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시절 동독은 베를린장벽 안쪽에 내벽을 추가하기도 했다. 이중 장벽인 셈이었다.(베를린 시내 내벽 전시공간서 촬영, 베를린=연합뉴스)급변 상황서 긴박하게 대처하며 조기통일 완성
<※ 편집자주 = 현대사의 기적으로 불리는 1990년의 독일 통일 25주년 기념일이 2주일 남았습니다. 베를린장벽 붕괴에 이은 독일 통일은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면서 전후 독일을 유럽의 중심국으로 자리잡게 했습니다. 독일은 한때 통일 후유증으로 고통받았지만, 하나 됨의 저력을 토대로 유럽 최대경제국이자 리더십 국가로 성장했습니다. 옛 동·서독 지역 간 경제 격차와 마음의 장벽은 여전하지만 통일은 그보다 훨씬 큰 분단 비용을 줄이고 통합의 무한 잠재력을 독일인들에게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연합뉴스는 1989∼1990년 통일 과정과 조건, 과거 동·서독 지역 격차, 분단 시절 동독 탈출을 감행한 러브스토리를 4회에 걸쳐 전합니다.>
(베를린=연합뉴스) 고형규 특파원 = 1987년 7월 당시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독일 대통령에게 독일 통일은 100년은 지나야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1년 6개월이 흐른 1989년 1월 에리히 호네커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SED) 서기장은 베를린장벽은 50년이나 100년은 더 버틸 것이라고 장담하며 그해를 열었다.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 세력과 소련을 필두로 한 공산주의 블록 간 진영 대결 구도가 고르바초프의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무너지는 과정에서 나온 이들 예언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이는 그들 스스로마저 이른바 현실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들의 변화 속도와 폭을 가늠하지 못한 결과였고, 어떤 면에선 그런 변화에 대한 불길한 두려움을 자기 기만하는 주술적 레토릭이 가져온 필연이었다.
동독인들의 평화투쟁이 이끈 1989년 11월 9일의 베를린장벽 붕괴가 이듬해 10월 3일 독일 통일로까지 내달리는 데에는 불과 329일이란 시간 밖에 필요하지 않았다.
베를린장벽을 넘으려다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는 그림이다. 공식 희생자만 136명이었다.(이스트사이드갤러리서 촬영, 베를린=연합뉴스)20세기가 놀란 베를린장벽 붕괴의 낌새를 동독 라이프치히 니콜라이교회 예배후 300명이 나선 1989년 3월 13일의 여행자유 요구 시위에서, 그리고 5월 2일 헝가리의 오스트리아 국경 통제 철조망 제거에서 알아차린 이는 거의 없었다.
그들 행위는 하지만, 1989년말까지 150만 동독인으로 서독으로 가고파 한다는 일요신문 벨트암존탁의 보도와 국경 탈주 발견 시 발포 행위를 중단하겠다는 힘 빠진 호네커 정부의 태도와 겹쳐 장벽 붕괴의 서막을 알리고 있었다.
독일 내부에선 5월 7일 실시된 동독 지방선거 부정이 동독인들의 분노를 정치적으로 조직화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밖으로는 서독행을 원하는 동독 난민들이 프라하, 바르샤바, 부다페스트의 서독 영사관으로 몰려들면서 격랑의 정세를 예고했다.
안팎의 상황 변화에 맞물려, 이후 동독 평화혁명을 촉발한 니콜라이교회의 월요시위에는 9월 4일 1천 200명이 모이고, 9∼10월 지금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장벽 붕괴 후 가세한 민주약진 같은 저항적 야당 세력이 등장했다.
독일 당국이 통독사(史)를 기술할 때 '첫 번째 하이라이트'로 꼽는 10월 9일 라이프치히 월요시위에는 무려 7만 명이 운집했다. 이 시위는 그해 6월 천안문 사태와 달리 무력 진압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당시 고르바초프와 호네커가 탱크와 총칼로 짓밟고 나섰다면 모든 것은 끝났을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민중의 집단적 저항과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역류시킬만한 힘이 그들에겐 이미 없었다는 진단과 함께다.
호네커가 결국 10월 18일 서기장에서 물러나고 에곤 크렌츠가 바통을 이어받는 동독 권력지형의 일대 변화는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호네커의 사임은 동독인들의 자유투쟁을 억제할 카드가 되지 못했다. 10월 말 동독 경제는 파산 상태라는 전문가 그룹의 진단이 나온 가운데 저항은 들불처럼 번졌고, 체코 정부는 동독인들의 서독행 진로를 열었다.
베를린장벽 붕괴 직후 '동방정책'의 빌리 브란트 전 총리 연설빌리 브란트 전 총리는 당시 "이제 함께하는 것은 함께 성장할 것"이라고 연설하면서 동, 서독의 동반성장 가능성을 기대했다. (베를린 시내 장벽공원 사진전서 촬영, 베를린=연합뉴스)지금 독일의 재무장관을 맡고 있는 볼프강 쇼이블레 당시 서독 내무장관은 동독 정부에 수 십억 마르크의 경제지원을 약속하고, 그 대가로 동독 정부는 새로운 여행법을 내놨지만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다.
11월 6일 하루에만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에 각기 30만 명, 10만 명의 시위대가 거리로 나와 공산정부를 반대했고, 이는 동독 내각의 총사퇴와 온건파 한스 모드로브 총리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며칠 뒤 11월 9월 귄터 샤보브스키 동독 정치국원의 동독주민 서독여행 상시허용 발표는 베를린장벽 앞으로 동독인들을 몰려들게 만들었고, 이들은 1961년 건설 이후 28년을 버틴 냉전의 철옹성을 현장에서 허물었다. 샤보브스키가 다음날 이후였던 발효 시점을 '당장'이라고 착각해 발표한 것이 장벽 붕괴의 직접적 계기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장벽 붕괴는 즉각 통일의 열망을 들끓게 했다. 헬무트 콜 서독 총리는 동독 정부에 근본적으로 개혁하면 모든 것을 지원해 준다고 약속했고, 모드로브 동독 총리는 "변화는 되돌이킬 수 없다"며 현실을 직시했다. 그 사이 동독인들은 11월 20일 월요시위부터 "우리가 인민이다(
Wir sind das Volk)"라는 기존 구호에서 나아가 "우리는 한 민족이다(
Wir sind ein Volk)"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콜 총리는 11월 28일 독일과 유럽의 분단 극복을 위한 10개 정책 발표를 통해 단계적 통일 비전을 제시하고, 1990년 벽두 프랑수아 미테랑 당시 프랑스 대통령에게 통일 추진에 관한 협조 의사를 전달받는 등 주변국 설득 외교 채널을 가동했다.
그러나 당시까지만해도 모드로브 동독 내각은 파탄 난 경제를 살리며 서독과 공존하려는 데 주안점을 두었고, 서독 역시도 동독을 자극하지 않고 적어도 겉으로는 공생을 도모하는 데 무게를 실었다.
콜 총리가 2월 15일 연방의회 보고에서 통일이라는 목표 지점에 가까이 와 있다고 보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당시 서독 정부의 조심스런 태도를 방증한다.
그러나 콜은 앞서 2월 10일 모스크바에서 고르바초프를 만나 독일 통일은 독일인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확인받고, 2월 24일에는 미국으로 날아가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통독 추진 의사를 전하며 지지를 얻는 등 통독 행보에 속도를 냈다.
1990년 10월 3일 통일의 그날에 서독 연방의회 앞(독일연방정부 운영 홈페이지 이미지 복사, 베를린=연합뉴스)이에 덧붙여 동독에선 3월 18일 첫 자유선거를 통해 콜이 이끄는 서독 기독민주당(
CDU)과 함께하는 동독
CDU 주도의 로타어 데메지에르 총리 내각이 출범하면서 '조기통일론'은 탄력을 받았다.
그 기조에 따라 동·서독은 5월 '화폐·경제·사회통합 조약'으로 7월 통합 마르크화 사용을 발효하는 데 합의하고, 8월 말 900쪽 분량의 통일협정에 사인함으로써 통일로 급속히 내달렸다.
독일은 앞서 통일 달성을 위해 동·서독과 소련·미국·프랑스·영국 등 전승 4개국 간 '2+4' 회담을 수 차례 가동한 끝에 9월 12일 통독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잔류와 소련군 철수에 사인하는 등 외교적 문제를 마무리했다.
나치 정권이 일으킨 2차 세계대전 전후, 승전국인 미국 프랑스 영국은 서독 영토를, 소련은 동독 땅을 각기 점유한 가운데 동, 서독 정부는 군사와 외교 등 주권적 사항을 이들 국가에 의해 제약당하고 있었다. 그 점에서 2+4 조약을 통한 통독은 온전한 주권국의 거듭남이란 의미도 있다.
서독은 이 과정에서 통독의 군사력 위협을 우려하는 소련에, 통독의 나토 잔류 및 통독군 37만으로 제한 동의와 소련군 철수 비용 대가로 150억 마르크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독일은 마침내 2일 동독 의회를 해산하고 3일 동독의 서독 편입을 공식 발효하면서 통일을 완성했다. 통일 독일은 직후, 2차 대전 패배 후 폴란드에 영토의 약 30%를 되돌려 주겠다며 그은 기존 오데르-나이세 국경선을 확정하는 조약을 맺는 등 후속 작업도 매듭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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