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아]
1949년생. 일흔이 눈앞인데 동안(童顔)이다. 도법(道法·66). 시인(詩人)에 빗대면 이태백이 아닌 두보의 길을 걷는다. 민중 속에서 살았다. 천촌만락(千村萬落)을 누빈 원효(元曉·617~686)처럼 말이다.
“국가 전략이니 하는 것을 잘 몰라요. 묻고 싶은 게 더 많습니다. 대답할 것은 대답하고 못할 것은 거꾸로 묻겠습니다.”
분열을 미래의 걸림돌로 꼽는 이가 많다. 이분화에 가까운 사회다. 이것 아니면 저것, 내 편 아니면 네 편이다. 관념은 남고 실제는 사라졌다. 실제가 아닌 관념을 두고 편을 나눠 다툰다.
도법은 흑백, 백색이 아닌 회색이다. 누구 편도 아니다. 화쟁(和諍)의 시각으로 세상을 본다. 제3지대에 서고자 한다. 관념이 아닌 실제를 들여다본다. 진영이 아닌 진실의 편에서 사안을 보려 한다.
화쟁은 모든 논쟁을 화합으로 바꾸려는 불교 사상이다. 대립과 모순·쟁론을 조화·극복해 하나의 세계를 지향한다. 원효는 저서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에서 화쟁 이론을 전개했다. 원융회통사상(圓融會通思想)이라고도 한다.
도법은 조계종 분란 때마다 수습에 나섰다. 1998년 조계종 분규 때 총무원장 권한대행으로 일했다. 2010년 6월 자승(慈乘·61·총무원장)과 명진(明盡·65·당시 봉은사 주지)이 충돌했을 때 화쟁위원장을 맡았다. 4월 1일 서울 종로구 조계사에서 그를 만났다.
연꽃의 길, 난초의 길
▼ 화쟁위원회 활동은.
“되거나 말거나 합니다. 인생은 빈손으로 온 것이니 이것저것 해본다고 손해날 게 없습니다. 뭐든 열심히 해보자는 주의예요. 뭘 갖고 왔어야 손해날 게 있겠지요.”
▼ 화쟁 사상은 원효에서 비롯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화쟁이 곧 불교예요. 2600년 전 부처님 당대에는 당시에 맞는 이론이 있었습니다. 수백 년 후 대승불교가 일어납니다. 한반도 땅에서는 원효 스님이 화쟁 이론을 정립하고요. 화쟁 사상은 불교의 세계관을 기본으로 삼습니다. 불교는 모든 존재가 관계로 이뤄진 것으로 봅니다. 우주 전체가 하나의 살아 있는 그물(인드라망)이고, 낱낱 존재는 그물코와 같아요. 모두가 연결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존재하는 게 세계와 우주이며, 인간입니다.
낱낱 존재 사이에서 대립, 갈등이 생기게 마련이므로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찾아야 해요. 싸워서 승부 내는 게 아니라 서로가 동의하는 내용을 도출해 삶을 꾸려나가야 합니다. 더불어 살려면 서로 협력하고 나눠야 한다는 게 불교의 세계관입니다. 화쟁 사상은 어느 시대에나 인간이 사는 곳에서 요구되는 것이지요.”
도법은 절집에 앉아 참선, 수행만 하는 승려가 아니다. 속세에 발을 담그고 생명·평화운동을 해왔다.
▼ 난초는 깨끗한 환경에서 살면서 고고한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반면 연꽃은 진흙탕에서 더러움을 정화하며 깨끗하면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워냅니다. 스님께선 법정 스님을 난초에 비유하고 자신은 연꽃과 같은 삶을 지향하겠다는 취지로 말한 적이 있습니다.
“별 얘기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연꽃은 불교의 인간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겁니다. 조계종이 대표하는 한국불교는 연꽃의 인간상보다 난초의 인간상을 추구해왔어요. 은둔이나 수행을 중요시하지요. 성철 스님 같은 분을 난초에 비유하는 것은 수양하면서 꽃향기를 피우셔서입니다. 법정 스님도 그렇고요.
연못에는 똥오줌, 피고름이 뒤섞여 있습니다. 연꽃은 연못에 뿌리내립니다. 더러운 곳에 살면서 오염되지 않고 오히려 연못을 정화하면서 고개를 세워 꽃을 피웁니다. 대승불교의 보살이 상징하는 인간상이 연꽃과 같습니다.”
▼ 원효가 떠오릅니다.
“원효 스님이 연꽃 같은 인간이죠. 천촌만락을 다니며 분노의 현장, 욕심의 현장에 함께하면서 욕심, 분노에 매몰되지 않고 화쟁의 시각으로 문제를 풀었습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내가 해온 것은 뭐….”
어긋남 해석해 조화롭게
▼ 원효는 불교 여러 종파의 사상을 종합하면서 독자적 체계를 세웠고, 동아시아 불교에 큰 영향을 줘 ‘해동종주(海東宗主)’라고 불렸습니다. 하지만 조계종이라는 명칭은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에서 비롯됐지요. 자신이 거주하던 송광사가 있던 송광산을, 중국 선종 승려인 혜능의 사상을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혜능이 살던 광둥(廣東) 지역의 산 이름을 가져와 조계산으로 바꿨고, 자신의 불교 학풍을 조계종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원효와 같은 큰스님이 계신데도 한국을 대표하는 종파의 이름이 중국의 산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게 아쉽습니다.
“우리가 풀고 정리해야 할 일입니다. 한국불교의 공간은 한국이고, 역사도 한국이어야 하겠지요. 한국이라는 땅에서, 또 한국이라는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불교를 우리가 한국불교라고 일컫는지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답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도불교, 중국불교를 주로 얘기합니다. 조계종의 구성원을 봤을 때 이른바 고승이나 전문 학자 중 한국 역사 속에서 구축한 불교를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원효, 의상(義湘·625~702) 스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한국불교를 이야기하지 않지요. 두 스님에 의해 형성된 내용도 잘 안 다루는데,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선종(禪宗·참선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을 중시하는 불교의 종파) 중심의 사고가 강합니다. 전통처럼 굳어졌어요. 한국불교는 선종을 주로 표방해왔으나 내용적으로 보면 원효 스님의 사상에 나타나듯 회통(會通)불교입니다. 요컨대 다양한 사상과 정신을 회통해 갈등을 화해시키고 문제를 통합적으로 다루는 게 본래의 한국불교입니다.”
▼ 원효가 산 시대는 중국에서 당(唐)이 강대국으로 떠오를 때입니다. 고구려, 백제가 멸망하고 신라가 불완전하게나마 통일을 이뤄낸 격동의 시대였고요. 한반도는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후 19세기 말 일본 제국주의가 등장할 때까지 1200년 넘게 친중(親中) 사대주의 사상의 직·간접 영향을 받았습니다. 21세기 한반도는 잠자던 사자 격이던 중국이 슈퍼파워로 재등장하면서 또 한 번 격동의 시대가 열리는 듯합니다. 불교의 시각에서 볼 때 격변의 시기에 국민이 사상·문화적 중심을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격동의 시대 위한 會通
“늘 소박하게 생각하면서 살아와 거창한 것을 잘 모릅니다. 소박한 생각으로는, 바깥의 변화는 물론 중요하고 바깥의 이런저런 일을 조합해 미래를 조망해야겠으나 절실한 것은 우리의 정체성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일찍이 21세기에는 지구촌을 넘어 우주의 시각으로 지금, 이곳의 문제를 다뤄야 한다고 했습니다. 좁게 봐선 안 됩니다. 삶을 넓게 보려면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어떻게 갖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뭐랄까, 열등의식 혹은 피해의식에 길들지 않나 싶습니다.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해요.
원효, 의상 스님의 사상은 21세기를 조망하는 세계관으로도 충분히 설득력을 가졌습니다. 모든 게 관계로 얽혔으며, 이뤄졌다는 것을 바탕 삼아 문제를 풀어야 해요.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의 역학관계가 복잡하게 얽혔지만 한반도의 주체가 세계정신, 나아가 우주정신에 부합하는 세계관을 기초로 해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이런 토대를 구축해냈을 때 작은 나라가 가진 한계를 넘어설 수 있어요.”
|
도법(오른쪽)은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 4대 강국에 둘러싸인 우리가 사상·문화적 중심을 올바르게 세우지 못하면 강대국에 휘둘리며 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1200년 넘는 친중 사대주의의 뿌리가 상당히 깊습니다. 1945년 미군이 진주한 후 친미 사대주의가 나타났으나 21세기 접어들면서 약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상·문화적 중심을 굳건하게 세워 나라를 발전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대가 달라졌잖아요? 분단된 나라지만 우리의 위상과 역량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큽니다. 나라를 자랑할 때는 자부심을 갖고 말하는데, 국제관계에서는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북한 문제를 다루는 것을 보면 과거의 위상, 역량을 바탕으로 해석하고 바라보는 양상이 보입니다.”
▼ 북한 핵 문제만 해도 중국이 북한에 압력을 행사해 해결 방안을 찾기를 기대하는 경향이 드러납니다. 역량을 직접 발휘하려고 하기보다는 외세에 의존해 문제를 풀려는 겁니다.
“위상이나 역량에 맞는 안목을 갖추지 못했어요. 자신감, 포용력을 가진다면 북한 문제를 푸는 방식이 크게 달라질 겁니다. 강대국과의 관계를 조율하는 일도 마찬가지고요.
안상수 홍익대 교수가 디자인과 관련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잘한다는 평가를 듣는데, 서양 사람과 일하면 위축됐답니다. 현대 디자인은 서양에서 들어온 것이라 자신감을 갖지 못했다는 거예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 한글을 보면서 눈을 떴답니다. 한글이야말로 최고의 디자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거예요. 그렇게 정체성에 눈뜨면서 위축감이 싹 사라져버렸다고 해요.”
안상수(63) 교수는 1985년 한글 글꼴 ‘안상수체’를 개발한 그래픽디자이너다.
“강대국에 휘둘리지 않고 중심을 잡으려면 우리가, 우리의 역사 속에서 갖게 된 세계관, 정신, 실천적 방법론을 당대에 맞게 잘 정립해나가면서 국민이 그것을 당대의 세계관으로 소화하게 하는 게 기본일 것 같습니다. 격동의 시대라지만 예전에도 똑같이 어려웠습니다. 우리의 색(色)을 갖고 우리의 길을 가되 주변과 잘 어울려야 합니다. 21세기 시대정신에 맞는 보편적 세계관과 함께 유·불·선 삼도를 회통한 최치원, 세종대왕, 동학의 정신 등을 한반도 구성원의 세계관으로 확립해야 합니다.”
진영, 이념, 지역 갈등이 일소되기는커녕 오히려 고착화하는 듯하다. 승자독식의 정치가 갈등을 부추긴다.
▼ 편가르기가 심합니다.
“인간은 편 갈려 살아왔습니다. 국가, 민족 같은 것으로 편 갈리고, 이념으로 나뉘어 극한 갈등도 겪었습니다. 편 가름은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는 겁니다. 생존경쟁, 약육강식의 논리에서 적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죠.
한국 사회로 시야를 좁혀봅시다. 20세기를 지나면서 좌우 갈등, 동족상잔, 남북분단이 나타났습니다. 21세기 한국도 갈기갈기 찢어져 있습니다. 당면한 문제는 두 갈래예요. 하나는 인간 사회에서의 극단적인 대립, 다른 하나는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나타나는 단절과 파괴를 어떻게 극복할지입니다.
‘인간 간에, 인간과 자연 간에 협력하고 나누면서 조화롭게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가장 절실한 어구(語句)가 아닐까요. 화쟁의 세계관과 방법론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대가 당대이고, 어느 곳보다 필요한 곳이 한반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미안해, 잘못했어, 달라질게
▼ 화이부동쟁이불이(和而不同爭而不二·화합하나 같지 않고 다투나 다르지 않다)에 기초해 화쟁을 이끌어내고 열린 마음으로 회통을 통해 진리를 찾고 통합을 이루자는 게 원효의 주장인 것으로 압니다. 정치·사회적 갈등이 격한 한국 사회에서 화쟁, 회통의 사상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화쟁 이론의 핵심은, 간략하게 말하면 ‘이치에 어긋나지 않게’ ‘정서를 다치지 않게’입니다. 이치는 진실에 토대하는 것입니다. 진실을 잘 짚어 드러내더라도 정서적으로 얽힌 게 있게 마련입니다. 정서도 잘 살피고 헤아려 문제를 해결하는 게 화쟁입니다.
세월호 침몰이 던진 숙제를 제대로 풀면 한국 사회가 달라지리라고 봅니다. 비극 혼란 부패 무책임 무능 같은 낱말이 우선 떠오르지만 사고가 났을 때 국민의 반응에 주목해야 합니다. 좌파도 우파도, 자본가도 노동자도, 여당도 야당도, 전라도도 경상도도 인간이 표출할 수 있는 가장 거룩한 마음을 나타냈습니다. 내 아픔처럼, 내 슬픔처럼 여겼습니다. 당시의 마음을 통해 현재적 삶을 가꿔나가면 우리가 인간다워진다고 봐요. 누군가의 슬픔, 아픔에 사람으로서의 반응과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인간이라고 할 수 없어요. 다들 미안해, 잘못했어, 달라질게, 새로워질게라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현재 상황은 어떻습니까. 사안이 정쟁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길이 있겠지, 여겼는데 정쟁거리로 추락하는 현실을 보면서 맥이 탁 풀리더군요. 누군가의 슬픔, 아픔을 어떻게 정쟁의 도구로 삼습니까.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봅니다. 화쟁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과 지혜가 모여 인간의 고귀한 마음이 삶의 현장에서 발휘돼야 해요.”
그가 석가모니의 일화 한 토막을 소개했다.
“강(江) 양안에 두 부족이 살았습니다. 가뭄이 들어 강물을 두고 다툼이 벌어집니다. 전쟁이 날 것 같아 부처님이 달려갔습니다. 부처님은 누가 잘했느냐, 누가 잘못했느냐, 누가 옳으냐, 누가 그르냐를 묻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부처님이 말합니다. 사람 목숨이 중요한가, 물이 중요한가? 정신이 번쩍 드는 겁니다. 목숨이 당연히 소중하지요. 세월호와 관련한 일도 비슷한 사안입니다. 세월호 문제를 화쟁적으로 풀면 현대사가 잉태한 여러 문제를 해결할 길이 보일 것 같아요.”
싸움 말리고, 흥정 붙이고
▼ 인간의 본성에는 이기심도 있습니다. 세월호 문제가 정쟁으로 흐른 것은 정치인의 이기심 탓인 것 같습니다.
“편 갈림이 너무 심해요. 진실은 사라져버리고 이쪽 시선, 저쪽 시선만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좌파 민심, 우파 민심만 있습니다. 우파는 우파 민심이 국민의 생각이라고 주장하고 좌파는 좌파 민심이 국민의 견해라고 내세웁니다. 그러고는 힘겨루기를 합니다. 종교와 지식인이 건강하다면 정파적으로 문제를 이용하거나 끌고 가는 것을 막았을 겁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세월호에서 희망을 발견하려는 건 삶을 좀 더 본질적으로 성찰할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 화쟁위원회가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쌍용자동차 해고자, 밀양 송전탑 등 사회문제가 발생한 곳을 찾아가 문제를 풀고자 노력했습니다.
“사회문제라고 표현했는데, 종교문제이기도 합니다. 불교는 사람의 고통에 가장 큰 관심을 갖습니다. 종교가 사회나 정치에 참여하는 게 옳으냐고 묻는 사람에게 묻고 싶습니다. 고통이 있는 현장을 떠나 종교가 있을 곳이 과연 어디일까요? 정치문제든, 사회문제든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는 현장을 떠나고서도 존재할 곳이 있는 종교가 과연 필요할까요?
그간 편을 갈라 힘을 기른 후 승부를 내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소모적, 파괴적이었다는 게 역사적 경험입니다. 개개인의 아픔까지 치유하지는 못하더라도 다수의 사람이 고통을 겪는 현장에서는 화쟁의 관점에서 길을 찾아보는 게 좋습니다. 강정마을, 밀양, 쌍용차에 간 것도 그래서예요. 쉽게 말해, 다투는 사람이 있으면 싸움을 말리고 흥정을 붙이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강정 가면 좌파로 몰려
▼ 성과는 어땠고, 한계는 무엇이었는지요.
“싸우는 사람만 있는 게 우리 사회의 문제예요. 진영을 나눠, 편을 나눠 싸울 준비만 합니다. 진영, 편을 잇는 다리가 너무 없어요. 화쟁위원회를 통해 싸움을 말리고 흥정을 붙이면서 문제를 풀어가려 했습니다. 강정, 밀양, 쌍용차를 어느 한 편에 서서 간 적이 없습니다. 강정 가면 좌파, 밀양 가면 진보라는 세상이잖아요. 다 같이 살아야 할 사람인데 함께 사는 길은 없을까, 편 갈라 싸우는데 다른 길은 없을까를 고민했습니다.
그동안 늘 세상에서 떨어져 살던 조계종단이 사회적 아픔을 품에 안고 불교적으로 사안을 풀고자 하는 몸짓을 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종교는 세상의 아픔을 품에 안고 고통 받는 사람에게 희망을 줘야 해요. 조계종의 이러한 변화는 우리 불교가 대승불교의 전통에 걸 맞은 진정한 한국불교로 변화하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손에 잡히는 성과는 없었지만 ‘편 갈라 승부를 내는 방식에서는 희망이 나오지 않는다, 제3의 길을 여는 게 필요하다’는 사회적 여론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구실을 했다고 볼 수 있어요.”
▼ 조계종 안에서도 화쟁이 필요할 듯합니다.
“화쟁의 논리로 봉은사 문제를 다뤘습니다. 명진 스님이 조금 불만스럽게 됐지만…. 70~80%는 잘 풀렸다고 생각해요.”
▼ 스님께서 조계종 개혁과 쇄신의 선두에서 목소리를 크게 냈으면 좋겠는데, 이런저런 분쟁이 생길 때마다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아 개혁의 대상이 돼야 할 분들이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는 비판도 나옵니다.
“그 얘기, 귀가 따갑게 듣습니다. 총무원이라고 하는 조계종단 집행부가 부패한 불교 권력인데, 내가 방패막이 노릇을 한다는 거거든요. 그렇게 해석될 수는 있다고 봐요. 보는 사람마다 관점이 다르니까요. 한국불교에 쇄신이 필요하다고들 말합니다. 조계종도 쇄신하겠다고 밝히고요. 그렇다면 쇄신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어야 할까요. 이것 또한 관점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이 다릅니다.
종단의 주체들이 정치를 잘하면, 행정을 잘하면, 경제를 잘하면 한국불교가 불교다워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것보다 우선하는 게 세상의 아픔을 품에 안고 치유해내는 불교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한국불교가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진짜 불교’가 된다고 봐요. 조계종은 종교집단입니다. 종교 본연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쇄신의 내용을 종단 내부의 정치적 다툼과 관련한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종교 본연으로 돌아가는 게 진짜 개혁입니다.
화쟁이라는 이름으로 이뤄졌지만, 조계종이라는 거대 집단의 총무원장이 정치·사회적으로 민감한 현안에 지금처럼 관심을 갖고 행보한 적이 없습니다. 자승 총무원장이 대단히 보수적인 사람이기는 하지만, 여러 사람이 화쟁적인 접근 방안을 모색해 제안하면 받아서 움직입니다. 총무원장이 강정마을에도 가고, 쌍용자동차에도 갔어요.
총무원장이 통합진보당 사태 구속자 구명 탄원서를 냈습니다. 염수정 추기경도 비슷한 내용의 탄원서를 썼고요. 생각보다 굉장히 예민한 문제예요, 이게. 이른바 진보진영이라는 곳에서도 몸을 사렸습니다. 조계종 수장이 이런 행보를 한 것은 체질이 변화한다는 방증입니다. 인사 문제가 불합리하다, 이런 걸 바꾸는 게 그냥 개혁이라면 체질 변화는 진짜 개혁입니다.”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다”
그가 덧붙여 말했다.
“조계종단이 50년이 됐지만, 조계종 수장이 사회의 민감한 현안과 관련해 지금처럼 행보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쌍용차 문제를 예로 들면 지부장 한 분이 단식을 오래해 죽게 생겼습니다. 단식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단식을 중단시켜야 하는데, 명분이 필요하잖아요. 총무원장이 방문해 소망을 전하는 형태로 명분을 만들어 사람을 살리려 했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도 사람이 산 뒤에나 가능한 겁니다. 총무원장이 방문하기 전 병원으로 실려가 설득이 실제로 이뤄지지는 않았습니다.
자승 스님이 대단히 보수적인 사람이고, 조계종단 또한 보수적인 데다 정부와 관계된 일이 많기에 총무원장이 알아서 대처하지는 못합니다. 누군가 합리적 제안을 내놓으면 어지간한 것은 수용하고 총무원장 나름대로 약속한 것을 지킵니다.”
그는 “나는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한진중공업 사태 때 희망버스 하는 사람들이 함께 가자는 겁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절대로 안 간다고 했습니다. 화쟁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해요. 쌍용차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와 관련한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화쟁위원장이 참석해야 한다고 해 공부나 해보자고 갔습니다. 사안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서 ‘이게 뭐야’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문가들이 와서 진단하고 내린 결론이 뭐었냐면요. 단순화하면, 회사 나쁘다, 정부 잘못한다, 그러므로 강력히 투쟁해 뜻한 바를 쟁취하자였습니다.”
▼ 계속 그래왔죠.
“어마어마하게 투쟁해왔는데 해결은 안 되고 스무 명 넘는 노동자가 죽어나갔습니다. 투쟁력은 형편없이 무너져 회생 불가능해 보였고요. 세상으로부터도 잊히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강력하게 투쟁하는 것은 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노동자 편에서 뭘 하자고 하면 제도권 종단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회 통합의 관점에서 해답을 찾아내는 일에 종교계가 나서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33명의 종교인이 원탁회의를 꾸렸습니다. 해고자도 만나고, 사장도 만나고, 정부도 만났어요. 처음에는 노동자들이 냉소적이었습니다. 이게 뭐하는 짓거리냐, 약자 편에 딱 서서 부당한 회사와 정부를 타도해야지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원수 비슷하게 돼버린 회사에 남은 노동자와 해고 노동자를 만나게 하는 등 이런저런 성과를 냈습니다. 해고자들이, 많은 사람이 자기들 편에 서서 싸워줬지만 한 걸음도 못 나갔는데 종교 원탁회의가 가능성을 열어줬다고 말했습니다. 회사에 남은 이들의 노조와 해고된 분들이 지금도 만납니다.”
우파 민심, 좌파 민심
화쟁을 통해 진영 싸움을 극복하는 길을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한국에서는 진실을 물을 수가 없습니다. 단순화해 말하면 보수와 경상도는 ‘박정희 진짜, 김대중 가짜’, 진보와 전라도는 ‘김대중 진짜, 박정희 가짜’, 딱 이거거든요. 경상도 가서 ‘박정희가 진짜 맞아?’라고 물으면 돌 맞게 생겼고, 전라도 가서 ‘김대중은 가짜 아니야?’라고 물어도 똑같습니다. 진실이 설 땅이 없는 겁니다. 내 편, 네 편 문제를 풀지 않고서는 바람직한 미래가 열리지 않습니다. 진영 싸움, 남남 갈등은 지역 다툼이면서 삶의 이해관계까지 얽혔습니다. 이 같은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내가 가진 화두입니다. 이 화두를 풀고자 화쟁이라는 것을 해왔습니다. 사회의 모든 문제를 광장으로 끌어내야 합니다. 이쪽, 저쪽만이 아니라 제3의 시선을 가진 이들이 둘러앉아 화쟁의 길을 찾아야 해요.”
▼ 보수, 진보 갈등은 남북 간 대립과 착종, 결합한 예가 많습니다.
“남북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의 걸림돌은 대한민국에 있다고 봐요. 편 갈라 다투는 것을 그냥 놔둔 채 북한 문제를 풀어낸들 희망이 있겠습니까. 모두가 싸움의 주체가 돼 있는 사회에서 통합적이며 생산적인 힘이 어떻게 나올 것이며, 희망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화쟁적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화쟁적으로 미래를 설계하는 흐름을 만들어내는 게 불교가 통일에 기여하는 길입니다. 조계종이 북한을 상대로 뭔가 하는 것보다 화쟁의 분위기를 만드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아요.
북한은 제거해야 할 악마인가요, 함께 살 동포인가요? 공론이 ‘동포’라면 정책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는 한쪽은 동포로, 다른 쪽은 적으로 봅니다. 적으로 보는 이들이 집권하면 이쪽으로 가고, 동포로 보는 이들이 집권하면 저쪽으로 가는 엎치락뒤치락인 게 현실입니다.
대한민국이 역량을 발휘해야 남북 문제가 풀립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해결은 어렵다고 봐요. 좌파는 좌파대로 자신이 생각하는 쪽으로만 문제를 풀려 하고, 우파는 우파대로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만 상황을 몰고 갑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내용을 보면 나와 내 집단의 이해를 중심으로 사안을 들여다보는 거죠. 대한민국이 이렇듯 갈라진 상황에서 분단의 장벽이 무너지면 소모적 상황은 더욱 확대될 겁니다.
상황이 이런데 강대국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이리저리 휘둘릴 수밖에요. 중심을 잘 잡아야 파도를 넘습니다. 갈기갈기 찢겨 있으면 헤쳐나갈 힘이 나오지 않아요. 남북 문제를 푸는 최선의 방향 역시 화쟁입니다. 북한을 함께 살 동포로 봐야 한다는 것을 화쟁적으로 공론화하는 것은 화쟁의 생활화, 화쟁의 대중화의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불교가 그러한 역할을 해야 합니다.”
▼ 인간의 보편적 가치와 관련한 문제조차 진영 논리에 휘둘립니다.
“제3지대가 단단하게 구축되면 좋겠습니다. 이쪽이냐, 저쪽이냐가 아니라 국민의 관점에 서는 것 말입니다. ‘진보에도 관심 없고 보수에도 관심 없다. 좌파도 잘 모르고 우파도 잘 모른다. 인간적으로, 사회적으로 합리적 길을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진 제3의 시선이 역할을 해야 합니다.
나는, 나를 회색분자라고 표현합니다. 갈지자(之) 행보예요.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니, 왜 거기 갔느냐고 시비하지 말라고 농담처럼 말합니다. 한국 사회는 제3지대가 거의 없습니다. 어느 편에도 서지 않은 채 싸움을 말리고 흥정을 붙이는 사람이 없어요. 회색분자가 많아져야 해요. 제3의 시선이 많아져야 합니다.”
‘붓다로 살자’ 운동
▼ 어느 쪽에도 서지 않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이해관계가 걸린 데다, 양쪽 진영에서 공격합니다.
“자포자기로 사는 거예요. 저기 가면 이쪽에서 욕하고, 여기 가면 저쪽에서 욕합니다. 주변의 시선을 감내할 용기가 필요할 수밖에 없죠. 어느 편에도 서지 않은 회색지대에서는 실제가 무엇이냐를 봅니다. 박정희가 진짜입니까? 김대중이 진짜입니까? 박정희가 가짜예요? 김대중이 가짜예요? 한쪽은 무조건 나쁘고, 한쪽은 무조건 좋다는 것은 관념입니다. 한국 사회는 실제가 아닌 관념을 두고 편을 나눠 싸웁니다. 그렇다면 실제는 뭔가요? 두 사람 다 장점·단점이 있고, 공과(功過)가 있죠. 회색지대, 제3의 지대가 넓어지면 각 진영이 실제를 바탕으로 한 합리적 논쟁에 나서게 됩니다. 관념으로 다툼하는 이들은 양 극단으로 쫓겨 가겠죠.”
▼ 어떤 일을 할 계획입니까.
“앞으로도 화쟁적 실천과 모색을 하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원효, 의상 스님의 세계관과 정신, 실천론을 우리시대에 맞게 계승한 ‘붓다로 살자’ 운동도 펼칩니다.”
▼ 조계종 차원에서 하는 건가요.
“네. 공론화하지는 않았지만 시작했습니다. 붓다로 살자가 무슨 뜻이냐면, 한국불교는 그동안 부처가 되자는 게 밑바탕이었습니다. 사람은 중생이기에 수행해 부처가 돼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승불교는 사람은 본래 부처이므로 다시 부처가 되는 게 아니라 붓다로 살아야 한다고 봅니다. 대승불교 전통을 시대에 맞게 구현해보자는 뜻에서 ‘붓다로 살자’ 운동에 나선 것입니다. 붓다로 살자의 구체적 실천 방법 또한 화쟁이라는 낱말로 요약됩니다.”
도법과의 대화는 대담을 마무리한 후에도 한동안 계속됐다.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는 나 홀로 수행은 필요 없다”고 그는 말했다.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아니다”라고도 했다. 예수 또한 “네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고 했다. 편 갈린 사회를 화쟁해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