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무역 1조 달러’]<下>산업체질 바꿀 개혁 서둘러라
한국 경제성장의 키를 쥐고 있는 수출이 ‘날개 없는 추락’을 이어가고 있지만 정부는 여전히 뚜렷한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수출 부진은 세계 경기 부진에 따른 일시적인 현상”이라며 현 상황을 가볍게 넘기려는 분위기도 눈에 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상황을 훨씬 더 심각하게 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수출 위기가 한국 경제의 구조적인 현상이라는 점에서 땜질식 단기 처방 대신 산업정책의 틀을 바꿀 수 있는 근본 대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 세계 경제만 탓하면서 수출·제조업 홀대
현 정부는 2013년 출범 이후 지금까지 ‘무역투자진흥회의’를 모두 8차례 열었다. 박근혜 대통령 주재로 열리는 경제·산업 분야의 가장 중요한 회의로 박정희 정부 시절 수출진흥회의를 확대 개편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 회의에서 수출이 주된 의제로 오른 것은 올해 7월 딱 한 차례뿐이었다. 그나마 이때 나온 대책도 무역금융 확대, 판로 지원 등 이미 발표된 내용의 재탕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무역투자진흥회의에서 수출 대신 주요 안건으로 올라왔던 서비스업 규제 완화, 기업 투자 활성화 대책 등은 이익단체의 반발 및 국회의 벽에 막혀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정부가 환율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도 수출 문제에 안이하게 대처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본이 2012년 아베노믹스를 적극 추진하기 시작한 이후 원화 가치는 엔화에 비해 50% 이상 올랐지만 정부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오정근 건국대 특임교수는 “역사적으로 엔화가 심각하게 약세를 보일 때 한국 수출이 제대로 버틴 적이 없었다”며 “그런데도 정부는 공무원 휴가를 장려하고 기업 배당을 권유하면서 경기를 ‘반짝’ 살리는 데만 급급하다”고 꼬집었다. 정부가 재정을 푸는 ‘단기 경기부양’에 몰두하는 반면 산업 구조개혁처럼 어려운 과제는 상대적으로 피해 왔다는 지적이다.
정부가 수출 부진의 원인을 저유가, 세계교역 둔화 등 외부 탓으로만 돌리면서 수출 품목·지역 다양화와 같은 해묵은 과제들이 소홀히 다뤄졌다는 비판도 있다. 신승관 국제무역연구원 동향분석실장은 “중국 경제가 수출에서 내수중심 경제로 바뀌고 있는 만큼 소비재와 서비스 쪽으로 대중 수출의 무게 추를 옮겨야 한다”고 말했다.
○ “장·단기 대책 병행해야”
위기 돌파를 위해 새로운 주력 수출품을 발굴해야 한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한국의 전체 수출에서 정보기술(IT), 기계, 철강, 화학 등 10대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980년 55.9%에서 2014년 86.3%로 급증했다. 제조업의 혁신 역량을 높이는 것도 필수적이다. 미국, 독일 등 제조업 강국들은 3D프린팅, 지능형로봇, 사물인터넷 등 차세대 제조업 기술 선점 경쟁을 펼치고 있다. 김상훈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국의 IT 인프라 환경은 뛰어나지만 기업 간 격차가 크고, 관련 기술의 경쟁력은 낮은 편”이라며 “IT 기반을 활용한 원천기술 개발 및 시장 개척 등을 위한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단기적으로는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을 비롯해 수출 지원을 위한 법안들을 조속히 통과시켜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한중 FTA의 경우 올해 안에 발효되지 못하면 하루에 40억 원, 1년간 1조5000억 원의 수출액이 사라질 수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중국의 비준 일정을 감안할 때 이달 중순까지 한국의 국회가 비준을 마쳐야 한중 FTA가 차질 없이 추진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선제적인 사업 재편과 구조조정을 지원할 수 있는 법제도의 정비도 시급하다.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글로벌 기업들은 업종 전환, 인수합병(M&A) 등에 나서고 있지만 한국은 조선·철강·석유화학 등 주력업종이 생존의 위기에 몰리면서도 구조조정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는 상태다. 정상 기업의 구조조정을 지원하는 ‘기업 활력 제고를 위한 특별법(기활법)’ 역시 “대기업에 과도한 특혜”라는 야당의 반대로 국회에서 논의조차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유재동 jarrett@donga.com·김재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