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들이닥친 외환위기는 전 아시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승승장구하던 아시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이고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국제통화기금(IMF)의 서슬 퍼런 처방을 따라야만 했다.
그러나 세계에서 단 한 나라, 말레이시아만이 반기를 들었다. 마하티르 모하마드(Mahathir Mohamad) 총리는 “서구 투기자본 탓인데 왜 근면한 아시아인들에게 책임을 돌리느냐”며 정면대결로 나왔다.
신기하게도 그 이후 말레이시아 경제는 회복되기 시작했다. 마하티르는 그 여세를 몰아 1999년 가을 총선에서도 승리했다. 20년째 장기집권 중이던 그를 만나기 위해 나는 2000년 3월 총리 집무실을 방문했다.
“서구 대신 일본과 한국을 배우자”
당시 그는 전혀 75세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격무와 삶의 황혼기에서 느껴지는 피로감과 허탈함은 숨길 수 없었다. 그는 존경하는 아시아 지도자로 중국의 마오쩌둥과 함께 이승만·박정희를 언급했다.
“그들은 권위주의적이었소. 그러나 단언컨대 한국이 처음부터 민주화가 됐다면 오늘의 한국은 없었을 거요. 늘 지도자가 교체되고 어수선한….”
그는 특히 박정희에게 각별했다. “박 장군은 매우 강한 지도자로 대기업을 일으켜 국부(國富)를 증진시켰습니다. 돈도 자원도 없는 나라에서 할 수 있는 최적의 모델이지요.”
그는 시종 ‘박 장군(General Park)’이라고 불렀다. 마하티르는 박정희의 경제개발 모델을 많이 차용했다. 81년 총리 취임 후 “일본과 한국을 배우자”는 ‘동방정책(Look East Policy)’을 정력적으로 추진하면서 한국의 ‘하면 된다(Can Do Spirit)’ 정신을 ‘말레이시아는 할 수 있다(Malaysia Boleh)’로 재생시켰다. 박 대통령처럼 매일 아침 경제관료 회의를 주재하며 선글라스를 끼고 전국 현장을 시찰했다.
전두환·노태우 대통령과도 친했다. 권위주의적이기는 하나 그들의 열정, 애국심, 고민에 같은 개도국 지도자로서 동병상련(同病相憐)을 느꼈다. 당시 마하티르의 동방정책은 노태우 ‘북방정책’의 단초가 됐다는 게 정설이다. 두 사람은 비공식으로 만나면 미·일 등 강대국에 대한 비판을 실컷 나누는 사이였다.
95년 김영삼 대통령이 ‘역사 바로 세우기’를 외치며 전·노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했을 때 마하티르는 매우 상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만난 김에 그때 이야기를 슬쩍 물었더니 우회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사실 국민의 원성을 들으며 죽을 때까지 권좌를 유지하고 싶은 지도자는 별로 없다고 봅니다. 은퇴한 뒤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싶어 하죠. 문제는 퇴임 후 정치보복이요. 알다시피 신생국 지도자들은 손에 ‘흙’을 묻히지 않을 수 없거든요.”
이 대목에서 그는 책상에 놓인 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만약 민주적이진 않지만 힘센 리더가 있다고 합시다. 사람들은 그에게 권력을 포기하고 민주화를 이룩하자고 설득합니다. 이후 막상 민주화가 되자 사람들은 그를 감옥에 넣습니다….”
마하티르는 이날 내게 점잖게 말했다. 그러나 후일담이지만 전·노 구속 당시 그는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자신들의 롤 모델이었던 한국이 벌이는 ‘자기부정(自己否定)’을 매우 위험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후 잘나가던 한국 건설사의 말레이시아 공사 수주는 별 볼 일 없어지고 말았는데 이 역시 우연의 일치로만 볼 수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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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간의 집권 후 퇴임한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가 한 이슬람 사원에서 금요 기도를 마친 뒤 지지자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중앙포토] |
마하티르는 존경하는 서구 지도자로 매우 잔인했지만 러시아의 근대화를 이룬 표트르 대제(1682~1725 재임)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의 처칠 총리를 꼽았다.
유창한 영어와 냉철한 논리로 서구 비판
57년 독립 당시 말레이시아는 우리보다 잘살았다. 인구는 우리의 절반 정도인데 면적은 세 배나 넓고 천연자원이 풍부했다.
마하티르에게 과거 한국은 ‘희망 없는 나라’였다. 그는 어린 시절 한국을 아주 낙후된 ‘은둔 국가(Hermit Kingdom)’로 배웠고 장성해서는 분단·전쟁·가난과 같은 말로 인식했다. 65년 초선 의원으로 한국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서울은 불빛조차 많지 않았고 변변한 산업도 없었다.
그러나 이후 한국을 자주 방문하면서 온 국민이 똘똘 뭉쳐 “조국을 발전시키자”며 벌이는 ‘새마을운동’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한국인의 애국심·근면·자조자립·규율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현대자동차와 대우조선을 방문해서는 입이 쩍 벌어졌다.
81년 총리로 집권하자마자 그는 서구 중심 국가발전 모델을 과감히 버리고 아시아의 일본과 한국을 배우자는 동방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마하티르의 리더십 아래 말레이시아는 만년 열대 빈국에서 벗어나 약진하기 시작했다.
마하티르는 지난 수백 년간 말레이를 지배한 서구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명문 ‘킹 에드워드7세 싱가포르 의대’를 졸업한 그는 영국식 교육에 힘입은 유창한 영어와 비판 논리로 서구의 오만과 독선을 지적했다.
“서구인들은 솔직하고 단도직입적이며 비판적 토론을 옹호하면서도 정작 동양인이 그러면 비난한다.”
상대방의 정곡을 찌르는 촌철살인(寸鐵殺人) 언변, 자신의 입장과 이익을 솔직하게 밝히는 태도,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확고한 자부심은 90년대 들어 국제무대에서 마하티르를 ‘아시아의 대변인’으로 부상시켰다. 그는 97년 아시아위크(Asiaweek) 선정 ‘아시아 파워 50인’ 중 중국의 장쩌민에 이어 2위로 올랐다.
그러나 바로 그해 아시아에 몰아친 외환위기로 동남아 통화가치가 폭락하면서 엄청난 국부가 유출되기 시작했고 경제는 마비상태에 빠졌다. 분노한 마하티르는 “서구 투기 자본의 결과”라며 미국 뉴욕의 ‘큰손’ 조지 소로스를 겨냥해 직설적으로 공격했다.
아시아 각국이 미·영 주도의 IMF의 살인적인 ‘고(高)금리·구조조정’ 처방을 받아들였지만 마하티르는 순순히 굴복하지 않았다. 외과의사 출신답게 원인을 분석해 처방을 얻으려고 했다.
마침내 98년 8월 그는 IMF 처방과 정반대되는 ‘저(低)금리·경기부양·고정환율제’를 골자로 하는 신경제정책을 단행했다. ‘마하티르의 마이 웨이(My Way)’로 명명된 이 조치는 즉각 서구 언론과 금융계로부터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국가의 인위적 개입’을 핵심으로 하는 이 조치는 곧 홍콩·대만에서도 차용됐다. 이후 추락하던 동남아 경제는 대반전에 성공, 아시아 외환위기는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약속대로 스스로 권좌에서 내려와
외환위기 당시 마하티르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위기에 빠졌었다. 그의 후계자인 부총리 안와르 이브라힘이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마하티르가 연일 미국을 공격하고 미국 언론도 마하티르를 독재자로 비판할 때 안와르는 ‘친미(親美)’ 자세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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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티르 총리(가운데)가 1983년 8월 11일 창원공단의 삼성정밀 공장을 방문, 이건희 삼성그룹 부회장(오른쪽)으로부터 기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
98년 5월 이웃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대통령이 IMF 처방을 수용한 데 반발한 폭동으로 32년 권좌에서 물러나자 부총리 안와르 측은 자신들을 ‘개혁세력’, 마하티르를 ‘물러나야 할 구세력’으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미국 언론은 이런 안와르를 ‘말레이시아의 희망’으로 치켜세웠다.
마하티르는 강공을 택했다. 98년 9월 안와르를 부총리에서 해임한 후 동성애와 직권남용,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해 버렸다. 예상대로 서구 언론은 안와르를 피해자, 마하티르는 가해자요 탄압자로 부각시켰다.
그러나 경제 회복이 되면서 그의 입지는 다시 공고해졌고, 총선에서도 이겼다. 마하티르는 인터뷰 당시 “이번 총리직이 마지막이며 후계자도 정해졌다”고 공언했다. 약속대로 그는 2003년 10월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났다. 내각책임제 국가에서 총리가 된 후 단 한 번도 선거에서 패하지 않고 무려 22년간 집권한 뒤 건강한 상태에서 자의(自意)에 의해 퇴임한 것은 그가 처음 아닐까 싶다.
경호원 없이 쇼핑 다니는 평온한 말년
최고 통치자로서 마하티르는 여러 얼굴의 소유자다. 국가 발전의 올바른 비전을 갖고 온갖 난관을 무릅쓰고 성취시키는 실천력은 박정희를 닮았다. 국제무대에서 미국을 상대로 호령하고 뛰어난 국제 감각을 보이는 모습에선 이승만이 연상된다.
정치 초년병 시절에는 ‘독립의 아버지’인 툰쿠 초대 총리와 싸울 정도로 원칙주의자였으나 집권하고서 중도실용의 길을 걸은 것을 보면 김대중이 떠오른다. 그러나 민주주의 신봉자인 김대중과 달리 마하티르는 개발독재를 옹호한다.
그의 철저한 반미 노선은 일견 노무현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노무현이 감정적이고 국제관계에 문외한인 반면 마하티르는 냉철한 프로다.
그의 인생을 한마디로 평하면 평생 ‘마이 웨이’로 살아온 삶이다. 일국의 정치가로서, 최고 권력자로서 맞닥뜨린 수많은 인물과 사건, 상황 속에서 그는 예스(Yes)면 예스, 노(No)면 노였지 에둘러 가지 않았다.
그는 기존 통념에 얽매이지 않고 주변에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놀랄 만한 직관력과 솔직함을 무기로 그 누가 뭐래도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그런 그를 세상 사람들은 ‘독재자’‘독불장군’‘이단아’라고 불렀지만 그의 판단은 대부분 옳았고 인생은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조국은 번영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의 재임 기간(1981~2003) 중 말레이시아는 후진 농업사회에서 세계 17위 무역대국이자 산업국가로 부상했다. 지금도 5% 넘는 고도성장을 하고 있다.
마하티르는 현재 행복한 말년을 보내고 있다. 구순(九旬)이 다 된 나이에 경호원도 없이 혼자서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고 쇼핑도 한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시민 대부분이 다가와 그에게 악수를 청하거나 함께 사진 찍기를 부탁한다. 마하티르는 귀찮아 하는 기색 없이 특유의 미소로 그들의 요구에 응한다.
지난해까지 주(駐)말레이시아 대사를 지내며 그와 가까이 지냈던 이용준 경기도 국제관계대사는 “국민으로부터 진심 어린 존경을 받는 모습이 정말 부럽다”고 했다. 그런 말레이시아인들의 모습은 지금 내 편, 네 편으로 갈려 살벌하게 싸우는 우리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마하티르의 삶을 보면서 나는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마하티르는 이토록 존경받고 평안하게 사는 데 비해 그가 롤 모델로 여긴 한국의 전직 대통령들은 왜 그런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 그들의 잘못 때문인가, 마하티르의 착각인가, 아니면 우리들의 편협함 때문인가.
평범한 일상을 살면서 작은 선택에도 늘 망설이고, 할 말도 제대로 못하며, 주위 눈치나 보면서 소심하게 살아가는 범인(凡人)들이 볼 때 마하티르의 ‘마이 웨이’ 성공은 신기하기조차 하다. 도대체 무엇이 그런 그를 만들었을까.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성공한 사람에게는 외곬이자 결단력이 있다. 뜻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확실한 목표와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함영준 조선일보 사회부장·국제부장 등을 역임하고 국민대 겸임교수를 거쳐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비서관,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저서로 『마흔이 내게 준 선물』 등이 있다.
한 남자가 목탄을 들고 하얀 도화지 앞에 섰다. 종이에 검은 목탄이 닿는 순간, 먹선이 춤을 추듯 움직이기 시작한다. 단지 스치고 지나갔을 뿐인데 절벽이 나타나고 정자가 세워지는가 싶더니 거대한 암벽 속에서 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 모든 것을 그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1~2분. 객석에 앉은 사람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조명이 꺼지고 마술 같은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그림 속 폭포에서 정말 파란 물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눈이 휘둥그레진 관객들이 열렬히 박수갈채를 보낸다. 무대 위에서 이런 놀라운 일을 연출해내는 이는 바로 세계 최초로 ‘드로잉쇼’를 만든 김진규(45) 예술감독.
드로잉쇼는 말 그대로 ‘그림 그리는 과정’ 자체를 보여주는 쇼다. 물과 기름이 섞이는 마블링 기법을 이용해 고흐의 해바라기를 그리기도 하고, 캔버스에 찍은 점 하나가 춤추면서 스스로 그림을 그리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드로잉쇼는 2007년 초연 이래 누적 관객이 130만 명에 달할 정도로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미 일본·중국·호주 등에서 K팝을 잇는 K아트로 주목받고 있다.
무대 올리기까지 10년, 일주일 만에 매진
시작은 농담처럼 가벼웠다. 김진규 감독은 디자인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강의를 했지만 그림에 대한 풀리지 않는 갈증이 있었다. 나만의 예술을 하고 싶다는 목마름이었다. 그 갈증을 이기지 못해 매일 술을 마셨다. 흥이 올라 춤추며 그림을 그리던 그를 보고 친구가 혀를 차며 말했다. “쇼하고 있네.” 그 한마디가 그의 인생을 바꾼 도화선이 됐다.
“그 말이 귀에 확 꽂혔어요. 정말 쇼를 하면 되겠구나.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겁 없이 시작했죠. 그 과정에서 안 해본 게 없어요. 입으로 물감을 뿜어내는 퍼포먼스를 하다가 물감도 엄청 먹어봤고, 그림에 불이 붙는 장면을 만들어 보려다 여러 번 불도 냈죠. 100가지의 아이디어를 실험해 보면 한 개도 못 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어요.”
그는 점점 드로잉쇼에 ‘미쳐’갔다. 한번 연구와 실험에 몰입하면 해가 뜨는지 지는지, 자신이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어쩌다 술이 생기면 알코올중독자처럼 마셔댔고 미친 듯이 그림만 그렸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그가 원하는 수준의 작품은 나오지 않았다. 안 그래도 가난하던 예술가의 살림은 점점 더 궁핍해졌다. 수순처럼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그를 덮쳤다. 공황장애는 일종의 ‘임사 체험’이었다. 몸이 완전히 딱딱하게 굳어버려서 호흡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것 같은 끔찍한 공포 그 자체였다. 그의 필살기인 ‘스피드 드로잉’ 역시 잠시라도 공황장애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에서 나왔을 정도였다. 결국 보다 못한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그의 곁을 떠나버렸다. 가난한 남자와는 살아도 미친 사람과는 못 살겠다며.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정말 죽었다. 극한의 고통 속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진 것이다. 그 직전 그는 온몸을 울리는 ‘거부할 수 없는’ 죽음의 메시지를 들었단다. 다행히 어둠의 끝에서 그는 실낱같은 빛을 발견했다. 눈을 떴을 땐 떠났던 가족들이 옆에서 울고 있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이후, 그의 인생은 많이 변했다.
“어느 날 따뜻한 햇볕을 쬐고 있는데 제가 실실 웃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살아 있어서 숨 쉬는 게 너무 고마운 거죠. 제일 중요한 건데 왜 한 번도 소중하다는 생각을 못했을까…. 그 뒤부터 아무리 힘들어도 웃으며 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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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규 감독이 서울 마포구에 있는 김미경 대표의 집필실에서 손전등을 이용해 빛으로 그림을 그려보이고 있다. [사진작가 김도형] |
그렇게 드로잉쇼를 무대에 올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10년. 2006년 대학로에서 드로잉쇼를 처음 공연했을 때 찾아온 관객은 딱 4명이었다. 그런데 일주일 뒤부터 입소문을 타더니 ‘전석 매진’의 기적을 만들기 시작했다. 다시 1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김진규 감독은 수십 명의 배우와 스태프들과 함께 일하는 CEO이자 주목받는 아티스트가 됐다. 모든 것을 걸었던 그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드로잉쇼는 그의 천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개그맨을 꿈꿨을 정도로 그는 ‘끼’가 넘치는 사람이다. 말도 재미있게 잘하고 무용수처럼 몸을 쓸 줄 알며 배우 같은 연기력도 갖췄다. 작업실에만 묻어두기가 아까울 정도로 원하는 것을 몸으로 표현하는 재능이 탁월하다. 이 모든 것은 이미 그 안에 이미 잠재돼 있던 재료들이다. 그러나 내 안에 있다 할지라도 그걸 찾아가는 과정은 쉽지 않다. 얼마나 깊은 곳에 있는 것들을 골라 쓸 것인가. 정말 만들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그 답을 찾으려면 자신을 깊게 끝까지 보는 힘이 필요하다. 그것은 숨 막히는 슬럼프의 심연을 오랜 시간 헤매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드로잉쇼에서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과정’이다. 완성된 그림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과정 자체가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다운지를 보여주자는 것이다. 이는 무대 뒤에서 드로잉쇼를 만들어가는 과정 역시 포함된다. 배우나 창작자가 매 순간을 즐기고 살아가야 관객들에게 그 카타르시스가 제대로 전달될 수 있다. 이 때문에 배우들의 연습시간은 일종의 ‘미술치료’ 시간이 되기도 한다. 놀랍게도 드로잉쇼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미술 전공자들이 아닌 일반 배우들이다. 그런데 이 쇼에 합류하면 몇 달 만에 멋진 그림을 척척 그려낸다.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을 깨줄 뿐이죠. ‘우리 모두는 원래 표현을 잘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겁니다. 그러면 한두 달 만에 기가 막힌 표현들이 나와요. 배우마다 어떤 색깔과 표현이 그림을 보다 건강하게 만들어줄 지도 고민합니다. 그런 식으로 내면의 막혔던 부분이 풀리니까 저절로 멋진 퍼포먼스가 나오는 것이죠.”
간절히 원했던 길, 시간 지날수록 행복
그의 쇼에 치유 받는 것은 배우들뿐만이 아니다. 몇 년 전 도쿄에서 공연하는데 한 회장님이 그림을 꼭 사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 본래 그는 공연이 끝날 때마다 그림을 찢어버리곤 했다. 그림을 소유하는 순간 가슴 속 감동이 사라져 버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결국 김진규 감독은 회장을 만나 미완성인 그림을 사려는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 미완성 그림이 바로 제 인생입니다. 이 나이가 되어 돌이켜 보니 인생이란 당신의 그림처럼 한 점에서 시작해 찰나로 끝나더군요. 저 그림이 꼭 나와 같아 위로를 주니 제게 그 그림을 줄 수 없겠습니까?”
그 얘기를 듣는데 그림을 내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단다. 오히려 자신의 그림에 위로받았다는 그분께 더 큰 감동을 받았다. 몇 년 후 돌아가신 그분은 바로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드로잉쇼가 현란한 ‘그림 테크닉’을 넘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예술이 된 것은 무대에 그의 인생 전체를 담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사람이 이유 없이 잘나갈 때는 내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갈 때가 많다. 훈풍이 너무 밀어줘서 물어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10년간 발목을 잡히면서도 그 길을 기어이 갔다면 그 길은 진정한 내 길이 맞다. 한 걸음씩 푹푹 빠질 때마다 내가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 대답했을 것이므로. 이런 길은 시간이 지날수록 행복하다. 나이 오십에 이 길이 맞나를 물어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처럼 뱃속 든든한 게 없기 때문이다. 힘겨웠던 세월만큼 깊게 물든 이 남자의 미소는,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가보다.
김미경 더블유인사이츠 대표
키쇼어 마부바니(68)는 아시아 출신으로 국제정치 무대에서 영향력이 큰 몇 안 되는 인물이다. 서양 매체들은 그에게 ‘아시아의 토인비’ ‘동양적 윤리를 설파하는 막스 베버’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마부바니는 1984~89년, 98~2004년 모두 10여 년에 걸쳐 주유엔 싱가포르대사를 지냈다.
싱가포르의 정치·경제는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가, 외교 및 국제적인 위상은 마부바니가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99년 『Can Asians Think?』라는 책에서 “아시아의 시대가 도래했다”며 “서양 중심의 사고방식을 버리고 아시아의 가치를 우위에 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1일 그가 원장으로 있는 싱가포르국립대 리콴유스쿨(공공정책대학원)에서 만났을 때도 그는 “아시아의 상황을 곡해하는 앵글로색슨 미디어의 포로가 돼선 안 된다”고 했다.
-우선 홍콩 시위에 대해서 안 물어볼 수가 없다.
“홍콩 사람들이 자신의 미래에 대해 발언을 원하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동시에 홍콩은 중국의 일부다. 홍콩 사람들은 중국 다른 지역의 사람들보다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중국 정부는 700만 홍콩 인구보다 13억 중국 인구의 이익을 앞세워야 한다. 시위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홍콩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보다 중국이 갑자기 선거 방식을 바꾸려는 것 아닌가.
“영국과 서방세계는 매우 기만적이다. 자기들은 홍콩에 민주적 자유를 주려고 생각한 적조차 없으면서 이제 와선 중국에 자유를 보장하라고 강요하고 있다. 내 말을 그대로 인용하라. 영국은 홍콩을 중국에 반환하면서 독약(poison pill)을 집어넣었다. 홍콩과 중국 사이에 민주화라는 갈등 요소를 만들어놨다는 얘기다. 홍콩이 왜 영국 땅이 됐나. 1842년에 영국은 중국이 아편을 사지 않는다며 전쟁을 일으켜 홍콩을 강제 합병해 버렸다. 그 후 150년간 홍콩을 수탈하고 권위적으로 지배했다. 그런데 당연히 중국의 영토인 홍콩을 반환하면서는 민주적 권리를 보장하라고?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서방세계의 이중 잣대다. 중국·홍콩뿐 아니라 아시아인 모두가 이런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중국은 언제쯤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될까.
“자꾸 민주, 민주 하는데 국제 뉴스를 접하면서 앵글로색슨 미디어의 포로가 돼선 안 된다. 그들은 아시아에 대해 곡해된 세계관을 주입하고 있다. 중국은 언젠가 민주국가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중국은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를 주목했다. 하루아침에 민주주의로 바꾸자 러시아 경제가 무너져 벨기에보다 경제 규모가 더 작아졌다. 급작스러운 개혁은 재앙을 불러온다는 교훈을 줬다. 중국의 국정 운영은 굉장히 성공적이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1980년에 미국 경제가 세계 경제에서 차지한 비중은 25%, 중국은 2.2%였다. 하지만 중국의 비중은 곧 미국보다 높아질 걸로 예상된다. 이건 정말 놀라운 역사적 전환이다. 중국인들은 완벽한 정치적 자유를 얻지는 못했지만 지난 35년 동안 많은 개인적 자유를 얻었다. 생활수준도 높아졌다. 매년 1억 명의 중국인이 해외여행을 떠난다. 한국 인구의 두 배 아닌가. 서방 언론은 중국의 이런 측면을 애써 외면하고 권위주의 정권이라고만 강조한다.”
-북한도 중국과 같은 변화가 가능할까.
“중국의 변화는 북한에 ‘국민 개개인에게 자유를 줘도 권력을 계속 가질 수 있다’는 시그널을 보내고 있다. 베트남도 예전 공산당 정권이 건재하지만 개혁·개방에 성공했다. 북한 경제가 중국·베트남처럼 성장하면 그만큼 한반도의 평화적인 변화 가능성도 커진다. 한국은 북한에 계속 투자해야 한다. 북한에 대해 희망을 가지길 바란다. 연평도 포격 같은 국지적 도발은 있었지만 한국전쟁 이후 큰 군사적 갈등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북한이 중국과 다른 점은 개인 숭배가 국민의 눈과 귀를 막고 있다는 점이다.
“큰 걸림돌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런 극단적으로 통제된 사회를 개혁하는 게 더 쉬울 수도 있다. 덩샤오핑 개혁 이전의 중국은 그야말로 지옥과 같은 문화대혁명을 거쳤다. 수많은 사람이 정치적인 이유로 유린당했고 굶어 죽기까지 했다. 중국이 그걸 견뎌내고 고속 성장을 이룬 것처럼 북한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펴낸 책 『The Great Conver gence(위대한 통합)』에서 세계인의 가치가 이념 대신 ‘중산층의 삶’으로 모아져 평화와 번영이 찾아올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실상은 달라 보인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현재 국가 간 전쟁으로 죽는 사람 수가 최저다. 이라크·시리아 등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또 2010년 아시아의 중산층은 5억 명이었다. 불과 6년 뒤인 2020년엔 그 3.5배쯤인 17억5000만 명에 달할 전망이다. 2030년엔 49억 명으로 세계 인구의 절반이 중산층의 생활수준을 영위하게 된다. 경이롭지 않은가. 나는 그 책을 통해 우리가 사는 지구의 역사에 대해 포괄적인 분석을 해보려고 했다.”
-당신 글 때문에 백악관에서 화를 낸 적도 있다.
“힐러리 전 국무장관이 베이징에 갔을 무렵 내가 뉴스위크에 글을 썼다. 미·중 관계에서 미국은 다음 선거를 염두에 둔 전략만 있고, 중국은 장기 전략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미국의 친구로서 그런 조언 겸 주장을 했다. 세상엔 무비판적인 애인과 사랑스러운 비판자가 있는데 나는 후자다. 그런데 나와 개인적으로도 아는 제프리 베이더 당시 백악관 안보특보가 전화를 걸어 화를 냈다. 틈만 나면 표현의 자유를 외치는 사람이 내가 비판적 견해를 내놓자 닥치라고 한 것이다. 이해할 수 없다.”
-일본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일본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근대화를 이뤄 서양 국가와 대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하지만 과거사에 대해 명확하게 반성하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건 크나큰 실수라고 생각한다. 역사를 바꿀 수는 없다. 일본은 자꾸 역사를 번복하면서 스스로 부담을 지우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역할은 무엇인가.
“한국·북한·중국·일본·몽골을 한데 묶는 ‘동북아시아 국가연합’을 주도해야 한다. 싱가포르가 속한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은 유럽연합(EU)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성공적인 지역 연합체다. 67년 출범할 땐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 간의 분쟁이 있었고,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와의 연방에서 탈퇴하는 등 갈등이 컸다. 서로 의심하는 5개국이 연합체를 만들었는데 그로부터 50년 후 의심이 사라지고 회원국도 늘었다. 동북아에선 한국만이 이 같은 평화와 번영의 연합체를 주도할 명분과 역량이 있다.”
싱가포르=박성우 기자 blast@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