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저자들] 모순적 세상 타파하기 위해 경계인의 삶을 산 비평가… 그는 '지성적 아웃사이더'
[에드워드 사이드]
이스라엘 군에 돌던진 컬럼비아대 교수
팔레스타인 출생, 미국 살며 기독교 믿어
"한국, 美제국 비판하며 왜 中엔 침묵하나"불과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저서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1935~2003)는 평생을 망명객과 변경의 지식인으로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으로 하루아침에 집과 나라를 잃고 부모를 따라 이집트의 카이로로 이주했다. 그러나 학교에서 난민이라고 차별과 놀림을 받자 고교 시절 홀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사이드에겐 돌아갈 조국과 고향이 없었다.
그는 늘 '다른 것'과 동거했다. 집에서는 아랍어를 썼지만 대학에서는 영어로 강의하는 영문학 교수였고, 아랍인이었지만 이슬람교도가 아닌 기독교도였으며, 팔레스타인 사람이었지만 무슬림 테러리즘에 대한 신랄한 비판자였다. 그는 또 아라파트에 의해 팔레스타인 망명 국회의원에 임명되었지만 아라파트의 급진 정책을 비판하고 사임했으며, 미국에 살았지만 워싱턴의 편파적 중동 정책을 비판했다. 그는 아랍 세계와 미국, 이슬람과 기독교, 그리고 동양과 서양이라는 두 세계의 경계에 선 외로운 지식인이었다. 뉴욕타임스는 그를 "스스로 선택한 망명객"이라고 불렀다.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대한 서양의 편견을 다양한 문헌 분석을 통해 강력하고 설득력 있게 비판한 명저다. 이 책 서문에서 사이드는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쓰게 만든 것은, 어린 시절, 두 식민지에서 자라난 동양인의 자각이었다. 팔레스타인과 이집트에서 나는 서구식 교육을 받았지만, 어린 시절의 깨달음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고 썼다. 그런 면에서 보면, 사이드에게 글쓰기나 문학비평은 곧 비극적 개인사와 그것을 초래한 서구 근대사에 대한 문학적이고도 지적인 성찰이었다. '세상과 텍스트와 비평가'라는 저서에서 사이드는 예술 지상주의를 비판하며, 문학비평은 순수해서는 안 되고 현실적이고 세속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런 자각에서 비롯됐다. 그는 "예술과 현실이 괴리될 때, 한 손으로는 릴케의 시를 읽으며, 다른 손으로는 유태인 학살 승인 서류에 서명한 나치가 생긴다"고 말하며, 예술은 곧 현실의 반영이며, 그것을 산출한 시대적, 사회적 산물이라고 지적했다.
사이드는 또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그는 프린스턴대 졸업생에 하버드대 박사이자 컬럼비아대 석좌교수였지만, 중동을 방문했을 때는 팔레스타인 항의 시위대 선봉에 서서 이스라엘 진압군에게 돌을 던졌고, 미국 TV에 자주 나가 미국의 외교 정책을 비판했다. 사이드는 평생 집 주소를 숨기고 살았다. 이슬람 옹호자라는 이유로 유태인 급진주의자들이 테러 위협을 했기 때문이다. 테러 위협에 시달린 사이드가 유태계 지식인들로부터 같은 이유로 "지적 테러리스트"라는 비판을 받은 것은 아이러니다.
한편으로는 이슬람을 옹호했지만, 사이드는 사담 후세인을 비판했으며 극단적 민족주의도 경계했다. 그는 저서 '문화와 제국주의'에서 "방어적이고 보수적이며 심지어는 편집증적인 국수주의가 유감스럽게도 교육 현장에서 어린이들과 청소년들로 하여금 타문화를 비하하고 자신들의 문화만을 숭상하고 찬양하도록 주입되고 있다"고 탄식했다.
사이드는 평생 아웃사이더로 살다가 저세상으로 갔다. 그러나 '문화와 제국주의'에서 사이드는 "내가 자신을 아웃사이더라고 부를 때, 그것은 슬프거나 박탈당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제국주의가 나누어놓은 두 세계에 다 속해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 두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런 맥락에서 사이드는 12세기 유럽의 성직자 성 빅터 유고가 한 말을 좋아한다. "자신이 태어난 나라만 좋아하는 사람은 아직 어린아이와도 같다. 세계 어디를 가도 자기 나라처럼 느끼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곳을 다 타국처럼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사람이다."
그의 태도는 자기 조국에만 매달리는 한국인들을 부끄럽게 한다. 1996년에 서울을 방문했을 때, 사이드는 한국인들은 왜 미국의 제국주의만 비판하고, 중국의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침묵하느냐고 의아해했다.
사이드는 좌파 지식인이었지만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고, 팔레스타인 사람이었지만 결코 이스라엘을 증오하지 않았다. 백혈병에 걸렸을 때도, 사이드는 뉴욕의 유태계 병원인 마운트 사이나이 병원에서 유태계 의사들의 치료를 받으며, "유태인들이 나를 치료하다니 아이러니지" 하고 말했다. 사이드는 갔지만, 그가 남긴 거대한 그림자는 아직도 우리에게 커다란 깨침을 드리운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더 알고 싶다면…]
오리엔탈리즘 이론적 배경 '시작'… 삶의 여정 쓴 '아웃 오브 플레이스'에드워드 사이드가 쓴 저서들은 전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오리엔탈리즘'과 '세상과 텍스트와 비평가', 그리고 '문화와 제국주의'는 사이드의 사상을 읽어내는 데 필수적인 책들이다. 여기에다 망명객으로서 그리고 변경의 지식인으로서 사이드의 삶의 여정을 함께 이해하고 싶다면 그의 자서전 '아웃 오브 플레이스(Out of Place)'를 권한다.
미셸 푸코의 이론을 미국에 처음 본격적으로 소개한 '시작(Beginnings)'이라는 책은 그가 '오리엔탈리즘'을 쓰게 된 이론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저서이다. 사이드는 독주회도 열었던 피아니스트다. 그가 이스라엘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과 나눈 대담을 수록한 '평행과 역설'은 음악과 사회와 역사가 어떻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탐색하면서, 동양과 서양, 그리고 아랍과 이스라엘의 화해와 공존을 추구한 사이드의 후기 사상을 잘 드러내준다. 국내 학자들의 사이드론을 모은 책인 '에드워드 사이드 다시 읽기'도 사이드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
[김성곤 서울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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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과 맛있는 만남] 강석희 CJ E&M 대표 "학교서 우등상 준다길래 우동 주는 줄 알았죠"
“제주도에서는 국수를 ‘우등’이라고 부릅니다. 우동의 제주 사투리가 우등이죠. 일곱 살 때 초등학교에서 우등상을 받았는데, 상품으로 진짜 국수를 주는 줄 알고 잔뜩 기대했다가 공책을 주길래 울어버렸죠. 하하….”
제주시 애월읍 출신인 강석희 CJ E&M 대표는 국수마니아다. 서른다섯 살 때 생선회를 처음 먹어봤고 그 전까지는 주로 국수를 찾아 다녔다. 1980년대 입사 초기에는 서울 무교동 뒷골목의 쫄면집을 찾아 다녔고 국수를 한꺼번에 7인분씩 먹어치우기도 해 친구들 사이에 소문이 나기도 했다. 친구들은 그를 보고는 “씹지도 않고 삼킨다”며 혀를 내둘렀다.
이 이야기를 듣고서야 그가 서울 쌍림동에 있는 CJ제일제당 빌딩 지하 면요리 전문점 ‘제일제면소’를 인터뷰 장소로 잡은 게 이해가 갔다. 그는 제일제면소의 인기 메뉴인 소고기 샤부샤부를 먼저 주문했다. “제가 잔치국수를 좋아하지만 국수 한 그릇만 하기는 그렇죠. 우선 국물이 시원한 샤부샤부 먼저 드셔보세요.”
강 대표는 제일제당 제약사업부 영업맨 출신이다. 지금까지 제약 부문에서만 25년을 일했고, CJ미디어 영업본부장으로 옮긴 2004년에야 엔터테인먼트와 미디어 업계에 입문했다. 그는 여전히 영업예찬론자다. 젊었을 때 사람을 가장 발전시키는 것은 현장에서 직접 뛰고 부딪치며 얻는 경험이라는 게 지론이다.
“사무직에 근무하는 사람은 큰 톱니바퀴의 톱날 하나라 할 수 있지만, 영업사원은 작지만 완전한 톱니바퀴 그 자체죠. 영업이 단순히 장사만 하는 것 같지만 영업사원 한 명 안에는 해당 사업의 세계가 다 들어 있습니다.”
미디어와 제약사업은 완전히 다른 분야라는 생각도 들었다. 적응하기 힘들지는 않았는지 묻는 질문에 강 대표는 바로 “하루 만에 적응했다”고 답했다. 그가 선호하는 본질을 파고들어가는 접근법 덕분이었다. “영업사원 시절 세상엔 바이어와 세일러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심하게 얘기하면 남녀가 사귀는 것도 서로 매력을 사고파는 것의 일종이지요. 미디어로 넘어왔더니, 세상에는 콘텐츠 사업자와 플랫폼 사업자만 있더군요.”
콘텐츠와 플랫폼의 관계를 그는 명쾌하게 설명했다. 처음엔 아무리 좋은 콘텐츠라도 플랫폼이 필요하기 때문에 플랫폼이 우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고뿌가 없으면 못 마신다’는 우스갯소리가 떠올랐다. 강 대표는 플랫폼을 통해 콘텐츠가 많이 노출되고, 입소문이 나고, 사람들이 많이 쓰게 된 다음에는 콘텐츠가 우위에 선다고 했다. 이것이 콘텐츠와 플랫폼의 ‘섭리’고, 결국 둘 다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콘텐츠 창작자가 돈을 많이 벌어야 옳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둘 다 중요합니다. 플랫폼에는 돈이 많이 들죠. 대표적 플랫폼인 백화점이나 극장을 지으려면 엄청난 설비 투자비가 들어갑니다. 학교, 병원 다 마찬가지예요. 플랫폼이 없으면 어떻게 콘텐츠가 소비자를 만납니까. 페라리와 포르쉐가 아무리 좋아도 아우토반이 없으면 달릴 수 없는 것이죠.”
콘텐츠와 플랫폼 사업을 모두 경험한 그라서 납득이 갔다. CJ미디어 시절, 콘텐츠사업자(PP)로서 플랫폼인 종합유선방송사업자(SO)에게 채널번호를 유지해 달라고 읍소한 경험도 있고, CJ CGV 대표로 있을 때는 ‘갑’이 돼서 콘텐츠를 선별하기도 했다.
그는 플랫폼의 힘은 ‘고객의 선호도와 지명도’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고객은 원하는 상품이 있는 곳으로 간다. 그런 고객을 어떻게 하면 끌어오고 지킬 것인가가 플랫폼 사업자의 영원한 숙제다. 그는 CGV에서는 CJ E&M이 만든 영화를 많이 배정하고 오래 상영한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고객이 외면하면 상품을 바꿀 수밖에 없다는 플랫폼의 성격을 무시한 감성적인 생각이라는 얘기다. 다만 그는 “예술·독립영화에 대한 배려는 필요하다”고 했다.
“화살에는 촉이 있고 대와 깃이 있는데, 화살촉이 예술영화입니다. 이게 있어야 다양하고 새로운 영화들이 나옵니다. 이른바 전위죠. 화살의 중심이 되는 ‘대’는 상업영화입니다. 이런 균형이 잘 이뤄져야 화살이 잘 날아가죠.”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메인 메뉴’인 잔치국수가 나왔다. 손바닥만큼 큰 두부가 면 위에 올라 있는 게 특이했다. 두부 위에는 계란말이와 양파, 파 같은 고명이 알록달록했고 멸치와 다시마로 우려낸 국물은 싱거운 듯 하면서도 묘하게 짭쪼름했다. 후룩후룩 면을 먹는 소리에 잠시 대화 속도가 느려졌다. 강 대표가 다시 옛날 얘기를 꺼냈다.
“제가 사는 동네와 좀 떨어진 중학교에 가는 바람에 12세 때부터 혼자 자취를 했어요. 도시락 싸기가 싫어서 점심을 많이 굶었습니다. 그러고선 저녁 때 집으로 와서 꼭 국수를 삶아 먹었죠. 자취할 무렵인 1968년쯤의 석유와 두부 값은 아직도 기억해요. 2ℓ들이 병에 든 석유가 36원, 두부 한 모가 7원이었습니다. 이 국수에는 두부가 올라와 있어 옛날 맛이 나요.”
CJ E&M은 지난해 ‘광해’와 ‘늑대소년’ 등의 영화를 성공시키며 외형적 성장을 이뤘다. 그러나 몇몇 영화가 흥행하고 ‘응답하라 1997’ ‘슈퍼스타K4’ 등의 킬러 콘텐츠를 만들어내면서 ‘문화를 CJ가 독점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들었다. 강 대표는 이런 비판들이 상당히 억울한 눈치였다.
그는 “문화산업은 돈을 잘 벌기 힘든 비즈니스”라고 했다. 몇몇 영화가 성공하면 겉보기에는 많이 남는 것 같지만 과거까지 따져보면 기획과 투자가 실패해 영화 제작조차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는 것. 조심스럽게 말을 아꼈지만, CJ E&M이 ‘K컬처’를 갖고 해외 시장을 개척해 국가 이익 극대화에 힘쓰는데도 국내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에 대한 답답함이 묻어났다.
“문화산업이라는 게 사실 국가 브랜드를 높이는 사업입니다. 한국문화를 알리면 한국 제품과 음악, 음식을 좋아하고 여행도 많이 오게 되죠. 부대 효과가 큰 사업입니다. 그런데 돈은 돈대로 투자하고 벌지는 못하는데 여기저기서 좋지 않은 소리를 들을 땐 직원들의 사기가 많이 떨어져요.
"학교는 훈련소, 사회는 전쟁터…진정성 있어야 생존"그럼에도 CJ E&M은 글로벌 진출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가 오는 8월 전 세계 동시 개봉을 앞두고 있고, 오기환 감독의 ‘이별계약’의 중국 진출도 기대를 모은다. 초기 단계이긴 하지만 미국과 일본에서 엠넷 채널을 가동 중이고, 아시아 각국을 돌면서 여는 ‘MAMA(Mnet Asian Music Awards)’도 이제는 표를 구하기 힘들 정도로 뿌리를 내렸다. 그는 “매년 2~3편의 한국 영화를 보고, 매주 1~2편의 한국 드라마를 시청하고, 10곡의 한국 음악을 다운로드받아 매일 1~2곡씩 듣게 되는 세계인의 모습을 꿈꾼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선 자체 제작이 필수입니다. 1960년대 제약회사들은 크게 연구·개발 중심 회사와 마케팅 중심 회사로 나뉘었어요. 1990년대로 오면서 마케팅에 치중하던 곳들은 다 없어졌죠. 결국 방송이든 영화든 음악이든 자체 제작 역량을 확보하지 못하면 오래 못가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콘텐츠를 직접 만들어 국내와 해외에서 ‘멀티 유즈’ 해야만 사업이 된다고 봅니다.”
일각에서 배급사는 영화를 제작 하지 못하도록 하는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영비법)’ 개정론이 일고 있는 데 대해 강 대표는 “그러면 영화 사업을 뭐하러 하느냐”고 반문했다. 콘텐츠 자체 제작 없이 배급만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 영비법 개정의 근거로 제시되는 미국 ‘파라마운트 판결’에 대해서는 꼭 설명하고 싶다고 했다. 파라마운트법은 1948년 미국 법원이 반독점법에 근거해 제작, 배급, 상영을 모두 하고 있던 파라마운트사에 극장을 강제 매각하도록 판결한 법이다.
“파라마운트법 이후 안정적 상영망 확보가 어려워진 메이저 제작사들은 제작편수를 줄였고, 이로 인해 극장 기업이 파산하는 등 미국 영화 산업은 악순환을 거듭했습니다. 1980년대 들어 다시 영화사들의 극장인수가 승인되면서 파라마운트법은 사실상 사문화 됐어요. 1996년 텔레커뮤니케이션법이 발효되면서는 정식으로 폐지됐죠. 그런데도 국내에서는 1948년 법이 아직도 유효한 것처럼 인용하고 있죠. 안타깝습니다.”
엔터테인먼트 기업의 수장으로서 대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물었다.
그는 “삶은 전쟁, 학교는 훈련소, 사회는 전쟁터”라고 했다. “청춘을 위로하는 에세이는 오아시스일 뿐, 사막 같은 전쟁터에 맞는 진지함과 진정성을 가져야 한다”는 ‘돌직구’를 던졌다.
강석희 대표의 단골집 제일제면소 - 소면 등 4가지 국수에 바삭한 튀김CJ푸드빌의 면요리 전문 브랜드다. CJ그룹의 모태로 설탕뿐 아니라 밀가루도 생산했던 제일제당에서 ‘제일’이라는 이름을 따왔다. 면요리는 예로부터 집안에 경사가 있을 때 긴 면처럼 장수하라는 의미로 손님에게 대접했던 음식. CJ는 옛날 동네에서 볼 수 있었던 제면소의 기억을 떠올리도록 나무와 기와 인테리어로 추억과 향수를 살렸다. 제면실에서 면을 뽑아내는 모습과 대형 가마솥에서 팔팔 끓는 물에 면을 삶는 장면도 볼 수 있다.
인기 메뉴는 남해산 멸치와 다시마로 국물을 우려내고 밀가루와 물, 천일염 외에는 어떤 재료도 첨가하지 않은 면으로 만드는 ‘제일국수’와 ‘잔치국수’다. 우동면, 소면, 메밀면, 쌀면 등 4가지 면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깔끔하고 고소한 튀김과 7종의 수제 주먹밥, 술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소고기 샤부샤부, 우동 전골, 치킨 가라아게(닭튀김)도 인기다.
서울 쌍림점, 신사동 가로수길점, 여의도 IFC점, 경기도 판교점 등 네 곳에 매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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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언?기자?misaeon@hankyung.com |
국수는 7500~8000원, 소고기 샤부샤부 1만8000원(1인), 수제 주먹밥 1500~2500원. (02)6740-7999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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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최전선에 그가 있다, 존 브록만
저자보다 더 영향력 큰 편집자
'문화지휘자' '지식의 효소'로 불려
700여 명 기고하는 엣지 재단 운영
도킨스·니스벳 등 일급 필자 수두룩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웹사이트를 운영하는 남자' '문화지휘자' '지식의 효소'.
영국 일간지 옵서버(가디언지 일요판)는 지난해 1월 한 인물을 소개하며 이런 수사를 총동원했다. 주인공은 존 브록만(73·John Brockman)이다. “브록만은 진실로 위대한 사상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예술과 문학, 그리고 과학을 특유의 방식으로 융합할 줄 아는 이들에 빠져 있다”고 전했다.
최근 국내에서 『컬처 쇼크』와 『퓨처 사이언스』, 두 권이 나란히 번역됐다. 한 책엔 존 브록만, 다른 책엔 막스 브록만이라는 이름이 눈에 띈다. 두 사람은 부자지간이다. 이들은 저자가 아니라 엮은이, 즉 편집자다. 그런데 저자보다 중량감이 더 나간다.
보통 이들의 이름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리처드 니스벳의 『생각의 지도』, 미하일 칙센트미하이의 『몰입의 즐거움』 같은 굵직한 화제작의 한 구석에 작은 글씨로 들어가 있다. 그리고 안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브록만사(Brockman Inc)와 독점 계약한 출판사에 있습니다.'
이들의 이름은 종종 표지에 등장하기도 한다. 아버지 존이 엮은 책 12권과 아들 막스가 편자인 책 2권이 국내 번역돼 나왔다. 이 책들에 등장하는 필자는 연인원 300 명이 넘는다. 노벨상 수상자를 비롯해서 최고 권위의 필자들로 빼곡하다.
1 지난해 1월 엣지 재단의 웹사이트와 브록만의 활약을 소개한 영국 '옵서버'.
2 1960년대에 앤디 워홀·밥 딜런과 함께 자리한 브록만(사진 왼쪽).
3 브록만을 '유럽에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라고 소개한 이탈리아 일간지 '라 스탐파'. [사진 edge.org] 브록만 부자의 직업은 출판 에이전트다. 글 쓰는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저자와 출판사를 연결해준다. 아이디어만 있는 책, 초고가 입수된 책, 출판 준비를 마친 책, 그리고 이미 출간된 책들 등등, 이 책들에 관심이 있는 전세계 출판가 브록만사와 저작권 흥정을 한다.
그런데 출판계에서 존 브록만은 골칫거리로 알려져 있다. 오랜 관행을 가볍게 무시하고, 더 많은 돈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저자들의 이익을 철저하게 대변한다.
존 브록만은 어떤 사람인가. 그의 아버지는 보스톤에서 꽃을 팔았다. 그 부친이 새벽에 꽃 도매가를 정하면 도시 전체의 꽃값이 정해졌다는 설도 있다. 이제 존 브록만이 책값을 정하면 전세계 출판사들이 이를 따른다. 놀라운 건 그가 설립한 엣지재단의 홈페이지(edge.org)에 기고하는 일급 필자가 700명에 육박한다는 점이다. 그가 유능한 장사꾼에 그치지 않는 이유다. 지식의 최전선에 있는 과학자·저술가들이지만, 그들이 가고 있는 항로를 의미 있게 엮어 대중에게 내놓는 사람은 존 브록만이라는 얘기다.
브록만의 뚜렷한 전망과 독특한 방법론이 없었다면 이렇게 많은, 세계의 슈퍼 브레인들이 한자리에 모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옵서버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엣지가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배타적인 엘리트 집단이 아니다. 능력을 중시하지만 늘 열려있다. 스티븐 핑커·브라이언 이노·리처드 도킨스 같은 친구들이 엣지의 구성원으로 받자고 하면 나는 말없이 그렇게 한다.”
그가 처음 편집한 책은 『제3의 문화』(1995)다. 일찍이 C P스노가 선언했던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두 문화 사이의 단절을 뛰어넘자는 의지였다. 이제는 그의 이런 뜻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때로는 아들을, 때로는 제자를 추천해 함께 모여 글을 쓴다.
브록만은 도발적이다. 자료만 파고드는 훈고학적 공부, 최신의 과학적 성취를 반영하지 않는 책상머리 공부를 비판해왔다. “주석에 주석을 더하며 입으로만 말하고 분석하는 지식 속에서 실제 세상은 길을 잃었다”고 말했다. 바로 지금 들끓고 있는 학문간 대화, 그 실증적 논쟁을 주목했고, 또 이를 책으로 빚어왔다. “하버드 도서관에 앉아 수백 만 권의 책을 읽으면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다. 차라리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 100명을 한 방에 가둬놓고 각자 가지고 있는 질문을 서로 던지도록 하는 게 낫다”고 자신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실제로 엣지 웹사이트는 그런 뜻 아래 만들어진 온라인 지식살롱이다. 사이트 출범을 기념하며 해마다 던지는 '올해의 질문'과 이에 응답한 지식인들의 글은 뉴욕타임스에 단골로 소개된다. 질문은 '당신이 증명할 수 없으면서도 믿고 있는 것은? '당신의 위험한 사상은?' 등 엉뚱하기로 유명하다. 뿐만 아니다.
엣지는 요즘 학계의 키워드인 통섭이나 융합을 선구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자발적, 혹은 정책적으로 융합을 강조하면서 서로 다른 분야간의 대화를 꾀하고 있는데 그 결과물은 실망스러울 때가 많다. 억지로 섞으려는 모습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차라리 과학과 인문학, 그리고 예술의 최전선을 대중들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엣지의 방법론이 훨씬 나아 보인다.
브록만은 올해 일흔셋이다. 뉴욕의 아방가르드 예술가와 노벨상 수상자 모두에게 편하게 전화를 걸 수 있는 드문 존재가 됐다. 백악관과 펜타곤에 자문을 하기도 한다. 그가 매년 여는 '엣지 만찬'도 화제다.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 제프 베조스 아마존닷컴 대표, 마크 주커버그 페이스북 CEO 등 정보통신 업계의 거물들이 참석해 이른바 '백만장자들의 저녁'이라 불릴 정도다.
브록만의 개인사도 흥미롭다. 스물두 살에 컬럼비아대에서 MBA를 마친 그는 뉴욕 월스트리트 대신 이스트빌리지를 선택했다. 거기서 아방가르드 실험영화운동의 대부 요나스 메카스와 작업했고, 앤디 워홀·로버트 라우젠버그·클라스 올덴버그와 같은 당대의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백남준과 함께 작업해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존 케이지로부터 노버트 위너의 『사이버네틱스』를 건네 받고 새로운 지식에 눈을 떠 지식을 중개하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뉴욕의 저명 문학 에이전트였던 장인이 아마도 모델이었겠지만 그가 신탁을 받는 신전은 문학이 아니라 과학이었다.
이렇듯 브록만은 성공적인 예술 경영자에서 최첨단 지식의 지휘자로 극적으로 변신했다. “사람들이 평소 생각하지 않은 것을 생각하도록 도발하는 게 목표”라던 그의 꿈은 이제 아들 막스가 이어받고 있다. 그의 작업에서 좁게는 다변화된 매체 환경에서 출판의 미래를, 넓게는 우리시대의 과학적 성취를 선뜻 끌어안는 문화의 새로운 비전을 본다.
주일우 과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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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우 문학과지성사 대표. 생화학·과학사·환경학을 공부했다. 뉴미디어아트를 다루는 아트센터 나비 부관장, 인문학과 과학의 접점을 찾는 문지문화원 '사이'의 기획실장을 지냈다.
존·막스 브록만 부자의 신간은 …
『컬처 쇼크』 『퓨처 사이언스』
문화와 과학의 열띤 대화아버지 존 브록만이 엮은 『컬처 쇼크』(와이즈베리)는 '현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지식의 최전선에서 넓힌 새로운 영역을 포괄해야 한다'는 엣지 재단의 슬로건을 그대로 담아낸 책이다.
『총, 균, 쇠』의 저자이자 지리학 분야 석학인 제러드 다이아몬드, 대중음악가이자 문화이론가인 브라이언 이노, 소셜 네트워크의 전염효과 연구로 유명한 하버드의대 교수 니컬러스 A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최신 문화연구와 첨단 과학의 핵심을 짚었다. 우리 시대의 IT(정보기술)와 테크놀로지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를 논한다.
아들 막스 브록만 특히 IT시대의 명과 암에 대한 학자들의 논쟁이 흥미롭다. '어메리칸 아이돌'처럼 집단 인기투표와 대중의 눈높이로 모든 것이 재단되는 시대에 비틀즈 같은 밴드가 과연 우승하거나 음악적 창의력을 보유했을 수 있었겠느냐는 질문도 던진다.
아들 막스 브록만이 엮은 『퓨처 사이언스』(문학동네)에 등장하는 과학자들은 아버지가 엮은 책에 등장하는 이름들보다 생소하다. 젊고 유망한 과학자들을 자신의 일을 물려받은 아들과 함께 일하도록, 일종의 세대교체를 해 가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제목도 『미래의 과학』이다.
종신교수가 되기 전의 젊은 과학자들이 가장 생산력이 높은 시기에 이루고 있는 성과들을 보여주는 이 책은 진정으로 지식의 최전선이 어디인지를 보여준다. 실험실에서, 연구실에서 분자를 자르고 생명체를 조작하고 방대한 데이터를 처리하면서 우리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열띤 현장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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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joinsmsn.com/center/v2010/power_reporter.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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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친일파는 일본 친미파를 벤치마킹했나
[한겨레]
제국일본 2차대전 패전 뒤
온건파들 미군에 적극 협력
전쟁책임 군부에 떠넘기고
피해자 둔갑해 가해기억 제거
미국은 일본정치 좌지우지
준식민지적 종속국가 만들어
모든 과정 한국서 그대로 복제전후의 탄생
권혁태·차승기 엮음/그린비·2만원
미국은 동아시아를 어떻게 지배했나
마고사키 우케루 지음, 양기호 옮김/메디치·1만8000원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가 기획한 <전후의 탄생>과 얼마 전 번역 출간돼 관심을 모은 <일본의 영토문제>의 지은이 마고사키 우케루의 또 다른 책 <미국은 동아시아를 어떻게 지배했나>는 다른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다루고 있음에도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두 책은 모두 ‘전후’(戰後), 특히 일본의 전후를 다루고 있다. 마고사키의 책도 원제는 ‘전후사의 정체’다.
전후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전쟁 이후를 뜻한다. 일본에서 말하는 전후는 제국 일본의 2차대전 패전 이후다. 그러나 단지 시간적 구분만 가리키진 않는다. 여기엔 일본을 한동안 점령했던 전승국 미국이 기본틀을 짠 체제라는 의미도 들어 있고, 전쟁 전과는 달리 경제대국으로 번성하고 평화로운 민주주의 국가 일본이라는, 대다수 일본인들이 자국에 대해 공유해온 하나의 가치개념이기도 하다.
일본 전후 민주주의의 정신적 지주로서 ‘전후 일본’의 의식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침으로써 ‘전후 일본사상계의 천황’이라고까지 불린 마루야마 마사오는 1946년 5월에 발표한 글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8·15는 일본군국주의에 종지부를 찍은 날이다. 그리고 동시에 초국가주의 모든 체계의 기반인 국체(國體)가 그 절대성을 잃고 비로소 처음으로 자유로운 주체가 된 일본 국민에 그 운명을 위탁한 날이다.” 8·15, 즉 패전을 경계로 일본의 전후는 전전, 곧 전쟁 이전과 완전히 ‘단절’됐다고 선언한 이 유명한 말은 전후 일본의 새로운 출발을 실감케 하는 유력한 준거틀이 됐다. <전후의 탄생>에서 나카노 도시오 도쿄외국어대 교수는, 이는 전혀 다른 길로 갈 수도 있었던 전후 일본의 또 다른 가능성을 차단하고, 사실상의 전전-전후 연속이라는 현실을 혁명적 단절 신화로 덮어 감추는 데 기여했다고 본다.
애초부터 단절은 없었다. 일본 ‘천황’과 궁중그룹, 그리고 ‘온건파’라 불렸던 친영·친미파 정치가나 외교관들은 그룹을 결성해 국체 유지와 전쟁 종결을 위해 움직였고 패전 뒤에는 점령군에 적극 협력하면서 살아남았다. 그때 그들은 모든 전쟁 책임을 군부에 떠넘겼다. 하지만 제국 일본의 패권 확장 야망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들은 군부와 다를 게 전혀 없었다고 나카노 교수는 본다. 전후 일본 보수 본류도 거기서 태어났다. 따라서 ‘군국주의세력 대 온건파 리버럴’이라는 구도는 허구이며, 그 가공의 구도를 자기 보신에 철저히 이용했다는 점에서 전쟁에 적극 협력했던 일본 언론·출판계도 다를 바 없었다.
전쟁이라는 악의 근원이 ‘거칠고 흉포한 군인’에게 있고 힘없는 자들은 그 폭력에 대항할 수 없었다는 논리가 수용되면서 많은 일본인들이 피해자의 얼굴을 하면서 전후에 다시 전면에 등장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전후에 자기 책임에 대한 심각한 고민 없이 민주주의자로 ‘전향’할 수 있었고 급기야 자신들을 피해자로 인식했다. 그런 피해의식 속에 타 민족에 대한 가해의 기억은 제거됐다. 이런 패턴은 친일파와 그 후예들이 득세한 한반도에서도 그대로 복제됐다.
<전후의 탄생>은 이런 과정을 거쳐 과거 책임을 봉인해버린 전후 일본의 탄생 메커니즘을, 특히 “조선의 소거”, 조선에 대한 가해사실 망각 내지 지워버림을 중심으로 하여 살핀다. 엮은이 권혁태 교수는 내셔널리즘과 민주주의의 ‘행복한 결혼’을 근대의 완성으로 본 마루야마의 경우, 그가 일본 근대를 비판하는 틀로 사용한 파시즘론 자체에 제국주의와 식민지, 식민지 조선 현실이 들어설 여지가 없었다고 본다.
일본의 이런 전후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 전전-전후 연속성을 보장해 주고 ‘조선의 소거’까지도 가능하게 해준 것은 바로 미국의 전후 처리였다. 미국은 자국의 아시아태평양 반공 안보체제 구도에 일본을 끌어들여 ‘고성능 기지국’으로 만듦으로써 20세기에 아시아를 식민지배와 전쟁의 참화로 얼룩지게 만든 일본을 그 역사적 책임에서 해방시켜준 대신 한반도와 아시아의 옛 피해자들을 새로운 질곡 속으로 몰아넣었다.
<미국은 동아시아를 어떻게 지배했나>는 바로 미국의 그런 행태를 전후 일본 내부 정치를 좌우해온 구체적인 개입 사례들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준다. 지은이 마고사키는 특히 전후 일본 외교를 움직인 최대 원동력이 미국의 대일 압력과 이에 대한 일본 지배세력 내의 자주노선 대 미국 추종세력 간의 갈등이라고 보고 그 틀을 통해 일본 현실정치를 해석한다. 미국의 압력은 철저한 자국이익 추구를 기조로, 주로 주일 미군기지를 자신들이 바라는 대로 유지하고 일본의 중국(옛소련도 포함) 접근을 견제하기 위해 발동된다.
마고사키는 예컨대, 2009년 정권 교체를 이룩한 민주당의 하토야마 유키오가 집권 9개월여 만에 총리직에서 사퇴한 것은 미국 공화당과 일본 자민당이 2006년에 합의한 오키나와 내의 후텐마 미 해병대기지의 현 내 이전에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미국은 하토야마가 중국 및 아시아 중시론을 내세운 데 대해서도 크게 반발했다. 하토야마는 결국 일본 보수 정객들과 관료들, 주류 언론들, 검찰의 집중포화 속에 조기 사퇴할 수밖에 없었다. 마고사키는 일본 내의 이런 역학구도 뒤에도 미국이 도사리고 있다고 얘기한다. 약 7년에 걸친 미국 점령통치 뒤 일본 지배세력 자체가 철저히 친미화하면서 미국의 이익이 바로 그들 친미 특권세력의 이익과 일치하게 된데다, 중앙정보국 등의 공작이 거기에 작동한다. 한때 민주당의 실세였고 하토야마 사임 뒤 예비총리 1순위였던 오자와 이치로가 끝내 총리가 되지 못한 것도 그의 중국 중시 때문이라고 마고사키는 말한다.
그뿐만 아니라 1972년 미국보다 먼저 중국과 수교한 다나카 가쿠에이를 총리직에서 밀어내고 정치적으로 매장시킨 록히드 사건에도 미국의 입김이 서려 있으며, 전후 최초의 사회당 가타야마 데쓰 정권, 그리고 아시다 히토시와 이시바시 단잔, 호소카와 모리히로 정권 등이 단명한 것도 모두 미국 이익과의 충돌 때문이라고 본다. 한마디로 미국은 지금도 자국 이익을 기준으로 일본 국내 정치를 좌우할 수 있을 정도의 현실적인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일본은 여전히 미국의 준식민지적 종속국가라는 얘기가 된다.
음모론처럼 들릴 수 있는 이런 이야기들이 설득력을 갖는 것은 36년간 외무성에서 근무하고 여러 나라 대사와 방위대학 교수까지 역임한 지은이의 경력 때문이다. 현장체험을 토대로 한 그의 얘기를 읽노라면, ‘우리는 다를까?’ 하는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카노·권혁태의 시선으로 보면 마고사키의 한계가 보인다. 예컨대 에이(A)급 전범이었고 중앙정보국 지원 속에 보수합동의 자민당 ‘55년 체제’를 만들었으며, 미국이 총애했던 기시 노부스케, 즉 아베 신조 지금 총리의 외조부를, 그가 개헌과 독자노선을 추구했다는 이유로 대미 자주파로 보고 긍정적 평가를 내리는 마고사키는 일본 내에서 보수 주류를 비판하는 비주류임에도 불구하고 ‘온건파 리버럴’ 유형으로 비친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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