시장 브랜드 최초로 미얀마에 진출한 것이다.
미얀마는 본격적인 문호 개방이 이뤄지면서 글로벌 외식 업체들의 진출이 가능해졌다. 문호 개방 전부터 롯데그룹 차원에서 미얀마 시장 진출 가능성을
타진해왔으며 지난해 2월 신동빈 회장이 미얀마를 직접 방문, 미얀마 진출은 급물살을 타게 됐다.
지난 4월 오픈한 롯데리아 미얀마
1호점은 월 매출 1억원을 돌파했다. 미얀마의 1인당 국민 소득 수준이 850달러선, 한국이 2만2000달러가 넘는 것을 감안했을 때 놀라운
결과라는 게 롯데리아 측의 설명이다. 이는 당초 목표 수치보다 376배의 매출 실적을 달성한 성과다. 특히 임시 오픈 기간을 포함한 4월 대비
5월 매출은 90%가 넘는 성장세를 보였다. 롯데리아 관계자는 "현지 기후상 5월 영업일 중 절반 이상이 우기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기후 사정이
좋았을 경우 최소 전월 대비 2배 이상의 매출성장을 보였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롯데리아는 미안마에 연내 7개 매장을 오픈하고
오는 2016년까지 30개로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한편 롯데리아는 베트남에 154개, 인도네시아에 21개 중국 15개, 미안먀 1개 등 총 1
91개 해외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spring@fnnews.com 이보미 기자
[일등을 넘어 일류를 창조하라] ② (5) 롯데리아, 15년 꾸준한 사회공헌 ‘착한브랜드’로 자리잡다
장애아동 수술 돕고, 저소득층 아이들 후원하고
베트남선 유소년축구 지원
‘우호친선훈장’ 받아
롯데리아는 국내외 사업 확대와 더불어 사회 공헌 활동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대표적인 활동은 지난 1998년부터 진행 중인 '좋은 세상 만들기' 캠페인이다. 이 캠페인은 햄버거 판매 수익금 일부를 적립해
장애우 등 어려운 이웃을 돕는 활동이다.
이 기금으로 지난 2008년 서울대 어린이병원과 협약, 희귀 난치성 환아 10명의
수술비를 지원했다. 롯데리아 직원들도 서울대학교병원 의료진과 함께 아동복지시설을 방문, 진찰 및 검사 등 의료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아울러 서울, 수도권을 비롯한 대전, 대구, 부산, 광주 등 전국 750여개 점포를 활용, 분기별로 해당 지역 보육원 어린이들에게
무상 급식 지원 등 봉사활동을 진행 중이다.
롯데리아는 '디딤씨앗통장' 사업도 후원하고 있다. '디딤씨앗통장'은 아동자립 프로젝트로
저소득층 보호 아동에게 일정 후원금을 저축, 대상자들이 만 18세 이후 준비된 사회인으로 성장·발전할 수 있도록 돕는 지원 사업이다. 롯데리아는
지난달 한국사회복지협의회에 3600만원의 후원금을 전달하는 등 지난 2011년부터 총 1억800만원을 지원했다.
롯데리아의 사회공헌
활동은 해외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베트남에서는 꾸준히 현지 유소년 축구 발전에 기여하고 있어 현지서 '착한 브랜드'로 인지도를 높이고 있다.
베트남 정부도 이 같은 공로를 인정, 롯데리아에 '우호친선훈장'을 수여했다.
롯데리아의 외식 계열사인 엔제리너스커피도 따뜻한 나눔에
동참하고 있다.
엔제리너스커피는 대학생 봉사 프로그램인 엔제린버스를 운영 중이다. 엔제린버스는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직접
버스를 타고 찾아간다는 의미의 봉사프로그램이다. 대학생으로 구성된 '대학생 천사단'을 수시로 선발, 함께 버스를 타고 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아울러 지난 2007년부터 고객들을 대상으로 커피교실을 열고 참가비 1만원을 아프리카 식수 위생
사업으로 후원하고 있다.
엔제리너스 관계자는 "전문 바리스타에게 듣는 알찬 커피 교육과 더불어 이웃에게 사랑을 나눠주는 일이
동참할 수 있어 더욱 뜻깊다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롯데리아는 환경 문제에도 높은 관심을 갖고 있다. 환경문제의
심각성과 해결방안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환경홈페이지'를 오픈한 바 있다.
이보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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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 포커스] 금융시장 원칙이 무너진다
인사부터 지방은행 민영화까지 정치권·이익단체 흔들기
난무
광주·경남은행 분리매각 지역자본 우선권 특혜 요구
우리금융 고위 인사 이어 지방은행장 선임 외부
입김
감독당국도 정책 오락가락 금융산업 신뢰상실 부추겨
우리금융그룹의 한 계열사 고위인사는 최근 유임 통보를 받았다.
하지만 이를 두고 금융권에서는 뒷말이 무성했다. 외부에 줄을 댔다는 것이다. 능력과 원칙에 따른 인사라면 두말할 게 없지만 정부가 대주주인
우리금융의 특성상 외적 요인이 감안된 결과라는 얘기다. 이순우 우리금융지주 회장이 지난달 "(인사청탁을) 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계속 한다면
임직원 다 있는 데서 망신을 주거나 강등시키겠다"고 할 정도였지만 인사의 원칙은 여전히 지켜지지 않은 셈이다.
금융산업의 원칙이
무너지고 있다. 조직관리의 최우선인 인사에서부터 우리금융 민영화, 은행 수익성 관리 같은 전반적인 틀이 흔들리고 있다. 금융회사에 정치권이
개입하고 당국의 정책이 오락가락하다 보니 신뢰가 생명인 금융업이 안으로부터 주저앉고 있다. 금융회사 직원들도 자신들의 이익을 앞세우는 주장을
하거나 단체 행동만 하고 있다.
◇금융에 '지역과 정치' 결합…이익집단 생떼 난무=박흥석 광주상공회의소 회장은 지난
5일 해당 지역 국회의원들과 금융위원회를 방문해 광주은행 매각공고 때 지역상공인연합체에 우선협상권을 줄 것을 건의했다.
앞서도
광주은행과 경남은행 분리매각시 지역자본에 우선권을 달라는 요청은 정치권을 통해 계속 나왔다.
문제는 이 같은 주장은 현실성이 없다는
점이다. 산업자본은 현재 지방은행의 지분 15%를 초과해 소유할 수 없다. 이런 금산분리 원칙을 지키면서 해당 지역에서 지방은행을 사들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또 지역 상공회의소를 중심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1조원 이상 될 것으로 보이는 인수자금을 대는 것은
어렵다는 전망이 많다. 특히 공적자금이 투입된 금융사를 파는 데 정부가 '최고가 매각원칙'을 세웠음에도 정치적인 배경을 이유로 특혜를 요구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설령 지역 상공회의소에 넘겨준다고 해도 은행의 고위직이 지역 유력인들의 '인사 놀이터'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하다.
금융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지방은행 매각 우선권을 달라고 하는 것을 보면 사실상 매각을 무산시켜 지금 상황을
유지하겠다는 뜻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정치적인 고려도 중요하겠지만 돈을 다루는 금융산업에 있어서는 이런 개입은 나중에 큰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전했다.
지방은행장 인선도 마찬가지다. 경남은행장 인선을 놓고 파열음이 계속되더니 광주은행장 인선작업은 난맥이라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혼선이 이어지고 있다.
민영화를 앞둔 시점에서 이에 맞는 능력을 갖춘 이가 뽑히는 게 원칙이지만 현실은 내부사람이냐,
외부인이냐의 싸움으로 흘러가고 있다. 12일 면접을 앞두고 있는 광주은행장은 김장학 지주 부사장과 조억헌 광주은행 부행장의 2파전으로 사실상
압축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국도 오락가락 신뢰 상실=금융감독당국도 일정 부분 중심을 잡고 있지 못한다. 정치권과
외부의 흔들기가 극심한 가운데 당국도 상황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부분이 있다는 얘기다. 2011년 금융감독당국은 은행의 수수료 인하를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은행의 탐욕이 문제가 됐던 때다.
그러나 당국은 올해 들어 방향을 틀었다. 금융감독원은 최근 들어
은행의 수수료 수익을 늘려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STX 같은 대기업 구조조정이 계속 추진되고 저금리 상황이 지속되자 은행의 수익이 급격하게
추락했다. 원칙적으로는 비이자이익 증가가 맞는 방향이지만 중심을 잡지 못하다 보니 오락가락 정책이 돼버린 셈이다.
STX 같은
기업 구조조정도 마찬가지다. 당국이 중심을 잡고 일을 풀어나가야 하지만 그러지 못한 부분이 많다.
BS금융지주 사건도 당국이
원칙을 저버린 사건이 됐다. 외압논란이 무성하지만 결과적으로 금융감독당국이 제재를 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최고경영자를 물러나게 했다. 스스로
원칙을 깬 것이다.
일부 금융권의 '모피아(재무부+마피아)' 인사 채우기도 같은 흐름에서 볼 수 있다. 금융권에서는 "당국은
금융사에 능력과 원칙에 따라서 인사를 하라고 하지만 일부 모피아 인사는 자리 봐주기로 한 것도 있지 않느냐"며 "정부 스스로도 앞뒤가 안 맞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영필기자
susopa@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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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보다 한수 빨랐다. 한글 '아이워치' 상표등록?
[머니투데이 조성훈
기자][애플 6월 3일 국내서 'iWatch' 'IWATCH' 상표권 출원···앞서 국내 개인들 10여건 등록]
애플이 지난달 초 국내에서 손목시계형 스마트기기인 아이워치(iwatch)에 대한 상표출원에
나선 것으로 확인된 가운데, 국내에서도 해외처럼 상표권 분쟁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7일 특허청이 운영하는 특허정보넷에 따르면,
애플은 지난 6월 3일 김앤장 법률사무소 소속 변리사인 위모씨와 양모씨를 대리인으로 삼아 'iWatch' 'IWATCH'에 대한 상표를
출원했다.
그러나 애플에 앞서 올 들어서만 개인과 기업들이 13건에 달하는 iwatch 상표권을 출원했다. 출원인중 김모씨는 지난
5월 27일 한글로된 '아이워치'에 대해서도 출원했다. 애플은 한글에 대해서는 상표권 출원을 하지 않았다.
시기적으로 이들이
앞서있지만 애플은 지난해 12월 3일 자메이카에서 등록한 상표권을 통해 우선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27일 한 보석관련
해외기업이 출원한 'i_watch'가 이에 앞서있어 수용여부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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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허넷에 등록된 iwatch관련 상표출원. 애플외에도 10여건에 달한다 / 사진=특허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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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미국에서는 현재 아이워치에 대한 상표권 선점에 따라 분쟁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현지 언론들이 보도한 바 있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중국내에서 9개사가 아이워치라는 이름으로 상표권을 등록했으며 시계에서
영화까지 업종도 다양한다고 전했다. 미국내에서도 이미 OMG일렉트로닉스 등이 아이워치 상표권을 신청하고 관련 제품생산을위한 자금조달중이라고
뉴욕포스트가 보도한 바 있다.
아이워치 상표권은 애플의 골칫거리가 될 가능성이 있다. 애플은 지난 2009년 중국내 아이폰 상표권
확보를 위해 2490만위원(46억원)을 지급하고 2010년에도 대만회사에 6000만위안에 상표권을 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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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아이워치 상상도 /
사진=인터넷 |
국내 아이워치 상표권도 대부분 애플이 손목시계형 스마트기기 개발
소식이 전해진 이후 이뤄져 '상표 알박기'라는 관측이 나왔는데 애플이 아이워치를 실제 선택한 것으로 확인돼 분쟁가능성이 현실화된 것이다.
외신들은 이같은 전력을 들어 애플이 법적 대응과 자금력을 바탕으로 아이워치 상표사용권 확보에 나설것으로 전망했다. 일부 국내
상표권 선점시도 역시 이같은 금전적 이익을 노린것으로 관측된다. 그러나 특허 전문가들은 상표 알박기의 경우 실제 사업여부와 무관한만큼 특허를
인정받기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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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임원으로 승진하기 가장 어려운 나라는?한국 or 일본
전세계 주요국 중 여성이 임원으로 승진하기 가장 어려운 나라는 한국과 일본이라는 조사결과가 7일
나왔다.
미국의 기업지배구조 분석기관 GMI레이팅스에 따르면 지난 3월 말 현재 한국 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은 1.9%로 조사 대상
45개국 중 두 번째로 낮았다.
일본은 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이 전체의 1.1%에 불과해 꼴찌를
차지했다.
GMI레이팅스는 45개국 대표기업 5977개사를 대상으로 이사회 내 여성 임원 숫자를 조사했다. 한국에서는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106개 기업이 조사 대상이 됐다.
한국 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은 선진국 평균인 11.8%보다 10%포인트 가까이
낮았고 신흥국 평균인 7.4%에도 미치지 못했다.
여성 임원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는 노르웨이(36.1%)였으며
스웨덴(27.0%), 핀란드(26.8%), 프랑스(18.3%) 등이 뒤를 이었다. 이들은 여성 임원이 일정 비율을 충족하지 못했을 경우 벌금을
부과하거나 정부 보조금 지원을 제한하는 여성 임원 할당제를 도입한 나라들이다.
아시아에서는 태국의 여성 임원 비율이 9.7%로 가장
높았다. 홍콩(9.5%), 중국(8.4%), 필리핀(7.9%), 싱가포르(6.9%), 말레이시아(6.6%) 등도 한국과 일본보다 앞섰다.하윤해
기자
justic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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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나機 美공항서 사고] 착륙 직전까지 비상상황 안내 없어.. 기체결함 가능성
낮아
사고
원인 해석 분분
윤영두 사장 “착륙 전 구급차 요청은 와전”
사고기 2006년 보잉社 제작.. 비교적
신형
7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착륙 중 충돌 사고가 발생한 아시아나항공기의 사고 원인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기체에는 이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 정황이 나오고 있다.
사고 비행기가 착륙 전 문제가 발견돼 응급차량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진 외신 보도와는 다른 것이다. 또
사고와 관련된 구체적인 상황이 파악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됐다.
국토교통부 한 관계자는 "(기장과 관제탑
간 교신은) 정황상 지상에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행 중이라면 문제가 있을 때 몇 분 내에 구급차를 부르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CNN 등 외신들이 여객기 기장과 관제탑 교신 내용이라며 착륙 전인 한국시간 6일 오전 3시22분27초에 항공기에서 관제탑을
호출하고 3초 뒤에 관제탑에서 "214편 항공기 응급차량 준비됐습니다"라고 답변했다고 보도한 내용과 전혀 다른 것이다. 또 미 언론 보도와 달리
사고기에서 공항 관제탑으로 구급차량을 부르지도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항공업계 한 관계자도 "(항공기가) 내리고 나서 관제탑과
교신한 것으로 안다"면서 "내리기 전에 문제가 있었다면 관제탑과 교신이 있었을 텐데 그럴 새 없이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다"고
추측했다.
아시아나항공 윤영두 사장도 기장과 관제탑의 교신에 대해 "자세한 것은 조사해 봐야 하지만 착륙 후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착륙하기 전에 아시아나항공 종합통제시스템에서 이상이 발견된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없다"고 답해 기체결함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시사했다. 국토교통부와 아시아나항공에 따르면 이 여객기는 비행 중 특이사항이나 고장 메시지를 보낸 것이 없었다.
또
기장이 착륙 전 별다른 비상 안내방송을 하지 않았던 것도 항공기가 정상적으로 운항됐을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사고기는 착륙하기
전 안전벨트를 착용할 것을 말하는 정상 안내방송은 진행했지만 비상착륙을 알리는 안내방송은 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고
비행기는 B777-200ER 기종으로 2006년 2월 제작됐고 같은 해 3월 국토해양부에 등록됐다. 일반적으로 비행기가 운항 10년이 넘기
전에는 새 비행기로 여기는 것을 고려하면 비교적 새 비행기인 셈이다.
777여객기는 2008년 영국항공 777여객기가 베이징에서
런던 히스로 공항에 도착하다 활주로 근처에서 충돌사고를 내 승객 1명이 중상을 입은 것을 제외하면 심각한 사고가 난 적이 없어 항공업계에서는
안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사고와 관련된 자세한 사항은 미국 연방교통안전위원회(NTSB)와 국토교통부, 아시아나항공,
보잉사 등으로 구성된 사고조사 위원회가 결정을 내린 후에야 가능해 상당시간이 걸릴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에 따라 사고 항공기의
비상착륙이 매뉴얼대로 이뤄졌는지, 사고 항공기가 비상착륙한 활주로가 현재 이용이 금지된 곳인지 여부는 이르면 다음 달에나 확인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시아나機 美공항서 사고] 국토부·외교부 공조 원인 조사.. 최소 6개월 걸릴
듯
정부
합동조사단 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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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나항공 보잉777 여객기가 7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착륙 도중 사고가 난 가운데 국토교통부 조사팀,
아시아나항공 사고대책반원, 피해자 가족 등이 특별기를 타고 현지로 출발했다. 이날 오후 1시 조사팀 관계자 등이 인천공항을 통해 출국하고 있다.
사진=서동일 기자 | |
정부가 미국 정부와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서 발생한 아시아나항공OZ 214편 여객기 사고에 대한 합동조사에 나섰다. 이번 사고 조사는 짧으면 6개월가량 걸릴 것으로
보인다.
7일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사고조사대책반 등을 태운 특별기가 이날 낮 1시30분께 인천공항을 출발해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
특별기에는 국토부 항공철도사고조사위 조사관 3명, 항공주사 1명, 운항안전과 항공안전감독관 2명 등 6명이 탑승했다.
또 아시아나항공의 조사대책반 18명, 외교부 신속대응팀 1명을 비롯한 관계부처 2명이 함께 탑승한 것으로
확인됐다.
국토부는 항공철도사고 조사관들이 현지에 도착하는 대로 미국 교통안전위원회(NTSB)와 합동으로 사고 원인 조사와 대책마련
등에 착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토부 관계자는 "외교부와 역할을 분담해 공조체제를 구성하고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며 "사고 수습을
위해 만전을 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토부 최정호 항공정책실장은 이날 공식브리핑을 갖고 "사고 원인과 관련해 여러 추측성 보도가
나오고 있지만 우리 사고조사반이 도착해 미국 조사당국이 공식적으로 확인하지 않는 이상 사고 원인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다"며 "사고조사
권한은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규정에 따라 사고 발생국인 미국에서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활주로에서 난 사고이기 때문에
사고 기록을 담은 블랙박스 회수에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본다"며 "조사 기간은 사고 발생 경위 등에 따라 통상 짧게는 6개월, 길면 2년이 걸릴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아시아나機 美공항서 사고] 보상액 2000억원 추정.. 소득·부상정도따라
지급
피해
보상은 어떻게
아시아나항공
보잉 777 여객기가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항 사고로 18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가운데 피해 보상 여부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통상 대형 비행사고는 항공사 사고 조사반과 경찰 당국이 사고원인과 피해 규모를 조사하고 항공사는 이를 토대로 보험사에 보험금을
청구한다.
7일 업계에 따르면 이번 아시아나 여객기 사고로 인해 추산되는 보상액은 기체 보상을 비롯해 약 2000억원에 달할
전망이다.
사고가 난 아시아나 여객기가 가입한 항공보험의 기체 보상 한도액은 9950만달러(엔진 포함 1억3000만달러·약
1484억원), 승무원 상해보험 책임한도액은 1인당 300만달러(약 34억원)다.
사고가 난 여객기에는 승객 291명과 승무원
16명 등 총 307명이 탑승한 것으로 파악됐다. 승객 1인당 소득수준과 연령에 따라 보상금이 지급되고, 부상승객은 부상 정도에 따라 치료비와
부대비용이 보상금으로 지급된다.
수화물은 승객 1인당 1800달러(약 205만원) 한도, 화물은 ㎏당 28달러(약 3만2000원)
한도로 지급된다.
아시아나항공 보잉 777 여객기가 국내 9개 손해보험사의 항공보험에 가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보험업계에 따르면
이들 9개 손보사는 LIG손해보험, 삼성화재, 현대해상, 동부화재, 메리츠화재, 한화손해보험, 롯데손해보험, 흥국화재, 농협손해보험
등이다.
항공기 보험은 보험가입금액이 워낙 커 여러 보험사가 공동 인수하는데, 이 여객기는 국내 9개 손해보험사(1%),
코리안리재보험(3%), 미국 AIG와 영국 로이드 등 30여개 외국 보험사.재보험사들(96%)이 공동 인수했다.
국내 9개
보험사의 개별 보유율은 0.5% 이하로, 보험가입금액 대부분을 외국 재보험사가 인수해 국내 보험사들이 부담할 금액은 크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국내 재보험사인 코리안리도 외국 재보험 가입으로 최대 손실액이 200만달러 미만이라고 밝혔다.
한편 탑승자
개별적으로 가입한 여행자 보험이나 다른 보험이 있다면 보험금을 추가로 받을 수 있다.
[아시아나機 美공항서 사고] 윤영두 아시아나항공 사장 대국민 사과
“탑승객·가족·국민께 죄송.. 조속한 사고 수습에 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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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나항공 윤영두 사장이 7일 오후 서울 오쇠동 본사에서 기자회견을 하고있다.
사진=서동일기자 | |
아시아나항공 윤영두 사장은
아시아나항공 보잉 777기 OZ214편 착륙사고에 대해 긴급 브리핑을 갖고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윤 사장은 7일 오후
3시30분 서울 오쇠동 아시아나항공 본사에서 가진 브리핑에서 "이번 사고로 인해 탑승객 및 가족 국민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머리 숙여 깊은 사과를
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윤 사장은 이어 "아시아나항공은 사고대책본부를 본사 및 미주 지역본부에 마련해서 인명 피해 및 정확한
사고 원인에 대해 조사 중"이라며 "이번 사고에 대한 파악 및 조처에 대해 조속히 수습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다시 한 번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고 거듭 고개를 숙였다.
윤 사장은 "착륙사고의 사망자 2명은 중국인이며 모두 여성 탑승자다. 1996년생,
1997년생으로 전해졌다"며 "기체 뒤편에 탑승한 승객으로 안타깝게 변을 당했다. 현재 한국인 부상자는 44명으로 병원치료 중이다"라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윤 사장은 "조속한 사고 수습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거듭 사과했다.
아시아나항공 B777 여객기는 6일
오전 1시27분(현지시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공항 28번 활주로에 착륙 도중 활주로에 부딪히며 항공기 꼬리 날개가 부러지는 사고를 냈다.
아시아나 "관제탑과 교신 시점은 착륙 후"(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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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두 아시아나항공 사장이 7일 오후 서울 강서구 오쇠동 아시아나항공 본사에서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발생한 활주로
충돌 사고에 대한 긴급 브리핑에 앞서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이번 사고는 6일(현지시각) 오전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아시아나항공
214편 B777-200 여객기가 착륙하면서 발생했다. 한편 이날 오후 국토교통부 조사팀, 아시아나항공 사고대책반 30여 명, 외교부 서기관
1명, 피해자 가족 등이 사고 현장으로 급파됐다. 2013.7.7/뉴스1 News1 박정호
기자 |
윤 사장 "28L 활주로도 정상적으로 운영"
(서울=뉴스1) 류종은 기자 = 아시아나항공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발생한 착륙사고에서 샌프란시스코 관제탑과 교신한
시점이 착륙 전이 아니라 착륙 후라고 주장했다.
윤영두 아시아나항공 사장은 7일 서울 오쇠동 아시아나항공 본사에서 열린 긴급
브리핑에서 "관제탑과 교신은 착륙 후"라며 "정확한 교신 시간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28L 활주로는 정상적으로 사용돼 온
활주로"라고 덧붙였다. 이같은 발언은 그간 보도된 착륙 전 기장이 관제탑과 교신해 앰뷸런스 등을 요청했고 비상활주로를 통해 착륙했다는 내용을
뒤집는 말이다.
윤 사장은 이에 대해 "현재 직접 확인되는 것은 없으며 모두 국토부를 통해 전달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관제탑
교신 시점 등은 사고 원인의 단서가 될 수 있어 현재 논란이 되고 있다.
윤 사장에 따르면 사고 여객기는 지난 6일 오전 11시
27분(현지시간)께 샌프란시스코 공항 28L 활주로에 착륙하다가 꼬리 부분이 활주로와 1차 충돌 후 활주로를 이탈했다. 또한 여객기는 비행 중
특이사항이나 고장 메시지를 보낸 것이 없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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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현지시간) 오전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아시아나항공 214편 B777-200 여객기가 착륙하다 활주로에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해 화재가 난 비행기에서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다. 서울에서 출발한 이 사고기의 동체 대부분이 화재로 소실되고 날개와 꼬리 부분이
부러졌으며 승객 292명, 승무원 16명 등 탑승자 308명이 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트위터 캡쳐) 2013.7.7/뉴스1 News1
윤선미 인턴기자 |
그는 "기장은 샌프란시스코 공항 28L 활주로에 정상적으로 착륙 후 관제탑과
교신한 것으로 국토부를 통해 들었다"며 "착륙하기 전에 이상신호는 감지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윤 사장에 따르면 아시아나 여객기는
기체에 이상이 있으면 아시아나항공 통제센터에 자동으로 메시지를 전송한다. 또한 사고가 발생하면 승무원이 사고 발생 안내방송을 하게 돼 있다.
하지만 이번 사고에서는 이상 메시지도, 사고 발생에 대한 안내방송도 없었다는 것이다.
윤 사장은 "사고 조사를 미국 NTSB가
주관하고 있어서 우리 측에서 단독으로 취할 수 있는 행동이 없다"며 "미주 본사도 사고 현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고, 피해자 현황, 사고 원인
등 대한 정보를 전혀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현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환자를 보호하고 피해자
가족들이 바로 샌프란시스코로 갈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는 것 뿐"이라며 "정부에서 파견한 조사팀이 미국 NTSB의 허락을 받고 조사한 내용을
전달받도록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윤 사장은 이번 사고의 원인에 대해 기체결함도, 조종사 조작미숙도 아니라고 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행 OZ214편인 보잉 777-200은 지난 2006년에 구입한 것"이라며 "기체결함이 이번 사고의 원인은 아닌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사고 항공기에 탑승한 조종사 4명 중 3명은 운항 1만시간을 넘긴 베테랑"이라며 "나머지 한 명도 1만시간에
육박한 조종사로, 조작 미숙에 의한 사고는 아닐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시아나 측은 모든 조사는 이날 오후 1시께 사고 현장으로
파견된 국토부 조사팀과 자사 사고대책반을 통해 이뤄질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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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현지시간) 오전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아시아나항공 214편 B777-200 여객기가 착륙하다 활주로에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진은 충돌한 여객기 잔해의 모습. 서울에서 출발한 이 사고기의 동체 대부분이 화재로 소실되고 날개와 꼬리 부분이 부러졌으나
승객 292명, 승무원 16명 등 탑승자 308명이 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KTVU 캡처) 2013.7.7/뉴스1 New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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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고 여객기에는 승객 291명(한국인 77명, 중국인 141명, 미국인 61명,
일본인 1명 등), 승무원 16명(운항승무원4명, 캐빈승무원 12명)등이 탑승했다. 미국 NTSB에 따르면 현재 사망자 2명, 부상자 182명
등 총 184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한국인 부상자는 탑승객 77명 중 44명으로, 현재 인근 병원으로 흩어져 치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정부 측에서 설명했다. 사망자 2명은 모두 중국인으로, 각각 96년생 여성, 97년생 여성으로 호가인됐다. 이들은 항공기 후방부에
탑승했던 것으로 아시아나 측은 전했다.
한편 아시아나 측은 △국토부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의 4명과 항공안전감독관 2명 등 조사팀
6명 △김덕영 아시아나 공항서비스 담당 상무를 반장으로한 사고대책반 30여명 △하의영 외교부 재외국민과 서기관 등을 사고 현장으로
급파했다.
최정호 국토부 항공정책실장은 "사고조사의 권한은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규정에 따라 사고 발생국인 미국에서 갖고
있다"며 "블랙박스를 회수해 봐야 알겠지만 통상 항공기 사고는 6개월~2년 정도의 조사 기간이 걸린다"고 밝혔다.
[아시아나 美공항서 착륙 사고] 방파제에 꼬리·날개 부딪히며 '쾅'…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여
사고순간 재구성
랜딩기어 산산조각, 기체 중심 잃고 회전…활주로 밖으로
밀려
동체 멈춘 후 관제탑 교신 "비상 상황, 응급차 보내라"승객 291명과 승무원
16명을 태운 아시아나 항공기 214편은 인천공항을 떠난 지 10여시간 만인 6일 오전 11시20분께(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
접근했다. 고도를 낮춰 활주로에 착륙하기 직전 비행기 앞바퀴와 꼬리 날개 부분이 활주로 입구에 설치된 방파제에 부닥쳤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은
바다와 접하고 있어 활주로와 바다 사이를 방파제가 막고 있다.
공항에서 사고 현장을 목격한 한 시민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사고
비행기가 다른 비행기보다 너무 낮게 활주로로 진입하면서 방파제에 부닥쳤다”고 전했다.
충돌 순간 비행기 꼬리 날개가 동체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불길이 치솟았다. 기체는 순간 위아래로 심하게 요동쳤다. 1~2초 뒤 랜딩 기어가 활주로와 충돌하면서 산산조각 났다. 바퀴 없는
비행기 동체는 빠른 속도로 활주로에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동체착륙’을 하게 된 비행기는 약 600m가량 활주로를 미끄러졌다.
기체는 중심을 잃고 옆으로 회전하면서 활주로 밖의 풀밭으로 밀려났다. 오른쪽 날개에 달린 엔진도 떨어져 나갔다. 동체착륙에 따른 충격으로 선반이
열리며 무거운 짐들이 승객 머리 위로 떨어졌다. 승객들의 부상이 속출했다. 비상용 산소호흡기도 선반에서 일제히 내려왔다.
오전
11시22분27초. 동체가 멈춘 뒤 기장은 관제탑과 긴급 교신을 주고받았다. “비상상황이다. 응급차를 보내달라.”(조종사 추정) “응급차량
준비됐다.”(관제탑) 약 1분간 이런 교신이 오갔다. 기내 곳곳에는 흰 연기가 올라왔다. 비상 탈출 슬라이드가 펼쳐졌다. 불길은 점점 세지고 흰
연기는 검은 연기로 바뀌고 있었다. 그러나 탑승객들은 승무원들의 신속한 대피 안내를 받고 슬라이드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부상을 입지 않은
승객들은 자신의 가방을 갖고 빠져 나오기도 했다. 승객 탈출이 마무리될 무렵 기내 화재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동체가 거의 소진됐다.
CNN은 300명 이상이 탑승했던 사고기의 충돌 당시와 이후 화재 규모를 감안할 때 사상자 수가 놀라울 만큼 적었다고 보도했다.
미 연방항공청은 사고 직후 샌프란시스코 공항의 비행 이착륙을 전면 금지시켰다. 사고 현장 수습과 함께 테러 위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 연방교통안전위원회(NTSB)와 연방수사국(FBI)은 초기 사고조사를 한 결과 테러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 오후
6시28분 활주로 2개를 정상화시켰다.
...
[아시아나 美 사고]아시아나 사고 미스터리..'이것이 궁금하다'
[이데일리 한규란
기자] 7일 오전(한국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서 발생한 아시아나항공(020560) OZ214편 여객기 충돌 사고를 둘러싼 갖가지
의혹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대부분 퍼즐을 풀어줄 블랙박스를 찾은 뒤에서 확인할 수 있는 궁금증들이다.
◇관제탑과 교신한 기장, 사고 예견? 언제 알았을까
이날 사고 여객기 기장은 공항
관제탑과 교신해 구급차량 대기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관제탑은 기장에게 “구급차가 출동했다. 긴급 착륙준비가 됐다”고 대답했다. 교신 내용을
보면 사고 여객기가 착륙에 앞서 관제탑에 긴급착륙을 보고하고 구급차량 대기를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아직까지 기장과 관제탑과의 교신은 착륙
이전에 이뤄진 것인지, 그 후인지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윤영두 아시아나항공 사장은 이날 브리핑을 갖고 “착륙 직전 기내 안내
방송은 없었다”고 밝혔다. 따라서 기장이 언제 사고를 예견했는지, 미리 문제점을 알았다면 왜 기내 방송을 하지 않았는지 등이 의문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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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오전 3시28분쯤(한국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아시아나항공 214편 보잉 777-200 여객기가 착륙하다 활주로에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 여객기의 동체 대부분이 화재로 소실되고 날개와 꼬리 부분이 부러졌다. 연합뉴스
제공. | |
◇사고 원인은 기체 결함?
조종사 실수?
이번 사고를 놓고 전문가들은 조심스레 기체 결함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강자영 항공대 항공운항학과
교수는 “일반적으로 비행기가 착륙할 때 꼬리가 먼저 닿는데 이때 중력과 양력의 차이가 최소화해야 충격 없이 착륙을 할 수 있다”며 “꼬리 부분이
활주로에 부딪혔다는 것은 비행기의 중력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조종사의 실수로 사고가
발생했다는 추측도 내놓고 있다. 샌프란시스코공항이 태평양과 연결된 만(灣)에 있어 착륙이 쉽지 않은 환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기장이
기체 이상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종 미숙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윤광준 건국대 항공우주정보시스템공학과 교수는
“조종사가 사전에 구급차를 준비시킨 것은 기체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라며 “착륙을 위한 랜딩기어에 이상이 생겨 꼬리 부분이
먼저 활주로에 부딪힌 것 같다”고 말했다.
◇샌프란시스코공항, 원래 사고가 잦다?
이번에
사고가 발생한 샌프란시스코 공항은 미국 내 공항 가운데 안전사고가 많이 발생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도심에 위치하고 주변에 큰 산이 있어
이착륙 때 위험도가 높은 공항으로 평가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공항의 지리적 환경이 아시아나 여객기 사고에 영향을 미쳤다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지난 1996년 국제조종사협회연맹은 샌프란시스코 공항을 ‘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공항 10곳 가운데 한
곳’에 포함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신상준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교수는 “바다에 인접한 샌프란시스코 공항은 다른 공항과 달리
바람이 세고 고도와 위치를 가늠할만한 구조물도 적기 때문에 다른 항공보다 상대적으로 착륙 환경이 좋지 않은 편이지만 특별히 사고가 잦은 공항은
아니다”고 말했다.
[아시아나 美 사고]또 항공기 사고..이착륙 11분 '마(魔)의 시간대'
[이데일리 한규란 기자] ‘이륙 후 3분과 착륙 전 8분을 조심하라.’
이번
아시아나항공(020560) 여객기의 미국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 착륙 사고는 ‘마(魔)의 시간대’로 불리는 이착륙과정 11분을 조심하라는
항공업계의 수칙을 재확인시켜줬다.
‘마의 11분’은 항공기 사고와 관련해 가장 많이 알려진 단어다. 항공기가 이륙하기 위해 활주를
시작한 뒤의 3분과 공항에 진입해 착륙할 때까지의 8분을 합친 11분 동안 항공기 사고율이 가장 높다는 의미다.
7일
오전(한국시각) 미국 샌프란시스코공항에서 발생한 아시아나항공 여객기 충돌 사고도 착륙 중 발생했다. 아시아나항공 OZ214편은 6일 오후 4시
35분 인천공항을 출발해 7일 오전 3시 27분(현지시간 오전 11시27분) 샌프란시스코공항에서 착륙하다 동체가 활주로에 충돌한 뒤 활주로를
이탈해 기체가 파괴됐다.
아시아나항공 측은 해당 여객기의 도착 예정 시간은 오전 3시 35분이며 사고가 난 시간은 오전 3시
27분이라고 밝혔다. 이번 사고도 착륙 예정 시간을 8분 앞둔 ‘마의 11분’ 시간대에 발생한 것이다.
지난 1997년 8월
229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한항공(003490) 보잉747기 여객기 추락 사고도 미국 괌 공항 활주로 착륙 수분 전에 발생했다. 80명이 숨진
1989년 대한항공 트리폴리공항 추락사고와 지난 1993년 7월 전남 해남군 야산에 추락, 66명의 사망자를 낸 아시아나항공 보잉 737기
사고도 착륙 직전 발생했다.
이륙할 때도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항공기는 이륙할 때 엄청난 힘이 필요하기 때문에 모든 엔진을
풀가동해야한다. 이때 불꽃이 튀는 스파크 현상이라도 발생하면 엔진이 폭발해 버린다. 또 이륙 후 3분 내에 기체결함이나 위험상황을 발견하더라도
운항을 중단하기 어려워 피해가 큰 것으로 알려졌다.
1999년 4월 대한항공의 중국 상하이공항 추락사고도 이륙 직후 발생했다.
1989년11월엔 대한항공 F28 터보제트기가 활주로 이륙직후 폭발해 40명이 부상을 당했고, 1990년 11월 김포공항에서 2명이 사망한
대한항공 국내선 여객기 사고도 이륙 도중 발생한 사고였다. 항공업계는 역대 항공사고 가운데 70∼80%가 이륙 후 3분 내, 착륙 전 8분 내에
발생한 것으로 분석했다.
[단독] "쾅"하더니 몸 뒤로 쏠리고, 꼬리부분에 연기가…
승객과 승무원 등 307명을 태운 아시아나항공 214편 여객기가 6일 오전 11시 28분(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착륙하던 중 활주로에 충돌하며 화재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현재까지 중국인 2명이 숨지고 1명이 실종됐으며, 18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아시아나 항공기 사고 생존자들의 증언이 잇달아 나오고 있다. 당시 사고기에 탑승하고 있던 김준석(44세,
엔지니어)가 전하는 긴박했던 사고 당시 정황을 전했다.
김씨는 실리콘밸리의 유명 IT기업에 엔지니어로 근무하고 있어 평소에도 자주
출장관계로 사고 항공편을 이용했다. 이날 김씨는 2주간의 휴가를 마치고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사고 여객기가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 도착하기 전까지 아무런 이상 징후가 없었다. 김씨는 비즈니스석 뒤쪽 우측 6번째 좌석에서 안전벨트를 착용하고 착륙을
기다렸다.
착륙 순간 첫 번째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김씨는 바퀴가 땅에 닿는 소리가 평소보다 커서 '러프하게
랜딩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 엔진소리가 다시 커지며 마치 상승하려는 듯 몸이 뒤로 쏠렸고, 두 번째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두 번째 소리는 첫번째 소리보다 2배 가까이 크게 들렸고 몸이 크게 흔들릴 정도의 충격이 느껴졌다.
기내 천장에서 산소마스크가
떨어져 내려왔다. 기내에 연기가 보이기 시작하자 승무원들은 “안전하다”며 승객들을 진정시켰다. 그때까지도 김씨는 응급상황과 관련된 기내방송이
없었기 때문에 '심각하지 않은 비상착륙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앞좌석에 있던 한 승객이 창문 밖을 보더니 “불이다”라고
소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승무원들은 동요하는 승객들을 침착하게 탈출구로 안내했다.
김씨는 상황의 심각함을 느끼고 신발도 못
챙긴 채 탈출구로 향했다. 이미 탈출구가 열린 상태로 비상 슬라이드가 펼쳐져 10여명의 승객이 밖으로 나가 있었다. 승객들은 땅에 내리자마자
모두들 비행기에서 멀어지려고 달렸다.
기체를 탈출한 김씨가 뒤돌아 보니 기체 반대편 쪽 날개 부분서 시커먼 연기가 솟아 오르고
있었고 소방차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비상 슬라이드에 더 이상 승객들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기체 뒷쪽 창문에서도 불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가 오전 11시45분쯤.
김씨는 승객 대부분 외상이 없어 보였으며 머리에 피를 흘리는 등 몇몇 부상당한 승객이 실려 나가는
모습도 보였다고 전했다.
이후 승객들은 특별한 조치없이 약 2시간 동안 땅바닥에 앉아 비행기의 상단부가 불길에 휩싸이는 모습을
지켜봤다. 어떤 승객은 그냥 빠져나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3시간 가량 기다려야했다. 입국수속을 통과한 후에도 FBI에서 테러가능성 때문에
조사한다며 기다리게 했다. 김씨는 오후 5시30분이 돼서야 입국장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김영훈(43·캘리포니아주 팔로알토
거주)씨는 "이코노미석 중간쯤 좌석에 있었다. 착륙한다는 안내방송과 랜딩기어가 내려지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비행기가 하강하는데 속도가 좀
빠르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오른쪽에서 '쾅'하는 소리가 들렸고 순식간에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머리 위의 짐칸에서 짐들이
쏟아졌고 산소마스크도 내려왔다. 유독가스처럼 독한 냄새가 심하게 났다"고 말했다. 정신 차릴 새 없이 출구로 뛰쳐나왔다고 말했다.
한 탑승객은 "착륙을 위해 활강하던 찰나 (기장이)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 생존자는 "꼬리 부분이 충돌한 뒤 다시
위로 오르면서 탑승객들의 머리가 천장에 부딪혔다"며 "그 상태로 275m 정도를 움직이더니 동체가 돌고 불이 나기 시작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그는 "중간에 앉은 승객들은 안전하게 대피했지만 꼬리 부분에 있던 승무원이나 탑승객들은 모두 밖으로 떨어진 것 같다"고 덧붙였다.
공항에서 사고 장면을 목격한 제니퍼 소젠은 "활주로 끝 부분에 비행기 꼬리가 충돌하자마자 떨어져나갔다"고 말했다.그는 엄청난
폭발이 있지는 않았지만 연기가 매우 많이 올라왔다고 덧붙였다.사고 당시 활주로에 있었던 항공기 정비사 에이드리언 미라부에노는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 "똑바로 착륙하는 듯 하더니 갑자기 옆으로 비껴나가면서 연기가 피어올랐다"고 설명했다.
LA지사=박낙희 기자,
뉴스1
[아시아나 美공항서 착륙 사고] 기체·승객 보상 2000억원 넘을 듯…B777 '안전'
명성…사고기 7년 운항
보상
어떻게 … 사고기 기종
기체 보상 최대 1485억원
사망 승객 보상 한도 없어 소득·연령 등 따져
결정
B777 1994년 보잉서 제작…아시아나 이전 사고 1건뿐보험업계는 7일
아시아나항공 여객기 착륙 중 사고와 관련된 보험금 지급 규모를 1억8000만달러(약 2055억원) 안팎으로 추산했다. 피해 규모 산정에 따라
규모는 더 커질 수 있다.
사고 항공기는 보잉777-200ER 여객기로 국내 9개 손해보험사가 공동 인수한 항공보험에 가입했다.
LIG손보 항공보험 상품으로 LIG손보가 20%, 삼성화재 현대해상 동부화재 메리츠화재 한화손해보험 롯데손해보험 흥국화재 농협손해보험이 약
10%씩 인수했다.
사고 여객기 기체 보상 한도는 9950만달러(약 1136억원), 엔진을 포함하면
1억3000만달러(1485억원)다. 승무원 상해보험 책임 한도액은 1인당 10만달러로 총 300만달러다.
항공보험 약관에 따라
사망 승객 배상책임 한도액은 따로 없다. 승객의 국적, 연령, 직업이나 소득을 고려한 소득상실액 등에 따라 보험금이 결정된다. 부상 승객은 부상
정도에 따라 치료비와 부대비용을 보상받는다. 수화물은 1인당 1800달러(약 205만원), 화물은 ㎏당 28달러(약 3만2000원)가 보상
한도다.
국내 손보사들은 재보험에 가입돼 있어 이번 사고로 실제 지급해야 할 보험금은 전체의 약 2.5% 수준이다. 국내
재보험사인 코리안리가 3.5%, 영국 로이즈와 독일 뮌헨리 등의 글로벌 재보험사가 94%를 부담하게 된다.
사고 여객기는
2006년 3월 아시아나항공이 도입했다. B777은 보잉사가 1994년 제작한 기종으로 1995년부터 세계 항공사들이 본격 도입했다. B777
기종은 2008년 영국항공 보유 기종이 런던 히드로공항에 도착하다 활주로 근처에서 난 충돌사고로 승객 한 명이 중상을 입은 것을 제외하면 사고가
난 적이 없다. 항공업계에선 대표적으로 안전한 비행기로 꼽힌다.
B777 기종에는 미국 프랫&휘트니,
제너럴일렉트릭(GE), 롤스로이스RK가 각각 개발한 고성능·저소음 엔진이 탑재됐다. B777-200ER은 프랫&휘트니가 제조한
PW4090 엔진이 장착됐다. 엔진이 양 날개에 하나씩 두 개가 있고 한 개의 엔진이 멈춰도 나머지 엔진으로 운항이 가능하다. 좌석 수는
300석 안팎으로 아시아나항공은 295석으로 운항했다. 랜딩기어는 전통적인 네 바퀴가 아니라 상업용 민항기 중 최대 랜딩기어인 축당 여섯 개의
바퀴로 구성돼 있다.
지난 2일 미국 시카고에서 인천공항으로 비행하다 엔진 고장으로 러시아 극동지방에 비상착륙한 대한항공 여객기는
B777-300ER 기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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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세대 에너지 저장장치 ‘3차원 다공성 그래핀 나노볼’, 친환경 대량생산 길
열린다
[OSEN=강희수 기자] 국내 연구진이 차세대 에너지
저장장치 등에 응용할 수 있는 고품질의 3차원 ‘다공성 그래핀 나노볼’을 친환경적으로 대량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에너지 저장 효율이 중요한
차세대 전지, 하이브리드 자동차 등에 적용 될 수 있는 기술이다.
울산과학기술대학교(UNIST) 친환경에너지공학부 장지현 교수
연구팀(제1저자 이정수, 김선이 박사과정 연구원)이 주도한 이번 연구는 미래창조과학부(장관 최문기)와 한국연구재단(이사장 이승종)이 지원하는
기초연구실 지원 사업 등의 지원을 받아 진행 됐다. 연구결과는 미국화학회가 발행하는 나노분야 학술지 ACS Nano 6.20일자 온라인판(논문명
: Chemical Vapor Deposition of Mesoporous Graphene Nano-Balls for
Supercapacitor)에 게재됐다.
기존의 흑연에 강산(Acid)과 산화제를 이용해 그래핀을 제조하는 화학적 방식은
대량생산이 가능하나, 유독하고 그래핀의 우수한 전기전도도 재현에 한계가 있었다.
반면, 최근 주목받고 있는 화학기상증착기법을 활용한
그래핀 제조 방식은 우수한 전도도 등 고품질의 그래핀을 합성할 수는 있으나, 유독 가스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 대량생산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장지현 교수 연구팀은 유독한 가스나 화합물 없이 고분자와 금속이온만을 이용한 제조기술을 개발하여 3차원 다공성 그래핀
나노볼을 친환경적으로 대량 합성하는데 성공했다.
다공성 그래핀 나노볼(Mesoporous Graphene
Nanoball)은 전기전도성이 좋은 그래핀을 다수의 기공(구멍)을 갖는 나노 수준의 구형 형태로 제작한 것으로 표면적이 넓어져 여러 가지
반응의 효율이 높아진다.
다공성 그래핀 나노볼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구형의
고분자 물질 표면에 금속이온을 고르게 도포한 후, 화학기상증착기법을 실행한다. 그러면 고온에서 고분자 표면의 금속이온들이 고분자 내부로도
침투하여 금속으로 바뀌고, 울퉁불퉁한 금속구의 표면에서 그래핀이 자란다. 마지막으로 금속을 제거하면 구멍이 많은 구형의 그래핀만 남게 된다.
다공성 그래핀은 표면적이 넓어 반응성이 좋고, 평면 그래핀의 우수한 전기전도도 그대로 유지되며, 분말 상태로도
만들 수 있어 활용 폭이 매우 넓다.
대량생산이 가능한 다공성 그래핀 나노볼은 차세대 에너지 저장장치인 슈퍼커패시터의 전극 소재로서
최적이다. 보조 배터리나 배터리 대체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슈퍼커패시터의 전극소재로 적용한 결과, 기존 대비 2배의 성능을 나타냈고, 장시간
사용에도 성능저하가 거의 없었다고 연구팀은 밝혔다.
장지현 교수는 “다공성 그래핀 나노볼은 뛰어난 특성으로 슈퍼커패시터 외에
다양한 장치에 활용 가능하다”면서, “삼차원 그래핀의 친환경적 대용량 제조방법으로 고출력ㆍ고효율 에너지 저장 시대를 앞당기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100c@osen.co.kr
<사진> 다공성 그래핀 볼 제조 과정을 보여주는
설명도(위)와 다공성 그래핀 볼 개발 연구진. 왼쪽부터 윤종철 연구원, 김선이 박사과정 학생, 장지현 교수, 이정수 박사과정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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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경제를 말한다]남민우 청년위원회위원장
대담= 강병준 경제과학벤처부 부장
창조경제의 핵심인 청년 일자리 창출을 모토로
청년위원회가 정식 출범했다. KT 광화문 사옥에 둥지를 틀고 활동을 시작했다. 덩달아 남민우 청년위원회 초대위원장(벤처기업협회장)도 연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아직은 `정중동` 수준이지만 조만간 창조경제 실현을 위한 파격적인 세부 실행 방안을 내놓을 계획이다.남 위원장은 사무실
제일 잘 보이는 맞은편에 `하고자하는 사람은 방법을 찾고 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핑계를 찾는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자칫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직원들을 자극하고 있다. 창조경제 실현의 선두에 선 남민우 위원장을 강병준 경제과학벤처부 부장이 만났다. 남 위원장은 창조경제를 위한 청년위원회
임무는 첫째도 일자리, 둘째도 일자리, 마지막도 일자리에 있다고 강조했다.
“대기업을 주축으로 우리 경제가 성장해 왔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대기업 위주 경제로)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 내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많은 사회 문제도 결국 모두 일자리 부족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볼 때 변화가 필요합니다” 남민우 청년위원회위원장(벤처기업협회장)은 창조 경제의 본질을 일자리 창출에 있다고
밝혔다.
“정부도 기존 대기업 위주 경제 구조로는 좋은 일자리가 힘들다고 판단했고 이를 중소·벤처기업에서 대안을 찾으려는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는 이런 변화를 새 정부가 `창조경제`로 대변했다고 분석했다. 한 마디로 청년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청년 일자리
창출이라는 설명이다.
남 위원장은 “얼마 전 방한했던 존 호킨스 박사도 `인프라 변화 없이 떠들어봐야 창조경제는 레토릭(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진단했다”며 “예산집행 시스템, 공무원의 일하는 방법 등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존 호킨스 박사의 말이 100%
맞는다고 전제한 뒤 “예산이 유연하지 않고, (필요한 곳이 생겼을 때) 전용할 수도 없으면 안 된다”며 이전의 틀을 지키는데 급급해서는 성과를
내기 힘들다고 밝혔다. 그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경제수석, 정무수석 등 청와대에서 바람을 일으키고, 장·차관 등이 변화해 `정부 3.0`으로
가야지만 창조경제의 틀이 만들어 진다”고 내다봤다.
청년위도 정부의 일하는 방식을 바꾸는데 일조하겠다고 덧붙였다. 예를 들어 정부
조달시장이 수십조 원인데 고용 창출 위주로 틀을 바꿔보자고 제안했다. 고용창출지수 등을 만들어 국내 일자리 창출을 많이 하는 기업에 조달시장
참여의 가점을 주자는 것이다.
“가격이 싸거나 제품 성능이 중요하지만 국내 일자리를 가장 많이 늘릴 수 있는 기업에 일을 주어야
합니다. 성장위주에서 고용위주로 가자고 대통령이 이미 말했듯이 한번 시도해 볼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실제 수조원의 예산이 들어가는 국가 정보화
예산을 외국기업이나 대기업에 몰아주지 않고 중소·벤처기업으로 돌리면 훨씬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남
위원장은 “정부 조달시장을 개편하면 대기업, 외국기업 등은 일부 피해를 받겠지만 중소기업, 벤처기업은 많은 수혜를 받는다”며 “(소프트웨어진흥법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기업이 같은 일을 할 때보다) 더 많은 일자리가 만들어진다”고 설명했다.
“정부에서 해외 청년 취업을
지원하는 `K-무브(Move) 운동`도 비슷한 접근 방식이 가능합니다. 해당 사업을 위해 여러 부처에서 총 1500억원의 예산을 쓰고 있습니다.
이 예산으로 몇 천 명이 수혜를 받는데, 기업을 끌어들이면 예산 증액 없이도 1만 명 이상 늘릴 수 있습니다. 창조경제를 통한 일자리 창출은
이런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정규 직원 채용 부담에 해외지사 설립 등을 망설이는 기업에 매칭 형태로 지원하면 기업은 해외진출
기반을 닦고, 더 많은 청년이 새로운 채용과 경험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아이디어다. 연봉을 많이 줄 수는 없겠지만, 청년들이 1~2년 견문도
넓히고, 스펙도 쌓으면서 해외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남 위원장은 “고용 위주로 예산을 쓰자는 것”이라며
“일부에서 반발이 있지만, 청년을 위한 큰 그림이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쉽지 않겠지만, 청년위가 창조경제를
실현하는 전위대가 돼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갖고 일을 추진하다보면 답이 보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많은 일을 하기에 일정이 너무 빠듯하지만,
벤처정신으로 헤쳐 나가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미 대선 캠프나 인수위 청년특위 등에서 반값 등록금, 일자리 창출, 청년창업 등 많은
일을 했습니다. 10여 가지는 국정과제로도 올라가 있는 만큼 최대한 빨리 일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남 위원장은
“벤처협회에서 하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며 “일반 공직에 계신 분들보다 자유스러운 자리이기 때문에 소신 있게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봉사하러 온 자리이기 때문에 국가와 청년을 위해 다양한 메시지를 던지는 역할을 하겠다”며 “(청년 일자리창출과 직결되는) 미래부
장관이나 중기청장이 하는 일에 힘을 보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상징적으로 미래부와 협의해 청년위 사무실이 있는 광화문
KT사옥 1층의 녹색성장체험관을 `창조경제체험관(가칭)`으로 바꾸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청년 창업, 벤처투자 등 독특한 아이템 전시는 물론
청년이 벤처·창업 등에 대한 아이디어를 나눌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만들 생각이다. 중소·벤처 중심으로 우리 경제구조가 바뀔 것으로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대통령의 철학이 (내가) 생각 이상으로 워낙 확고하다”며 “새 정부에서 확실한 패러다임 시프트가 가능하다”고
낙관했다.
[창조경제를 말한다]대통령 소속 청년위원회는 어떤 조직?
청년위원회는 `청년위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대통령령`에 근거한 대통령 소속 자문위원회다. 인재양성과
청년과 소통 및 청년정책 기획·조정·평가 등에 관해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기 위해 설치했다. 청년 창업·취업 활성화 등 일자리 창출, 청년 발전
및 복지증진을 위한 제도·정책 개선, 청년 역량 개발 및 균형 있는 인재양성, 청년과 소통 활성화 등의 역할을 맡는다.
지난해
12월 박근혜 대통령이 청년과 소통을 강화하고 눈높이에 맞는 정책 마련을 위해 신설을 공약했으며 지난 1월 23일 인수위 정부조직개편안에
신설계획이 포함됐다. 지난달 18일 민간위원 19명 인선이 발표됐으며 정부위원으로는 미래·고용·교육·여성부 장관과 국정기획수석이
참여한다.
위원회 핵심인 민간위원에는 일자리와 교육 등 청년관련 정책을 논의하고, 청년과 소통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청년 취업과
창업, 국제무대에서의 활동, 청년 멘토링 분야에서 많은 활동을 한 각계각층의 젊은 인재로 구성됐으며, 평균 연령은
34세다.
청년멘토 10명은 이제범 카카오 대표, 박기태 사이버외교사절단 반크 단장, 정미라 당정초등학교 교사, 박칼린 한국예술원
교수, 나승연 오라티오 공동대표, 장미란 장미란재단 이사장, 김광욱 코이카(KOICA) 월드프렌즈총괄팀 직원, 김태원 구글코리아 팀장, 신용한
지엘인베스트먼트 대표, 이욱재 청년협동조합 이사장 등이다. 8명 청년대표는 김윤규 청년장사꾼 대표, 박기준 세종대 총학생회장, 박수왕
소셜네트워크 대표, 박신영 폴앤마크 연구소장, 손수조 새누리당 중앙미래세대위원회위원장, 건국대 학생 이상협, 장문정 성신여대 총학생회장, 정홍래
경북대 총학생회장 등이다.
사무국은 20여명의 각 부처 파견 공무원을 포함해 70명의 조직으로 꾸려진다. 3개의 분과위로 운영될
예정이며, 분과위 밑에 실무위원회 및 사무기구를 각각 설치한다.
청년위원회 설치 추진경과
2012.12월: 청년위 신설
공약 공개
2013.1.21: 청년위 설치 발표 (인수위 정부조직개편안)
2.22: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청년특별위원회
활동 종료
2.23: 청년위원회 설립준비단 설치 (간사부처: 기획재정부)
4.15: 설립준비단 KT빌딩 12층 사무실
이전
5.06: 청년위 설치〃운영규정(대통령령) 공포〃시행
6.14: 청년위 실무추진단 직제(30명)
확정
6.18: 민간위원 19명 인선 발표
7월: 민간위원 위촉장 전수식 예정
[창조경제를 말한다]남민우 청년위원장은
남민우 청년위원회 초대위원장은 2000년대 벤처 붐을 이끈 1세대 대표 주자다. 그동안 창조경제를
이끌어갈 청년 창업가 멘토링 등 청년 일자리 창출과 후배 벤처 기업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사장 등과 사재를 털어
설립한 청년기업가정신재단 등이 대표적이다. 지난 91년 코리아레디시스템을 창업을 시작으로 93년 다산네트웍스의 전신인 다산기연을 설립, 20여년
만에 지주회사인 다산네트웍스를 중심으로 5개 관계사와 해외법인 등을 합쳐 매출 약 3000억원의 회사를 일궈냈다. 2012년부터 한국벤처기업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학교 기계공학과 졸업 ▲91년 Korea Ready System 창업 ▲93년 다산기연 (현
다산네트웍스) 창업 ▲98년 다산알앤디 창업 ▲2000년 다산네트웍스 코스닥 등록 ▲2001년 남북 IT협력사업 시작 ▲2001~2012년
한국벤처기업협회(KOVA) 이사/부회장 ▲2004~2006년 한민족글로벌 벤처네트워크(INKE) 의장 ▲2007~2011년 코스닥 상장위원회
위원 ▲2006년 다산TPS 창업 ▲2009년 다산SMC 창업 ▲2011~현재 한국청년기업가정신재단 이사 ▲2012~현재
한국벤처기업협회(KOVA) 회장 ▲2013~현재 대통령직속 청년위원회 위원장 ▲2000년 벤처기업대상 산업자원부 장관상 ▲2000 중소·벤처기업
정보통신부 장관상 ▲2001년 제2회 정보통신기업 디지털대상 통신부문 중소기업청장상 ▲2002년 벤처기업대상 대통령상 ▲2004년 외국인 투자
유공자 포상 대통령상 ▲2009년 서울세관 모범납세자 기획재정부장관 표창 ▲2010년 벤처기업대상
동탑산업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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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신 전 한수원 사장, 원전 수처리 업체서 뇌물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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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장실질심사 출두하는 전 한수원 사장 (부산=연합뉴스) 김선호 기자 = 원전 관련 업체로부터 억대의 금품을 받은
혐의(뇌물수수)를 받는 김종신 전 한국수력원자력 사장(가운데)이 7일 오전 부산지법 동부지원에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출두하고 있다. 2013.7.7. wink@yna.co.kr |
12년간 관리 '독점'…UAE
수출 원전에도 설비 공급계약
(부산=연합뉴스) 민영규 기자 = 김종신(68) 전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에게 억대의 뇌물을 제공한 업체는
냉각수 등 원전 용수를 처리하는 설비를 공급·관리하는 H사인 것으로 7일 확인됐다.
특히 이 업체는 무려 12년간 한수원의 관련
설비 관리를 독점하고 있는데다 우리나라가 아랍에미리트(UAE)에 수출하는 브라카(BNPP) 원전에도 설비 공급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밝혀졌다.
부산지검 동부지청 원전비리 수사단은 최근 김 전 사장의 수뢰혐의를 포착하고 경기도 안산시 H사 사무실과 이모(75) 사장 자택
등을 압수수색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또 이 사장을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해 강도 높은 조사를 벌인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이 과정에서 김 전 사장의 수뢰혐의와 관련한 진술을 확보하고 지난 4일 김 전 사장을 전격 체포, 6일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H사는 영광원전 3·4호기에 냉각용 초정수(순도가 높은 물)를 공급하는 수처리 설비, 터빈의 침전물에 따른 부식을
막아주는 복수탈염설비, 염소주입 설비를 일괄수주 방식으로 공급했다.
영광원전 5·6호기, 울진원전 3∼6호기에는 이들 설비와 함께
약품 주입 설비로 구성된 용수처리 설비의 설계부터 제작, 설치, 유지보수 업무를 모두 맡았다.
신월성원전 1·2호기와 신고리
1∼4호기에도 H사의 용수처리 설비가 공급됐고, 신울진원전 1·2호기와는 용수처리 설비 공급계약이 이뤄져 관련 프로젝트가 추진중이다.
H사는 특히 UAE 브라카 원전 1∼4호기에 용수처리 설비를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H사는 이와 함께
2002년부터 올해까지 12년째 한수원의 이와 같은 설비를 유지·관리·정비하는 업무를 독점하고 있다.
한수원은 3년마다 입찰을
통해 용역 업체를 선정하지만 H사가 4번 연거푸 낙찰된 것이다.
이 때문에 입찰에 참여했던 경쟁사들로부터 H사의 독점에 따른
민원이 끊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용역 계약에 따른 매출액만 연간 15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
관계자는 "이번에 문제가 된 김 전 사장의 수뢰 혐의는 원전 부품이나 UAE 원전과는 관련이 없다"면서 "구체적인 자금 출처나 규모는 확인해주기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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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 사회공헌활동 제2막은 ‘CSV’
CJ그룹 비상경영위원회, 문화·콘텐츠 적극 활용 공유가치창출 방안
마련
이재현 회장 부재로 비상경영에 돌입한 CJ그룹이 '그룹경영위원회'를 출범시키고 본격적인 후속 조치에 나서고
있다.
CJ그룹은 특히 사회기여도 제고 및 신뢰성 향상을 위해 자사의 장점인 '문화.콘텐츠'를 적극 활용,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한 단계 뛰어넘은 공유가치창출(CSV)에 적극 나선다는 방침이다.
7일 CJ그룹과 재계에 따르면 CJ그룹은
경영위원회 발족 이후 '국민 속으로'라는 모토를 내걸고 다양한 사회기여도 제고방안을 고민 중이다. 그동안 CJ나눔 재단과 CJ문화재단을 양대
축으로 사회공헌활동을 진행해온 CJ그룹은 기존의 CSR보다 업그레이드된 CSV를 적극 추진키로 하고 구체적 방안 마련에
들어갔다.
CSV(Creating Shared Value)는 기업 경영활동 자체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해 기업과 사회를 포함한 전체
상생의 가치를 창출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룹 관계자는 "CJ그룹은 신인 대중음악인 또는 공연 창작자, 스토리텔러 등에 대한
지원, 육성을 통해 문화.콘텐츠 산업을 키우고 동시에 비즈니스에도 도움을 받는 CSV에 더 가깝다"면서 "세계적인 한국인 스타 셰프 창출이
한식세계화와 CJ푸드빌의 해외 진출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도 비슷한 사례"라고 설명했다.
때문에 공연, 영화, 음악 등
대중예술분야 신진창작인 발굴 및 지원활동을 통한 문화다양성을 지원하는 CJ문화재단의 역할이 더욱 커질 전망이다. 더불어 그동안 프로젝트에 따라
산발적으로 진행되어 왔던 사회공헌 활동을 보다 체계화할 계획이다.
이처럼 사회기여도 제고방안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은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국민과의 거리감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실제 이관훈 CJ㈜ 사장은 경영위원회 발족 당시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주변과
호흡하며 살아가는 일에 다소 미흡했다"면서 "우리 스스로는 주변을 배려하고 함께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외부의 기대치에는 미치지
못한 것 같다"고 반성한 바 있다.
그룹의 신뢰성 향상방안도 조금씩 구체화되고 있다.
일단 전문가 풀(Pool)
또는 자문단을 구성하는 방안이 심도 깊게 논의되고 있다. 외부 전문가 조직을 통해 외부와 소통하는 것은 물론 견제와 감시로 국민적 신뢰도를
높이겠다는 의도다.
그룹의 경영안정과 중장기발전전략도 속속 나오고 있다. 지난 5일 경영위원회 구성 이후 첫 후속 조치로 CJ㈜
경영총괄을 신설하고 허민회 CJ푸드빌 대표이사를 겸직시켰다. 경영총괄은 경영위원회의 의사결정 과정을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하며 재무,
사업관리(사업1.2팀), 마케팅, 경영연구소를 관장한다.
재계 관계자는 "허 대표의 발탁은 이관훈 사장의 경영위원회 참여로 발생할
수 있는 지주사 업무차질을 최소화하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courage@fnnews.com 전용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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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obal View(Eye) & Professional 몇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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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잘 굴리는’ 테마섹..작년에는 뭐샀나
- 자산가치 역대 최대..순이익은 소폭 감소- 아시아
자산 71%..북미·유럽 에너지株도 관심[이데일리 김경민 기자] 싱가포르의 세계적 국부펀드 ‘테마섹홀딩스(이하
테마섹)’의 자산가치가 또다시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글로벌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나홀로 잘나가는’ 테마섹의 장바구니에 투자자들의 관심이
모아지고있다.
◇ 지난해 자산가치 192조원..사상 최대 수준
테마섹이 5일 공개한
‘2012회계연도(2012년 4월~2013년 3월)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3월 말 기준 테마섹 자산규모는 2150억 싱가포르달러(약
192조원)를 기록하고 있다. 작년 3월 말 1980억 싱가포르달러를 기록한 이후 8.6% 늘어난 수치로 역대 최대 규모다. 특히 테마섹
자산규모가 지난 2003년말 610억 싱가포르달러인 점을 감안하면 불과 10년만에 3배 이상 급증한 셈이다.
지난 1974년
싱가포르 정부가 설립한 테마섹은 싱가포르의 또 다른 국부펀드 싱가포르투자청(GIC)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국부펀드와 달리 2004년부터 자세한
투자보고서를 공개하고 있다.
테마섹홀딩스의 자산 규모는 금융위기 직후였던 2009년을 제외하고 대부분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배당과 주주 가치 변화를 고려한 수익률인 주주수익률은 3.92% 포인트 증가한 8.86%를 기록했다.
다만 순이익은 소폭 줄었다.
2011회계연도 순이익이 직전 회계연도보다 두 배 가까이 급증한 탓에 유지하는 수준에 그친 것으로 풀이된다. 2012회계연도 순이익은
전년동기대비 1억 싱가포르달러 줄어든 106억 싱가포르달러로 집계됐다.
이번 회계연도 동안 순투자금액은 70억 싱가포르달러로
집계됐다. 새로 200억달러 규모 투자를 단행했지만 차익 실현 등으로 회수한 투자금은 130억
싱가포르달러였다.
◇투자 비결은 ‘아시아’..통신주 줄이고 은행주 늘리고
테마섹이 쌩쌩
달릴 수 있는 비결은 아시아 신흥국에 대한 투자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지난해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곳이 아시아
이머징시장이었던 만큼 테마섹의 아시아 중심 투자가 빛을 발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테마섹의 국가별 비중을 보면 싱가포르를
제외한 아시아 지역이 41%를 차지했다. 30% 수준인 싱가포르 투자까지 더하면 아시아 지역의 투자 비중은 71%다. 북미와 유럽, 호주,
뉴질랜드가 25%를, 그 밖의 지역에 4%를 투자하고 있다.
금융주에 대한 애정은 여전했다. 중국공상은행을 비롯해 AIA생명,
핑안생명보험 등 금융주에 대한 투자를 늘렸다. 반면 그동안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바티인프라텔, 싱텔 등 통신주에 대한 투자는 조금씩 줄이는
모습이다. 지난 2004년 싱텔이 포트폴리오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0%가 넘었지만, 최근에는 14%로 줄었다.
◇
조금씩 달라지는 식성..유럽·북미 에너지주 담아
지난해에는 이례적으로 유럽과 미국 관련 기업에도 관심을 보였다.
경기 둔화로 주춤거리고 있는 선진국들의 기업가치가 저평가돼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특히 에너지나 자원 관련주 중심으로 투자를 늘려 식성이
달라졌음을 보여줬다.
테마섹은 스페인 에너지기업 렙솔(Repsol) 지분 6%를 사들인 데 이어 독일 석유화학기업
에보닉(Evonik) 주식도 4.6% 보유하고 있다. 또 미국 석유화학업체 비너리리소스와 캐나다 광산업체 투르퀴스힐 리소스 등의 지분도 보유하고
있다.
IT와 바이오 분야에서도 투자를 늘리고 있다. 테마섹은 지난 3월말 기준으로 셀트리온(068270)의 지분을 11%
보유하며, 2대 주주에 올랐다. 또 중국 전자상거래업체인 알리바바도 투자했다.
수피아 다나발란 테마섹 회장은 “세계경제가 최근
회복조짐을 보이고 있지만 위험요소는 여전하다”며 “아시아 등 신흥시장을 비롯해 유럽과 북미에 대한 투자를 늘려나갈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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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희 감독은 마키아벨리스트가 되어야 했다
[한겨레]
[S라인] 기성용 SNS 논란
기성용 사태는 그가 ‘독이 든 성배’ 떠맡은 순간부터
예견
대표팀 감독에게 필요했던 건 강력한 의지와 비범한 결단
☞ 한겨레21
바로가기나는 <한겨레21>의 이 지면과 그 밖의 기회를 통해 1년여 동안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최강희 감독의 입장을 존중하고 이해하며, 어쩔 수 없었던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한 그의 결정을 지지했다. 그는 상당히 난처한
입장에서 감독직을 수락했다. 한때 동고동락한 오랜 선배이자 동료인 전임 조광래 감독이 조중연 집행부의 조급증으로 경질된 마당이었기에 애초 그는
그 ‘독배’를 마시기를 꺼렸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대표팀 감독 스타일이 아니라 클럽 감독 스타일’이라고 자주 말해왔다. 1년
내내 한솥밥을 먹으면서, 진자리 마른자리 챙기면서, 다그치기도 하고 다독이기도 하면서 하나의 팀을 가꾸는 것이 그의 특장이었다. 전북이라는
K리그의 강팀은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그러나 대표팀 감독은 역할이 다르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선수들 중에서 23명을 엄선해 단기간에 자기만의
스타일로 조련한 뒤 단기전에서 끝장내야 한다. 자신은 그런 스타일이 아니라고 거듭 말했으나 상황이 그를 감독으로 만들었다.
기성용 사태, ‘인성’과 ‘SNS’ 문제가 아니다 초반의 분위기는 좋았다. 그러나 전술적 특징이
희미했고 시간이 흐르며 팀 내 잡음도 들려왔다. 특히 남은 세 경기가 문제였다. 레바논전에선 혼란에 빠졌고 우즈베키스탄 선수의 자살골이 없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마지막 이란전에서는 패했다. 그리고 드디어 파문이 터졌다. 기성용이 최강희 감독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문구가 드러났다. 몇몇 해외파 선수들이 그와 동일한 정서를 갖고 그동안 팀 소집에 응했거나, 아니면 발탁이 안 되었을 때 그들끼리 불만을
털어놓았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에 홍명보·황선홍 같은 중견 감독들이 나서 단호하게 후배들을 비판하는 인터뷰를 이어갔다. 대한축구협회가 진상
조사를 한다는 후속 보도까지 나왔다.
흡사 ‘정상회담 발언 전문’을 다 까보자는 식의 이런 대혼란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어떤
이는 기성용을 비롯한 해외파 몇 명의 ‘인성’을 논한다. 나는 ‘인성’이니 ‘정신교육’이니 하는 말에 담긴, 파시즘적 뉘앙스를 극구 싫어하지만
이 선수들의 경솔한 말을 두둔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SNS 같은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조처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문제는 SNS가
아니기 때문이다. 본질은 한국 축구계의 오랜 상명하복의 위계질서와 그러한 것에서 지리적·정서적으로 조금은 멀리 벗어나 있는 젊은 선수들 사이에서
발생한 균열이다. 이 균열은, 장차 이런 현상이 더 빈번해질 것이라는 시대의 흐름을 읽는 것으로 이어져야지 ‘SNS 금지’로 이어져서는
곤란하다.
포항 스틸러스의 노병준 선수는 지난 4월, 자신의 페이스북에 베이징 궈안의 공격수 프레데리크 카누테에게 인종차별적
발언을 했다가 논란이 일자 그 발언을 삭제했다. 포항 구단은 사회봉사 20시간과 지역 내 유소년 지도라는 징계를 내렸다. SNS 사용에 대한
방침도 세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권 교육을 하는 일이다. 노병준은 논란이 되자 “웃자고 던진 말에 죽자고 덤비면… 아무튼 뭐 오해의 소지가
있다니 삭제는 해야겠네요”라는 글을 올리고 문제의 발언을 삭제했다.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이런 미성숙한 의식을 교육해야 하는 것이다.
기성용 SNS 논란도 이런 맥락에서 접근해야 한다. 축구계 대선배에게 대들었으니 인성 교육이 필요하다는 식은 곤란하다.
까마득한 후배를 ‘비겁자’라 부르는 건 괜찮나 정작 중요한 건 최강희 감독의 인터뷰다. 그는 지난
6월18일 대표팀 감독에서 물러난 뒤 몇 차례 언론 인터뷰를 했다. 전체적으로는 회한에 가득 찬 토로였다. 그 와중에 기성용의 이른바 ‘지도자
자질’ SNS 멘션 얘기가 나왔고 ‘혈액형별 선수 특징’ 같은 얘기도 나왔다. 원래 격의 없이 농담을 섞어가며 담화를 나누는 최 감독의 스타일상
‘혈액형’ 얘기는 가벼운 에피소드다. 그러나 ‘기성용은 비겁하다’고 말한 것은 정확한 팩트다.
최 감독은 “이천수나 고종수처럼
욕먹어도 자기 표현하는 선수들이 좋다. 용기가 있으면 찾아와야 한다. 그런 짓은 비겁하다. 뉘앙스를 풍겨서 논란이 될 짓은 하면 안
된다”(<스포츠동아>, 2013년 7월3일)라고 말했다. 이 말이 논란이 되자 최감독은 다른 인터뷰에서 맥락을 빼고 보도되니까
왜곡됐다고 했다. 이렇게 말이 이어지면 곤란하다.
누군가는 기성용이 축구 대선배(최감독)를 조롱한 것을 비난한다. 원래
‘황태자’니 뭐니 하는 부류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나 또한 기성용의 발언이나 축구장을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까마득한
후배를 ‘비겁자’라고 부르는 것은 또 괜찮은가.
최 감독은 퇴임 뒤 여러 인터뷰에서 시한부 감독이 아니라 월드컵 본선까지 임기가
확정돼 있었더라면 선수 선발이나 평가전 등을 모두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논란이 되었던 ‘해외파’ 몇 명도
부상이나 컨디션 난조가 있다 해도 본선에 대비해 다 뽑아서 ‘안고 갔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철저히 시한부 감독”이었고 오직 본선 진출이
유일무이한 숙제였기 때문에 단기전에 몰입하는 방식으로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모든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가 독이 든 잔을 받아든 순간부터 문제는 예견됐다. 그는 정말로 대표팀 감독을 맡지 않으려 했다. 대한축구협회는 그런 최 감독을 억지로
앉혔다. 임기가 끝나면 전북으로 돌아간다는 확약을 서로 나눴다. 그런데 이 어수선한 자리에 오르면서 최 감독은 ‘내 임기는 최종 예선까지’라고
선언까지 했다. 스스로 ‘시한부 감독’의 운명을 걸었다. 본인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이 시한부 선택은 그의 리더십을 결국 흔들었다. 런던올림픽
동메달과 해외 진출로 구름 위에 올라탄 듯한 몇몇 선수들이 그의 지시 범위 바깥으로 빠져나가버렸다.
그에겐 마키아벨리적
‘비르투’가 부족했다 말의 참된 뜻에서 최강희 감독은 마키아벨리가 말한 ‘비르투’(Virtu), 즉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강력한 의지와 비범한 결단이 부족했다. 그 바람에 경솔하고 버르장머리 없는 젊은 스타들이 어이없는 발언을 나누며 낄낄거렸고 그 여파는 모두가
떠난 뒤에도 지속되고 있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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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스마트폰 데이터 통화량 1위는 웹서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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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이스마트폰을 이용하면서 가장 많은 데이터 사용량을 쓰는 기능은 인터넷 서핑인 것으로 나타났다.
<<연합뉴스DB>> |
SA "내년부터는 동영상이 웹서핑보다 늘어날
전망"
(서울=연합뉴스) 권영전 기자 = 한국인들이 스마트폰을 이용하면서 가장 많은 데이터 사용량(트래픽)을 쓰는 기능은 인터넷
서핑인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시장조사업체 스트래티지 애널리틱스(SA)는 지난해 한국의 연간 스마트폰 데이터 사용량이
150.6PB(페타바이트)였다고 7일 발표했다.
1PB는 1천24TB(테라바이트)이고 1TB는 1천24GB(기가바이트)라는 점을
고려하면 지난 한 해동안 한국인들은 스마트폰으로 1억5천792만GB의 데이터를 썼다.
이 가운데 웹브라우저를 이용한 인터넷 서핑
사용량이 90.9PB로 전체의 60% 이상을 차지했다.
이어 게임·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한 데이터 사용량이 28.6PB, 동영상
사용량이 24.4PB로 각각 2∼3위를 기록했다.
올해도 연간 데이터 사용량 231.5PB의 절반이 넘는 118PB가 인터넷
서핑으로 쓰일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내년부터는 동영상을 통한 데이터 사용량이 인터넷 서핑을 넘어설 것으로 SA는
내다봤다.
내년 연간 데이터 사용량은 354.1PB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동영상을 통한 사용량이 163.7PB로 인터넷
서핑 사용량 148.9PB보다 많으리라는 것이다.
이 같은 추세는 2017년까지 이어지면서 인터넷 서핑을 통한 데이터 사용량은 매년
평균 20.9%가량씩 완만하게 늘어나는 반면, 동영상은 연평균 72.2%의 가파른 증가세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통신업계
관계자는 "롱텀에볼루션(LTE)과 LTE어드밴스트(LTE-A) 등 빠른 속도의 통신 서비스가 늘어나면서 고화질 동영상 이용자가 늘어나고 있다"며
"동영상 데이터 사용량이 급증하는 것은 통신 서비스의 영향이 크다"고 설명했다.
동영상 데이터 사용량이 인터넷 서핑 데이터
사용량보다 빠르게 증가하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다.
SA는 전 세계 동영상 데이터 사용량이 2012∼2017년간 연평균
42.1% 늘어나 인터넷 서핑 사용량의 연평균 증가율 29.5%보다 더 빠르게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comm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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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통화 가치 50% 이상 전격적 절하
이란 중앙은행이 자국 통화를 전격적으로 50% 이상 절하했다.
중앙은행은 지난 6일 외환 센터에서 허가받은 수입업자 등에게만
달러당 2만4779리알의 환율을 적용하기 시작했다고 연합뉴스가 전했다.
이는 그간 적용해온 이른바 '고시 환율'인
1만2260리알보다 약 102% 상승한 수준이다.
이란은 지난해 1월 이후 1만2260리알을 공식 환율로 유지해왔다.
그러나 암시세는 6일 현재 3만3200리알로 이보다 훨씬 높다.
최근 환시장에서는 공식 환율이 대폭 상향 조정될
것이란 소문이 꼬리를 물었으나 이란 관리와 관영 매체는 거듭 부인했다.
이란은 서방 제재로 리알화 가치가 폭락하자 지난해 9월
외환 센터를 설치해 환거래를 통제해왔다.
현지 언론에 의하면 이란 정부는 지난달 중순 2013회계연도(내년 3월 말 종료) 예산을
확정하면서 중앙은행이 고시 환율을 높일 수 있도록 허용했다.
리알화 가치는 중도파인 하산 로하니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15%가량 반등해 지난달 23일에는 암시세가 한때 3만리알 이하로 떨어지기도 했다.
이란은 제재 강화로 인플레 심화해 민생이
타격받아왔다.
세계파이낸스 뉴스팀 fn@segyef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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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창원 "박사논문 표절 부분 있다" 인정 파문
[머니투데이 이슈팀
강혜림 기자]["저작물 소개 부분이지만 표절은 표절...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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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창원씨가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박사논문에 표절한 부분이 있음을 인정했다/사진=표창원
씨 블로그 |
표창원 전 경찰대학교 교수가 미디어워치 연구진실성검증센터에서 제기한 논문
표절 의혹에 대해 일부 혐의를 인정해 파문이 일고 있다.
7일 새벽 4시 50분쯤 표창원 씨는 자신의 블로그에 '박사논문에 표절한
부분이 있음을 인정합니다'라는 제목으로 논문에 표절한 부분이 있었음을 인정하는 글을 게재했다.
표 씨는 "1997년,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유학생이던 제가 쓴 논문에서 매우 부끄러운 표절 흔적을 발견하고 무척 당황스럽고 부끄럽습니다"라고 전했다.
이어 "표절이
이루어진 것은 실증연구의 기초가 된 선행연구와 이론적 틀 등 다른 학자들의 저작물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발생했지만, 표절은 표절이고, 제가 해선
안된다고 주장하는 행위를 '과거의 제가 행한 것'은 사실이기에 인정합니다"라며 자신의 박사논문에서의 표절 사실이 있음을
인정했다.
앞서 지난 1일 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는 표 전 교수의 논문 표절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표창원 전 교수는 3일 밤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논문 표절의혹에 대해 고소를 제기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누리꾼들은 "마지막 승자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역시 표창원 박사 답다", "실수 같은 소리 하네 학교에서 방관하지 않는 이상 유학생한테 quotation mark 쓰라고
백번 천 번 강조하는데 그걸 까먹어?", "논문이란 기존의 지식에 자신의 연구 내용을 덧붙이는 것인데 인용이 없을 수 있겠냐,그냥 인용 실수일
뿐 자신의 주장만 있으면 되는 거지"등의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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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한은 내가 짊어지고 갈게, 한국 친구들한테 잘해줘”
[한겨레]
[토요판] 커버스토리 팜티호아 할머니의 마지막 선물
▶ 이 르포를 쓴 구수정씨는 1999년 가을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의 실상을 취재해 한국 사회에 처음으로 알린
인물입니다. 1968년 2월 벌어진 꽝남성 디엔반현 하미마을 학살에서 두 다리가 잘린 채 살아난 팜티호아 할머니의 사연은 그중 하나였지요.
15년간 할머니와 수없이 만나 속깊은 이야기를 들었고, 지난 6월16~19일 할머니의 마지막 가는 길도 지켰습니다. 그는 현재 베트남에서 사회적
기업인 아맙(cafe.daum.net/doanhnhanxahoi/)을 이끌며 한국-베트남 평화운동의 가교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팜티호아 할머니의 극락왕생을 비는 스님의 독송 소리가 마을 어귀까지 울려왔다. 가슴이 내려앉고 발이 땅에
들러붙기라도 한 것처럼 걸음이 떼어지질 않는다. “왔네, 왔어!” 조붓한 고샅길에 웅그리고 앉아 있던 동네 사람 몇몇이 달려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먼 데서 온 제살붙이를 반기듯 살가운 눈인사가 오가고 한국의 단체들이 보내온 근조 화환이 줄을 이으면서 장례식장은 일순 부산스러운
활기를 띤다. 빈소에 차려진 제단에 향 3개를 피우고 두 번 절을 올렸다. 당신이 토했을 마지막 숨이 연기처럼 흩날리는 향불 뒤에서 영정 속의
할머니는 여느 때와는 달리 아무 말이 없다. 빈소를 물러나는데 하미 학살의 또다른 생존자인 쯔엉티투 할머니가 발목에서 뭉툭 잘려나간 다리를
절룩이며 화환마다 향을 피우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근조 문구 한자 한자를 몇 번이고 되뇌면서. “이제는 전쟁 없는 천국에서 편히
쉬십시오”, “할머니가 우리들의 가슴속에 심어준 사랑, 평화로 꽃피우겠습니다”….
미군에 이어 한국군 청룡여단이 들어온
뒤…그날 아침, 할머니의 얼굴에는 모처럼 화색이 돌았다. 지난겨울부터 줄곧 병원 신세를 지며 다섯 차례나 수술을 받아야
했던 맏아들이 집으로 돌아오고 저 멀리 호주에서 몽매에 그리던 둘째 아들도 날아왔다. 또다시 자식을 먼저 앞세울라 노심초사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말문까지 닫았던 할머니가 다시 입을 열어 십수년 만에 한자리에 마주 앉은 형제에게 조곤조곤 이르는 말도 길게 이어졌다. “과거의 원한은 내가 다
짊어지고 갈 거야. 그러니 나 없어도 한국 친구들이 찾아오거든 잘 대해줘. 마을 사람들에게도 이제 그만 미워하라고 해. 그 불쌍한 것들….
한국에서 위령제도 와 주었고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 나도 위령비 비문이 덮이는 걸 누구보다 반대했지만 10년이 지나도록 열리지 않는
저것을 이제 와 어쩌랴 싶고…. 한국 애들 여기까지 와서 마음 다칠 거 생각하면 이대로 둔들 또 어떠랴 싶고….”
그것이 할머니의
마지막 당부가 될 줄은 몰랐다. 하루에 죽 두어 술 뜨기도 어려웠던 할머니는 그날 둘째 아들이 떠 넣어주는 미음 한사발을 깨끗이 비웠다.
“너희들도 배고프다. 어서 밥 먹어라.” 가족들이 막 밥상 앞에 둘러앉았을 때 ‘쿵쿵’ 침상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 건너가 보니 할머니가
가쁘게 마지막 숨을 뿜어내고 있었다. 2013년 6월16일 낮 12시40분, 팜티호아 할머니는 향년 87살을 일기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생애 처음으로 편안히, 정말 편안히 깊은 잠에 든 할머니의 모습은 평온해 보였다.
할머니가 마지막까지 풀지 못하고 간 수수께끼는
1968년 운명의 그날, 친절하고 다정했던 한국의 청년들이 왜 하루아침에 살기로 번득이는 붉은 눈의 야수로 돌변했는가 하는 것이다. 1965년
3월 미국 해병대 제3상륙부대가 다낭에 첫발을 디뎠다. 이후 남쪽으로 이동해 호아방 현과 디엔반 현을 점령한 해병대는 1966년 봄 하미의
해안에 있는 프랑스의 옛 꼰닌 기지를 접수한다. 미군들은 신속하게 주변 마을을 평정하기 시작했고, 하미 사람들은 ‘전략촌’이라 불리는 호이안의
난민촌과 다낭의 빈민가로 소개되었다. 그 뒤 1967년 12월 미 제5해병연대는 꼰닌 기지를 한국 해병대인 청룡여단에
인계한다.
오랜만에 두 아들과 모인 날
할머니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한국에서 위령제도 와 주었고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
그것이 마지막 말일 줄
몰랐다
마지막까지 못 푼 수수께끼는
친절하고 다정한 한국 청년들이
왜 1968년 2월25일
오전에
마을 사람 135명을 죽였는지…
주검마저 불도저로 밀었는지…
두 아이와 두 다리 잃게
했는지…하미 사람들은 식량도 부족하고 다리를 뻗을 수 없을 정도로 비좁은 난민촌의 삶을 견딜 수 없었다.
궁핍하고 비위생적인 환경 속에서 이질 등의 전염병으로 아이들과 노약자들이 죽어나가자 마을 노인들은 남베트남 당국과 한국 전투 지휘부에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탄원서를 제출한다. 허가를 받았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하미 사람들은 1967년 12월 말에 마을로 돌아갔다. 당시 하미 바닷가
모래언덕 위에 주둔하고 있던 한국 군인들은 재정착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식량과 건축 자재를 지원했다. 그에 대한 답례로 주민들은 청고추 같은 지역
산물을 군인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학살은 그 뒤 한 달쯤 지난 1968년 2월25일에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하미 사람들은 그날 마을을
유린한 군대가 학살 전에 자기들을 도와준 부대와 같은 군대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사람들은 학살 직전에 부대 교체가 있었든지, 아니면 적어도 그
부대의 군인들은 학살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을 거라고 믿고 있다. 1999년 필자가 처음 하미 마을을 찾았을 때도 할머니는 한국군들이 왜 갑자기
학살을 자행했는지 당최 알 수가 없다며 가슴을 쳤다. “한국에 가거든 제발 높은 양반들에게 좀 물어봐줘. 왜 우리 같은 무고한 양민들에게까지
총질을 해댔는지, 대체 왜 갓 태어난 젖먹이까지 죄다 쏴 죽여야 했는지….” 하미의 생존자들에게 그날의 학살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역사의
봉인이다.
“운이 좋았던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원숭이해인 1968년 정월 스물넷째 날, 양력으로는
2월25일 오전 9시30분, 한국 해병대는 하미의 작은 마을인 썸따이 들머리에 탱크와 장갑차를 세워두고 세 방향에서 마을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오전 10시께 군인들은 마을 사람들을 응우옌 씨네 등 각기 다른 세 지점에 모았다. 생존자에 따르면, 지휘관의 길고 장황한 연설이
이어지고 일부 병사들이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누어주기도 했다. 하미 사람들은 한국 군인들이 주민을 한데 모은 것은 식량을 나눠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변에 중화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오늘은 또 무엇을 나눠주려나 머리를 굴리며 지루한 연설을 참아내고 있었다. “어젯밤 내가 죽은
이의 머리맡에 달걀인지 오리알인지를 놓고 제를 지내는 꿈을 꿨어. 왠지 오늘은 불길해.” 팜티호아 할머니가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지난밤 꿈
얘기를 털어놓았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런 말 하지 마. 말이 씨가 된다고 하잖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지휘관이 연설을
마치고 마을 사람들을 등진 채 몇 발짝인가 걸었을 때였다. 장교의 손짓을 신호로 수풀 속에 숨어 있던 M60 기관총과 M79 유탄발사기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서른 가구 남짓의 주민 135명을 학살하고 집집마다 불을 놓아 온 마을을 초토화하는 데는 불과 2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팜티호아 할머니는 자기 쪽으로 날아오는 수류탄을 보고 아이들의 몸을 감싸며 땅 위로 바싹 엎드렸다. 첫 번째 수류탄은 할머니의 허리를 맞고 튕겨
나갔고 두 번째 수류탄이 할머니 발밑에서 터졌다. 눈앞이 하얗게 변하면서 의식도 아득해졌다. 학살이 끝나고 몇몇 생존자들은 이웃 마을 사람들이
가져다준 돗자리로 시신을 둘둘 말아 얕게 판 구덩이에 묻고 작은 돌멩이나 막대기로 표시를 했다. 하지만 그다음 날 한국 군인들이 D-7 불도저
2대를 끌고 다시 마을에 들어와 엉성한 무덤들을 짓밟고 미처 묻지 못한 주검들마저 밀어버렸다. 지금까지도 마을 사람들은 “두 번 죽임을
당했다”며 시신과 무덤까지 훼손한 이 사건을 한국군의 가장 비인간적인 행위로 기억한다. 베트남 쪽의 자료에는 “커다란 대나무 채반과 긴
나무젓가락을 들고 흩어진 뼛조각과 살점을 주우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고 당시의 참혹했던 광경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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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학살로 할머니는 다섯 살배기 딸과 열 살짜리
아들, 그리고 한집에 살던 사촌올케와 뱃속의 아기, 아직 어미 젖을 떼지 못한 젖먹이,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까지 세 명의 종질을 잃었고
자신도 수류탄에 두 발목이 잘려나가는 중상을 입었다. 만삭이던 사촌올케는 한국군에게 강간을 당한 뒤 끝내 죽임을 당했는데 배가 갈라져 태아와
창자가 밖으로 쏟아져 나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열네 살이던 할머니의 맏아들 럽은 다낭에 머슴살이를 가 있었고 열한 살이던 둘째 아들 틴은
호이안에서 남의 집 농사일을 거들고 있어 학살을 면했다. 가족의 불행은 계속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럽은 황무지로 버려진 땅을
개간하다 불발탄에 두 눈을 잃어 장님이 되었다. 가난에 진저리를 치던 틴은 보트피플이 되어 조국을 떠나면서 가족과 생이별을 하게
된다.
나도 어느 글에선가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썼던가. 살아남아 ‘생존자’로 불리었던 할머니는 “목숨이 붙어
있다 뿐이지 산송장이나 다름없다”며 도리질을 치곤 했다. 그래도 산목숨은 또 살아야 해서 비럭질까지 나서야 했던 할머니를 떠올릴 때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는 유족들도 그의 영정을 부여잡고 울부짖는다. “운이 좋았던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한국군들은
시신과 무덤을 불도저로 밀어버린 것도 모자라 마을까지 깡그리 쓸어버려 하미를 풀 한 포기 없는 허허벌판 모래밭으로 되돌려 놓았다. 그러고 나서야
병사들이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부상자들을 야영지의 막사 같은 곳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총상으로 머리에서 뇌수가 흘러나온 사람, 배에서 창자가
비어져 나온 사람, 수류탄에 팔다리가 잘려나간 사람, 온몸에 화상을 입은 사람 등 썩어가는 육신이 내뿜는 악취가 진동을 하던 그곳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나환자촌’과도 같았다고 할머니는 전한다. 거기에는 의사는커녕 약품도 없었고 그 어떤 치료도 없었다. 할머니의 잘린 발에도 구더기가
하얗게 슬어 가슴까지 꼬물꼬물 기어올랐다. 무엇보다 할머니를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전신에 총상과 파편상, 화상까지 입은 어린 딸의
신음소리였다.
막사의 부상자들이 다낭 항구에 정박해 있던 독일 의료선으로 보내진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이나 지난 3월2일이었다고
할머니는 기억한다. 바다 위의 병원으로 이송된 할머니는 바로 수술실로 옮겨져 다리를 절단했고 딸은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엄마, 날 버리고 가지
마.” 축 늘어진 딸이 겁먹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작은 손으로 엄마의 옷자락을 감아쥐고 놓지 않았다. 마취에서 깨어난 할머니는 다리가
잘린 몸으로 온 병원 바닥을 기어다니며 딸아이를 찾아달라고 아무 다리나 붙들고 늘어졌다. 병원에는 죽은 베트남인 사체들을 바다에 내던진다는
흉흉한 소문도 돌았다. 그럴 수는 없다고, 굶주린 날치 떼에게 사람 몸을 던져주는 그런 반인륜적인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할머니는 제발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결국 한 베트남 간호사가 그를 달래 병상으로 데려가서는 아이가 이미 죽었으며 다낭종합병원에 안치되었다고
말해 주었다. 다낭병원으로 이송된 주검은 하루 동안 가족이 인수하지 않을 경우 무연고자로 처리돼 행정관청이 매장하도록 되어 있었다. 어머니로부터
여동생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럽과 틴이 시신을 찾아나섰지만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한국 조문객 찾아올까 4일장으로 치른
장례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었다. 가족을 잃고 삶의 터전마저 잃어버린 사람들은 산 채로 망령처럼
떠도는 삶을 몇 년이고 이어가야 했다. 할머니의 가족도 남의 집 더부살이를 하면서 하루하루 눈칫밥으로 연명하며 힘겹게 버텨가야 했다. 장남인
럽은 다낭에서 미군들이 먹을 프랑스빵을 구웠다. 할머니는 두 발목이 잘린 다리로 강중강중 종일 다낭 시내를 돌고 미군 부대를 전전하며 동냥길에
나섰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따이한’들이 던져주는 돈도 마다하지 않고 받았다. 하지만 한국 군인들에게 받은 돈은 꼭 따로 챙겼다. 할머니는 그
돈을 형제 앞에 주욱 늘어놓고 “자, 봐라! 내가 따이한에게 구걸해 온 돈이다”라고 매섭게 말하곤 했다. “이것은 네 여동생의 목숨값, 이것은
네 남동생의 목숨값, 그리고 이것은 네 아주머니의 목숨값….” 럽의 기억 속에는 입속말로 망자들을 부르며 꾸깃꾸깃한 돈을 손바닥으로 반듯하게
펴서 한장 한장 세던 어머니의 모습이 평생 지워지지 않을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할머니의 장례는 4일장으로 치러졌다. 베트남은 보통
3일장을 지내는데 행여 멀리 한국에서 찾아오는 조문객이라도 있을까 하여 인민위원회와 하미유가족협회가 유족들과 논의해 결정한 것이다. 베트남의
상도(喪道)와 상례(喪禮)를 잘 알지 못하는 나는 어떻게 해야 망자를 제대로 애도하고 남겨진 자들을 위로하는 건지도 잘 몰랐다. 외국인
문상객이라고 유족들은 물론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나를 세심히 배려하고 극진히 대접하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하룻밤이라도 할머니 곁에 더
오래 머무르고 싶었다. 마침 다음날이 발인이기도 해서 나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밤을 지새워 빈소를 지키기로 했다. 한국의 장례식장처럼 질펀한
술판도 없고 베트남 어디에나 흔한 카드판도 없었지만 밤이 깊어도 사람들은 흩어지지 않고 도란도란 둘러앉아 생전의 고인을 추억했다. 사람들은
얘기를 나누다가도, 잠시 평상 위에 고단한 몸을 눕혔다가도 간간이 제단으로 달려가 향을 켜들고 죽은 이의 안식을 기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향불은 가장 검은 밤에 가장 환하게, 바람이 불수록 더욱 붉게 타오르며 밤새 끊이지 않고 할머니의 영정을 비추었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동냥길에
나섰다
“따이한에게 구걸해온 돈이다
네 여동생, 남동생의 목숨값…”
아들은 이 모습을 평생
기억했다
10살 응우옌반펀, 5살 응우옌티씨
‘살육의 역사’ 문구 수정 압력에
연꽃으로 덮은 위령비에
새겨진
할머니 아들과 딸의 이름
죄지을 기회도 없던 이름 앞에서
나는 한참을 엎드려
있었다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고, 나 같은 사람 없어야 한다고, 할머니는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그
군인의 나라에서 온 이방인의 두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었다. 손주를 시켜 야자나무 열매를 따오게 하고 일본인이 선물한 귀한 차를 꽁꽁 숨겨
두었다가 우리에게 내주곤 했다. 너무도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에 울음이라도 터뜨리면 “아무 죄도 없는 젊은것들이 뭣 하자고 여그까정 왔어? 이를
어째, 이 불쌍한 것들을 어째!” 하며 할머니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떠나는 이들 한명 한명 안아주며 뺨에 입을 맞추고 등짝을 쓸어주었다.
“어여 가, 어여 가!” 갈 길 멀다 걱정하면서도 정작 당신은 울담을 떠나지 못하고 우리가 고샅을 다 빠져나올 때까지 불편한 다리로 서서
하염없이 눈바래움(눈배웅)을 해주었다.
지난 3월 하미학살 45주년 위령제에는 처음으로 한국인들이 참석했다. 내일, 어쩌면 하미의
팜티호아 할머니가 돌아가실지도 모른다고, 가족을 불귀의 객으로 떠나보내고 두 발목이 날아간 채 오랜 시간을 고통 속에 살아온 할머니를 끝내 한을
안은 채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비장한 걸음으로 찾은 자리였다. 그 일년 전인 2012년 1월 한국의 평화박물관 베트남 방문단이 하미 마을을
찾았을 때 할머니는 눈물로 호소했다. 지난 세월 마을 사람들이 수십 번씩 위령제를 지내는 동안 한국 사람들은 단 한 번도 찾아온 적이 없다고,
저 억울한 135명의 넋들을 꼭 한 번만 달래주라고. 그곳에 가서 우리가 마주한 것은 45년이 지난 지금도 불에 덴 자국처럼 남아 있는 하미의
깊은 슬픔이었다. 위령제가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고개를 돌리고 귀를 막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어디
그늘에라도 몸을 숨기고 싶었다. 거기, 하미에서 우리는 진실, 용서, 화해란 얼마나 사치스러운 단어인지를 절감했다.
위령비 속
1968년생들은 모두 ‘아무개’하미 마을에는 2000년 한국의 월남참전전우복지회에서 세운 비문 없는 위령비가 서 있다.
아니, 비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원래 위령비 뒤편에는 추모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비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제부터
모래언덕과 그 위에 자라는 나무는 살육의 역사를 기억하리라.” 한국 정부와 참전군인 측에서는 이 비문을 문제 삼아 갖가지 회유와 압력을 가하며
수정을 요구했다. 유가족과 마을 주민들은 “이건 우리의 역사이고 과거이며, 진실”이라며 이를 거부하고 강력히 반발했지만, 결국 베트남 중앙정부의
압박은 이기지 못하였다.
주민들은 “단 한 자도 고칠 수 없다”며 비문을 없애는 대신 커다란 연꽃무늬의 대리석으로 덮어버린다.
언젠가 다시 걷어낼 수 있는 날이 오리라 희망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하미 학살이 ‘두 번 죽임을 당한’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면 하미 위령비는
그 기억마저 말살하려는 ‘2차 학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진실은 또다시 묻히고 마을 사람들의 가슴속엔 새살이 돋는 게 아니라 새로운 상처가
생겨났다. 그로부터 십년도 더 지나서 마을 인민위원회는 진실이 다시 햇빛을 보게 되길 바라는 주민들의 염원을 담아 하미 위령제에 참가한
한국인들에게 종이에 인쇄한 비문을 선물한다. 비문을 받아든 우리는 그냥,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버렸다. 눈앞이 캄캄했다. 우리가 짊어져야 할
‘업’이 어디까지일지 도무지 감당할 엄두를 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팜티호아 할머니는 알고 있었던 걸까? 그래서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비문으로
또다시 마음을 다칠 우리들을 염려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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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이 내려졌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주가 옷자락에
흙을 받아 더듬더듬 관 위에 세 번 뿌렸다. 흙이 ‘좌르르’ 흘러내리는 소리가 가슴에서는 ‘와르르’ 돌탑이 무너지는 소리처럼 크게 울려왔다.
마을 사람들이 화환에서 꽃을 뽑아 할머니의 관 위로 뿌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내 손에도 노오란 국화 꽃잎을 한 움큼 쥐여주었다. 이제 이 세상의
한은 우리에게 다 주고 나비 날갯짓처럼 가볍게 가시라. 전쟁도 없고 고통도 없는 그곳에서는 말짱한 다리로 훠이훠이 자유로이 다니시라. 꽃잎들은
바람도 없는 허공을 날다가 함박눈처럼 할머니의 관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마을 사람들은 꽃이 듬성듬성 뜯겨 나간 화환에서 근조 리본을 떼어내
문구가 위를 향하도록 해서 할머니의 관 위에 보를 덮듯 가지런히 늘어놓았다. 아프고 슬프고 죄송해요. 명복을 빌어요. - 곶자왈제주학교…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베트남과 한국을 생각하는 시민모임. 장지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문구들을 한자 한자 읽어내리는데 내게는 그것이
할머니와의 경건한 이별의식처럼 느껴졌다.
발인이 끝나고 잠시라도 사람들이 없는 곳에 혼자 있고 싶어진 나는 하미 위령비를
찾았다.
82 Nguyen Van Phan 1959
114 Nguyen Thi Xi 1963
수없이 이 비
앞에 섰지만 한 번도 눈에 띄지 않았던 할머니 아이들의 이름이 먼저 눈에 화악, 들어왔다. 응우옌반펀 1959년생, 당시 열 살이던 할머니의
아들, 그리고 응우옌티씨 1963년생, 당시 다섯 살이던 할머니의 딸이다.
130 Nguyen Thi Hong
1967
131 Nguyen Van Teo 1967
132 Nguyen Van Tu
모두 1967년에
태어난, 응우옌티홍, 응우옌반떼오, 응우옌반뚜라는 아명으로 불리었던 두 살배기 아이들. 그들은 정식 이름을 지어주기에는 너무
어렸다.
133 Nguyen Vo Danh 1968
134 Nguyen Vo Danh 1968
135
Nguyen Thi Vo Danh 1968
학살이 일어나던 그해, 1968년에 태어난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보자인(Vo Danh),
한자로는 무명, 우리말로는 ‘아무개’. 갓 태어나 미처 이름을 지어줄 틈도 없었던 갓난아이들이다. 설명을 보태자면, 응우옌은 성, 이름자에
티(Thi)가 들어가면 여자, 위령비 맨 오른쪽의 맨 끝줄에 있는 아이는 갓 태어난 무명의 여아였다. 짐작하겠지만 82, 114, 130,
131, 132…는 일련번호이다. 위령비에는 1880년에 태어난 할머니부터 1968년에 태어난 무명의 아기까지 그날 희생된 135명의 명단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
거기, 하미 위령비에서, 할머니의 장례식 내내 터지지 않던 울음이 솟구쳐 올랐다. 단 한 번도 죄지을 기회를
갖지 않았던 이 아이들의 이름 앞에 나는 석고대죄하는 마음으로 한참을 엎디어 있었다. 팜티호아 할머니는 ‘용서’라는 마지막 선물을 남기고 홀연
떠났지만, 떠나보낸 기억이 없는 마음속에서, 아직 살아 있는 할머니는 “갈 길 멀다. 어여 가, 어여 가!” 하며 자꾸만 내 등을 떠밀었다.
꽝남 하미마을/ 구수정 전 <한겨레21> 통신원·호찌민대 역사학 박사
그들이 세운 ‘증오비’를 아십니까
[한겨레]
[토요판] 커버스토리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의 업보1930년대엔 만주에서
1950년대엔 지리산에서
1960년대엔
베트남에서…
게릴라 접촉 기회 없앤다며
마을 깡그리 태우는 경우 많아
위안부 할머니 성금으로
세운
평화박물관이 장학사업 앞장
베트남평화의료연대는 진료활동
페이스북에서 자발적으로
모인
시민모임도 적극적 후원활동“우리는 적에게 용감하고 무서운 한국군이 되자, 우리는 월남인에게
예의 바르고 친절한 따이한이 되자…”(주월한국군 참전 3훈5계 중)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한국군은 낯선 행성에 착륙한 우주비행사
같았다. 정글에선 희미한 길을 찾다 방향을 잃고, 마을에선 비밀 보급품 저장소를 찾기 위해 쌀항아리와 솥단지를 더듬어야 했다. 땅속에 미로처럼
파놓은 땅굴을 발견한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1965년 한국군이 첫 전투부대를 파견했을 때부터 이미 남베트남에 거점을 둔
게릴라단체인 ‘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은 주민들을 정치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미군처럼 한국군 또한 적군과 민간인을 구분하기란 힘들었다.
경계는 때론 모호했고 주민들은 표변했다.
민간인 학살이 집중된 시기 중 하나는 1968년 1~2월 이른바 ‘구정 대공세’ 직후다.
지난 6월16일 세상을 떠난 팜티호아 할머니가 한국군의 공격으로 두 다리가 잘린 시점도 이때다. 1월31일 북베트남(월맹)과 베트남민족해방전선
쪽은 ‘휴전 기간’인 구정 때 14개 성의 주요 도시에서 대공세를 벌였다. 미군과 한국군은 곧바로 반격했지만 많은 희생자가 나면서 미국에서는
반전 여론이 커지고 전쟁의 주도권은 북베트남으로 넘어간다. 베트남민족해방전선에 대해서는 게릴라의 활동무대를 없애는 방식으로 전술이 바뀐다.
게릴라와 접촉할 기회를 차단하고자 주민들을 자연취락에서 소개해 재정착촌으로 이동시킨다.
이런 방침은 이미 1966년
주월한국군사령부가 펴낸 전훈집에 드러나 있었다. 부락은 “모든 적 활동의 근거지”이며 “게릴라의 보급, 인적자원 및 정보수집의 근원은 부락이며,
베트콩 하부구조의 기반은 부락과 주민”이라고 규정했다.
민간인 학살이 벌어진 마을 주민의 증언을 들어보면 그 방식은 무참했다.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근현대사를 통과한 우리 국민에게 ‘극우반공주의’가 자리잡았다고 말한다. 한국전쟁 전후 형성된
분단체제와 내외부의 격한 대립 속에서 ‘빨갱이 처단’의 심리적 기제가 싹텄다. 잔혹한 일을 벌이면서도 죄의식은 중화될 수 있었다. 한 교수는
“특히 한국군이 공격당할 경우 보복심리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선 없는 전쟁’에서 ‘내부의 적’을 처리하는 방식은
이미 한반도와 주변에서 실행된 적이 있다. 1930년대 일본군의 만주 항일무장투쟁 소탕작전 그리고 한국전쟁 직후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이
베트남인 학살이 벌어진 현장과 다르지 않다. 지리산에서는 빨치산과 연계된 산간마을 주민을 소개해 보급로를 차단한 뒤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벌였다.
1970년 미국 <뉴욕 타임스>에 관련
기사가 실린 적도 있지만, 국내에서 우리 군의 민간인 살상을 언급하는 일은 금기였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이듬해인 1999년에야
<한겨레21>의 보도로 수면 위로 떠오른다.
당시 베트남에 머물던 구수정 <한겨레21> 통신원은 베트남 정부의
문서를 토대로 한국군이 베트콩 수색·토벌작전을 벌였던 중부 5개 성(카인호아, 빈딘, 푸옌, 꽝응아이, 꽝남)의 마을들을 돌며 증언을 수집한다.
베트남 정부 추산 희생자만 5000명이었다. 이듬해 전쟁에 참여한 김기태 예비역 중령의 증언이 나온다. 2002년 6월에는 퐁니·퐁넛
마을(1968년 2월12일), 호앙쩌우 마을(68년 10월22일), 프억미 마을(69년 4월15일)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이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NARA) 비밀해제 문서를 통해 드러난다.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은 세계적인 이슈로 떠오른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1년 한국을 방문한 쩐득르엉 베트남 주석에게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인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밝힌다. 민간인 학살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에둘러 사과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 부총재였던 박근혜
대통령은 이튿날 개인 명의의 성명을 내어 “(대통령의 발언은) 대한민국의 명예에 못을 박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 대통령의
사과는 양국의 외교협상에 따라 나온 것은 아니었다. 1992년 두 나라의 수교 때 전쟁배상 문제가 제외된 이래 전쟁 문제는 애초부터 두 나라의
현안이 아니었다. 베트남이 전쟁을 기본적으로 미국과의 관계로 간주한데다 승전국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기조는 지금까지도 계속된다. 양국은
민간인 학살 조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은 ‘불완전한 진실’에 가깝다.
진실에 다가서려
노력한 곳은 시민단체였다. 1999년부터 베트남 양민학살 진상규명위원회, 베트남 진실위원회,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등의 활동을 하면서
평화운동으로 발전시켰다. 특히 전쟁 피해자인 군대위안부 출신 고 문명금 할머니의 성금을 종잣돈으로 설립된 평화박물관은 2000년대 초반부터
베트남에서 어린이도서관 건립, 장학금 지원 등의 사업을 벌였다. 치과의사와 한의사들로 구성된 베트남평화의료연대는 매년 베트남을 방문해 진료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인터넷 페이스북에서 자발적으로 결성된 ‘베트남과 한국을 생각하는 시민모임’은 피해 마을의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을 모금하고
있다. 베트남에서 시작한 평화운동은 일상으로 확장됐다.
“아이들이 팜티호아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가장 마지막에 만난
한국인이었어요. 35년 전 일을 들은 아이들이 울었지요.”
여행 대안학교인 ‘로드스꼴라’의 김현아 대표교사가 3일 말했다. 아이들은
매년 한달 베트남을 여행한다. 그때 빠지지 않는 것이 민간인 학살지를 방문하는 것이다. 지난 4월엔 학생 13명이 하미 마을을
찾았다.
아이들은 베트남에서 ‘증오비’도 목도했다. 한국군의 살상이 벌어진 마을 주민들이 세운 것이다. 베트남 전역에 약
50~60개가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바다 건너 한국에는 베트남전 참전탑이 세워진다. 참전군인 단체 등에서는 2000년대 들어 ‘월남 참전탑’
설립 붐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앞을 비롯해 충남 부여, 강원도 홍천, 전북 전주와 정읍 등에 참전탑이
있다.
베트남전쟁의 역사는 우리에게 어떻게 남아야 할까? 베트남 정부도 한국 정부도 이 일을 들추길 꺼린다. 평화박물관은 호찌민의
베트남전쟁기념관과 공동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국내의 베트남전 참전기념탑과 베트남의 증오비 사진을 모아 전시하는 것이다. 두 나라는 같은 사건을
여전히 다르게 기억한다. 두 기억은 어떻게 접점을 찾을까.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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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혼란' 이집트, 신임 총리 임명 없던일로..뽑았다가 하루만에 취소
- 극단적 이슬람주의 정당 반대로 유보[이데일리 염지현 기자] 군부 쿠데타로 대통령이
물러난 이집트 정국이 표류하고 있다.
과도 정부를 이끌 신임 총리가 지명됐지만 극단 이슬람주의 정당이 이에 반대해 하루만에 지명이
철회되는 등 정치 행보가 파행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7일(현지시간) 극단 이슬람주의 세력 살라피스트가 창당한
이집트 제2정당 누르당 등이 총리 지명을 반대해 이를 유보한다고 보도했다. 임시 대통령 아들리 알 만수르(67) 전(前) 헌법재판소 소장이 과도
정부 새 총리로 무함마드 엘바라데이(71·사진) 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을 지명한지 하루 만에 결정을 번복한 것이다.
2005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외교관 출신인 엘바라데이는 지난 6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아들리 알 만수르 임시 대통령으로부터
내각을 구성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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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현지시간)
이집트 과도정부 총리에 지명된 것으로 보도된, 범야권 그룹 구국전선(NSF) 지도자 무함마드 엘바라데이(71)가 지난 1월 NSF 회의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 |
반정부세력
연합체 타마로드도 “만수르 임시 대통령과 타마로드가 엘바라데이를 신임 총리로 임명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총리 지명에 이슬람
정당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총리 지명이 유보됐다. 총리 지명 소식이 전해진 바로 다음날 이집트 정부는 누르당의 반대로 지명을 철회했으며 현재 임시
정부가 누르당과 정치적 협력을 도모하고 있다고 말을 바꿨다.
축출된 무함마드 무르시 이집트 대통령 지지기반인 무슬림형제단이 만든
자유정의당 관계자는 “우리는 쿠데타를 거부하며 엘바라데이의 총리 지명을 포함해 모든 정치적 결정을 반대한다”고 밝혔다.
한편
이집트에서는 무르시 대통령 취임 1주년을 맞은 지난달 30일부터 대통령 퇴진 운동이 일어나 나라 전체가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집트
군부는 무르시 정권이 독단적으로 이슬람 정책을 추진하고 경기 부양에 실패했다며 지난 3일 대통령을 축출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 5일에는 무르시
반대파와 지지세력이 이집트 전역에서 충돌해 최소 4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염지현
(labri@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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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과 재미” 요즘 해외서 뜨는 운동 4가지
지루함에서 탈출하는
계기 같은 운동을 반복하다보면 지루할 수가 있다. 이때에는 뭔가 다른 새로운 것을 시도해볼 필요가 있다. 건강
정보 사이트 ‘헬스 닷컴(Health.com)’은 미국과 유럽 등에서 최근 유행하고 있는 운동 4가지를 소개했다.
◆발레=발레리나가 되려는 목표가 없다면 싶게 배우기 힘들었던 발레. 이런 발레가 운동법의 하나로 각광을 받고 있다. 수평봉으로
불리는 발레 바를 잡고 하는 기초 동작이 주를 이룬다. 이런 발레의 동작을 배우다보면 유연성과 하체 근력, 균형 감각이 향상된다. 또한 아름다운
각선미와 어깨 라인이 만들어진다.
◆공공자전거 타기=바이크쉐어링으로 불리는 자전거 공유시스템은 현재 전 세계 493개 도시에
구축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도 서울, 부산, 대전, 창원 등 10개 자전거 거점도시를 중심으로 공공자전거 시스템이 확충되고 있다. 자동차에서 나와
공공자전거를 빌려 도시를 달려보자. 몸무게가 약 68㎏인 사람이 한 시간 정도 자전거를 타면 약 280칼로리를 태울 수 있다.
◆크로스핏=여러 종목의 운동을 섞어서 하는 크로스 트레이닝과 신체를 단련하는 피트니스를 합친 새로운 개념의 운동 방법이 바로
크로스핏이다. 크로스핏 프로그램 중에는 턱걸이 100개, 팔굽혀펴기 100개, 윗몸일으키기 100개 그리고 스쿼트 100개를 한 번에 다
소화하는 것도 있다. 이런 크로스핏을 제대로 따라하기 위해서는 기초 체력이 우선이다.
◆테마 레이스=5㎞ 달리기를 한 뒤 결승선에
들어오면 그 때부터 댄스파티가 열리는 식의 테마 레이스가 각광을 받고 있다. 달리기를 하는 동안 음악이 울리고, 불빛 쇼가 펼쳐진다. 어떤
주제를 가지고 마음 맞는 사람끼리 즐겁게 체력 단련을 할 수 있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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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은 못 했지만, 박근혜는 할 수 있다!
[3인1책 수다] 김욱의 <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 [프레시안 김용언
기자]
2012년 대선을 앞둔 겨울, 법학자이자 서남대학교 교수인 김욱의 관심사는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가'라기보다 "대선후보들의 '사과'"였다. 그는 곧장 책을 쓰기 시작했다. 주변의 압력에도 모른 척 시치미를 뗄 수 있는
상황에서 굳이 머리 숙여 공식적으로 사과했던 그 정치인들을 둘러싼 역학관계를 통해, "우리가 피상적으로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인간적·정치적·역사적·이념적인 뭔가"를 밝혀내고자 하는 시도였다. 그 결과물이 <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김욱 지음, 개마고원
펴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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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김욱 지음, 개마고원 펴냄).
ⓒ개마고원 |
월 35만원으로 생계를 어렵게 꾸리던 위안부 할머니
김학순은, 일본 정부가 민간차원의 위로금을 1인당 200만 엔씩 지급하겠다며 접근하자 "돈으로 해결할 사안이 아니다. 일왕의 백배사죄가 없는 한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35쪽)라며 거절했다. 장기독재 끝에 1960년 3.15 부정선거마저 저질렀던 이승만 전 대통령은 4.19혁명 이후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3.15 정부통령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다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다"(79쪽)라며 남의 일처럼
성명을 발표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5.18민주화운동에 대해 "본인은 당시의 정보책임자로서 이 사태가 초동진압 단계에 있어서의 계엄군의
강경진압과 일부 출처를 알 수 없는 악의에 찬 유언비어에 자극받은 일부 시민들의 과격시위가 그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판단을 하고
있다"(86쪽)라고 뻔뻔하게 진술했다. 김욱 교수는 한국 현대사의 아픈 상처로 남아있는 고비마다 사과와 거짓말과 침묵과 용서 사이에서
선택해야했던 이들의 행로를 추적하며 이 책에서 낱낱이 분석하고 가차 없는 평가를 내린다. 그러면서 "과거의 결과이자 미래의 원인, (…) 현재의
투쟁과정"인 '정치적 사과'를 어떤 식으로 끌어내고 그 발언을 지켜내야 할지에 대한 제언을 덧붙인다. 바로 이 책, <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가 이번 '3인 1책 수다'의 대상 도서다.
도서평론가 이권우(한양대
특임교수), 서평가 이현우(필명 '로쟈'), <프레시안> 기자 김용언 세 명이 다양한 주제의 책들을 선정하여 같이 읽고 토론하는
자리, '3인 1책 수다'는 인터파크도서 웹진 <북앤>(☞바로 가기 )
에 동시 게재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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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현우, 김용언, 이권우.
ⓒ프레시안(최형락) |
이권우 : <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의 부제는 '박근혜·문재인의 사과가 말해주는 것들'입니다. 정치가들이 역사적 과오에 대해 사과하는 문제, 그리고 그
과오를 용서하는 문제를 다룬 책이지요. 매우 중요하고 민감한 부분이지만 사실 대중적으로 깊이 있게 논의되지 않은 주제를 저자 김욱 교수가 한
번에 써내려갔습니다.
저널리즘과 단행본의 차이가 여기 있습니다. 시사적인 주제를 단기간에 보도하는 저널리즘과 달리, 단행본은 그
주제를 보다 깊이 있게 파고들지요. 일본에서는 이렇게 능동적이고 빠르게 단행본을 펴내는 게 일반적인데, 우리에겐 아직 좀 덜 익숙한 경향입니다.
<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는 그런 의미에서 반가운 책이었습니다. 두 분은 어떻게 보셨는지요.
이현우 : 제목에서 받은 인상보단 책이 훨씬 재밌었고요. 정치적 사과라는 단일한 주제로 한 권 분량을 죽
밀고 가는 힘이 느껴져서 개인적으로 좋았는데, 생각만큼 책이 주목받진 못했다고 하니 아쉽습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작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가 각각 사과했던 내용에서 촉발되어 책을 기획했다고 밝힙니다. 대선 전에 집필을 시작하여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쓴 책이고요. 한때 대선 이후 영화 <레 미제라블>이 '멘붕(멘탈 붕괴) 치유'라는 명목으로 흥행했었는데, 이 책 역시
결코 비관적이지 않은 결론으로 마무리하고 있어서 그런 치유 성격에 좀 부합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김용언 : 저도 2012년 대선에 대한 다른 각도의 결산이라는 측면에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당시
5.16쿠데타에 대한 박근혜 후보의 사과는 크게 보도가 되었는데, 민주당 분당에 관한 문재인 후보의 사과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던 것 같아요.
저 역시 문재인 후보의 사과가 어떤 면에서 의미 있는지 잘 이해 못한 상황에서 이 책을 읽었고, 민주당 분당이 영호남 갈등의 중요한
열쇳말이었음을 새롭게 알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정치적 사과의 시작을 일제 강점기 청산, 즉 이광수와 최남선 등의 친일 작가로부터
시작하며 방점을 찍었다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책 자체가 한국사회가 일제 강점기의 잔재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박하게 한국전쟁을
겪었고 그 이후 이데올로기 대립의 장으로 존속되어왔음을 일별할 수 있는 좋은 자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근혜가
사과했다이권우 :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의
사과부터 먼저 얘기해볼까요. 박근혜 후보는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과오에 대한 사과를 지속적으로 요구받았는데요. 연좌제로 옭아매는 시대도
아닌데 딸이 아버지를 대신해 사과해야 하냐를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죠. 어쨌든 박근혜 후보는 5.16과 유신, 인혁당 사건 등 과거사에 대해 공식
사과했는데요.
"5.16,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이 헌법 가치를 훼손하고 대한민국 정치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이로 인해 상처와 피해를 본 분들과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그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제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 94쪽)여기 대해 저자는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일단
'5.16은 정통성이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사실에 대해 놀랐다며 그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요. 저자의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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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평론가·한양대 특임교수 이권우. ⓒ프레시안(최혀악) |
이현우 : 2012년 9월 24일이었죠. 박근혜 후보의 사과가 대대적으로 보도됐을 때 분통을 터뜨린
극우주의자 조갑제의 반응도 인용됐는데요.
"박정희가 만든 역사는 박정희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들이
함께 만든 역사인데, 총체적으로 5.16과 10월 유신을 스스로 부정함으로써 박근혜 씨가 중대한 위기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정체성의
위기다."(168쪽)
조갑제조차 "박근혜 씨의 사과에는 진정성이 없다. 표를 얻기 위한 정치쇼이다"(169쪽)라고
폄훼할 만큼, 상당히 파괴력이 컸던 정치적 사과였다는 거죠. 아무리 정치적 이해관계가 엇갈린 정략적인 사과라 하더라도 모든 정치적 사과는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 속내와 무관하게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정치적 전리품이다, 그 의미를 계속 지켜가는 게 중요하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저는 이런 정치적 사과가 갖는 정치적 의미를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더 잘 기억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빚을
받으려면 빚을 줬다는 걸 기억해야 하잖아요? 저자의 결론처럼 궁극적으로 정치가 역사를 이길 수 없다고 할 때 그 역사의 승리를 보존하기 위한
중요한 방책이 기억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용언 : 저자의 실리적인 현실 분석과 평가
자체에 대해서는 매우 흥미롭게, 배우는 심정으로 동감하며 읽었습니다. 하지만 역사가 정치를 이기고야 말 것이라는, 지치지 않는 민중에 대한
낙관적인 결론은 아직까지 확신이 가질 않습니다. 결코 아무런 반성을 하지 않았던, 정치적 변화가 아무런 현실적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현재까지도
'살아있는 자'로서 권력을 누리고 있는 전두환 같은 사람이 있잖아요.
이현우 :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심신장애적 사과를 한 적은 있지요.
(웃음)
김용언 : 네. 30년이 넘도록 그렇게 어떤 반성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누릴 바만 즐기며 살고 있지요.
과연 역사가 정치를 이기는 것일까, 이 좁은 나라에서 지금껏 정치적·경제적 인맥이 촘촘하게 얽힌 채 서로의 이익 때문에 현재의 체제를 유지하려는
끈질긴 '노력'이 지속 중인데, 정말 거시적인 관점으로 조금씩 진보가 이뤄지고 있다며 확신할 수 있을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이현우 : 2007년 당시 박근혜는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검증청문회에서
"5.16은 구국의 혁명이고, 유신은 역사의 평가에 맡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완강한 태도가 2012년 바뀌었다는 거죠. 그게 저자
보기에는 나름대로 역사의 진보이자 역사의 힘을 보여준 계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역사가들이 자주 쓰는 표현이 있지요. 역사가 지그재그로 좌충우돌할
순 있지만 궁극적으로 진보할 거라는 신뢰, 저자인 김욱 교수 역시 그 같은 신뢰를 이야기합니다.
제 의견으로는, 100퍼센트
객관적인 신뢰라기보다는 주관적인 결단도 포함되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즉 역사가 승리하게끔 만들어야 한다는 당위적 의미 역시 포함되어 있다고
봅니다.
이권우 : 박근혜가 박정희의 과오에 대해 사과하지 않을 거라고
다수가 생각했었고, 설령 사과한다 하더라도 진정성이 있겠냐 하는 반응이 많았는데 그런 예상이 틀렸던 겁니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사과입니다. 102쪽에 보면 "민주주의 제도는 '모든' 정치인에게 진정성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즉 그런 마음이 없더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제도로 강제하는 데 그 핵심이 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정치인의 사과도 "'진성성 있는 마음과 말'이 아니라 '진정성 있는
마음이 없더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말과 행동'"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 거죠.
당시 박근혜 후보가 사과 발언을 한 직후
부산시당에서 열린 대통령선거대책위 출범식에 참석해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맞춰 '말춤'을 춤으로써 진정성에 대한 공격을 받았지요. 하지만 저자는
그에 대해 "그녀의 진정성이 아니라 그녀의 사과 언설이 그 자체로 역사의 전리품"이라고 못 박습니다. 일반적 관점과는 다르죠.
물론
이명박 전 대통령 같은 예도 있습니다. 2008년 쇠고기 협상에 반발하여 대대적인 촛불시위가 일어났을 때 "아무리 시급히 해결해야 할 국가적
현안이라 하더라도, 국민들이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또 국민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잘 챙겨봤어야 했습니다. 저와 정부는 이 점에 대해 뼈저린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21쪽)라고 사과했지만, 2010년 5월에 이르면 "많은 억측들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음에도 당시 참여했던 지식인과
의학계 인사 어느 누구도 반성하는 사람이 없다"(30쪽)면서 적반하장의 무책임한 발언을 했죠. 이런 예들 때문에 정치적 사과에 대한 진정성이 늘
의심받으며 평가절하되긴 했습니다만.
이현우 : 보통 냉소적인 지식인이나 대중들은
정략적인 사과에 진심이 담겨있지 않다면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받아들였죠. 하지만 저자는 그런 정치적 사과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고,
중요한 의미를 갖는 걸로 우리가 계속 강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말대로, 정치인들이 자신의 사과를 번복하려 할 때 우리가 계속 상기시켜야
합니다. 정치적 사과를 둘러싼 정치적 투쟁이 필요한 거지요.
식민 통치에 대한 일본의 사과에 관련하여, 지금 자민당 정권에서는
과거의 공식적 사과 발언을 부정하려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사과의 의미를 다시 상기시키고 그 무게를 느끼게끔
만들어야 합니다. 정치적 사과는 역사적 기억 투쟁의 대상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서도 '5.16쿠데타가 명백히 불법적이었으며 정통성이
없다'고 인정한 사과의 내용을, 그 사과 발언을 한 당사자의 진위와 무관하게 우리가 끝까지 충실하게 기억하는 게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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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가 이현우. ⓒ프레시안(최형락) |
이권우 : 45쪽 마지막 단락을 함께 볼까요.
"정치적
사과는 결코 일회성 사건이 아니다. 언제라도 철회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역류할 수도 있다. 양심의 후퇴가 아니라 정치적 힘 관계와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사과를 받는 것보다 사과를 지키는 것이 더 힘들다."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집단이 정치적으로 압박을 가해서, 정치적 사과를 유효하게 하는 정치적 힘을 발휘해야 하는 거죠.
박근혜가 아버지의
정치적 업적이나 과오에 대해 노코멘트로 일관했다면 정치적 힘겨루기에서 사과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지속적으로 아버지 세대에 이뤄진
결과를 업적으로 칭송했고, 역사적 판단이나 사법적 판단에 대해서도 일반적 상식과 어긋나는 발언을 계속 해왔지 않습니까. 결국 정치적 힘의 균형
관계 속에서, 또 대통령이 되기 위한 지지율 상승을 위해서 진정성과 관계없이 아버지에 대한 정치적 사과를 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이현우 :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지 않았던 48.4퍼센트의
사람들에게 그나마 전리품이라고 할 만한 게 박근혜의 사과라는 겁니다.
이권우 :
만일 당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지 않은 사람이 40퍼센트 이하였다면 사과를 안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세력균형이 상당히 팽팽하게
이뤄졌기 때문에 그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정치적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던 듯합니다.
문재인도
사과했다이권우 : 저자는 박근혜 후보의 사과를 두고 '뜻밖의 사과'라
불렀고, 문재인 후보의 경우엔 '은밀한 사과'라고 칭했습니다. 문재인 후보의 사과가 그리 널리 알려지진 않았던
모양이지요?
이현우 : 2012년 9월 27일 일이었는데, 크게 보도되진 않았어요.
당시 문재인 후보가 광주에 내려가 노무현정부 시절의 분당사태에 대해 사과한 부분을 책에서 잠깐 인용하겠습니다.
"제가 관여한 일은 아니지만 그 일(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분당)이 참여정부의 큰 과오였다고 생각합니다. 호남에 상처를
안겨주고 참여정부의 개혁역량을 크게 떨어뜨렸습니다. 지금도 그 상처가 우리 속에 남아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113~114쪽)
이 사과를 보도한 <한겨레> 신문 기사를 보더라도 "문재인, 호남 찾아
'힐링 행보'"라고 제목을 붙인 걸 보니, 사과의 정치적 의미가 당시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에선 박근혜의 사과와 문재인의 사과를 거의 대등한 비중으로 다루고 있어요.
이권우 : 김욱 교수는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분당"은 "반(反) 민주당(분당)사태"라고 설명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역문제 해결"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고,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호남과 영남을 각각 지배하고 있는 상태"로서는 지역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새 출발한 당에 영남인들이 표를 찍어줘야" 했기 때문에 민주당의 "법통"을 끊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민주당을 부정했다고
정리하지요. 동시에 대북송금특검을 수용함으로써 김대중 정권을 청산하는 듯한 입장을 보였기 때문에 호남 사람들의 자존심을 건드린 점도 있었고요.
호남의 압도적 지지를 통해 탄생한 참여정부가 호남의 민심을 배반했던 과거에 대해 문재인 후보가 뒤늦게 사과한 것입니다.
이현우 : 대통령이 자신이 대선 후보로 나섰던, 자신을 당선시켜준 정당과 과격하게 단절하고자 했던 시도는
굉장히 이례적이지요. 세계정치사에서도 유례가 드물법한 사건이었는데,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이 문재인 후보였습니다. 분명 그 분당사태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았을 텐데, 바로 그 사람이 광주에 와서 그 사건에 대해 사과를 한 겁니다.
지금 민주당 쪽에선 친노 세력과의
갈등 관계가 계속 제기되고 있는데요. 박근혜의 사과에 대한 조갑제의 반응과 달리, 문재인의 사과에 대해 친노 세력이 발끈하거나 흥분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게 특이합니다.
실제로 친노들은 거의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들은 문재인의 사과를
수없이 호남에 써오던 선거전략 정도로 생각했던 듯하다. 그래서 그 사과는 마치 호남인들 귀에만 대고 속삭인 은밀한 귓속말처럼 들렸을
것이다.(200쪽)
이권우 : 친노 세력도 호남의 몰표 없이는
정권을 차지할 수 없다는 사실에 동의했기 때문에, 노무현의 호남 홀대에 대한 문재인 후보의 사과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볼 수 있겠지요.
저자는 전반적으로 참여정부 친노 세력들에 상당히 비판적인 날을 세웠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김용언 : 아마 이 책이 다루고자 하는 범위 바깥이기 때문에 포함되지 않았을 거라고 짐작합니다만, 그래도
지역감정을 다루는 이 부분이 다소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자는 노무현의 지역감정 타파 노력이 "아마추어 정치"로 비춰질 수밖에
없던 거친 방식을 비판하고, 이런 식으로 호남으로부터 당연히 민주당지지 몰표가 나올 것을 기대하지 말라고 경고하며, "호남은 스스로를 지켜나가야
한다"(126쪽)고 주장하지요.
좀 거칠게 표현하자면 영남패권주의처럼, 한국에서 몇 십 년 동안 상처를 덧내왔던 호남 쪽 지역감정을
아예 인정하고 정치세력화하자는 주장일 텐데요. 박정희 정권 이후 차별을 수 십 년 동안 감내했던 호남 입장에선 당연한 주장일 수 있겠으나, 그
반대편인 영남의 기득권 제패에 대한 정밀한 분석 없이 호남의 정치세력화 얘기를 하는 건 좀 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현우 : 음, 저는 저자의 결론을 그렇게 보진 않았습니다만. 애초의 문제의식은 공감할 수 있었어요.
지역패권주의에 대한 문제의식 말입니다. 참여정부 당시의 해법이라는 게, 민주당을 지역정당으로 규정하고 소위 발전적으로 해체하려는 노력이었죠.
열린우리당이 민주당으로부터 빠져나오면 민주당이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고 정치적 힘을 잃을 거라는 계산이었지만,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했을 때
성공하기 힘든 시도였습니다. 그 패착이 참여정부 내내 정치적 행보의 발목을 잡게 됐죠. 마지막으로 한나라당에 연정 제안까지 하게
되는데….
모르겠어요. 그게 노무현식 정치의 특징이었을 수 있겠지요. 진정성은 갖고 있지만, 현실성은 없었습니다. 어떤 정치학자가
노무현을 마키아벨리스트라고 불렀는데, 실상 마키아벨리스트와는 거리가 멀었지요. 마키아벨리스트의 전형이라면 올 초 개봉했던 영화
<링컨>에서 묘사되는 링컨 대통령 같은 사람이겠죠. 비록 링컨을 롤 모델로 삼기도 했지만 노무현의 리더십은 서툴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제대로 된 반성과 청산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지난 대선 때 문재인 후보가 공식적으로 사과했다는
걸 저자는 높이 평가하지요. 거기 대해 제대로 음미해야만 현재의 민주당을 포함한 야권의 정치가 좀 변화할 수 있는 계기를 갖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이권우 : 김용언 씨의 문제 제기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121쪽부터
123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지역감정'에 대해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는 친노 진영의 이데올로기를 분석하고 있는데요. 역으로 문재인의 사과와
노무현의 영남출신적인 사고가 호남을 더욱더 정치화하는 게 아니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201쪽에 나옵니다.
나는 이제 대한민국의 개혁·진보세력은 호남몰표에 대한 위선을 벗고 다음 4가지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을 반드시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
첫째, 진보세력은 호남몰표를 원하는가, 원치 않는가?
둘째, 만약 앞으로도 호남몰표를 원한다면 그것을 은밀한
위선적 요구가 아닌 공식적 선거전략으로 선언할 용의가 있는가?
셋째, 만약 앞으로도 호남몰표를 원한다면 호남인들이 무엇을 위해 특정 정당에
호남몰표를 줘야 하는지를 설명해줄 수 있는가? 다른 지역 유권자들은 당연히 계층적 이익을 위한 정책적 투표를 해야 하고, 호남은 '민주화의
성지'이므로 앞으로도 계층적 이익과 상관없이 도덕적 몰표를 던져야 한다는 것이 그 답인가?
넷째, 만약 앞으로는 호남몰표를 원치 않는다면
공개적으로 (특히 선거에 임박해서) 새누리당에도 투표해야 한다고 계몽할 용의가 있는가?호남 몰표는 광주 항쟁 이후에
나타난 정치적 선택이었습니다. 2012년 대선 당시 호남에서 박근혜 후보에게 표를 던진 이들이 10퍼센트 가량 된다는 결과가 상징하는 바가
뭘까요. 호남으로 상징되는 차별에 대한 모순된 태도가 소멸되지 않는다면, 개혁 정권 역시 지속적인 지지를 받을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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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언 <프레시안> 기자. ⓒ프레시안(최형락) |
김용언
: 제가 궁금한 건 이런 종류의 질문이 호남과 관련해서만이 아니라, 영남을 향해서도 같은
비중으로 던져야 하는 게 아니냐는 겁니다. 이 책 앞부분, '왜 사과를 부정할까'라는 챕터에선 전두환 얘기가
나오지요.
1995년 12월, 김영삼정부가 전두환을 구속하자 이름 없는 대구
민초들의 이런 밑바닥 정서가 분출됐다. 그들의 불만인즉슨, "그래도 사람들 말이 전 전 대통령 때는 서민들 살기는 편했다 안캅니까" "전두환
씨가 잘못한 것이야 우리도 알지예. 하지만 모든 일에는 다 절차가 있고 방법이 있는 것 아입니꺼. 이 나라엔 법도
없어요?"(46쪽)
전두환이 나쁜 건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잡아들이는
것에 불만을 표하는 당시 대구 사람들의 정서가 무엇인지, 박정희가 김대중과 맞붙었던 1970년대부터 교묘하게 지역감정을 활용하며 영남인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음을 환기해보면, 박근혜 후보가 대선 직전 아버지의 과오를 반성하는 발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다수의 영남인들이
박근혜를 지지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그 영남패권주의의 근본이 무엇이냐를 물으면서 새누리당과 영남의 관계에 대해 더 파헤쳐야 하는 건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민주당과 호남의 관계에 대해선 저도 공감하고 있고요. 다만 영남 부분이 좀 더 들어갔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현우 : 영남패권주의에
대해서는 덜 비판한 게 아닌가라고 하셨는데, 162쪽부터 164쪽까지 전두환에 대한 아주 시원한 평가가 이어집니다.(웃음) 전두환의 고향인 경남
합천군에선 '새천년생명의 숲' 공원 명칭을 전두환의 아호인 '일해'로 변경했고, 그의 모교인 대구공업고등학교에서 한때 '자랑스러운 동문 전두환
대통령 자료실'을 열기도 했던 에피소드들이 이어집니다.
"대한민국 한쪽에서는 살인마·역적인 인물이 대한민국 다른 한쪽에서는 영웅
대접을 받는다"면서 "지금도 대한민국은 역사 전쟁 중"이라는 저자의 말에 공감했습니다. 대한민국이 사이즈가 큰 나라도 아니고, 전국의 대부분이
두 세 시간 거리잖아요. 역사적 평가가 이렇게까지 상반될 수 있다는 게 흥미롭지요. 팩트가 모호하면 이해나 갈 텐데(웃음), 역사에 대한 법적
판단도 내려진 상황에서 상이한 평가가 가능하다는 게 정말 수수께끼지요.
저자는 "'5.18과 영남파시즘' 과거사의 진실을 철저히
드러내"고, "호남과 영남 간의 왜곡된 이데올로기 대립이 아닌 '전두환 일당' 대 '대한민국 국민' 간의 정의로운 대립"(164쪽) 구도를
만들어가야만, 그런 식의 프레임을 통해서만 지역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박근혜의 사과가 의미 있었던
거겠지요. 진보를 추상적으로 얘기하기보다, 한 단계 한 단계 조금씩 진전되어 나가는 정치적 사과의 스텝을 밟아가자는 것이죠. 전두환에 대해서도
분명한 역사의 평가와 함께 정치적 책임을 묻고 사과를 얻어낼 수 있는 압력이 가해져야 합니다. 전두환으로부터,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심신장애적
사과'(웃음) 이후엔 제대로 된 사과를 받아내지 못했잖아요. 너무 유명한 '29만 원' 발언은, 그야말로 대국민모욕이죠. 이명박 정부도 그렇고,
지금 속속들이 공개되는 국정원의 행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정치적 사과가 정치적 진보에 대한 유력한 지표가 될 수 있다고 했을
때, 아직 우리의 역량이 부족한 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만.
이권우
: 이 책을 통해 우리 정치는 지역주의에서 아직까지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김욱 교수의 전작을 보니 <영남민국잔혹사-'지역주의 타파'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개마고원 펴냄)가 있던데, 아마 <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에서 상대적으로 좀 덜 다뤘던 영남패권주의가 더 정밀하게 다뤄지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봅니다.
누가,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는가?
이권우
: <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에 나온 또 다른 사과의 사례 중에선 어떤 것이
가장 흥미로웠는지 얘기해볼까요.
이현우 : 199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던 전두환과 노태우를 '무조건 사면'하자는 입장으로
돌아섰을 때의 이야기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전 당시 분격하여 김대중의 최대 실정이라고까지 생각했었어요.(웃음)
저자의 프레임에 따르자면, 정치적 사과는 개인의
사과와 다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박정희와 전두환 군사정권의 피해자로서 가해자를 용서한다고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사과와 용서의 정치적
의미에 대해서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요?
(김대중은)
<뉴스메이커>와의 인터뷰에서 "화해라는 것은 잘못한 사람이 잘못했다고 사과해야 이뤄지는 것이지만 용서는 다르다"며 "그분들이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우리도 똑같이 대응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주장한다.(226쪽)한편으로 정치자금 수수와 관련되어 본인도 떳떳하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했다는 전두환·노태우를 사면했다는 설도
있는데, 그런 경우에조차 개인적인 차원과 정치적 사과를 구분하지 못했던 오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권우 : 정당들의 지역적인 토대, 지지 세력의 한계가 있었다는 겁니다.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종필의
자민련과 연합하여 정권을 이뤄냈기 때문에, 원활한 국정 운영이라든가 영남권의 지지를 위해서 그들을 사면했다는 얘기도 있었지요. 그런 오판에 대한
평가가 책 39쪽에 잘 나옵니다.
정치적 사과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집단의 문제고, 감정의
문제가 아닌 이데올로기의 문제며, 과거의 문제가 아닌 미래의 문제라면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차라리 아예 사과를 못 받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사과 없는 용서로 대체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역사적 패배를 자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소지가 크다. 그것이 끈질기게 정치적 사과를
요구하는, 또 요구해야 하는 이유다.자연스럽게 주제가 사과와 용서 문제로 넘어가게 되네요.
이현우 : 당시 사면에 관한 <경향신문> 기사 아래 김욱 교수가 코멘트를 첨부한 게
있습니다.
"정치인의 사죄와 용서는 개인의 그것과 다르다. 김대중이 베푼 '사죄 없는 용서'는
개인 차원에서야 아름다운 일일지 모르지만 정치지도자로서 역사적 상처 치유라는 과업을 저버린 크나큰
과오였다."(38쪽)100퍼센트 동의합니다. 그때 사면을 하지 않았다면 '29만원' 같은 발언은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지금도 1600여 억 원에 달하는 전두환의 미납추징금 환수 문제가 계속 말썽을 일으키고 있지 않습니까.
전두환이 한국
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집약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국가에서 5.18 광주항쟁을 민주화운동으로 지정까지 했잖아요? 그런데 반대편에선 그 학살의
당사자가 호의호식하며 심지어 육사 졸업식에서 사열까지 받는 기형적인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첫 단계는
정확한 비판이라고 봅니다. 김대중의 정치적 오판이 주변의 정황상, 국정의 안정적인 운영상 불가피했다는 논리에 대해서도 비판해야
해요.
정치인으로서의 자격이나 리더십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재고해야 합니다. 정치적 사과와 용서에 대해서 분명한 기준을 가진 사람,
정치적 사과와 용서의 개인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 그런 정치가를 갖기 위해서 국민이 먼저 그 부분에 대해서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이권우 : 이현우 선생님이 정치하면 되게 세게
할 것 같아요.
이현우 : 아, 로베스피에르 같은…
(일동 웃음)
김용언 : 저도 전두환·노태우의
사면에 대해서는 절대로, 절대로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제 짧은 소견으로는, 지금까지 보았던 한국 대중문화에서 그 같은 용서와 사과의 문제를 가장
잘 포착한 장면이 1995년 드라마 <모래시계>였어요. 재벌의 딸이자 운동권 학생인 혜린(고현정)이 연인 태수(최민수)를 삼청교육대로
보내버린 아버지 윤회장(박근형)에게 "아버지를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거예요"라고 선언하자, 아버지가 "용서도 힘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거다"라고
응수하는 장면입니다.
어린 시절 그 문장이 되게 충격적이었습니다. 이게 대체 뭘까, 아, 결국 이런 건가하는 생각을 내내 했었어요.
강한 자에 대한 이상한 경외심과 굴복감이 아직까지 한국 현실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이요.
밋 롬니 부분이 그런
점에서 흥미로웠는데요. 2012년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밋 롬니가 <위대한 미국은 사과하지 않는다>(김기용 옮김, 예지
펴냄)를 쓰기도 했지요. 그는 "미국은 실수도 했다. 하지만 의롭다고 믿는 훌륭한 일들을 해왔고, 미국의 선조들은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평화를
얻기 위해 희생을 치렀다. 이런 미국을 대신해서 사과를 한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 132쪽)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일본의 극우 현상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극우들의 논리가 '강한 일본을 보고 싶은데 왜 항상 사과만 하냐, 언제까지 사과만
해야 하냐'잖아요.
한국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경우가 먼저 떠오릅니다.
이분들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했잖아요. 전두환 등으로 상징되는 세력에 맞서기 위해선, 그들이 성자의 위치에까지 올라야만 가능한가 하는 생각까지
해봅니다. 피해자의 용서, 화합과 평화, 이런 식으로 균형을 맞추는 건 아닌지…. 김근태 전 상임고문에 대해 사람들이 칭송하는 부분이
'고문기술자 이근안 같은 악마를 용서했다더다'라는 점이잖아요. 그런 식의 '성자'같은 용서를 강요하는 분위기도
불쾌합니다.
이권우 : 한국의 진보가 갖는 어려움이 그 점이지요. 도덕적인 완벽성을
요구받기 때문에, 어떤 허점을 보이기만 하면 시민적 지지를 잃어버려요. 보수 쪽의 실수에는 상당히 너그러우면서, 진보의 윤리성에 문제가 생길
때는 끝까지 비판하게 되니까요.
김용언 : 지역감정과 더불어 거기서 파생되는 '강한
권력'에 대한 매혹이 만연한 상황이 정말 끔찍합니다.
이현우 : 그게 바로 미당
서정주의 세계관이잖아요.
김용언 : 전 이 책에서, 전두환의 56회
생일(1987년)에 바치는 서정주의 시 '처음으로'를 읽고 진심으로 충격 받았습니다. 그런 시까지 썼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이권우 : 139쪽에 수록된 시지요.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 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
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김용언 : 지난 5월에 한국시인협회가 엮은 시집
<사람>(민음사 펴냄)도 엄청난 논란에 휩싸였다가 결국 전량 회수됐잖아요? 박정희, 이승만, 이병철 등에 대해 낯 뜨거운 찬양을 바친
시들이 포함되어 있었죠.
이현우 : 미당 학교에서 배출한 시인들의 계보인
거죠.(웃음) <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에서 지속적으로 비판하는 친일파 작가 이광수나 최남선의 자기 변명은 정말 말도 안
됩니다. 그나마 자신의 친일행적을 공개적으로 속죄했던 유일한 인물이 <매일신보> 사장 최린 정도예요. 이런 친일의 부끄러운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는 경험을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다는 게, 오늘날의 아주 많은 병폐와 정치적 냉소주의와 극우 득세의 바탕이 아닌가 싶어요. 미당
서정주 역시, 그런 분위기에서 자신보다 한참 연배가 어린 권력자에게 저런 낯 뜨거운 찬양시를 바쳤지요. 책 142쪽에 보면, 문학평론가 김명인이
서정주에게 냉정한 평가를 내린 부분에 매우 공감합니다.
"서정주의 가장 뛰어난 작품들이야말로
그의 가련할 정도로 기회주의적인 삶을 비추는 적나라하게 맑은 거울들이라는 생각이다. 다만 그의 일생을 통한 권력지향과 정치적 노예성을 살짝
도포(塗布)하는 언어가 그토록 공교롭다는 것에 아이러니컬한 경이감을 느낄 뿐이다."김용언 : 거의 고통스러운 감정까지 느끼게 됩니다. 한국어가 구사할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보여줬던
시를 지은 사람의 실제 모습이 이런 거였다는 게….
이현우 : 그걸 그대로
교육해야지요. 이 언어의 아름다움이 어떤 정치적 몰상식과 결합되어 있는가를 학생들에게 제대로 가르치는 게, 그나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권우 : 맞습니다. 세계문학사에 기록된 소설들만 봐도, 가장 미학적인
작품이 가장 윤리적인 작품일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우리만 유독 윤리성과 미학이 상당히 충돌하고 갈등을 겪는 듯, 미학에선 윤리를 포기하는 것
같은 경향이 있어요. 서정주나 그의 시를 찬양하는 사람들을 봐도 그렇습니다. "(서정주)의 삶과 시 모두는 차라리 과잉 정치적이었다"라는 김명인
평론가의 말에 동의합니다. 이현우 선생님 말씀처럼 올바른 문학, 좋은 문학에 대한 독자들의 훈련과 교양을 위해 제대로 교육해야 하는 게
필요해요.
힘과 윤리를 동시에이권우 : 국내의 사과
문제를 주로 얘기하다보니 일본의 경우를 뺐는데, 이것도 만만치 않지요. 저자의 평가에 대해 같이 얘기해볼까요.
이현우 : 책 56쪽부터 58쪽까지 일본의 과거사 사죄발언에 대한 서술이 죽 나오지요. 최근 아베 신조
총리가 과거 사죄를 부정하려는 듯한 발언으로 계속 문제를 일으키는데요.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정치적 사과는 역학관계에 의해 재규정되고 번복될 수
있는 겁니다. 따라서 정치적 사과를 지켜나갈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는 거죠.
정치인들의 경우 자기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이 지지기반이고
정치적 발언을 정당화해주는 힘이기 때문에, 정치적 사과에 대해서 번복하거나 왜곡하려는 시도도 자기기반과 관계되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해요.
일본의 망언이라는 것도 주기적으로 듣게 되는데, 개인적인 차원의 의미로서만 접근하면 안 됩니다. 작년 말 도쿄 도지사를 사임했던 이시하라
신타로, 오사카 시장 하시모토 도루의 망언도 마찬가집니다. 한번 발언했는데 지지율이 올라가면 계속 망언을 내뱉는 것이고, 지지율이 떨어지면
발언의 수위를 조절합니다. 망언 자체가 아니라 한국, 중국, 일본, 미국 사이의 정치적 힘의 역학관계를 봐야 합니다. 도덕적 차원에서만 자꾸
판단하는데, 정치적 사과는 그런 차원에서 벗어나 인식할 필요가 있어요.
이권우
: 이 책에서 설명하다시피 일본의 공식적인 사죄발언은 '미야자와 담화'(1982년), '고노 담화'(1993년), '무라야마
담화'(1995년),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1998년)입니다. 이런 발언이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한 저자의 분석이
흥미로워요. 57쪽을 보면 "사과 없이 자신들의 뜻대로만 국제관계를 영위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라고 못 박지요. 아시아 주변국들의
국력이 신장되면서 "일본으로서는 과거사보다 미래의 이해관계가 중요해진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현우 : 우리가 그런 망언들에 발끈하는 건, 국가라는 행위자를 개인과 동일시하면서 심성 문제로 환원시키기
때문입니다. 그 시각을 좀 바꿀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일본의 사과를 유지하기 위해 개인적 차원을 벗어난 역량이
필요합니다.
김용언 : 이순간의 현실을 생각하면 무척 갑갑해집니다. 그런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라면 외교와 역사 부문의 전문가집단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할 텐데, 이 책 134쪽에 나오다시피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8년 아주
놀라운 발언을 한 바 있습니다. <친밀인명사전> 수록인물 4776명의 이름이 공개되었을 때,
"친일문제는 국민화합 차원에서 봐야 한다. 일본도 용서하는데…, 공과를 균형 있게 봐야 할 것 같다. (일본과의
정상회담을 위해-인용자 주) 과거에는 단어 한 마디, 사과라는 단어 한 마디로 몇 달씩 조율을 했지만, 이번에는 사과는 당신들(일본)이 알아서
하라고 했다."지도자라는 인물의 대표적인 천박성, 그리고 옆에서 그걸 아무도 제어하지 못하는 상황, 전문가집단을
현명하게 중용하지 않았을 때 드러나는 폐단의 전형이지요. 앞으로도 만약, 일본에게 그 같은 사과를 강요하지 않는 게 한국에 소위 이득이 된다면,
정치적 경제적 이익만으로 그런 과거사를 덮고 가도 된다는 파국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절망적인 생각이 듭니다. 전 양쪽이 함께 가야 하는
것 같아요. 역량을 키움과 동시에 역사적 윤리성을 요구하는 목소리 역시 높여야 합니다.
이권우
: 물론 사과와 용서가 맞물려야 하는데,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가능해집니다. 사과하면 무조건 용서해야 하나?
이현우 : 아까 <모래시계> 얘기가 나왔는데, 전 그게 맞는 것 같아요. 강자가 용서합니다.
적어도 어떤 차원에서건, 힘의 강자든 도덕적인 강자든 더 나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용서할 수 있지요. 한국인의 심성이라고 하면 오버일 수
있는데, 어쨌든 많은 이들이 감동에 기대지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이데올로기, 화해의 이데올로기. 전 그런 부분이 불만스러운데, 용서에
대해서도 그게 마치 궁극적인 해결책이자 결론인 양 얘기하는 경향이 불편합니다.
이권우
: 만일 광주항쟁을 무력 진압했던 전두환 세력이 사과하면, 용서될 일인가요?
이현우
: 누가 용서해야 할까의 문제인데, 아주 어렵습니다. 일본의 과거 침략 발언도 그렇고요. 어느 정도까지 사과하고, 누가 용서해줄
것인가의 문제는 쉽지 않습니다.
이권우 : 한갓 인간에 불과한데 신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니….
이현우 : 사실 용서라는 게 되게 오만한 겁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용서가 아니라 복수예요.
(웃음) 지젝의 책에 나오는 말이기도 한데, 용서는 신의 자리를
참칭하기 때문에 늘 겸손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김용언 : 게다가 사과와 달리
용서에는 진정성이 강요되지요.
(웃음)
이권우
: 사과는 정치적 문제고 용서가 진정성의 문제라면, 우리 사회가 정치적 사과에 대한 용서를 강요하는 분위기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사과할 건 사과하고, 거기 대한 논란과 논쟁은 거쳐야 합니다. 갑자기 용서를 들이밀면서 정치적 사과를 안이하게 해결하는 측면이 분명
있지요.
이현우 : 저자 결론을 정리해 본다면, 용서에만 초점을 맞추는 걸
재고해봐야 하고 정치적 사과를 요구하는 역사의 힘을 우리가 길러야 하며, 냉소주의 대신 그 역사적 힘에 대한 신뢰를 키워야 한다는 겁니다. 전
그런 결론에 공감하고 동의합니다.
<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를 마치며이권우 : 슬슬 정리해야 할 시점인데요. 이 책에 대한 전체적인 감상을 얘기해보면 어떨까요. 저로서는
단일한 주제로 책 한권을 소화하는 필력, 이슈에 대한 적극적 대응을 강점으로 꼽고 싶습니다.
이현우 : 좋은 책의 조건 중 하나라면, 지금까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생각하도록 하는 책이죠.
저한테는 그런 의미에서 <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가 의미 있는 책이었습니다. 뭐랄까, 말투 자체는 논객식 글쓰기예요. 진중권식
글쓰기와 강준만식 글쓰기가 혼재되어 있는 것 같은데, 자료와 주장 사이에서 적절하게 균형을 잡았고 유의미한 문제제기를 한다는 측면에서 좀 더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용언 : 저 역시 이 책의 장점에
대해서는 동의하고요. 조금 아쉬웠던 점을 한두 가지 첨언한다면, 아까 말했다시피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좀 더 정밀한 분석도 포함되었다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화해와 용서를 강요하는 분위기, 저자는 '화해강요 이데올로기'라는 표현을 쓰는데요, 그 부분에
대해서도 좀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주요 이데올로기가 개신교 프레임인데,
용서와 화해를 강요하는 분위기가 이런 프레임과 결부되면서 심화되는 것인가 하는 추측도 들고요. 이를테면 섣부른 용서가 어떻게 끔찍한 파국을
가져오는가를 다루는 이창동 감독의 <밀양> 같은 영화와 결부시켜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저자의 문제의식과 더불어 이런
부분들을 논의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권우 : 긴 시간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달에 또 다른 '납량특집' 책으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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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인터뷰] 이명희 한국현대사학회장, "한국사 교과서에 자본주의 이끈 기업·기업인
업적 다뤄야"
'정전 60년 … 교육현장서 바라본 현대사'
"경제사 구체 언급 않고 성장·경쟁력만 표면적
접근
'우편향' 딱지 붙이기보다 자본주의 발전 해명 중요
6·25전쟁은 창조적 파괴 … 경제 기적의 토대
마련"
오는 27일이면 6·25전쟁의 포성이 멈춘 지 60년. 하지만 6·25전쟁을 비롯해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 시기 등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인식하는 한국 사회의 갈등은 전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최근 검정을 통과한
교학사의 역사교과서와 이를 집필한 한국현대사학회에 붙은 ‘우편향’ 딱지가 대표적이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교과서에 대한 악성 루머가 퍼졌고,
야당 국회의원들까지 가세하며 논란을 일으켰다.
이런 상황에서 이명희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지난 1일 한국현대사학회 2대 회장에
취임했다. 한국 현대사를 둘러싼 첨예한 갈등의 중심에 있을 수밖에 없는 자리다. 지난 5일 그를 만나 정전 60년을 맞는 6·25와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역사를 인식하는 자세, 한국의 미래에 관해 폭넓게 들어봤다.
▷한국현대사학회는 어떤 계기로
창립됐습니까.“현대사 인식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다양한 관점이 어우러지고 균형을 이뤄야 하는데 현재는
1980년대의 이데올로기적 요구에서 비롯된 민중사관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진보적 변혁운동을 하던 활동가들은 현대사 연구에 대한
관심이 현장 운동 이상으로 컸어요. 이론적 토대를 만들기 위해서죠. 2001년 7차 교육과정이 시작되면서 민중사관에 입각한 교과서가 학교에
공급됐고, 교사들도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엄정한 사료를 바탕으로 우리 국민 전체가 납득할 수 있는 제대로 된 현대사 연구와 교과서 보급이
시급합니다.”
▷교학사 역사교과서가 공개 전에 논란이 됐습니다.“검정 교과서는 최종
통과 전까지는 공개하지 않습니다. 읽어 보지도 않은 사람들에 의해 악성 루머가 퍼졌어요. 교학사의 모든 책을 불매운동하겠다는 협박 전화 때문에
작업이 중단될 뻔했습니다. 교학사 교과서 담당 이사로부터 ‘못 낼 것 같다’는 문자메시지까지 왔어요. 겨우 설득해서 발행하기로 하고 준비
중이지만 씁쓸하더군요.”
▷한국현대사학회도 곤욕을 치렀죠.“우리 학회에 현대사
전공자가 8명밖에 없다고 공격해요. 황당합니다. 말 그대로 ‘대한민국사’를 쓰려면 정치·경제사뿐 아니라 교육사 문화사 스포츠사와 같은 미시사까지
포괄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양한 전공자들을 모신 건데 전공자가 없다니요. 이미 참여하고 있는 학자들에게는 탈퇴하라는 협박 전화도 오고
있습니다.”
▷역사가 접점 없는 투쟁의 장이 된 것 같습니다.“현재 한국의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분들이 학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변혁 운동의 기저에 역사가 있는 거죠. 전부라고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자신과 다른 걸 참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상대를 선의의 학술적 경쟁 상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 전체주의는 자유주의의 적 아닙니까.
그러다 보니 싸움이 크게 붙는 것 같습니다.”
그는 현대사를 둘러싼 투쟁의 단적인 예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백년
전쟁’을 들었다.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판적으로 다룬 이 영상은 올초 유튜브에서 100만건 이상의 조회 수를 기록하며 반향을 일으켰다.
이 학회장은 “식민지 병합부터 현재까지 역사를 어떤 대상에 대한 ‘전쟁’으로 보고 있는 제목 자체에 증오심이 깔려 있다”며 “영상에서 말하는 그
증오의 대상은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이라고 했다.
▷독재자를 왜 옹호하느냐는 접근이 설득력을 얻은 것
아닐까요.“어떤 한 사람에게 하나의 딱지만 붙이는 건 불가능합니다. 역사적 인물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렇습니다.
독재를 한 부분이 있죠. 하지만 다른 면도 있습니다. 이승만 집권 후반기에는 이 전 대통령을 통해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부패한 반민주 인사들이
많았습니다. 여기에 빠져 본인이 독재를 하는 줄도 모르고 독재를 한 측면이 있습니다. 이 전 대통령이 잘했다는 게 아닙니다. 개인의 책임뿐
아니라 대한민국 지도층의 한계라는 얘기죠. 이승만 개인이 물러난다고 그 한계가 사라집니까. 한계를 제대로 연구해서 입체적으로 봐야 계속 이어지는
못난 모습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북한은 ‘내재적 접근법’으로 보면서 우리 현대사는 그렇지 않다는 지적도
있는데요. “내재적 접근법은 역사 연구의 기본과도 같습니다. 이해가 안 될 정도로 기괴한 사건이나 대상이라고 해도
일단 당시 상황이나 상대방 입장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게 내재적 접근법입니다. 당시 상황과 오늘날의 입장 모두에서 바라보고 본질을
입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입니다. 송두율 독일 뮌스터대 교수나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이 북한 연구를 할 때 사용해 성과를 거뒀죠.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일제 강점기와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내재적 접근이 전혀 없고 현재 시점에서 결론을 내놓고 끼워 맞추기 급급해요. 해석과
평가 이전에 내재적 접근을 통해 사실 자체를 인식해야 하는 건 기본입니다.”
▷올해로 정전 60년을
맞습니다.“정전의 의미를 되짚어 보는 해가 돼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전에는 전쟁의 참혹상과 피해에만
주목했습니다. 당연하고 의미 있는 반성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전쟁의 다른 의미는 어떤 것이 있는지도 파악해봐야 합니다. 일제 36년을 거치고
나서도 우리에게 남아 있던 전통적 사고 체계와 신분 의식이 전쟁을 통해 완전히 해체됐고 그게 발전의 토대가 된 측면이 있습니다. 또 전쟁을 통해
공산주의는 대한민국에서 설 수 없는 이론이라는 인식이 생겼습니다. 공산주의를 배제하는 과정에서 오늘날 보기엔 무리한 일도 있었고 참혹한 비극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을 통해서 우리의 국체(國體)는 분명히 확립됐습니다. 사회사적으로 의미 있는 건 사람들이 지역적으로 많이 섞였다는
겁니다. 전통사회에서는 태어난 데서 계속 살았지만 전쟁을 통해 말하자면 ‘비빔밥’이 됐어요. 부산에서 서울로도 가고, 북한 지식인 계층도 남으로
많이 내려오고요. 6·25전쟁은 말하자면 시바 신(神)처럼, 파괴인 동시에 창조이기도 했던 것이죠.”
▷경제사 교육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한국사 교과서에 경제사라는 게 없다시피 합니다. (교과서를 보여주며) 경제 성장을
표면적으로만 접근하고, 그나마도 바로 정치·사회적 요인으로 환원됩니다. 경제사라면 우리 경제가 세계적으로 어떤 상황에 있었고 어떤 경쟁력이
있었는지 밝혀야 하는데 여기에 대한 조금의 분석도 없어요. 경제 주체인 기업과 기업인도 거의 서술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교학사
교과서는 친 자본적일 것 같아서 문제’라고 하더군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 발전을 해명하는 게 가장 중요한 것 아닙니까. 계급적 편견과
접근이 우리 사회에서 굉장히 일반화돼 있어요.”
▷교사 생활을 8년 넘게
하셨는데요.“어떻게 보면 교사 생활을 했기 때문에 유학을 떠나게 됐고 지금에 이르게 됐어요. 중학교 교사를 할 때
보니 아이들이 자기 주장은 잘하는데 남의 얘기는 잘 못 듣는 경향이 있더군요. 저는 이 문제를 역사 교육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역사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의 시각으로 보는 거니까요. 그래서 더 공부를 하기 위해 유학을 떠났습니다. 정책 관련 일이든 현장
운동을 할 때든 교사 경험은 큰 도움이 됩니다.”
▷앞으로 계획은.“현행 역사교과서는
국민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거꾸로 분열을 일으키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일단 현대사학회장으로서 새로운 시각으로 연구를 계속해
나갈 생각이에요. 나아가 세계사 교육에 대한 문제 제기도 하고 싶습니다. 아직도 우리 세계사 교육은 서양은 따라가야 할 대상, 동양은 우월감을
느끼는 대상이라는 낡은 틀에 갇혀 있어요. 이런 마인드로는 한국인이 세계로부터 인정 받고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어렵습니다. 다양한 지역에서 인류가
무엇을 이룩했고 동시에 무엇을 이루지 못했는지를 배우며 큰 안목을 갖게 해주는 게 세계사입니다. 이를 통해 자신이 세계 무대에서 뭘 해야 할지도
알 수 있죠. 그게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 아닐까요.”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
이명희 회장은 누구경북 문경에서 1960년 태어나 서울대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서울
강동중, 서운중, 오금중, 국립 국악고에서 역사 교사로 8년간 근무했다. 그후 일본 쓰쿠바대에서 역사교육학 석·박사 학위를 따고 1998년
귀국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책임연구원과 국가수준교육성취도평가팀장, 한국외국어대 교육대학원 겸임 교수를 거쳐 2002년부터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로 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 국가교육과학기술자문회의, 사회통합위원회 이념분과 위원 등 교육 및 사회분야에서
국정 자문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2011년 전임 회장인 권희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와 함께 한국현대사학회 창설을 주도했고 학회 연구위원장,
교과서위원장을 거쳐 지난 1일 임기 2년의 제2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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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의 독대정치, 현오석 매주 한차례…남재준은?
밀실정치
논란소지 차단
"국정원장 독대 없었다"…측근 실세도 '1대 1' 피해
공식계통 소통 중시…정 총리는 격주로 만나
최근 야당이 북방한계선(NLL) 대화록 공개와
관련, 박근혜 대통령과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의 밀실 독대 의혹을 제기하자 청와대는 ‘발끈’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그런 적이 한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역대 대통령들은 독대(獨對)정치를 가졌다. 꼬인 정국 돌파를 위해 뭔가 ‘은밀한
대화’가 필요할 때, 측근들 간 권력 투쟁을 조정할 때 권력기관장이나 측근을 부르는 등 독대정치를 활용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최근 독대 횟수를
늘리고 있다. 다만 박 대통령의 독대정치는 과거와 다른 측면이 많다.
우선 독대의 상대가 주로 내각이다. 내각 멤버 중 박
대통령과 독대를 가장 자주 하는 사람은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다. 현 부총리는 매주 한 차례 주례보고차 청와대를 찾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관계자는 “따로 요일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고 이슈가 있을 때마다 대통령을 만나는데, 보통 매주 수요일 경제장관회의가 끝나고
만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정홍원 총리는 격주로 독대 자리를 갖는다. 박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가 매월 둘째·넷째주
화요일에 열리는데, 국무회의가 끝나는 즈음인 오전 11시부터 한 시간가량 대통령 집무실에서 따로 만나 현안을 놓고 의견을
주고받는다.
다른 장관들은 현안이 생길 경우 박 대통령이 주로 전화를 걸어 묻고 지시했지만 최근 들어선 집무실로 따로 부르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다. 독대할 때는 장관의 의견을 충분히 듣는 편이라고 한다.
한 장관은 “준비해 간 보고서는 옆으로 밀쳐놓고 주로 눈을
마주치며 대화를 나누는 식인데, 보고서에 담긴 내용은 사전에 파악하고 있는 눈치더라”며 “그래서 뻔한 얘기보다는 ‘다만, 이런 점이 있습니다’며
문제점이나 점검해야 할 것을 함께 지적한다”고 말했다.
청와대 참모 중에서는 허태열 비서실장과 김장수 국가안보실장, 이정현
홍보수석, 조원동 경제수석 정도가 독대가 잦은 편이다.
박 대통령은 각료들과 청와대 핵심 참모 외에는 좀체 독대를 하지 않는다.
청와대 관계자는 “과거 정권 때는 내각보다는 실세 측근이나 당 지도부, 권력기관장을 비밀리에 불러 독대하는 일이 잦았지만 박 대통령은 이런 식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른바 ‘측근정치’나 ‘밀실정치’ 같은 논란의 소지를 애초부터 없애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박 대통령은 이전 정부에서 관례적으로 해왔던 국가정보원장 등의
‘대통령 정례 독대 보고’를 취임 이후 한 차례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다른 관계자는 “박 대통령은 비공식 통로를
이용한 소통보다는 공식적인 계통을 중시하는 스타일”이라며 “취임 이후 비선라인을 두지 않은 것도 이 같은 스타일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경우 수석을 제치고 비서관이나 행정관들을 수시로 불러 직접 보고받는 경우가 많았으나, 박 대통령은 수석비서관을 통해 보고를
받는다고 한다.
총리나 장관으로부터 따로 보고를 받을 때 가급적 관련 당사자들을 배석하게 하는 것도 특징이다. 예컨대 정홍원 총리와
만날 때 김동연 국무조정실장과 유민봉 국정기획수석 등이 배석하곤 한다.
정 총리가 답변하기 힘든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선 김 실장이
대신 답변하기도 한다. 청와대 관계자는 “대통령의 의사가 정확히 전달됐는지 ‘크로스 체크’하고 다른 의견이 없는지 즉석에서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종태 기자의 청와대 뉴스터치
jtch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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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LL 논란? 노무현은 옳았다!
[프레시안 books] <정세현의 통일토크> [프레시안 한승동
<한겨레> 문화부 기자]
2007년 10월의 남북 정상회담 때 나온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발언
내용이 불법적으로 유포, 공개되고 정치 흥정의 대상물로 전락했다. 지구상에서 참으로 희귀하고도 기괴한, 그리고 비극적이고도 희극적인 반공국가
대한민국, 그 시대착오적인 냉전국가의 실체를 거기서 본다.
이 문제가 언론에 등장한 것은 지난 연말 대선 때였다. 그 5년 전의
전임 대통령 발언록이 왜 그때 불쑥 불거져 나왔을까. 공개 자체가 법으로 금지돼 있는 내용이 어떻게 세간에 흘러나오고 집권당이 이를 문제
삼았을까. 권력을 쥐고 있던 자들이 그것을 집권당 대선 전략으로 활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 문제를 집권 연장을 위한 이데올로기 공세 도구로
활용하려던 그들은 노 전 대통령의 발언 내용 중 일부를 자의적으로 짜깁기해 흘리면서 정치적 반대파를 위험한 '종북좌파'로 몰아가는 반공
매카시즘을 다시 또 부추겼다.
그리고 그 문제가 대선 뒤 국정원의 불법적인 대선 개입 논란이 거세지면서 다시 등장했다. 아마도,
그대로 두면 대선 불법개입 공작을 지시한 국정원 수뇌부와 국정원이 위험해지고 공모 가능성이 짙은 집권당과 권력자들 또한 난처해질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그리하여 국정원의 대선 개입 비리를 입증하는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는 순간, 난데없이 과거 대통령의 NLL 발언 내용이 다시 정치
쟁점화했다.
그렇게 해서 지금 국정원 불법비리 혐의라는 문제의 본질은 묻히고 엉뚱하게도 공개돼선 안 될 전임 대통령의 정상회담 발언
내용을 공개하는 게 맞느냐 틀리느냐, 그 내용이 '나라 팔아먹은 종북좌파'의 매국 행위냐 아니냐 따위의 곁가지, 근거 모호한 에피소드들이 사건의
본질인 양 행세하고 있다. 저질 코미디를 보는 듯했던 '윤창중 사건'이 상징하는 권력 주변 문제도 NLL 거품 속에 녹아버렸다. 그게 바로
노림수다. 수구 언론 매체들은 언제나 그랬듯, 거기에 맞장구치며 모략가들을 결과적으로 도와주고 있다.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고인의 발언을
자의적으로 비틀어 사건을 날조한 혐의가 짙은 이 '사기극'의 핵심에 구제불능의 언론이 자리 잡고 있다.
노 전 대통령 발언이
공개되든 말든, 또 얼마만큼 공개되든 상관없이 결국 발언 내용 중에 문제될 만한 것은 없을 것이다. 설사 있다고 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 실체 규명이 목적이 아닐 테니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주류 수구세력에게 법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유엔 가맹국인 북한은 그들에겐 국가가 아니다. 통일 문제의 당사자요 논의 상대임에도 그들은 전혀 그런 대우를 해줄 생각이 없다. 국내 정치적
이용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라면 북과의 약속이나 국가 대 국가로서 지켜야 할 기본 룰조차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 특권 유지를 위해서라면 '빨갱이'들쯤은 마음대로 처분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지닌 극단적 반공투사, 이미 다른
곳에서는 다 흘러가버린 '냉전의 전사', 시대착오적이고 퇴행적인 분열증적 영웅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유사 사태가 1992년 남북
고위급회담 때도 벌어졌다. 당시 안기부장 특보를 하다 고위급회담 남쪽 대변인을 맡고 있던 이동복의 '훈령조작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성사시키기 위해 필요한 조처(피랍 동진호 선원 송환요구 철회)를 취하라는 청와대 훈령을 중간에서 가로채 우리 쪽 회담 대표에게
전달하지도 않고 자기 고집대로 회담을 끌고 가 결렬시켰다. 그리고 훈령조작 사실을 은폐했다가 나중에 들통 났다. 감사원 감사를 통해 드러난 범죄
행각은 정상적인 국가에서 보기 드문 것이었다. 좁은 세계에 갇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모든 것을 희생시켜도 상관없다는 가치관·세계관의
소유자들. 그런 유형의 시대착오적이고 광신적인 반공투사들이 21세기인 지금도 여전히 대한민국 핵심부를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번 국정원 대선
불법개입과 전직 대통령 NLL 발언 공개 논란은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남북한 통일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나라 바깥의 힘센
자들과 한통속이 돼 뭔가 일이 될 만하면 사사건건 훼방을 놓으면서 70년 세월의 분단구조 속에서 특혜를 누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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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세현의 통일토크>(정세현 지음, 서해문집 펴냄).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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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통일 문제 전문가로, 통일부 장·차관으로, 남북대화 현장 핵심멤버로 일한 정세현
원광대학교 총장이 체험을 토대로 쓴 <정세현의 통일토크>(서해문집 펴냄)를 읽노라면 이 뒤틀린 인간들과 뒤틀린 구조가 한결 선명하게
다가온다. 이 70년 묵은 복잡하고 뒤틀린 문제를 그만큼 구수하고 흥미진진하게, 그러면서 문제의 본질과 핵심을 그만큼 쉽고 명쾌하게 풀어내는
이도 드물 것이다. 책은 박정희 정부 이후 이명박 정부까지 역대 정부의 남북관계 현장 30년 역사를 통사적으로 요약 정리한 1부, 논란거리가 될
수 있는 주제 7가지를 '한반도 평화를 여는 일곱 개의 문'이란 제목으로 정리한 2부, 그리고 남북접촉 현장의 에피소드들을 묶은 3부로 구성돼
있다. <정세현의 정세토크>(서해문집 펴냄)의 자매편 격이지만 남북관계·통일 문제를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했다는 느낌을
준다.
먼저 이런 얘기부터 해 보자. 만일 2007년 10·4 남북 정상선언대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합의내용이 실행에
옮겨졌더라면? 그런데도 그 2년여 뒤인 2010년 3월의 천안함 침몰 사태가 일어났을까? 그럼에도 그 인근 해역에서 대규모 한미 합동군사훈련이
벌어지고 46명의 젊은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숨져간 비극이 일어났을까? 그리고 뒤이은 북의 연평도 포격 만행도? 우리 젊은이들의 피로 지킨
NLL을 사수해야 한다고 군과 집권당과 대통령은 말했지만,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무고한 젊은이들 피가 아니면 지킬 수 없는
NLL을 계속 '사수'해야 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 사수하지 않아도 지켜내는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사람들은 도대체 문제의 그 NLL에
관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이라는 게, 정확한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나온 것인지나 알고 있는
걸까?
2007년 10월 노무현-김정일 회담 뒤 발표된 '10·4선언'에 담긴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구상의 골자는
이랬다.
우리의 '서해 5도'가 산재해 있는 해주 앞바다와 주변 해역을 남북이 함께 안전하게 이용하는 '공동어로·평화수역'으로
지정한다. 해주경제특구를 개발하고 장차 해주-개성-인천을 연결하는 물류네트워크도 만든다. 해주와 인천간 직항로도 개설한다. 강화도와 북쪽 건너편
개풍군 사이에 다리를 놓아 개성공단을 좀 더 단거리로 남쪽과 연결함으로써 공단의 내실화, 확장을 꾀한다.
<정세현의
통일토크>에서 정 총장은 이렇게 썼다. "10·4 정상선언에는 여러 가지 계획과 사업들이 언급되어 있지만, 그 중 가장 의미 있고 남북관계
발전과 한반도 평화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서해특별지대)에 관한 합의사항입니다."
정상끼리 합의했다고
해서 일사천리로 진행되진 않았겠지만, 그 구상이 실현 가능할 뿐만 아니라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진척될 수도 있으리라는 전망을 해도 될 만한
주·객관적 환경이 당시에는 어느 정도 조성돼 있었다. 경의선 철도가 연결되고 동해 쪽 도로·철도도 연결되거나 연결 작업을 하고 있었다. 수많은
남쪽 사람들이 이미 육로로 금강산을 오가고 있었고, 개성공단도 시범단계를 넘어 대규모 확장이 구체화되고 있었다. 제주도와 남해안 사이에선 북쪽의
선박들이 탈 없이 통과하고 있었다.
"그건 정말 대단한 발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중 정부에서
철도·도로 연결공사를 시작하고 개성공단 개발을 추진할 때는 '군사적 대치지역'을 '경제적 협력지역'으로 변화시켜나가는 식으로 접근하다 보면 결국
남북 간에 협력과 공존의 영역이 넓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서 있었습니다. 그게 통일로 가는 가장 정확한 길이라고 판단한 것이죠. 기능주의적 접근을
하되 경제와 군사를 연계시키는 개념이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입니다. (…) 그런데 그 범위를 훨씬 더 넓힌 것이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라는
것입니다. (…) 그럼 황해도까지도 군사긴장지역에서 경제협력지대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NLL 문제 때문에 툭하면 긴장이 고조되던 서해가
평화협력지대로 탈바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그렇게 해서 서해특별지대가 실천에 옮겨지기 전에 이미 "북한 당국이
개성공단 부지로 내 놓은 지역에 있던 6만여 명의 북한병력이 10킬로미터 이상 북쪽으로 올라갔다"고 했고, 금강산 쪽 주둔 북한군 부대들도
금강산이 경제협력지대로 바뀌면서 그 북쪽으로 15킬로미터 정도 이동했다. 보수 성향의 <신동아>가 2005년 2월호에 여러 장의
위성사진과 함께 '개성공단 일대 군사시설 전격 철거'라는 제목의 기사까지 실었다. 뿐만 아니라 경협이 확대되면서 그들 지역을 관리하는 북쪽
군대들이 어쩔 수 없이 남쪽 군대와 매일 통화하고 팩스도 주고받으면서 협력할 수밖에 없게 되고, 이에 따라 긴장완화, 신뢰구축 효과가 눈에 띄게
나타났다.
노 전 대통령이 북쪽 수뇌와 얘기했다는 NLL 관련 발언과 엮인 서해특별지대 구상은 그런 변화의 연장이자, 그것을 질과
양 모두 획기적으로 높이자는 남북 간의 합의였다. 따라서 노 전 대통령의 NLL 발언은 이 합의를 끌어내기 위한 협상과정에서 나온 것이며,
기록공개 여부가 논란이 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기록자들이 배석한 자리에서 이뤄진 것이다. 국민 대다수의 지지로 당선된, 수많은 공식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세계의 관심 속에 유엔 가맹국인 이웃나라를 공식방문 중인 자국 대통령을 나라를 팔아넘길지도 모르는 적국의 스파이쯤으로
간주하는 것은 정신병리학적 광기의 소산일까. 아니면 정치적 이득을 노린, 공작 차원도 못되는 졸렬한 수작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NLL을 넘어
분단체제 자체를 '사수'하려는 의지의 표명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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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당시 노무현 대통령, 김정일 국방위원장. ⓒ청와대
사진단 |
2008년 2월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서해특별지대 구상뿐만 아니라 10·4 선언,
그리고 김대중 정부 때의 6·15 공동선언까지 전 정부들이 10년간 어렵사리 쌓아 올린 남북공사 토대들을 사실상 모조리 폐기처분해 버렸다.
'박왕자 피살사건'으로 이명박 정부의 대북 자세는 한층 더 경화됐지만, 그 전 인수위 시절과 취임 이후 발표한 대북정책 기본구상인 '비핵·개방
3000'을 통해 강경 대결자세를 기조로 한 대북 정책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정 총장은 걱정했다.
"이명박 정부가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합의를 포함해서 10·4 정상선언 전체를 부정했는데, 이렇게 한 것이 훗날에는
시간을 낭비했다는 점에서 굉장히 후회스러운 역사가 될 것입니다."정 총장은 이명박 정부가 폐기해버린 이런 접근방식을
국제정치학상의 주요 통합이론들 가운데 하나인 '기능주의'로 분류했다. 정치 위주의 직선적 접근을 앞세우기보다는 경제, 사회, 문화, 스포츠 등
비정치적·기능적 부문의 교류·협력을 통한 우회적 접근을 강화한 뒤 궁극적으로 정치적 통합을 꾀하는 방식이다. 세계대전을 두 번이나 치른 뒤
석탄·철강 공동체 등을 우회해 유럽연합(EU)을 결성하기에 이른 유럽의 전후 통합방식이 그랬다. 정 총장은 남북한의 경우 여기에다 정치적 요소를
가미해 의도적인 정치적 결단을 중시하는 신기능주의를 도입했다며,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햇볕정책'이 바로 신기능주의 통합이론에 가깝다고
했다.
"더 많은 접촉을 통해서 북한의 변화를 유도해야만 통일이 가능하다는 것이 햇볕정책의 기본철학 아닙니까? 접촉점을 무수히
찍으면 접촉선이 생기고, 접촉선이 무수히 생기면 접촉면이 넓어지고, 그런 접촉면이 자꾸 생기다 보면 접촉공간이 넓어지고, 그것이 바로 북한의
개방점, 개방선, 개방면, 개방공간이 되고, 이어서 통합점, 통합선, 통합면, 통합공간으로 연결된다는 철학입니다." 독일통일 방식이
그랬다.
김대중 정부 이후 이 신기능주의적 접근을 통해 남북 간 왕래가 보편화되고 통일 문제가 현실 문제가 됐다. 그러나 그렇게
되자 이번에는 남북 내부에서 각기 내부 갈등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통일 문제가 담론 차원에서 현실 차원으로 넘어가면서 냉전구조가 허물어지자,
냉전구조 위에 번성해온 기득권 세력이 위기의식을 느끼면서 반격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 인한 우리 내부 갈등이 '남남
갈등'이다.
대한민국 수구세력은 북과의 갈등 증폭을 통해 남남 갈등을 조절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온존시키는 전략을 택했다. 그들은
북과의 갈등을 전면화하고 남쪽 내부의 반대세력을 모조리 종북좌파로 몰아 약화시키는 대신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했다. 2002년 9월 고이즈미 총리
방북 때 나온 북의 일본인 납치 사실 시인을 북-일의 오랜 갈등 해소의 출발점이 아니라 오히려 갈등 증폭 수단으로 써먹은 일본 우파의 복사판인
'자학사관 비판'과 뉴라이트의 대두가 그것과 표리일체를 이룬다.
이는 정 총장이 <정세현의 통일토크>에서 자주 거론하는
독일 통일의 예와 매우 대조적이다. 통일 전 서독은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 이후 통일까지 20여 년간 엄청난 '퍼주기'를 마다하지 않고 동독과의
대화·교류 확대에 매진했고 이에 대해서는 기독교민주당이나 자유민주당 등 보수·우파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사회민주당의 브란트 동방정책을
계승해 독일 통일 마지막 단계를 완수한 건 헬무트 콜의 보수 기독교민주당이었다. 정 총장이 명시적으로 얘기하진 않았으나 <정세현
통일토크>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의 핵심 축 하나가 바로 한국과 독일의 이런 자세 대비일지도 모르겠다. 통일 문제와 관련해,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 3000'이 대표하는 한국 보수 우파의 기본자세는 '북이 먼저 변해야 대화도 하고 지원도 한다'는 것이다. 남쪽 보수 우익은 북이
먼저 핵문제에 대한 입장을 바꾸기만 하면, 말하자면 핵을 포기하겠다는 쪽으로 가기만 하면 왕창 도와주고 체제안전도 보장하겠다고 줄기차게
얘기한다. 이는 북이 자세를 바꾸지 않는 한 대화도 지원도 하지 않겠다는 얘기다. 일본이 북을 대하는 태도와 똑같다. 북이 먼저 굴복하지 않는
한 대화도 지원도 과거 청산도 수교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대화하지 않겠다는 얘기다.
독일의 자세는 이와 확연히 다르다.
서독은 동독에 대해 먼저 변하라고 요구한 게 아니라 '동독이 변하게 하려면, 동독을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를
고민했다. 동독에게 안 바뀌면 대화도 지원도 없다며 변화를 다그친 게 아니라, 동독이 서독의 요구에 호응하고 나설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만들었다.
그 핵심 수단이 바로 한국 보수 우파들이 보면 입이 딱 벌어질 정도의 '퍼주기'였다. 한국 우파의 대북정책이 '바꾸면 주겠다'인데 비해 서독의
대동독정책은 '주어서 바꾼다'였다.
정 총장에 따르면, 1969년 동방정책이 시작된 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날까지 20년 간 서독 정부가 직접 또는 교회 등 민간을 통해 동독에 지원한 돈과 물자가 1044억 마르크, 달러로 약 576억 달러나 됐다.
연간 평균 약 29억 달러쯤 되는데,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남이 북에 지원한 연평균 4억 달러의 7배가 넘는다. 지금 독일의
국내총생산(GDP)이 3조5000억 달러 정도고 우리가 1조1600억 달러(2012년) 정도인데, 이런 소득차나 국력차를 감안해도 통일 전
서독의 동독에 대한 지원 규모는 남한의 북에 대한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이에 대해 독일 국회나 언론은 그 20여 년간 한 번도
시비를 걸지 않았다고 한다. 이게 또한 한국과 독일이 다른 점이다.
한국 우파들 논리대로 그런 퍼주기 공세를 당한 동독이 그 돈으로
첨단무기를 사들이고 신무기를 개발하는 등 군사력을 길렀다면 독일 통일의 주역은 서독이 아니라 동독이 됐어야 한다. 그러나 서독의 퍼주기는 동독을
강하게 만든 게 아니라 결과적으로 동독의 해체를 크게 앞당겼다.
정 총장은 미국도 인정했듯이, 북이 미사일 기술 한 가지만으로도
연간 10억 달러 이상의 외화를 벌어들인 사실을 지적하면서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 수익, 인도적 식량지원 등을 군사비, 나아가 핵과 미사일
개발에 전용했을 거라며 김·노 정부의 퍼주기를 북핵 개발의 원흉으로 몰아가는 이들의 황당한 논리를 꼬집었다. 그것보다는 북한 옥죄기와 북이 느낀
체제위기 공포가 북핵 개발을 촉발시켰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정설에 가깝다. 누가 옳고 그르냐가 아니라 상대를 어떻게 해서든 변화시켜 통일을
달성하는 방책을 제시하는 게 통일정책의 존재이유 아닌가. 독일은 그렇게 했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정 총장에 따르면,
한국은행이 추산하는 북의 1인당 국민소득은 대체로 1000달러. 그런데 북한 경제를 연구하는 러시아 등의 전문가들은 그 절반인 500달러 정도로
본단다. 이를 기준으로 시산한 2010년대의 대체적인 남북한 1인당 소득차는 2만 달러 대 500달러. 즉 북의 소득수준은 남의 40분의 1.
남북의 인구가 2 대 1이니까 총량 기준으로는 무려 80 대 1의 격차다.
국방비만 보면, 남의 2013년 전체예산이 약 340조
원이고, 그 중에서 국방예산은 약 10퍼센트인데, 달러로 환산하면 330억 달러 정도. 이에 비해 북한의 1년 예산은 지금 60~70억 달러가
못 된다. 그 중에서 50퍼센트, 즉 절반을 군사비에 쏟아 붓는다 해도 30~35억 달러밖에 안 된다. 남북의 군사예산에 10 대 1의 차이가
난다는 얘기다.
이 실패한 나라, 취약한 북을 바꾸기는커녕 체제 생존을 결과적으로 도와주는 듯한 대북정책, 통일정책. 북을 변화시켜
통일로 가기 위한 방책이 아니라 북의 변화를 가로막고 분단을 영속화하기 위한 방책. 그것으로 이득을 보는 자들…. 유치한 음모론이라고 하겠지만,
그럴 리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는 게 현실이다.
1990년대 중반, 통일 뒤 독일에서 과다한 통일비용이 논란거리가 됐을 때, 일본
장기신용은행이 한반도 통일비용을 예측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독일 사례를 기계적으로 한반도 통일에 대입한 그 연구는 남북한이 통일되면 10년
동안 매년 한국 GDP의 15퍼센트씩을 쏟아 부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서 "한국 혼자의 힘만으로는 감당 못할 테니 결국 일본이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는 논평까지 달았다. GDP의 15퍼센트면 국가예산의 거의 절반인데, 차라리 통일하지 않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킬
만큼의 출혈이다.
그 연구를 계기로 우리 국내에서도 통일비용 연구 붐이 일었고 하나같이 천문학적인 통일비용들을 제시했다.
40퍼센트가 통일을 바라지 않는다고 한 7월 2일의 서울대생 대상 통일의식 관련 조사 발표까지 증폭돼 온 통일에 대한 부정적 사고의 근저에는
이런 경제적 요인, 특히 천문학적 통일비용이 자신의 호주머니를 비게 만들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것을 누구보다 먼저 촉발한 게 일본이라는
게 아이러니라고 정 총장은 지적했다. 이명박 정부의 통일비용, 통일세 얘기도 거기에 연원이 닿아 있다.
하지만 정 총장은 그런 식의
통일비용 산정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독일의 통일비용이 산더미처럼 커진 것은 통화통합 탓이 가장 크다. 동서독 화폐는 당시
명목상으로는 2 대 1, 실질적으로는 4 대 1 정도의 가치 격차가 있었다. 즉 서독의 1마르크는 동독 돈 4마르크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동서독의 통합을 서두르면서, 동독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정치인들이 동서독 화폐를 1 대 1의 동일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간주하는 통화통합을 강행했다. 그 결과 동독인들의 마음을 일시적으로 사로잡았지만, 서독의 4분의 1 가치 밖에 없는 노동력과 기술,
물품에 1마르크의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비용은 4배로 늘었다. 게다가 동독 고향의 땅문서를 지닌 서독인들에게 그 토지에 대한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동독 땅값을 일거에 치솟게 만들었다. 결국 높은 인건비(노동력)와 땅값 때문에 서독 기업들이 동독 진출을 꺼렸고, 그것은 동독경제의 오랜 침체와
동서독 소득격차, 고실업 등을 초래해 결과적으로 통일비용을 엄청나게 부풀렸다.
일본 장기신용은행의 통일비용 연구는 이런 사정을
무시했으며, 엄청난 분단비용도 고려하지 않았고, 또 통일될 경우 비용보다 훨씬 더 클 수 있는 통일수익 또한 논의대상에서 빼버렸다. 정 총장은
말했다.
"그러니 통일을 포기하는 것이 차라리 편하게 사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었습니다.
이게 바로 무서운 분단 이데올로기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참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우리 분단의 근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데 통일 공포증까지 유포시키면서 분단을 지속시키려는 장난을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통일비용 과다론, 이거 정말 무서운 분단
이데올로기입니다." 이것 역시 북한 붕괴론, 흡수 통합론의 득세와 표리관계다.
정 총장이 인용한
신창민 중앙대 명예교수의 '통일비용과 분단비용'(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홈페이지 자료실에 들어가 116번 자료를 클릭하면 볼 수 있단다)을 보면
통일비용은 통일되는 날부터 10년 동안 매년 GDP의 6~6.9퍼센트가 들어가는데, 우리 GDP가 지금 1조 달러 남짓이니 600억~690억
달러쯤 된다. 그런데 통일이 되면 지금 쏟아 붓고 있는 분단비용을 쓰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해마다 30조원 이상, 국가예산의 9~10퍼센트,
GDP의 3퍼센트 정도를 국방비로 쓰고 있다. 기타 외교비용 등을 합하면 해마다 분단비용으로 GDP의 4.35~4.6퍼센트를 쓰고 있는데,
통일되면 이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예상 통일비용에서 이 분단비용을 뺀 순 통일비용은 GDP의 1.65~2.3퍼센트, 평균 2퍼센트 정도가
된다. 2011년 GDP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연간 200여 억 달러, 20조 원 정도가 되는데, 지금의 국방비 연평균 34조 원의 60퍼센트
정도다. 게다가 통일 뒤에는 연평균 11.25퍼센트의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다고 신 교수는 추산했다. 거기서 2퍼센트의 순통일비용 만큼
빼더라도 연평균 GDP 9.25퍼센트의 고도성장을 할 수 있다.
이는 통일비용을 투자로 보는 사고와 맞물려 있다. 철도와 도로,
전기를 연결하는 등 북의 인프라를 새로 깔고 질 좋고 값싼 노동력과 토지를 이용해 공장을 짓고 저렴한 인건비로 경쟁력 있는 고품질의 상품을
쏟아내게 되면 북 주민소득 수준을 단기간에 크게 높일 수 있다. 거기에 필요한 비용을 몽땅 통일비용으로 간주할 수도 있지만, 더 큰 수익을 위한
투자로 볼 수도 있다.
남북 합해 7000만이 넘는 광대한 인구의 거대 시장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중국 동북3성(만주)과 러시아
연해주, 나아가 유라시아 대륙과의 연결로 이어지면서 섬과 같은 지금의 분단 약점을 일거에 털어버릴 획기적 차원 상승으로 나아갈 수
있다.
반면 분단은 그런 가능성을 모조리 차단하고, 한반도 남북 모두 주변 대국들에 종속돼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약자 신세가
되도록 속박한다.
미국 주류세력 역시 한국 우파나 일본 우파들처럼 북이 변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게 아니라 북이 먼저
변하지 않으면 대화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고수하고 있다.
1차 북핵위기 때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를 불과 보름여 만에 중간선거에서
승리한 공화당이 사실상 뒤엎은 것, 2005년 6자회담에서 채택한 9·19공동성명 발표 바로 다음날 미 재무부 매파 네오콘들이
방코델타아시아은행(BDA) 예치 북한 자금 동결조처로 공동성명 자체를 무력화시키고 남북관계 자체를 동결시켜버린 것, 2000년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평양에 가고 조명록 북 차수가 워싱턴에 간 북-미 접근을 그 직후 대선에서 이긴 공화당 부시 정부가 가로막은 것, 2002년
고이즈미 방북과 함께 급진전되던 북-일 접근을 그 직후 평양에 간 제임스 켈리 국무차관보가 촉발한 북의 고농축우라늄 소동과 제2차 북핵 위기로
막아버린 것 등등. 정 총장은 이런 사건들의 실체와 의미를 일목요연하게, 어렵지 않게 설명한다.
오바마의 민주당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마찬가지다. 미국이 바라는 것은, 애초에 그들이 갈라 놓은 대로, 한반도 통일이 아니라 분단체제 유지일지도 모르겠다. 대신 미국이 바라는
통합은 한-미-일 통합이다. 그게 일본 우파 이익에도 부합한다. 한-미-일 통합은 북-중 통합 또한 보장해줄 테니까, 중국 역시 영구분단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약자들의 이해는 아랑곳 않는 대국들의 분할 통치방식이다. 거기에 국내의 일부 광신적 반공투사들이 동조하면서 분단구조
속에서 특혜를 누려온 자신들 기득권을 영구화하려 할 것이다. 그 자신 1980년대 말까지 반공투사였던 정세현의 '통일토크'는 그걸 꿰뚫어 보라고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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