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특집] 2012년 미국 대선은 ‘정부의 역할’ 둘러싼 논쟁 축소판… 오바마 재선은 ‘재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한 미국인들의 대답버락 오바마 미국 44대 대통령의 임기가 ‘4년 더’ 늘었다. 11월6일 치러진 대선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6066만여 표(50.4%)를 얻어, 총 선거인단의 절반(270명)을 훌쩍 뛰어넘는 303명을 확보했다. 5782만여 표(48%)를 얻은 밋 롬니 공화당 후보는 206명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표차는 약 284만 표였다.
선거 막판까지, 오바마 대통령의 승리를 장담한 이는 많지 않았다. 유례없는 ‘초박빙’이리란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되레 롬니 후보의 ‘선전’을 점치는 이가 늘기도 했다. 여론조사 결과도 그랬다. 앞선 2008년 대선 때 오바마 대통령의 지지율은 52.9%, 확보한 선거인단은 365명이었다. 4년 전과 견주면, ‘격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예상’을 뛰어넘는, 제법 여유 있는 승리로 평가할 만하다.
오바마 정부, 지난 4년 250만 개 일자리 창출돌아보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34대) 이래 임기 8년을 모두 채운 미 대통령은 로널드 레이건(40대), 빌 클린턴(42대), 조지 ‘아들’ 부시(43대) 등 단 3명뿐이다. 존 케네디(35대)는 집권 2년10개월여 만에 암살됐고, 린든 존슨(36대)은 거센 반전 여론에 밀려 재선 도전을 포기했다. 리처드 닉슨(37대)은 재선에 성공한 직후 ‘워터게이트’의 여파로 자진해 물러났다. 제럴드 포드(38대)와 지미 카터(39대), 조지 ‘아버지’ 부시(41대)는 재선에 나섰다가 쓴잔을 마셨다. 오바마 대통령의 재선이 갖는 무게감이다.
솔직해지자. ‘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 재선’이란 수식은 더 이상 울 림이 없다. 캔자스 출신 백인 여성과 케냐 출신 흑인 남성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서아프리카 출신 흑인 노예들이 지은 워싱턴 펜실베이 니아 대로 1600번지 ‘허연 건물’의 주인이 된 것도 벌써 4년 전이다. 청 명한 하늘에 추위가 매서웠던 2009년 1월20일 열린 그의 취임식에 참석했던 150만 인파의 감동이 여전하기를 바랄 순 없다. 그래서 묻 게 된다. 2012년 11월6일, 미 유권자들의 ‘선택’은 무엇을 뜻하는가?
“(2008년 금융위기로) 무너졌던 경제가 서서히 회복되고 있다. 이 시점에 잘못된 정책을 추진한다면 다시 경기침체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보수 진영에선 2010년 통과된 건강보험 개혁법을 흔들기 위한 이념 공세가 한창이다. 여성의 건강권과 자기결정권을 법으로 통제하려는 시도도 잇따르고 있다. 역사적인 민권법이 통과된 게 반 세기 전임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의 일부는 결혼할 수 있는 권리조차 박탈당하고 있다. 11월6일 선거를 앞둔 미국 사회의 현주소다.”
<뉴욕타임스>는 10월27일치 사설에서 이렇게 썼다. 선거를 열흘 앞둔 날이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롬니 후보가 3% 안팎으로 오바 마 대통령을 앞질렀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었다. “오바마 대통령의 재선 도전을 열렬히 지지한다”는 얘기를 꺼내놓기 쉽지 않은 시점이 었다. A4용지 4쪽을 꽉 채운 긴 글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건강 보험 △경제정책 △인권정책 등 크게 3가지 분야다. 모두 이번 선거 결과와 고스란히 맞닿아 있다. 한 가지씩 더듬어보자.
신문은 오바마 행정부의 ‘건강보험 개혁법’(이른바 ‘오바마 케어’) 통과를 “1965년 노인(메디케어)·빈민층(메디케이드) 의료보장법 통 과 이후 최대 업적”이라고 평가했다. “전 국민 의료보장 시대로 한발 다가선 개혁”이라는 게다. 공화당과 롬니 후보의 생각은 전혀 달랐 다. 롬니 후보는 선거운동 과정에서 “취임식 다음날 아침 일과를 ‘오 바마 케어’ 폐기 법안에 서명하는 것으로 시작할 것”이라고 호언해왔 다. 왜? 건강보험 가입 여부는 ‘개인의 판단’에 맡겨야 하며, 정부가 섣불리 건강보험 시장에 개입해선 안 된다는 게다. 말하자면, ‘작은 정부론’이다.
경제는 어떤가? 2009년 1월 취임 당시, 오바마 대통령이 물려받은 미국 경제는 붕괴 직전 상황이었다. 위기의 진앙인 금융권은 물론, 줄이 막혀 도산 직전으로 내몰린 자동차 업계에도 막대한 공적자금 이 투입됐다. 성과는 지표로 확인된다. 지난 4년여 새로 만들어진 일 자리가 250만 개에 이른다. 12%에 다가서던 실업률이 8%대로 떨어 진 것도 이 덕분이다. ‘금융소비자보호국’ 창설을 촉발한 이른바 ‘도 드-프랭크 법’으로 대표되는 금융개혁 작업은 현재진행형이다. 파생 금융상품 시장 규제와 은행권의 자기자본 비율 확대는 성과로 꼽을 만하다.
롬니 후보의 반응은 어땠을까? 자동차 업계 구제금융에 대해 그 는 비판의 날을 세워왔다. “시장의 판단에 맡겨야지, 정부가 간여할 일이 아니다”란 게다. ‘도드-프랭크 법’에 대해서도 “정부가 지나치게 시장을 규제해선 안 된다. 당선되면 즉각 폐기하겠다”고 공언해왔다. 귀에 익은 주장이다.
롬니, 부자감세·낙수효과 등 작은 정부론 2001년과 2003년 부시 행정부가 도입한 ‘부자감세’ 정책은 올해 말 효력을 잃게 된다. 그간 오바마 대통령은 “연간 25만달러 이상을 벌어들이는 가구에 대한 세금을 높이겠다”고 별러왔다. 지난 8월 의 회예산처(CBO)가 추산한 자료를 보면, ‘부자감세’를 연장할 경우 연 방정부가 떠안게 될 재정적자 규모는 세수 부족분 2조7400억달러와 금융비용 등 무려 3조1800억달러에 이른단다.
지난 4년 남짓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이 오바마 행정부가 내놓은 ‘경기부양책’의 발목을 잡을 때마다 내세운 명분은 ‘재정적자 축소’ 였다. 그럼에도 선거운동 과정에서 롬니 후보와 공화당 쪽은 “오는 2022년까지 ‘부자감세’ 정책을 10년 더 연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자감세를 통해 소비 수요를 늘리고, 이를 통해 신규 고용을 창출 할 수 있다”는 게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절 유행했던 이른바 ‘낙수효과’를 떠올리면 되겠다. 역시, 낯설지 않다.
재정·경제 정책 측면에서 ‘작은 정부’를 외쳤던 롬니 후보는 사회· 인권 정책 분야에선 전혀 딴소리를 했다.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대법 관 인선’ 문제에 대한 언급이 대표적이다. 선거운동 기간에 그는 “존 로버츠 대법원장을 비롯해 앤터닌 스캘리아, 클래런스 토머스, 새뮤 얼 얼리토 대법관 등과 맥을 같이하는 인물들을 대법관으로 임명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밝혔다. 그 가 언급한 인물들은 ‘미 대법원 역사상 가장 보수적인 대법관’ 으로 통한다. <뉴욕타임스>는 “롬니 후보가 당선돼 새 대법관 을 지명하게 되면 (낙태를 합법 화한) ‘로 대 웨이드 사건’에 대 한 대법원의 판례가 뒤집히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제 공화당은 지난 8월 말 열린 전당대회에서 “성폭행으 로 인한 임신을 포함해 어떤 경우에도 낙태에 반대한다”는 규정을 정강·정책에 포함시켰다. 롬니 후보는 “여성의 건강이 위태로운 경우에 한해 낙태를 허용할 수 있다”는 관점이지만, ‘가족계획’을 위한 연방정부 지원 예산 삭감에는 찬성했다. ‘피임’마저 금하겠다는 뜻이다. 시장은 풀고, 개인은 옥죈다. 하긴 동성결혼 반대와 불법이민자 일괄 추방 등 이번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 쪽이 내세운 사회정책 기조는 가히 ‘극우적’이라 부를 만했다. 롬니 후보가 국민의 절반에 가까운 ‘47%’를 “자기 책임은 다하지 않고 정부에 바라기만 하는 사람들”로 몰아세운 것도 무리는 아니었던 게다.
우연치곤 절묘하다. 지난 8월 말~9월 초 각각 열린 공화·민주 양당의 전당대회는 때마침 불어닥친 ‘허리케인 아이작’으로 어수선했다. 공화당은 전당대회 개막일을 늦췄고, 민주당은 대규모 야외행사를 포기해야 했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들끓었던 수많은 논쟁을 막판에 하나로 모아낸 것도 허리케인이었다. 선거를 불과 일주일 남짓 앞두고 뉴욕·뉴저지 등 동부 해안지역을 강타한 ‘샌디’ 말이다.
지난 4년 남짓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이 오바마 행정부가 내놓은 ‘경기부양책’의 발목을 잡을 때마다 내세운 명분은 ‘재정적자 축소’였다. 그럼에도 선거운동 과정에서 롬니 후보와 공화당 쪽은 “오는 2022년까지 ‘부자감세’ 정책을 10년 더 연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허리케인이 흔든 ‘데이비스-베이컨 법’한쪽에선 “큰 재난에 대처하려면 큰 정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른 쪽에선 “파산한 정부와 절망에 빠진 이재민을 동시에 구하는 유일한 길은 시장에 맡기는 것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초대형 자연재해에 대처하는 방법을 두고 워싱턴 정가 안팎에서 벌어진 치열한 논쟁 속에 2012년 미 대선 독해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미국에 ‘Pub. L. 71-798’이란 일련번호를 가진 법이 있다. ‘Pub. L.’은 연방의회가 제정한 ‘공법’을 상징한다. ‘71-798’은 제71차 의회에서 798번째로 제정한 법률이란 뜻이다. 이른바 ‘데이비스-베이컨 법’으로 불리는 이 법은 1931년 3월 발효됐다. ‘연방정부가 발주하는 공사를 따낸 업체는 고용노동자의 임금을, 최소한 해당 지역 노동자 평균 수준에 맞춰야 한다’는 게 뼈대다. 몇 차례 일시적인 효력 정지 기간이 있긴 했지만, ‘데이비스-베이컨 법’은 미 건설노동자들의 임금 수준을 보장해준 버팀목이었다.
반면 건설업체로선 ‘규제’로 받아들이는 게 당연했다. 공화당이 틈만 나면 법 폐기를 추진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해 1월에도 공화당 쪽은 향후 10년 동안 2조5천억달러의 연방정부 재정적자 감소 방안의 일환으로 이 법의 폐기를 거론했다. “임금 제한 규정이 사라지면 공사비 자체가 줄어들어 해마다 적어도 10억달러의 예산을 절감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허리케인 샌디가 휩쓸고 지나간 직후에도, <폭스뉴스>를 비롯한 보수매체에서 비슷한 주장이 어김없이 등장했다. “빠른 복구 작업을 위해서라도 ‘데이비스-베이컨 법’ 같은 연방정부 차원의 낡은 규제 조항을 즉각 철폐해야 한다”는 게다.
조금 뜬금없는 논쟁도 있었다. 재난 복구와 관련해 ‘월마트 역할론’이 떠오른 게다. 세계 최대 규모의 유통업체인 월마트는 미국에서만 무려 4천여 곳의 점포를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업체가 유독 발을 들여놓지 못한 곳이 있다. 미 최대 도시로 꼽히는 뉴욕이다. 이 업체는 최근에도 뉴욕 브루클린 지역에서 공사가 한창인 대형 쇼핑몰 ‘게이트웨이 2’ 입점을 추진했다. 하지만 ‘월마트 없는 뉴욕’을 비롯한 시민단체와 노동조합, 뉴욕 시의회까지 나서 대대적인 반대운동을 벌이자 결국 입점 포기를 선언했다. 허리케인 샌디와는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
“영세업자들이 운영하는 소규모 점포(이른바 ‘맘 앤드 팝 스토어’)는 대규모 재해가 터졌을 때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다. 대형 유통업체(이른바 ‘빅 박스 스토어’)는 다르다. (2005년 8월 말 뉴올리언스를 비롯한 멕시코만 연안을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 때 이재민들이 물과 비상식량을 손쉽게 구할 수 있었던 것도 월마트 덕분이었다.” 이언 머레이 기업경쟁력연구소(CEI) 경제자유센터장은 11월1일 경제지 <포브스> 인터넷판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그는 이어 “월마트를 거부해온 뉴욕 시민들이 이번 재난을 통해 어떤 교훈을 얻을지 지켜볼 일”이라고 덧붙였다.
미 의회가 1968년 통과시킨 ‘연방 홍수피해 지원 프로그램’(NFIP)도 여지없이 표적이 됐다. NFIP는 홍수 피해가 잦은 지역 주민들의 파손주택 복구비용을 지원하기 위한 일종의 공적 보험이다. 법이 정하고 있는 NFIP의 기금 상한선은 208억달러, 이미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여파로 이 가운데 180억달러가 소진된 상태란다. <월스트리트저널>은 10월31일 보수적 싱크탱크 ‘R스트리트 연구소’의 레이 레번 선임연구원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2008년 경제위기는 고삐 풀린 금융시장이 불러왔다. ‘재난’에 빠진 경제를 되살린 것은 ‘큰 정부’였다. ‘작은 정부’를 원하는 이들도 있다. ‘재난’이 닥쳐도 스스로 헤쳐나갈 힘이 있는 이들이다. 경제위기 속에 출범한 오바마 행정부 1기는 초대형 허리케인으로 막을 내렸다. 둘 다 ‘재난’이다.롬니의 ‘FEMA 폐지론’ 날려버린 ‘샌디’“허리케인 샌디로 인한 피해 규모는 최소한 524억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추정된다. NFIP 기금이 바닥을 드러낼 가능성이 높다. 기금 상한을 높이려면 의회의 승인이 필요하다. 이번 기회에 의회에서 관련 논쟁이 벌어진다면, 그간 (재해보험) 시장을 왜곡시켜온 연방정부의 역할에 대한 비판이 거세질 것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 재난 대비와 관련한 보험시장이 전면 민영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레번 연구원보다 한술 더 뜬 이도 있다. 러셀 소벨 시타델대학 방문교수(경영학)는 10월31일 <뉴욕타임스> 인터넷판에 기고한 글에서 “연방정부 차원에서 재난지역을 일종의 ‘자유무역지대’로 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각종 규제와 인허가 절차 해제는 물론 세금까지 동결시킨다면, 이재민들에게 필요한 물품과 서비스 공급이 훨씬 원활해질 것”이란 게다. 시장이 알아서 모든 것을 해결할 테니, 정부는 뒷짐 지고 물러나 있으란 얘기다.
생뚱맞은 주장은 끝없이 이어졌다. 금융산업에 대한 각종 규제가 은행권의 신속한 재난 지원자금 대출을 어렵게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정부가 지나치게 가격을 통제하면, 업체들이 공급량을 한꺼번에 늘리지 않아 재난 복구용 물품 부족 사태가 벌어질 것이란 경고도 나왔다. 이 모든 논란의 정점은 ‘연방재난관리청’(FEMA)으로 모아진다. 따져보면, FEMA의 역사 자체가 ‘정부의 역할’을 둘러싼 미국 사회 논쟁의 축소판이다.
FEMA는 지미 카터 행정부 시절인 1978년 연방정부 각 ���처에 흩어져 있던 재난 대비 업무를 한데 모아 창설됐다. 냉전이 불을 뿜던 1980년대를 거치며 ‘핵전쟁 이후’를 대비하는 데 힘을 빼던 FEMA가 제 기능을 찾은 것은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장관급 독립기구로 격상되면서부터다. 오래가지 못했다. 9·11 동시테러 이후 조지 부시 행정부는 FEMA를 신설한 국토안보부에 딸린 차관급 부서로 격하시켰다. 그 시절 FEMA 청장을 지낸 인물은 부시 대통령의 선거참모였던 조 얼바우와 그의 친구인 변호사 출신 마이클 브라운이었다. 두 사람 모두 재난 업무와 관련된 경력은 전무했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한 피해 규모가 커진 것도 이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 취임 이후 플로리다주 재난관리국장 출신인 크레이그 퍼게이트가 청장에 임명되자 FEMA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하지만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가 문제였다. 지난 2년 동안 공화당은 FEMA의 재난 대비용 예산을 43%나 삭감했다. 롬니 후보는 당내 경선 과정에서 아예 ‘FEMA 폐지론’을 내세우기도 했다. 선거 막판 ‘샌디’가 위세를 떨치리라 예상하지 못한 게다. 자연재해가 늘 그런 식이다.
재난에 빠진 경제 살린 건 ‘큰 정부’2008년 경제위기는 고삐 풀린 금융시장이 불러왔다. ‘재난’에 빠진 경제를 되살린 것은 ‘큰 정부’였다. ‘작은 정부’를 원하는 이들도 있다. ‘재난’이 닥쳐도 스스로 헤쳐나갈 힘이 있는 이들이다. 경제위기 속에 출범한 오바마 행정부 1기는 초대형 허리케인으로 막을 내렸다. 둘 다 ‘재난’이다. 그러니 분명해진다. 2012년 미 대선 결과는 ‘재난’에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한 미국인들의 대답이다. 어디 미국뿐일까? 대선을 한 달여 앞둔 지금, 우리도 물을 만하다. 대체, ‘국가란 무엇인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청 엔노흐 싱가포르경영대 교수 "'금융허브' 되려면 IT·금융 실무인재 육성부터"
부산대·한경 주최 행사서 발표“금융중심도시 발전은 정보기술(IT)에 기반을 둔 금융산업 육성에 달려있습니다. 금융전문가 육성도 금융트렌드 변화에 맞춘 IT와 금융능력을 함께 갖춘 실무교육으로 전환돼야 합니다.”
청 엔노흐 싱가포르경영대 컴퓨터공학과 교수(사진)는 12일 부산 해운대 누리마루APEC하우스에서 열린 ‘제8차 국제금융콘퍼런스’에 기조연설자로 나서 “대학 교과목과 금융 재교육은 실무 위주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 교수는 IT를 금융분야에 다양하게 적용한 대표적인 싱가포르 교수로 금융전문가 프로그램(SMU금융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청 교수는 “논문의 질과 편수를 중요시하는 국가도 많지만 금융산업에선 실무가 더욱 중요하다”며 “싱가포르대의 경우 연구만 하는 교수는 10~20%에 불과하며 나머지 교수들은 금융과 IT 실무를 경험한 전문가들로 금융상품 이해와 금융이윤 생성과정, IT 활용을 어떻게 하는지를 교육해 ‘금융도시 허브 싱가포르’를 만드는 데 밑바탕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현재의 금융산업은 IT를 빼고는 성공할 수 없지만 일부 국가는 여전히 이론에 그치면서 실용 교육이 부족하다”면서 “시장에서 필요한 파생상품과 자동화시스템, 리스크 관리, 무역거래테크놀로지, 자산관리 실무와 함께 자국에 없는 기술을 아웃소싱해야 글로벌 금융도시로서 자리 잡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청 교수는 금융교육은 학생들이 실무에 맞춰 배울 수 있는 모의 환경도 조성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학생과 금융 재교육자들이 IT와 금융상품 등의 실제 및 모의 프로그램을 무료로 이용해 가상 금융기관에서 마케팅을 하면서 생애주기 차원의 금융상품을 만들어봐야 합니다. IT 인프라관리, 금융회계 등도 배우고, 금융기관들의 지원을 받아 졸업논문까지 낼 수 있는 산학협력 시스템을 구축해야 효율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부산국제금융중심지를 위한 글로벌 IT기반 금융전문가와 국제금융인재 육성 프로그램과 개발전략’이란 주제로 열린 이날 행사는 부산대 국제금융포럼과 하와이대 아시아태평양금융시장연구센터, 한국금융투자협회, 한국경제신문 등이 공동 주최했다.
부산=김태현 기자 hyun@hankyung.com
빅스 도이체방크 전략가“유럽에 투자할 때입니다. 유럽 경제가 더 이상 나빠질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이클 빅스 도이체방크 유럽주식담당 전략가(사진)는 12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유럽 자산의 위험도가 과대 평가돼 있다”며 “바로 지금이 유럽 위험자산에 투자할 적기”라고 주장했다.
도이치증권이 마련한 연례 콘퍼런스 참석차 방한한 빅스 전략가는 “지난 10월 45.4까지 떨어졌던 유로존의 구매관리자지수(PMI)는 4분기부터 반등해 늦어도 내년 1분기엔 50 이상으로 회복될 것”이라며 “올 11월부터 내년 2월 사이에 유럽 자산 가치가 빠르게 회복세를 보이면 유럽에 대한 시장의 시각도 달라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유럽중앙은행(ECB)의 무제한 국채 매입 조치 이후 유로존을 짓누르던 부담이 완화됐고 추가 자산 가치 하락을 유발할 일도 별로 없다”고 지적했다.
2010년부터 도이체방크의 유럽주식 투자전략을 총괄하고 있는 빅스 전략가는 유럽 자산이 저평가돼 있다는 점도 집중적으로 언급했다. 유럽 주요 주식의 적정 주가수익비율(PER)은 12.5배지만 지난 2년간 9~11배 수준에서 거래됐다는 것이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
“인터넷포털 업체들의 개인정보 수집에 대한 반발이 전 세계에서 놀라울 정도로 없는 것은 이용자들이 침해 실태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고려대가 주최한 ‘사이버공간 안전과 프라이버시 아시아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온 에릭 클레몬스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교수(64·사진)는 12일 “구글 등 포털 업체는 이용자가 무엇을 검색하고 어떤 이메일을 발송하는지, 온라인으로 무슨 상품을 구매하는지 등 다양한 정보를 훔쳐본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한·미·일 3국의 온라인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터넷 사이트들이 수집한 사생활 정보를 이용하는 것을 ‘알고도 찬성한 이용자’는 1~2%에 불과했다. 그는 “이용자가 모르면 모를수록 침해는 더 광범위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치밀하지 않은 법적 규제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클레몬스 교수는 일본을 예로 들며 “소프트뱅크가 소유해 통신법의 엄격한 제약을 받는 야후재팬은 사용자의 이메일 정보를 알 수 없지만 구글재팬은 내용을 읽고 저장·분석까지 할 수 있다”며 “법이나 제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사례가 세계적으로 많다”고 꼬집었다.
그는 “포털 업체들이 이 같은 ‘구멍’을 의도적으로 이용한다”며 “자율적인 규제를 믿으면 안 되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클레몬스 교수는 “포털 업체들은 개인정보를 광고 등에 이용하면 1년에 수십억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기 때문에 법의 허술한 부분이 메워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설명했다.
그가 제시한 대책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이용자에게 개인정보 수집 내용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것이다. 클레몬스 교수는 “예컨대 병원 진료 기록을 이메일로 보내기 전에 포털 업체에 수집될 수 있음을 알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두 번째는 두 곳 이상의 국가에서 사업하는 회사는 규제가 엄격한 나라의 법을 따르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는 “규제가 가벼운 국가를 핑계삼아 사적인 정보를 침해하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보영 기자
wing@hankyung.com
당 총서기·군사위 주석 동시 이양…'上王' 장쩌민 선례와 단절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부주석(사진)이 오는 15일 당 총서기는 물론 인민해방군 통수권을 가진 당 중앙군사위 주석직까지 꿰차고 명실상부한 중국 최고지도자로 등극할 전망이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 홍콩 언론들은 12일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오는 15일 제18기 공산당 중앙위원회 1차회의(18기1중전회)에서 군사위 주석직까지 시 부주석에게 물려주고 정계에서 은퇴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후 주석은 내년 3월 국가 주석직을 시 부주석에게 넘길 예정이다.
이렇게 되면 시 부주석은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에 이어 20년 만에 당권과 군사 통수권을 보유한 채 국가 주석에 오르는 최고지도자가 된다. 장쩌민은 자오쯔양 당 총서기가 톈안먼 사태로 숙청되는 바람에 1989년 총서기를 맡았고 1992년 군사위 주석에 오른 뒤 1993년에 국가 주석이 됐다. 정치평론가인 천즈밍(陳子明)은 “이유가 무엇이든 후 주석의 완전 은퇴는 그의 계승자인 시 부주석의 권력 강화로 연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후진타오 은퇴 수순
2002년 11월 후 주석은 공산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장 전 주석에게 당 총서기직을 물려받았지만 군사위 주석직은 약 2년 뒤인 2004년 9월에야 넘겨받았다. 당시 장 전 주석은 대만과의 긴장관계를 원만히 처리하기 위해 군사위 주석직을 더 유지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막강한 권한을 이용, 자신의 사람들을 후진타오 정권의 요직에 배치하는 데 힘썼다.
이로 인해 후 주석은 재임기간 중 장 전 주석과 끊임없는 권력투쟁을 벌이면서 ‘힘없는 최고지도자’로 인식돼왔다. 베이징 정가에서는 그동안 후 주석 역시 중국이 미국의 아시아 봉쇄 전략, 일본·아세안과의 영토분쟁 등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는 상황을 들어 2~5년간 군사위 주석직을 유지할 것이라고 관측했다.
베이징의 한 소식통은 후 주석이 군사위 주석직을 내놓는 배경에 대해 “과거 장 전 주석의 군사위 주석직 유임은 덩샤오핑이 마련한 후계자 승계구도를 위협하는 조치로 당 안팎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며 “공산당 원로들은 이런 관행이 계속되는 것을 꺼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후 주석 본인도 군사위 주석직을 보유할 경우 발생할 논란을 원치 않는 데다 건강이 좋지 않다는 점 등 때문에 은퇴를 결심했을 것으로 SCMP는 분석했다.
군사위원회에는 이미 후 주석 계열 인물들이 다수 포진해 있어 그가 굳이 군사위 주석직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분석도 있다. 최근 군사위 부주석에 오른 판창룽(范長龍) 지난(濟南) 군구 사령관과 쉬치량(許其亮) 전 공군사령관도 후진타오와 가까운 인물들로 알려졌다. 정부 몫의 군사위 부주석 자리에 후 주석의 측근인 리커창(李克强) 부총리가 임명될 것이라는 설도 돌고 있다.
○“시진핑 강력한 지도자될 것”
전문가들은 시 부주석이 군사위 주석에 오를 경우 후 주석에 비해 훨씬 수월하게 군을 장악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후 주석은 인민해방군과 별다른 인연이 없었지만 시 부주석은 인민해방군 출신 혁명투사인 부친 시중쉰(習仲勳) 전 부총리의 후광을 입어 군부를 쉽게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시 부주석은 1979년 칭화(淸華)대학을 졸업한 후 3년간 중앙군사위 판공실에서 겅바오(耿飇) 국방장관의 비서를 맡았다. 당시 그는 계급은 없었지만 인민해방군 소속으로 장교급 대우를 받았다. 중국을 이끌어갈 5세대 최고지도자(정치국 상무위원) 후보군 가운데 군 경력이 있는 인물은 시 부주석이 유일하다. 그의 부인 펑리위안(彭麗媛)은 현역 소장(인민해방군 가무단장)으로 군부 내 인맥도 탄탄하다.
시 부주석은 2010년부터 군사위 부주석을 맡아 군 최고지도자들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후진타오 계열로 알려진 팡펑후이(房峰輝) 군 참모장, 자오커스(趙克石) 총후근부 부장과도 가까운 것으로 알려졌다. 린청핀 전 대만 국방부 차관은 “최근 단행된 군 인사를 분석해보면 시 부주석계 인물들이 꽤 많다”며 “이미 군 인사에서 시 부주석의 군사위 주석 승계가 예고됐다”고 주장했다.
베이징=김태완 특파원 twkim@hankyung.com
천연가스 생산량 증가세 둔화
시장점유율 1위 미국에 뺏겨미국에서 시작된 ‘셰일가스 혁명’으로 ‘천연가스 강국’ 러시아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 세계 시장 점유율 1위 자리는 미국에 빼앗겼다. 최대 수출시장인 유럽의 경기가 부진한 가운데 미국산 셰일가스까지 밀려들면서 천연가스 시장을 점차 잃어가는 추세다.
셰일가스는 진흙으로 이뤄진 퇴적암층(셰일층)에서 뽑아낸 천연가스를 말한다. 미국을 중심으로 개발이 본격화하면서 최근 들어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각광받고 있다.
러시아의 지난해 천연가스 생산량은 총 6070억㎥로 전년 대비 3.1% 늘어났다. 증가율은 2010년(11.3%)에 비해 3분의 1 이하로 떨어졌다. 올해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영국 에너지기업 BP의 자료를 인용, “러시아의 올 1~9월 천연가스 생산량이 전년 동기 대비 2~3% 감소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도했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러시아는 세계 천연가스 시장에서 늘 1위였다. 2006년 세계 시장 점유율은 20.7%로 경쟁국가인 미국(18.3%) 캐나다(6.6%) 이란(3.8%) 등을 앞섰다. 그러나 값싼 셰일가스가 등장하면서 시장에 변화가 일어났다. 지난해는 미국이 시장점유율 20.0%로 러시아(18.5%)를 제치고 수위에 올랐다. 미국의 천연가스 생산량은 지난해 전년 대비 7.7% 증가했다. 올 1~8월에도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5.8% 늘었다.
러시아의 입지가 쪼그라든 가장 큰 원인은 유럽의 경기 부진이다. 채무위기로 내수침체가 장기화하면서 에너지 소비량도 늘지 않고 있다.
셰일가스는 이런 추세에 속도를 붙였다. 미국의 셰일가스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미국 내 전력회사들은 기존 연료 중 하나인 석탄 사용량을 대폭 줄이기 시작했다. 남아도는 석탄은 유럽 전력회사로 흘러들었다.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사용하는 것보다 미국산 석탄을 때는 게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다.
도쿄=안재석 특파원
yagoo@hankyung.com
삼성 현대 LG 등 한국 대기업들은 전 세계적으로 대단한 힘과 영향력을 갖고 있다. 이들 기업은 미국 일본 독일 기업들과 더불어 세계 제조업 시장을 형성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앞서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성장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에서 한국 기업 이미지가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한국 기업들은 단기적인 수익에 너무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으며 환경과 인권 문제에 대한 의식이 높지 않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수익만을 핵심 가치로 여기는 기업들은 그 기업을 구성하는 직원에 대해 인간으로서 가치는 존중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유럽이나 미국의 자본주의 성격은 초기와 달리 상당한 수준으로 개선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한국 기업에서 유럽의 초기 자본주의에서 나타났던 회의감이 재연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세계화 시대에 인적 자원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은 제1ㆍ2차 세계대전, 그리고 냉전ㆍ탈냉전을 겪으며 시행착오를 겪어온 자본주의 진영과 전 세계 대부분 지역 지식인들의 소망이다. 이는 자본가나 기업인에게도 나쁜 것만은 아니다. 가난한 나라, 힘없는 나라의 국민들이 교육을 더 많이 받고 경제적 위상을 높인다면 지구촌 전체적으로 구매 능력과 소비 총량을 확대하는 결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인적 자원을 통합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은 각국 정부나 국제기구가 아닌 기업들이다. 세계 정부 창설을 상상할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정부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세계적 기업들이 좀 더 인간답게 세계에 공헌하는 모습으로 바뀌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기업과 경쟁할 수 있는 세계 정부는 없고 이것은 실제로도 어렵다는 점에서 기업이 스스로 바뀌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핵심은 기업의 DNA를 바꾸는 것이다. 본질과 성격 자체를 바꾸는 혁신이 필요하다. 세상은 지금 새로운 정신과 문화를 가진 기업을 원하고 있다. 이런 과업을 한국 기업들이 선도적으로 수행하면 어떨까. 한국 기업들은 수익 중심의 기업 문화를 운영하고 있지만, 한국에는 분명 인간다운 기업 문화를 창출해낼 수 있는 홍익인간 정신이 존재하고 있다.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인류의 행복과 인간 사랑을 일찍이 표방한 대한민국 건국 이념인 홍익정신은 모든 인류와 사상을 포용하는 정신이다. 이는 의심할 바 없이 모든 한국인이 자랑스러워하는 한국인의 문화로 인종이나 민족, 종족을 차별하지 않는 보편적인 성격의 개념이라는 점에서 다른 나라로 확장시킬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홍익정신에 기반을 둔 공동체 중심 문화를 기업 문화에 적용하면 새로운 기업 모델이 탄생할 수 있다.
전 세계가 단일 시장권으로 변화하는 현실에서 기업의 목적을 수익 하나만으로 규정하는 것은 기업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수익과 더불어 직원에 대한 분배, 지역 사회와 지구촌에 대한 공헌이 기업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실적 평가도 수익과 분배, 공헌 모두를 따지는 것으로 변경해야 한다. 특히 대기업은 환경 문제 해결, 인간 가치 존중, 여러 가지 사회 갈등 해소와 세계 평화를 목표로 해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홍익정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면 그 어느 사상이나 철학도 더 나은 논리를 제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 기업은 이제 세계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 흐름을 주도하는 진영에 속해 있다. 다른 어느 나라에도 없는 보편적인 인류 공동체 중심 철학을 바탕으로 기업 문화를 혁신해야 할 것이다.
[이만열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경제민주화·행복 모두 좌익 깃발…새누리 좌편향이 저질 선거 초래
외교 ·안보 경계선도 나날이 희미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김종인 위원장은 또 출근 투쟁 중이다. 그 연세라면 출근의 조건을 놓고 투쟁할 나이는 지났지 싶다. 자칫 하면 노인네 투정이 될 수도 있다. 스스로를 보수라고 자임하는 사람들 중에는 지금이라도 김종인을 내치지 않으면 절대로 박근혜에게 투표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차마 종북 후보자에게 표를 던질 수 없기 때문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더는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라는 항변이기도 하다.
사실 행복추진위원회라는 작명부터가 그렇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돼지가 애교스럽게 내세울 것 같은 이 구호는 김종인 씨가 정동영 후보 밑에서 일할 때부터 써왔던 낡은 좌익 간판이다. 국가는 국민의 행복에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이 헌법이 정한 행복추구권의 본질이다. 행복은 자유권이지 국가의 의무 혹은 국민의 청구권적 권리 목록에 포함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런데 김종인과 새누리당은 의미를 뒤집어 국가의 책무로 규정되는 그런 행복을 주장하고 있다. 국가가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명백한 좌익 슬로건이다. 새누리당이 이런 비열한 자세로 선거전을 치른다면 국민을 우습게 보는 것이다. 국민은 빅 브라더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그런 하찮은 존재가 아니다.
유력 대선 후보 3명이 모두 꿀을 바른 마약 보따리를 풀고 있다. 물론 한 명은 마약인 줄 알고 풀고 있고 다른 한 명은 마약이 아니라며 풀고 있고 나머지 한 명은 마약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다. 그러나 누구에게 정권이 흘러가든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약속을 잘 지킨다는 면에서 박 후보가 가장 위험하다는 농담조차 나돌 정도다. 그렇게 선거를 통해 국가적 의사를 결집하고 국가 공동체의 나아갈 방향을 진지하게 아젠다화하는 일은 사라졌다.
대통령 선거가 이다지도 저질화한 것은 새누리당과 김종인 때문이다. 우익이 좌익의 깃발을 빼앗아 달리기 시작했으니 좌익은 설자리가 없어졌다. 새누리당의 싸구려 책사들은 이런 현상을 놓고 처음에는 박수를 치며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선후보를 평가하는 잣대 그 자체가 동시에 쓰레기통에 처박히고 말았다. 지금은 문제의 본질을 깨닫고 있는지 모르겠다. 대중이 단일화 정치쇼에만 눈길을 주는 것도 그 결과다 박 후보의 공약이 필연적 저질화의 과정을 걷고 있는 것도 그렇다. 별별 공약이 발표되고 있다. 이제는 골목길 전봇대까지 언급해야 하는 지경이다. 구청장 선거를 한다는 것인지.
좌익의 선거전략은 포퓰리즘이다. 그게 본질이다. 그래도 나라가 중심을 잡는 것은 보수 가치가 살아있고 그것을 지키는 정치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통의 새누리당이 싸구려 좌익 정당이나 좌경 무소속처럼 놀고 있으니 이게 무슨 정당인가. 김종인 같은 이들을 기용해 경제민주화라는 좌편향 슬로건을 내걸었으니 ‘자유와 책임과 일자리’를 뼈대로 하는 보수 이념은 제멋대로 휘갈긴 낙서로 전락한 꼴이다. 그것이 새누리당 입장이라면 한국의 보수는 지금 새로운 모색에 나서는 것이 옳을 것이다.
경제민주화라면 민주통합당이 더 잘할 것이라고 보는 게 순리다. 겨우 차별화되는 것이 외교, 국방이라고는 하지만 그 경계선조차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다. 이는 지난 총선에서 비겁하기 짝이없었던 국회의원 공천의 당연한 결과다. 경제민주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인식 수준에서라면 북한에 적당히 퍼주고 평화를 구걸하자는 대북 전략도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 새누리당에서조차 한·미동맹을 주장하는 사람이 사라진 지 오래 아닌가 말이다.
지난 주말 공개된 경제민주화 공약 초안도 그렇다. 기업인 범죄는 국민참여재판에 회부하고 대기업 집단의 사장단 회의까지 법적 책임을 지우겠다는 게 골자다. 이는 인민재판의 부활이요, 기업을 통일적 인격체가 아닌 다수결의 정치조직으로 보는 발상이다. 결코 보수의 가치라고는 볼 수 없다. 이런 황당무계한 좌익 이념을 내걸고 표를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나. 민주당이 따라오니 우리는 더 왼쪽으로!라는 식이다. 굳이 투표장에 나가야 할 이유가, 그리고 박근혜여야 한다고 주장할 이유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박근혜 위기의 본질은 바로 이념의 방황이요, 훼절이다.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